구원론

 

1987. 6. 9. 오후교역자회(화)

 

본문:마태복음 13장 14절∼16절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우리는 땅에 있는 사람들과 달라서 복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 도리를 같이 보고 듣고도 그 깨달음이 넓고 깊고 또 길고 높으며 또 정확해서 자기가 이 깨달음에게 사로잡혀 종되는 이것이 복있는 사람이고, 다 같이 읽고 들어도 그 마음이 미련하고 자기 중심의 사람이 되어져서 하나님의 도리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또 이 말씀에게 사로잡힐 만한 그런 깨달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그 사람이 복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마태복음 13장에는 여러가지 비유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이 씨뿌리는 비유, 씨뿌리는 비유에 네 가지 종류를 말했는데 이 세 가지 종류의 행위는 다 불행스러운 행위요 그 한 가지 행위는 행복된 행위입니다. 그러면 세 가지 행위는, 택한 사람의 이 세 가지 행위는 다 불행스러운 행위요 한 가지 행위만 복된 행위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네 가지로 말한 이것은 불택자에게 한 말이 아니고 택자로서 중생돼서 예수 믿는 사람들로서 이 네 가지 행위가 있다 하는 것을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 가지 행위를 하는 그것은 자기 구원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불행스러운 사람이요 옥토에 뿌린 씨 이 행위만이 자기 구원을 이루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 가지 행위를 하는 것은 중생된 기독자라도 이것은 성경에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말미암은 그 옛사람의 행위, 옛사람의 행위입니다. 옛사람의 행위기 때문에 아무리 중생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행위는 멸망받고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이제 옥토에 뿌린 씨의 행위가 되어야 구원이 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택자에게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그걸 우리가 똑똑히 구별을 해서 알아야겠습니다.

세 가지, 돌밭 덤불밑 길바닥 이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여게는 다 지옥 갈 사람들에게 대해서 교훈한 게 아니고 예수 믿어서 천국 구원을 이루어 갈 그 사람들에게 대한 전 이 13장의 비유의 말씀으로 저는 그래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본구원 건설구원을 그렇게 구별해서 나누지 안할 수 없는 것은 기본구원을 얻은 중생된 사람 중에 이 네 가지 신앙 행위가 있습니다. 네 가지 신앙 행위가 있는데 세 가지 행위는 다 멸망할 행위고 하나의 행위는 구원 얻을 행위기 때문에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세 가지 행위를 회개해서 하나의 옥토에 뿌린 행위를 가지라, 이 사람이 돼라는 것입니다. 뭐 불택자에게 대해서 하는 말씀 아니오.

그런고로 이것을 이러나 저러나 하는 이것도 중대한 교리요 신조인데 이것이 잘못되면 그이 신앙 생활은 다 절단나고 맙니다. 이것도 우리가 그저 이래 말하니까 그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그럴 게 아니라 제가 생명 바치고 자기 일생을 바쳐서 살 그 노선이기 때문에, 진리이기 때문에 자기 진리이기 때문에, 교리 신조이기 때문에 이것이 이러나 저러나 하는 확정하는 그것이 자기가 중대한 문제인데 이것조차 확정하지 안하고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하는 그런 사람은 진실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암만 예수 믿어 봤자 기본구원이나 있지 그 믿음 가지고는 건설구원은 이루지 못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믿든지 안 믿든지 저는 이래 증거합니다. 저는 이래 증거했습니다. 나는 이래도 증거하는 이것을 칭찬받을 것입니다. 칭찬을 받든지.

또 그다음에 천국은 좋은 씨 가라지 이렇게 비유가 있는데 이것도 둘 다 택함받고 중생된 사람들이 신앙 생활 하는 데 있어서 이 두 가지 행위의 종류가 있다. 먼저는 주인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아들을 뿌렸고, 하나님 아들 뿌린 것은 우리를 과거에 모든 그 불의가 있지마는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을 입히시고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입니다. 이건 깨끗해졌습니다. 과거는 다 청산되고 됐습니다.

여게다가 원수가 모르게 살며시 와 가지고 뿌렸습니다. 그거는 뭐이냐? 중생된 자에게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것, 그러면 예수를 믿으면서, 불법이라 하는 것은 이는 뭐 세상 법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법을 외면하고 이 세상 법을 따라 사는 그게 다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인 신구약 성경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게 다 불법인데 이 세상 법을 따라서 살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 다 불법이요, 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양식을 주어서 그 사람을 도와서 강건케 하든지 그리 안 하면 술이 취해 가지고서 뚜드려서 다른 사람에게 넘어지게 하는 미혹을 주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 다 택자들의 신앙 생활을 중생시키고 난 다음에도 악령 악성 악습 이놈이 들어와 가지고서, 우리에게 자기 아닌 옛사람을 집어넣어 가지고서 이렇게 살게 되는 이것을 가리켜서 여게 가라지로 가리킨 것입니다. 불택자에게 말씀하신 것 아닙니다. 이거는 택자들에게 한해서 말씀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교훈은 불택자에게 말하지 않고 택자들에게 한해서 한 교훈의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밤에 원수가 와서 이렇게 하였구나” “밤에 원수가 와서 이렇게 하였구나” 그것은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중생된 새사람 된 것이 처음입니다.

먼저요. 그전에 어떤 것이 돼도 먼저요. 그 후에, 언제 중생됐든지 중생된 후에 그후에 자기 아닌 옛사람이 들어와 가지고서 그것의 유혹으로 사람들이 더러워진다.

그러기 때문에 이 택하고 중생된 사람들도 피와 성령으로 중생된, 예수님이 우리에게 낳아 주신 생산해 주신 이 사람은 그렇지 않는데 마귀가 들어와 가지고서 옛사람을 우리 속에 넣어 가지고 불법 생활 하게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양식 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미혹시키는 신덕이 없는 그런 행위를 한다.

그러나 하되 마지막에는 아무리 택한 자라도 불법과 불신덕의 행위한 그 행위는 유황불 구렁텅이에 간다. 영은 구원 얻어서 하늘나라 가지마는 그 행위는 유황불 구렁텅이에 간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 때에 여러가지로 대립적으로 마찰이 있어 가지고서 새사람으로 사는 것과 옛사람으로 사는 것이 자기 안에서도 싸움이 있고, 자기 가정에서도 싸움이 있고, 교회 안에서도 싸움이 있고 있는 건데 이러나 마지막날에는 그 진가가 드러나서 그때에 이 세상에 신앙 생활 할 때에 여러가지 곤경을 겪은 그 생활 했으나 위로의 날이 있고 기쁨의 날이 있고 칭찬의 날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런 것 있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네가 그런 사람으로 살지 안하고 너는 진리대로 살고 다른 사람에게 신덕을 끼치는 생활 함으로 네가 외로워지고 핍박을 당하고 대적을 당하면 네가 불법 행하고 미혹 주는 그 입장에서 있는 그보다는 네가 어떻게 당한다 할지라도 그게 복있지 않느냐? “이제 당하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을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다” 하는 그 말씀과 같은 그런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굳센 믿음을 흔들지 말고 요동치 말라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렇게 가라지와 곡식의 이 두 가지 신앙 생활이 한 집에 있고, 한 교회 있고, 한 사람 네 속에도 이 사람이 됐다가 저 사람이 됐다가 된다. 이러기 때문에 이게 없을 수 없는 것이니까 그 불법을 행하는 자는 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는 것이요 미혹케 하는 것은 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외로와도 어려워도 그 생활 계속하는 자는 자기 아버지의 나라 하늘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그날이 있으니까 이날에 핍박받는 것과 그날에 해와 같이 빛나는, 하나님의 그 상을 주고 그 위로를 주고 칭찬을 받을 그거와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 하는 이걸 똑똑히 깨달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달리 해석을 하면 ‘그거야 뭐 가라지는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상관없다.’ 가라지에 상관 없는 사람이 불법에 조심할 필요가 뭐 있으며 넘어지게 하는 데 조심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길가바닥에 뿌린 씨 덤불밑에 뿌린 씨 돌짝밭에 뿌린 씨 그거는 우리가 아닌데. 옥토에 뿌린 씨가 우리고 그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면 우리 믿는 사람에게 무슨 필요 있습니까? 이 교훈이 우리에게 무엇 줍니까?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상관없는 걸 뭐하러 교훈 줍니까? 저 사람 망하는 것 보고서 구경하고 칭찬하고 좋아하라고 줍니까? 우리 하나님 그런 하나님 아닙니다. 요걸 확고하게 쥐어야 되지 요거 똑똑히 못 쥐면 신앙 생활 바로 못합니다. 이거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주 중대한 문제요.

또 그다음에, 이 겨자씨 비유는 둘을 가르치지 않고 하나만 가르쳤습니다.

겨자씨가 작지마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게 심기워져 가지고 뽑히기만 안하면 성공합니다. 기회주의자로 형편이 이러면 이래 따르고 저러면 저래 따르는 그런 새와 같은 그런 성격의 천국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번 뿌리박아서 심었으면, 자기가 주님의 구속을 받았으면 구속받은 거게서 요동치 아니하고 구속받은 거게, 하나님의 그 구속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고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구원에 뿌리를 박고 요동치 아니하면 이렇게 저렇게 너를 삼킬 수 있는 모든 기회주의자들,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자들, 팔방미인들, 주위 환경을 따라서 얼마든지 변동되는 그런 자들 다 네 밑에 속하게 되고 영원히 너에게 속해서 너로 인하여 사는 그런 자가 된다.

그거 다 소유하게 된다 그것을 여게 똑똑히 말했습니다.

이것도 우리 신앙 경험에 다 경험합니다. 하루 동안을 요동치 않으면 그만치 우리는 자랐고 힘있고 또 승리해서 그 대적들은 밭에 와서 깃들게 됩니다.

오늘까지 기독교 역사가 다 그것 아닙니까?

또 누룩 비유는 누룩은 그 반대로, 여게는 꼭 한 가지만 겨자씨 말해 놓고 그다음에 또 반대로 누룩 말해 놨습니다. 누룩은 적은 것이지마는 그것이 들어가면 그만 부풀고, 부풀면 어째? 부풀면 뭐 성신의 감화입니까? 아니오.

부풀면 썩습니다. 그다음에 썩는 것 아닙니까? 썩기 위해서 부푸는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그저 천국 신앙 생활에는 무엇이든지, 자기 사상에든지, 정신에든지, 욕심에든지, 또 감정에든지, 소원에든지, 행위든지 뭐이든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마귀로 말미암은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하나 박혀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그 사람의 전체는 구원이 절단난다. 이게 성경입니다.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그 속에 없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느냐” 말씀했는데 그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그 죄로 말하면 그뭐 약간의 죄 사소한 죄입니다. 그것이 들어서, 그것이 빠져나가고 고치기 전에는 절대 영생은 없다 했으니까 구원 다 절단났다 말 아닙니까? 모든 성경이 다 맞는데 이거 뭐 별스러운 게 아니고 성경에 딱 이렇게 다 말해 놨는데.

그러고 또 그다음에는 감추인 보화를 말했습니다. 천국은 이 보화와 같다. 자기가 오다 가다 만나도 이 천국, 천국은 우리가 지금 이루는 구원은 뭐 기본구원 때문에 애쓰는 게 아니라. 기본구원은 상관 안 해도 얻습니다. 기본구원은 꼭 차이 없습니다. 기본구원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게 아니고 순전히 은혜고 행위대로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알기 오래 전 영원 전부터 이 구원이 돼 가지고 있다고 성경에 말했습니다.

그랬는데 이 구원은 우리에 대한 그 건설구원을 가르쳤는데 이 건설구원, 우리가 나그네 생활에서 건설구원 성화구원 이 구원의 가치를 자기가 아는 사람, 이 구원을 바로 발견한 사람은 이것을 차지할라고 하면 현실을 차지해야 되는데 현실을 차지하는 건 현실을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현실을 이용하고 이 현실을 구원을 이루는 데에 이용하고 이 현실을 구원에 손해가는 현실로 자기가 뺏기지 않기 위해서는, 뭐 우리가 다 아는 것 아닙니까? 소유와 몸과 생명 다 바쳐야 되지 안 바치고 어떻게 됩니까? 그 안 바치고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게 맞습니까? 확정을 지우십시오, 머뭇머뭇거리지 말고.

이것은 자기 건설구원에 이 구원의 가치를, 기본구원의 가치라 말 아니오.

기본구원은 우리는 다 얻어놨기 때문에 우리는 그거는 말할 것 없고, 그거는 또 기본구원을 모릅니다. 기본구원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왜? 주님의 무한하심으로 이와같이 해 가지고서 댓가 냈기 때문에 그거는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것이 이제 기본구원이니까 그 구원의 범위가 어데까지인지, 깊이가 어데까지인지, 높이가 어데까지인지, 길이가 어데까지인지, 어데까지 세밀하고 범위가 어데까지 종류가 많은지 모릅니다.

다만 이 건설구원의 이 가치를 제가 알면 건설구원이 담겨 가지고 있는 그 현실은 제가 어떻게 해도 그 현실을 제가 제것 만들지 그 현실을 뺏기지 않는다.

현실을 제것 만들라고 하면은 소유와 몸과 생명도 다 투자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제 현실을 절대 못 만든다! 이거 아닙니까, 뭐? 이거 성경 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또 진주를 구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은 이 도를 구해서 이런 도 저런 도를 구해 가지고서 뭐 평생을 애쓰다가서 참 기독교의 이 구원이라는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그 사람도 발견만 했으면 있는 것 다 팝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에누리하지 말고 우리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가진 것은 전부 이 건설구원을 자기 것 만드는 데에 그 이상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밖에는 못 합니다. 다 기울여야 요거 합니다. 뭐 이런 거야 요동할 것 없이 그만 이대로 깨닫고.

또 그다음에는 뭡니까? 그물 비유입니까? 예, 그물 비유인데 이 그물에는 바다는 이 세상을 상징한 것이고 이 세상에서 이렇게 저렇게 복음 운동에 끌려서 다 같이 한 교회에서 신앙 생활 하고, 한 진영에서 신앙 생활 하고, 또 한 진영에서 같이 목회하고, 한 집에서 이래 신앙 생활 하고 이래 해서 세상에서 다 구별해 가지고 나온 예수 믿는 사람이오. 그물에 끌려나왔어.

끌려나왔지마는 그 생활 하는 것은 그 뒤에 보니까 의인과 악인을 갈랐습니다, 의인과 악인. 의인은 주의 것 된 사람이 의인이요 악인은 자기 것 된 사람이 악인입니다.

다 같이 신앙 생활을 하지마는 자기는 주의 것이 돼 가지고 주의 것으로서 자유 없이 산 제사로 드려서, 자기는 자기 것이 아니니까 주님의 것이니 “먹어도 마셔도 살아도 죽어도 주의 것이니라” 주의 것으로 사는 그 신앙 생활 있고 또 자기 욕심대로 자기 마음대로 ‘내 몸인데 내 몸 가지고 내 살지’ 또 그 악이 자기 중심 자기 위주기 때문에 그대로 사는 자 있다.

네가 이래 있는 것 보고서 ‘저렇게 살아도 밥 잘 먹고 옷 잘 입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살 게 뭐 있느냐?’ 그렇게 하지 말아라. 이 세상 끝날까지 그물 안에 다 같이 놀고 다 뛰고 있지마는 그게 언제든지 그래 있는 게 아니다. 마지막에는 의인과 악인을 갈라서 하나는 풀무불에 던져서 살라버리고 하나는 구원시킨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그런 말씀해 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한 시간 살면 한 시간 사는 데는 우리의 정력은 그만치 소모됐습니다. 하루 살면 하루 사는 것만치 그만치 우리의 정력은 없어집니다. 하루 살아도 그 정력이 남아 있는 게 아니오. 그 정력은 없어지요. 없어지는데 그 정력이 사망을 이루는 사망의 기능을 만들기도 하고 생명의 기능을 만들기도 하고 합니다.

그 사람이 하루 주일을 대가리를 싸 짜매고서 어학을 공부했으면 어학 공부한 그 정력은 없어지고 그 정력은 기능으로 바꿔졌습니다. 그러면 영어를 공부하는 영어 어학의 기능으로 바꿔졌고, 정력은 없어지고 기능으로 바꿔졌습니다. 그 기능으로 바꿔져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이 하루 동안을 살 때에 하나님 말씀대로 이렇게 진리와 영감대로 이래 살았으면 그 정력은 영생하는 하늘에 속한 기능으로 바꿔졌습니다. 정력은 없어졌지마는 그 기능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심신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래 가지고서 “죄에 드리면 죄의 병기가 되는데 그 결과는 사망을 낸다” 그렇게 성경에 말했고, 또 “하나님께 드려서 의의 병기로 살면 그 마지막은 생명을 이룬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루 하루 사는 데에 정력이 기능화돼 가지고서 정력은 없어지고 기능화된 그것만 자기에 있고, 하루 종일 사는 데에 그 사람이 아무 뜻없이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자고 했으면 그 사람은 그냥 정력이 정력으로 없어져 버렸고 악의 기능도 만들지 못했고 의의 기능도 만들지 못했고 정력만 허비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 현실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뭐 백 년을 살았더란대도 백 년 살면서 그 사람이 현실 현실에서 그 모든 정력은 다 기능으로 바꾼 것도 있고 또 그냥 허비한 것도 있고 하는데 그 기능의 죄짓는 온갖 기능으로 바꾼 것 있어서, 그거 우리가 제일 회개하기 어려운 것은 악성을 회개하기도 쉽고 악령을 회개하기도 쉽고 악습 회개가 제일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그렇습디다, 악습 회개가. 그것이 와 가지고 기능이 돼 가지고 내게 있기 때문에 그 어려운 것입니다. 없어지지 않소.

이랬는데 그것이 죽기 전에 그것이,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이렇게 부인한 그것은 큰 악의 기능을 마련했습니다. 악의 기능을 마련했습니다. 그 사람의 정력은 그때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그 행위를 한 기능을 만들었고 그는 살기 위해서 그 기능 만들었습니다.

만들었으나 그 사람이 주님을 저주한 그 기능 만든 그것을 죽기 전에 그 기능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높이는 그 기능이 잡아먹어서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를 위해서 꺼꾸로 십자가에 못박힐 만치 그가 하나님에 대해 능력 있는 그 기능으로 화해졌습니다. 기능화됐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은 주님을 부인한 그것을, 그 악의 기능인데 그것을 자기가 의의 기능화시켜서 큰 구원을 자기가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 남은 여생의 길이기 때문에 요걸 똑똑히 알고 자기가 현실에서 어떻게 살든지 현실에 산 그 정력은 그것이 아주 없어지든지 그 정력은 기능화되는 것입니다.

그 정력은 기능화되는데 기능화된 그것이 두 가지 기능화되니 사망의 기능화도 되고 생명의 기능화도 되는데 사망의 기능화된 그것을 자기가 정말로 복있는 사람이 돼서 뒤에 좋은 교훈을 들었든지 바른 깨달음이 있으면은 사망의 기능화된 그것을 죽기 전에 그 사망의 기능화된 그것 때문에 더 생명의 기능화되는 것에 양식이 돼 가지고 강하게 해서 도리어 그 범죄함을 인해서 더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자기가 술먹고 불량지기고 이래 돌아다닌 그것이 평생 후회가 돼 가지고서 집회할 때마다 그 말을 하고, 그러기 때문에 다시는 그 목사님은 빠져 가지고서 술취하고 방탕한 그런 데에 안 빠질 수 있는 거게 대해서는 강한 기능을 가져서 어떤 뭐 술뿐 아니라 아무 속에 들어도 거기 빠지지 않을 그런 강한 기능이 됐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범죄한 일생의 기능도 다 이것을 생명의 기능으로 삼켜서 생명화됐기 때문에 바울도 발하기를 내가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탄식하는 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기 위해서 힘쓰는 그것이 바울이 이제까지 모두 후회된 그 생활을 다시 복구해서 살리는 그 구원의 방편을 잡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다른 것 할 여가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달리 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그 기능이 그것이 뭐 오만 희로애락을 다 하고 하는 그 기능인데, 그 기능인데, 오만 희로애락을 다 하는 기능인데 자기의 전신을 악의 기능 그것을 마련한 사람은 악의 기능 그것이 죽을 때까지도 그 기능이 자기의 전신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놈이 솔빡 악령 악성으로 더불어 기능으로 자기 심신으로 기능화시킨 그거 가지고 같이 유황불 구렁텅이 갔었는데 슬피 울지 못하고 이를 갈지 못하고 고통을 못 받는다 말입니까? 이거는 심령이 어두운 소리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은 만물이 탄식하며 고대하는 것, 우리는 그말 하면은 성경이 말하지 안했으면 ‘세상에 만물이 무슨 탄식할 줄 알고 소원할 줄 알고 또 만물이 우리에게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는 그런 것 어찌 그거 말도 아니다’ 하지만 성경이기 때문에 말합니다. 성경이 아니라도 말합니다. 성경이 아니라도 그래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인간의 오묘한 것, 지금 인론을, 여게 조직신학을 말하지만 인론에 대해서는 거의 제로입니다. 나는 그래 무시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에 세계에 조직신학에 인론이라 하는 건 다 거의 제로라고 나는, 이거는 영 영점이라 그렇게 봅니다.

영도 구별 못 하요. 마음도 구별을 못 하요. 영이 뭐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영론을 할 겁니까? 무슨 인간론을 할 겁니까? 인간의 제일 중요한 것이 영이 주격체인데.

이러니까 공연히 맹종적으로 생각지 안하고 양심 쓰지 안하고 그렇게 날뛰어서 하나의 눈먼 망아지 원앙 소리 듣고 따라가듯이 그렇게 하는 그런 생활을 하지 말고 자기가 살면서 자기 구원을 바로 이루도록 노력해야 되지 아무리 말해 봤자 칼빈이 우리 구원에 대해서 변증 못 해 줍니다. 틀리면 정죄받지 어짤 겁니까? 또 저먼저 내가 그거 하나 그걸 뭐 보라 했더니마는 그걸 봤는데 그래 가지고서 그것을 환하게 드러내는 그 드러난 것도 그거 변호를 해 가지고 이 칼빈이 이랬지만 칼빈이 이래 하는 게 아니고 이래 변호하지만 그뭐 박혀 놓은 게 딱 있고 글이 있는데.

이러니까 어쨌든지 그런 사람들이 우리 선배로서 그만치 후배에 준 것도 감사하니까 거게서 나는 공짜로 먹을 게 아니라 나는 또 거게서 더 연구에 연구를 가해 가지고서 내 신앙 생활을 바로 깨달아야 될 것 아닙니까? 세계에 세계 신학자가 증거하면 그까짓 거 무슨 힘이 있습니까? 바로 딱 들어맞아야 힘이 있지. 그렇지 않소? 온 천하 신학자가 다 ‘이게 옳다’ 하면 그게 무슨 힘있소? 그게 바로 맞아야 되지. 그렇지 안해요? 뭐 많은 학자가 말한다고 그것이 무슨 힘이 있는가? 아니오.

다 주님의 심판 앞에 가 설 터이니까 그분은 알지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바른 것 틀린 것 다 아니 그분이 인정해야 되지 그분이 인정하지 않은 거는 아무 소용이 없어. 세계를 날리는 대학자라도 그 사람이 대학자라는 그것을 가지고 원인으로 그 아무 그 인정하지 안해. 그거는 옳으냐 바르냐 참이냐 거짓이냐 그것만으로만 구별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쉽게 간단하게, ‘어떻게 한 사람이 지옥 가도 있고 천국 가도 있느냐?’ 그거는 그 시간에 많이 말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영은 죽어서 전적 기능적으로 없는 거와 같이 되어 있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거는 세계에 신학자들이 다 통일돼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영은 전연히 활동 기능은 전연히 없는데 그러면 불신자들은 그에 무슨 감각이나 이성 작용이나 없습니까?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전체로 가지고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니까 거기 가서 호소한다.

택한 자들도 자기 생활에 자기 영도 무시하고서 전신을 끌고서 이 육체의 소욕의 생활이 이 영육을 막 끌고서 제 마음대로 해서, 로마서 7장에 보면은 이 영도 탄식을 하고 여러가지 곤고를 느끼고 있는데 이래도 끌고 가 가지고 제 마음대로 지금 살고 있는 그 강한 자가, 강한 자가 영 떼고 그자만 딱 떼서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서 할 때에 그게 희로애락을 모른다 말입니까? 그게 고통을 모른다 말입니까? 너무 심령이 둔해서 자꾸 꼰지가 서 가지고서 너무 육적으로만 또 일방적으로만 생각해서 그래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거 알고, 요게 마태복음 13장에 비유는 내가 어제인가 언젠가 말했는데 이 비유는 중생된 자들에게 한해서 한 말씀이냐 전인류에게 대해서 한 말씀이냐 요것부터 구별을 해야 될 것이오. 그러면 이거는 기본구원에 대한 말씀이냐 건설구원에 대한 말씀이냐 요것부터 구별해야지 요거 구별하지 못하면 암만 해석해 봤자 헛일되고 사람 살리지 못하고 어지럽게만 만들지 소용이 없습니다.

다 같이 잠깐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알게 하시지 아니하시면 알 자가 없고 들어 자기 구원에 유익되도록 자기 구원을 스스로 건설케 하시지 아니하시면 건설할 자가 하나도 없음을 압니다. 주님께서 얼마든지 강퍅하고 악독하고 어리석게 어둡게 만드시면 그대로 되는 것을 압니다. 지옥도 주님의 예정이요 천국도 주님의 예정인 것을 저들은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주님의 육십육 권의 도리를 똑 바로 깨닫고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실상을 이루어 주님에게는 영광이 되고 우리 자신들에게는 구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서 모인 여게도 비록 초리하고서 작으나 주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면 지극히 큰 모임이 되는 것을 압니다. 여기서 주님이 다 기뻐하시는 일도 할 수 있고 여게서 이 세계와 우주를 구원할 수도 있음을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들에게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은혜로 충만시켜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536 구원론/ 로마서 1장 16절-17절/ 860702수새 선지자 2015.10.25
» 구원론/ 마태복음 13장 14절-16절/ 870609오후교역자회 선지자 2015.10.25
534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20장 19절-23절/ 880403주전 선지자 2015.10.25
533 구원과 율법과의 관계/ 마태복음 5장 17절-20절/ 890218토새 선지자 2015.10.25
532 구원과 승리 방편/ 마태복음 4장 5절-11절/ 860807목후집회 선지자 2015.10.25
531 구원과 멸망은 항상 언제 어디서나/ 누가복음 21장 34절-38절/ 830928수새 선지자 2015.10.25
530 구원과 멸망/ 베드로후서 1장 1절 / 840401주새 선지자 2015.10.25
529 구원, 두 신앙 노선/ 출애굽기 16장 21절-25절/ 830401금새 선지자 2015.10.25
528 구원, 두 신앙 노선/ 창세기13장 8절-13절/ 1983. 5. 3. 화새집회 선지자 2015.10.25
527 구원 잊어버리면 헛일/ 에베소서 6장 10절-20절/ 871118수새 선지자 2015.10.25
526 구원 이루는 방편/ 디모데전서 4장 1절-5절/ 1977년 4공과 선지자 2015.10.25
525 구원 역사의 근거/ 마태복음 16장 13절-20절/ 1977년 48공과 선지자 2015.10.25
524 구원 순서/ 로마서 1장 16절-17절/ 860702수야 선지자 2015.10.25
523 구원 방편 2가지/ 시편 91장 2절-3절/ 880521토새 선지자 2015.10.25
522 구원 도리의 기준/ 로마서 1장 18절-23절/ 890425화새 선지자 2015.10.25
521 구원/ 베드로후서 1장 4절-11절/ 1980년 28 공과 선지자 2015.10.25
520 구원/ 베드로전서 1장 5절-7절/ 1980년 37 공과 선지자 2015.10.25
519 구원/ 베드로전서 3장 19절-22절/ 820122금야 선지자 2015.10.25
518 구원/ 베드로전서 3장 20절 -22절/ 801110월새 선지자 2015.10.25
517 구원/ 마가복음 10장 23절-31절/ 810415수야 선지자 2015.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