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사역보고 (2010년 11월)
선지자선교회
○ 문안 인사
롬12:4-5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연약하여 저와 제 식구를 먼저 챙기기도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한 지체가 된 것을 알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 안에서 온 교회와 온 가정이 평강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 성경적 조직신학
사역보고서를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데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립니다. 영남 지방에 계시는 목사님이신데 총신 쪽이며 조직신학 교수였다고 자신을 간략히 소개 하면서 ‘성경적 조직신학’ 책을 구입할 수 없는지 물어왔습니다. ‘성경적 요한계시록 주석’은 서점에서 구입을 하였는데 성경적 조직신학은 구할 수가 없어서 전화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집필은 되었으나 아직 책으로 출간은 하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출간 원고는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고 말씀드리니 성경적 조직신학 관심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즉 성경 교리적 조직신학에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직신학이라는 것이 전적 성경적이어야 하는데 성경 반 인간 지식 반으로 섞여 있는 것이 오늘날 신학교에서 다루는 조직신학입니다. 현재 집필된 ‘성경적 조직신학’은 성경 교리를 중심해서 조직적으로 체계화 한 조직신학입니다. 그러니까 교계 신학교에서 다루는 조직신학은 ‘신학적 조직신학’이라면 성경 교리를 중심으로 집필한 교리적 조직신학은 성경적 조직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학 중심이나 교리 중심으로 집필한 조직신학보다는 순전히 성경에서 말씀한 대로의 ‘성경’ ‘계시’ ‘하나님’ ‘사람’ ‘죄’ ‘마귀’ ‘교회’ ‘대속’ ‘구원’ ‘재림’ ‘심판’ ‘하늘나라’ 등으로 그대로 나타내면 이것은 참으로 성경 그대로의 성경적 조직신학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교계의 ‘신학적 조직신학’에서 ‘교리적 조직신학’으로 나아가고, 그 ‘교리적 조직신학’에서 ‘성경적 조직신학’으로 나아가는 것이 되겠습니다. 현재 ‘교리적 조직신학’이 집필 되었으니 조만간에 ‘성경적 조직신학’에 이를 것으로 소망하고 있습니다.
현재 집필된 ‘성경적 조직신학’은 ‘신학적 조직신학’에 비하면 성경적이기 때문에 성경적 조직신학이라 명칭 하였으나, 이제 전적 성경 말씀으로 조직신학을 집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지금 ‘성경적 조직신학’이라 한 것을 ‘교리적 조직신학’이라 명칭하고, 이제 성경만으로 집필한 조직신학을 ‘성경적 조직신학’이라 명칭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조직신학 연구나 강의 그리고 집필에 관심이 있고 관련 있으신 목회자나 신학교수 그리고 신학자 분들은 이점을 참조하셨으면 합니다.
사역보고서 초두에 이렇게 조직신학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말씀한대로 보고서를 작성하려는데 조직신학과 관련된 전화가 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진 분들을 위해서 간략히 그 관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 아가서 주석
아가서 주석은 1장부터 8장까지 주석을 마쳤습니다. 아가서 주석을 하기 위해서 아가서 성경을 펼쳤을 때에 할 수만 있다면 피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아가서 주석하는 그 성경적 원리는 요한계시록 주석을 하면서 어느 정도 밝히 알고 있지만 그 원리 방편을 안다고 해서 주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산악 등산가가 해발 몇 천 미터 되는 그 높은 산을 보았을 때 그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그 과정이 어떨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성큼 대할 수는 없을 터입니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주석을 마친 즉시 이가서 주석을 하게 되는 것은 마치 눈 덮인 고봉을 등정하고 내려오자마자 또 곧바로 다른 산을 등정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 주석 집필을 피했으면 좋겠지만 요한계시록 주석을 하게 하셨을 때는 아가서 주석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주셨기 때문에 아가서 주석은 할 수 밖에 없는 인도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 쓰임 받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 아가서 강의
아가서 주석 집필을 마치고 현재 수정보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이번에 아가서를 강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본래 일정에는 계획이 없었는데 아가서를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목회자들도 다들 목회에 바빠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아가서 1장만이라도 공부를 하게 되면 그다음 8장까지는 1장 강의한 것을 참조해서 아가서를 연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목회자 분들 중에는 우리가 전하는 교리와 신조를 동질적 신앙노선으로 가질 분들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주의 교회를 위해서 예비한 종들이라 믿습니다. 이런 신실한 주의 종들이 영감의 갑절을 받아서 이곳 교회를 성경적 교회로 바로 세워 나갈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백영희목회설교록과 그리고 아가서 주석과 요한계시록 주석 등 성경적 신앙 자료와 목회 자료를 힘 있는 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 아가서 독해
아가서는 육십육 권 성경 중에서 가장 문장 독해가 난해한 성경이 아가서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문장 독해가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아가서가 더 난해한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문장 독해를 했다 할지라도 주석에 맞는 독해가 되어야 하지 그렇지 않고 주석하기 전의 문장 독해는 아직 미완성에 그치는 독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백육십육’이 무슨 말이라는 것을 독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육백육십육으로 성경을 근거해서 주석을 하려고 하면 주석이 안 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육백육십육은 ‘육백’과 ‘육십’과 ‘육’이 각각 별도의 도리가 있는데 합쳐진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석할 때는 육백과 육십과 육을 각각 별도로 성경에서 찾아야 그에 대한 주석이 되게 됩니다.
아가서도 이와 같아서 문장 독해에 있어서 참 난해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학자들은 독해를 하고 또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독해한 것이 주석할 수 있는 정확한 독해가 되어야 하는데 그 독해한 것으로 주석을 하려고 하면 주석이 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문장적 독해는 되었지만 주석적 독해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증표입니다. 즉 문장 독해가 바로 되지 못했다는 결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서를 독해할 때는 주석할 수 있는데 까지 되어야 정확한 독해이지 그렇지 않고 주석이 되기 전의 독해는 아직 미완성적 독해라는 것을 기억하시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석하기 전의 독해를 가지고 주석까지 마친 독해를 옳다 그르다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현재 김반석이 주석한 아가서를 볼 때 주석은 성경적인데 그에 앞선 독해가 의아스럽게 여길 그런 부분이 제법 많은데 그런 독해와 주석이 보이는 것은 이러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미리 이해를 구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해명하는 것입니다.
○ 백영희목회설교록
재중 한인교회 목회자 분들 중에도 그 목회자분의 설교에 은혜가 충만해서 주변 지역 목회자 분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백영희목회설교록’으로 은혜를 받고 계신다 하시니 왜 은혜가 충만한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을 연구해서 강의나 설교를 하면 성경 교리적으로는 그만큼 전할 수 있지만 신앙적으로는 백영희목회설교록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백영희목회설교록으로 준비해서 말씀을 전할 때는 장닭이 되지만, 자신이 연구해서 가르칠 때는 병아리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와 신앙 준비는 백영희목회설교록을 근간으로 하고, 그에 보완하는 교리 공부는 연구 집필로 보조를 합니다. 물론 백영희목회설교록이나 연구한 주석 등은 성경 진리를 조명하는 보조적 도구라는 인식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 주의 일
한 달이 차서 사역보고서를 작성하려 할 즈음에는 이 달에 주의 일을 얼마나 했나하고 이것저것 챙겨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의 일이라는 것을 사역해서 나타난 것으로만 보기 싶겠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주의 일이라는 것이 주의 일을 하므로 나타난 사역이 주의 일일까? 물론 일한 사역으로 나타난 것이 주의 일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주님께서 시키시지 않았는데 제가 주의 일이라 여겨서 그 일을 하여 주의 일 한 것으로 여긴다면 오산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기 전에 주의 일이 무엇인지 주께 구하는 것이 주의 할 일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주의 일은 주의 뜻을 찾는 것이 주의 일이며, 또 주의 일은 주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주의 일이며, 그리하여 주의 뜻을 찾고 주의 인도를 따라 해 놓은 일이 주의 일이겠습니다.
그러한데 주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의 일을 해놓고서 주의 사역을 했다고 한다면 주님과는 상관없는 일을 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7:22-23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주의 종 된 우리들이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제가 한 것인지, 아니면 제가 시켜서 주의 일을 한 것인지 이것을 먼저 분별하는 것이 주의 일을 하는데 우선 순서라 여기는 것입니다.
○ 목회 사역
목회 사역에는 목회자가 담임하는 교인을 목회하는 경우도 있겠고 또 선교사가 선교지 교회를 목회 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이것이 다 주의 종으로서의 직분입니다. 목회는 양과 목자의 관계성이 있기 때문에 목자가 양을 칠 때는 반드시 여러 면의 수고가 따릅니다. 애를 먹이고 서운하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이는 목자가 양떼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필연적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대개의 목자는 양떼들이 서운하게 했다고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양떼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화내지를 않습니다. 그러함은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이 주의 일을 할 때 동역하는 관계에서 이런 때도 저런 때도 있겠지만 목자 위치에 있는 목회자는 애를 먹더라도 서운해 하거나 화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선교사가 동역하시는 여러분께 서운케 하는 양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 선교 사역
선교지의 선교사들은 대체로 사역에 대한 재정이 대부분 빠듯한 형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경제적으로 절절매는 분들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좀 여유로운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사의 선교 역사가 대체로 이랬을 것 같습니다.
마6:25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셨으니,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고 몸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즉 주의 일을 하는 주의 종들에게 목숨과 몸을 유지 시키도록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이겠습니다.
먹을 것 즉 몸을 위해 먹을 것과 주의 뜻을 이루는 것
입을 것 즉 몸을 위해 입을 것과 세마포 의의 행실을 하는 것
마실 것 즉 몸을 위해 마실 것과 생명수 샘이 되는 주의 피 공로를 힘입고 사는 것
○ 동역 감사
기도로 동역하시고 선교비로 동역하시는 그 동역으로 선교사역은 이루어지는 것을 믿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사역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선교사가 선교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고 연보하시는 그 파송 교회로 말미암아 선교 사역은 이루어지고 있고 선교사는 더불어서 따라가고 있는 것을 압니다.
선교사는 기도하시고 연보하시는 여러 분들 덕분에 감사히 쓰임 받고 있으며 또 여러분들은 주의 영영한 뜻이 있어 쓰임 받는 줄 확신합니다.
○ 연평도 폭탄
한국 서해안 연평도에 북한이 폭격을 해서 연평도는 거의 전쟁 상황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곳 중국 신문에서도 1면에 폭탄에 맞아 연기가 솟아오르는 연평도 사진을 실어 놓은 기사를 보았습니다. 연평도 주민은 폭격에 놀라서 공포에 질려있는데 그 외 국민들은 아직 그 형편을 직접 만나지 않아서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놀라는 분들이 많겠습니다.
전쟁은 남의 나라 이야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연평도 폭격으로 인하여 전쟁이 날려면 어느새 나겠다는 생각이 다들 들겠습니다. 군인들이 즉각 대처하는 준비가 평소에 부족하다보니 그만큼 대응이 늦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신앙으로 즉각 대응하는 만반의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우물쭈물하다가 신앙 실패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열심히 수고해서 노후를 준비하고 또 자녀에게 물려주자 하는 생각과 계획과 노력이 얼마든지 아무 소용없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주신 그 모든 것을 저와 자식을 위해서 저축위주로 산 것이 얼마나 제 중심의 제 욕심인지를 이번 기회에 한 번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겨주셔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부강해져서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하는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게 하시니 되는 것이지 저 북한은 남한과 딱 붙었는데도 한쪽은 복음을 가지고 있고 한쪽은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일제 신사참배에 굴복한 평양이 있는 지역이며, 남한은 6,25때 눈물로 회개한 부산이 있는 지역입니다. 하나님의 보응이 어떤지를 알게 하는 역사입니다.
선교지의 주의 종들은 연평도 폭격 소식을 듣고 다 같이 말하기를 한국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말합니다. 또 개인적으로도 신앙준비를 잘 해야 할 것을 경고하시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노후와 자손들을 위해서 보관주의로 사는 것에서 돌아서기를 원하시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 신앙 박해
예수를 잘 믿으면 신앙 박해가 있기 마련인 모양입니다. 우리 진영은 우리를 기르시고 가르치신 백영희목사님께서 신앙 박해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흉내라도 조금은 내어 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경험을 조금 맛보았습니다.
선교지의 목회자가 예수를 바로 믿고 교회를 신앙으로 바로 세우려고 하니까 주변 목회자들이 밉상스럽게 여기고 박해를 합니다. 모두가 한 짝이 되어서 신실한 주의 종을 미기야 선지자의 뺨을 때리듯 때립니다. 왕상22:24에는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하셨습니다. 그만한 신앙이 있고 그만한 자격이 되어야 그만한 박해를 받지 어디 아무나 그런 박해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다들 말합니다. 복된 쪽에 섰는 자들이 있고 복 없는 쪽에 엎드린 자들이 있습니다.
○ 파수꾼
글쓰고 말하나 그에 대한 행실은 십분의 일 백분의 일이 될까? 글말을 맺을 즈음 돌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망대의 파수꾼 되어서 서로를 위해서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파수꾼이 되어주면 좋겠습시다.
2010년 12월 2일
선교지에서 무익한 종 김반석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