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축복

 

1983. 5. 14. 토새

 

본문 : 시편 1장 1절-6절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는 이 말씀은  진리와 영감으로 중생된 자가 진리와 영감대로 다 살아진다 하는 것입니다.

영감대로 다 살고 진리대로 다 산다. 이게 자유한다 하는 말이오.

 사람이 영감대로 살려고 할 때에 여러가지 방해로 인해서 살지 못 하는데,  우리가 영감대로 살려고 할 때에 온 세상이 방해를 하는데, 세상이라면 악령과  죄와 사망과 모든 저의 점령한 사람들을 합해서 세상이라, 또 그 모든 문화들을  가리켜서 저의 복술이라 술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막으나 하나도  막히지 안하고 영감대로 다 할 수 있고 진리대로 다 하게 된다 하는 그것을 그  행사가 형통하다 하는 것이라.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악인은 사람이 벌써  자기 중심이 되면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자기 중심이 되면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어 그 관계가 끊어집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최후까지 붙들어 줄 자는 없습니다. 자기의 의지로  자기를 붙들고, 자기의 무슨 세상 자기가 만들어 놓은 기반으로 붙들고, 교제로  붙들고, 또 세상 어떤 과학의 힘이나, 사회 힘이나, 국가 힘이나 무슨 그런 것이  붙든다고 해도 그것은 사람을 진정 붙드는 것이 못 됩니다.

 노아 홍수 때에 홍수의 심판이 내리니까 인간이 스스로 붙들었던 그 모든 것은  다 소용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아무 매인 데가 없고 붙들린 데가 없으니까 그는 그저 바람 부는 데로 날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심판하실 때에 다 심판에 날아가서 다  망하게 된다 하는 그 말이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그말은 최종까지 책임져 주는 자가 없고  최후까지 멸망치 아니하고 생명에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멸망한다  하는 여기에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그말은 어데 붙들려 매인 데가 없다  그말이오.

 아무리 겨라도 그것이 어데 요새 말로 말하면 아주 강한 풀로 딱 붙여 놨으면  그게 바람에 떨어지겠습니까? 떨어지지 안하지마는 그 바람을 이길 만한 아무런  연결이 소속이 없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이 멸망을 시킬 때에 하나님의 멸망을 벗어날 만한 그런 아무런 배경이나  소속이 없는 걸 말합니다. 이러니까 여기는 하나님과 연결이 없다. 악인은  하나님과 연결이 없다 하는 그것을 하나 비유해서 표시한 것이오.

 또 "그러니까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멸망케 하는 것이 심판인데,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일 하고 멸망시키는  일 하시는데 구원하시는 일을 하시고 마지막에는 멸망시키는 일이 심판인데  "하나님의 말씀의 불로 불사른다" "불로 시험한다" 그말은 불로 멸망시킨다,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약과 진리로 멸망시킨다.

 암만 멸망을 시켜도 멸망을 하지 않는 것, 그러니 기독자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뭐 까불고 또 이리 심사하고 저리 심사하고 암만 심사해 봤자 전지전능의 심사로  전지전능이 멸망을 시킬래도 멸망시킬 수 없는 그것이 심판을 이기는 것입니다.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그러니까 그 반렬에  들지 못하는데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 하는 그 인정이라 말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계약 선포하신, 선포하신 그 계약과 일치되어 있다'  그말입니다. 인정하신다 그말은 색다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선포해 놓으신 그  계약과 이질적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 계약과 다른 게 아니고 그 계약과  동질이다 그말입니다.

 인정하신다 그말은 계약을 선포해 놓으신 그 하나님과 서로 색다른 것이 없다,  이질적인 것이 없다, 동질이다. 보니까 그 질이 하나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암만 심판해도 뭐 홍수 심판이나, 또  불심판이나, 앞으로 그리스도의 그 심판에서 아무리 심판을 해도 그 심판에  정죄받을 것이 없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요동치  아니할 구원이요 또 실은 하나님과 동질입니다.

 하나님과 뜻도, 소원도, 성품도, 마음도, 지정의도, 비판도, 평가도, 계획도,  취미도, 성미도 모두가 다 이질의 것이 아니고 하나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으로 인해서만 되는 것이지 인적 요소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적 요소의 것에다가 신성의 모든 것으 로서 다 속량을  입혀서, 근본은 피조물이지마는, 근본은 피조물이라 그 피조물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피조물이지마는 창조주의 은혜를 입어서 창조주와 꼭 같다. 아버지의  온전하심 거룩하심 주의 깨끗하심과 꼭 갈다. 같은 것만 구원이 되지 같지 않은  것은 다 멸망받습니다.

 그러기에 사데 교회에 대해서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었다.

왜? 네가 신앙 행위를 한다고 하지마는 네 행위에 온전한 것을 하나도 찾아보지  못했다. 온전한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화된 것, 그런 것은 네게 하나도  없다.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온전하고 깨끗한 그게 된 것이 구원인데 그게 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 된 것은 온전한 행위가 그게 아니라 온전한 행위를 하는 가운데에서 그  속에 그것이 이루어진다. 온전한 행위가 큰 것이 아니라 온전한 행위를 하는  가운데서 자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구원이 지극히 큰데 우리는 어떤 자가 돼 가지고 있느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서 과실 맺고 또 잎사귀가 청청하다 그 시냇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봇둑을 말합니다. 봇둑. 물 댈라고 만들은 봇둑을 말하고  자연히 되어 있는 강변이나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농부들의 인공을 가해서  만들어 놓은 그런, 인공을 가해 만들어 놓은 물쓸 관리하는 그 관수의 언덕,  물을 댈라고 만들어 놓은 언덕 그것을 말을 합니다. 자연 언덕이 아니고.

 거기에 있으니까 가물어도 수분이 넉넉하고 또 아무리 비가 와도 물이 쭉쭉  빠지니까 무손이 받쳐서, 무손 받친다는 것은 밑에 물이 안 빠지고 물 속에 오래  받쳐 있으면 죽습니다. 대나무 저것도 아주 강한 것 같지마는 물이 들어서  일정한 한 그 날짜, 며칠이라 하는, 많은 날짜가 아니고 며칠만 있으면은 그  대가 싹 다 죽어버립니다. 그다음에 물이 암만 빠져도, 그것이 무손이라 이러는  건데, 무손이라. 물로 손해가는 것이라 해서 무손, 그거 받치면 그만 곡식이  썩어져 버리고 안 됩니다. 그런 것이 없다.

 그러면 봇둑은 나무에 아주 모든 것이 다 구비하게 좋다 하는 좋게 되어 있는  그 위치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분의 무한하신 은혜를 비유한 것입니다.

무한하신 분의 무한하신 은혜를 비유했고 그 언덕에 심은 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심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 무한하신 은혜에  예수님의 대속의 그 중보자로 인해서 연결이 돼 버렸습니다.

 무한하신 은혜에 연결시키신 분이 우리의 중보자 신인양성일위의 대속의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시고 또 부활하셔서 그리스도로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는 우리의 그 둥치와 갈습니다. "나는 포도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리스도의  영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같이 하는데 그리스도의 영이란 말은 기름부음의  영이란 말인데 기름부음의 영이라 말은 우리를 제사장, 저 뒤에 들립니까?  제사장 자격과, 선지자 자격과, 왕의 자격을 완성시키는 직책을 맡은 이가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곧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그는 예수님은 중보자되어서 대속으로 화친의 그 화합시킨 역사를 하신 분을  말하고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 공로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우리에게 번져와 가지고 우리가 앞으로 거룩한 제사장, 깨끗한 선지자, 또  정확한 왕 이 직책을 주님과 연결해서 영원히 감당할 수 있는 이 실력을  양성하는 그 직책을 맡아 가지고 하는 이가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는 비유컨대 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둥치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거기다가 심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이 심어 놓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해질 수 있는 여기에까지 우리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안 되는 게 아니고 될  수 있는 그런 실력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말미암음이 아니고  지극히 큰 능력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 능력의 보호를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역사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온갖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에 넘치게 해 주신다' 우리의 생각보다 더 이상으로 이루시는  것은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 행위는 실행과 성경을 연구하는 것과 또 기도하는 것, 이  세 가지가 뱅뱅 돌아가면서 세 가지가 하나인데 이 세 가지가 겸해야 우리  신앙에 힘이 나고 자라지 그게 아니면 자라지 않습니다.

 이 비유에 말하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새 뿌리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새 뿌리 내린다고. 나무를 옮겨 놨을 때에 그 잎사귀가  땅내를 맡아서, 땅내 맡은 것은 그 색깔이 검게 이제 좀 생기가 돌아오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이제 땅내 맡았다, 땅내 맡았다. 지기를 지금 흡수하게 됐다  그렇게 말합니다. 또 그말을 또 농부들은 말하기를 이제 새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합니다. 새 뿌리가 내렸어.

 묵은 뿌리는, 묵은 뿌리는 그것은 현상만, 현재의 유지만 하지 자라거나 새로운  영양을 취하지 못합니다. 나무를 옮길 때에 큰 뿌리는 다 잘라버리고 작은 뿌리  남겨 놓고 그만 작은 뿌리에 새 뿌리가 나면 그것이 땅의 기운을 빨아당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자꾸 이렇게 상고해서 연구를 하면 하나 연구해서  한 진리를 발견하고, 또 한 소망을 발견하고 또 한 하나님과의 관련된 그  절대성을 또 자기가 발견해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의 각  부분에 골고루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가 섭취할 수 있도록,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그런 다방면을 자꾸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르면 믿을 수 없고 믿지 안하면 그 은혜가 올 수 없는 것인데  성경을 읽으면 비유컨대 새 뿌리 내리는 것과 같고 기도하는 것은 인제 새  뿌리가 내려 가지고서 그 지기를 빨아당기는 것입니다. 지기를, 땅기운을  빨아당기는 것. 그러면 빨아당기는데 새 뿌리가 나면 새 뿌리 그게 또 새로  땅기운을 그것이 빨아당깁니다. 빨아당기는 그것도 나무가 산 생명의 역사인데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역사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자꾸 새 뿌리가 난다. 동쪽으로도 새 뿌리가 나고 서쪽으로도 새  뿌리가 나고, 남쪽으로도 새 뿌리가 나고 새 뿌리가 나서 새 뿌리가 나는 그면에  은혜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 면에 은혜를 발견치 못하고 믿지 안하면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러면 성경을 봄으로 그 면에 은혜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새 뿌리 식물로  말하면 새 뿌리 내리는 것과 같고, 발견하게 되고 또 발견한 것을 자기가 묵상,  기도로 먼저 실험합니다. 기도로 그와 실지로 실 험으로 접촉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게 말하면 영양을 빠는 것과 같애.

 빨아당기는 것과 같고, 그러면 이제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뭐이 있어야 되느냐?  그 행함이라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행하려고 하니까 악인이 제 주장대로 하자고  달라듭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꾀움도 되고 달램도 되고 이렇지마는 마지막에는  그 세력을 가지고서 우리를 억 압합니다.

 뭐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나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에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한 그 세력의 이름을 한 말로 말하면 다 악이라.

그것이 다 인간 저들의 중심, 민족들의 중심 국가의 중심, 사회 중심, 단체  중심, 무슨 뭐 어떤 기관 중심 그게 다 악들이라.

 그 세력이 들어서 그렇게 살지 못하게 이렇게 방해를 하는데 그것이 말하자면  '해나 뜨거운 기운이 상우지 못한다' 했는데 그게 식물로 말하면 햇볕입니다.

햇볕이 쪼여 가지고 자꾸만 이 순애기를 마르게 할라고 자라지 못하게 할라고  자꾸 이렇게 방해를 하는데 그럴 때에 이 식물은 시냇가에 심었으니까 영양을  취해 가지고, 못 하게 하는데 자기는 하나님 말씀대로 그대로 합니다.

 기도를 못 하게 하는데 기도를 합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라 하는데 계속해서  절을 안 합니다. 할라는 데 하지 말라 하고 하니까 하지 말라는 세력과 할라는  세력과 이 두 가지 세력이 서로 대립이 돼 있는데 그때에 자기가 처음에는 그저  하기 싫으면 안 할 수 있었지마는, 하기 싫으면 안 할 수 있었지마는, 좀  있다가는 하기 싫어서 안 할라고 애를 쓰고 힘을 써야 안 하게 되고, 그다음에는  안 할라고 하니까 불미 속에 집어넣는 생명을 내놔야 안 하게 됩니다.

 점점 할라고 하니까,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방해가 오니 그 말씀을 어기지  안하고 그대로 실행해서 살려고 하니까 대항이 처음에는 예를 들어서 대항하는  힘이 한, 그것 비유인데. 한 근쯤 되는, 한 근쯤 되는 힘이 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럴 때에 처음에는 내게 있는 것이 혹 한 근이 돼서 서로 둘이 못 하게 하고  나는 한다, 하지 마라 한다 이래 신강이 있었는데 내게 있는 것 가지고서 하니까  서로 하고 못 하고 이렇게 신강이 있는데 자기에게 그 힘이 있어 가지고서 하지  못하게 해도 제 힘 가지고 그것을 이미 있는 힘 가지고서 그것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다음에는 대항하는 것이 열 근이고, 열 근의 힘으로 대항 하고, 백  근의 힘으로 대항하고, 천 근의 힘으로 대항하고, 만 근의 힘으로 대항합니다.

대항하는데 나뿐이면 그걸 한 근 대항은 서로 이렇게 비중이 같았지마는  그다음에는 두 근, 한 근 이상이 될 때에는 나는 그걸 대항할 수가 없는데 내  배후에 새 뿌리가 내려서 땅에 있는 지기를 지금 빨아 당기고 있습니다.

 자꾸 기도로 빨아 당기고 있으니까, 밑에서는 지금 다 준비가 다 돼 가지고서  빨아 당기고 있으니까 위에서 자라지 못하도록 햇볕으로 들이 쬐이는데 인제  그것을 그만 제가 대항하지 안하고 말면 안 되지마는 그렇게 방해를 해도 자꾸  합니다. 계속해서, 열 근이 오면 열 근을 대항해서 자기가 그대로 계속하려고  하니까 열 근을 대항하니 열 근 대항할 힘이 나와서 열 근 대항을 했습니다. 또  만 근이 방해를 하는데 만 근을 대항 하니 만 근 대항의 힘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힘이 뭐이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참 많은 땅에 있는 그 지기 영양  수분 그게 있으니까 그걸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것을 빨아당겨 가지고서 하니까  나중에 뭐이 되느냐? 시냇가에 심은 시내의 그 수분 좋고 옥토되어 있는 그  영양이 그것이 새 뿌리를 통해서 이렇게 둥치로 와 가지고서 가지로 올라가서  그것이 지금 적을 대항해서 이래 하다 보니까 나중에 가서는 대항한 그 힘은  하나님이 도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연결돼 있는 무한한 은혜가 지금 나는 그런 입장과 소속이  돼 가지고 있지마는 그 무한한 은혜를 내가 골고루 상관을 가지고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골고루 발견을 해야 되고, 성경을 읽어서 발견을 해야 되고,  또 발견한 것을 내것을 만드는 데는 묵상해서, 기도해서 그 영양을 빨아 당겨야  되고, 그 빨아 당긴 그 영양은 위에서 햇볕이 쪼우지 안하면 아무리 밑에 좋은  옥토에 심겨져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햇볕이 안 쬐이니까 그 수분도 소용없고 영양도 소용없어. 그러면 그것이 그만  그대로 빨아 당겨야 필요가 없으니까, 필요가 없으니까 다 중단됩니다. 새  뿌리가 내리는 것도 그만 내리지 못하고, 새 뿌리 내리는 것은 뭐냐? 위에서  자꾸 많이 요구를 하니까, 위에서 영양을 많이 요구하니 지금 현재 현상태로서는  그게 안 되니까 또 새 뿌리를 자꾸 내리는 것입니다.

 햇볕이 쪼우면 식물이 자꾸 새 뿌리를 냅니다 왜? 새 뿌리 안 내리면 위에  말라죽어 버리니까 안 말라죽기 위해서는 자꾸 새 뿌리를 내려야 되고 새 뿌리를  낸 그 뿌리가 자꾸 또, 그래 가지고 안 되니까 더 깊이 자꾸 수분 좋은 데로  자꾸 깊이 내려가 파고 들어 가지고서 이래 해야 되고 이러니까,  햇볕이 쪼우니 밑에 있는 뿌리 역할은 새 뿌리를 내야 되고, 깊이 박아야 되고,  또 수분과 영양을 섭취를 해서 올려 보내야 되고, 올려 보내니까 위에서는 지금  자꾸 대항을 해서 서로 싸우고 이러는 가운데서 이것이 자라갑니다.

 만일 위에 햇볕이 안 쬐이고 그만 음광이 져 가지고서 이래 있으면 새 뿌리가  나도 필요가 없고, 영양을 섭취해도 필요가 없고, 필요가 없으니까 새 뿌리 나는  것도 중단, 영양 섭취하는 것도 중단, 중단되니까 밑에는 중단되고 또 위에도  아무 햇볕이나 그런 게 쬐여서 그게 서로 투쟁이 없으니까 또 중단,  이러니까 둥치 줄기도 자라는 게 중단, 뿌리도 중단. 줄기도 중단 뿌리도 중단,  중단되는데, 이것이 중단 안 되는 것은 어떻게 해야 안 될 수가 있느냐? 햇볕과  통풍 둘이 있어야 됩니다. 햇볕이 쨍쨍 쬐이고 바람이 세게 불면, 바람도 불면  수분이 마구 날아가 버립니다. 또 햇볕도 쬐이면 또 수분이 날아가 버립니다.

 이게 날아가니까 부득이 밑에서는 또 새 뿌리를 내서 섭취를 해야 되겠고, 그  자리 가지고 안 되니까 더 넓혀야 되겠고, 더 깊어야 되겠고, 더 힘을 써야  되겠고,  이러니까 실행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성경 보게 되고, 또 실행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성경 봐서 자기가 깨달은 대로 하나님에게 간구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무한하신 분의 그 은혜에 우리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함을 우리가 섭취할 수  있고, 모든 면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구비한 은혜를 섭취할 수 있고, 또 그  은혜를 우리가 발견해 가지고서 얼마든지 섭취하는 그 구해 가지고서 얻을 수  있고,  그런 데는 자기가 기도를 암만 하고 성경을 암만 읽어서 모든 부분에 골고루  은혜면을 자기가 발견을 하고 이렇게 했다 할지라도 하나만 없어도 안 됩니다.

위에서 햇볕과 바람이 이게 쐬어야 되지, 바람이 쐬어야 되지 그게 없으면  무한하신 은혜가 필요가 없어. 무한하신 은혜가 소용이 없어. 전능하신 능력이  소용없고, 전지한 지혜가 소용없고, 하나님의 한없는 대속의 온갖 그 은혜가  자기에게는 필요가 없어. 쓸데가 없으니까.

 이 세상하고 싸우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쓰여지고 하나님의 지혜가  쓰여지고 하나님의 모든 은총이 쓰여지는 것인데 그만 그것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낮으로 햇볕 쬐일 때는 햇볕이 쬐일수록 밑에서는 거기에 안  마를라고 하니까 굉장한 걸 지금 빨아서 보급을 해야 안 마른다 말이오.

 안 마르고 이러다가 그만 이렇게 마구 준비해 가지고 올라오는데 햇볕이 딱  중단돼 해가 넘어가 버렸어. 해가 넘어가니까 이게 밤 사이에 새 순이 쭉 늘어져  버렸다 말이오. 그 힘이, 그 힘이 늘여 버려. 그 힘이 늘어지고, 늘어졌는데  그대로만 있으면 그게 또 결실을 못 해. 바람이 부니까 이게 또 바람에 쓸려  가지고 이러니까 튼튼케 만든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우리에게 오는 그 어려움은 바람 같은 그런 어려움은  우리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고 우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는 힘을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 지혜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것을 막아서 그거는 말하자면  악한 지혜요 무지인데 무지로 우리를, 지혜로 우리를 막아 가지고서 하나님의  지혜를 쓰지 못하게 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나로 하여금 쓰게 하는 것이고  또 세상 능력이 우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하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는 무한함에 지금 뿌리박아 가지고 연결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햇볕이 안 나도 안 되고 바람이 불지 안해도 안됩니다. 햇볕과 바람이 불 때에  그때에 마르지 안할라고, 바람에 마르지 안하고 햇볕에 마르지 안하고 햇볕과  바람에 말라서 죽지 안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결국 자랐다 말이오.

 그러면 자란 것은 뭐이 자랐습니까? 무슨 힘으로 자랐습니까? 자란 것이,  그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자란 것인데 새로 지기의 것을, 제것 아닌  지기의 것을 빨아당겨 가지고서 제 둥치와 뿌리와 줄기가 잎사귀가 끝이, 열매가  됐다 그거요. 그러면 신적 요소를 우리가 그 작용을 통해서 자기 것을 만들어서  인적 요소를 만들었는데 그러나 순전히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 그거요. 그게  인제 온전한 것이요 영 원한 것이요 불멸의 것들인 것입니다.

 토지를 사면 그 토지에 수분이 어떠나 또 그 토지에 영양이 어떠나 그런 것  보고 햇볕이 좋으나 그것 봅니다. 통풍이 좋으나? 통풍이 없으면 그 토지는  아무짝도 못씁니다. 바람이 안 불면 못씁니다. 또 햇볕이 안 쬐워 줘도  못씁니다. 그러면 밑에 지기에 있는 것을 빨아당겨 올려 가지고서 곡식이나 그  나무가 자라지를 못한다 말이오.

 햇볕이 없고 통풍이 없으면 땅에 있는 영양을 빨아당겨 가지고서 자라지를  못해. 그 자라는 작용은 무슨 작용이나? 위에는 죽일라 하고 안 죽을라 하고 꼭  투쟁으로 자란다 말이오. 그것도 투쟁으로 자라지 달리는 자라지를 못해.

 위에는 햇볕이 들어서 빠짝 말릴라 하고 저는 안 마를라 하고, 바람이 들어서  말릴라 하고 안 마를라 하고, 바람이 들어서 뿔라버릴라 하고 안 부서지려 하고  전부 투쟁으로 되는 거라 그말이오.

 이 투쟁으로서, 이제 투쟁하는데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로  말미암아 무한한 그 하나님의 은총에 연결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안  질라고만 하면 돼. 안 죽을라고만 하고 안 질라고만 하면 돼.

 안 죽는다 말은 육체가 안 죽을라 하는 그말이 아니고 신앙이 안 죽을라 하는  것이고 또 영감이 안 죽을라, 영감이 소멸 안 될라 하는 것이고 자기에게 진리를  깨달음이 소멸 안 될라 하는 것이고 자기가 신앙 양심대로 하는 그것이 뒤에  후퇴하거나 양보나 그것만 안 할라고 말이지 요런 투쟁하면 하면, 투쟁만 하면  밑에 얼마든지 예비가 돼 가지고 있어서 자라고 결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투쟁을 해도, 투쟁을 해도 뿌리가 깊이 새 뿌리가 내리지 안하고 뿌리가  깊지 안하면 돌짝밭에 뿌린 씨로서 또 인제 말라버리고 만다.

 이거는 새 뿌리가 나기는 났지마는 영양을 섭취를 못 한다. 그러면 안 돼.

그러면 또 헛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씀에서 자꾸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는 것은 새 뿌리  내리는 것과 같고, 또 우리가 묵상하는 것은 새로 깨달은 깨 달음에서 새로운  기도를 하는 것이 영양을 빨아당기는, 섭취하는 것과 같고, 위에서 이 외부적인  세상살이 하는 데에서 우리가 신앙대로 살 려고 할 때에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것은 내가 연결되어 있는 무한한 은혜를 힘입어 그런 것을 다 승리하고 정복할  수 있는 그 실력을 그 은혜로 내 실력을 만들게 하는 그 역사인데 그 은혜로 내  실력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은 그만 내 자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자꾸 이래 읽어서 점점 새로운 깨달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게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몰라도 내가 토마토 농사를 조금 지어봤는데  '토마토는 아무래도 적어도 세 번은 옮겨야 됩니다.' ,그래 '세 번을 뭐 할라고  옮기느냐?' '처음에 있던 데 그 지기를 빨아먹고 나면은 그다음에 또 옮겨서  널리 빨고 널리 빨고 이래야 되기 때문에 토마토를 첫 해 심으는 데에는 안  옮겨도 되지마는 여러해 심으는 것은 자꾸 한 번 옮겨 다르고, 두 번 옮겨  다르고, 세 번 옮겨 다르고, 다르다.' 자꾸 거기서 새 지기를 빨아당기기 때문에  그렇다 그거요.

 이 모양으로 우리가 자기가 현상 유지의 신앙 생활 할 때는 그것이면 되지마는  제가 성경을 봐서 새로운 깨달음이 없으면 그 이상은 자라지 안합니다.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성경을 봐서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되고, 또 새로운  깨달음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기도하게 되는데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도 기도 안  할 수 있어  어째 그렇습니까?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도 새 뿌리가 나기는 났는데 영양  섭춰는 안 합니다 어째 그렇습니까? 위에 필요가 없다 말이오. 전투가 없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 전투가 없으면 자기에게는 묵상의 그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전투가 없으면 새 뿌리도 나지도  안합니다. 또 새 뿌리와 그 영양 섭취가 없으면 전투 하면 말라버리고 맙니다.

안 됩니다.

 이러니까 이 셋은 하나라 하는 것을 대구에서 늘 말했는데 이 셋은 하나이기  때문에 어데서 내가 지체해 가지고 있는지? 요 셋이 하나가 돼 가지고서 이래  돌아가는 것이니까,

 오늘 아침에 제가 온 것은 아무래도 내가 이것을, 먼데서 왔는데 내가 가서  증거를 해 줘야 되겠다 해서 그래 왔습니다. 요새는 제가 내치 제가 잠 못 자고  뭐 팔다리 뭐 이런 게 쑤시고 이래서 잠을 못 자고 이라다가 잠은 지금 사흘째  잠을 자고, 또 구미 없어서 식사 할라 하면 세 시간 걸려. 하루 .아홉 시간 열  시간 걸려. 암만 먹을라 해야. 한번 할라 하면 세 시간 걸리는데 세 시간  걸려봤자 식사는 못 한다 그말이오. 대고 자꾸 이라고만 있지.

 그러다가 구미도 좀 나아졌는데 이제는 또 그렇게 뭐 많이 많아 먹은 거는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라면 뭐 과식했는가?' 그것도 아니야. 인제 자꾸  배아프고 설사나고 이래요. 요번 지난 주일에는 내가 그날 계산 하니까 똑  변소에 아홉 번 갔어. 갔는데 이래서 이 식사하는 분들도 또 조심을 해서 하기는  하는데 이분들이 알아야 되겠다 해서 몇 번 설사하고 난 다음에 내가 자꾸  말하니까 '저 목사님은 뭐 그렇츰 자꾸 설사하고 난 다음에 그래 살아 있을까?'  이래 여겨. 할 수 없어 그 다음에는 내가 설사를 하고 난 다음에 그걸 변소에다  양변기에 내리지 안하고 놨어. 내리지 안하고 한 두서너 번 자기네들 오다가다  보고 또 인제 또 내리고 또 내리고, 그래서 아마 자기네들이 안 것도 인제 여러  차례라는 것 알 겁니다. 아홉 번째라. 또 그래도 이상하기는 눈도 그렇게  들어가지도 안하고 기운도 그래 없지도 안하고 그날 주일날 설교는 또  잘했습니다.

 요새도 보통 세 번 네 번은 합니다. 어제도 제가 꽃마을에 가 가지고 거기에  오전 열한시인가 돼서 가 가지고 똑 네 번 변소에 가고. 그랬는데, 그래서 그거  어떻게 하나님이 하실런지 몰라. 죽 조그매 먹고 그래도 그것 가지고 이래 현상  유지가 이래 돼지고 이랬는데, 오늘 아침에 '나는 내일 아침에 못 간다' 하고  오늘 아침에 서 목사님한테 부탁을 하고 그랬었는데 또 새벽이 되니까, 열두시라  그때. 열두시인가 돼서 잠이 드는데 세시 이십오분에 제가 깼어. 깨니까 또 배가  하나도 안 아파. 안 아프니 또 내가 안 가면 하나님이 노여워하실 것이고 가라  하는갑다 싶어서 그래 내려왔습니다. 내려와 가지고 읏 입을 여가 없으면 그만  잠바 바람으로 여기 설까 이랬는데 옷입을 시간이 있어 그래 인제 곧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증거할라 하는 것은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것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이고 둘은 자기 몸 밖에 있는데 이런 것이 자꾸 이래 하는 것이 뭐냐?  비유컨대 그 식물로 영양에 필요성을 느껴서 '새 뿌리가 안 나면 너는  말라죽는다.' 새 뿌리 나게 하는 것이요 또 그 영양을 자꾸 새 영양을 자꾸  섭취하게 해서 점점, 한 평을 점령해 가지고 먹고 살다가 나중에 위에서 자꾸  햇볕이 되게 쬐이면 안 되니까 두 평을 점령해 가지고서 먹어야 그걸 대항할  수가 있고 가지가 위에 커지니까, 커지니까 대항이 많아진다 말이오. 이러니까  한 평 있다가 또 두 평 점령했다가 세 평 점령했다가, 큰 나무는 여러 평을, 한  십여 평 몇십 평을 이렇게 점령해 가지고 그걸 막 빨아당겨야 그냥 되진다  말이오. 그러면 자꾸 인제 나무가 커진다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자기에게 있는 게을이 드는 그것도 자기 안에 있는  적인데 그것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빨아당기게 하려는 역사요, 악인도  그렇고, 죄인도 그렇고 다 그런 것이니까 두려워할 것 염려할 것 없이, 우리는  거기 심겨졌으니까 우리를 심은 이는 예수 님의 대속으로 우리가 거기에  심어졌어. 우리가 스스로 나무가 심어진 것 아니오.

 주인이 심었는데 심은 그것은 예수님이 그 옥토에 우리를 연결시켜 놨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연결시켜 놨는데 연결시켜 놓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를  지금 아버지에게로 인도하는 것은 당신이 우리의 둥치가 돼 가지고 교회 머리가  돼 가지고 이래 가지고 지금 빨아당기기 때문에 우리는 뭐 이 세 가지만 하면 못  할 게 없다 그말이오.

 세 가지, 하나는 자꾸 새 뿌리 내는 것, 성경 이와 같이 자꾸 읽고 연구해  가지고 새로운 깨달음, 종류적으로 새로 깨닫는 것도 있고 같은 종류라도 더  깊이 깊이 깨닫는 것이 있고 이래서 어쨌든지 새로운 깨달음이 있는 그것이 새  뿌리 내리는 것과 같고 또 우리 묵상하는 것이 새 뿌리에서 영양을 섭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이러니까,  그 두 가지를 하면서 대항하고 투쟁하는 그 투쟁으로만, 투쟁을 해야 성경 읽는  것도 필요하고 성경 읽게 되고, 투쟁을 해야 '성경 읽어야 되겠다' 하는 그게  나오고, 투쟁을 해야 '기도해야 되겠다' 그게 나오고,  투쟁인데 투쟁은 둘은 자기 밖에 있는 것과 투쟁하는 것이고 하나는 자기와  투쟁하는 것이니까 그저 투쟁 그게 있는 투쟁의 존재 목적이, 그 투쟁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 나로 하여금 넓은 땅에 있는 지기를 빨아 가지고 내 뿌리가 크고,  둥치가 크고, 가지가 크고, 잎사귀가 많이 피고, 꽃 피고, 열매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서 있는 것들이라. 그것이 이래 있는 것.

 그러니까 자기가 게을나는 그게 뭐냐 하면은 자기 위하는 것. 게을 나는 그걸  정복하면 된다 말이오. 게을나는 그것도 투쟁으로 되고, 또 악인의 꾀도  투쟁으로 되고, 죄인의 길도 투쟁으로 된다 말이오. 이 러니까 투쟁만 하면은  필승이라 하는 건 결정돼 있다. 투쟁만 하면은 반드시 이긴다는 것, 그 투쟁으로  말미암아 자란다는 것은 그것은 틀 림없이 확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투쟁을 애끼지 말고 해라. 이렇게 있다 하는 그것을 증거하는 것을 제가 대구서  그걸 하다가 그만 끝을 못 마치고 말았는데,  이러니까 우리는 투쟁 없으면 무한한 은혜를 빨아당길 수가 없어. 투쟁이  없으면 무한한 은혜가 필요가 없고 또 투쟁이 없으면 그 은혜를 쓸 수가 없고  투쟁만 있으면 무한한 은혜를 다 써서 하나님처럼 온 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할 수  있다.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성경 학자들은 해석하기를 '이것은 인간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것 가지고 불가능하니 어떤 의인이라도 교만한 자라도 이 성구로  정죄받도록 하기 위해서 있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 해석이  잘못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되는 것은 아니고 피조물은 피조물이지마는 주님의  은혜로 될 수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시편 기자가 "내 행위의 온전치 못한 것을 찾아보십시오. 내  행위가 온전하지 않습니까? 흠이 있습니까? 점이 있습니까? 뭐 책망할게  있습니까?" 하는 그것은 중보자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 되어진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것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 자랑하는 것이요 자기 자랑하는 것  아닙니다.

 자기는 전적 부패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함을 받은 이것은  온전하고 깨끗하다, 그거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 은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게 아니라 말이오. 사람이 죄 안 지을 수가 있어  하나님께서 안 짓게 하시면 안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말이오 또 세상에서  못 할 일이 없는 그런 가능성이 있어. 그것 하는 것은 그 일을 땅위에서 자기가  다 완성한다고 해서 가능성이 있다 말이 아니오. 그 일을 하되 중단하지 안하고  계속을 하다가 계속하는 것으로 끝을 마치면 그 일은 완성입니다. 왜? 그자의  것은 인계자가 있으니까.

 인계자가 누가 인계자입니까? 성도가 신앙으로 하다가 남겨둔 그 것을 인계하는  인계자는 누굽니까? 녜, 하나님이 인계하십니다. 예수님이 한, 예수님이 다 한  것 아니오.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은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있는 것으로서 다 해서 하나님에게 믿음 지키는 것으로서  그것으로 죽고 그것으로 끝났으면 그일은 내나 이제까지 한 것도 하나님이  하셨고 껍데기만 내가 했지 하나님이 하셨는데 하시던 그분이 그 일을 계속해서  완성을 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완성 그것이 자기의 완성이라. 그러기에  아벨이 잠깐 살고 말았지마는 그 사람의 완성이 그것이 끝이 없어.

 그런고로 우리가 어짜든지 그만 제일 주의할 것은 뭐냐 하면은 모두 성경 보는  것도 필연적으로 되고, 묵상 기도하는 것도 필연적으로 되고 이런데 이 투쟁하는  이것도 필연성의 것인데 이게 제일 필연성이 제일 약합니다. 투쟁이 필연성이  제일 약하요. 요거는 제가 안 하고 요리 조리 피하고 꾀를 내서 요 꾀 내고 조  꾀 내고,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도인데 꾀가 많아서 그때에  타협주의로 말이지요, 그렇게 타협주의로 그렇게 나가는 것 그것이 투쟁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적이 그면 클수록 그 대적을 능가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를 수 있는 그런 기회인데 그 투쟁을 피하는 것이 자기의 실력을 자기가 받지  안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거는 피할 수 있는데, 그러기에 기독자들이 꾀를 써서, 무슨  행정을 해도 꾀로 하려고, 꾀로 하면 쉽습니다. 꾀로 하면 쉽지마는 역부러 그런  방편을 안 쓸려고 애를 씁니다. 미련한 십자가의 길을 가려 하지 그런 길 안  쓸라고 해. 그것 버릇이 되면 나중에 안 되기 때문에. 뭐라 하든지 꼭 하나님  앞에 가책되지 않는 바른 길만 뿍뿍 나갈라고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

 필연성의 그 양이 투쟁이 제일 약해. 그거는 자기가 양보할 수도 있고 이래  하지마는 이렇게 투쟁만 하게 되면은 이거는 성경 안 찾아볼 수 없어.

 재판이 났는데, 재판이 났는데 법전을 찾아보지 안할 수 없어. 재판이 났으니까  법이 어떤고 법전을 찾아보게 되고, 또 자기가 되게 급한 꼴을 당했으니까  언덕에 떨어지니까 '급하면 엄나무 쥔다' 말이 있어. 엄나무는 가시가  송송합니다. 급해 놓으니까 엄나무 거머쥡니다. 이 투쟁만 양보하지 않으면  급하니까 성경을 붙들어서 여기 어떤고 저기 어떤고 자꾸 이래 가지고 찾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또 필연적으로 기도하게 되고.

 이러니까 이 세 가지가 있어서 신앙 생활이 되어지는 것인데 성경 읽는 것도  필연성이 많고 기도하는 것도 필연성이 많고 투쟁하는 것도 제가 그래 할라  하는데, 그러면 뭐 당장 예수 믿는 사람인데 신사참배 해라 국기 배례 해라  하니까 이것 투쟁 안 할 수 없는 그것도 필연성이 있지마는 그래도 그건  껍데기이기 때문에 양보하고 이리 저리 둘러 맞춰 가지고 이렇게 할 수가 있다  그거요.

 그러니까 그것을 양보하지 말고 미련한 전투자가 돼야 돼. 이래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 그말은 전투자들이, 꾀라 하는 그거는 악인의 무력만 아니고 이제  꾀가 심하면 나중에, 처음에 꾀라 하는 건 달래는 데, 살살 꾀워서 달래는  데부터 시작해 가지고 나중에 강제까지 그것 포함해서 표시할라 하니까 악인의  꾀라 표시가 됐다 그말이오.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라" 그거는 성경을 어기는,  성경에 삐뚤어진 그 길을 가자 하는 것 그게 우리 투쟁이라.

 내나 뭐 그것 다니셀이 기도하지 말고 한 달 동안 기도하지 말라는 그것이  죄인의 길이요 그게 악인이 살살 달래고 꾀우고 하는 것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밖에 있는 전투, 이것 양보하면 기도도 필요 없고 성경도 필요  없습니다. 성경이나 새로운 깨달음이 필요 없어. 자꾸 이 투쟁을 하는  가운데에서 성경도 보게 되고 새로운 깨달음도 가지게 되고 또 기도하게 돼.

 그러면 투쟁이 없으면 나무 둥치 잘라 놓은 것 한가지입니다. 제가 요번에  정원에 있는 그 나무를 소물어서 이것을 좀 없애야 되겠다 해서  집사 보고  자르라 했습니다. 그걸 여유 있게 자르면 그게 새 순이 나는데 그걸 없애기  위해서 땅을 요만치 파고 잘라버렸어. 그 딱 잘 라버리니까 그만 거기서 나온  영양 그것이 나와 가지고서 당장 썩어서 버섯이 돼 버려. 그만 싹 죽어버려.

 그러니까 전투가 없으면은 당장 죽습니다. 기독자에게는 전투가 없 으면  죽습니다. 전투가 조그매씩이라도 있으면은 놀놀하게 해 가지고서 새 움이  조그매 나 가지고 뭐 성과는 없지마는 좀 거석하지마는 큰 성공은 없습니다.

 자기에게 닥친 전투를 양보하지 안하고 전투만 하면 무한한 배경이 있습니다.

무한 능력이 있어. 무한한 지혜가 있어. 무한한 은총이 있어. 전투만 양보 안  하면 이래 돼져. 큰 정자나무가 됩니다.

 이러니까 전투를 양보하면 안 돼. 이러니까 전투는 자기 밖에 있는 대외전이  둘이고 대내전이 하나인데 오만한 자는 그거는 대내전이라. 낙관하는 것,  게을하는 것.

 보니까 요새는 지금 기독자의 뭐 자유 시대라. 이러니까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는 뭣으로 무슨 그 전투를 안 해 죽느냐 하면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 이  대내전을 하지 안해서 죽어. 대외전을 할 게 없어, 뭐. 거리낄 게 뭐 있어야지?  조금씩 양보하면은 다 돼 버리는데.

 이러니까 우리는 전투 없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핍박 없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뭐 이단이니 뭣이니 무슨 파니 무슨 파니 하는 그런 소리가 없으면  그만 성장이 없다 말이오. 그런 소리가 자꾸 있고, 자꾸 있고, 있든지 말든지  그저 주님 앞에서 바로 서서 주님과 하나돼서 할 일 다 하면 되지 않느냐 해서  전투가 많을수록 양보만 안 하면 굉장한 성과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전투를 보고 불만스럽게 여기지 말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환경 이게,  환경이 이거 전투의 대상인데 불행스러운 환경을 불만스럽게 생각지 말고,  불행스러운 그 환경이 인간 말로 불행스러운데 그 환경을 능히 정복하고 극복할  수 있는 그 무한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그 말이오.

 그런고로 대외전 대내전 이것만 양보하지 안하고 전투만 잊어버리지 안하면  우리에게는 무한한 은혜가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는 권찰회 없습니다. 권찰회 없고 행정위원들만 잠깐 좀 사층에서  모이겠습니다. 총공회 행정위원들만. 십 분 기도 후에 모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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