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광훈丁光訓의 구원론은 다른 복음이다
선지자선교회
王瑞珍 牧師
중국 삼자교회의 최고 지도자 정광훈이 1998년에 정광훈문집(丁光訓文集)을 남경의 역림(譯林)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삼자교회의 신학적 관점들이 그의 문집에 잘 나타나 있다. 물론 그의 사상이 전 삼자교회 목회자들의 신학사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삼자교회 상층부의 신학사상임은 분명하고, 또한 중국정부가 그의 문집을 교과서로 삼아 삼자신학교들과 삼자교회들의 신학과 신앙을 변질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 특히 구원론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본고는 중국복음선교회 출판부장인 王瑞珍 목사가 중국선교사훈련원에서 2000년 9월 4일-8일까지 "중국가정교회의 신학사상과 이단"이란 주제로 강의한 내용 중 <정광훈의 구원론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것이다.
1. 인간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낙관적이다.
정광훈은 "우리들은 "우리들은 인간이 죄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죄가 세상에 가득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p.202) 그는 한편으로 죄의 사실을 인정하면서( p.86) 다른 한편으로 인성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이며 인간의 전적부패를 반대한다.(p.86) 이로 인해 그는 歸正(회개와 믿음)을 중시하지 않으며, 인간의 내면에 여전히 선함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것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인류는 끊임없이 진화랄 것이라고 믿는다. 심지어 Teihard de Chardin(프랑스 고고학자, 예수회 수사, 과정신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를 고무하며 "어느날이 이르면 우리들이 비바람과 바다와 지구인력을 관리할 수 있은 후에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해 사랑이라는 이 에너지를 조종함으로써 인류는 장차 세계역사상 제2차 불씨와 같은 발견과 같다"고 말한다. 즉 사랑이 계속해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2. 우주적 구원의 색채(보편구원론).
직접 언급하지 않으나 정광훈의 저서 가운데는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도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를 해석하며 말하기를 "중국기독교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이 문장을 읽어야 하는데, 이는 이 문장이 해방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빛과 같이 우주에 충만하고 높은 산을 밝히고, 깊은 계곡을 밝히는 것과 같다. 여러 가지의 색채를 모두 불러낸다. 존재는 하나의 거대한 과정이고 최후에 도달하는 것은 남녀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공동체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는 삼위하나님 자신이 사랑의 공동체 였기 때문이다."(p.27)
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좌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5;15)를 예로 들어 해석하기를 "단지 범죄가 은사만 못하다. 만약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죽는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이 사람들에게 입하지 않겠는가?"라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보면 그리스도는 아담보다 강하고 상급은 패역보다 강하고, 은혜는 죄악을 강조하는 것이다. ..... 그러나 항상 어떤 사람은 죄를 보편화하는데 힘을 더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구속을 소수의 대상으로 제한함으로서 마치 아담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낙인은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것보다 더욱 깊게 했다."(28p) 여기서 소위"갑절을 대면한 모든 사람"에서 "모든 사람"은 "전 인류"를 말하는가 아니면 "모든 믿는 신자"인가? 정광훈은 "만약 하나님께서 단지 자신을 믿은 사람을 자녀로 삼고, 그들에게만 영생을 주었다면 그는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을 창조해 냈을 것이고, 그중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최후에 지옥의 자식이 된다고 했을 때 믿을만하고 사랑이 있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pp.275-276)
3. 유일한 사랑주의 : 하나님의 공의와 사람의 회개를 강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한다.
"하나님의 근본속성은 그의 무소불능이나 그의 무소부지, 그의 스스로 계시고 영원히 계시는 것, 그의 위엄과 영화가 아니라 그의 사랑이다"(p.32) "무엇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가? 바로 그의 사랑이다"(56)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의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었고, 일종의 기형적인 하나님의 관념을 주지시킴으로써, 즉 하나님이 그의 화로 인해 불신의 모든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다."(p.85) 중국기독교에 대해서 말한다면 보복적이고 사람으로 두렵게 하고 인류에 독재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배척하지만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동정하고 우리와 함께 한 가지로 고통을 받고 차분하게 잘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이런 변화를 진정한 해방이라 한다."(p.97) 하나님은 사랑임을 이해해야만 하는데, 다만 그를 인간의 부친이 되는 것에 비하는 것은 거리가 멀고 부족한 것이다. ..... 사랑이 세상의 아버지들의 특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성경중의 어떤 장, 절은 매우 분명하게 모친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했다.(사66:13,46:3-4,49:15,시편121:2,마33:37 등)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정광훈은 여러 차례 호세아서11:4를 인용하면서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글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두었었노라" 오히려 아래 문장이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주의하지 않았다. "저희가 애굽 땅으로 자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호세아서11:5-6)
4. 구속(救贖)의 문(門)을 확대함.
정광훈은 골로새서1;15-17, 히브리서1:3, 요한복음1:9, 빌립보서2:6-11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 충만한 만유의 그리스도라고 여긴다. 이는 "더욱 크신 그리스도"이다. 그는 인도의 신학자 마타이싸자리얼의 말을 인용하여 "과거에 우리가 본 장래는 교회가 나가서 각 나라의 여러 사람을 불러서 그리스도의 품안에 돌아오게 하는 것 (전도운동을 가리킴)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을 감동시킨 장래는 또 다른 한 폭이다.(또 다른 것이다.) 우리들이 본 것은 그리스도가 창조된 모든 세계와 인류가 그와 하나의 목표로 걸어가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같은 구속의 과정중 그것은 인류의 모든 발달과 해방과 인화(사람을 상대적으로 여김)의 운동을 사용한다. 그는 "교회는 하나님의 유일한 그릇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교회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pp. 251-252)
정광훈은 또 60년대의 바티칸 제2차 대공회의의 관점인 "교회의 외부에는 결코 타락과 멸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용했다.(p.252) 또 독일의 신학자 라네아의 관점을 인용하여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써의 그리스도인이라 칭하지 않는다"하였다.교회 외부에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음을 나타냄으로 교회 밖에서의 진선미를 강조한다.(p.253) 정광훈에게 인류의 모든 발전과 민주와 인도주의 운동은 모두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되는 일이다.(p.115) 그는 "사회복음"을 추진하고 숭배한다.(p.27) 비록 그 내용을 해석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정광훈의 모든 책은 사회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찬양하고 있어 사회주의의 소위 말하는 "해장"과 그리스도의 구원을 서로 제기하고 논하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정광훈은 무신론과 사회주의 등은 모두 하나님의 구속의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비록 구원의 은혜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상대적으로 구원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며,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은 대체될 수 없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더욱이 그들 모두가 곧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매우 위대하고... 하나님의 기량은 그렇게 위대하시다. 비록 오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믿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는다. 다만 그를 위해 안타까워하시며, 그가 스스로 깨닫고 자신과 교통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기 때문에 단지 신(信)과 불신(不信)의 문제로 글을 쓰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당신들은 내가 샤르뎅의 신학관념을 감상하는 것을 볼 수 있다.(p.205)
5. 구속의 범위 확대와 그리스도의 우주성 강조.
창조의 완성이 구속의 완성이다. 계속해서 창조되어 가고 있다. 구속이 인류에만 제한되지 않고 우주에까지 포함된다.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의 과정을 인도하고 있으며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의 목표를 실현했다. 그리스도의 이 구속사역의 항목 중에서 인류는 진보와 해방과 민주와 박애의 운동을 쟁취하여 모두 하나가 되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선전하는 것으로써 참회하고 경배하는 활동을 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전 세계 모두는 교회가 전하는 죄사함과 화목과 화평의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결코 교회범위 내에 제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모든 우주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이같은 주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정광훈은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요1:9)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의 우주성을 강조하였다.(p.251) "모든 피조물이 모든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대상이다. 우리들은 이같은 반성품(半成品)의 임무는 하나님께서 창조프로젝트에서 도움의 손이 되는 것이고, 이 프로젝트를 돕는 동시에 자신이 점점 반제품에서 완성품이 되는 것이다. 창조는 구속을 포함하고 있고, 구속은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기 위함이다. "(p.278)
6. 창조는 곧 구속이다.
"한 종류의 관점을 우리는 분별 없이 맞장구 칠 수 없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오히려 또 그를 반역자 사탄의 손에 내버려뒀다. 그리스도는 오로지 세상을 구원하고자 그의 선택된 작은 인원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다. ...그리스도는 기독인을 구속할 뿐만 아니라 그의 구속은 전 인류에 미쳤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계획은 모든 우주를 포함한다. 이와 같이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나 교회의 보혜사 일뿐 아니라 일반적인 미와 선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한다.(pp.93-94)
"하나님은 사랑이며 그가 관심을 간는 것은 창조로써 즉 구속과 교육과 성화를 통하여 인류가 점차 아름다움을 이루며, 창조의 참여자가 되고 죄의 질고를 벗어버리며, 또한 모든 저급한 취미 등을 벗어버리고 지혜가 가득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p.95) "어떤 사람의 신학은 信과 不信을 축으로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해방신학과 샤르뎅의 시각은 매우 넓어지고, 이 문제를 초월했다. 나의 이해를 따라 샤르뎅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행하시는 창조의 위대한 목적과 하나님의 창조사업의 모든 과정을 보는 것이다.(pp.197-198) 샤르뎅은 하나님의 6일 창조완성과 제7일 안식의 견해를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은 계속 창조하셨으며, 또한 계속 창조하고 계시고, 창조의 목적은 최후에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새 사람의 출현이 바울 서신 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 새사람으로 완성되는 단계를 말한다. 샤르뎅의 사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창조이며 또한 구속의 과정이고 또한 교육의 과정이다. 창조, 구속, 성화, 교육은 하나이다."(p.199)
역사를 크게 3단계로 나눈다. 제 1단계는 유기질의 나타남으로써 준비하는 것이고, ... 제2단계는 유기질의 출현에서 사람의 출현이며, ...제3단계는 사람의 공동체의 완성이다. 사람이 출현했지만 그러나 사람의 공동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간에 여전히 모순이 있다. 이 단계는 무엇으로 끝을 이루겠는가? 공동체의 완성으로 끝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성령의 성화이며 도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이고 하나님의 창조사업이다.(p.201)
샤르뎅의 시각에 따르면 사람은 과거에 창조나 진화에 있어 반제품이다. 그는 앞으로 개조의 대상이며, 또 진일보한 사람의 원동력이다. 우리들은 일정한 정도에 있어 이미 이와 같이 지각하고 있으며, 어떤 점은 하나님과의 공동체를 건립하기를 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의미에 있어 우리는 반성품이다. 사실 우리는 반성품으로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역사를 촉진하고, 진화를 촉진하고 창조를 촉진하게 하고자 한다. 이는 바로 반성품이 완성품으로 되는 과정이다. 창조의 완성을 구속으로 본다.
7. 구원이 현 세상에 함의됨에 치우쳐 있다.
"교회를 잘 운영하고자 한다면 ..... 함께 많은 문제를 중시하고 연구해야 한다. ... 어떻게 이단사설을 억제하며, 어떻게 성경해석을 잘하며, 어떻게 영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통일적인 신학사상으로 세울 것이며, 교회와 사회주의로 상호 적응하게 할 것인가"(p.376)
"확실하게 나만 죽음 후에 천당에 가서 영원한 복을 누리고 영을 지켜나가기 위한 그리스도인이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은 말하기를 살아생전의 관심은 사망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반 사람과 같으며, 생활하고 일하고 배우고 가정을 이루고 살핀다. 그들은 ..... 인생을 보고 현실에 자신을 투자하고 또한 교회의 공동체를 통하여 자신으로 또한 사람들로 그리스도가 말하는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한다. ... 기독교는 사람의 생활을 도우며 잘 살아가도록 돕는 것을 가리킨다."(p.274)
"성경은 옳고 그름을 말하며, 도덕을 말하며, 어떻게 행하는 것이 좋은지를 말하며 도한 사회에 응당 어떻게 해야 하며 정치의 어던 부분을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 많은 차이를 갖고 있다. 그러나 현재 어떤 기독교는 단지 개인의 구원만을 묻고 있고 ..... 그들은 교회 내에서 오히려 교회 외부의 그와 같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시각을 나누어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서로 ..... "(p.415)
이와 같이 정광훈은 영적인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8. 결론.
정광훈이 슨 책중에 구원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샤르뎅의 "유신적 진화론"이며, 그는 우리로 계속 우리 속의 진선미를 계속 발전시켜서 하나님과 합해져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최후에는 우리 자신과 모든 우주가 곧 완전하고 하나됨의 지경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정광훈은 귀의(회개와 믿음)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이나 진정한 부활과 영화로움 등 가장 핵심적인 구원론에 대해 한 번도 중시하지 않았다.
정광훈의 구원론의 근본문제는 성경의 전체적인 계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광훈의 주류사상은 성경이 아니라 사회주의이고, 해방신학이고, 샤르뎅적이고 자유적이고 또한 보수적이지 않고 낙관주의이고 진화론적이다. 만약 정광훈의 사상이 정확하다면 성경의 80%의 내용은 응당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 그의 사상과 성경의 주장은 매우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다. 성경의 구원론에 대한 주장은 한 사람이 진정 회개하고 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미 경험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광훈과 같은 낙관주의적인 구원론은 사실 아름다운 공중에 지은 누각과 같고, 진정한 근거는 없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쫓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갈1:6-7)
이로 볼 때 정광훈의 구원론은 다른 복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