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8 10:25
나수화 청년의 신천지생활 7년 그 생생한 증언
다음은 신천지에 빠졌던 나수화 청년의 신천지 생활 7년 그 생생한 증언입니다.
'교회와신앙’에 2014년 7월 1일부터 2014년 8월 8일까지 9차례 연재된 글입니다.
증언 : 나수화
1. 신천지 첫 걸음 ‘복음방-센터’ 수강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어쩌다 사이비란 말조차도 분에 넘칠 ‘신천지’에 처음 들어간 날이.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06년 겨울이었다. 당시의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부모님이 “신천지라는 좋은 교회가 있다. 그런데 그전에 먼저 ‘복음방’에서 공부하고, ‘센터’ 6개월을 수강한 후 수료시험 만점을 받아야 교회로 들어갈 수 있다. 성경공부를 잘 한 사람만 갈 수 있다.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당시 신천지가 사이비종교라는 것을 나는 잘 몰랐다. ‘사이비종교 하면 무조건 겉모습부터 이상하고 금방 알아챌 것이다’는 터무니없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사이비종교가 우리 주위에는 없겠지’라고만 생각했기에 엄마아빠가 다니는 신천지가 사이비라는 것을 미처 생각 못했다. 한마디로 의심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신천지는 이렇게 나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로 복음방 선생님이라고 하는 20대 언니가 일주일에 몇 번 우리 집에 방문하였다. 주로 우리 집에서 공부를 했으며, 가끔은 동영상을 보여준다고 집근처에 있는 건물에 들어가 공부하기도 했다(아마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가 열리는 곳 같았다. 지금도 계속 유지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로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 구약과 신약의 간단한 요약, 아담과 이브가 왜 죄를 지었는지, 성전, 교회의 진짜 의미 등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가끔 성경 구절의 몇 부분을 똑같이 공책에 옮겨 적게 하는 숙제도 내주었다.
2007년 3월부터 복음방 과정을 마친 후 월화목금 저녁에는 매일 부모님과 함께 ‘신천지학원’이라 불리는 센터에 다녀야 했다. 2007년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느 대학교에 합격했으나 비싼 등록금 때문에 못 다니고 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가르쳐주는 컴퓨터 기술개발원을 다니게 되었다. 매일 기술개발원에서 8시간 공부를 하고 나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몸이 무척 피곤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빨리빨리’ 라고 재촉하셔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허둥지둥 센터에 가야만 했다.
센터에서는 복음방 과정에서 공부했던 것을 더 자세하게 보충해주는 느낌이었다. 성경에는 ‘비유’가 있다고 수도 없이 가르쳤다. 소위 ‘비유풀이’는 쉽고 재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20살의 성인이 된 나에게 엄마아빠가 이미 1번을 수강했다는데도 굳이 나를 위하여 재수강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속기사나 수화통역이 없다는 것이 더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요즘 장애인관련법이 많이 개선되어 청각장애인에게는 수화통역이나 속기사통역이 필수로 지정되었지만 아직도 일부 대학에서는 지원이 어려워 많은 청각장애 대학생이 수업공부에 큰 불편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신학을 공부한다는데 왜 그 정도의 배려조차도 안 해주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저 다른 사람의 필기 노트만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불만스러워 불평을 했다. 그러자 부모는 그저 ‘열심히 공부하라’고 화만 낼뿐이었다.
내가 다니는 기술개발원에서는 수업할 때 수업내용을 타자로 쳐서 자막으로 보여준다. 그런 형식의 수업을 원했는데 신천지 센터에서는 그럴 인력도, 그런 배려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인지 나 같은 장애인은 한 명도 못 본 것 같다. 강사는 강의를 할 때 오로지 말로만 하고 중요한 단어는 칠판에다 적을 뿐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어떤 청각장애인이 가족 한 명도 없이 혼자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면 공부를 하도록 배려를 해줄까?
솔직히 나는 내가 스스로 원해서 신천지 센터에 다니는 유형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적극적인 권유와 그 곳에 다니신 부모님의 긍정적인 변화를 보고 ‘그렇게 좋은 곳인가?’ 하는 마음도 있었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센터를 다닌 것이 맞다. 원래 늘 화를 내시고 많이 힘들고 지친 모습만 보인 부모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시고, 나한테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하시는 부모님의 변화가 왠지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변하신 걸까?’ 알고 보니 신천지란 곳을 다니신 후에 그렇게 달라지신 것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신천지란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 하던 찰나 부모님께서 다니라고 하시니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7년 8월에는 6개월의 수료과정을 마치고 수료시험을 봤을 것이다. 6개월 동안 청각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 수업방식에 굉장히 불만이 많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수강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 혼자만 불만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차마 불만을 표현하기보다는 그저 부모님이 필기해주는 것을 보고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나 공부 안 해!”라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철없는 딸이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어리석은 21살의 나였다. 그 곳이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다녔는가. 수료 100문제 시험에 합격하겠다고 수능시험을 공부하는 것처럼 밤낮으로 그렇게 열심히 비유풀이 따위를 외워댔던가.
문득 수료시험을 다 보고 났을 때가 생각났다. 열심히 수료시험의 문제를 푸는 나를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던 부모님에게서 자식이 시험에 합격하시길 바라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속으로 ‘무슨 수능시험 응시하는 자녀를 지켜보는 부모님 같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100문제의 답을 미리 기억하고 외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치 진짜 수능시험을 보는 것처럼 열심히 답을 생각하고 썼다.
마침내 시험을 다 보고 난 후에 시험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나의 시험점수는 딱 한 개 틀려서 99점이라고 했다. 청년들의 경우엔 젊고 기억력이 좋으니까 반드시 100점 맞아야 한다고 들었다. 전도사가 약간 낙심하는 나를 보더니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특별히 100점 맞은 걸로 처리할게요.”라고 하셨다. 당시의 나는 그걸 의심도 안 하고 그저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보니 그 때부터 ‘부정시험’, ‘사기’의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시험이란 자고로 정직하게 결과를 반영해야 하건만 전도사 마음대로 시험 점수를 약간 바꾸는 것 자체가 이미 신천지 특유의 ‘거짓말’의 특성이 아닌가?
2007년 9월쯤은 수료식을 한 날로 기억한다. 센터에서 강의한 강사와 다른 강사들은 뭔가 목사님 같은 의복을 입고 있었다. 수강생들은 마치 대학교를 졸업할 때 입는 졸업복과 학사모를 쓰고 있었다. 벌써 7년이나 지나서 당시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똑같은 졸업복을 입고 있는 수십 명의 수강생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수강생도 기억이 난다. ‘그렇게 눈물까지 흘릴 일인가?’ 의아해했지만 6개월 동안 힘들게 공부하고 100문제 시험이라는 난관까지 통과해서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동안 그렇게 힘들게 다니고 아무나 들어오기 어렵다는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하겠다’라고 이해했다. 총회장이라는 사람의 알아들을 수 없는 지루한 설교가 끝난 후에 마침내 본격적인 수료식 의례를 시작했다. 강사들이 수강생이 쓴 모자의 끈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시켜주는 그런 의식이었다.
그렇게 수료식을 마치고 부모님과 함께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을 들어가게 되었다. 의외로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교회는 2층 형태의 건물이었다. 입구가 2개였고 뒷문도 1개가 있었다. 특이하게 교회 입구 근처에는 매점이 있었다.
수료식을 마치고 교회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은 ‘새신자교육’을 약 2주 동안 받아야 했다. 이 교육 역시 또 강사로 보이는 사람이 말로만 설명해서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 번 동영상 자료를 보여주긴 했지만 별다른 재미는 없었다.
2주간의 지루한 교육이 끝나고 수요일 저녁, 일요일 낮에 예배를 드리려 나와야 했다.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릴 때 다닌 교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보통 교회에 흔히 있을 법한 장의자가 없었다. 연로하신 자문회 성도를 빼고 모든 성도들이 바닥에 양반자세를 하거나 무릎을 꿇고 앉아야 했다. 그렇게 하면 무릎이나 허리에 안 좋은데 그 누구 하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모습에 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 기도하는 모습이 사뭇 우습고도 특이했다. 안경을 쓴 사람은 기도할 때 반드시 꼭 안경을 벗어야 한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릴 때 양손은 바닥에 짚어야 하고, 여자는 양손을 무릎 위에 포개놓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다른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기도방식인데도, 신천지 교회 안에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도 서서히 익숙해져서 기도를 드릴 땐 자연스럽게 안경을 벗고 드렸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청각장애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든 설교는 오로지 말로만 했다. 글씨로 보여주는 것은 설교가 다 끝나고 나서 시작하는 광고뿐이었다. 뭔가 좋은 말을 열심히 설교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부모님께서 필기해준 것을 봐도 모든 설교가 다 적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저 물고기같이 우물우물하는 총회장이란 사람이나 강사의 얼굴을 보고만 있다가 지루해지면 딴 짓을 하곤 했다. 주위를 둘려보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상하게도 총회장의 말끝마다 “아멘! 아멘!” 열심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짧고 간단한 말에다 워낙 입을 크게 해서 이 한 마디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기이한 현상에 나는 ‘왜 그렇게 열심히 아멘 하는 것일까? 그렇게 좋은 말씀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하고 같이 다녔다. 그 때 구역장이란 사람이 내가 청년이라 청년회에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청년들끼리 모이는 청년회실로 가게 되었다. 교회보다는 좀 더 활기찬 느낌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구역모임 때는 구역장, 팀장과 알게 되었다. 모두들 친절하고 사근사근하고 잘 대해주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구역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좋은 사람 같았다. 대체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나는 왠지 선뜻 이 분위기에 녹아들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부모님이 다니는 교회니까, 나도 잘 적응해서 열심히 다녀야겠다고만 생각했다. 여전히 신천지가 이단일 줄은 미처 몰랐기에 가능했던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여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니니까, 설마 이상한 곳이겠어?’ 이런 생각을 하고 온갖 의문점들과 의심은 애써 무시했다. < 계속 >
2. 신천지가 이단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나 이미 의심을 그만둔 나
2007년 겨울쯤, 어느 날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예배가 끝나고 나서 어김없이 광고가 시작되었다. 광고 시간만큼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글씨가 나오는 화면을 열심히 보게 된다. 그나마 못 듣는 내가 유일하게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번 광고에는 동영상이 나오는데 ‘PD수첩’에 관한 것이었다. MBC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이다. 신천지가 나왔다. 바로 신천지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신천지를 탈퇴한 사람들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전체 분량은 아니고 편집되어 나와서 짧게 끝났다. 이 동영상은 ‘이 방송 때문에 우리 신천지가 억울하게 핍박받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 “기성교회가 우릴 핍박하고 질투하니까 저렇게 방송으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서 우릴 방해하는 거야.”라고 하셨다. 나는 당시엔 정말 그런 줄로 믿게 되었다.
지금의 내가 보면 그런 내 자신이 참으로 신기하고도 무서웠다. 처음에 그렇게 의심하고 불편해했던 내가 PD수첩을 통해 신천지가 이단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이제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144,000명을 채우면 나라와 제사장이 되어 ‘영생’한다는 사실이 무척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느꼈었다. 분명히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신천지에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차츰 ‘영생’을 믿게 된 것이다. ‘제대로 믿고 성경공부 열심히 해서 깨달으면 내 모습이 완전히 다르게 변하고, 아픈 곳이 없어지며 영원히 산다’는 달콤한 유혹에 빠진 것이다.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으나 한편으론 은근히 ‘그것이 언젠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신천지에서 수시로 ‘초림 때 예수님이 이단으로 핍박 받았듯이 우리 신천지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고 핍박받고 있다. 하지만 핍박받을수록 나중에 더욱 더 큰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주장을 한다. 동영상이나 다음카페 ‘진짜바로알자 신천지’ 카페에 올라오는 글에서도 자주 나오는 주장이다. 그 내용이 너무나 그럴듯해서, 처음부터 경계하고 의심하던 나도 서서히 넘어간 것이 아닐까. 그렇게 점점 ‘신천지를 의심하지 말고 열심히 성경 공부하고 다녀야겠다! 부모님도 열심히 다니시니까’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2008년에는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제5회 신천지 하늘문화체전이 열렸다. 교회에서 여는 체육대회 치곤 꽤 규모가 크다고 느꼈다. 전국에서 각 버스를 타고 온 성도들이 줄을 서서 운동장으로 향하는 모습도 장관이었다. 마태지파도 새벽 일찍부터 버스를 타고 도착했다.
체전이 시작되기 1개월 전부터 미리 응원동작이나 춤을 연습한다. 주로 예배 끝나고 나서 몇 십 분간 연습을 했다. 마스 게임을 하는 사람은 평일에도 시간을 내서 연습하는 것 같았다. 각자 운동복, 모자, 장갑 등등을 자기가 비용을 부담해서 샀다. 또 별도로 체전용 비용을 걷었다.
다른 교회는 이런 것은 엄두도 못 낸다고 했을 때 괜히 신천지가 자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전국 12지파가 한 곳에 모인 그 모습은 굉장하다고 느꼈다. 특이한 건 지파마다 색깔이 달랐다. 초록색, 분홍색, 보라색, 하늘색, 연두색, 주황색, 노란색 등등…. 그래서 의자에 앉은 모든 신천지 성도들의 알록달록한 색깔이 돋보였다. 각 지파마다 색깔이 다른 이유가 하늘의 12보석의 열두 가지 색을 따왔다고 한다.
나는 청년회 쪽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사람들의 응원동작을 따라했다. 총회장의 연설이나 공연 빼고는 응원하느라 거의 앉아있지 못한 것 같았다. 특히 파도타기를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체육복 점퍼를 벗어서 옆에 있는 사람과 소매부분을 연결한 다음, 우리 차례가 오면 번쩍 드는 독특한 파도타기였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좀 지쳤다. 거기에 축구, 육상 등 스포츠대회가 시작되면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 다양한 응원도구를 들고 목이 터져라 응원해야 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먹을 때에야 한숨을 돌렸다. 힘들었지만 태권도, 무용, 마스게임 등 다양한 공연이 정말 멋지다고 느껴서 나름 재미있게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어머니는 부녀회 자리에서 응원을 하셨고, 아버지는 체전을 시작할 때 입장하는 기수단에 참여하셨다. 걸어갈 때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똑같이 팔을 흔들며 힘차게 입장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규칙적으로 발을 맞추면서 총회장 쪽을 향해 경례 자세를 취했다. 이게 쉬워보여도 100명 이상의 인원이 척척 동작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래서 아버지는 주말 때마다 예배 후 연습에 매진하셨다. 첫 번째 체전은 그렇게 힘들긴 했지만 그저 재미있다고 느꼈고, 더더욱 신천지에 대한 의심이 없어졌던 것 같다.
체전 후 시간이 흐르고 나서 구역 편성으로 새로운 구역장과 구역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있었던 구역에서만 했었던 구역소식지를 만들 때 내가 성경과 관련된 한자성어를 쓰는 일을 맡았다. 주일 예배를 드린 후에 시간이 나면 다 같이 밖에서 식사를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신기하리만큼 하나같이 친절하고 인성이 좋은 청년들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신천지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일 거란 잘못된 생각을 해버렸다. 숲은 안 보고 나무만 보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거기에다 부모님께서 다니시니까 부모님의 뜻에 거슬리면 안 된다는 무의식도 한 몫 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지 7년 동안이나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닐 수 있었다.
특히 부모님께서 신천지를 다니시면서 많이 한 활동 중 1위를 꼽으라면 전도라고 생각한다. 전도를 정말 왕성하게 하는 것을 가까이서 봐왔다. 부모님의 지인, 회사사람은 물론이고 가까운 친가, 외가 친척들에게도 전도하려고 애를 쓰셨다. 외가 쪽은 불교를 믿어서 전도하는 데 실패했지만 친가 쪽 고모에게 거의 전도에 성공할 뻔했다. 사촌들이 당시 신천지에 대해 알고 있어서 고모에게 다니지 말라고 반대해 흐지부지되어 부모님께서 아쉬워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도가 안 된 게 참으로 천만다행이다.
전도할 사람을 우리 집에 데려오는 것은 기본이요, 복음방 과정에 있는 사람을 데려와 거실에서 교육시키기도 했다. 가까운 거리에 사는 이웃들에게 전도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차츰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 80%는 거의 신천지 사람들이 되었다. 그것도 거의 부모님께서 전도한 사람들이었다. 직업도 성격도 나이도 다양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신천지’였다. 그들끼리 바닷가에 놀러가고 서로의 집에 초대해 식사를 함께 했다. 당시의 나는 부모님께서 친구가 많아져서 예전보다 많이 웃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현상이라고만 생각했다.
부모님께서 전도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물불 가리지 않으셨다. 복음방 교사를 하고 계시던 아버지는 시간이 밤에만 난다는 복음방 교육생을 위해 밤 11시에 나가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일용직을 하셔서 늘 새벽 5~6시에 나가시고 저녁 6시에 들어와서 씻고 바로 복음방 교육을 위해 나가신다. 어머니는 당뇨병과 합병증 때문에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지금은 딱히 중요한 직분을 맡지 않는다. 한 때 잠깐 부구역장을 하셨지만 너무나도 바쁜 스케줄 때문에 힘들어서 곧 그만뒀다고 하셨다. 그러나 구역예배나 교회 봉사활동 등에는 자주 참여하신다. 어머니께서 아는 신천지 지인들 중 아이를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가끔 그 사람이 아이를 맡길 데가 없을 때 대신 우리 집에 데려와 돌봐주기도 하셨다.
이런 점 때문에 ‘신천지 덕분에 부모님도, 나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구나.’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 긍정적인 느낌은 곧 사라져 버렸다.
3. 청각장애인 친구의 만남, 그리고 전도의 숨겨진 비밀
2010년 여름, 모 카페에서 나와 같은 취미, 나와 같은 청각장애인 언니를 우연히 만나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주 만나면서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고 기뻤다. 이전에는 신천지를 다니면서 내가 전도할 만한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 힘으로 전도를 직접 하지 못했기에 그 기쁨이 컸던 것일까. 때마침 청년회에서 1인당 1명씩 전도할 사람의 개인정보를 적어서 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친구의 개인정보나 성격, 성향 등을 꼼꼼히 적어서 냈다. 구역장이 보고 구역원들에게 날 보고 본받으라고 할 정도였다.
문제는 신천지에서는 전도할 사람에게 먼저 신천지라고 절대 밝히지 말라고 했다. 거기에다 전도할 언니는 이미 신천지를 잘 알고 있었다. 대학교 시절에 친하게 지내던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도를 하고 청각장애인에게는 절대 전도 안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사람이 신천지라고 밝혀져서 많이 섭섭했다고 말해주었다. 총회장을 거리낌 없이 ‘이만희 사이비 교주’라고 말하기도 해서 날 당황시켰다. 당황해하는 나를 수상히 여긴 언니는 “혹시 어느 교회에 다니니? 교단은? 목사님 성함은?”라고 꼼꼼히 질문을 쏟아냈다. 나는 언니의 이런 태도가 더욱 더 당황스러워서 교회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급히 마무리를 지었다.
그 후 그 일을 평소 친하게 지낸 부구역장한테 말했다. 그랬더니 필담으로 “교회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 이름으로 하고, 교단은 감리교라고 말하는 게 무난할 것 같아. 예수교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의심하거든.”이라고 적어주었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황당했다. “그럼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거예요?”라고 물었더니 “신천지가 이단으로 취급받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에 금방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부구역장이 말한 대로 전도할 언니에게는 대충 둘러댔으나, 언니는 여전히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은 내 말을 믿어준다고 했다. 그 후 그 언니 앞에서는 감히 교회의 교자라는 말도 못 꺼냈고 더 이상 전도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또 시간이 지나서 다시 부구역장과 만났다. 부구역장은 전에 내가 작성한 전도할 사람의 정보가 적힌 종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신천지 교회 근처 카페에 가서 대화를 나눴다. 처음에는 왠지 부구역장이 좀 미안한 듯한 얼굴이어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부구역장의 손으로 적힌 글의 내용은 이전보다 더더욱 나를 당황케 했다. “청각장애인이라서 전도하기에 좀 많이 힘들 것 같아. 혼자 다니기는 힘들 것 같고 남편 분하고(결혼했음) 같이 센터교육 받으면 좋을 것 같아.”라고 했다. 청각장애인인 언니에게 전도하려면 혼자는 안 되고 다른 사람과 함께 교육을 받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나는 수없이 시험에 든 것 같았다. ‘청각장애인을 위해 교육환경을 개선할 생각은 안 하는 것일까? 굳이 듣는 사람과 함께 동행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수없이 들었다.
그래도 그 생각을 애써 무시하고 부모님께 이 일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두 분 다 기뻐하시면서 “우리 딸이 드디어 전도하려고 하네! 걱정 마, 먼저 언니의 남편을 우리 집에 초대하도록 해보면 우리가 이야기해볼게.”라고 하셨다. 그래서 언니에게 언니와 남편 둘 다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언니는 선뜻 수락했지만 언니의 남편 분은 모르는 사람과 만나는 것을 어색해해서 이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부구역장과 만나서 언니에게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없을지 물어봤다. 하지만 부구역장은 그저 난감해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장애인이나 많이 가난한 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은 나중으로 미뤄졌다고 한다. 지금은 얼른 144,000명을 모아야 하고, 빨리 모으기 위해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니 그 사람들은 나중에 인원이 다 차면 전도할 것이라고, 지금 당장 전도 못하는 건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일단 겉으로는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은 뭔가 불편했다. 빨리 인원수가 차야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말은 그럴 듯했다. 그래도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왜? 그 144,000명에 장애인이나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이 제외되어야 하는가? 그들도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는가?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더 이상 뭘 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전도방식에 상당한 불합리함과 차별을 느꼈을 뿐, 그것을 그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신천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내가 다 참고 인내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나는 또 신천지에서 어영부영 세월을 흘러 보냈다.
4. 인위적인 느낌이 강했던 두 번째 체전
2012년에는 제6회 신천지 하늘문화체전이 열렸다. 나와 부모님은 두 번째로 참가했다. 아버지는 역시 입장식 때 기수단에 참여하셨고 어머니는 이번에 아는 집사님과 나와 함께 같은 자리에서 응원을 했다. 이번 체전 장소는 잠실올림픽주경기장이었는데 1984년에 건립되어서 신천지 창립이 된 해와 같아서 의미가 깊다고 했다.
제5회 체전보다 한층 더욱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마스게임은 제5회 체전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하여 화려해지고 다양해졌다. 하지만 이 마스게임을 위해 많은 청년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무더운 날에 학교, 직장을 빠지고 땀 뻘뻘 흘려가며 연습을 해야 했다. 이 사실을 마스게임 연습에 참여한 부구역장을 통해 비로소 알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항상 씩씩한 부구역장이 힘들다고 말을 했을까? 그래서인지 이번 체전은 처음 본 체전보다 훨씬 더 화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체전처럼 마냥 순수하게 즐길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체전 때는 미처 몰랐던 것이 두 번째 체전에서는 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었다.
제6회 체전에는 외국 사람들이 많았다. 체전이 열리기 전 총회장이 ‘동성서행(동쪽에서 이루어진 것을 서쪽에 전한다는 뜻, 유럽에서 시작된 하늘 복음을 오늘 날 동쪽 땅 끝까지 전해져 이룬 것을 서쪽으로 전한다고 함)’을 하느라고 전 세계의 외국인들과 만난 것이 계기였던 것 같다. 또 세계 자원 봉사 단체 ‘만남’도 있었는데 가입한 회원들 중 외국인들도 많았다.
그렇기에 순수하게 신천지를 알고 스스로 방문한 외국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체전에 온 외국인들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식이었다. ‘우리 신천지는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곳이야! 그런데 너희들은 핍박하기만 하지? 외국인들은 안 그렇거든!’이라 자랑하려고 말이다. 체전이 열리기 전에 신천지 성도들한테 ‘아는 외국인이 있으면 체전에 초대하자’라고 광고해서 외국인들을 일부러 많이 모으려고 했었다. 거기에 길거리에서 아무 외국인이나 섭외해 체전에 초대한 것도 봤다.
그리고 관객석에 앉아 똑같은 체육복을 입고 대부분의 시간을 일어서서 응원해야 하는 성도들은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했다. 쉬는 시간에는 화장실에서 줄을 선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아예 기저귀를 차고 온 사람도 있다고 했다.
응원할 때는 어머니께서 제일 힘들어하셨다. 오십견 때문에 양팔을 번쩍 들 수가 없는데, 응원 동작 중에 서로 양팔을 잡고 번쩍 위로 올리기, 파도타기 등등 팔을 위로 올려야 하는 동작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 체전 때는 어머니와 떨어져 응원해서 몰랐으나 이번에는 어머니 바로 옆에서 같이 응원하니까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응원에 빠져서 어머니의 손을 사정없이 위로 휙휙 억지로 들게 했다. 힘들고 아파하는 어머니의 상태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 때부터 어머니가 걱정이 됨과 동시에 응원하는 사람들에게서 왠지 모를 약간의 광기가 느껴졌다.
저녁, 밤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슬슬 야간공연이 시작되었다. 공연 내내 각자 준비해온 손전등이나 스마트폰으로 빛을 냈다. 깜깜한 관객석에서 자그마한 빛이 하나하나 모여 반짝이는 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 때, 커다란 전광판에 총회장과 만남의 대표 김 씨가 신라시대 의복 같이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왜 저 두 사람의 모습이 꼭 결혼식을 올리는 것 같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공연의 일부일지도 몰라서 함부로 단정을 짓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저 두 사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12지파장들의 모습도 심상치 않았다. 마치 무언가 축하해주는 듯한, 약간 들뜨고 상기된 모습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총회장의 사모님이라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유독 만남 단체 대표인 김 씨하고 같이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에이 설마, 의심하면 안 되지’ 하고 그냥 넘어갔으나, 이번 본 결혼식 같은 모습은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이건 뭔가 아니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화려한 공연들은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인가? ‘하늘문화’ 체전이라고 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위해 만든 공연인가? 이렇게 많은 돈을 쓰고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공연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차라리 그 비용과 인력을 다른 곳에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 체전에서 억지로 만들어진 장미 조화 같은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틀림없이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고 아름답긴 한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향기’가 없었다. 무언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이 없었다. 그것을 억지로 감추려고 화려한 색깔만으로 승부하는 느낌이었다.
화려한 공연들로 눈이 즐거웠지만 마음은 굉장히 불편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꺼림칙함도 들었다. 그리고 그 불편한 마음은 생각 외로 오래 갔다. 불편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꺼림칙함을 혼자 마음속으로 꾹꾹 눌러 숨겼다. 이 날 밤에는 비가 왔다. 캄캄한 밤하늘에 주룩주룩 세차게 오는 비는 마치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5. 구역장이 얼마나 힘들기래??
7년 동안 다니면서 청년회 활동은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고 슬쩍 모임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번한 구역개편 때문에 구역장이나 부구역장이 몇 번이나 바뀌는 것을 봐왔다. 왜 구역 개편을 자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 중 만난 구역장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명은 연봉이 높은 회사에 다니는 구역장이었다. 24시간이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구역장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그 회사를 선뜻 그만두었다고 한다. 마치 그것이 자랑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서 다시 회사에 취업했다 싶었더니 또 다시 그만두었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회사를 금방 그만두면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지? 헌금은 또 어떻게 하고??’라고 묻고 싶었으나 왠지 묻기가 어려웠다.
한동안 얼굴이 안 보인 적이 있었는데 천식에 걸려서 아팠다고 한다. 거기에 기침이 너무 심해서 갈비뼈에 금이 가 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 그래도 너무 말라보여서 안쓰러웠는데, 직접 보니 더욱 더 마르고 아파보이는 모습이었다. 왜 천식에 걸렸는지, 왜 갈비뼈에 금이 갈 정도로 아파도 제대로 된 치료를 안 받았는지 이 역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또 한 명은 대학생이면서 나보다 두 살 정도 어린 구역장이었다. 평일에 시간 날 때마다 밖에서 만나 편하게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구역장이 갑자기 굉장히 힘들다고 말했다. ‘나한테 구역장 역할은 좀 벅찬 것 같아요’라고 말이다. 알고 보니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방 구역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보통 구역장이면 신천지를 오래 다닌 사람만 맡는 걸로 생각했기에 그것이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구역장 역할이 얼마나 힘든지를 어머니를 통해서 알았기에 ‘아무도 구역장을 하고 싶지 않아서 막 들어온 애한테 맡겼나 보구나.’ 생각했다. 참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계속 >
6. 가정평화인줄 알았더니 가정소홀이었다.
2013년에는 여동생이 심한 조울증을 앓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여동생은 나와 같은 청각장애인이다. 나는 혹독한 구화훈련으로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었으나 동생은 말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부모님과의 대화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부모님께 수화나 필담으로 동생과 대화를 많이 해볼 것을 권유했지만 바쁜 신천지 생활 때문인지 동생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려 하지 않으셨다.
첫째인 나에게는 엄격하게 대하시는 반면 막내인 동생에게는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인지 동생에게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럴 때 부모님이 따끔하게 혼내고 고칠 점을 고쳐나가야 하는데 그런 행동조차 없으셔서 거의 내가 혼냈다.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이유로 그냥 ‘언니인 네가 좀 타일러’ 혹은 ‘동생 혼자 알아서 해라’ 라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당시 부모님이 많이 바쁘시니까 할 수 없이 내가 돌봐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글을 읽기 어려워하고, 수화도 올바르지 않게 배운 동생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누군가와 사귀어도 인격에 문제가 많은 친구하고만 사귀었다. 나도 여러 가지 고칠 점과 부족한 것이 많지만 동생은 그것이 더 심했던 것 같다. 때론 너무 버릇없는 말과 행동을 내게 하여 서로 많이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기에, 같은 청각장애인이기에 나름대로 부모님 대신 챙겨주었다. 하지만 너무 심한 피해의식, 학교 문제, 이성 문제, 극단적인 거짓말 등등으로 나는 더 이상 동생을 감당할 수 없어 한동안 부모님께 맡기고 동생과 대화를 안 하게 되었다. 그 이상 동생을 상대했다간 나마저 동생을 닮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 내 동생이 언제부터인지 심하게 우울했다가 갑자기 심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등의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전부터 동생의 심리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서 부모님께 병원에 데리고 가서 상담을 받아보자고 지속적으로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뭐 하러 그런 것을 받아.”라며 무시하셨다. 결국 동생이 새벽 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서 굉장히 먼 곳에서 내려 밤새도록 돌아다닌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야 병원에 데려가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또다시 시험에 든 기분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신천지를 다니는데 왜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을 했다. 당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아토피까지 재발해서 매일 잠을 못 자 밤을 새는 일이 허다했다. 책을 읽거나 인터넷 등으로 이 힘든 상황을 잠시 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마저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다.
그 당시에 신천지에서 전도대상자의 기준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새로 생긴 기준은 ‘과거나 현재에 우울증, 정신질환을 앓은 사람은 전도 대상자에서 제외한다.’였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나는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저 기준을 따르면 내 동생은 절대로 신천지에 못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장애인, 가난한 자는 전도금지’라는 기준도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신천지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마치 세뇌에서 빠져나와 처음에 줄기차게 의심하는 나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이제 신천지고 예수고 뭐고 더 이상 아무도 믿고 싶지 않다는 강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7년 동안 믿어왔던 예수님을 그냥 놓아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그래서 기도를 드릴 때에는 “하나님, 정말 이 곳이 진리의 성읍이 맞나요? 솔직히 144,000명만 혜택을 보는 것도 이상해요. 하나님이시라면 장애인, 아픈 사람 차별 없이 모두에게 왕 같은 제사장 혜택을 주실 것 같아요. 정말 이 곳이 진짜라면, 그럼 제가 의심하는 것 자체가 참 큰 죄이고 감히 건방진 생각을 하는구나 하실지 모르겠어요. 부디 그런 저를 용서해주시고 진짜 믿음이 생길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래도 만약 이 곳이 정말 가짜라면 어떻게 할까요. 이곳을 계속 다니는 게 올바른 선택일까요?” 이런 식으로 예배 후에 꼭 드렸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 부모님께서 계속 신천지에 다니며 매달 헌금을 몇 십 만원 씩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께 십일조는 꼬박꼬박 드려야지.’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조울증에 걸린 동생에게 심리 상담을 받게 하지 못하고 약만 먹이고 여기저기 갚아야 할 빚도 많은 현실을 외면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그냥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 하지?’라고 열심히 머리를 굴러 방법을 모색해봤으나 딱히 이렇다 할 대안이 없었다. 신천지를 그만 나가라고 막연히 이야기하면 집안이 뒤집어질 것이다. 내가 심한 복통이나 감기에 걸려도 ‘절대로 결석하면 안 돼.’라며 억지로 교회에 끌고 갈 만큼 신천지에 목숨을 거신 분이신데, 그분들에게 신천지로 나가지 말라니, 미친 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부모님은 신천지를 다니며 옛날과 많이 달라졌고 신천지에게서 위안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부모님은 신천지를 다닌다고 해서 행복해진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많이 힘들어 하신다. 그것은 2013년에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신 후로 나에게 솔직히 털어놓으시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아는 신천지 집사에게 부탁을 받아 그 집에 가서 잠깐 고장이 난 물건을 고치고 온다고 해놓고서 안 오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수상히 여겨 그 집사 집에 가는 길에 아버지와 집사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게 왜 의심할 상황인지 의아해하다가 뒷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이 어릴 때부터 바람을 많이 피우셨다고 한다. 심지어 어머니가 갓난아기인 동생을 돌볼 때도 수시로 밖에 나가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셨다. 그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직업 없이 밖으로 돌아다니기만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께서 대신 일하러 나가셔야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그런 문제점이 있는 줄 미처 모른 것도 있었지만, 신천지에 다니면 그런 나쁜 점이 다 없어질 줄 알았는데, 전혀 변한 게 없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은 것이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의심하니까 오히려 아버지가 적반하장으로 주변 지인에게 어머니를 쓸데없이 의심만 하는 이상한 여자라 이야기한다고 말하며 우셨다. 그리고 이혼하고 싶지만 신천지에서는 이혼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했을 때는 너무 마음이 쓰라렸다. 그리고 확신했다. 신천지를 다닌다고 해서 사람이 꼭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위와 같은 이런 이야기를 써도 될지 모르겠다. 괜히 부모님을 욕보이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부모님도 이런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실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천지 인들은 신천지를 다니게 되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좋은 사람으로 변화한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착각을 깨기 위해서 부득이 쓸 수밖에 없었다.) < 계속 >
7. 2014년, 신천지는 오지 않고 교리만 은근슬쩍
신천기 30년(2013년)의 표어는 ‘신천지 평화 광복 십사만 사천 완성의 해’였다. 2013년에는 144,000명이 다 채워지니까 이제 이 힘든 시기도 다 끝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14년이 되어도 달라지는 것이 전혀 없었다.
신천지에서는 분명히 144,000명이 완성되면 이 땅에 천국이 임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30년이 끝나면 다음 31년은 안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31년이 되어 또 새로운 표어가 나왔다. 게다가 표어는 더욱 더 기가 막혔다. ‘지파완성 흰무리 창조 종교 대통합 만국회의의 해’였다.
‘흰무리 창조?’ 144,000명이 다 차면 전 세계에서 알아서 몰려와 흰무리를 만든다는 글을 분명히 봤는데, 이젠 흰무리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또 종교 대통합이라니? 우리나라 남북한 통일도 못 시키는 마당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종교들을 하나로 통합한다니? 만국회의는 또 뭔지?
‘답이 없다.’ 2014년의 나는 2013년보다 더욱 더 신천지에 대한 불신감이 강해졌다. 점차 예배에 갔다가 카드만 찍고 돌아오는 일이 많아졌다. 우습게도 그렇게 했는데 아무도 내가 예배를 안 드린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왜 그렇게 출석률을 따지는 것일까. 출석률 100%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또 나의 불신감을 더욱 더 부채질 한 것이 있다. 바로 ‘헌금’이었다. 십일조, 건축헌금, 체육기금, 구역회비 등 기성 교회보다 돈을 쓸 일이 무척 많은 신천지다. 센터에 다닐 때에는 분명 신천지는 기성 교회처럼 헌금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오히려 기성교회가 헌금을 강요한다고 비판을 하였는데 지금 신천지는 기성교회보다 더 심했다.
회계담당이 한 달마다 일일이 헌금을 냈냐고 확인 문자를 보낸다. 내지 않으면 이번 주일 안에 꼭 내라고 독촉을 한다. 또 신천지는 ‘성전’은 바로 내 마음 속에 있다고 가르쳐준다. 하도 강조해서 저절로 마음 판에 새겨질 정도였다. 그 가르침과 너무나도 모순되는 성전건축헌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난감했다. 말과 행동이 안 맞는 모습을 보이는 신천지였다.
더구나 올해에는 1인당 100만 원 이상 성전건축헌금을 거의 반강요로 작성하라고 했다. 그 돈으로 동생의 심리치료에 보태거나 빚을 갚으면 될 텐데 어머니께서는 오히려 100만 원이 아니라 300만 원, 500만 원 더 내고 싶다고 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부담이 된다고 애써 1인 당 100만 원으로 줄여서 총 300만 원을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100만 원도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데 어머니는 우리 두 사람을 한심하게만 보셨다.
어머니께서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하면 우리에게 2배로 돌려주셔. 저번에 헌금 500만 원을 했더니 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서 합의금으로 천만 원을 받았잖아. 그것도 다 하나님이 해 주신 거야.”라고 하셨을 때 나는 그 말에서 ‘광기’를 보았다. 왜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일을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연의 산물마저도 모조리 신천지 덕분이라고 생각하시는 어머니가 무섭게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신천지를 의심만 하며 그 마음을 숨기고 살기가 벅찼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차라리 신천지가 진짜라면 좋겠지만 만약 가짜라면 두말없이 얼른 나와야 했다. 그런데 증거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랐다.
때마침 옛날에 본 신천지 광고에서 ‘우리 신천지를 나쁘게 말하는 안티 카페가 있는데 그 곳에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한 것이 떠올랐다. 뱀의 독이자 영혼이 죽어버린다는 위험한 선악과라고 했다. 그 곳은 가라지, 비진리, 욕설, 비방 등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말들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뭐라고 검색하지? 안티 신천지? 안티 신천지 카페? 다 검색해 보자.’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후 검색해봤더니 이상하게 신천지 편을 드는 글들만 상위에 보였다. 하지만 예전에 마케팅 아르바이트를 해본 나는 상위에 뜬 글이라고 해서 좋은 정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네이버 같은 포털 사이트의 경우 편법을 써서 일부러 특정 글만 클릭을 많이 해 상단에 띄우는 방법이 있다.
직감적으로 나는 상위에 있는 글을 봐도 소용없겠다고 느꼈다. ‘더 보기’를 눌려서 하단에 있는 글을 살펴보다가 신천지를 비판하는 듯한 블로그를 발견했다. ‘선물’님의 블로그와 ‘회복’님의 블로그였다. 읽어보면서 7년 동안 신천지에 있었던 나조차 전혀 몰랐던 수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특히 이만희 교주가 법원에다 자신이 ‘영생’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진술하는 정보가 충격적이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만을 위해 일한다는 사람이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충격에서 간신히 헤어 나와 ‘카페’도 있을지 몰라서 카페홈에 들어가 ‘신천지’를 검색했다. ‘진짜 바로 알자 신천지’는 신천지 측 카페라 무시하고 아래를 찾아보니 ‘바로 알자 사이비 신천지’ 카페가 있었다. 클릭해보니 찾고 있던 안티 카페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나 괜히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왠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어차피 블로그 글도 다 봤다. 이미 신천지의 실체를 일부분 알아버렸다. 그러니 카페에 들어가서 남김없이 글을 다 봐줘야겠다는 각오로 가입 버튼을 눌렀다. < 계속 >
8. 안티 카페에서 신천지의 실체를 알게 되다
가입하는 과정에서 카페 매니저의 이름이 ‘신현욱’으로 되어있는 걸 발견했다. 또 아래 메뉴에는 이단상담소 정보가 있었다. ‘헉…. 신천지를 나간 배도자 신현욱? 이단상담소도 있네….’ 약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서서히 신천지가 사이비종교이고 그 곳에는 천국과 구원 따위 없다는 걸 알았는데 말이다. 신현욱 강도사님은 신천지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나오셨다는 글도 읽었고 말이다. 신천지에서 이단상담소와 신현욱 강도사님이 상당히 위험하다고 하는 광고를 하도 봐서 그런지 무의식적으로 정말 그런 줄로 느꼈나 보다.
어쨌든 그 두려움을 애써 버리고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읽어보았다. 하나하나 읽어나가면서 충격과 황당함, 분노 등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였다. 어느새 밤을 새게 되었지만 그 사실도 잊을 정도로 아침까지 계속 카페 글을 읽었다.
굉장히 허무했다. 허탈했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이런 온갖 감정이 뒤섞여서 내 마음을 묵직하게 꽉 채웠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를 만큼, 무기력함이 내 몸을 덮쳐왔다. 마치 내 마음 속에 있던 자그마한 희망마저 다 빼앗긴 기분이었다. 신천지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대로 그저 사기집단에 불과했었다.
한편으론 이 사실을 부모님께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 부모님을 존경하고 따라야 할 사람인데, 신천지를 나오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감히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또 초조하게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신천지의 실체를 알고 나니 비로소 신천지 사람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었다. 부모님과 신천지인들, 그리고 한 때 나도 헛된 망상을 품고 있었다. 로또 당첨보다 더더욱 이뤄지기 힘든, 아니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이요, 때가 오면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올 수 있다는 슬픈 망상이다.
핍박받으면 받을수록 나중에 더욱 더 큰 복을 받는다는 헛된 착각을 품게 된다. 현재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차츰 없어지며 급기야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 환상에 의지해서 사는 나약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서웠다. 부모님만 그런 줄 알았으나 사실은 나도 어느새 그런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든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안티 카페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회원 분에게 쪽지를 보냈다. 서로 이야기를 하고 이단상담소에서 만나자는 약속까지 잡게 되었다. 약간 들뜨고도 두려운 마음을 안고 상담소에 발을 내딛었다. 의외로 신천지에서 말하는 무시무시한 이미지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보통 작은 교회와 별다를 바 없었다. 감금하고 강제로 개종 교육한다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스스로 상담소를 방문한 듯한 사람들과 상담사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역시 신천지는 신천지인들이 상담소에 못 가게 하려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어냈구나!’ 라고 확신이 들었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신현욱 강도사님께서 강의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신천지에서 보여주는 영상에는 일명 ‘신뱀’ 신현욱 강도사님 얼굴에 모자이크를 하고 ‘총회장님 이름으로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잘못된 말을 한 배도자 이미지로 보여주었었다. 그래서인지 직접 보니까 영상과는 너무나 달라보였다. 무뚝뚝한 표정이셨으나 열심히 강의를 하시는 모습에서는 도저히 배도자 이미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신현욱 강도사님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니 오히려 신천지 탈퇴자와 피해자를 열심히 도우고 계셨다. 이렇게 좋은 분을 한 때마나 의심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몇 번 회심교육을 받고 더더욱 신천지 교리에 대해 잘못되었다는 것을 꼼꼼히 알게 되었다. 이제 신천지를 나와야겠다는 확고한 마음이 들었고 나오기 위해 준비를 했다. 우선 시간제 근무를 하는 회사를 그만두고 일이 힘들지만 좀 더 좋은 조건의 회사로 옮겨서 다니기로 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독립하기 위해서였다.
아무에게나 신천지 이야기를 할 수 없던 나는 너무 답답해서 그 해방구로 안티 카페에 간단한 경험담을 쓰곤 했다. 신천지의 실체를 모르는 부모님과 함께 사니 왜인지 한 집에 있어도 나 혼자가 된 느낌이었다. 밀려오는 외로움과 허무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신천지 탈퇴자들의 공통점이다.
그동안 속아온 세월이 얼마나 아깝고 허무한가! 정말 하나님 나라가 올 줄 알고 모든 일 다 내버려두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그 길이 잘못되어서 그 먼 길을 다시 한참 되돌아가야 한다. 남들은 저만치 앞서갔는데 나만 뒤쳐졌을 뿐만 아니라 또 뒤로 가야 한다. 그런 암담한 심정을 신천지 탈퇴자가 아니면 모를 것이다.
솔직히 내가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속인 신천지도 잘못되었지만 한편으론 속은 내 탓도 있는 것이 아닌지 괜히 자책감도 들었다. 부모님이 다닌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닌 것, 신천지에 대해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의심만 하며 다닌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인정해야 지금부터라도 다시 바로잡을 수 있다. < 계속 >
9. 무참한 폭행, 마침내 빠져나오다.
2014년 3월 23일에 아버지의 화난 듯한 문자를 받고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16일 이전에 내가 속한 구역의 구역장이 나의 최근 근황을 묻거나 힘들지 않는지 갑자기 안부를 물어왔다. 또 총회장 말씀을 듣고 느낀 점을 써보라고도 했다. 일단 대화하고 대답했지만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16일 일요일 저녁에 구역장이 교회에서 지문재등록하자고 불러서 같이 교회로 갔다. 그러나 방송실에 불러가 섭외부장이란 사람이 나에게 내가 그동안 신천지 안티 카페에서 활동한 글을 프린트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금 놀랐지만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기에 내가 아닌 척했다. 한편으론 신천지가 안티 카페를 모니터링을 한다는 사실이 진짜란 걸 알게 되어서 더 놀랐다. 카페에 올라오는 글을 자세히 읽어본다면 틀림없이 신천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망정 오히려 의심이 가는 사람을 불러 확인을 한다. 내가 쓴 게 아니라고 하니 범인을 잡아야 한다며 우리 집에 있는 컴퓨터를 갖고 오라고 했을 때 더더욱 황당했다. 그리고 부모님께는 결코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3월 23일 일요일에는 부모님도 이 사실을 아시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섭외부장을 통해 먼저 아시고 나에게 화내시는 문자를 보내셨다. 왜 안티 카페에서 활동을 하고 글을 쓰느냐고 하셨다. 나는 솔직히 내가 썼다고 하고 신천지는 잘못된 곳이며 함께 이단상담소에 가서 증거를 확인해보자고 설득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이미 증거를 다 봤다고 하셨다. 정말로 자료를 제대로 보신 것일지 의심스러웠다. 밤새도록 이단상담소에 갔냐고 그 곳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나를 윽박지르셨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회유하시는 6페이지의 편지를 쓰셨다. 너무 안타깝고 답답했다. 이 집에서 잘못된 사람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3월 24일 월요일은 폭행당한 날이었다. 밤새 잠을 못 주무신 어머니가 내 방에 와서 계속 이단상담소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계속 실랑이를 하다가 내 핸드폰에 켜진 메시지를 보고 이단상담소 사람이라 생각한 어머니가 폰을 뺏어서 메시지를 다 보셨다. 연락처를 모른다고 거짓말하는 것에 화가 난다며 나를 때리셨다. 오전 6시쯤부터 오전 9시쯤까지 약 3시간 여간 맞은 것 같다. 초반에는 두 사람이 동시에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발로 내 몸을 마구 걷어찼다. 아버지께서는 손으로 내 얼굴을 때려 코피가 났다. 나는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지르며 때리지 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두 사람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니라 두 짐승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어머니가 효자손으로 내 머리를 집중적으로 때려서 방어하려다가 팔, 손에도 맞고 허벅지도 많이 맞았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하지만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나는 분명 “내 의지로 탈퇴하고 싶다.”라고 말했지만, “그래 네가 탈퇴하는 것은 상관없어. 근데 왜 우리에게 피해가 가게 만들어!” 하고 또 때리셨다. 내가 한 활동 때문에 부모님까지 제명당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부모님은 그것을 끔찍이도 싫어하셨다. 계속 맞다가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결국 가짜로 회유하는 척 연기를 해서 간신히 그만 맞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너무 속상해하시면서 네 몸에 사단의 영이 들어갔다고 하셨다. 이단상담소 가서 뱀에게 독침을 맞았다라고 하셨는데 참 어이가 없으면서 새삼 세뇌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신천지의 세뇌가 나의 부모님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고, 이 참담한 현실을 내 눈 앞에서 직접 마주하고 있었다. 너무 절망스러웠지만 일단 계속 회유한 척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자꾸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셨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나를 때리실 때에도 아버지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계셨다. 오후 1시쯤에 교회로 갈 테니 섭외부장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비라고 하셨다. 어머니께서 “잘못되면 우리 다 죽어버릴 거야.” 라고 하셨다. “일이 잘못되면 나 너 보는 앞에서 칼 맞고 콱 죽어버릴 거야.” 라고 재차 강조하셨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내 속을 칼로 푹 쑤시는 느낌이었다.
할 수 없이 무사히 내 발로 집을 나오려면 일단 그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을 돌려받았지만 아직 부모님이 내가 휴대폰으로 뭘 하나 감시하고 계셨고 이단상담소 사람들이나 친구들의 연락처가 다 지워졌기에 연락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휴대폰을 돌려받아도 딱히 사용하지 않았다.
아버지랑 버스로 교회에 가서 섭외부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카페활동 안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다시 한 번 상담소와 안티 카페는 적군이고 나쁜 곳이라는 세뇌교육을 들어야 했다. 내가 못 들어서 필담으로 나눈지라 길게 대화는 안 했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을 프린트한 종이를 아버지도 보시게 하셨다. 그 후, 일단 지파장이 일을 좋게 마무리해서 총회에 올릴 테니 총회에서 경고, 근신, 기타 등등을 내릴 거라고 했다. 또 컴퓨터로 안티 카페에 로그인해서 내 아이디를 확인하였고 집에 가서 카페에 내가 쓴 글을 삭제하고 그 화면을 찍어서 문자로 보내라고 하셨다. 문득 아버지가 집에서 계속 전화했던 상대방이 섭외부장 이 사람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부모님의 회유와 협박은 계속되었다. “네가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카페활동을 하느냐.” “앞으로 네가 버는 월급은 모두 엄마한테 다 갖다 바쳐. 다른 집 딸은(가족 모두 신천지인) 자기가 번 돈을 모두 부모한테 가져다주는데 얼마나 효녀냐.” 등등 듣기 힘든 말과 끔찍한 말과 나에 대한 책망을 새벽이 되도록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
3월 25일 새벽에 일어나 맞아서 욱신욱신 거리는 몸을 이끌고 회사에 갈 준비를 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이 악물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걸어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탔다. 타면서 얼른 연락처가 지워지지 않은 친구에게 내 소식을 전했다. 어제 휴대폰을 뺏겼을 때 부모님이 이 친구한테 나인 척 해서 “헤어지자,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마.” 라고 문자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친구는 내가 신천지에 다닌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고 말투가 부자연스러워서 본인이 쓴 글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단다. 너무 걱정해서 이단상담소에 대신 전화해주었다고 했다. 그렇게 다행히 상담소 측의 연락처를 다시 알게 되어 내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내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당장 아는 친구 집에 숨어 있으라고 했다. 회사에 도착해서 사장님께 급히 사정을 간단히 말하고 나왔다. 다음 날 회사에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는 신천지 지인이 찾아왔다고 했다. 그 다음 날에는 아버지 본인이 직접 찾아오셨다. 사장님께 내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는 답변밖에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 날은 사장님의 메신저가 해킹을 시도한 흔적을 발견되었다. 신천지에서 회사 위치를 알고 있고 회사에도 민폐를 끼칠 것 같아 결국 딱 2주간 일했던 그 회사는 그만두게 되었고 그 길로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친구 집에서 며칠 있다가 기자회견에 참여해 인터뷰를 했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를 가지고 경찰서에 가 부모님을 상대로 접근금지신청, 고소를 했다. 자식이 부모를 고소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패륜아 같은 짓이지만 접근금지신청이 빨리 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식으로 부모자식과의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음을 더욱 더 실감했다.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있어서는 안 될 신천지 때문에 부모님과 내가 빠져서 오늘까지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단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가정의 평화 문제요 좀 더 넓게 보면 사회적인 문제다. 그런데도 한국에 이단이 200여 종류 넘게 있으면서 국가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니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다. 하루빨리 사이비종교 법 제정이 되어서 이 땅에 이단들이 사라졌으면 한다. 그래야 두 번 다시 나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