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4 09:06
고범죄
1984. 3. 7. 수새벽
본문: 히브리서 10장 26절-31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온혜의 성경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성령의 감화로만 각자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니 그런 말로 백 명이 꼭 같은 여기에 대한 말을 해도, 사람 보기에는 그저 꼭 같은 말 꼭 같은 태도를 할 때에 어느 정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지마는서도 그 내용의 사실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은 그 내부의 진상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털끝만치도 착오가 없이 정확하게 알고 계시고 판정하고 규정짓고 계십니다.
그러면 사람이 꼭 같은 말을 하는 그 말 속에 천 명이면 천 명 차이가 다 각각 있는 그것을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것을 발표할 수 있겠습니까? 발표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는 인간의 말로 발표할 수 없는 그 내용에 속한 것이 많기 때문에 뭐 별 말을 해야, 그저 말하는 것은 말할 때에 들을 때에 인간이 볼 수 없는 은밀히 역사하는 성신의 감동이 각자에게 역사해서 깨달아질까 해서 하는 것이고, 또 누차 이 본문을 읽고 말씀하는 것은 이 내용 이 사실을 깨닫고 여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자기가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자기의 연구 제목으로 삼아서 어떻게 노력하든지 노력을 해서 여기에 걸리지 안해야 되지 않느냐 이래서,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증거하는 것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선택함을 입고 부르심을 입어서 이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대해서 하는 말씀이지 일반적으로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이랬으니까 이는 뭐 무신론자나 이방인이나 그런 사람들에게 대해서 한 말씀은 아닌 것을 우리가 이런 것만큼은 확정을 지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했으니까 우리에게 관해서 말씀하신 것이지 다른 이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서 단정을 지울 수 있습니다. 거기서 뭐 에누리, 이거는 에누리 할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뜻 그것을 가리켜서 진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식이라고 말하면 이거는 일반 지식이나 어떤 지식이나 다 그저 지식이라는 말인데 우리가 세상에 있는 모든 그런 지식을 우리가 알고 모르는데 대해서 말씀한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인 그 지식을 알고 모르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지식은 우리에게 문서 계시로 기록해 주신 이 지식인 것도 이것도 뭐 에누리 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그저 신구약 성경 계시 지식 이 지식이라는 것도 거기서 에누리를 잘 하는 우리, 아주 에누리 잘 하는 그것이 순전허 마귀의 궤휼입니다. 마귀가 꾀워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에누리하는 것이 그 에누리를 대개 논평한다고 하면 그 에누리는 어데서 근거 됐느냐?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인정하고 신임하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맞세운 거기에서 모든 에누리는 나왔습니다. 에누리는 딴 데 나온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자기를 세우기를 힘을 쓰고 또 자기를 키우기를 힘을 쓰고, 자기가 무엇을 좀 중대한 책임 높은 지위 그런 것을 차지하려고 애를 쓰고, 많은 선전으로 나타낼라고 애를 쓰는 것이 우리들이었고, 또 모든 일반 인류라는 것이 못나고 잘나고간에 전부 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본질과 본성을 가졌으너 그 본질과 본성 그게 뭐인가? 그것이 에덴동산 배암에게서 들어온, 배암에게 받은, 해와와 아담이 그 사상을 받았고, 그 사상을 받아 그 본질과 본성이 된, 다시 말하면 자기중심인 원죄입니다. 원죄 그것이, 바로 원죄지 딴 것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처음에는 내나 그 사람이기 때문에 착각을 해서, 그놈은 죽여야 할 놈이요 자기는 아닌데. 분명히 그놈은 죽여야 할 놈은 죽여야 할 놈인데, 그 놈을 죽여야 될 원수로 알고 대항해서 죽일라고 해도 죽지 안하고 참 일생을 따라 다니면서 유혹을 주고 해를 주는 그놈인데 원수인 줄도 알지 못하고, 그것이 아주 자기 중에 자기인 줄 알고? 그것이 주장하는 것을 자기주장인 줄 알고, 그것을 위하는 것이 자기 위함인 줄 알고, 그것을 높이는 착각하고 사는 것이 기독자들입니다. 이것이 자기 높이는 줄로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거 착각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 짓 하다가 지옥갈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이 아닌 죽은 영을 살리시기 위해서 주님이 대속하셨기 때문에 살아난 우리들은 죄와 허물로 죽은 그 자를 죽은 영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렸으니 이제 산 자입니다.
이런데, 살아난 자기로 살려고 애를 쓰는 그것이 제법 원수도 알고 자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요, 또 자기로 살아서 자기를 길러서 자라갈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자라가는 그 사람의 장성이 부활의 장성이요 길러 가서 길러진 그것이 부활의 실력을 기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하고 순전히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그 사람, 또 그 방법. 또 그 소망 이것을 가지고 살고, 하늘에 속한 것은 말뿐이요, 말뿐이요, 또 말로서는 절대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말은 이 육십 육 권 도리에 기록했기 때문에. 아. 요거야 얼마 됩니까? 얼마 안 됩니다. 이러나, 인간이 기록할 수 없는 그 사실을 기록하려고 하면 온 세상에 둬도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침 많고 그만침 복잡하고 그만침 수가 많습니다. 많은 그것을 이렇게 인간이 알 수 있는 정도의 것으로 발표한 것이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인데 이렇게 우리가 자기에게 대해서 바로 알고, 자기를 죽일라고 애를 쓰고, 또 자기를 기를려고 애를 쓰고, 자기를 죽이려고 애를 쓰고 자기를 기를려고 애를 쓰고, 자기를 구별해서 자기를 미워하려고 그 미워할 점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고, 자기를 사랑하려고 사랑할 점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를 미워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된 그 사람을 미워하고 그 사람을 부인하고 그 사람을 꺾으라는 말 절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얼마든지 길러야 됩니다. 얼마든지 옹호해야 됩니다. 절대 흠이 없는 자입니다. 이 중생된 자는 흠도 점도 주름 잡힘도 책망할 것도 무지 무능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전입니다. 하나님의 그 전부가 저의 것이 되어 있는데 저의 것이 되어 있지마는서도 이 영의 것이 이렇게 발산될 수 있는, 영의 것이 이렇게 발휘할 수 있는 이 발휘의 구멍이 막혀서. 그 혼을 바치지 안해서 마음이 영에게 연결 되지 안하고 몸이 연결되지 안해서 그 관이 막혀 가지고서 나오지 못하는 것이지 그 안에는 얼마든지 충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자의 영이 이 세상에 있으면서 얻을 수입은 무엇 때문에 세상에 있느냐? 있는 이유는 그 자체의 그 무엇 때문에 있는 것 아닙니다. 다만 저희의 소유가 되고 저희의 기관이 되는, 도구가 되는, 쉽게 말하면 저희의 도구라고도 할 수 있는 저희의 기관이 되는 이 마음이라는 것과 몸이라는 것 이것을 그 영이 어느 정도 점령을 하느냐, 어느 정도 지배를 하느냐, 어느 정도 이용할 그 이용권을 가졌느냐 하는 이것이 세상에서 노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은 자기에게 있는 이 육이라는 것을 통치권과 이용권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활용하는 그 권세를, 예를 들면 백 프로 가진 의도 있고, 구십 프로 가진 자도 있고, 일 프로도 가지지 못한 자도 있다고 우리는 논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백 프로 가진 이는 누구인가? 백 프로 가진 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백 프로를 가졌습니다. 다 가졌으니까, 가졌으니까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는 그 찬양을 하게 됐고, 거기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했고, 거기에서도 조금도 그 심신이라는 주님의 육이 그 영을 거역한 일이 없습니다. 영을 거역한 일이 없었고 영육이 하나 된 그 인성으로서 신성을 거역한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완전자입니다. 뭐, 예수님이 승리하신 그 승리, 그 승리가 첫 열매요 그 승리와 같은 승리를 우리들이 그 공로를 힘 입어서 승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안에서 지극히 큰 능력이 역사해서 예수님의 그 죽으시는 성공을 했고 살으시는 그 성공을 해서 다 완전 성공했기 때문에 피조물로서는 창조주 다음 위치를 가지고 계시는 곳이 아버지 우편입니다. 그 능력이 이제는 우리를 중생시키는 일을 하시고 또 중생시키는 일을 하고 난 다음에는 중생된 자가, 중생된 자가 그를 배반치 아니하고, 중생된 자가 그에게 속할 때에 그 능력이 그의 것이 되고, 또 중생된 자가 그를 인해서 움직일 때에 그 움직임 안에서 그 능력이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 노력을 하는 것이요, 또 영은 이 소망을 가지고 노력을 하는 것이요, 우리의 심신은 순전히 사망에게 속한 것이 생명으로 옮겨 속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요, 사망의, 죄의 도구가 의의 도구가 되어 영의 지체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옛사람과 중생된 새사람은, 이는 말로는 암만 말해도, 말해서 그 사람이 백 번 천 번 외우고 읽고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알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성신의 감동이라야 알아지고. 또 자기 자체가 변화된 것 만침 알아집니다. 변화되지 못한 것은 알아지지를 않습니다.
자체가 변화가 된 것 만침 이 사실을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는 그 자체가 되어 있는 것이지, 자체가 변화되지 안 하면 암만 말해야 자기네들은 자기 자체의 요소에 들을 만한 요소가 없고 또 그것을 자기가 받아서 가질 만한 그런 아무 그릇이 없습니다. 요소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참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자기와 새사람 자기를 아주 논평을 심히 많이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설교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도 내가 볼 때에 논평을 해서 아주 원할 때에는 그 사람이 됐다가 그만 외나 자기의 옛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기회는, 죽일 수 있는 기회는 옛사람이 자기되고 맙니다. 평소에는 옛사람 이놈은 죽여야 된다 새사람으로 살아야 된다 하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면서도, 강조하는 그 사람이라도 옛사람을 참 죽일 수 있는 기회, 그 옛사람을 죽여서 새사람의 양식이 돼서 옛사람을 새사람이 잡아먹어야 됩니다.
먹어서, 그게 양식입니다. 먹어야 됩니다. 계란이 병아리로 부화될 때는 그 계란 속에 들어 있는 그 계란이 이 병아리가 다 먹어서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싹 먹어야 비로소 이 공간에 나와 가지고 살 수 있는 부화한 병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걸 잡아 먹어야 되는데 잡아 먹을 수 있는 그런 좋은 기회는 어느듯 옛사람으로 바꿔지기 때문에 실상에 있어서는 옛사람이 살찌고 자라고 새사람은 거기에 파묻혀 버리고 마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을 자기가 자기를 살펴서 알아야 되지 그거 말하면 도리어 개에개 진주를 던지면 진주를 모르기 때문에 밟고 와서 문다 하는 거와 같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한번 두 번이지 많이 말해 주지를 못합니다. 한번 두 번 말하는 것은 파숫군의 책임에서 말하는 것이고, 또 그다음에 자꾸 말하면 도리어 옛사람만 살쪄서 옛사람으로만 점점 강해지고 새사람은 파묻히는 죽이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 전하는 자에게 박해가 올까 하는 그것보다도 그 상대방에 유익이 없는 것은 결국은 하나의 살인이 되고 말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문제도 스스로 자기가 서야 되지,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아껴야 되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야 되고 자기가 자기를 구원해야 되지 스스로 구원하지 않으면 누가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자기가 자기라야 아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아껴 줄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있고, 다른 사람이 아껴 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껴 줄 수 있지만 자기가 자기를 아낄 수밖에 없는 그것은 자기만이 아끼지 다른 사람은 아끼지 못합니다. 또 자기만이 자기를 기를 수 있고 견고케 할 수 있고 자기를 북돋울 수 있는, 자기가 자기를 기르고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굳게 할 수 있는 이것은 자기만이 하지 다른 사람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면 폐단이 됩니다. 마치 우리의 육체도 자기 몸은 자기가 기르지 자기 몸 아닌 다른 것이 와서 기를라면 그거는 병이 되고 자기 자체를 상해하는 것이 되고 말지 도움이 되는 것 아닙니다. 꼭 방법대로 입으로 먹어 가지고서 이렇게 소화가 되어 가지고 이래 되어져야 되지.
그런데, 지금 세상은 자꾸 유능한 세상이 되는 것같지마는서도 복잡한 세상이 돼서 진리를 알기가 대단히 어렵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입으로 먹어야 뭐이 영양이 되는데 이거 요새는 무슨 영양주사, 주사도 자주 꽂고 이라니까 좀 발달이 돼서 알기는 알지마는서도 그 지식에 도달하지 안하면 알기 어렵기 때문에 '지혜는 배암같이 하고' 하는 그 말은 배암의 지식을 다 알고 있어라 그말이오.
배암의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은 그 지식이 구원된다는 말이 아니고, 그 지식은 인간을 죽이는 지식이기 때문에 알아야 그 지식에게 죽지 안하지. 그런고로, 그 지식에게 따라서, 사이비하기 때문에. 그 지식이나 하나님의 지식이나 비슷하기 때문에, 옛사람이나 새사람이나 비슷하기 때문에, 옛사람에게 속한 지식이 있고 새사람에게 속한 지식이 있으니 옛사람에 속한 지식을 다 알아라 그 말은.
새사람의 지식도 알아야 돼.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새사람에게 속한 것도 성령이 알게 하지 다른 이는 모릅니다. 성령이 알리는 것도 다 알고 마귀가 알리는 것도 다 알아라. 왜? 마귀가 알리는 것은 마귀의 알리는 그것을 앎으로서 마귀가 유혹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마귀의 지식대로 하지 않기 위해서 아는 것이요 성령의 지식대로 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탐정해서 '이 놈을 죽일 놈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죽일 놈으로 알고 죽여야 될 줄 알고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에게 호소하면서 이것을 죽여 달라고, 죽일라고 애를 쓰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그 기도가 끝나고 눈 뜨고 난 다음에 어떤 말 한 마디를 해서 옛사람을 죽이는 말 한 마디 하면 그 시간부터 당장 대적이 돼 버립니다. 당장 대적이 돼 가지고서 원수가 되고 그것을 복수를 할라 해. 복수하는 그것이 겁이 나는게 아니라 그럼으로써 자기가 자꾸 망합니다. 멸망 가운데 자꾸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옛사람을 기르는 것인지 새사람을 기르는 것인지, 옛사람의 기업은 세상이 옛사람의 기업이요 새 사람은 천국이 기업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데도 간단하게 말해서 땅의 복음과 하늘의 복음이 있습니다. 땅의 복음과 하늘의 복음이 있어서, 그 전체를 다 놓고서 이것을 이 경중을 단다고 하면 땅의 중량이 무겁고 하늘의 중량이 가벼우면 그것은 중간에 어떻게 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땅의 운동밖에는 안 됩니다. 땅의 소망밖에 안 됩니다. 모르게 슬슬 그 사람은 땅의 사람이 되어가고 하늘의 사람은 점점 파묻히고 말고, 또 하늘의 복음으로 전하게 되면 그 사람은 차차 차차 땅의 것은 희미해져서 빈약해서 땅에 대한 소망도 차차 빈약해 또 노력도 빈약해지고 평가도 빈약해지고 모는 소원도 빈약해지고, 또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결과도 빈약해 지고, 하늘의 것이 점점 풍성해지고 강해지고 사모도 소원도 강해집니다. 이루어지는 결과도 강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껍데기 문서로 아는 이것으로서 다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녹음기와 같이 꼭 같이 그렇게 설교를 했는데, 한마디도 빠지지 안하고 '어, 아'하는 것도 똑 같이 했는데 뭐 설교가 다른게 뭐 있어서 설교가 다르다 설교를 못 한다 그렇게 하느냐 그거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순전히 유물주의자요 외식자요. 그걸 깨닫지 못하면 이 진리에 절대 서지 못합니다. 안 됩니다. 꼭 같은 언어에 태도에, 인간이 볼 수 있는 거는 꼭 같고, 들어 보는 것 생각해 보는 것 느껴보는 것 감각해 보는 것 꼭 같으나 인간이 알 수 없는 그 영감이 와 가지고서, 영감이 와 가지고서 그 영을 움직이고 또 인간이 발표할 수 없는 그 속에 새사람을 살찌우고 움직이는 것 이거는 인간이 발표하지 못해.
그러기 때문에. 참 비유컨댄 꿀먹은 벙어리가 아 꿀을 먹으니까 이상한 줄 알지만 달다는, 달다는 그 표시하는, 달다는 그 언어를 모르면 그 사람이 달다는 발표를 하지 못하고 '뭐인가 좋다' 이랄 것이고. 또 그 사람이 그 지식이 없을 뿐 아니라 발표할 아무런 구음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저 달다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이 들을 때는 별별 말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꿀먹은 벙어리라 하는 거 모양으로, 벙어리니까 발표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는, 내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 하는 이 말 속에 인간이 볼 수 없는, 성경이 말하기를, 성령의 감화 감동과 권능이 그 말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고 바울이 말하는 이것 이것은 인간이 감동받는 그것도 그 결과에 조그매 비추어지는 것이지 그것도 다는 아닙니다.
해방 바로 직후에 제가 서울에서 집회를 했는데 그때 집회로서는 서울서는 숫자가 제일 많이 모였습니다. 이천 명이 모였는데, 그때로서는 천 명 숫자라는 그런 숫자가 모일 때가 아니고 그 뒤에 한 삼사 년 지내고 난 다음에 한강 모래사장에서 그때 ○○○ 목사가 모운 그 모움이 그때 십만 명이 모였는데 제일 많이 모였습니다. 그만 지금은 차차 차차 고속 시대가 됐습니다. 고속 시대가 돼서 모든 것이 빠르기 때문에 이 모이는 양도 어떻게 빠른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벌써 십만 명 하니 '아이구' 놀랬지마는 그 뒤에 빌리 그래함 올 때에 오십만이 모일 때에 '아이구' 했는데 지금은 제일 많이 모인 것이 한국에서 얼마나 모였었습니까? 얼마 모였지요? 뭐 백만 명도 넘을 걸? 이거 도무지 세상에 대해서 무식하기 때문에 이거 탈이라. 신문에 났을 건데, 다. 뭐 얼마더라? 얼마가, 오백만 명이 모였다더나 뭐 여의도 광장에서, 오십만 명이 아니고 뭐 얼마가 모였다는 것이 그때 신문에 한번 났습니다. 그걸 기억을 안해서 그렇지.
이렇게 자꾸 이거 가속도로 이런데, 그때에 내가 뭐, 그때에 집회를 제가 가서 인도할 때에 그때는 마이크가 안 나왔소. 마이크가 있는 데는, 없는 거는 아니지마는서도 그것이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일반적으로서 보급이 안 돼 가지고 있었다 말이오. 이러니까, ○○○ 목사라 하면 아주 서울에서 제일 활동가로서는 첫째 갈 만한 그만침 유명한 사람인데 그 사람도 이 마이크를 준비를 못 했어요.
못해 가지고서 그 광장에서 이천 명이, 그때 모인 수가 이천여 명이라. 이천이 모인 데에 그때에 육성을 가지고서 그때에 그 집회를 끝을 냈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할라 하다가 지금, 내가 뭣에서 그리 나갔지? 예? 네, 고만 놓쳐 버렸어. 뭐, 그만 놓쳐 버렸어. 그만 그리 말이 나가다가서 외지로 나가 버려서 고만 성령의 감화를 고만 놓쳐 버렸어. 또 이제 새로 시작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하는 이 표시만으로서 전부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인간의 방언의 이 표시 속에 사람이 측량 못할 하나님의 영감의 그 세밀한 내용이 들어서 역사해야 된다는 것, 또 그 내용 속에 하나님이 직접 능력을 가지고서 역사해야 된다는 것,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에 대한 관심보다 그 속에 하나님의 계시 지식인 이 성경 지식에 관심이 그 안에 알맹이가 되고 주인이 되고, 이 세상 지식은 그 지식을 보호하고 있는 집이라면, 집으로 비유한다면 하나님의 계시 지식은 그 집 안에 내주해 있는 주인이 되고, 또 이 성경 지식이 집이라면 이 성경 지식 안에 영감이 안에 내주하는 주인이 되고, 영감이 집이라면 영감 안에 하나님이 직접 내주하셔 가지고서 역사하시는 거기에를 우리가 바라보면서 거기에서 오는 그 역사가, 거기에 오는 그 역사가 이리 통해서 나타나야 되지 껍데기에서 물론 돼 들어가고 위에서 나와야 되지마는서도 그 역사가 우리에게 역사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설교를 할 때도 신구약 성경 말씀 껍데기 속에 영감이 들어 있어야 되고, 영감 안에 하나님의 그 능력이 역사해야 되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 하나님 자체가 기도해야 되겠다 말이오.
얼마든지 그 속에 일로 되어 있는 이것을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으로서는 하나님이 이 성경 말씀을 선택해 가지고서 이 말씀을 증거해라 저 말씀을 증거해라 이렇게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증거하는 그 말씀이 나를 통해서 나와야 이 말씀이 모든 전능의 파괴 전지의 과괴 가지고 전지전능의 그 사랑의 건설도 되어지는 것이지, 만일 사람이 선택을 했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지마는 순전히 그거는 인간 말이 되고 마는 것이요 그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안한다면은 인간 말이 아니라 그거는 마귀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니,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마귀가 하나님 말씀 가지고 이용하는 거와 같은 이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 말씀을, 참 이사야 입에 넣어 준 것같이 내 입에 넣어 주시고 나를 통해서 말씀하셔야 그 말씀이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고 하실 수가 있지 내가 선택한다면 내가 들어 선택했으니까 그 말씀은 전지전능의, 인간을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인데 내가 그 말씀을 이용한다고 그 말씀이 나에게 이용을 당하지 안할 터이니까 그 말씀을 껍데기로 자타를 멸하는 그것만 되고 말지 아무런 실지의 생명 역사는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랍니까' 하는 것을 그것을 생각하고 자꾸, 그러기 때문에, 미리부터 준비해서 어느 말씀을 성경을 보고 뭐 참고서를 보고 들여다 보고 하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고, 하면 좋은 데 할 수 없어서 그때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그것을 정하는 것이 제일 난제고, 정하고 난 다음에는 언제 연구할 여가가 없고, 연구할 여가가 없는 그게 실은 보면 좋습니다. 연구할 여가 있으면 그 연구는 하나님이 많이 역사하시든지 적게 역사하든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거나 나타날 터인데 그거 아니면 전부 인간의 것으로서 파묻어 버리고 만다 말이오.
칼빈이 깨달은 그 깨달음을 그분들이 선진들이 깨달아 영감된 그 영감은 싹 잡아 빼버리고 이제 껍데기 찌끼가 되어 가지고 있는 인간이 기록 할 수 있는 문서 기록만 가지고 이것만 자꾸 고수하고 이렇게 문서 전도를 우리에게, 문서를 남겨 줬으니 이 문서를 깨달을 때에 어떤 영감이었던가?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었던가?. 그 사람과 그 영감을 그것을 생각해서 알라고 하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순전히 껍데기 이거 문자로. 뭐 영어로는 이렇다 뭐 무슨 말로 어데 번역으로는 이렇다 이 말에만 시비를 가지고 있지, 그 말을 할 때에 그 말하는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어떤 사람이 돼 가지고 있었던가? '성현이라야 능지 성현' 이라고 성현이라야 성현을 알지 성현이 아니면 성현을 모릅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경험합니다.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그 사람이 돼야 그거 알지 모르면 그 사람은 전부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 사람에게 역사한 그 영감은 어떤 영감이었으며 그 사람에게 영감하는 영감은 무엇을 보고 말했는지 꼭 그 말을 했지마는서도 그 말한 그 때에 그 사람의 깨달음이 어느 시야를, 어느 정도의 그 시야를 봤는지 어느 정도까지 깊이와 넓이를 봤는지 이런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순전히 자꾸 껍데기 외식으로만 나가기 쉽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 아침에도 지금 이런 말을 많이, 말을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말로 다라고 생각지 말라 그말이오. 문서 계시로 기록한 것은 육십 육 권의 조그만한 한 책이지마는서도 이 책에 말씀하기를 이 책 안에 내용에 담겨 있는 이 담긴 것은 그 성경 안에 내재하고 계시는 내제적 영감이 알려 줘서 알릴 터이니까 그는 내제적 영감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은밀 계시라고도 하고, 또 영감, 영감으로만 알려 주는 영감 계시라고도 하고 이런데, 이것이 그렇게 나타난 양보다 심히 크다. 그러면 내가 설교하는 것이 콩내끼만 하면 이 육십 육 권의 몇 억억만 배가 이 세상이 될 건가? 몇 억억만 배가 되면 이 세상에 가득 찰 건가? 이러니까, 내가 요 꿀밤 만한, 도토리, 꿀밤 만한 요만한 언어 표시를 하는 데에 하나님의 영감은 이 세상 만치 이 영감 속에 내주해 가지고 역사하실 수가 있다, 또 성신의 감화가 깨닫게 하는 것은 이렇게 복잡한 것을 깨닫게 할 수 있다, 이러니까, 이렇게 복잡하고 이렇게 세밀하고, 예수님이 사활에 성공하신 그 능력이 이 안에서 역사하고 이것을 우리가 알기나 알고, 그 세밀히 그 능력이 와 가지고서 역사하기를 이걸 우리가 소망하고 그런 줄 알고 이게 아니면 전부 외식이요 헛일이다, 우리가 믿으면 되고 바라보면 되고 의지하면 그대로 인식하고 행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인데 여기 대해서는 생각하지 안하고 그저 제가 입으로 가지고 사람들 속이는 말만 이래 줄줄해 버렸으면 다 됐다 이래 가지고서,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보지 안하고 지식은 인간을 반드시 교만케 합니다. 그 사람이 설교를 함으로 자꾸 교만해서 자신 만만하고 강하고 담대하고 뭐 이라는데 그이의 행함에 능력은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왜 그런데 왜 교회가 부흥이 안 됩니까? 왜 능력이 안 나옵니까? 왜 그게 아무 변화가 되지 않습니까? 말은 꼭 같이 하는데. 이 속에 알맹이를 무시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니까, 인간의 말로서 다라고 생각지 말고, 인간들이 감동받는 것으로서 다라고 생각지 말고. 말로가 다가 아니라 말 안에 무진장의 것이 층어리 층어리 들어 있고, 또 인간들이 감동받는 그 감동은 매우 적은 것입니다. 천하 사람이 다 감동받았으면 합격입니까? 아니오. 천하 사람이 다 감동을 하나도 안 받아도 당신이 감동되면 됐소. 당신이 감동되면 됐습니다. 우리의 하는 일이 당신에게 감동이 되느냐 당신에게 분개가 되느냐 하는 것을 여기에 말씀합니다. 당신에게 감동이 되느냐 분개가 되느냐? 내가 이렇게 했다마는서도 너무 상대방이 해 준 일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부족한데 이렇게 나를 대우했다 내가 이렇게 그 상대방을, 고생을 시켰다 못할 일 했다 내가 그분을 대할 때에 머리를 들 수가 없고 부끄럽고 미안하고 죄송하고, 이러니까 죄송하고 부끄러워서 그분이 나한테 한 것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니 부끄럽고 죄송하고 미안하고 낯을 들 수가 없고.
그러면 내가 그분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할까? 그분을 위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있을 때에 자기로서는 남음이 없이 이렇게 다 하는 이것이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상대방이 볼 때에 위로할 정도로 아, 너무 그렇게 자꾸 생각지 말라고. 그러니까 도리어 내 마음이 아프다고서. 너무 그렇게 생각지 말라고.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그것이 그분에게는 유일한 대접이 될 것이고, 또 그분에게 대한, 그분이 해 주신 그것을 내가 보존을, 잘 간수하는 것이라든지 거기에 대해서 내가 느낌이라든지 거기에 대해서 내가 하는 정신과 태도가 그것이 볼 때에 그저 너무, 그 상대방이 볼 때에 너무 이렇게 도리어 짐을 지웠다 너무 과격하다 너무 이래 놓으니까 마음이 블안하다, 은혜 입은 그자가 하는 것이 은혜를 입힌 시은자가 볼 때에 마음이 불안해서 동정이 되고 애처럽고 할 수 있는 이것이 그의 대접이요 이것이 인격과 인격이 교제하는 그 인격 교제인 것입니다.
이와 정반대로, 해놓은 그것을 얼마나 힘들여 해 놨는데 힘들여서 저희를 위해서 해 놓은것의 억만분의 일도 깨닫지 못하고 아주 한 그것을 업신여깁니다. '뭐 그까짓 쯤이야' 아주 업신여기고 무가치한 것으로 그렇게 여겨서 그에 대해서 아무런, 그 공로를 시은한 그 댓가를 받을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마는서도 시은에 대해서 알아주지 안하고, 거기에 대해서 알아주지를 안하고 알지를 안하고 인식하지를 안하고 업신여기면 섭섭할 것입니다. 섭섭할 것이오. 또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인정을 안할 뿐만 아니라 업신여기면 처음에는 마음에 참 좋은 것은 '아, 너무 그렇게 마음 아프게 여기지 말아라.' '상한 심령을 멸시치 안한다.' 상하면 제가 세상 것 때문에 상한 것은 상하다가 뒈져야 되는 것인데 뭐 그걸 뭐 그럴 것 있습니까? 이렇게 '네가 그렇게 상심하지 말아라' 자꾸 그라니까 도리어 '아이구 네 안 그렇습니다.' 이러나, 그 속에 미안하고 죄송하고 하는 그것이 감사가 고만, 감사가 고만, 그것이 없어질 만치 감사가 나오다가 너무 생각하니까 죄송하고 미안해서 낯을 들 수 없어 상대방이 도리어 위로를 하고 도리어 마음에 안 됐고 하는 거기에서, 그게 정상인데 거기에서부터 차차 타락해 가지고서 몰라주니까, 몰라주니까 시은자가 섭섭하다가, 섭섭하다가 몰라 줄 뿐 아니라 아주 멸시를 하니까 그 시은자가 좀 마음에 좀 분하다가 분개한 것이 더 심해가지고서 마음에 괘씸해서 복수하기까지, 복수하기까지, 원수로 삼아서 복수하기까지, 시은자가 그에게 대해서 복수하기까지 타락해 내려갔으니 어느 정도인가? 그러면 우리가 당신이 우리에게 베푸신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당신이 나를 동정할 수 있는, 그 동정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당신이 나를 동정한 수 있으며, 당신이 나한테 시은한데 대해서 오히려 마음에 동정이 되고 무엇인가 좀 못해 줘서 마음에 원통해 더 해 줄 수 있는, 더 해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하는 그 방편이 무엇일까? 그분이 나에게 은혜 베푼 것을 후회하지 아니하시고 마음에 만족히 여길 수 있는 그 방편이 무엇일까? 그분이 섭섭하게 생각하실 수 있는 그런 방편이 무엇일까? 그분이 마음에 참 섭섭함이 심하면 마음에 분한, 분한 마음이 생기게 하는 그 방편이 무엇일까? 이제는 원수로 삼아서 '이놈' 하고서 복수하고 소멸할 불을 가지고서, 소멸할 블을 가지고서 소멸을 하려고 당신이 이제는 원수를 갚고 공평되게 심판을 하려고 하시는 그렇게까지 시은자가 되어지는 그것이 은혜를 입은 자의 태도에 있는, 태도는 그렇게 자극이 강하지 못할 것이고, 태도보다도 그 안에 마음, 마음보다도 정신보다도 그이의 전 인격이 어떻게 되어지는, 인격이 어떻게 되어져 있는 그 인격의 변질된, 인격이, 시은에 대해서 시은한 자의 그 인격이 그로 인해서 변질되고 변화돼 가지고서, 이 변질되고 변화된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것이, 그것이 우주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셔서 '돈 없어도 사라' '사라' 말씀하신 것인데, 우리가 여기에 본문에 보니까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그러면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것을, 이 모순 된 것같이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 자꾸 달리 해석합니다. 아, 주님께서 나의 전부,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완전히 담당했습니다. 이 담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공지성에서 담당했습니다. 거기에는 다시는 변동을 못 합니다. 지성지공에서 완성했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의 공심판 문제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그 멸망 가운데서 오만 것 다 당신이 대신하셔 가지고서, 대신하셔 가지고, 대신하는 데에는 주님이 대속에서 피흘렸으면 이 피는 잘못된 것의 값을, 댓가를 받은 것인데 잘못된 것이 어느 정도 잘못됐는가? 하나님의 온갖 속성에 대해서 잘못된 것,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잘못된 것 하나님의 모든 소유에 대해서 잘못된 것 온갖 잘못된 것이 많이 있는 어떤 잘못됨에서 이 댓가가 어떤 댓가가 있는데, 어떤 잘못됨에 어떤 댓가가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형벌이 있는데 주님이 이것을 하셨다는 그것을 우리가 연구하는 것은, 먹이고 입히고 다른 것은 문제없는데 그거 연구하는 것이 당신을 연구하는 것이요, 그것을 알아서 느끼고 마음에 그로 인해서 내 자체가 변화되어지는 그것이 당신을 대접하는 것이요 아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아무나 느끼지 안하고 이것을 팔아먹을 줄만 알고 이걸 몇 가지 알아 가지고서 팔아먹어서 인간들이 감동받고 인간들이 됐다 하니까 이것으로 만족하니까 당신은 지금 이 외식에다 배척을 당하고 마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렇게 해서 당신이 내기에 어떻게 한 그 면을 내가 생각하고 생각하고 해서 그 면에 대해서 내가 느껴진, 깨달아지는 것 깨달아지고 난 다음에 실감적으로 내가 느껴지는 것. 느껴지고 나니, 느껴지고 나니 달라집니다. 아, 나는 평안한 줄 알았는데 이제 여기에 가, 보니까 나는 평안한 줄 알았는데, 그 밖에 공산주의자가 지금 포위해 가지고서 독침을 가지고 무기를 가지고 포위해 가지고서 죽일라고 지금 딱 포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몰랐을 때는 얼굴이 평안했는데 알고 나면, 그걸 알고 나면은 당장에 그 안색이 송장 안색같이 완전히 변색이 될 것이요 다 피부도 변할 것이요 색도 변할 것이요 사람도 변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당신이 나에게 대해서 행하신 그 행하심이 그것보다 내가 어떤 무엇이 됐기에 당신이 이런 댓가를 내지 안하면 안 됐는가? 내게 있는 그것을 깨닫고 그의 내신 시은의 댓가를 깨닫고, 이라고 보니까 내 자체가 거기에서 녹아서 변질되는, 변질되는 것이 변질되는 이것이 뭐이냐? 성화입니다. 변질되는 것 이것이 당신을 대접하는 것이요, 이래서 당신이 나 위해서 은혜를 베푸신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감동되는 그 강도 이것이 점점 자라가는 것이 그것이 우리가 깨달아가는 것이오.
요한이가 밧모 섬에서 주의 얼굴이 해와같이 비친다, 태양 빛 말하는 것 아니오.
그 주님의 행하신 것이 자기에게, 행하신 그걸 가지고 깨닫고 보니까 자기는 기절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것이 뭐이냐? 사도 요한이 최고로 은혜를 받은 때요 귀한 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줄이 끊어지고 밧모 섬이라는, 귀양가는 그것이 세상 줄이 끊어진게 좋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걸 잠깐 체험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끊어지고 없어지고 함으로써 똘똘 세상적으로 고독해지고 세상적으로 가난해지고 세상적으로 완전히 죽은 자 되어지는 그것이 당신으로 부요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죄가 깨달아지고, 당신이 내게 은혜 베푸신 그것이 내기에 깨달아짐으로 내가 변질되는 것, 깨달아짐으로 내가 변화된 요것이 당신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줄줄하면서 아무런 변화 되지 안하고 아무 깨달음 없고 아무런 변화 되지 안하고 고게 대해서 감동되지 안하고 아무런 자기가 변하지 안하고 요 무서운 흉측한 옛사람 요 악독을 가지고 있는 그자가 하나님을 노여워 하시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릴 것뿐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깨달아져 느껴지는 것과 자기가 이 느껴지는 여기에서 이제 당신이 대속해서 주신 그것을 자기가 보존하는 그일에 대해서 또 그를 보존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일에 대해서 당신이 나 위해서 이렇게 했으니 내가 당신 위해서 하는 데는 당신이 나에게 베푸신 이 은혜를 보존하는 것이 당신 위함이요, 나 위해서 하셨으니 내가 당신 위해서 해야 될 수 있는 그런일을 당할 때에 당하기를 필연적으로 기다리게 되고 당했을 때에 자기의 모든 것이 애껴지지 안 하고 어느 정도 애껴지지 안하고 다 기울여지는 그것이 어데서 나온 거냐? 그것이 당신의 은혜를 깨달은 고 양 만치 자기가 변화 될 것이요 변화된 것 만침 당신에게 대해서 갈급해서 그를 위해서 살고도 부족해서 자꾸 갈급 갈급으로 이래되는 그것이, 요 둘이, 모든 죄악이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죄악이 되는 것이고 모든 죄악이 하나님의 분노외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거 뭐 시간 적으니까 다 못해. 이제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공심판에서 죽은 자를 이렇게 큰 힘 들여서 구원해 가지고서 일단 끌어다 내 놨습니다. 일단 끌어내 가지고, 일단 다 끌어 내다 놨습니다. 끌어 내다 놓고 이제는, 이제는 거기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는 성령 줬고 깨달을 수 있는 성경 줬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이기 때문에 어떤 형이 있는 것을 어떻게 힘 들여서 대속한 것을 자꾸 알려 주는 것이 성경이요 알려 주는 것이 영감입니다. 이렇게 자꾸 알려 주는데 거기에 대해서 감사함이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철없다고 할 것이요 마음에 이래도 그걸 모르니까, 그 은혜를 모르니까 그 은혜를 시은자가 그 은혜 베푼데 댓가를 받을라 하니까 그 은혜를 모르고 있으니까, 그 은혜를 가치를 모르면 그 은혜를 짓밟아 버리고 은혜를 팽개칠 거라 말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큰 힘 들여서 저희에게 해 준 것을 이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세상에 있는 조그만한 요런 것 만치도 가치없이 여기니까 이것을 팽개쳐 버릴 것이기 때문에 애가 터졌을 것이고, 애가 터질 것이고, 그 다음에 그게 심해지면 마음에 섭섭함이 나오실 것이고, 섭섭함이 나와서 심해지면 분함이 나오실 것이고, 분함이 나오셔 가지고 나중에 극도로 되어지니까 원수로 취급하고 '이제는 내가 너를 원수로 삼아서' 왜? 피를 부정한 것으로, 성령을 욕되게, 짓밟고,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이라니까 이제 밟히고 그라니까 차차 차차 당신도 분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별분 아니오. 근본이요 완전자시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도 차차 차차 섭섭합이 심해지면 분해집니다. 분해짐이 심해지면 미워집니다. 미위짐이 심해지면 그 상대를 멸하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가서에 보면 하나님은 시기자 중에 제일 근본 시기자요, 근본 시기자요, 근본 시기자가 하나님이요 미움의 근본자가 하나님이시요? 미움에 극심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감정, 감정에 대해서 제일 근본되신 이가 하나님이시요, 또 모든 데 대해서 분개함을 가진 것의 근본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은 미움이라 이랬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질투라 이랬습니다. 그랬으니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이렇게 데려다가 사심판에 놔 놓고 또 가르쳐서 '네가 이런 이런 해 가지고 큰 멸망에 빠졌는데 이래 됐으니까 조심해라 조심해라.' 자꾸 가르치고, 그러면 제가 자체가 얼마나 비참한 걸 가르치고 비참한데서 예수님이 대속한 것이 어떻다는 것을 가르치고, 대속에서 이렇게 영광의 구원을 내가 줬기 때문에 다시는 놓지 말라는 것을 자꾸 가르치고, 암만 가르쳐야 이거는 소 귀에 경 읽기지 소용이 없습니다.
없을 뿐딴 아니라 그게 또 제가 교만합니다. 제 중에 또 교만하요. 또 교만할 뿐만 아니라 그게 또 하나님을 업신여깁니다. 짓밟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했으니까 요 '밟고'는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해석을 해요. 어떻게 하면 밟는 것인지, 또 성령을 욕되게 한다 했으니까 또 요게 어떻게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인지, 정결케 하는 그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으니까 요것도 여러분들이 해석하면 요거 나올 수 있어요.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당신이 이제는, 공심판에서는 끌어 왔기 때문에 공심판에서 일단 끌어온 것을 지옥에 보낸다는 말 아닙니다. 지옥에 보내지 안하지마는서도 요렇게 끌어 나왔는데 요 구속을 느끼지 못하니 그 은혜를 보존을 못하는 자요. 요 구속을 느끼지 못하시 은혜를 전파하지 못할자요, 이 구속을 느끼지 못하니, 그 은혜를 보수하는 데에 여러 가지 애로 있으니 어느 정도 이 은혜에 대해서 보수의 힘을 쓰겠느냐, 어느 정도 이 은혜에 대해서 또 전파를 하면서 기념하겠느냐 '내가 올 때까지 기념하라' 말은 뭐 기념하느냐? 피 기념하라 말입니까? 주님의 이 공로를 기념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공로 이것을 나타내라 그 말입니다.
이러니까, 그것을 안하니 다시는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꼐서 공심판에서는 그것을 다시 철거하다는 말 아닙니다. 공심판에서는 당신이 다 대속한 것을 그대로 뒀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지마는서도 공심판에서 면제해 나왔지마는서도 이 사심판에서, 이 안에서 그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안하고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다시 당신이 행한 대로 갚는다 이랬습니다. '행한대로 갚는다.' '선악간에 행함을 따라서 갚으신다. 우리가 다 그렇게 받는다' 이래 말했기 때문에 십자가의대속으로서는 무슨 죄의 문제가 문제가 없는데 다 사죄 받았는데 사죄 받았는데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한 요것을 여러분들이 숙제로 생각하고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자녀들을 원수로 소멸할 불로 지금, 심판으로 이래 계시는 이것이 뭐인가? 그것을 좀 생각해서 그 면을 깨달으면 강퍅을 안 부릴 겁니다. 그 면을 깨달으면 강퍅 못 부립니다. 그러면 깨달으면 교만을 못 부립니다. 절대 이 진리를 배반해서 교만해서 뭐 있다고?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있다고? 땅의것 썩을 것은 많이 있는지 모르지만 하늘의 것은 아무것도 없지마는서도 뭘 가지고 자랑하고 뭘 가지고 교만하고, 그거 토끼 꼬리 같은 것 짤막한 아주 가치 없는 것 그거, 선천적으로 제가 총명이 있다 뭐이 있다 하는 그까짓 것 아주 그것 하나님에게 그런 거는 아무런 하나님에 대한 것에 대해서는 대용품이 못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요번 공회에서, 이 속죄함을 받지 못할 죄라, 또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죄라, 그리스도의, 주의 피공로를 이렇게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죄라,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라, 그 죄가 뭐인데? 그 죄가 알고 짓는 죄입니다. 그 죄가 알고 짓는 죄. 이러니까, 우리가 알고 짓는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많이 있습니다. 알고 짓는 죄, 이 죄는 속죄함을 받지 못해. 하나님의 아들을 밟았소.
뭣 때문에? 그거는 공심판적인 것이 아니오. 당신은 시은자 우리는 수은자인데 은혜를 입은 우리들의 태도가 당신을 섭섭하게 노엽게 했다 그말이오. 당신을 노엽게 했으니까 당신을 섭섭하게 하고 노엽게 하고 행동. 고 행동을 우리가 꼭 고쳐서 이제는 하나님의 노가 풀어져야 되고 하나님의 섭섭이 풀어지고 하나님께서 분이 슬그머니 풀어지고 '제가 그러니까. 뭐 인간이 연약하니 그럴 수 있지 않나?' 하고서 당신이 마음이, 분노가 변해서 긍휼로 바꾸어지는, 바꾸어질 수 있는 고런 우리의 정신과 태도가 있어야 되지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그저 주여 주여 하고 바라 보지만 참 하늘나라에서는 비참하고 불쌍한 자 되고 맙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십분 기도 후에 뭐 여기에서 다 그거기도 할 수 없으니까 그저 기도 제목만 우리가 간추려 가지고 가서, 이거는 있을 동안 해서, 하나님 앞에 큰 사랑을 받은 자인데 큰 사랑을 받은 자가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큰 미움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큰 미움을 받는다는 것.
그러기 때문에, 이 기독교는 감동이 아니면 소용없어, 감동 없으면, 감동 없으면 아무 소용없어요. 감동은 겉으머리 말만 가지고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거지 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감동이 속에 있어야 되고, 자기의 전 인격의 그참 이 피부가 노래질 만침, 피부가 새파래질 만침, 이렇게 자기의 육이 변질될 만침 감동되고 그 마음이 변질될 만침 감동되는 이 감동이 없으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실감이 없어요. 그 실감이 내가 주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고, 그 실감이, 주님 앞에 머리 들 수 없는 요 실감 요것이 자기의 전 생애를 자유 할 수 있는데 요것이 없으면 다 외식이요 헛일입니다. 스스로 속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