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회란 무엇인가?
선지자선교회
◀성공회의 미사 집전 모습
1 영국성공회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성공회라는 교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공회가 태동한 영국교회의 시작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영국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된 것은 1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터툴리안(약 160∼225)은 그의 저서에서 ‘로마인이 끝내 정복하지 못한 영국의 각 지방도 그리스도에게는 마침내 정복당하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314년 프랑스의 아를에서 열렸던 공의회에 영국의 주교가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미 오래 전부터 영국에서 교회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마 교황 그레고리 1세(540∼604)는 영국 선교를 위해 주후 596년에 어거스틴(?∼604)과 수도사 40명을 파견한다. 이때부터 로마가톨릭은 영국교회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영국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게 되고 11세기 이후 봉건제도가 실시되면서 로마에서 파송된 주교는 많은 토지를 소유한 봉건영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또 교회 법정에서는 국가의 사법권을 대행하는 재판관이 되었다. 중세말에 이르러 교황청은 영국교회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착취하였으며 영국교회를 마음대로 지배했다.
이에 대해 영국의 국왕, 성직자 그리고 국민들은 교황의 지배를 반대하고 영국의 국가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는 후에 영국의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2 영국성공회는 왜 카톨릭으로부터 독립했나
영국성공회의 개혁은 헨리 8세(1491∼1547) 때 그 불꽃이 점화되었다. 로마교회와의 단절의 표면적 계기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의 결혼무효 소송이다.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는 사내아이가 없었다. 당시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다는 것은 영국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헨리 8세는 왕위 계승을 위해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다. 사실상 헨리 8세는 국가 이익을 위하여 형수인 캐서린과 정략결혼했고 이는 교회법에도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20:21)
그러나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이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교리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었다. 당시 교황은 독일 찰스 5세의 보호 아래 있었고 찰스 5세는 캐서린의 조카였기 때문이었다. 또 헨리 8세가 미망인 형수와 결혼한 것은 전임 교황이 허락한 것인데 이를 무효로 선언하면 교황권이 불신받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혼무효 청원이 거부당하자 헨리 8세는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는 ‘영국은 어떠한 외국 세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결의를 하고 영국의 로마교회(Church in England)를 영국성공회(Church of England)로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표면적 계기가 되었을 뿐 근본적인 동기는 외국의 지배를 벗어나 왕권과 강력한 국가를 이루려는 국가주의에 기초한 국민의식이 일치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자 앙드레 모루아는 그의 영국사에서 ‘헨리 8세의 이혼은 왕자를 얻어 전쟁의 위험을 피하고 영국 국가를 강하고 안전하게 하고자 한 것이며 그의 개혁의 시도는 군주로서의 무정견한 망동이 아니라 영국 국민의식의 종교적 표현이었다’고 하였다.
3 영국성공회의 종교개혁은 어떻게 발전했나
영국성공회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크랜머 대주교가 있다. 크랜머 대주교는 중세의 미신적이고 습관적인 의식을 폐지하고 프로테스탄트적 방향으로 개혁했다. 1549년 크랜머는 공동기도서를 만들었는데 이 기도서는 일반 국민이 모르는 라틴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여 모든 사람이 예배에 참여토록 했으며 성서 읽기표를 많이 넣어 중세교회가 상실한 성서적 요소를 회복시켰다. 이 기도서는 오늘날까지 세계성공회의 보배로운 유산이 되고 있다.
영국성공회는 엘리자베스(1553~1603) 여왕이 즉위하면서 종교개혁의 정착기를 맞이했다. 두개의 극단적인 그리스도교를 경험한 그는 극단을 피하고 중용의 길(中庸, Via Media)을 표방하는 신중하고 온건한 종교정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자를 포용하는 기도서 제정(1559)과 극단을 배제하고 중용의 노선을 추구하는 39개 신조(1563)를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성공회는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져오는 가톨릭적 전통을 유지하면서 종교개혁적인 복음사상을 받아들여 가톨릭적이며 개혁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4 성공회 신앙의 기준과 특징은 무엇인가
성공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는 권위에 대하여 독특한 관점을 발전시켰다. 성공회는 신앙을 판단하는 권위를 성서와 이성(理性) 그리고 전통의 근거에 의해 서로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성서는 종교개혁의 출발점이다. 성서는 잘못된 전통과 진리를 비판하는 힘이다. 진리의 회복으로 종교개혁은 존재하는데 그 비판과 회복을 위한 최우선의 권위는 성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권위는 전통과 교리를 절대화하려는 모든 신학적 노력과 주장을 상대화하려는 비판적 원리다. 따라서 성공회는 잘못된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 성서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오로지 성서로만’이라는 원리에도 약점은 있다. 즉 역사적 발전을 간과하여 환상적인 원리적 신앙을 추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상을 피하기 위해 인간 이성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때의 ‘이성’은 해석자의 자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교회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판단하는 이성(cosmic and corporate Reason)이다. 이 점에서 이성은 전통보다 앞선다. 전통은 이성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성의 역할은 합일이 이루어지는 원칙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성은 인간의 경험이 사물의 본질과 조화를 이루는 근거다. 즉 성서에 담긴 계시는 특정한 역사와 조건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다른 역사 속에서 재해석하려면 이성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 성공회에서 전통은 인간의 경험과 실천 그리고 합의가 최종적으로 만들어낸 산물로서 교회의 중요한 권위다. 즉 성서에 대한 이성적 작업으로 축적된 신앙의 결과물이 바로 전통이다. 그러므로 전통은 성서와 이성에 의해 제공된 것에 종속되어야 한다. 전통은 성서에 속한 초자연적인 최고의 진리를 가져다 줄 수 없지만 개인적 판단의 위험성을 피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전통은 성서와 이성에 근거한 인간의 ‘실천, 경험, 동의’에 의해 필요에 따라 변경되고 폐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공회는 이렇게 성서와 이성과 전통의 긴장관계를 통해 교회사에 나타나는 극단적인 주장과 오류를 피하는 ‘중용’의 정신을 구현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의 정신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극복하고 일치를 추구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고 본다. 아울러 세계성공회는 1888년 람베드회의에서 채택한 다음의 람베드-시카고 4개 조항을 함께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위한 신앙적 기준을 삼는다.
①구약과 신약 66권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②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은 그리스도 신앙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선언이다. ③세례와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두가지 성사다. ④역사적 주교직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적절한 처리방법이며,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