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선지자선교회 1982년 1월 22일 금야

 

본문 : 벧전 3:19-22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오늘 권찰회 여기 마치고 바로 상가에 갔는데 제 안경을 잊어버려서 지금, 예?  있으면 나를 바로 찾아다 줘야 되지. 그래 인제 눈이 없으니까 이래 갑자기  변해지니 이상합니다. 먼데 하나도 안 보이지, 또 돋보기 쓰니까 앞에는  보이지만 먼데 안 보이지, 이것 벗으니까 먼데는 보이지만 앞에 안 보이지  이래서, 어디 안경 있소? 있거든 갖다 주십시오. 눈이 변해져도 거기 충격을 안  받아야 될 터인데 그것 아주 갑자기 눈이 변해지니까 자유가 없습니다. 보니까.)  노아 시대에 된 일을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한장에 신약 교회 시대의 종말도  이와 같을 것을 말씀하셨고 또 사도 베드로를 통한 베드로전서에서도 노아  시대의 홍수 이 문제가 우리 신약 교회의 구원의 표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때에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그 관계된 이 이치는 우리와도  꼭 같은 관계가 되는 이치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다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천하 중량보다 더 큰 중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 눈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환한데. 내가 그말 한 것은  '저 목사님이 어째 갑자기 지금 좀 이상해졌다.' 여러분들 눈에 그래 보였을  것이오. 내가 그렇게 안 하려고 이래 애를 써도 눈이 갑자기 없어져 놓으니까.)  우리는 노아 시대의 이 일을 우리의 구원의 참 거울로 이렇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를 보아서 우리 시대를 비교해 보고 그때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해서 구원 이루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 이 계시를 주신  목적인 것입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노아  홍수로 말미암아 멸망받은 사람들이 많았고 이 홍수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사람은 겨우 여덟 명뿐이라고 여기에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참 크게  염려스러워지고 두려워지는 한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했고 또  여기에도 이 말씀을 했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이때에 예수 믿는 사람의 수효가  이렇게 많지마는 과연 건설구원을 바로 이루어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하는 이것을 생각할 때에 참 심히 떨립니다.

 우리가 죄를 다 회개해야 천국 가지 그렇지 않으면 안 간다고 하는 그런 주장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 아무리 인간 제가 회개해 봤자 더 밝은  빛이 오면 또 회개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회개로 천국 간다고 하면  하늘나라 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 가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로만 대속받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갈라서 기본구원이라 이렇게 말하고, 또 이 기본구원의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자기가 이 은혜를 힘입어 있는 힘을 다 써서 이렇게 하면 집짓는 것처럼  건설구원이 이루어진다, 성화구원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회개해야 다 구원을 얻지 회개에 미진함이 있으면 하늘 나라 못  간다는 그것도 좀 더 구별을 해야 되지 그래 가지고는 대단히 위험한 소리고, 또  예수님만 믿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같은 그 영광과 평강과 행복을 누린다고 하는  그 주장도 위험한 주장입니다.

 그러기에 세밀히 구별해서, 택한 자들은 잘 믿든지 못 믿든지 예수님의 공로로  하늘나라는 갑니다. 택한 자는 하늘나라 아무리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고  불택자는 갈래야 갈 수 없는 것이 이것이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약입니다. 또  하늘나라 간 사람으로서 그 영광의 차이는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차이보다  비교 못 할 차이가 있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러기에 노아 홍수 때를 이렇게 거울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기본구원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루어 갈 성화구원 건설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본구원은 택한 자들은 다 기본구원은 얻지마는 이 건설구원을  제대로 바로 이루어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사람은 심히 그 수가 적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서 경고합니다. 우리가 잘 믿든지 못 믿든지 애를 쓰는 것은  건설구원을 잘 이루어 가지고 가려고, 주님 앞에 노여움을 끼치지 아니할 이런  구원을 이루어 가지고 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구원에 보면 사람들이 구원을 준비할 그런 시기가 있고 또 구원을 매듭짓는  결말을 짓는 그런 시기가 있는 것을 성경에서도 늘 말씀했고 또 우리의 신앙의  경험과 체험에서도 그러합니다. 잘 믿는 사람들이 흑은 개인 시험으로 자기에게  개적으로, 참 열 처녀에게 밤중 비유를 하신 것과 같이 밤중 같은 그 어려움이  닥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평소에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했지마는 차차 차차 그 신앙생활을 계속하기가  어렵도록 환경이 몰아붙여 가지고 마지막에 어려움을 당하는 그 절정을 딱  만나면 그만 그 사람이 못 견뎌서 그때에 그 신앙을 다 양보하고 뺏기고  넘어지는 것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넘어지고 나면 그러기 전에 가졌던 신앙이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히 백지로 돌아간 것과 같이 그 사람에게는 신앙의  능력이나 또 신념인 그 확신이나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봅니다.

 또 개인적으로가 아니고 가정적으로도 보면 그 가정이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으로 참 모든 면을 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라든지, 또 기도, 성경 보는  것이라든지, 전도하는 것이라든지 연보하는 것이나 그런 모든 면이 참 그 가정은  신앙의 가정이요 모범할 만한 그런 가정이라고 다 볼 때에 반드시 그 가정에도  차차 차차 날이 짙어져서 밤중이 옵니다.

 차차 차차 밤이 닥치듯이 어두움이 오면 그 가정이 신앙이 활기를 띠지 못하고  흔들리다가 마지막에 밤중 같은 그 어려움이 부딪힐 때에 그만 그때 그 가정이  신앙생활을 못 하고 아깝게도 넘어져 버립니다. 넘어지면 그렇게 잘 오목거리고  나가던 경제도 아주 파탄을 당하고, 모든 사람들의 출세도, 뭐 인격도, 그이의  양심도, 인격의 지조도, 그만 신앙도 아주 참 박살이 되는 그런 것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또 시대적으로도 열심을 품은 그런 시대의 교회들이 시대적으로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그만 모든 교회가 마치 연한 채소에 끓는 물을 찌트리면 그만 확  데쳐져서 다 삶겨서 주저앉는 것처럼 그렇게 교회들이 힘을 잃고,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요동치 아니하고 그 어려움을 꿰뚫고 올라 가는 그런  신앙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신앙은 그 시대적인 환난을 통해서 그 인물들은  다 유력한 인물들이 되고 그 다음 세대에 참 교회의 기둥으로 복음을 위해서  이바지하는 그런 인물들이 되어지고, 가정에서나 개인이나 다 그러합디다.

 왜정 말년에 제가 어떤 사람을 하나 아는데, 그분의 이름은 밝히지 않습니다.

그분이 아주 은혜생활 했습니다. 그 교회 담임 전도사가 한번은 밤에 심방을  가니까 그분이 성경을 읽는데 불은 깜깜하게 꺼 놨기 때문에 '잘 외운다. 많이  외운다. 얼마나 외우는가 보자.' 한 시간 있어도 외우고, 두 시간 있어도  외우고, 세 시간 있어도 외우고 끝이 없이 새벽이 다 돼 가는데 하문 끝나는가  하고 보니까 그대로 줄줄 줄줄 외우고 있습니다.

 할 수 없어서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라 해 들어가니까 '성경을 어찌  그리 이렇게 많이 외웁니까?' 그분이 영수입니다.

 '영수님, 성경을 어떻게 이래 많이 외웁니까?' '나 외우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었습니다.' '불을 꺼놓고 어떻게 읽었습니까?' '불 꺼 놔도 뭐 켜나 끄나  한가지로 환하게 보입니다.' 그분이 성경 보는 데 그랬었습니다.

 또 도 사경회 하면 자기 집이 도 사경회 하는 그 자리에서 얼마나 되느냐 하면  내가 리수를 잘 모르겠는데 아마 25리나 30리나 그렇게 될 겁니다. 12킬로나  된다 그말이지요? 30리나 되는데 우리가 새벽예배 보고 다 기도하고 같이,  우리는 거기에서 식사를 붙여 놓고 있으니까 아침 먹고 세수하고 예배 시간 돼서  오면 그분이 앞에 와서 앉았습니다. '영수님, 식사를 어디 붙여 놓고 있습니까?'  '예, 집에서 다닙니다.' 이럽니다. '집에서 다닙니다.' 이래 30리를 가 가지고  아침 먹고 왔는데 우리보다 앞에 참석합니다. 그것은 뭐 상상도 못 할 일이오.

어떤 사람이 그게 참말인가 싶어서 뒤를 따라가니까 같이 동행을 하는데, 같이  동행했는데 이 사람도 어찌 됐는지 갔다가 아침 먹고 오니까 예배 시작 안  했더랍니다. 그 사람 힘으로 그렇게 다녔소.

 이랬는데, 거기에 신사참배가 있어 가지고 신사참배를 하라고 강요하는데  이분의 생각에 해석이 뭐라고 된게 아니라 '거기에 가서도 머리만 숙이지  속으로는 섬기지 않으면 되지.' 안 가려 하다가 강제에 끌려서 가면서 '그러면  가서 절 안 하지' 그러다가 되게 조우니까 두렵고 못 견뎌서 '그만 머리는  숙여도 속으로는 속 절은 안 하지.' 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말이오. 절을 탁  하니까 자기 속에 뭣이 꼭, 자기 말로 그래요. 자기 속에서 학이, 학이 훅 날아  나가는 것 같은 그런 그 기분이 나더라고. 그러고 난 다음에 그 자리에 팍  꼬꾸라졌습니다. 그만 그 자리에 그만 꼬꾸라져서 그만 처박혀 엎어졌습니다.

 처박히고 난 다음에는 그 뒤에는 역연 30리를 가는 데에는 암만 부지런히 가도  세 시간, 세 시간 반 이래 걸리고, 갔다오려 하면 60 리 되니 일곱 시간이나  걸리지 그렇게 갔다 오지를 못하고, 그 다음에는 불을 켜고 성경을 봐야 되지 불  꺼놓고 난 다음에는 성경 하나도 못 봤고, 그전에는 그분을 만나면 말 한 마디를  해도 거기서 젖이 나오고 꿀이 나와서 은혜가 되는데, 또 그분 저를 잘 찾아  옵니다. 만나면 얘기할 것이 있는데 그 뒤에는 완전히 변질이 돼 버렸습니다.

 그것이 구원 준비를 할 동안에 그렇게 준비를 해 가지고 마지막에 결실을 이룰  수 있는 밤중을 때에 등불이 탁 꺼져 버리니까 그만 신랑 맞이 못 하고 그만 그  꼴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기본구원은 택한 자는 다 얻습니다. 나 가지고 금방 죽었어도  인간이라면 택한 사람은 다 구원을 얻지 인간의 어떤 행위로써라도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 못 갑니다. 꼭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만 갑니다.

 그러나 건설구원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행위를 통해서 결정되어지는 이  구원인데, 이 구원은 참 사람들에게 천층 만층이라 하더니마는 뭐 층어리가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노아 시대의 이 홍수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이 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사람이 겨우, 몇 명 안 됐으니 여덟 명뿐이었다. 이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와 같으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건설구원을 이루겠다고 이렇게 애를 써서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잘  믿는다고 보여지는 사람도 많고 수많은 사람들이 별별 애를 쓰고 별별 거룩한  사업에 공헌자가 되어지고 이렇지마는 노아 시대 이 홍수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의 공로로 건설구원을 이룬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노아 때에 홍수로 인하여 멸망받은 사람도 있고 홍수로 인하여 구원함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말했습니다. 여기에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그러면 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사람은 여덟 명이고 물로 말미암아 멸망받은 사람은 그 외에 전부입니다.

 이 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하신 이 대속과 3일 만에 부활하신 이 부활을  예표해서 하나님이 두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대속의 부활하심은 노아 시대의 물과 같습니다. 물의  그때 그 이치는 예수님의 사활의 이 대속의 효력의 이치를 예표해서 하나  표시해서 보이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가 어떤 사람에게는 그 홍수가 멸망을 시켰습니다. 홍수가 멸망을  시켰소.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인해서 세상은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인하여 세상이 정죄받고 심판받아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홍수로 인해서 멸망받은 사람들도 있지마는 홍수 때문에 구원 얻은  사람 있습니다. 홍수 때문에 구원 얻은 사람이 있습니다. 홍수의 도움을 입은  사람들 있습니다.

 만일 노아는 이 홍수의 도움이 없었으면 노아의 구원은 헛일입니다. 노아는  인간 중에 가장 세상적으로는 천한 인간이 됐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이  홍수에 빠져 죽는데, 다른 사람은 이 홍수에 빠져서 멸망을 하는데 노아의 여덟  식구는 이 홍수가 이렇게 들고 모시고 다녔습니다. 이 홍수가 들고 모시고  다녔어. 노아는 이 홍수의 도움을 받았고 혜택을 입어서 이 홍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다른 사람들은 이 홍수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형 대행 대화친의 이 대속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산 자의 머리가 되고 첫열매가 되어 모든 자에게 산 소망을, 산 생명과 산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베푸신 이 공로는, 이 공로를 마치 노아 때에 홍수의  도움의 혜택을 입은 자는 구원을 받았고 홍수의 도움과 혜택을 입지 못한 자들은  다 멸망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의 사활의 이 대속의 공로를 자기 건설구원에  도움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고 이 사활의 공로의 도움을 받지 못한 자는 영원히  멸망입니다. 이것을 여기에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죄 칭의 하나님과의 화친 이것을 대신해서 이 공로를 베푸시고  '이 공로를 차지해라, 이 공로를 네것 삼아라, 이 공로를 입었으면 네가 죄 없는  자 되고, 의인 되고, 하나님과 친밀한 부자가 되어지고, 네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같이 죽고 예수님의 부활 하심에 같이 살아나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도 중생한 새생명을 가졌고 그와 마찬가지로 이 몸과 이 마음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 살아나라. 마음도 살아나고 몸도 몸의 기능도 살아나라.'  이 살아나는 혜택을 어떤 자는 입고 어떤 자는 이 혜택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새생명길을 열어서 새생명으로 살라 하시고 살지 않는 자는  영원히 멸망입니다. 예수님이 대형을 해서 죄 형벌을 받은, 받아서 대신 대형해  주신 이 사죄를 힘입는 자는,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는 자는 죄의 심판이 없는데  이 공로를 힘입 지 않는 자는 정죄로 영원히 멸망받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사활의 이 공로는 노아 홍수 때의 홍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는 어떤 자는 받들어 구원을 하고 혜택을 입히고 온  천하에서 구별해서 구원을 시키고, 어떤 자는 이 홍수가 멸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공로의 혜택을 입는 자는 구원을, 건설구원이 되고 이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는  이 공로로 인하여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이 현실 현실이라는 이 현실은 이것이 노아 홍수 때의 그  홍수와 같습니다. 이 현실에서 이 홍수와 같은 역할을 하는 예수님의 이 공로는  한편은 구원을 하고 한편은 정죄를 하고, 한편은 생명을 일으키고 한편은 사망을  일으키는 양면을 가진 것이 예수님의 구속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서 이렇게 대속했기 때문에 심판하는  권세를 가졌다, 또 사망과 생명을 당신이 다 잡으셨다, 생명도 당신의 것이요  사망도 당신의 것이라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노아 때에 그 홍수의 도움을 입은 자들은 구원이 됐고, 홍수로 인해서  구원했습니다. "물로 말미암아"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자 있고 또 물로 말미암아 멸망받은  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라 말은 죽음을 전제로  두고 하는 말입니다.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들을 구원하는  표다.

 이러기 때문에 이 사활의 공로는 너희들을 구원하는 이 구원이 마치 노아 홍수  때에 이 홍수로 노아를 구원한 것처럼 너희들을 구원하는 것인데 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이 홍수로 말미암아 다 멸망을 받는다. "그를 믿지 아니함으로 죄  정함을 받았다" 이랬습니다. 그를 믿지 아니함으로 죄 정함을 받습니다.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현실이라는 현실이 마치 노아 때에 홍수로 우리에게 예표로 보여  주신 그 형식계시와 같이 우리 현실은 홍수와 같은, 구원과 멸망을 주는 홍수와  같은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가 내 현실에 접해 있습니다. 우리는 노아 시대의  홍수를 사람들이 당면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현실에서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우리는 접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활의 공로를 접하고 있습니다.

 이러기에 이 사활의 공로를 내가 힘입게 되면, 이 사활의 공로의 도움을 입게  되면 나는 구원이 되고 이 사활의 공로의 도움을 입지 못하게 되면 이 사활의  공로는 나를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지공법 지성법은 죄에 대해서는 형이 있고, 불의에 대해서는 형이  있고, 하나님 훤수 대해서는 형이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형을 면하려면 죄의  형벌을 받아야 되고, 불의를 면하려면 불의의 형벌을 받고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하나님 율법에 복종하는 이것이 있어야 되고, 하나님과 원수된 이 형벌을  면하려면 원수된 이 형벌을 받고 하나님과 화친을 받아야 되는 것인데 못 받은  것은 다 멸망입니다.

 그러면 우리 현실은 예수님의 공로의 혜택을 입든지 못 입든지, 예수님의  공로의 도움을 입든지 못 입든지 이 둘 중에 하나가 결정되고 지나가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혹 조부라운 생각으로 하면 이해 안 될 사람이 있는지 모르나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로 말미암아 구원 얻온 자, 노아 여덟 식구는 물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습니다.

물 아니면 구원 못 얻소. 암만 방주 만들어 봤자 다른 사람에게 조롱거리만 되지  아무 소용이 없어. 물이 와서 노아의 방주를 드부렁 드부렁 띄워 가지고, 모든  것은 다 멸하고, 세상을 정죄해서 멸하고 노아의 여덟 식구만 구원시켜서 온  우주는 그분에게 상속시켜서 그의 소유가 되어졌던 것입니다. "여덟 명이라"  21절에 "물은" 노아 홍수 물 말이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표니 곧 세례라" 노아 홍수의 물로  깨끗한 것은 아주 깨끗한 것으로 딱 갈라 세우고 더러운 것은 더러운 것으로 딱  갈라 세워서 완전히 둘을 갈라 뜨려서 하나는 살렸고 하나는 죽였습니다.

 "이것이 세례라" 그말은, 세례는 더러운 것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갈라  가지고 더러운 것은 멸망을 시키고 깨끗한 것은 구원해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착한 양심이"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다 버려 죽여버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서 깨끗한 것으로 살아난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아 홍수 때에 이 홍수에, 홍수는 죄와 의를 가르는데, 홍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와 하나님에게 노여움을 받는 자를 두 쪽으로 가릅니다.

구원과 멸망을 갈랐고, 의와 죄를 갈랐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갈랐습니다.

그것이 노아 홍수의 홍수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는 인생이 현재 현재라는 그 현재를 쭉 맞이해  가지고 현재를 통과해 가지고 쭉 가는데 그 현재 현재에서 예수님의 공로는  인생을 의로우냐 불의하냐, 죄인이냐 죄 없는 자냐, 망할 자냐 살 자냐,  하나님편이냐 하나님과 대적이냐? 이것이 둘로 갈라지는 현실입니다. 갈라지는  현실 우리 현실은 우리가 이제 의면의 죄면 죄, 구원이면 구원 멸망이면 멸망,  하나님과 연결이면 연결, 하나님과 끊어져 마귀와 연결이면 연결, 이것이 우리  현실에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결정이 되는데 이 결정되는 우리 현실에 있어서 노아 홍수 때에 홍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입니다.

 우리 현실에 노아 때의 홍수와 같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이 홍수가 어떤 사람은 도와서, 조롱 멸시 천대 받던 그것을 도와  가지고 구원을 시켰고 어떤 자는 멸망을 시켰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현실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공로는 모든 인류를 이  공로가 도와 주는 자는 그는 다 구원을 얻어 살아나고 영생을 가지게 되고 이  홍수와 같이 예수님의 공로의 도움을 입지 못하는 자는 그대로 있는게 아니라  도움을 입지 못하는 자는 이 공로로 말미암아 정죄해서 영원히 멸망받는  것입니다. 이 두 가 지가 우리 현실에서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 때에 이 홍수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노아  홍수 때에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방주를 예비한 노아의 여덟 식구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 현실에서 홍수와 같은 그런, 홍수 그거는 표요 예수님의 이  대속득 공로는 실상입니다. 홍수로 표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공로가 우리 현실에  접하고 있을 때에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이 방주가 우리에게 있을 때에는 홍수의  혜택을 입은 것처럼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우리가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가 없는 자는 실패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대속의 이 공로를  입을 수 있는 노아 때의 방주와 같은 오늘의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을 수  있는 이것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보배로운 믿음이라 그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노아 홍수 때에 이 홍수에 모든 사람이 멸망을 받는데 홍수의 도움을  받아 구원을 얻은 이 구원 얻게 된 그것은 무엇인가? 노아의 방주인데, 노아의  방주는 무엇으로 된 것인가?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께서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한 마디 한 마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나님이 시키시는 그대로  만든 그것이 방주입니다. 만든 그것이 방주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일시에 만든 것이 아니고 120년이 걸려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때에도 배가 없는게 아니라 배가 있었을 터인데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만들어진 것이오. 오늘 노아의 홍수와 같은 그런 구원이냐 심판이냐 두 권세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공로의 도움을 입을 수 있는 방주는 무엇인가? 방주는  무엇인가? 우리가 노아가 그 방주 만든 것과 같이 오늘도 꼭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서계시와 영감계시로, 문서계시 이면에 영감계시가  내재해 가지고 영감과 이 진리가 우리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때에 우리  현실에서 성신의 감동과 진리가 함께, 천인 만인이 어떻게 하든지 내 현실에서  주님이 '네가 이렇게 해라' 하는 내 현실에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옳고 바르게 가르치나니 그대로 행해라" 하는 이 말씀, 우리  현실에 하나님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하신 이 말씀 이것은 곧 홍수와  같은 현실에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노아가 입은 방주와 같은 방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의 도움을 입게 되고, 도움을 입게 되고 이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시키시는  것인데, 이렇게 시키시는 대로 하면 이 구원은 내것입니다. 이 시키시는 대로 한  이것이 노아의 방주와 꼭 같은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같은 것입니다.

 시키시는 대로 한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우리를 띄웁니다. 우리를  띄웁니다. 우리를 보호합니다. 우리를 높입니다.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 방주가 없는 사람들은 이 홍수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현실에 주님이 인도하시는 인도는 홍수와 같은 이 구원과 멸망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이요 하나님의 구원인데, 예수님의 공로의 이  도움을 입기를 홍수에 방주로 말미암아 도움 입는 것, 방주 안에 들었으니까  방주를 띄웠지 방주 밖에 나 가면 다 죽었습니다.

 이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현실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는 이 인도하신 이  인도는 우리 현실에서 예수님의 이 홍수와 같은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이  공로는 나에게 구원이 되고, 나를 도움이 되고, 나에게 모든 세계 것을 나만  차지하도록 나에게 주는 것이 되고, 이 순종의 방주가 없는 사람은 잘났든지  못났든지 예수님의 이 공로로 말미암아 그들은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공로는 인간을 대신해서 이 세 가지 큰 일 해 놨는데 이  공로를 입으면 인생은 구원얻고 이 공로를 입지 못하면 인생은 멸망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택자는 이 공로 입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하는 이 길 한  길뿐인데 택한 자들은 이 공로를 입을 수도 있고 이 공로를 입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건설구원에 있어서는. 이 공로를 입으면, 이 공로를 힘입으면, 공로의  도움을 받으면 구원을 얻고 도움을 받지 못하면 멸망받는데 도움을 받으려면  노아가 방주 만든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이 인도대로  하는 이 믿음을 만들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온 천하가 홍수로 침몰되는 그 무서운, 침몰되는 무서운 그  홍수에 이 방주로 구원 얻은 것처럼, 방주가 있으니까 이 홍수가 드부렁 드부렁  띄워 가지고 도왔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속의 공로는 이 공로를 입는 자에게는  구원이 되고 이 공로를 입지 못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단히 분별해서, 우리가 현실에 예수님의 공로를 못 입으면 그  현실에서는 영원히 멸망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한 그 공로를 입지 않으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때문에 이 지금 역사 세계를 머물러 놓고 있는 건데  예수님의 공로를, 공로를 입어서 예수님의 공로 안에 들어간 것은 구원이 되고  예수님의 공로 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모조리 무엇이든지 다 멸망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에 홍수 심판과 같은 심판이 자꾸 지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으면 살고 안 입으면 멸망입니다. 안 입으면 그대로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에서 멸망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뛰어들어서 이 공로만 힘입으면 이 현실에서는 멸망을  벗고 구원을 받지마는 이 공로의 도움을 입지 못하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도움을 입지 못하면 안 됩니다. 도움을 입는 것은 마치 노아가 순종으로 배 모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순종으로 이 공로를 힘입는, 순종 이것만 이 공로를 힘  입습니다. 순종 이것으로만 이 공로를 힘입어 자기 구원이 되지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리 우리 위해서 대속의 공로를 베풀었지마는 건설구원에 있어서는 이 공로는  우리를 돕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지금은 홍수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는 하나님의 심판이요 하나님의 의요, 홍수는 하나님의 구원이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깊이 생각해 깨닫고 확정을 지우고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반드시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기도하십시오, 다른  사람 죄짓게 하지 말고. 저 ○○○씨 구역에 가방 저거 안으로 들여 놔요.

홍수에 도움을 받은 것은 방주입니다. 방주는 순종으로만 방주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순종 외에는 예수님의 이 영원한 공로, 참 완전한 이 공로, 사죄와  칭의와 하나님과 화친의 이 공로를 순종으로만 현실에서 도움 입을 수 있지 그  외에는 도움 입는 길이 없습니다. 이것을 입은 것으로 현실을 통과한 것은  영생이고 그 외의 것은 다 멸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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