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이름 : 중선 번호 : 52
게시일 : 2003/06/29 (일) AM 11:14:02 (수정 2003/06/29 (일) AM 11:15:02) 조회 : 65
■ 복음문화 큰빛 밝힌 벽안의 선교사-새문안교회 세운 언더우드 목사
"1883년 초엽 올트만스 박사는 장로교 뉴브룬스윅 신학교의 선교지망생들을 모아놓고 최근 서양 각 국가 조약을 맺고 개국하기에 이른 은사의 나라에 관한 글 한편을 읽어주었다. 복음을 받지 못한 1천3백만명에 대한 이야기...82년 슈펠트 제독과의 조약체결(한미수호조약)로 문호가 개방되었으나 교회측이 무관심하여 1년여를 거저 보냈다는 이야기...거기 갈 선교사를 찾는다는 이야기...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교회와 선교 지도자들도 시기상조를 내세우고 있을 때…나에게 메시지가 왔다. '너는 왜 못 가느냐'"
이로부터 2년 뒤인 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이 고백의 장본인 언더우드는 마침내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인천부두에 한국개신교 선교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총명하고도 불같은 정열을 가진' 26세의 청년이었다.
아펜젤러와 함께 첫발
당시 미국은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해외선교열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신앙적이고 진취적인 미국 젊은이들 중에는 해외선교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
특히 1880년에 시작된 미국의 전국신학교연맹은 이같은 선교열을 더욱 구체화. 조직화시켜주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남장로교의 초대 한국선교사들도 이 연맹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사실 언더우드목사는 한국의 새벽을 깨우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경신중고 및 연희학원을 설립하여 신교육의 터전을 닦고 조선 장로교 조직을 정비, 선교토대를 마련했으며 숱한 저술을 통해 한국을 해외에 소개하기도 했고 또 '춘생문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 본의였든 아니든 구한말 한국정치상황에 깊이 관련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의 행적의 본령은 목회에 있었고 그중에서도 한국장로교의 모 교회라 할 새문안교회 설립이 그 으뜸이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 2백여m를 가다보면 오른켠에 진입로가 보이고 한길에서 조금 물러앉은 새문안교회 건물이 나타난다. 신문로 1가 42번지.
그러나 이 자리는 1907년에 옮겨온 곳으로 정작 새문안교회의 첫자리는 큰길 건너편 현재의 정동 예원학교 운동장 자리. 당시 앨런 선교사의 집 오른쪽, 옛날 강로 정승의 집이다. 언더우드는 이 집을 얻어 안채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집 사랑채가 바로 교회의 시발지다. 그래서 처음에는 교회이름도 '장로교 정동교회'라 했다. 장로교 정동교회와 감리교 정동교회가 초창기에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1887년 9월27일 가을저녁(화요일) 서상륜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있던 서울신자 등 14명이 이 집에 모여 언더우드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예배를 드렸으니 이 일이 새문안교회의 출발 이다.
장로교 정동교회로 출발
교인 수가 급증함에 따라 1895년 교회를 대로변 (전 피어선신학교 자리)으로 옮기고 1904 년 10월 송순면장로가 장립되면서 당회가 조직되었다.
한편 언더우드는 자기 집에 영국 고아학교형태의 '예수교학당'을 열고 학비에 의복과 음식까지 주면서 한글 성경 등을 가르쳤다. 이는 이후 구세학당으로 바뀌었으며 1901년 연동으로 교사를 옮겨 경신학교라 하였으니 오늘날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예수교학당을 거쳐 경신이 배출한 인물 중에 김규식박사가 있다.
"이 아이(김규식)의 아버지는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고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관청의 눈이 무섭고 살림이 어려워 친척들도 외면한 여섯살바기를 우리 고아원에 데려왔다. 자꾸 울기만해 돌려보냈으나 구박이 심하다는 소문을 듣고 원목사(언더우드)가 통조림과 우유를 들고 찾아가니 배가 고파 울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다 죽게 되었고 죽으면 말썽만 나니 데려가지 말라 했으나 원목사는 이 애를 데려다 애정으로 양육, 훌륭한 기독교인 이 되게 했다"
언더우드 부인의 기록이다. 지금과 비교해볼 때 당시 한양은 인지가 덜 깨이고 물질적으로도 궁핍한 땅이었다. 88년 늦은 봄 항간에는 '외국인들이 조선아이들의 눈알을 빼서 안경 알을 만들고 염통을 빼어 약을 만든다' 는 허무맹랑한 낭설이 나돌았다. 카가 크고 눈알이 파란 서양인들은 하루아침에 양도깨비가 되었고 성난 군중이 두려워 바깥출입도 삼가야할 형편이었다.
당시 광혜원에서 일하고 있던 호튼양도 이 통에 가마꾼들이 다 도망가 버려 당황해 하고 있었다. 이때 용감히 말고삐를 잡고나선 총각이 바로 병원 일을 보고 있던 언더우드였다. 1 년 후 그들은 백년해로를 약속했고 서울에서 의주까지 함께 전도여행 겸 신혼여행을 떠난다
신부를 가마에 태우고 임진강나루를 건너 오두막 주막에서 하루를 묵기도 하고 구경꾼들의 놀림과 위협도 감내하며 의주에 이르렀다. 아직도 선교가 자유롭지 못하던 때라 국경인 압록강에서 의주교인 33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국의 요단강 세례'다.
이 오지 순회전도여행은 초기 한국교회 선교의 중요한 모델이 되고 있다.
교회사가 민경배교수는 "한 역사적 인물을 당시 시대상황과 완전히 유리시켜 평가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전제하고 "언더우드 목사는 한국의 기독교뿐 아니라 서양문화 도입에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했으며 한마디로 한국근대문화는 그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했다.
/전인철기자
<언더우드 약력>
1859 런던 출생
1872 전 가족 도미
1881 뉴욕대 졸업 뉴브룬스윅 신학교 졸업. 한국선교사 임명받음
1885 일본 거쳐 제물포 도착. 광혜원에서 일하며 한국어 연마
1886 고아원설립 노도사에게 세례. 구세학당 창설(현 경신중고 전신)
1887 1차 전도여행(소래 평양 의주). 새문안교회 창립
1889 '한국어문법' '한영자전' 간행. 예수교 성교서회 창설. 호튼양과 결혼. 2차 전도여행 (압록강 세례 집전)
1890 1차귀국 (한국실정 알리고 선교사 파송 요청). 92년 귀한
1893 한국 첫 찬송가 출간
1895 '춘생문사건' 발발
1897 '그리스도 신문' 창간
1900 기독청년회 조직
1901 2차 귀국(안식년)
1903 기독청년회 회장 피선
1906 건강 악화로 3차 귀국
1907 조선장로회 독노회 창립
1908 귀한. 대학설립 계획. 'The Call of Korea'출간
1910 'The Religion of East Asia'출간
1912 조선장로교 총회 창설. 휴가차 일시 귀국(4차)해 대학설립자금 모금
1913 조선장로교 총회장에 피선
1915 연희학원 설립
1916 건강악화로 귀국. 10월 별세
1927 새문안교회에 기념비 건립
1928 연희학원 교정에 동상 건립
게시일 : 2005/10/10 (월) PM 02:11:53 조회 : 63
■ 언드우드 선교사의 기도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두움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의심부터 내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사람들의 속셈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 나라의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에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도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