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4 09:08
고범죄
1984. 3. 5. 총공회
본문: 히브리서 10장 26절-31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또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총공회로 이렇게 모였지마는 참 모든 세상적 풍채나 또 그 수를 볼 때에 심히 초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적 모든 것이 다 빈약하고 또 심히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그것은 아닌 줄 압니다. 우리의 이 모임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것을 우리가 바로 발견해서 하나님의 섭섭해 하시는 노가 있으면 하나님의 그 노를 풀어 드리는 것과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우리가 조직하고 단결하고 시발한다면 하나님은 그 이상 원하시는 것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에게는 없는 것이 없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엿새 동안에 우주를 지으셨고 또 영계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아는 대로 이 하나님은 이런 것들의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고 또 이런 것들을 원하시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시고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 가지고 아버지 우편에서 우리 위해서 기도하시고 또 우리의 있을 곳을 예비하시고 그곳으로 데리고 갈 그런 모든 역사를 하는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인 줄 압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우연이라 자연이라 세월이라 그렇게 생각하지마는서도 땅 위에 나타나는 그 순서 하나도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우리의 구속을 워하지 아니한 예정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우리가 아는 것 모르는 것, 모든 존재도 주님이 피흘려 구속하신 우리의 구원 이것을 위하지 아니한 존재는 하나도 없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모든 순서도 이거 위해서 있고 모든 존재도 이것 위해서 있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잡으시고 이렇게 저렇게 운영하시고 섭리하시는 것도 다 우리의 구원 이거 하나를 위해서 하시는 것인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 총공회에서 주님이 사람되시고 또 죽으시고 살으시고. 지금도 진리와 성령과 주의 공로가 보증을 하고 계시는 이 하나님의 지극히 소원하시는 이 일을 이루는 우리의 모임이 된다면 하나님은 만족해 하실 것이요, 만일 이 일을 이루는 모임이 되지 아니하고 이 일에 방해가 되는 그런 모임이 된다고 하면 뭐 참 천하에 제일 웅장한 그런 다수의 모임이든지 온 세상이 아주 심히 위대하다 하는 그런 어엿한 모임일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다 외면하시고 그런 것을 당신은 가치로 삼지를 아니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봉독한 말씀에 아주 하나님께서 대단히 노여워하시는 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이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밟는다면 그 어찌 되겠습니까? 짓밟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케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십자가의 보배 피 공로를 부정한 것으로 아주 천한 것으로, 깨끗지 아니한 것으로 여긴다면 이거 얼마나 기막히는 일이겠습니까? '은혜의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신 성령을 욕되게 한다면 우리의 이 모임이 크든지 작든지.
온 세계에 한 덩어리요 모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그것이 다 가증스러운 것이요 아무것도 아닐 줄 압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노아 때에 그 수가 많았지마는서도 그 많은 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안했습니다. 다만 그 노아 여덟 식구를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참 수에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그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하나님이 분히 여기시는 그것이 우리가 되어 있는가 하는 이것을 살펴서 만일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노여워하시고 하나님이 분개하시고, 당신을 밟으시니까 당신이 분개하시고, 당신의 그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부정하게 여기는, 아주 업신여기고 천하게 여기는 그 모욕을 우리가 회개하고. 또 성령을 욕되게 한 것을, 우리가 만일 이 모임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가 어떤 무슨 조직이고 어떤 기이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런 것을 가치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아주 그 뭐 말씀하신 대로 참 분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는 것을 우리가 몰랐다가 이 자리에 와 가지고 그런 것 있는 것을 우리가 회개를 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은 것을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의 피를 부정하게 여겼던 것을 회개하고, 성령을 욕되게 했던 일을 회개해서 하나님의 노를 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면 참 우리의 모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할 것이요 가치 있는 모임이요 참 위대한 모임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27절에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이 어떤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건가? 또 우리를 대속하신 주의 대속의, 그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 어떤 것이 부정하게 여기는 것인가? 성령을 모욕되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이 성령을 모욕되게 하는 것인가? 바로 내세워 놨습니다. 그거는 뭐인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말씀했습니다. 짐짓 범하는 죄, 짐짓 범하는 죄 이거는 속죄를 못 받습니다.
성경에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짐짓 범하는 죄는 속죄함을 받지를 못합니다. 속죄하는 대속의 공로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짐짓 범하는 죄를 대속하는 공로는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이 하나님의 대적으로, 대적으로 취급하시고 소멸하는 맹렬한 불만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을 이렇게 노엽게 하고 또 분개케 하고 하나님이 맹렬한 불로 소멸하라고 맹렬한 불을 갖추시고 또 심판하시고 또 형벌하시고 이렇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분개히 여기시는 이 일. 그 분개하게 여기시는 것이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분개하게 여기시는가?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구속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고 성령을 욕되게 한 그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개해서 이렇게 원수로 갚겠다, 불로 소멸하겠다 그는 심판에서 멸하겠다 그것이 그렇게 하나님이 분개하시는, 하나님을 모욕 주고 짓밟고 주의 대속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아주 천하게 여기고 성령을 업신여기고 아주 모욕시켜서,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대속의 공로와 하나님의 지금 이 구속의 운동, 성령은 구속 운동을 맡았는데 이 운동을 아주, 여기에 짓밟는다 하는 것은 아주 멸시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발에 밟는 것같이 아주 멸시한다는 것. 하나님이,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아닙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을 아주 짓밟는 것, 주님의 피를 아주 부정하게 여기는 것,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히 분개해서 거기에는 용서가 없다, 사죄가 없다,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했습니다. 사죄가 없다, 무서운 마음으로 멸망을 기다릴 것, 심판을 기다릴 것뿐이다. 그 행위가 곧 뭣이냐? 그것이 짐짓 짓는 죄다 그렇게 말해 놨습니다. 짐짓 짓는 죄.
그런고로, 이것을 간단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그 해석을 다 할 수 없고 그저 간추려서 고만 끄내서 제가 아는 대로 말하겠습니다.
짐짓 짓는 죄는 알고 범하는 죄라, 고범죄라 그런 말입니다. 고범죄라 말인데 잘 안 들으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하는 것은 몰라서 범죄한 죄가 하나 있습니다. 몰라서 범죄한 죄가 하나 있고. 또 죄를 안 지을라고 했는데 그만 실수로 범죄한 죄가 있습니다. 실수로 범죄한 죄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안 지을라고 애를 써도, 애를 써도 우리가 부족하고 약해서 범죄하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짓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면 죄를 한 너덧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지은 죄, 또 실수로 지은 죄, 자기가 부족해서 지은 죄, 또 자기가 안 지을라고 애를 써도 연약해서 지은 죄 그런 죄가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죄지은 것은 그런 종류들의 죄인데 그 죄가. 그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죄, 주의 피를 부정하게 취급하는 죄,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 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죄는 그 죄가 될 수 있고, 우리가 범한 죄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참 애가 터져서, 저것은 저 죽고 저 망할 줄도 모르고 그저 불구덩이 뛰어 들어 가는 거와 같이, 수십길 되는 그 바다 속을 무슨 밑에 육지같이 되어 있는 줄 알고 저거 죽을 줄도 모르고 철이 없이 푹 뛰어 들어가는 그런 죄와 같은 죄, 죄를 안 지을라고 애를 쓰면서 참 뭐 금식도 하고 애를 쓰고 결심도 하고 이래도 또 그게 못 견뎌서, 안 지을라고 결심하고 애쓰지마는서도 연약해서 짓는 죄, 그게 안 짓는다고 하다가 그만 또 실수해서, 또 실수해 가지고서, 실수해 가지고 또 짓는 죄. 몰라서 짓는 죄, 어쨌든지 우리 짓는 죄가 하나님이 분노하는 고범죄가 되든지, 하나님에게 사유함을 받지 못하는 고범죄가 되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참 마음에 그 불쌍히 여기지 아니할 수 없고 마음에 하나님이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죄 하나님이 그 동정하지 안할 수 없는 죄, 하나님께서 애처럽게 여기는 죄, 동정 할 수 있는 죄,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해서 안타까워서 그 마음에 괘씸한 마음은 하나도 없고 분한 마음도 없고 섭섭한 마음도 없고, 분개한 마음도 없고 섭섭한 마음도 없고 괘씸한 마음도 없고 '이놈' 하는 마음도 없고 마음에 참 '아' 참 불쌍하고 가련하다. 참 이렇게 네가 힘이 약하니. 약해서 네가. 안 지을라고 하지마는서도 또 부족해서 짓고 연약해서 죄를 짓고 또 네가 어리석어서 몰라서 죄를 짓고 함으로, 어쨌든지 하나님을, 여러분들, 하나님을 욕보이는, 하나님을 짓밟는 성령을 욕되게 하는, 피를 부정케 하는, 하나님이 분노할 수 있는. 하나님이 분노할 수 있는 그 단계에 죄가 나아가지 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다음에는 멸망뿐입니다. 이게 고범죄입니다.
우리가, 자기가 죄인 줄 알는 그 죄를 지었다고 그 범죄가 고범죄 아닙니다.
그거 고범죄 아니요. 알고 죄를 지어도 그 죄 지은 것을 주님은 그 속을 볼 때에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나를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다,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다, 주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그 고난을 당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송장과 같은 우리 속에 오셔 가지고서 우리를 치료하신 그 하나님의, 하나님이 도성인신 하심과 하나님이 십자가의 대속하심과 성령님이 이 일을 역사하실라 하는 거기에 대한 그 사실이 어떠함을 자기가 느끼고, 자기가 깨닫고 느끼고 거기에 대한 실감에서 감사한 마음과 '이렇게 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범죄할 수가 있느냐?' 그 주님의 대속에 대해서 마음에 감격한 그 마음 '이렇게 하셨는데 내가 어찌 범죄 할 수가 있느냐?' 감격한 그 마음. 그러기 때문에, 자기는 범죄 안 하려고 자기 있는 대로 힘을 쓰고 발동을 치는 죄 이 죄는 제가 아는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동정하지 안할 수 없는 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지 안할 수 없는 죄, 하나님이 참 안타깝게 여기지 안할 수 없는 죄, 하나님이 그를 돕지 안할 수 없는 죄, 하나님이 그에게 위로를 해 주지 안할 수 없는 죄 이 죄가 되면! 문제가 해결이 되지마는서도 우리가 강퍅해서,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강퍅해서, 하나님이 한번 두번 이렇게 참아 기다리시지마는서도 이는 참 아주 주님의 되를 아주 속된 것으로 여기고 뭐 하나님이 사람되어 왔다 갔다 하는 그걸 무슨 조그마한 이 세상에서 어떠한 존귀한 식람이 좀 희생해서 무엇을 다른 일을 돕기 위해서 자기가 희생하는 그런 것 만치도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피조물되어 온 여기에 대해서 좀 느껴보지 안하고, 신인양성일위이신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여기에 대해서 느껴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이 송장과 같은 우리 속에 오셔 가지고서 우리를 구원하실라고 애터져 하는 거기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고,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 구속에 대해서 자기가 어떠하신 분이 어떤 구속을 하신다는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없이 느끼지 안하고 이것을 예사롭게 그저 입에 발려서 슬슬 이야기 하고 여기에 대해서 예사롭게 여겨서 뭐 그거는 조그만치도 마음에 자기의 어려움이나 참 거기에 대해서 아무 실감을 느끼지 안하고 예사롭게 생각하고, 또 자기가 구속하신 이 구속함에 대해서, 사죄라든지 칭의라든지 화친이라든지 여기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하든지 이렇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이 날 위해서 이렇게 대속하셨으니 여기에 대한 감격한 그 마음. 이로 인해서 내가 이러니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는 자기가 애터져서 애쓰는 마음 요 두 가지가 없으면 고범죄가 됩니다! 요 두 가지가 없으면 고범죄가 됩니다!! 요 두 가지가 없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살펴봅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그 구속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고 느껴 거기에 대해서 느끼는 정도가 다 다르지마는서도 '참 이렇게 나한테 와서 구속을 하시고 이런 큰 힘을 주셨다. 얼마나 그 대속하신 이 대속이 얼마나 힘들었다 얼마나 애쓰셨다, 그 하나님의 고난 받으심이 얼마나 어떠하냐'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느끼는 그 실감을 가짐이 있고. 거기에 대해서 마음에 감사할 뿐 아니라 이렇게 대속을 받은 걸 생각하니 이 사죄나 칭의나 화친에 대해서 자기가 예사롭게 지낼 수가 없고 힘을 안 쓸 수 없고 마음에, 이러니까 자기 마음이 '안 됐다 내가 암만 해도 다시는 죄 지을 수 없다' 하는. 우리의 그 마음에 대속을 우리가 버리지 안하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주님의 노가 되지 안하고 주님의 동정이 되든지, 그것이 주님의 노가 되든지, 주님의 구속에 대한 그 은총이 마음에 감사해서 그 마음에 감격할 때에 주님이 그 기쁨이 되어지든지, 주님이 '네가 내 구속을 아주 업신여기는구나 아주 멸시하는구나' 분개하게 여기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요 둘 중에 하나니까, 그것은 자기가 알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범죄함에 대해서 두 세 증인이 있으면 긍휼 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고 다 죽였는데. 사형을 시켰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케 한 그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크겠느냐?' 속죄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공심판에 대속했습니다. 공심판에 대속했고, 이것은 예수님의 사심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노를 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문제입니다. 지옥 가는 문제는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면 세상에서 받습니다. 세상에서 화로 갚아 줍니다.
오늘 우리가 너무도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아주 참 그거는 뭐 이런 뭐 어데 짐승 한마리 죽은 것 만치도 여기지 안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에 대해서 제 하나 팔 하나 끊긴 것 만치도 여기지 안하고 도무지 거기에 대해서 아무 우리가 참 감사의 실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어서 이렇게 오신 여기에 대해서도 아무 실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구속한데 실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요 실감을 가지는 것 자유대로 하십시오. 실감을 가지는. 그 실감이 하나님 보시기에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실감인지, 하나님이 참아 기다릴 수 있는 실감인지, 우리의 애쓰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고 싶은 그런 우리의 노력인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노력인지, 업신여기는 노력인지!! 하나님이 동정, 하나님이 이 해하실 수 있는 노력인지! 우리가 알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번에 해결 지워야 될 것입니다.
이 고범죄가, 고범죄가 되면, 고범죄를 짓는다고 천국 못 가는 것 아닙니다.
여기시 사해 주지 않는다 그 말은. 사함을 받지 못한다 그 말은 뭐이냐? 공심판에서 지옥 간다는 그말 아니오. 하나님이 그걸 용서를 안 한다 그말입니다.
안 하기 때문에 그거 있으면, 아합을 하나님이 멸하려고 했지마는서도 아합이 그 참 자기한 것을 원통히 마음 아파서 심히 고통하면서 할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합을 멸하려고 했지마는서도 네가 아합을 봐라 그가 지금 걸음을 옳게 걷지 못한다 걸음을 옳게 걷지를 못한다 그가 거기에 대해서 심히 고민하고 있다 그의 심히 고민함에 내가 그걸 면할 수가 없다 내가 요번에는 용서하겠다' 말씀하시는 거와 같이 이렇게 우리가 고범죄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하나님의 분노가 하나님의 긍휼로 바꾸어지고, 하나님이 불쌍히 여김으로 바꾸어지고 괘씸하고 분하다가 하나님이 우리를 동정할 수 있는 동정으로 바꾸어질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이 구속에 대한 감격과 내가 그 대속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노력하는 이 노력이 들어서 하나님의 노를 풀어야 됩니다. 이 두 가지로 하나님의 노를 풀어야 되고, 이 두 가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우리 공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이거 없으면 뭐이 여러 수백 배 사람이 모여 가지고서 무슨 조직과 뭐 질서를 어떻게 하고 어떤 큰 경영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외면하시고 노여워하십니다. 요번 이 공회에서 이 두 가지를 해결을 지웁시다. 자기가 압니다. 자기가 압니다.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지금 참 분개하실 것이다. 분개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동정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래도 날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저 무조건하고 그래 믿는다고 해서 되는 것 아닙니다. 성경이 말한데까지 가야 되고 성경이 가는 데까지 거쳐야 됩니다. 성경이 말하지 안한 동정을 자기가 기다리면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지 안하는 사랑을 제가 바라보면 안 됩니다.
성경이 바라보라 하는 데까지 바라보고 성경이 그치라 하는 데서 그쳐야 되지.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내가 그 감격한 그것이 주님이, 나를 대속하신 주님이 내가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며 감격하는데 대해서 주님이 보실 때에 '그저 네가 뭐 다야 알 수 있나 다야 그르지마는서도 그래도 제가 내 대속을 알기는 안다 제가 네 대속에 대해서 그저 그래도, 그게 원첨 무지하고 연약해서 그렇지 내 대속에 대해서 그래도 제가 못 느끼고 있는 거는 아니다.' 이게 있어야 될 것이고, 또 '내 대속에 대해서 제가 어쩌든지 힘써서 애써 가지고서 이 대속을 저도 벗지 안하고 이 대속을 기념 하려고 지금 애를 쓰고 있다.' 애를 쓰다가 훅 넘어질 때에 주님은, 주님이, 넘어졌을 때에 주님이 분개하실 수 있는 넘어 짐인지, 세어졌을 때에 '야 또 넘어졌나?' 동정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런 것인지 요 둘로서 하나님의 노를 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금번에 요 고범죄에 대한 것, 우리가 고범죄가 되든지 고범죄가 되는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할 때에 하나님의 긍휼의 죄가 되는지,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죄가 되는 지, 하나님이 사유하실 수 있는 죄가 되는지. 하나님이 분개하는 고범죄가 될런지 그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거기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내가 그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며 어떻게 그 평가하는지 내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내가 노력하는 자요 두 가지로서 고범죄도 될 수 있고, 많이 죄를 짓는다고 고범죄 되는게 아니고 적게 짓는다고 고범죄 안 되는 것 아닙니다. 요 둘에서 고범죄도 될 수가 있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죄도 될 수 있으니까 고요히 우리가 자기를 생각하면서 이 문제를 금번 공회에서 해결을 짓도록 합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