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사랑

 

1986. 8. 23. 새벽(토)

 

본문:요한일서 4장 16절∼5장 4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기독교는 사랑의 도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기독교는 박애주의라 그렇게들 속 깊이 모르고 외모를 보고서 그렇게 말하고 또 불교는 대자 대비라 이렇게들 말을 합니다.

이종교가 말하는 말은 다 실상 없는 거짓말입니다. 전지 전능의 완전의 영원의 불변자가 아니면 자비도 할 수 없습니다. 진실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약속해 봤자 모든 일이 다 끝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전지 전능자, 완전자, 영원 불변자만이 모든 옳은 것과 좋은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늘 옳아도 내가 내일 그 옳은 것을 보존하지 못하면, 내가 없어지면 그것이 옳은 것이 되지를 못합니다.

한 말로 말해서 기독교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은 상대방을 좋게, 유익되게, 복되게, 살게, 행복되게, 기쁘게, 점점 좋아지고 성공되게 하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한 말로 말해서 상대방을 복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하나님 한 분만 가질 수가 있지 피조물은 가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 예를 들면 아무리 상대방을 복되게 한다 할지라도 복되게 하는 그것이 영원히 복돼야 되지 영원히 복되지 안하면 복된 그것이 화가 되어지기 때문에, 또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그것이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위한다 할지라도 전지 전능자 영원자가 아니면 위하는 것이 끝이 나니까 그것이 끝이 날 때에는 큰 낭패와 절단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깨끗입니다. 깨끗도 요 시대에 깨끗으로 인정받아도 다음 시대가 지나갈 때에 그것이 죄로, 부정으로 인정받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깨끗이라 하는 것도 완전자라야 상대방을 깨끗게 할 수 있고 영원 불변자라야 상대방을 깨끗게 할 수가 있지 전지 전능의 완전자가 아니면 상대방에게 대해서 깨끗이 할 수도 없고 또 상대방을 깨끗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상대방으로 인해서 내가 무엇을 얻어지는 게 아니고 상대방을 위하여 내가 주는 것이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것도 전지 전능의 창조성을 가지지 못하면 이것도 주는 일을 할 수가 없고 다 그것이 유한하기 때문에 끝이 나니까 끝날 때에는, 내가 주는 것이 끝이 날 때에는 거게는 사망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불변이라야 사랑이 되지 변해지면 사랑이 안 됩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안해야 되지 없어지면 낭패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완전이라야 되지 불완전하다면 언젠가 정죄받고 심판받아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사랑인데 사랑은 하나님 한 분밖에는 가질 수 없는 이 보배로운 것이요, 또 어려운 것이요, 힘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하나 예를 들면은 불교는 대자 대비라, 이렇게 크게 자비한 것이 불교라 이라면 그 자비를 계속하지 못하면 그 자비는 상대방을 속인 것이 되고 상대방을 낭패지우는 일이 됩니다.

그러면 석가모니가 사람을 자비하게 하는 그 일을 끝까지 보장할 수가 있느냐 하면은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영생하고 완전하고 전지 전능하고 주권자이기 때문에 그분 외에 다른 자가 주권을 가질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되고 결국은 꾀운 일이 되고 말고 사람들을 참된 것을 찾아 가지지 못하게 하나의 헛된 것을 가지고 속인 것이 되고 말지 유익 주는 것이 되지를 안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들이 성경을 자꾸 보면은 기독교는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사랑은 하나님 한 분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인데, 그러기에 사랑은 하나뿐입니다.

둘이 아니고 사랑은 하나님 사랑 그 하나뿐이지 하나님 사랑 외의 것은 다 그것이 꾀우는 것이요, 속이는 것이요, 결과적으로는 해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면 동류의 사랑, 정욕의 사랑, 혈육의 사랑 있는데 이 세 사랑은 다 이것은 속이는 것이요, 거짓된 것이요, 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중에 에미가 새끼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 성격이 피조물들에게 임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랑은 그것은 끝이 있을 때가 있지마는 성질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짐승에게도 있고 버러지에게도 있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은 고동 같은 것은 제 새끼를 낳으면 새끼를 위해서 저는 외부에 있는 식물을 섭취하고 자기 속에다 넣어 놓고 새끼를 기릅니다. 다른 것이 해하지 못하도록 고동 그 통 안에다가 넣어 놓고서 기르는데 먹어서 그것을 성장을 보충해 가지고 기르다가 차차 차차 커지게 되면은 그 성장 보충을 하지는 못하고 하다 하다가 못해서 나중에는 속에 있는 그 새끼가 에미를 다 긁어서 하나도 없이 다 먹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는 그것이 나와서 그 고동 통 밖에 나와 가지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미가 새끼를 위해서 전적 다 희생해서 먹혀진 것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골에 가면, 지금은 식량이 풍부하지마는 옛날에는 아주 식량에 대단한 곤란을 당했었습니다. 그럴 때 보면 어미개는 바짝 말라서 곧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도 그 새끼들을 위해서 준비하는 그 젖통은 붇고 새끼 젖을 먹여서 새끼를 기릅니다. 이러니까 기를라고 하니 뭘 먹어야 그게 나오겠는데 주인이 아무 사료를 배불리 주지 안하니까 그저 새끼 데린 개는 온 동리에 저 산이고 들로 막 헤매입니다, 뭣이 먹을 게 있는가 싶어서. 그런 것도 하나님이 주신 그 본능의 것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장성해 가지고 혈육적 사랑이라, 자기 혈육을 따라서 사랑하는 혈육 사랑이라면 거게서부터 하나님이 주신 그 본능 사랑이 변해서 악의 사랑으로 화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땅위에 모든 정욕 사랑도 악의 사랑이요, 또 혈육 사랑도 악의 사랑이요, 동류 사랑도 악의 사랑이요 전부 그 사랑은 자기를 위하는 그것이 원동이 돼 가지고 거기로 말미암아 생겨난 피동으로서 모두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은 그 근본인 자기를 사랑함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이것은 맞지 않는 변질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만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은 자기를 사랑함으로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은 악이 됩니다. 결국 상대방에게 유익 주지 못하고 자기를 위한 자기 중심과 자기 위주의 악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가 악이 되지 안하고 그것이 의가 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도 당신 중심 당신 위주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들도 이뭐 동류 사랑이나 정욕 사랑이나 또 혈육 사랑이나 그런 것이 다 모두 자기 중심 자기 위주에서 발원돼 가지고 나가는 그것인데 왜 사람이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악이 되고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은 의가 됩니까? 그거 뭣 때문에 그러합니까? 녜, 하나님은 완전자십니다. 하나님은 완전자시요 우리는 완전이 아니기 때문에 틀리는 것입니다.

이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때에 “우리가 선악의 정의를 가지는 거와같이 사람들이 선악 정의를 그렇게 가지고 있다. 우리가 ‘우리 중심 우리 위주가 선이요 우리 중심 우리 위주를 어기는 것들은 다 악이다’ 이와같이 하는 거와같이 사람이 이제는 배암에게 꼬여 가지고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사람이 됐다.” 그러면 ‘하나님도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하나님이요 사람도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사람인데 뭐 사람이 잘못된 게 뭐 있어서 사람을 쫓아내는가?’ 그것은 원인이 어데 있는고 하니 하나님은 완전자시요, 자존자시요, 영원 불변자시요, 그분은 그만 한 말로 말해서 완전이라. 모든 면이 완전자시기 때문에 당신 중심이 완전 중심이요 당신 위주가 완전 위주기 때문에 그것은 다 옳고 바르고 참되지마는, 사람은 완전이 아니요, 자존자도 아니요, 전지 전능자도 아니요, 영원 불변자도 아닌데 이것이 자기를 중심하고 위주로 하다 보니까 자기 중심 자기 위주 그것이 다 유한의 것들이요, 다 변질의 것들이요, 결국은 다 없어지고 말 것들이기 때문에 그거 중심한 것은 다 속이고 속고 망하고 죽고 없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사랑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인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믿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요 볼 수 없는 사랑이신데, 볼 수 없는 분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볼 수 없는 분이 역사하니 보이는 것만 상대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분이 역사하는 보배로운 역사인 그 사랑이 있으니까 볼 수 없는 거는 인정을 하지 안하고 볼 수 있는 것만 인정하기 때문에, 볼 수 없는 자가 역사하는 그 사랑이 볼 수 있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람이 볼 수 있는 데 거게서부터 시발돼 가지고 ‘모든 것이 볼 수 있는 데서 났다’ 이렇게 하는 데에서 ‘자식은 부모가 낳았다' 또 `새끼는 에미가 낳았다’ 이렇게 해서 볼 수 있는 데서부터 시발되고, 볼 수 없는 거게서부터 시발이 된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그 동가리를, 인간의 지능이 거게까지 볼 수 있는 그 시력이 없었기 때문에 거게는 못 보고 동가리로 끊어서 보이는 데서부터 보기 시발됐기 때문에 그것이 보이는 것들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으로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이랬는데, 우리를 부르신 것은 볼 수 없는 분의 형상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난 분이 예수님이신데, 우리를 부르신 것은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하나님의 그 형상을 우리가 본받아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닮아 그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입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원형은 예수님이시요 예수님의 원형은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이루는 것은 어떤 구원을 이루는 것인고 하니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입어서 예수님의 모형, 모형이라 말은 그거와 꼭 같은 모양으로 생겨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그 형상을 우리가 온전히 갖추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라” 에베소 4장에 말씀한 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형상에는 한 가지만이 아니고 수십 가지, 차차 알면은 한 가지가 두 가지 되고, 두 가지가 세 가지 되고, 세 가지가 열 가지 되고, 열 가지가 백 가지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의 종류를 많이 아는 사람이 그 사람이 신앙이 많이 자란 사람이요 하나님의 형상의 종류를 하나밖에 몰라서 하나에만 맞춘 사람 있고, 열을 알아서 열에 맞춘 사람이 있고, 백을 알아서 백에 맞춘 사람이 있고, 예를 들어서 뭐 몇 백을 알아서 몇 백에 맞추어서 형상을 이룬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다각형이다’ 모가 많은 다각형으로 빼쪽빼쪽하이 요 밤송이같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밤송이같이 생겼다’ 그러면 밤송이는 한 개지마는 아주 침 같은 게 빼쪽빼쪽 나와서 요면으로 요리 쏙 나와 가지고 요 하나 또 침이 돼 가지고 있고 조리 침이 돼 가지고 있고, 그러면 밤송이는 하나뿐이지마는 그 침은 여러, 내가 헤아려 보지 안해서 잘 모르겠는데 아마 수십 개는 안 되는가? 수십 개, 수십 개는 좀 넘을 겁니다. 수십 개는 좀 아마, 수백 개는 될란지 몰라도. 그 모양으로 하나님은 요 면으로 보면 요런 하나님이고 조 면으로 보면 조런 하나님이고 고 면으로 보면 고 면 하나님이고 이래서 ‘하나님은 모가 많은 하나님, 다각형으로 되어 있는 하나님이시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밤송이 같은 하나님이시다’ 그말은 하나님은 나타나기를 여러 모양으로 이리저리 나타났는데, 그래서 밤송이는 하나지마는 끄트머리 나타난 그 침은 여러 개로 나타났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예를 들면은 밤송이 침 하나 그것만 지금 사귀어 가지고 그것이 밤송이 다인 줄 아는데 그 안에는 많은 침들을 가지고 있는 덩치가 있다. 자기는 비유컨대 하나님을 밤송이와 같이 한 부분, 한 모때기, 한 속성, 성경에 열두 가지 속성을 말했지마는 그것도 이제 성경을 우리들이 깨달은 걸 말한 것이지 깨달으면 그뭐 그 안에 한정 없이 있습니다.

그런 모때기 모때기 모모를 사귀는데 어떤 사람은 한 모를 사귀고 한 모만 알고 있고, 어떤 사람은 열 모를 알고 있고, 어떤 사람은 천 모 백 모를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은 다각의 존재라, 다각형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 책에 보면 코끼리를 말하는데 어떤 사람은 ‘기둥같이 생겼다’ 그 사람은 코끼리 다리만 본 사람이고, ‘코끼리는 배암같이 생겼다’ 하는 사람은 코끼리의 코를 본 사람이고, ‘코끼리는 한 발 되는 큰 창으로 생겼다’ 그거는 코끼리 이를 본 사람이고, ‘코끼리는 이 벽같이 생겼다. 크단한 벽같이 생겼다.’ 그 사람은 코끼리 배를 보고서 자기 본 대로 보고서 이런게 말한다 그런 말을 해 놨습니다. 그런 것 다 예화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다각적인 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속성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지음을 받은 것도 다각적인 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만물을 보아서 하나님을 알 수가 있다.

이래서 자연계시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만물과, 또 하나님이 이 섭리하는 거 보면 이리도 하고 저리도 하고 하는 섭리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고, 또 그중에 깨닫기 쉬운 것은 사람들의 마음은 천태만상으로 변해진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말이오. 하나님의 마음이 다, 하나님의 마음대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형이 다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인데, 그러면, 사람들의 마음인데 사람들이 타락한 후에는, 타락한 후에는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 자체를 중심으로 위주로 해 가지고 이런 모양을 가졌고, 또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 중심 위주로서 모든 다각형의 그 모양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중생돼서 새사람된 것은 이제는 하나님의 그 수없는 다각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되는데 그것은 모든 창조된 만물, 사람들의 마음의 구조라든지 모든 만물들이 움직임이라든지 그런 움직임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에게서 지음받아 나와 가지고 사람이 천 가지 만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에 금방 사랑했다가 금방 미워하고, 사람이, 그래서 조석변이라. 사람은 조석으로 변해진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그러면 조석변 그것이, 조석으로 변해지는 그 형체가 그 형상이 어데서 나왔는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어. 하나님이 그렇게 변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잘 변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잘 변하는 하나님이시오.

사람이 천태만상으로 그 마음이 변하고, 한 시간이라도 수십 번으로 변합니다. 그 변하는 것을 겉어머리 나타내지 안해 그렇지, 나타나지 안해 그렇지 속에는 변하기를 얼마나 변하나? 번개같이 변합니다.

그래서 그 변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사람들이,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연상이라 이런데, 연한 생각이라. 이 생각에서 이 생각하고 이 생각에서 이 생각하고 쫙 가면 일 초 동안에 이 우주를 쭉 다 돕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쭉 다 생각해.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변하는 마음인데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인데 하나님도 그렇게 변하십니다.

하나님이 변하시는데 하나님은 변하기를 어떻게 변하는가? 하나님도 그렇게 변하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변하는가? 또 인간은 어떻게 변하는가? ○○○목사, 하나님은 어떻게 변하지? 변하는 게 하나님하고 사람하고 같애요 달라요, ○○○목사? 다릅니까 같습니까? 변하는 게 달라요 같애요? 다릅니까 같습니까? 변하는 게 같애요 달라요? 저 ○○○목사님? 이해가 안 돼. 지금 이해가 될 리가 없어, 아직까지. 가서 많이 궁구해야 알지 좀 알기가 어려워요.

알기 쉽도록만 자꾸 이거,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도를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만 표현하기 위해서 이번에 장생골에서는 증거했는데 그 설교를 우리 진영의 목사들이 지금 반도 못 깨닫고 있습니다. 반도 못 깨닫는 게 아니라 아직까지 못 깨닫습니다. 이거는. 아직까지는 사람들이 그래 가지고는 깨닫지를 못합니다.

사람이 변화가 돼져야 깨닫게 되지.

인간의 천태만상으로 변해지는 사람의 마음의 구조, 별별 마음들이 있는 구조인데 그 구조가 그것이 무슨 모형인가? 그것의 원형은 뭐인가? 그것의 원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게 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루 뭐 백 번도 더 변하요. 알겠습니까? 천 번도 더 변하요. 하나님 마음은 요렇게 조렇게 자꾸 자꾸 변해집니다.

‘허이구, 그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겠다.’ 녜, 하나님은 그렇게 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데 하나님의 불변이라 하는 건 다른 각도에서 말합니다.

변하는 하나님인데, 그러면 사람도 변하고, 사람은 마음이 자꾸 변하는 사람을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까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까, ○○○목사? 사람의 마음이 자주 변하는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이라 하요 못쓸 사람이라 하요? 뭐라 해? 뭐라 하노? 그러면 큰 소리로 하지 뭣 때문에 큰 소리 못 하고 있어, 뭐.

뭐 녹음기 그거 다 치워 버려요. 이거 녹음기를 자, 녹음기가 설교 듣고 있습니다.

‘너는 조나?’ ‘졸아도 녹음기가 다 듣고 있다.' 녹음기에는, 녹음기에는 소리만 녹음되지 영감은 녹음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녹음기 테이프를 내 보내나 안 보내나 이라다가 모두 다 하라 하기 때문에 내 보내는데 그 들은 사람이, 거게서 들은 사람이 잊어버려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걸 들으면은 깨달아서 돼지고 그렇지 안하면 그 지식만 자라기 때문에 그 사람은 교만하고 자기를 망치지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듣지 안한 사람들은 그 녹음기 가지고 가 가지고 결국은 자기가 지식만 가지기 때문에 지식만 가지면 교만하게 됩니다. 왜? 지식을 가지고 실행을 하면은 제가 무능자인 걸 알고 악인인 것을 알고 점점 겸손해지고 자기가 작아지지마는 그 지식을 가지고 행하지 안한 자는 자기가 행해보지 안하니 어려운 것도 아니고 자기가 커져 가지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그런 교만한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변하는 그대로 모양으로 그대로 지었기 때문에 우리 마음도 조석으로 변해집니다. 우리 마음이 변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변해야 됩니다. 변해야 되는데 변하는 그 근원이, 변하는 그 원인이 자기를 중심해서 변해지면 사망이고, 자기를 중심해서 변해지면 사망이니 그것이 원죄입니다, 원죄. 자기 중심으로써 자기 위주로써 자기 본위로 선악을 규정지우는 것은 원죄기 때문에 그것으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런데 하나님은 변하되 하나님도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변합니다. ‘그러면 사람도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변해지는 것은 악이라 하고서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변하는 것을 악이라고 하지 안하니 이거 틀리지 않는가? 하나님은 순 이기주의요 아주 욕심자네.’ 녜, 하나님은 이기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이기주의요. 하나님은 이기주의가 가장 완전한 것인데 사람은 이기주의가 되면은 그것은 다 사망하는 죄의 원인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기주의로 변해지면 그것을 좋은 것이라 하는데 사람은 이기주의로 변해지면은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이 됩니까? 그 원인이 어데 있습니까? 그 원인이 어데 있소? 녜, 하나님 자체와 우리 자체가 다릅니다. 하나님 자체는 완전이기 때문에 그분이 자기 중심으로 완전에 삐뚤어진 것은, 완전에 삐뚤어진 것을, 완전에 삐뚤어진 것을 일 년 있다가 삐뚤어졌다고 알아야 됩니까, 완전에 삐뚤어진 것을 즉시 아는 것이 좋습니까? 즉시 아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완전에 삐뚤어진, 완전에서 삐뚤어진 것을 즉시 처리해 버리는 것이 좋습니까, 일 년이나 이태나 있다가 처리하는 것이 좋습니까? 어떤 게 좋소?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 완전에 조금만, 당신의 완전에 삐뚤어지면 즉시 삐뚤어진 것을 표해서, 삐뚤어졌으니까, 부모가 금방 사랑해서 쓰다듬어 줬는데 그 자체가 그 부모에게서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자가 되니까 쓰다듬어 줬다가 금방 그 꾸중을 해야 될 때가 변해지니까 꾸중을 하게 된다 말이오. 그러면 부모의 사랑은 하나이나 자녀에게 대한 것은 자녀 행동에 따라서 부모의 사랑이 변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소범위에서는 되지마는 자기라는 자체가 깨끗한 정도 범위 내에서는 되지마는 그게 몇닢푼치 안 되기 때문에 그 너머 가 가지고 그와같이 하는 것은 다 사망이 되고 만다 그말이오.

이래서 우리는, 이 우리의 원형을 닮아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게 했다 그말이오.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느냐? 우리를 십자가의 대속으로써 대속하시고 우리를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시켜 가지고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었는데 이와같이 만든 것은 목적이 뭐입니까? 만든 목적이 뭐이요? 만든 목적이 뭐이지? 저 ○○○집사? 예수 그리스도 형상이라 하면 더, 새 말을 만들어 내지 말고 될 수 있으면 그 말을 써요. 그 말 써서 안 될 때는 만들어 내요.

구원이 기본구원 건설구원이라 하는 것이 자, 그말 안 하고 어찌 구원이라는 한 말만 하면 됩니까, 둘로 하니까 편리하고 정확합니까? 어때요? 하나만 해도 되는데 건설구원이니 기본구원이니 둘로 말했으면은 백 목사는 정죄받습니다.

공연히 사람을 어지럽게, 하나만 해도 되는데 둘 말했으니까 사람을 어지럽게 말한 것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부담을 줬기 때문에 정죄를 받습니다. 심판 받아요.

그러나 하나 가지고는 정확한 그 표현을 할 수 없고 둘이라야 표현하지 하나 가지고는 반밖에는 표현을 못 하게 되니 둘을 가지고 다 표현하게 했다고 하면은 만일 그랬다 하면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백 목사 상을 받아요 벌을 받아요? 상 받아요 벌 받아요? 상 받아요, 상 받아.

그러기 때문에 필요 없는 걸 자꾸 새로 만들어 내는 거는 못 쓰는 거라 말이오.

필요 없는 걸 새로 만들어 낸 것은 만들어 놓은 것만 해도 쓰는데 필요 없는 걸 만들었으면 사람을 복잡하게 어지럽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를 부르신 것은 에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의 형상입니까? 볼 수 없는 아버지의 형상입니다.

아버지의 형상을 입고 나타났어. 하나님이 형상을 입고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났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모형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러면 우리를 부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인데, 무형의 존재인데 그분의 형상은, ‘형상이 없는데 무형의 존재인데 무슨 형상이라고 있다 하는가?’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인데 무형의 존재의 형상은 그분의 그 모든 역사하신 그 역사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 역사가 그분의 형상이요, 역사가 그분의 형상이요, 그분의 속성이 그분의 형상이요, 그분의 신성이 그분의 형상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그분의 신성을 가리켜서 열두 가지 속성이라 하나 열두 가지 신성이라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열두 가지 속성으로 나타났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을 받아 가지고 잘 먹고 잘 입고 살고 남은 거 있으면 자기의, 제 새끼라고 해 가지고 어린 아이에게, 감당 못 할 것이라도 자기 어린 아이에게 유산으로 주고는 ‘내가 이만치 물려 줬으니까 됐다’ 만족하고 죽지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깰 때에” 뭐라 했습니까?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깰 때라 말은 세상 이 모든 침침하고 어둡고 이 모든 온전치 못한 꺼풀을 입고 있는, 이 꺼풀 안 입고는 이 세상에 못 살아. 온전치 못한 이 꺼풀을 입고 있다가 이 꺼풀을 완전히 벗었을 때에, 온전치 못한 꺼풀이 뭐입니까? 이 제한된 꺼풀입니다. 우리 혈육을 가진 혈육 꺼풀 이거는 제한된 꺼풀이기 때문에 백 년만 살아도 쭈글쭈글해.

나는 칠십칠 년을 살았는데도 지금 가죽이 쭈글쭈글하이 내가 봐도 보기 싫습니다. 내가 봐도 보기 싫어요. 면경을 보면 여게도 저승꽃이라 하던가 검버섯인가 이래 피어 가지고 이게 흉해요. 아주 보기 싫어. 이런데 이거 만일 백 년을 살면은 지금 이십삼 년을 더 살아야 되는데 이십삼 년을 더 사는 날이면 아마 얼굴이 새까마이 꼭 송장 비슷하이 될 거라. 이러니까 몇백 년 살면 살 수 있습니까? 이러니까 부득이 우리는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이와같이 갈아 입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볼 수 없는 형상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입으신, 모기약&&& 이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난 이가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인격, 볼 수 없는 것이, 형상으로 말한 것은 그것은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행위, 또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인격성,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신성 이것을 예수님이 온전히 입어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꼭 같기 때문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떻게 해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와 나와 꼭 같다.” 요렇게 말한 것은 그것은 예수님을 봐서, 예수님의 인격성, 예수님의 속성, 예수님의 행위, 예수님의 사상, 예수님의 주의, 예수님의 욕심,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을 보아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꼭 같다 그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그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불렀는데 예수님의 형상 가운데에, 한 말로 말하면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나님의 형상인데 사람들이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형이라 하나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신데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 우리는 예수님의 그 형상을 입어서 예수님의 모형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모형이라면 하나님은 한 말로 말하면 사랑이신데 사랑은 좀 전에 해석한 대로 사랑은 먼저 깨끗이라, 주는 것이라 상대방을 유익되게 복되게 하는 것이라.

이러니까 한 말로 말하면 기독교는 어떤 것이 기독교인가? 기독교는, 자체가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은 무슨 도입니까? 자체가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은 무슨 도지요? 자체가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체가 자체를 위해서 있는 도는 무슨 도입니까? 배암의 도입니다, 배암의 도. 에덴동산에서부터 생겨졌습니다.

또, 그러면 요게 혼돈되기 쉽다 말이오.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를 위하는 도입니까, 뭐입니까? 하나님은 타를 위하는 도입니까 차체를 위한 도입니까? 자체를 위한 도입니다. 자체를 위한 도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자체를 위한 도면은 악입니까 선입니까? 악입니다.

그거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그런데 왜 우리는 왜 그렇습니까? 그거 다른 원인이 어데서부터 시작이 됐습니까? 하나님은 완전자시요 우리는 거짓된 자요 다 유한된 자기 때문에 그런 요것을 꼭 잡아야 돼요. 요거 여러분들이 요 어려운 것입니다. 요것이 뭣이 기독교에 나온 것이 아니고 요게 어려운 것인데 요걸 단단히 잡아야 돼요.

그러면 기독교는, 하나님은 기독교를 믿는 데에, 하나님은 기독교를 믿는 데에 당신은 자체를 위하는 모든 행동이십니다. 자체를 위하는 행동이시오. 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데 우리는 어떤 행동이어야 합니까? 자체를 위하지 않는 타를 위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체의 본질과 본성이 다른 데에서 생겨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독교인 행동을 할라면, 기독교인 행동을 할라면 자기 위하는 것을 죽여 버리고 타를 위하는 것이 돼야 기독교 행동이 되고,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의 자체를 위하다가, 당신 자체를 위하지 안하는 것이면은 하나님은 어찌 됩니까? 악이 됩니까 선이 됩니까? 그걸 뭐 악이라면 조금 말이 좀 다르겠는데 그것은 불의가 됩니다. 그것은 사망이 됩니다.

하나님이 만일 자체를 위하지 안한 행동이 하나 있다고 하면은, 하나가 생겨졌다고 하면은 하나님은 어찌 됩니까? 하나님은 죽습니까 삽니까? 하나님은 죽습니까 삽니까? 하나님은 죽습니다. 요거 요동치 말아. 하나님은 자체가 완전자라는 것을 이것을 놓지 말아요.

이래서, 그러면 우리에게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중심 당신 위주의 당신 본위의 것을 우리에게 행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도 당신 본위의 말을 하고, 당신 위주의 말을 해야 되고, 당신 중심의 말을 해 줘야 되지 당신 중심이 아닌 말을 우리에게 해 주면은 그 말은 우리는 죽입니까 살립니까? 죽입니다.

당신 중심의 말을 우리에게 할 때에 우리가 그 말을 받아 가지고 우리는 어째야 됩니까? 그 말을 받아 가지고 그랬으니까 당신 중심의 말을 우리가 받았으니까 우리가 그 말 받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무슨 중심으로 해야 됩니까? 하나님 중심으로 해야 된다 그말이오.

여러분들이 지금 이래 들어 가지고 자꾸 이걸 녹음기에 나올 터이니까 요걸 자꾸 여러 번 수백 번 들어요. 수백 번 들어서 사람이 변해지지 안하면은 못 알아듣습니다. 사람이 변화된 것만치 차차차 알아지기 때문에 이제 변화지도록 하기 위해서 자꾸 이래 말하는 것이니까 이제 변해지면 자꾸 변해지는 것만치 들을 거라.

이번에 장생골에 가 가지고 집회를 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걱정이라. 백 목사님을 우리가 스승으로 모시고 하고 있는데 백 목사님 설교가 자꾸 깊이가 없어 자꾸 얕아가고 있으니까 이거 참 걱정이라.’ 얕으면, 얕으면 껍데기로 나오지요. 껍데기로 나오면 결국은 멸망되고 말지요. 하나님을 향해 깊이 들어가야 되지요.

이런데 그래 그 말을 내가 해서 ‘그래’ 이라고 말았습니다. 말았는데 내가 자신이 있습니다. 그건 분명히 그 사람이 지금 요번에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하나님의 도의 깊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면 좀 변화가 될 터인데 암만 말을 해도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할 수 없는 그것을 인간의 방언으로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까, 인간의 방언에서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 못 하는 것을 가리켜서 뭐이라 합니까?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할 수 있는 그것 속에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할 수 없는 그 속에 것을 뭐라고 말합니까? 이거 모두 다, 영감. 자, 문서 의지.

따라해요.문서 의지!영감 의지! 의지라 말은 하나님의 뜻이라 말입니다.

문서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것은 우리가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지마는 그 속에는 하나님의 영감 의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은밀한 의지라, 나타나지 안한 은밀한 의지라. 그것은 인간의 말로 표시할 수 있는 그것은 문서로 기록한 성경에 기록한 정도의 것이고 그 속에 인간의 말로 표시할 수 없는 그것은 영감으로 되기 때문에 그것은 볼 수 있는 계시를 가지고 자체가 변화되는 데 따라서 변화된 것만치 알아져요.

이래서,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네가 성화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된 것만치 진리를 압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는 행하지 안하는 자는 그자는 딱 중단해 놓고 일보도 전진하지는 못하고 향상하지는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금 갖추어 가지기 위해서 하는데 지난밤에 어떤 사람이 그걸 물었습니다. ‘타를 사랑하는 것이 선이라. 그러면 자기 아닌 다른 모든 피조물 사랑하는 것이 선이라, 또 하나님 사랑하는 것도 선이라. 다 선이라는 데 이게 잘 구별하지 못하겠으니까 어찌됩니까?’ 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선입니다. 하나님 중심하는 것이 선입니다. 또 사람 사랑하고 사람 중심하는 것이 선입니다. 선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뭐이냐? 하나님 중심하는 것에 배치되는 인간 중심은 그것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악입니다. 그러면 인간 중심을 하는데 하나님 중심하는 그 중심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 위주로 하는 것이 내가 한다고 해도 자꾸 삐뚤어져가기 쉽지 하나님이 그분을 중심하는 일이 잘 안된다 그말이오.

그러면 하나님을 중심하는 중심은 연습하기가 힘들고 볼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완전한 존재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중심한다고 해도 마귀란 놈이 요리 삐뜰트리고 조리 삐뜰트리니까 그 핀트가 딱 요래 맞지 안하고 삐뚤어져 가지고 저 혼자 삐뚤어져 가지고 지금 하나님 중심했다고 평생 날뛰기 쉽다 그말이오.

그러면 하나님 중심, 볼 수 없는 하나님 중심의 고급의 이 하나님 중심을 우리가 숙달시킬라고 할 때에 볼 수 있는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을 인간 중심에서 연습해 가지고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 연습한 것이 성장되고 숙달되면은 그것이 하나님 중심의 하나님 위주의 것이 도달해서 달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그러면, 하나님 사랑하는 사랑의 연습을 어데서 해요? 인간 사랑에서 연습해요.

하나님 중심인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인 그 일을 연습은 어데서 해요? 인간 중심 인간 위주에서 연습해요. 그러면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데 하나님 중심을 하되 볼 수 없는 하나님에게 안 되니까 볼 수 있는 사람에게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내가 다른 사람으로 나를 위해서 있게 하지 안하고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있게 하는, 마태복음 20장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세상 일은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고 큰 자는 작은 자를 삼키고 하는 것이 세상 나라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희들의 나라는 그렇지 않다. 너희들의 나라는 그렇지 않다.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는 자가 되고, 큰 자는, 높으고자 하는 자는 작은 자를 위하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정반대의 나라다. 이래서 내가 온 것은 세상에서 섬겨ㅡ내가 제일 높은데ㅡ세상에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러 왔으니 내 몸과 생명까지를 다 이 세상에게 줘 가지고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종노릇하기 위해서 왔다. 너거가 소망하는 나라 내 나라는 이런 나라다. 이 세상 나라는 그렇지 않다.” 그 밝혀서 말씀하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볼 수 없는 하나님에게 내가 이렇게 해야 되겠는데 볼 수 없는 하나님에게 한다는 것이 그분이 보이지 안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한다는 것이 그만 잘못돼 삐뚤어지기 쉽다 말이오.

여러분이, 기름 장사가 참기름 장사 십 년을 하면은 위에 딱 부으면은 밑에 떨어지는 것이 하도 연습이 돼 가지고 있어서 이층집에서 병을 밑에 놓고서 기름을 부어도 한 방울도 땅에 떨어지지 안하고 그걸 기름을 졸졸졸 그 병에 부어 가지고 딱 끊치면 한 병 딱 돼 버리고 그렇게 하고, 그 또 그말 있습니다.

서예 명필이 글씨를 쓰니까 그저 하도 글씨가 익어 놓으니까 불을 깜깜하이 꺼놓고 쓰나 불 써놓고 쓰나 한가지라. 그 연습이 다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거 모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그 연습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하라’ 그게 아니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서 연습하라’ 하나님 중심 위주 그것을 거게서는 잘 안 되니까 사람 중심 위주에서, 하나님 중심 위주를 사람 중심 위주에서 연습한다 그말이오.

그러면 연습하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 중심의 것은 사람 중심으로 해 주지마는, 하다가, 만일 다니엘이 이제까지는 그 다리오 왕에게 죽자껏 충성하고 순종했는데 이제 기도하지 말라 하는 말은 순종하지 안하고 사자구덩이에 들어가도 순종하지 안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항상 다리오 왕 위주로 이렇게 섬겨서 나왔는데 그때 다리오 왕이 시키는 말은 왜 안 했습니까? 왜 그때 위주로 안 했습니까? 왜 위주로 안 했소? 다리오 왕 위주로 다리오 왕 중심으로 이래 가지고 늘 살았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리오 왕에 대해서 흠잡을 것이 하나도 없고 전부 바르고 옳고 참되게 했다 그말이오. 그랬는데 왜 기도하지 말라 하는 건 안 합니까? 여게서 하지만, 보는 데서 하지마는 보이지 않는 그분에게서 연결돼, 그분에서 발원이 돼 가지고 이래 하기 때문에 연습을 이래 하기 때문에 여게서 보이는 사람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사랑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함으로 하나님 사랑함이 아니오. 여기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거라.

그러기 때문에 이 철학이나 이종교나 그 모든 것은 땅에서 올라가는 것이 이종교 철학들이요 하나님의 도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다 기독교라 그말이오.

여러분들이 그저, 잘 알아듣지 못하지마는 시간 많이 갔으니까, 그런 줄 알고 여러분들에게는 혹 들은 사람은 해결이 될 것이고 안 들은 사람은 수수께끼를 만들었고 마음에 번민과 고민을 만들었을 것이라 말이오.

우리 믿는 사람이 번민과 고민을 많이 걸머져 가지고 집어넣어 가지고 교회 가면은, 들으면 번민과 고민이 꽉 들어 가지고 요것을 엿새 동안에 자기가 그대로 말씀대로 실행 실천하는 가운데에서 실마리 풀립니다. 하나 풀리고 둘 풀리고 풀려. 요걸 하지 안하는 자는 백날 목사노릇 해도 저는 멸망만 받지 아무 소용없습니다.

여러분들, 사울 왕이 왜 비참해졌소? 왕이기 때문에 비참해졌습니까 왕이 아니라서 비참해졌습니까? 왕이기 때문에 비참했어. 목사 노릇하는 사람이 목사기 때문에 비참해집니다. 자기를 부인해요! 자기를 죽여요! 주를 중심으로 위주로 살아요! 안 살면 죽어요! 망해요!! 왜 이렇게 예수 믿는 목사들이 뭣 때문에 자기 중심 위주를 꺾지 안하고 이래 가지고 자꾸 자기 망치고 남 망치는 일 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이래도 그걸 쓸모가 있으니 고쳐서 쓸까 해 가지고 기다리고 있지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복수하십니다.

자, 사울 왕 이걸 그래도 없애면 안 될 것이고 이것을, 그것도 이용할 게 있다 말이오. 이용 가치가 있어 이용을 했지마는 이용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복수를 뭘로 했습니까? 복수를 뭘로 했어?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복수를 뭘로 했어? ○○○목사? 자살로 복수시켰어, 자살로. ‘이놈아 네 칼로 네가 죽어라’ 자살로 복수를 시켰다 말이오. 이렇게 하나님은 복수성이 강합니다.

땅위에 모든 사람의 복수성을 보거든 ‘저 복수성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로구나’ 이 땅위에 사람들이 천태만상으로 빼쪽 빼쪽 빼쪽 삐꾸는 걸 보거들랑은 ‘저 삐꾸는 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로구나. 하나님은 저렇게 삐꾸시는 하나님이로구나.’ 그 삐꾸시는 하나님인데 인간은 악을 중심해 가지고 삐꿨기 때문에 틀리고 하나님은 완전을 중심해 가지고 삐꿨기 때문에 완전을 중심해 삐꾸는 것은 삐꾸는 것이 좋은 것이요 나쁜 것이요, ○○○목사? ‘좋은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틀렸어. 교만 뽑아버려. 너 암만 목회해 봤자 그래 가지고 성공 못 한다. 뭐 ‘좋은 것입니다’ 이제 알았다 그말이오. ‘좋은 것입니다.’ 배짱이 있다 말이오. `좋은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아이가 돼. ‘좋은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뭘 자, 이렇게 할 사람, 옳은 걸 말할 때 이렇게 할 사람 손 들라 하면 요거는 마귀 새끼야. 헛일이라. 그 말을 알아들었으면 ‘옳은 것 이거 자, 소원하는 사람 손 드십시오.’ 하면 막 이라지. 또 이렇게 각오한 사람 손 드십시오. 이까짓 게 무슨 각오가 돼? 속에 불이 붙으면 ‘각오할 사람 손 드십시오’ 하면 막 이랍니다. 이라면 그냥 이라면 안 되니까 막 일어서, 그만. 막 이래 가지고 이래 가지고 이래 한다 그거요. 그렇게 간절함이 없으면 헛일이라. 다 제가 저한데 속아. 보면 다 알아.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새김질 많이 하고, 어짜든지 우리가 변해야 됩니다. 변해야 돼요.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사욕과 주관을 이기주의를 완전히 죽여 버려야 됩니다. 안 죽이면 안 됩니다.

이타주의를 하되 하나님을 중심한 이타주의가 아니면 헛일입니다. 인간을 중심한 이타주의는 결국은 인본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 도덕주의, 기독교 세상주의, 기독교 윤리주의, 이거는 다 그거 중심했기 때문에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276 하나님의 평강/ 빌립보서 4장 4절-7절/ 1987. 6. 3. 수저녁 선지자 2016.01.11
275 하나님의 표적/ 출애굽기 20장 1절-2절/ 1985. 6. 1. 토새벽 선지자 2016.01.11
274 하나님의 형상/ 시편 17장 1절-15절/ 1983. 6. 1.수새벽 선지자 2016.01.11
273 하나님의 형상/ 요한계시록 18장 1절-8절/ 1981. 1. 10. 토새벽 선지자 2016.01.11
272 하나님의 형상/ 누가복음 5장 8절-11절/ 1979. 8. 11. 토새벽 선지자 2016.01.11
271 하나님의 형상/ 로마서 8장 29절-30절/ 1979. 8. 12.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11
270 하나님의 형상-사랑/ 요한 1서 2장 24절-29절/ 1986. 8. 2. 토새벽 선지자 2016.01.11
» 하나님의 형상-사랑/ 요한일서 4장 16절-5장 4절/ 1986. 8. 23. 토새벽 선지자 2016.01.11
268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대로 알고 행할 것/ 로마서 4장 1절-8절/ 1986. 10. 21. 화새벽 선지자 2016.01.11
267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세 가지/ 고린도후서 5장 8절-10절/ 1986. 3. 9.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11
266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세 가지/ 고린도후서 5장 9절-10절/ 1986. 3. 16.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11
265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세 가지/ 고린도 후서 5장 8절-10절/ 1986. 3. 5. 수저녁 선지자 2016.01.11
264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세 가지/ 고린도후서 5장 8절-10절/ 1986. 3. 9.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11
263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마귀가 준 자유/ 갈라디아서 5장 13절-15절/ 1988. 10. 27. 목새벽 선지자 2016.01.11
262 하나님이 하시는 일 두 가지/ 요힌계시록 3장 10절/ 1981. 8. 26. 수새벽 선지자 2016.01.11
261 하나님이 해주시도록 기도한다/ 에베소서 4장 13절/ 1989. 2. 4. 토새벽 선지자 2016.01.11
260 하늘과 땅은 불에 타서 녹아진다/ 베드로후서 3장 11절-13절/ 1985. 8. 25.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11
259 하늘과 땅은 불에 타서 녹아진다/ 베드로후서 3장 6절-14절/ 1985. 8. 14. 수저녁 선지자 2016.01.11
258 하늘과 땅은 불에 타서 녹아진다/ 요한계시록 6장 12절-16절/ 1985. 8. 15. 목새벽 선지자 2016.01.11
257 하늘과 땅은 불에 타서 녹아진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13절/ 1985. 8. 18.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