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4 07:52
경건
1979. 7. 16. 월새
본문: 야고보서 1장 26절-27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엇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경건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위주로 해서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이 이것이 경건입니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 또 행동하는 이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이 스스로 이렇게 하려고 해서 껍데기에서 하는 것이고 하나는 자기 겉에서 하는 것 보다 자기 안에서 하는 힘이 더 강해서 겉에 있는 것과 싸우는 이런 경건 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속에는 하나님 위주 하나님 중심 그것이 없는데 자기 밖에서 자기 마음 자기 생각 이것을 가지고 아무래도 내가 하나님이 중심으로 하나님 위주로 살아야 되지 하는 이렇게 밖에서 일어나는 운동이 있고 예배 볼 때에 말씀 못 듣고 자부는 그것은 꼭 마귀가 들어가 속에 도가 안 들어갑니다.
안들어 가기 때문에 믿어도 제대로 믿어야지 우리 교회 지금 잘 믿는다고 하는 권찰들이나 집사들이나 이런 분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그 사람 그 행동하는 것 보면 잘 믿는 사람이고 또 사람에게 실수 없고 이렇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속에서 역사 하는 그 역사가 없는 사람이면 암만 믿어도 변화가 없는 것이 일 년 믿어도 그대로 이년 믿어도 그대로 삼 년 믿어도 그대로 사람들에게 실수 없고 사람들에게 잘하지마는 속에 영감의 작용이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런 사람 여 더러 있어요.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은 뭐 변화가 없습니다. 실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속에 영감의 충격이 없소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보면 예배드릴 때에 조는 사람입니다. 예배드릴 때에 예배드리면 그만 졸아 조는 그런 사람들은 보면 그게 없어요. 여기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경건 하나님을 위하는 그 생활하는 것을 가르쳐서 경건이라 이라는데 하나님을 위하는 그 생활을 하되 자기가 이렇게 할라고 애를 써서 하는 종류가 하나 있고 자기가 그렇게 할라고 애를 써는 것보다도 속에서 그 본능적으로 그것이 나와서 역사 하는 것이 있어서 자기 이성 비판이나 자기 마음이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 그것보다도 그 속에서 뭐라고 해석을 못하겠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 세력이 강해서 오히려 속 깊은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 그 세력과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이 세력과 이 두 세력이 싸우는 것을 자기가 볼 수 있습니다. 그 두 세력이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 살아야 되겠다 하는 이 소원하는 이 마음도 없고 자기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강한 것이 이렇게 보여 집니다. 자기가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하는 이 생각 이것은 그만 환경에 따라서 변해져서 형편에 따라서는 그렇게 할 수 있나 자기 마음은 변하고 자기 생각은 변하는데 그 속에서는 뭐인가 그렇게 변하고 보니까 변화고 보니까 불쾌해집니다.
또 변하고 보니까 당장에 똑 채소를 뜨거운 물에 삶아 놓으면 데쳐져서 숨이 죽어지는 것처럼 그만 기분이 탁 꺾어지고 죽어지고 활기가 없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역사가 있는 것을 여러분들도 볼 터인데 그 세력이 어느 세력이 강하냐 누구의 것이 강하냐 남의 것이 강하냐 이런데 어떤 사람은 안에 것은 전혀 없고 외부의 것 그것이 들어서 순전히 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이 외부의 것이 약해서 조심도 약하고 이성 비판이라는 그것도 약하고 또 그 사람의 그 마음도 약하고 이래서 마구 그 생활의 실수투성이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엉망진창의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생활을 해도 그 속에서 나오는 역사로 인해서 그라고 넘어지고 나면 또 가책을 받고 아주 기가 팍 죽어지고 또 고통이 되어지고 안에 있는 그 작용이 강하지를 못해서 겉에 있는 세력으로 인해서 아주 불의 길을 걸어가도 그 길을 걸어가도 가면은 가고 난 다음에는 기가 꺽어지고 갈라고 하면은 기운이 빠지고 이래가지고서 항상 고통 가운데 있는 그런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불의의 길을 걸어가도 자기의 속에서 나오는 어떤 그 역사가 자기 이성 비판과 자기 마음과 싸우고 있는 그 역사 없어서 역사가 없어서 외부에서도 이것을 행하면 이 사람이 되버리고 저것을 행하면 저 사람이 되버리고 아무런 불의의 길을 걸어가도 그 속에서 나오는 가책이 없고, 또 의의 길을 걸어가도 자기 속에서 나와 가지고 이 의 이것은 의의 길을 걸어가 놓고도 또 이것이 잘못됐다 해서 항상 자기의 마음과 생각과 그 이성 비판보다 위에서 이것을 책망하고 이것을 눌러고 이것 보다 더 깨끗한 그 주장자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떳는데 그 전에 김해순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생활은 우리 교인들 중에 제일 더러운 생활이었습니다. 제일 실수 많고 그러나 그 사람을 내가 말하기를 어떤 그 아주 사람 보기에 얌전하게 믿는 그 사람 보다 그 사람이 앞서 있다 하는 그것을 제가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한 20년 전이요 이제 일반 제직들은 거 무슨 말인가 모르는데 그 사람은 중생함에 대해서 속에서 하나님이 그 안에서 역사하는 그 역사가 착수를 했고 연결을 했고, 하나 그 사람은 아무 그런 것이 없어,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다 좋아하고 얌전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 속에 역사가 없어, 이러니까 그 사람은 나중에 속화 될 때에 어디까지 속화 되는냐 어데까지 가는데 까지 갑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자기 마음이 마음이 주장을 하고 있고 자기 이성이 주장을 하고 있지 자기 속에 자기 아닌 다른 세력이 그 주장을 주장하고 있는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이라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데까지 빠져들어가도 상관이 없고 어디까지 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런 거기에서 자책이나 가책이나 무슨 반성이나 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기 경건은 두 가지 경건을 말했는데 그 헛된 경건 헛된 경건은 자기 아무리 하나님 위해서 산다고 해도 자기 속에 자기 마음 보다 자기 생각 보다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서 산 생활 보다 그것보다 더 깨끗한 능력과 깨끗한 자가 속에 있어가지고서 큰 옳은 일을 했는데도 하고나니까, 또 하 그것 내가 그래서 잘못됐다 속에서 나는 실큰 깨끗하게 했는데 속에서 그것 잘못 됐다하는 그 책망이 나오고 그 깨달음이 나오고 그 수정이 나오고 또 잘못한데 빠져서 여러 사람이 삐뚤어진데 빠져가지고 모두 삐뚤어진데 빠져가지고만 거기서 헤엄치고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는데, 빠지고 난 다음에 또 속에서 자기 이성과 자기생각이 완전히 속화되 버렸는데, 그 자기 속에서 어쩐지 꽤꼬롬하고 안됐고 마음에 불쾌하고 기분이 나빠지고 그 자기에게 기가 죽어지고 하는 그런 작용이 속에 있어가지고서 다시 거기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보다 자기 안에서 더 깨끗하고 옳은 그 주장이 있어가지고 그 안에서 있는 세력이 자기 이성 비판 보다 더 깨끗해서 자기 이성 비판을 이기지 못해도 못해도 이성 비판과 이놈이 들어서 저하고 싶은 대로 갔지마는 속에서 이기지 못해서 그리로 가니까 가기는 갔지마는 그 속에서 아니라고 자꾸 안할라고 속에서 주장하고 이렇게 반대하는 이 세력이 있고, 이러니까 어떤 때는 자기 이성 비판이나 그런 지식으로서는 이것이 옳다 이것이 좋다 이랬는데 어쩐가 자기 속에서 그것이 불쾌해지고 그것이 기분이 나지지 안하고 좋지를 못하고 이래서 자기가 생각하기를 이 일은 괜찮은데 왜 이럴까 내가 잘못 생각 했나 암만 잘못된 생각이라 해도 속에서 아니라는 것이 자꾸 기분이 나오고 무엇인가 잡을 수 없는 그런 것이 나와가지고서 그 불쾌해진다 말이요.
그런데 나중에 오랜 후에 보니까 그것이 아주 망령의 대실수라는 것을 나중에 발견하게 된다 그거요 그러기에 다시말하면 우리 그 영은 따로 있는데 자기 마음 자기생각 자기 이성 비판 이것 보다 이것 보다 더 깨끗하고 참되고 옳은 것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 있고 자기 안에는 그게 없어 자기 안에 것 보다는 자기 속에 있는 그것 보다는 자기 생각이 그래도 더 깨끗하고 자기 마음과 이성 비판이 더 깨끗해서 속보다는 자기가 생각하고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이 더 깨끗하고 깨끗한 사람이 있고 자기가 아무리 비판해도 생각해도 그것보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더 깨끗하고 요것으로서 이 하나님께 속하고 아직까지 계약에 속한 사람 요 참된 경건 헛된 요 경건 요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자기 이성 비판이 그대로 다 했는데 이성 비판대로 했는데 그 속에서 무엇이 그래도 이성 비판대로 했는데 깨꾸름하고 뭐인가 마음에 안정이 안되고 안심이 안되고 불쾌해서 안되요 뭐인지 모르는데도 그런 것 있고, 또 어떨 때는 자기 마음에 비판대로 다 했는데 그 속에서 틀렸다 실컨 설교하고 나니까 속에서 책망을 합니다. 실컨 하나님의 뜻대로 땀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는데 행동했는데 그 속에서 잘못됐다는 것이 발견됩니다. 왜 이것을 이리 했느냐 하는 잘못된 것이 발견됩니다.
이래서 자기 겉보다 속이 깨끗한 사람이 있고 속보다 겉이 깨끗해서 자기 밖에서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 이거해야 되겠다 이성 비판도 나오고 주장도 나오고 나오는데 그것이 다라 그것이 전부라 그것이 앞에 있어 그것을 책망하는 것이 자기 속에 없고 그것을 수정하는 것이 자기 속에 없고 그것에 대해서 이면이 틀렸다 하는 것을 안에서 지적해 주는 것이 자기 속에 없는 사람이 있다 말입니다. 그것은 헛된 경건입니다.
여기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하며 자기 혀를 제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가 말을 해 놓고 말을 해 놓고 말도 해놓고 실컨 조심해서 말했는데 또 나중에 보니까 이말을 이렇게 할 걸 잘못했다 실컨 양심대로 자기는 말을 했는데 아 요말을 내가 했고 하나님이 하시는 거기에 피동적으로 하지 안했구나 요 작용이 자기 속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말한 것이 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자기가 무엇이든지 말한 것에 대해서는 힘끗 생각해서 좋은 것을 말한 것이면 그 말을 수정해주는 것이 속에 없다 그말이요. 그것은 미달이라고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없다 그말이요. 또 자기 마음을 속이면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러면 껍디기 행동하는 것이 껍디기 행동하는 것이 자기 속에 있는 그것과 일치가 되지 아니하고 그러면 자기 마음은 속에 있는 마음은 이런데 겉으머리로 이렇게 행동을 한다 말이요 말하자면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속 보다는 겉이 깨끗하다 그말이요 속 보다는 겉이 깨끗해 자기 속 보다는 겉이 깨끗한 이 사람이 있고, 겉 보다는 속이 깨끗한 사람이 있는데 이런데 속 보다 겉이 깨끗한 겉 보다 속에 깨끗한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은 이것은 다 경건이 거짓뿌리기 때문입니다.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의로움이 없는 경건은"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어떤 것이냐 곧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고 요 고아와 과부라 그 말은 자기보다 약자입니다. 자기보다 약자 자기보다 그 약자를 돌아본다 그러면 이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생활 중에 최고의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 생활 중에는 최고의 생활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본다 하는 것은, 고아가 밥을 못먹으니까 밥을 주고 과부가 옷이 없으니까 옷을 주고 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겉디기에 속하기는 속했지마는, 자기보다 못한 그에게 자기보다 더러운 자기보다 더러운 그 자는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더러운 그 자를 더러운 것을 제거하지 아니하고는 견디지를 못하고, 자기만치 깨끗지 못한 자를 그걸 어떻게 충동을 시켜도 자기 보다 깨끗지 못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보다 더러운 것을 보지 못하고, 이래서 자기보다 더러운 것을 그 자기 만치라도 더럽도록, 자기만치라도 더럽도록, 이제 자기 보다 더 더러운 것을 자기만치라도 더러운데 나오도록, 자기보다 깨끗함이 없는 자를 자기만치라도 깨끗하게 하려는 이것이 본능적으로 나옵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이 이런 죄를 불의를 보고는 견디지 못해서 입에서 말을 합니다. 말을 하고 난 다음에는 욕을 얻어먹고 주박히고 이라고도 그것을 안하고는 견딜 수 없는 그것이 뭐이냐 속에서 나오는 작용이라 말입니다.
또 저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만치를 못하면서도 자기보다 하나님과 더 동행 못하는 자를 보고는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이 속에서 나온다 말이요 이것이 자기가 자기를 주장함이 아니고 자기 안에 하나님이 주장하셔서 그의 역사에 피동된다는 그것입니다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자기는 세상을 따라 갈라하는데 자기 속에서 세상을 따라가고 보니까 속에서 역사하는 것 보니까 이것이 네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는 세상으로 나가고 자기 속에는 세상으로 나간 것을 이제 충고를 하고 경고를 하고 책망을 하고 이대로 세상으로 지금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작용이 자기 속에서 일어나 그 모든 생활이 자기 아닌 자기로서 자기 속에 이것도 잘못하면 오해하는데, 자기 아닌 자기 그것이 세력이 있어 가지고서 자기가 싫컨 한 것을 책망을 해서 자기가 거기 수정을 받고, 이래하는 그 다시 말하면 옛사람 자기로 이렇게 생활을 하고 있는데, 옛사람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데 그 자기 아닌 자기 참 자기입니다.
자기 아닌 자기 그것이 들어서 속에서 자꾸 종알거리고 뒤에서 티를 떳고 자꾸 어둥거리고 충격을 주고 자꾸 이렇게 하는 그것이 있다 말이요 그러니까 자기에게 싸움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데 분명히 자기에게 두 자기가 있어서 한 자기는 세상과 가까워지는데 한 자기는 세상과 가까워지는 것을 충고 하고 있는 그런 역사가 있으면 그 사람의 경건이 참된 경건이라 깨끗한 경건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전부가 이것을 가르치고 있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말은 이제 포도나무에게서 나온 그것이 가지의 것이지 딴 것은 아무리 금덩어리를 붙여 놓아도 포도나무는 아닙니다. 포도나무 가지에 보석을 붙여 놓았으면 포도나무 가지는 뭐 얼마나 가치가 있겠소 그렇치마는 포도나무 가지는 아니요. 포도나무에게서 나온 것만 포도나무 가지입니다.
이제 하나님에게서 나온, 거기에서 나온 이것만이 성화를 이루고 영생에 속한 것이요 참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작용이 속에서 생겨진 사람은 동역을 찾습니다. 이 작용이 속에서 생겨진 사람은 아무데 가도 그만 그대로 속화되지 않소. 속화가 되나 속에 무엇인가 작용이 있어가지고서 자기가 몰라도 불안 가운데 그 속에 살면 그 만큼 불안하고, 뭐인가 자기의 행동하는 그 현실에 자기 생활과 마찰되는 역사가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반성이 있을 수 있고, 그 사람은 회개가 있을 수 있고, 그 사람은 바른 길을 찾아서 돌이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가 속에 없이 순전히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이성 비판 그 사람의 진리의 평가 이것이 들어서 이것으로만 가지고도 신앙생활하는 요것은 순전히 그 근원이 사람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인본신앙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근원이 되 근본이 되가지고 하는 사람은 인본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있고 아무리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더럽게 해도 신본 신앙생활이 있소 하나님이 그 근본이 되어서 하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있는데 요 하나님이 근본이 되어서 신앙생활하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무식해도 어디가도 빠지면 헤어 날 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죄 가운데 깊이 빠져도 죽는 날 까지 빠지지 않습니다.
빠져도 그 사람이 언젠가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도 모르게 속에 있는 작용이 그 사람에게 자책을 주고 주고 자책을 주고 그 사람에게 무슨 무엇인가 이제 형언할 수가 없지마는 그 자리가 불안하고 불만하고 그렇게 해서 있을 수가 없어 돌아서는 사람입니다 이렇지마는 속에 이 하나님으로 인한 이 작용이 없는 사람은 여기에 가면 이 사람되고 저게가면 저 사람됩니다. 이 세대되면 이 사람되고 저세대되면 저 사람되고 그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환경과 주의에 따라서 가는 거기에서 뒤돌아 보는 것이 없습니다. 환경과 주의에 따라서 그만 그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그러기에 그 사람은 어데서든지 만족하고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실은 예수 믿는 사람 많지마는 많지 못합니다. 많지마는 교회가 많지마는 그렇게 많은 것 아닙니다. 만일 그 사람에게 신본의 것이 있으면 아무리 천인 만인이 그 인본의 것을 좋다고 그 속에 가도 그 사람은 뭐인가 자기 속에 작용이 있어서 불만 불평으로서 마음에 불편해서 그 자리를 만족을 하지를 못하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지를 못하고 뭐인가 갈급해서 찾는 것이 있습니다. 갈급해서 찾는 것이 있소 그러나 속에 그 신본의 작용이 시작되지 안한 그런 사람은 그만 아무데 가도 그 사람이 공산주의라도 민주주의라도 그 자리서 그만 처음에는 얼마동안은 그렇치마는 그 자리서 만족하요 그 사람이 아무리 독하게 교회나 그 단체 속에 들어가도 처음에는 좀 이색진데는 있지마는 차차차차 갇히면 거기에서 그만 머리를 숙이고 거기에 일치가 되어지고 거기에 이색됨이 없고 이질됨이 없기 때문에 그만 거기서 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본의 작용이 있는 사람은 거기가서 처음엔 좋고 맞았는데 있어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아무래도 견데지를 못하고 아무래도 되지 못해서 무엇인가 자기에게는 갈급이 생겨지는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여기에 세속에 물든다 그 말은 속화된다 그 말은 세속이라 말은 이 세상 풍속이라 말인데 이 세상에서 움직이고 나가는 그것을 말합니다. 세상 살아 있는 세상 것을 말합니다 기독자들이 세상을 떠나서는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지 마는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노아 홍수의 노아의 배가 그 홍수가 아니면 노아가 성공을 못합니다. 홍수가 아니면 노아가 성공을 못하요 노아 보다 더 강한 자가 더 많소 그 홍수 때문에 노아가 성공을 했습니다. 홍수 때문에 노아가 성공을 했지마는 그 노아의 방주가 홍수를 떠나도 실패 홍수 속에 빠져들어가도 실패 꼭 이와 같습니다.
기독자가 이 세상을 세상을 떠나서 염세가 되든지 세상을 떠나서는 기독자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안 이루어집니다. 불교는 염세주의로 산중을 찾지마는 기독교 자꾸 사람 많은 도시를 찾습니다. 세상을 떠나도 구원이 이루어지지 안하지마는 세상 속에 빠져 들어가도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접하되 세상을 접하되 접하면 접한 그 결과가 어찌되는냐 접한 결과가 어찌되는냐 접한 그 결과가 내가 세상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그 결과는 다문 자기 역량있는 대로 다문 얼마라도 세상이 자기에게로 끌려 왔지 세상이 자기를 따라 왔지 자기가 세상을 따라가지 않는 요것이 죽고 사는 길인 것입니다.
세상을 접하되 자기 힘대로 다문 얼마라도 세상이라 하는 것이 한 뿌스러기 하나라도 세상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자기에게 끌려 왔지 자기가 세상에게 끌려가지 않는 요것이 산 자요.
자기가 아무리 세상에서 부흥 운동을 하고 아무리 개혁운동을 하고 진리 운동을 한다고 해도 자기가 세상을 접했는데 세상에게 그 결과가 다문 얼마라도 끌려갔느냐 세상을 하나님 앞으로 끌고 왔느냐 여기서 죽고 사는 것은 판명납니다.
어제 우리 하기 아동성경학교에 대한 준비가 준비회가 있었는데 제가 오층에 있었습니다. 오층에 있으면서 그걸 듣는데 뭐인가 불쾌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그 복음성가나 그런데 있는 것을 찾아해라 찬송에 있는 것을 그때는 다른 것을 해라 이랬는데 내가 허락을 했는데 어짠가 불쾌했습니다. 속에서 내가 듣는데 내가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했고 또 그것을 내가 주장을 했고 이랬는데 오층에서 그것을 하는데 스피가로 다 나오니까 그 내가 들을 때에 뭐인가가 마음에 불쾌해서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견디지를 못해서 거 참 아무 험이 없는데 그라다가 나중에 마지막에는 그 노래에서 내게 확실히 발견이 되었습니다. 발견이 되어서 그래서 그것을 어제는 전기가 정전이 되어서 인타본이 안되서 전화로 할라고 해도 안되서 전화로 할라고 해도 전화가 안되서 할 수 없어 내려 왔습니다 내려 왔었는데 내려 왔어도 다른 것은 내가 말을 할 수가 없고 그 하나만 말해서 그것을 고쳐라 그 왕자 왕자 하는 하나님의 왕자라 내 앞에 있는 모든 것들아 다 물러서라 세상에서 별 앞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왕자라 하는 그런 뜻으로 하는데 그것은 가사가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반들은 나는 하나님의 공주라 남반들은 남학생은 하나님의 왕자라 이랬는데 여자는 하나님의 공주라 남녀를 구별해서 이라는데 하늘나라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그것이 없고 전부 하나님의 장자라 하나님의 장자 아닌 것을 하나님 나라에 못갑니다.
그런데 그 남녀로 갈라서 그라는 그것이 좀 그리 안해도 계집아 머슴아 뻣듯 그리면 그만 죄고 어제도 반사들 나가는데 저 보니까 반사 둘이 앞에 나가는데 거 예수 믿는 사람 아니요 순전히 그것은 계집아이들 놀릴라고 나오는 것이요 제게는 그것다 보입니다.
이런판인데 이래 놓으니까 교회에 이 청소년들이라 하는 것이 계집아 머슴아 어울리는 그 재미가 아니면 교회 나올 재미없습니다. 나올 재미가 없고 또 그 재미에 그 흥분에 일하고 움직이고 아라는데 미국서는 그 재미 아니면 안되고 그 재미로 싫컨 좋소 그 재미 그까짓 것 그 재미로 교회가 됩니까 하나님 때내버리고 교회가 다 타락이 됩니다. 미국에서 교회는 제일 미국에 깨끗한 교회가 무소속에 개 교회요 개교회가 미국 교회에서 제일 깨끗하고 그 다음에는 침례교회 그 다음에 장로교니 감리교니 하는 것은 형편 없습니다.
성결교니 이런데 할수 없이 내려와 가지고 말을하라고 내려와 보니까 뉴돈이라 하든가 뉴이하든가 하든데 이래하든데 나는 하나님의 ??? 이거 순전히 마귀역사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제 그것을 보고서 밤새껏 생각했습니다.
어찌되느냐 우리 서부교회에 주일학교를 세계에 제일 주일학교로 지금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제일 다른 것이 제일 다른 것이 뭐이냐 하면은 아동들의 비위를 맞추느냐 하나님의 비유를 맞추느냐 거기에 대해서 서부교회는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고 있습니다. 아동들의 비위를 싹 제한했습니다. 아동들의 심리가 이렇다하는 아동들의 심리를 생각지를 안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동들의 심리를 생각합니까 전부 하나님의 비위 하나님의 심리를 생각해서 이러니까 그래가지고 무슨 주일학교가 되느냐 다 말합니다. 어린 것을 하나님의 말씀만 근 한 시간 동안 자꾸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게 무슨 그래가지고 되겠느냐 아동심리를 이용해 가지고 시청각으로 시청각 이것도 거의 사실을 말하지마는 그 속에는 세상에서 하는 것이지 하늘나라에는 적입니다. 원수요 마귀역사입니다.
시청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의 감화에 맞으면 다된 것이라 그것 가지고 되는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그것도 인간의 힘에 능에 속한 것 아니요 이것 가지고 해서 다른데서 오면은 첫째 그것 말해줍니다. 예 일반 주일학교와 다른 것은 이것입니다. 제일 처음 이것입니다. 일반 주일학교에서는 아동들의 심리에 심리 연구에 주력을 하고 심리를 맞추기를 주력하는데 서부교회에서는 주일학교를 아동심리 그것은 생각지 않고 사람이라고만 인정하지요 하나님의 뜻을 연구하는데에 주력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맞추는데에 주력합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거기에 다르요 그래가지고 무슨 교회가 되겠느냐 이러니까 서부교회는 봉하다 그럽니다. 둘째로 틀린 것은 일반 주일학교는 아동들의 비위를 맞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동들의 비유에 맞게 이럴게 이야기를 만들어 가지고 동화를 만들어 이렇게 했지마는 서부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비유를 맞추어서 하나님의 말씀 꼭 그대로 가르쳐 나가고 있습니다. 요것이 첫째 둘째입니다.
그랬는데 내가 가서 그것을 해 봐도 이번에 하기 아동성경학교에서 유희라고 놀이 하는데 그 놀이 하는 것을 종전에도 그것을 나왔는데 차차 차차 처음에는 손벽만 치자 또 참 하나님과 관연 없는 찬송 그런 것 하지 안하고 거저 이런 놀이하자 이랬는데 이것이 차차 차차 그 변해져가지고서 이제는 가사는 하나님에게 맞는 가사지마는 이 가사를 가지고서 이제 율동한다고서 율동인가 뭐인가 한다고서 이제는 차차 주의해야 됩니다.
우리가 처음에 들을 때는 하 탄일 축하 할 때 강단에서 마구 남녀 합해 가지고서 딴 것으로 하고 무슨 춤을 추고 하는데 아이쿠 했는데 내나 이것이 차차 그리 갈 만한 것을 그것을 느껴졌습니다.
이래서 제가 그것을 밤세껏 생각할 때 자 이 찬송을 이렇게 가사를 가지고 하는 것이 나부터 회개를 해야 되겠다 하기 아동성경학교 이것은 하나의 절기 모양으로 이것이 한 습성으로 온 세계교회가 마구 운동하고 있으니 우리교회는 잠잠하고 있으면 안되니까 우리도 따라서 같이 그렇게 해서 이 아동들을 붙드는 것으로 하자 하는 이 생각을 가지고서 회개를 하고 합니다.
이것도 이매 다른 사람이 처음에 할 때는 이렇게 여름에 더운 더위에 주님을 생각하고 이 더운 제일 한 더위에 우리는 주님을 생각하고 주의 도리를 배우고 가르치자 하는 이것이 아매 그 분의 동기 였을 것인데 이렇게 속화되어 나왔다
안할라면 아예 성경학교를 철패해버리고 할라면 우리도 십자가의 정신으로 해야 되겠다 그것을 내가 생각을 했고 다른 것은 그래하고 있는데 다른 것은 내가 말은 그래해도 하는 짓은 다 성경가르치고 또 위대한 성경 위인들의 위인전을 가르치고 또 여름동안에 육체에 대해서 위생을 가르치고 이것 다 좋은 것인데 또 찬송을 가르치고 이것도 좋은 것인데 율동하는 이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위생을 가르치는 것은 그 위생이 되어져야 되지 그렇치 않으면 하나님 위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지마는 이 율동하는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은 순전히 인간 놀음이지 이것은 안해야 되겠다 해서 이것은 속화된 것이다 어제 내가 톡톡히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를 해서 올 부터 그 가사로 하되 율동은 없애버리고 그것은 하지 말고 그저 그 가사만 해서 손벽을 치든지 뭐이든지 하고서 그래하면 좋겠다 그것을 작정했고 또 성경에 춤추는 것이 없느냐 이제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춤을 출 수 있는데 성경에 춤추는 것은 그 춤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하나님에게 피동되고 하나님에게 감격해서 저들이 뭐 춤도 추고 뛰기도 하고 구불기도 하고 이래 한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을 등지고 돌아서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좋게 하기 위해서 춤추는 춤은 성경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회개를 합니다.
이제는 하기 아동성경학교는 그저 짧은 이틀 사흘은 하지마는 거기에서 옳은 정신을 가지고서 해야 되겠고 성경 가르치는 것 찬송가르치는 것 이제 하나님께 찬송하다가 보니까 손벽치는 그런 것은 하지마는 춤추는 그것 춤인데 유희하는 그것도 춤인데 그것은 근본정신이 안되어서 안되겠고 또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아서 기쁘 즐거워서 뭐 춤추는 것은 좋습니다. 그래서 이것 율동 이것은 안해야 되겠다 하는 이것은 어제 발견했습니다. 어제 그날 거기에서 충격을 받아가지고 발견했어 아 이것이 순전히 마귀로구나 제가 그 전에 성탄 축하 할 때에 저도 축하할 때에 그 유희라고 하는 것을 모두다 어디가 배워오는지 그런 것은 참 잘 배워와 배워 가지고 잘하는데 그것 배워가지고 하라고 했는데 내가 집사 때인데 나중에 하는 것 보니까 뭐인가 부끄럽고 불쾌하고 안되서서 그래 나중에 생각해서 그것은 제거했습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에서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 학생들은 그것을 하지마는 그 위에 학생은 하지마라 이랬는데 이것도 자꾸 올라가면 그런 것도 치워야 됩니다. 그것 안합니다. 그것 치워야 되겠어 그것이 나중에 국민 학교 일학년 까지 하다가 이학년 까지 하자 국민학생은 하자 그 다음에 중학생도 하자 나중에 고등학생하자 나중에는 장로 목사도 하자 그리 점전 속화 되어 나가는 그런 길이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이 고치기 전에는 고칠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마음에 크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몰랐는데 뭐인가 그래가지고서 그것이 이외에 나에게 알려져 가지고 거기서부터 알려 졌습니다.
그러기에 고치기는 내가 고칩니다. 하나님이 고치기를 애를 써도 하나님을 골탕을 쥐먹이고 나중에 억지로 고치는 것이지 내가 앞서서 뭐하는 그런 것은 내게 아직 없는 것 같애.
통성으로 기도 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속화 되지 안해야 됩니다. 속화 나는 속리 산에 한번 갔는데 속리산 말을 들어니까 어떻게 이름이 좋은지 세속을 떠났다 세속을 떠났다 그 속리라는 이름이 어떻게 좋은지 그래 내가 한번 거기 가봤어 속리산에 한번 가 봤어 우리는 속화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속화되면 안됩니다. 한 십분기도하고 권찰회 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