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3 11:51
겨자씨 비유
본문 : 마 13:31-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천국 백성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하는 자라는 방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택한 자들이 자랄 때에 어떻게 자라는가 하는 것을 비유해서, 새들이라고 비유한 것도 택한 자들을 말하고 겨자씨도 택한 자들을 말을 합니다.
새와 겨자씨는 그 생의 방편에 있어서 정반대입니다. 새는 형편에 따라서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그것이 새요 정처가 없이 여기에 앉았다가 저게 앉았다가 아주 지혜롭고 슬기롭게 무슨 소리만 하나 나도 혹 날아서 또 다른 데로 가고, 또 무슨 반가운 소리만 나도 또 우 모아들고, 또 한 마리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확 모아들고, 또 무엇이 하나 놀랄 만한 것 있으면 그만 도망치고, 이래서 정처가 없이, 정처가 없이 아주 슬기롭게 공중에 날아다니는 이것이 새가 생활하고 있는 그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 겨자씨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이 한번 심어 놓으면 그 자리에서 옮길 줄을 모르고 주인이 심어놓은 그 자리에서 비가 와도 그 자리, 바람이 불어도 그 자리, 부러지면 부러졌지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아주 겨자씨와 새와는 정 대조적입니다.
또 새는 크고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크고 작은 그것도 대조적입니다. 또 이렇게 이동하고 요동하는 데 있어서는 새는 아주 슬기롭고 실력이 대단합니다.
높은 공중에도 얼마든지 날아 올라가고 먼 데도 얼마든지 날아갑니다. 그러나 새가 1초에 날아가는 것을 겨자씨는 평생 가도 그만치 못 갑니다. 그만침이 아니라 1초에 움직이는 그 움직임을 평생 해도 겨자씨는 그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 합니다. 아주 요동하는 데에는 무능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모든 형편과 사정을 보고 재빨리 요동하는 데는 새는 아주 실력있고 이는 무능합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택한 신자로서 양극을 비유로 이렇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겨자씨같이 아주 보잘것이 없이 작고, 지식도 작고, 지혜도 작고, 인격도 작고, 건강도 작고, 모든 것이 다 인품도 그러하고 아주 작고 못나고 그렇습니다. 모든 면이 가장 모자라는 자입니다. 가장 모자라는 자 이런 자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청도 금산교회에 후임으로 오겠다고, 거기에 자기를 전도사로 파송해 주면 힘껏 한번 해 보겠다고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자기 소개를 했는데 인품도 좀 별스럽고 모든 게 좀 별스럽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 다 본 사람들 알지마는. 너무 사람이 볼 때는 좀 겨자씨가 아닌가 이렇게 보여져서, 자기 입으로 주님에게 대한 신앙을 가진 걸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거부하지를 않고 '이게 겨자씨인가? 겨자씨 같으면 이 작은 것이 크게, 작은 것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자기가 말한 대로 이렇다고 하면 크게 쓰여질 수 있는 큰 사람이겠는데 혹 겨자씨가 아닌가?' 해서 내가 말하기를 '그러면 지금은 내가 허락할 수가 없고 얼마동안 여기에 시간 있는 대로 참석을 해서 진리를 받아봐라. 그러면 그 후에 하나님이 등용하실 것이고 나도 찬동할 것이다.' 이랬는데 얼마 겪어보니까 가짜 겨자씨라, 가짜 겨자씨. 그래서 그만 말았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아무리 못나고 아무리 작고 적어도 상관없습니다. 씨 중에 가장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기독자 중에 모든 면으로나 제일 못나고, 제일 약하고, 제일 무식하고 무지하고, 아주 제일 못난 자를 비유한 것입니다. 제일 못나도 상관없습니다.
제일 못나도 주인이 심어놓은 그 자리에 요동치 않고 있으면 거기에서 자기가, 이것은 나물 종류인데, 나물 종류인데 채소 종류인데 나중에는 나물보다 커 가지고 나무가 된다 이랬어. 나무가 됩니다. 나무가 됩니다. 나물 종류인데 나물 종류가 아주 탁월한 나무가 됩니다.
그렇게 못났지마는 주인이 심어놓은 그 자리 요동치 아니하면 그 자리에서 은혜를 입어 인간을 탁월한 사람이 됩니다. 인간을 초월한 사람이 됩니다. 그는 초자연적인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커지는 것입니다.
주인이 심어놓은 그 자리에 있는 것, 너는 택함을 입은 자이다. 너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 주의 피에 팔린 주의 것이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너 보고 산다. 너를 위하여 역사하신다. 모든 존재는 너를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거룩하게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용하시려고 지어놓은 만물이다. 모든 존재는 너 위해서 있다. 네가 별별 움직임을 네가 볼 터인데 그 모든 움직임은 영원 전 너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전지자로서 예정하셔 가지고 움직여지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너 위해서 하나님이 내어왔고 모든 움직임은 너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우주를 창조할 때에 주력했던 이치인 참 이치 진리와 주님의 공로가 너를 책임지고 이렇게 온전케 하려는 이 보증자로 나섰다. 이러니까 너 할 일은 무엇이냐? 너 할 일은 그때그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 당장 직장이 깨지는 인도라도, 가정이 깨지는 인도라도, 네가 박살나는 인도라도, 네가 죽는 인도라도, 어떤 고문과 고형이 닥쳐도, 주님이 당하게 하는,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 때문에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인도를 그대로 네가 지키라.
그러면 모든 기회주의자 기독자, 아주 잘나고 날쌔고 훌륭하고 인물 잘나 사람의 틀이 있어, 재산 있어, 권세 있어, 명철 있어, 뭐 구비한 사람, 아주 기독교 안에서 아주 잘나고 구비한 사람, 슬기로운 사람, 어떻게 능한지 어떻게 눈치가 싼지 모든 소식도 잘 듣고 무슨 일 있으면 퍼뜩퍼뜩 어떻게 날쌔게 움직이는지? 사람 교제도 날쌔고, 또 어려움을 피하는 것도 날쌔고, 자기에게 유익될 것을 선택해서 잡는 것도 날쌔고, 아주 이 새 모양으로 실력있고 겨자씨에 비해서 날쌔고 민첩하고 활동성있고 판단력 빠르고 참 빠릅니다. 이렇게 잘난 사람, 교회 안에서 제일 잘난 사람, 그런 사람들을 다 탁월하게 인간 탁월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이 되어 마지막에 영원무궁토록 그런 인물들이 다 네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네게 와 가지고 소속해서 네게 소속한 자 되고 네, 영광 위해서 있고, 네 권위 위해서 있고, 너 존귀 위해서 있고, 너를 높이기 위해서 있어. '우리는 이렇게 새떼같이 살았는데 이는 겨자씨같이 살았기 때문에 이는 살았다.' 그 모든 것이 너를 찬양하는 것이고, 너를 놀린 것이 너를 찬양하는 것이고, 너를 배척하는 것이 너를 환영하는 것이 되고, 이렇게 해서 이렇게 기독교 안에서 인간적인 지능을 가지고 세상 적인 것 가지고 자기중심으로 날쌔게 날뛰는 그 모든 잘난 자들로 하여금 겨자씨 같은 이런 자에게 영원히 소속을 시켜서 '보라, 이렇게 한 자들은 이런데 겨자씨 모양으로 제일 못난 자 네가 이렇게 존귀하다' 하여 그것으로써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이며, 어떻게 살고 어떤 자가 불쌍하고 가련한 자 된다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보면, 문벌 좋다 말은 종자가 좋다 말이오.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으며 학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아주 모자라는 그것을 택해서 잘났다고 하는 자들을 다 부끄럽게 하고 다 그 발 아래 두게 했다." 이것은 왜?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으로 피동되는, 하나님으로 자기 것을 삼아 하나님으로 인하여 산 여기에서 커지고 여기에서 자라고 위대해지지 이것 버리고 제것이라는 그것을 자본으로 삼아 하는 그런 자들은 다 천해지고 약해지고 허무해지게 하는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라.
하나님 한 분으로 전부 삼는 그자를 하나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위대케 만들고 어떤 존재든지 자기로 인하여 뭐 되겠다 하는 그런 자는 아주 그자는 하나님이 작게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내버려 둬.
제 꾀대로 냅두니까 마지막에 보니 자기 위해서 했다는 것이 자기가 들어서 자기를 망쳤습니다. 자기를 높인다고 아주 새떼 모양으로 슬기롭게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자기 높인다는 그 행동이 자기를 낮췄으니까 누구한테 원망할 것 불평할 것이 없어.
겨자씨 같은 자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여 그분 위해서 했다는 것이, 내나 그분 위해서 참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주님 위해 참 았다는 것이 저만 위해 참았어. 주를 위해서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어찌 뒤집어졌는지 순전히 자기 위함이 됐습니다. 이것이 신앙 간증자들의 간증입니다.
어리석지를 맙시다. 새떼가 되려고 하지 말고 겨자씨가 되십시오. 큰 걸 부러워하지 말고 아무리 작아도 좋습니다. 작은 그대로의 하나님이 심은 그대로 있으십시오. 그대로 자라십시오.
신앙의 기초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시고 선포한 것을 요 안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심어 왔습니다. 신앙의 터를 요동치 말고 신앙의 터 위에서 믿음으로 나가면, 신앙의 터 위에 있으면 나갈 수 있어.
'아이고, 저 일에는 죽는다.' 그까짓 것보다 하나님이 크시니까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에게 매였지 제가 협박준다고 날뛴다고 되는 것 아니라.
'그러나 이럴 때는 하나님이 피하라 하는 것이다.' 피하라 하니까 어기면 또 그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가 아니라 오고 가고 하는 것 하나님으로 인하는 것, 동하고 정하는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 모든 문제를 어렵게 여기지 않고 멸시하는 것은 자기가 바라보고 의지하고 속하여 있는 그분이 엿새동안에 지은 것 들이요 가치없는 것들이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기 때문에 더 크신 분의 품 안에 있는 자가 뭣 때문에 염려를 할 것이오? 잃어버린 양떼가 목자가 와서 아듬고 가는 것을 모르니까 제가 올 때 굴혈이 있으니까 굴혈 보면 놀라서 뻐득거리고 덤불 보고 뻐득거리고 이렇지마는 과거에는 저 혼자 세상으로 탈선해 나갈 그때에 당한 일이고 지금은 주님의 품 안에서 전능자가 안고 가니까 덤불이 무슨 상관 있으며 개울이 무슨 상관 있습니까? 설쩍 설쩍 건너뛰고, 덤불이 있으니까 이래딱 저래딱 피해서, 산에 목자니까 도구를 가지고 있으니까 걸리면 탁 쳐버리고 길을 내 가지고 썩 가고 하니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공연히 자기 주관을, 자기 혼자 세상을 경험한 주관이 없어지는 것만치 평안하고 있는 것만치 불안 준 것이지 목자의 품 안에 어깨에 메여 가는 것이 무슨 상관 있겠소? 어려움 없어. 이것을 믿는 것이 기독자들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말해. '목사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할 때에 목사님이 나를 무시하고 멸시해서 그렇다. 나는 이런 선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를 부모네들이 이러니까 이렇게 무시해 그렇다.' 그래 내가 등을 두드리면서 '얘, 내가 성경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이 그때그때 창조하는데 삼사 대까지, 죄지은 것이 삼사 대까지 이르는 그런 유전성과 전달성은 있지마는 하나님이 택해서 쓸모 있다고 너를 인정하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할 게 뭐 있나? 그거는 마귀가 너에게 줬다. 그런 것 벗어라.' 했는데 내가 그뒤에 보니까 벗었는지 안 벗었는지 아직 몰라. 껍데기는 보니까 벗은 것 같애. 그러나 속에도 벗었는지? 여러분들, 겨자씨같이 작은 것을 가지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나는 불학무식찬 사람이다. 못났다. 병신이다. 근본 인격이 없다. 재질이 없다. 못났다.' 주님 앞에는 잘나 가지고 떠드는 것보다 못난 게 낫고, 못난 것보다 자기는 병신 중에 병신인 것을 아는 게 낫고, 오히려 자기는 죽은 자같이 되어져서 아무것도 아니라 죄뭉텅이뿐이다 하는 이것이 주님 앞에는 더 낫습니다.
왜? 그것을 크게 만들어야 '아, 하나님 솜씨 있다.' 이렇지. '참, 과연 예수 믿는 게 이렇구나.'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못나고 잘나고 상관이 없어.
잘난 사람이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얘, 너 잘난 사람은 다 이렇게 저 믿고 저 의지하고 제가 앞장 서 가지고 날뛰는데 네가 뭐 하려고 실력 없는 자같이 이렇게 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따르고 나로 인하여만 하려고 했느냐? 못난 것들이 그렇지 너같이 잘난 것이 그러냐?'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저렇고 나는 못난 자요.' 있는 데 못난 자로 압니다. 이러면 주님은 그자는 더 크게 만드시고 더 크게 쓰십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인간적으로 슬기롭게 날뛰면 안됩니다. 다 인간적으로 뻐뜩뻐뜩할 그런 것을 할 마음이 있지마는 그것을 사용하고 그럴려고 애를 쓰고 연구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움직일까 싶어서 그것을 죽이느라고 애를 씁니다.
자기 마음에 정치성을 가지고 '요렇게 정치하면 요거는 되겠다' 정치성을 쓰려고 해도 그러다 보면 미련한 십자가를 걷지 못하고 주님이 인도하는 데 따라가지 아니하고 앞성이 될까 해서 죄를 쓰지 않습니다. 꾀를 쓰면 '요거는 말 한 마디 요래만 꾀쓰면 된다' 하는 그게 분명히 쓰면 됩니다. 돼도 그 죄 써서 그것 수입하다가 그것이 주님 배반이 되어지는 것이니 주님 배반되어지면 그까짓 것 성공된다 할지라도 모든 것에 전부되시는 주님 팔아버리고 배반했으면 소용없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가 환한 길이 있어도 역부러 안 씁니다. 역부러 안 쓰요.
또 당장 이렇게 저렇게 후닥딱 키울 수 있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하면 크는 데에 주님보다 앞장 서 가지고 주님이 키우시는 대로 크지 않고 제가 크는 것 될까 해서 안 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어떤 분이신 것을 아는 사람이오.
그런고로 겨자씨 비유에서 새와 겨자씨를 단단히 기억합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새떼의 행위인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겨자씨에 속한 것인가, 무엇인가?' 이렇게 알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독자의 터로 주신 이 터 위에서 요동치 않아야 됩니다. 새 다른 터를 닦으면 안 됩니다.
새 다른 터를 닦지 말고 이 터 위에서, 인간의 제일 잘난 사람의 그 지능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모자람이 없이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고 무한히 남는 이 사실을 확신하는 그 한 가지가 인간의 모든 구비한 지능에 억억억억‥‥ 만 배보다 뛰어납니다. 이것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는 새떼와 겨자씨 이 비유, 무궁세계에 새 떼는 겨자씨에게 속하게 만들어요. '너는 거기에 속해라' 요렇게 하나님은 복수성이 어떻게 강한지? 복수성이 무한합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 향하라 하니까 기독교가 대항하지 않는 무저항의, 저항을 하지 않는 무저항주의로 알면 틀립니다. 그 속에는 무서운 저항이 있고 무서운 복수성이 있습니다. 오른뺨 맞았는데 내가 오른뺨 맞음으로 그것에게, 뺨 때리는 그 자에게 피동되지 않으려고, 그자의 뺨 때린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의 인품이나 사상이나 속성이 움직이지 않으려고, 거기에서는 하나님을 따라 움직이려면 그 원수에 대해서 복수심 가지지 않고 그이의 복수심이 풀어지구로 해서 결국에는 복수를 가지고 원수를 가지고 왔지마는 내게 와 가지고 그것이 물러지고 깨지고 했으면 내가 이긴 것이라 말이오. 나는 점령을 한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때린 자에게 부애 촉분 지르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한번 더 때려도 참고 견딜 생각하고 있으니까 가만히 때려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까 마음이 좀 풀립니다. 또 한번 더 때려서 가만 있으면 풀리겠지. 이러니까 그놈의 가지고 왔던 독이 내게 와서 녹아졌지 그 독에게 내가 피동되어서 내게 독이 추호라도 생기지는 않았다 그거요. 얼마나 복수주의입니까? 얼마나 대항주의입니까?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껍데기에 보면 기독자는 속에 배 없는 저거는 참 약한 중에 약한 자 같고 아무 창자도 뼈도 없는 것 같지마는 무섭습니다. 하나님처럼 뼈가 강하고, 하나님처럼 복수성이 강하고, 하나님처럼 자존심이 강한 것이 기독자들인 것입니다.
껍데기로 살지 맙시다. 알맹이로 살고 껍데기로 살지 말아요. 이 겨자씨를 본받아서 하나님이 심어놓은 그 자리, 하나님이 있으라 한 그 자리, 에덴동산의 그 자리에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은 그 자리에서 후퇴하지 않고 있으면 거기에서 모든 좋은 것이 다 나옵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그 자리, 연결된 그 자리,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신 그 자리, 하나님께서 이제 죄 없는 자로 대속하신 그 자리, 그 자리에 있으면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 중보자를 통해서 내가 차차 차차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하늘의 것 땅의 것 이제 것 장래 것 사망 생명 모든 것,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전체가 다 자기의 것이 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계약이오.
그런고로 작다고 한탄하고 낙망하지 맙시다. 병신이라고, 공부를 못 했다고, 머리가 둔하다고, 나는 못났다고 그렇게 낙망하지 맙시다. 얼마든지 잘날 수 있소.
그러기 때문에 야고보서 1장에 "그리스도 안에는 낮은 자는 높아진 걸로 자랑하고 높은 자는 낮아진 걸로 자랑하나니 이는 모든 세상 부요와 영광이 풀의 꽃과 같아 해가 돋으면 그 아름다움이 다 쇠해지고 없어지느니라" 이러기 때문에 '아, 나는 이렇게 못났는데 예수 안에 보니까 이렇게 못난 게 아니라 제일 잘난 자 될 수 있구나.' 하는 이것을 자랑해. '나는 이렇게 못났지만 마지막에는 제일 잘난 자 될 수 있다.' 이걸 자랑하는 것이 작은 자는 큰 자로, 낮은 자는 높아진 걸로 자랑하고.
높아진 자는, "높은 자는 낮아진 걸로 자랑한다" 자기는 제일인 줄 알았는데 '아이구,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제일인 줄 알았는데 훅 집어던져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낮은 자로 탁 낮아짐으로써 자랑한다 그말이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라.' 자랑해. 이것이 예수믿는 자들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예수믿는 데서 건방되게 날뛰면 안됩니다. 건방지면 못써. 안돼. 얼마 전에 어떤 희망있는 좋은 청년이 하나 왔는데 속에 건방이 들었어. 내가 대번 척 보니까 아무 태도 없이 말해. 그래 내가 발길로 차서 던져버렸어. '너거 교회가 가지고 주일학교나 좀 충성하고 가 봐라.' 이랬는데 대구에 어떤 목사님에게 한 번 발길로 차였는데, 이분은 발길로 차 놓고 마음이 안됐으니까 뒤에 동정해 가지고 그 사람을 넘어뜨렸다 그말이오.
넘어뜨렸어. 내가 여기서 뭐 어떤 소장 편지를 보다 보니까 그랬어. 그래서 교학실에다 말했더니만 교학실에 전화를 했던가 대구에 있는 목사님이 전화가 와서 자복 전화가 왔어. '내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목사님이 해 놓은 걸 내가 이렇게 해 놨으니 내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복을 하는데 '내가 보기에 좀 건방돼서 내가 한번 나무래 놓고 내가 그랬는데 목사님한테도 무슨 말 할 때 목사님도 어떻게 그랬습니까?' 나한테는 아무 말 없어. 와서 겸손히 '내가 어짜랍니까?' 하는 데도 그게 보여져서 그랬어.
그뒤에 다시 왔어. 내가 오라 했더니만 다시 왔어. 다시 와서 이제 그때는 설명을 해 줬어. '네가 이렇고 이렇기 때문에 네가 작은 자가 되어져라. 그래야 네가 희망 있다.' 이러니까 단 마음으로 받아 가지고 기쁨으로 받아 가지고 갔어.
우리는 외식으로 날뛰면 안 됩니다. 외식으로 날뛰면 안 돼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로 모시고 영원히 살 터이니까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조심있게 지내라 말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