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사랑하사

2010.09.26 18:50

김반석 조회 수: 추천:

제목: 우리를 사랑하사
선지자선교회
본문: (계1:5-6)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서론)

1. 주 하나님의 사랑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배워서 이 사랑을 원형으로 삼아서 배워 본받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에 본체시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형상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형상인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 우리가 가질 사랑인 것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하신 것을 우리가 배워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며. 또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신 것을 우리가 배워서 그렇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2. 가짜 사랑

이것이 아니면 그것은 다 가짜 사랑이요 속이는 사랑입니다. 왜 그렇게 그것이 속이는 사랑이며 가짜 사랑인가 하는 것을 지난 시간에 증거를 했습니다. 그것이 다 제한 된 것들이요 또 그것이 극히 부분적이요 또 편벽된 것들이기 때문에 전체가 나올 때에 그 편벽은 해치는 것이 되었고 무한한 것이 올 때에 유한한 것들은 다 사망으로 화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본론)

1. 존귀한 것에 가짜

사랑은 최고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가 많습니다. 천한 것은 가짜가 없습니다. 존귀한 것이라야 가짜가 있습니다. 가짜는 진짜에 그 가치를 도둑질하고 그 유익을 노려서 힘들여 가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가치한 천한 것은 아무도 가짜를 만들 욕망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최고의 가치 있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최고로 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랑에 모든 가치를 모든 사람들이 고귀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2. 가짜 사랑은 그 시발이 자기

사랑을 가지려고 애를 쓰는데 이 사랑은 하나님 한분만이 가졌지 그분 외에는 사랑을 가질 실력이 없어서 사랑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랑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사랑을 받아 가지면 이 사랑은 참으로 자기 유익을 구치 안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되어 지기 때문에 가짜 사랑을 가진 자들은 상대방을 위하는 그 일은 할 수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상대방을 이용하는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 사랑은 그 시발에 자기가 시발입니다.

가짜 사랑은 그 사랑에 시발이 자기입니다. 사랑에 종자가 자기입니다. 그 사랑에 근거 원인이 자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곧 선악을 아는 것이 우리중 하나와 같이 되었다 하는 그 원죄성인 것입니다. 원죄에서 나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얼핏 보면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상대방에 유익을 구하는 것 같이 보여 지지만 실은 그것을 방편으로 삼아 상대방을 자기 사람 만들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되어 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구를 만족케 하려는 그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완전자에게 귀속할 수 있는 기회를 다 빼앗아서 자기에게 귀속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영원히 사망시켜 삼키는 무서운 미움이요. 무서운 살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하나님의 가지신 사랑 외에 사랑은 다 이런 사랑들인  것입니다. 그 뿌리를 생각할 때에 무섭고 징그럽고 아주 흉측하고 또 그에  실력을 볼 때에 전부가 거짓말 속이는 것 밖에는 될 수 없는 극히 빈약한  것들입니다. 또 그것들에 결과를 보면 완전히 그 미움은 그 사랑은 미움으로  정체를 갖게 되고 또 그 사랑은 마지막으로 불리 불행 불안 고통 사망으로 결과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 사랑의 가짜와 종자와 결과와 방편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이 귀한 것만큼 가짜가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이래서 그 사랑에 종자에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찾아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는 그 사랑에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찾아서  알면 그 사랑에 방편이 어떠한 것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가짜사랑과 종자도 다르고  결실도 다르고 자라가는 그 방편도 아주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어리석어서 그 사랑에 그 방편 그것만을 보고서 모든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상대방을 좋아하고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를 위하는 것 나를 복되게 하려는 것 나를 기쁘게 하려는 것 나를 평안하게 하려는 것 나를 존영하게 하려는 것, 그것을 가지고 상대하니까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몇 시간을 가든지 그 수명을 생각해야 되고 또 그것이 시간이 지나가면 무엇으로 화해져서 영원한 것이 되어 지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땅위에는 줄 사랑도 없고 받을 사랑도 없고 그 가치도 인정할 사랑도 없고 모두가 다 속이고 속이는 것이며 다 무지 무능한 책임 못질 것이 책임지는 듯 하는 모든 속이고 속는 이 외에 전체가 거짓된 것 외에는 하나도 없는 것인 것을 우리는 확실히 판정하여야 합니다.

4. 우리는 불멸의 존재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끝이 없는 오늘 한 시간만 살고 영원히 없어지는 것 같으면 하지만 우리는 불멸의 존재입니다. 없어지지 아니할 존재이입니다. 영원 존재의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좋은 것이 앞으로 영원에 불리한 것이 된다면 고통이 된다면 이것은 사랑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이 존재가 일시로 끝나버리면 있는 그 동안 복되다면 그것이 복이 되겠고 기쁘다면 기쁨이 되겠고 유익하게 한 것이면 유익이 되겠는데 우리는 불멸의 존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원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 존재에게 해당되는 유익이라야 필요한 것이라야 평강이라야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지 일시 있다가 없어질 그것으로써 영원에 불리한 불행한 고통스러운 사망이 되어 지는 그런 것은 우리의 것으로 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금수나 초목이나 이런 것들은 하나에 형체가 되어졌다가 그것이 없어지면 다시 원소로 돌아가서 그 하나에 개체라는 조성은 완전히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고 영과 육이 영원불멸의 영원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해당된 것은 우리에게 해당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에 좋은 것이라야 됩니다.

영원에 좋은 것이 될려고 하면 그것은 종말을 갖추기 전에는 둘도 셋도 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을 갖추게 되는 그때에 다 없어질 것은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힘과 힘이 대결해서 결국은 하나의 힘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원 주권자, 영원 주재자, 영원 능력자, 모든 영원성 완전성 불변성 영생성, 이런 데에 소속한 이것에 것이 아니면 다 그것은 사망에 속한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5. 사랑과 그 사랑의 행사는 하나님 한분만이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하나님 한분만이 가졌고 또 사랑의 행사는 하나님 한분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실력이 없어서 지혜의 실력이  없어서 하나만 알았지 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만 알고 그것뿐인 줄 알고 하나에만 준하여서 모든 일을 준비했는데 하나밖에 천도만도 넘으니까 그 준비한 것이 다 헛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로 가진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다 속인 것이 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또 그 능력으로서 우리에게 어떤 것은 베푼다 할지라도 그의 능력은 극히 제한된 것이며, 주관에 맞아 거기만 그 능력이 해당됐고 효력이 있어졌지 그 밖에 무한에 나가보니까 그 능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때 가서 보면 다 속인 것이 되어 지는 것이 그것뿐인 줄 알고 그것이면 다 인줄 알았는데 가보면 아니기 때문에 결과는 나를 속였고 나는 자기를 속였고 다 속이고 속고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혜도 그러하고 또 자체가 극히 제한되어서 그 형체로 그 모양으로 그 상태 그것은 일시 뿐이고 그 다음에는 천태만상으로 변해나갑니다. 그것이 일시 그 사랑을 갖추어 위하는 것이 되어 지지만 그 다음 시간에는 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해합니다. 그것이 그 상태가 유지가 되는 동안에는 그 사랑이라는 사랑이 될 수 있겠는데 그 상태가 시간을 따라서 바꾸어져 버립니다. 바꾸어지는 것은 극히 무능한 자이기 때문에 생명도 제 마음대로 못해서 살아야 할 터인데 죽어버립니다. 또 능력이 계속해야 될 터인데 능력이 그만 끝나버립니다.

자체라는 그 자체가 완전이 아니고 영원이 아니고 불변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는 어떤 존재에게 따라서 자꾸 피동 되고 또 조성되고 또 파멸되고, 그의 권리가 절대자에게 있고 그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주권이 되어 제가 어떤 것을 사랑 하겠다 하는 것이 다 헛말이요. 다 빈말이요. 다 허무한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한분 밖에는 가진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랑을 받는다 말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왔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영원을 주셨습니다. 불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 영원 불변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7.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의 완전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하나님의 영생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완전성도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 그 본체는 아니시지만 그 하나님의 그 전부가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 본체가 역사하셔서 그 본체에 속성 그 신성이 곧 인간의 인성과 일위가 되어서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입이십니다. 또 영원히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8.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神人兩性一位)

예수님의 신인양성은 예수님의 그 본체인 신성과 인간이 일위가 된 것이요. 예수님의 인성이 하나님의 그 본체와 일체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인성은 신성 인성 신인양성이 일위된 것이지 그 본체가 인간의 본체와 하나 되어서 일체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신인에 일체됨이 아니고 양성일위가 됐습니다.

9. 예수님의 그 사랑

하나님의 그 무한하시며 완전하시며 영원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났는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나타났으면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이 사랑이 되는가? 예수님이 나타나셨으니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인데 그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사랑이 되는가? 사랑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했기에 사랑이 되는가?

이 완전자이신 하나님과 삐뚤어져 있는 것을 정리를 했습니다. 또 이 완전자 이분과 이 결합될 수 있는 그 움직임을 가져서 이분과 하나 되는 일을 했습니다. 또 이분과 이 원수된 것을 결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과의 이 세 가지는 이것을 완성해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성이 이루어졌고, 불변성이 이루어졌고, 완전성이 이루어졌고, 생명성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어떤 완전성이 이루어졌는가? 이제는 삐뚤어짐이 완전히 없는 삐뚤어짐이 완전히 없어진 완전에 사죄입니다. 완전의 사죄가 이루어졌고 또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올바른 것이 건설됐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건설해 주신 것은 완전 의(義), 영원 의(義), 불변 의(義). 이는 완전 영원 불변의 의를 우리에게 건설해주셨습니다. 이 건설은 하나님의 움직임의 결과인데 하나님의 움직임에 우리의 움직임을 완전히 결합을 시켰습니다. 또 하나님의 지성법 지공법에 저촉된 삐뚤어진 것을 완전히 해결 지웠습니다. 또 하나님과 완전히 결합을 시켜서 우리에게 완전 생명을 건설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이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 가지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그 결과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순전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이 완전의 것을 받은 완전 뭉텅이입니다. 영원한 것을 받아 영원 뭉텅이입니다. 불변의 것을 받아 불변 뭉텅이입니다. 이리하여서 예수님은 이 사랑을 가져서 이것으로서 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인간에게 하고 또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해야 된다는 것이 요동할 수 없는 이치입니다. 진리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가 확실히 파악을 하고 자기가 체득을 하고 알아야 되는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사랑의 정의가 삐뚤어져 있어서 전체는 지금 에덴동산에서 사랑이 들어서 인류시조를 서로 죽인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은 사랑이 들어서 교회를 죽입니다.

마귀가 가짜 사랑을 가지고 이렇게 하니까 기독자들로 이것이 사랑인 줄 알고 그 가짜 사랑이 들어서 교회는 완전히 망쳐졌습니다. 동서양의 교회가 사랑으로 망쳐졌고 지금 앞으로도 사랑으로 망쳐졌습니다. 사랑의 정의를 오늘은 외칠 때입니다.

10. 충성된 증인

5절에 보면 우리를 사랑한 사랑을 말했습니다.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에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랬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대해서 행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대해서 행한 것입니다. 충성된 증인이 충성이 우리 위해서 했고, 증인이라 말은 하나님을 완전히 나타낸 것이 우리를 위해서 나타냈고 또 죽은 것도 우리 위해서 죽었고 또 살아나신 것도 우리 위해서 살아났는데, 이 충성도 증인도 죽음도 살아남도 우리 위해서 살아났는데 또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11. 사랑의 원인과 결과

그러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원인인가? 우리를 위한 것이 원인인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결과인가? 우리를 위한 것이 결과인가? 원인과 결과 어는 것입니까? 이 사랑을 했는데 이 사랑의 역사의 원인, 그러면 사랑의 역사의 원인이라 말은 무슨 말입니까? 사랑의 역사라 말은 무슨 말입니까? 상대방을 유익되게 좋게 위하는 그것이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역사입니다. 사랑의 자체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역사인데 예수님께서 충성된 증인 곧 죽은 것 살아난 것 이것은 그 사랑의 자체입니까? 사랑의 역사입니까? 네 사랑의 역사입니다. 사랑의 역사인데, 이것은 사랑한 것인데 이 사랑한 것에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이 사랑의 역사가 우리에게 대해서 사랑한 것은 그 사랑의 결과가 우리에게 왔습니까? 사랑의 그 원인이 우리에게 왔습니까? 결과가 왔습니다. 사랑의 원인은 어디로 갔습니까? 사랑의 근원은 위하는 근원은 하나입니다. 그 결과가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랑의 방편은 이랬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방편입니다. 사랑의 역사 사랑의 역사는 뭐인가? 위하는 것, 좋게 하는 것, 기쁘게 하는 것, 행복 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사랑의 역사의 원인은 하나님께 대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을 좋게 그것은 하나님의 자체에는 행복 되게 할 수 없습니다. 위할 수 없습니다. 없는데 다만 그를 위할 수 있는 것은 뭐이냐? 그분이 원하는 무엇을 함으로 그분에게 좋고 기쁘고 즐겁고 하는 그 길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우리를 상대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길이 있을 수가 없는 그런 요소로 되어 있는 본질과 본성으로 되어있는 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을 상대해서 했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위함이 되어 진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 하나님을 향해 상대했고, 그 다음에는 그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맺어지도록 했습니까? 맺어진 것은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피로’ 하는 말씀은 하나만 죄에서 해방한 것을 말했지만 이미 삐뚤어져 있는 죄에서 해방 했고 영원히 삐뚤어질 것에서 해방했기 때문에 이는 칭의입니다. 의입니다. 그래 가지고 또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결합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12.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내 것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에게 드려서 섬기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바쳐서 섬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을 받아 섬기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은 어떤 것입니까? 어떤 것이지요? 바쳐 섬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받아 섬기는 것입니다.

이래서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았다’ 그 말씀은 그 하나님을 위한다 말은 하나님을 중심해서 하나님을 상대해서 그의 모든 움직임을 받는 것이 받는 자 만들었다는 것을 가르쳐서 나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또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분이 원하고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라로 삼았다’ 말은 그의 것을 받는 것 말하고, ‘제사장으로 삼은 것’은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어디서 합니까? 그분이 원하는 일을 인간에게 하는 것이 제사장이요. 그분이 원하는 것을 피조물들에게 하는 것이 제사장직인 것입니다.

13. 우리가 인간을 사랑하는 방편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을 사랑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인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위하여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완전히 가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그에게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와 하나님과 삐뚤어진 것을 내가 이것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와 하나님과의 역사적 바른 관계를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에 속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의 것이 그에게 와서 역사하도록 움직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순전히 그를 위해서 했는데 그를 위하는 그 방법이 내가 그를 위하는 자 되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래서 이것을 가르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을 거룩케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먼저 내가 형제를 위해서 내가 하나님과의 완전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완전 관계를 가지고 난 다음에는 내가 그 형제로 하여금 하나님과 온전 관계를 가지게 하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외에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순전히 날 사랑했다 했지만 나에게 직접한 것은 그대로 살기 싫은 교훈, 듣기 싫은 책망, 하기 싫은 권면, 이 외에는 직접 나에게  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 외에는 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었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보혜사 성신을 보낸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무엇이냐? 우리가 형제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은 어떤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냐? 사랑은 완전 자와 거리낌이 없게 하는 것이 사랑이요. 완전자가 만족한 기뻐할 수 있는 움직임을 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요. 또 완전자와 화친을 해서 완전자의 것이 그에게 배급되고 그에게 분급되고 그에게 전달되고 하는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깨끗이요, 사랑은 지혜요, 사랑은 능력이요, 사랑은 완전이요, 사랑은 승리요, 사랑은 영원이요, 사랑은 불변인 것입니다.

14. 그 사랑이 타락한 인간에게 이루어진 것은

그러기에 이것이 타락된 인간에게 어떤 것으로 이루어졌더냐? 이 타락된 인간에게 이 사랑이 이루어질 때에 그 이루어지는 그 공기가 어떠했던가?  이루어질 때에 그 파문이 어떠했던가? 이루어질 때에 일어나는 그 먼지가  어떠했으며 일어나는 연기가 어떠했으며 일어나는 소리가 어찌 됐던가? 그 소리는 이를 십자가에 못 밖아 죽게 하라. 죽이라. 죽이면 그 벌은 어떻게 하고 벌이 있으면 우리가 받겠다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아 죽인 것입니다.

왜? 악령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저들에게 유익되게 하는 것은 해로 여겼고, 그를 위하는 것은 그 불행스럽게 만드는 것으로서 저들의 본질과 본성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을 줬기 때문에 충돌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충돌이 돼도, 오해를 해도, 이해를 못해도, 반대를 해도, 원수를 품어도, 진정코 영원히 그에게 유익될 것을 준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영원성 없는 그 일시 위하고 일시 위하는 그것이 도리어 사람을 속인 것이 됐고 영원을 가지지 못하게 이 완전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이 기회에 완전 사랑을 가지지 못하게 이 가짜 사랑으로 미혹 시켜서 완전 사랑에 연결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유혹의 사랑입니다.

또 그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고 그를 유익하게 하는 것 같이 하여 자기 사람 되어서 자기 좋아해서 자기를 유익되게 자기 것이 되게 하려는 무서운 도적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양을 노략하려고 이리들이 왔다 거짓선지자들이 왔다 말씀했습니다.

15. 그 열매를 보아서 그를 알라

‘그 열매를 보아서 그를 알라’ 그 열매는 이 세 가지입니다. 조물주와의 죄면, 의(義)면, 결합면, 이 면이 바로 되면 그 사랑이 바로 됐고, 이것이 잘못됐으면 이것은 전부가 다 사망이요 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그 사랑의 역사만 보고 저를 위하면 사랑한 것인 줄 알고, 저를 기쁘게 하면 사랑인 줄 아는데 그것이 위함이 며칠이 가며 몇 날이 가며 그것이 뒤에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를 맺을 것인가 하는 이것을 알면 이것은 사랑 같으나 미움이라, 위하는 것 같으나 해하는 것이라, 나를 좋게 하는 것 같으나 나를 해치는 것이라, 나를 기쁘게 하는 것 같으나 나를 근심되게 하는 것이라, 나를 살게 하는 것 같으나 나를 죽게 하는 것이라. 이렇게 사람이 무지해서 마귀의 이 유혹에 들어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랑의 정의를 바로 가지지 못한 기독교의 나라가 점점 망해 가고 있습니다.

16. 사도 바울의 사랑

그 사람이 망할 길을 가는 것을 간다고 책망할 때에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역자들도 책망할 때에 좋아하지 안하고 책망하면 저거끼리 뚤뚤 뭉쳐서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그의 본질이요 본성이요 당연한 것이요. ‘그래도 너희들에게 유익한 것은 한마디도 내가 금하지 안하고 다 말했다’ 사도행전 20장에 사도 바울이 말한 그것은 다 돌 맞을 일이요 그 말이 매 맞을 일이요 미움 받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망하지 안할 행복 된 그 길을 가게 하려는 그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정의를 바로 알아야  됩니다.

(결론)

1. 사랑은 하나님의 것 뿐

그러기에 사랑은 하나님의 것뿐인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 방편으로 내가 이웃을 사랑해야 그것이 사랑입니다. 또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한 그 방편으로 사랑하는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사랑한 것을 배워 우리가 주님을 그와 같이 사랑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배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이 외에는 사랑도 없고 사랑의 방편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알지라’ 그러면 그 사랑했으면 그 결과에 사죄 역사가 있는가? 죄가 도말되는 역사가 있는가? 의가 건설되는 역사가 있는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역사가 있는가? 그렇지 아니하고 점점 그것이 그 역사로 말미암아 죄가 더 무성해지고, 의가 점점 도말되어지고, 하나님께 대해서 점점 무시하고 멸시하게 되어 지면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닌 마귀가 인간을 미혹을 시킨 가짜 사랑인 것입니다.

2. 사랑의 정의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정의를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지자들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을 지금 외칠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똑똑히 연구해 가지고 외칠 때요.

다 이렇게 죽이는 미움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꺼풀을 입혀서 무지한 그 지혜가 천박하고 유치하고 좁은 자 그런 자들 유혹시켜서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충고를 했고, 살리기 위해서 책망을 했고, 살리기 위해서 징계를 줬는데 가서 살살 달게 가지고 ‘야 그렇지만’ 그 사람에게 위로 주고, 기쁨 주고, 그 사람 편이 되어서 ‘너한테 너무한데’ 그 기회를 타서 간교를 부려서 그 사람을 자기 사람을 만드는 그 자는 살인자 중에 살인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지 그자가  살인자 아니요? 그 똑똑히 마음보를 알면 무섭고 징그럽습니다. 칼을 가지고 달아들어 찌르는 것보다 더한 자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친구라고 하고, 이것을 동지라고 하고, 진정 그를 행복 되게 하기 위해서 화를 멸하고 고칠려고 하는데 왜 그 사람을 아주 죽이는 그런 간교를 부리는 그것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하는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백영희목회설교록(1981. 4. 11. 토 새벽) 정리 김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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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아브라함의 3단계 믿음 김반석 2010.07.18
411 보배로운 믿음 김반석 2010.07.18
410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 김반석 2010.07.25
409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 김반석 2010.08.02
408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김반석 2010.08.08
407 삼십팔 년 된 병자 김반석 2010.08.25
40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김반석 2010.08.29
405 청종의 권위 김반석 2010.09.20
» 우리를 사랑하사 김반석 2010.09.26
403 우리의 피난처 김반석 2010.10.11
402 궁지에서 건질 분은 주님 한분 김반석 2010.10.31
401 기독교는 전투생활 김반석 2010.11.07
400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선지자 2010.11.14
399 산 제사로 드리라 김반석 2010.11.21
398 처세에 유일한 방편 김반석 2010.11.28
397 영감의 갑절을 구한 엘리사 김반석 2010.12.05
396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김반석 2010.12.12
395 구주 탄생 김반석 2010.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