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축복


선지자선교회 1985 1. 7. 교역자회

 

본문 : 신명기 28장 1절∼14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위에 보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고 그 다음부터 하나 하나 종목을 들어서 몇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모든 것이 다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게 되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되는 것은 필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을 우리가 믿는다고 해도 그 믿는  증표는 그 나타나는 열매로 알 수가 있는데 그 결과가 없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렇게 판명을 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 본문에서 제일 제일 문제되는 점이 어떤 점이냐 하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하는 이것이 문제가 되고 또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하는 요 두 성구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깨달아지지 안하면 수박 겉핥는 거와 같이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이것이 깨닫기가 어려운 문제이고,  또, 하나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모든 것이 잘되게 하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까 우리가 그 복을 받아서 모든 면에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게  되는 그것을 이루는 데에, 그 이루는 일에 대해서 사람이 어데까지 부담을 하며  또 하나님께서 어데까지 부담을 하시는가 하는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다음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이것이, 좌로 치우치는 것은  어떤 것이며 우로 치우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거는 안 된다는 거 실패하는  길을 말했는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실패한다. 실패하는 것을,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떠나는 이것이 하나 실패하는 원인 중에 하나이고. 또 그다음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그것이 또 실패하는 원인 중에 하나이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않으면 이와 같으리라' 그러면 다른 신을 따라서 섬기는 이것이  실패하는 원인 세 가지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여게 죽 내려보면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또 그다음에 오든 복이 올 것을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위에도 그렇게 말씀을 해 놓고 또 여게도  중복적으로 말씀을 한 이런 면에 우리가 좀 주의를 해서 그 뜻을 바로 깨닫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성공되는 일은 뭐 몇 가지를 들어서 말씀을 했는데 그거는 그저 금생과  내세를 다 총칭해서 대표로 몇 마디를 한 것으로 우리가 그렇게 볼 수 있고 또  영과 육 그것에 대한 것을 다 말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영과 육,  금생과 내세, 모든 면에 살고 죽는 것 또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 승리하고  패전하는 것 그 모든 것을 여게다가 다 연결시켜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랬는데. 우리는 너무 자꾸 복 복 이렇게 많이 말씀을 하시니까 하나님의 하신  이 말씀도 복을 너무 자꾸 많이 여러 번 이래 중복적으로 말씀하고 이러니까  고만 천해 보기 쉽습니다. 복을 자꾸. 이래 뭐 많이 말해 쌓아니까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서 이 계약 말씀의 권위성을 우리가 그만 예사롭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거게서 말씀을 떠나는 것은 의례히 말씀을 자기가 믿지 않는 것과 또  순종하지 안하는 그런 것이 다 말씀을 떠나는 것이 되겠습니다. 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하는 그 치우치는 거는 뭐일런지? 좌로 치우치는  거는 무엇이며 우로 치우치는 건 뭐인가 그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좌로 치우치는 것이 어떤 것이며 우로 치우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요것을 우리가 연구해서 알도록 합시다. 어떤 것인지.

 그저 우리는 오늘까지 늘 성경 공부를 해도 그저 듣기만 하고 자기네들이  연구도 하지 안하지 또 그대로 실행도 안 해 보지 이라니까 이제까지의 가르친  말씀은 전부 다 떠내려 가고 말았습니다. 떠내려가니까 능력이 나오지 안하고 또  그 사람에게 참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과 담력과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꾸 이렇게만 말해 줄 게 아니라 이거 자신들이  좀 생각해서 이 성경을 깨달을 수 있도록, 자기네들이 이 성경을 보고 생수를  친히 파 가지고 이 생수를 발견해서 마실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돼야 되지 이거  이렇게 자꾸 가르치기만 하니까, 마치 소 귀에 경 읽는다 하는 말과 같이  자기네들 정도에 얼토 당토 안한 말 하니까 그 무슨 말인지 아무 감각 없이  지나가기 때문에 이게 실패다 하는 그런 것을 제가 이번에 ○ 목사님 설교한 그  테이프를 들을 때에 깨달았습니다.

 그분이 성공한 것이 성경 읽으라고 하고 또 거게 대해서 연구 제목을 가르쳐  주면서 그 제목을 깨달으라 이렇게 연구를 그래 시키고 한 것이 그것이 효력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거게서는 연구한 것이 성경을 엮어서, 성경을  엮어서 하는 것뿐이지. 그만 성경에 문서적으로 나타난 거, 문서적으로 나타난  그 문서를 연결시키는 그 조직에 불과하지 거게서 보이는 그 문서 속에 들어  있는 그 면에는 별로이 말하는 것을 제가 들어 보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그  테이프를. 그때 여기 집회 한 것이 일곱 개 인데. 일곱 개를 한 서너 번  들었습니다. 또 들어 보고 또 들어 보고 이래 들어 봤습니다.

 들어 봤는데. 그래도 배우는 사람들이 실지로 깨딜음이 있고 자기네들이  감동돼서 실행하는 데에서 하나님도 역사하실 수가 있고 자기네들도 구원도 얻을  수가 있었는데, 이것은 도무지 거리 먼 말씀을, 자기가 들어서 깨닫지도 못했지,  그저 앵무새가, 앵무새는 아무 이성이 없기 때문에 그저 따라서 음만 외우는  것이지 속의 뜻은 모릅니다. 그거 모양으로, 앵무새 모양으로 음만 외우고  인간의 방언으로서만 그것을 외우지 그 속에 있는 진리는, 자기가 실지로 생활을  할라고 하면은 그 모든 것들이 다 거기에 대결돼서 다 일어나는 것인데, 생활 안  해 보니까, '어떤 그에게는 배경이 생겨지며 어떤 풍랑이 일어나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러면 그럴 때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생전 한번 겪어  보지 안하고 이래 놓으니까 요대로 나가면 틀림없이 앞으로 패전하는 사람이  되고야 맙니다. 틀림없이 그거는 뭐 백 프로 패전하는 사람 되고 맙니다. 절대  승리 못 합니다. 이렇지, 자기네들이 행해 봄으로써 비로소 알아진다는 것을  아무리 말해 봤자 그것은 뭐 그저 참 개가 머래 먹는다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입으로 꾹꾹 씹어 가지고서 그저 내놔 버리고, 아무 맛을 모르니까. 그거  모양으로. 그러니까, 교역자들이 교만하기도 하고 강퍅하기도 하고 아주 헛된  담력도 생겨지고 망령도 부리고 패역도 부리고 저 망할 줄 모르고 자꾸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니 이것은 저거가 좀 연구를 해서 귀를 뚫어 놔야 되지 이거  안 되겠다 하는 그런 것을 요번에 ○ 목사 강의에서 제가 깨달았습니다.

 그 ○ 목사님은 미국에서는 그 복음이 아주 세월을 아주 낼 겁니다. 거게서는  아주 부흥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 와 가지고는 좀 달라질  것입니다.

 왜? 미국 교회는 신앙 연령이 벌써 노숙해졌기 때문에 거게는, 처음에 초창기에  선교자들이 오고 할 때에는 모두 신앙 행동과 교리와 신조가 일치되는 그런 일을  해서 그때는 생명이 약동을 했지마는서도 그 후에는 남아 있는 게 뭐이 남아  있느냐? 기독교 도덕면이 남아 있습니다. 제일 남아 있기를 기독교 도덕면이  남아 있습니다. 이래서, 봉사면. 또 희생면. 그저 그게 무슨 도를 지키고 있느냐  하면 아마 표본적으로 천주교가 우리 한국에 와 가지고 복음 운동 하는 그와 꼭  같은 그런 현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게서는 이 구원에 대한. 우리가 말하자면 기본구원인데,  기본구원에 대한 것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다만 믿는 사람들이 인인 관계의 그 도덕면. 또 자선이나 구제면. 봉사면 그런  면만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또 높이 평가하고 이라기 때문에 그 면만 지금 힘을  쓰고 나가는 판입니다.

 성탄 축하 하는 데도 그 성탄 축하도 실은 성경적이 아니고 발가이 틀렸습니다.

그거다. 산타 할아버지가 아주 유명하게 이래 했지마는 그것도 아닙니다. 성탄  축하도 그게 온 세계가 다 그만 그대로 유전적으로 하고 있지마는 성경에 비추어  봐서는 비성경적입니다. 성탄 축하라든지 뭐 이렇게 또 추수감사절이라든지 이런  거 다 하나의 너무 그만 흘러서 유전으로 내려 가지고서 외식적으로 그렇게 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과는 거리가 멀어서 예수 믿는 거와는 아주 틀린 그런  별스러운 인간 도덕주의. 그런 무슨 좀 말하자면 사회주의라 할까. 이래 가지고  봉사주의 그런 희생주의 뭐 그런 것만 남아서 그것만 지금 움직이고 있지.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미국에 있는 신자 아마 천 명 모아 놓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대속이 어떻게 돼서 대속이 됐으며 어떻게, 대속이 뭣 뭣이며 어떻게  돼서 사죄가 됐으며 칭의가 됐으며 화친이 됐느냐 하는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그걸 구체적으로 물으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없는데, 이번에 그 ○ 목사님이 와서 하는 강의는 기본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본구원 그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있는 거. 그  기본구원을 그것을,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이 기본구원을 활용을 해 가지고 이  건설구원 성화구원을 이루어야 된다 하는 그 면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들  다 좋아하고 기뻐하고 뭐 굉장히 모아들 것입니다. 그거 뭐 그 사람들 무슨  가난한 사람이 부자 되는 것도 아니고 다 의식주가 넉넉한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다 기본구원을 말하니까 모두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해서 많이 모아  들지마는서도 그것은, 벌써 한국에서는 기본구원은 말하지 안하고, 벌써 새로  터를 닦지 말아라 하는 그것은 그 목사님 해석은 달리 하는데 그것은 기본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을 다시 말하지 말고 기본구원은 이미 얻었기 때문에  거게서 건설구원을 지금 이루라 하는 그것입니다. 건설구원을 이루라 하는  것이니까 이것이 착각하면은 사람이 들어서 똑 하는 것같이 이렇게 보여지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이 착각하기 쉽고, 하나님이 해 주시고 이라는데 사람이  하는 것같이 그렇게 모두 여긴다 그렇게 하는 그것으로 다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본 구원은 참 하나님께서 전부 우리에게 다 해 줬습니다. 다 공으로 해  줬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다 이루셨다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목적은 예수님이 다 십자가상에서 완성을 해 버렸습니다. 완성한  것입니다. 완성했으면 어떤. 양적으로 어느 정도 완성을 했는가? 우리 택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완성을 해 놨습니다. 완성을 해 놨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그 완성을 해 놓은 그 완성된 기본구원을 우리들이 실질로 자기가  입고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기본구원을  입은 자로 사는 생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셨는데.

우리가 그 기본구원을 입고서 그 기본구원을 입은 것을 든든히 여겨서  기본구원을 벗지 안해야 건설구원이 되지 기본구원을 벗고는 건설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지금 우리도 또 조금 그만 차차 낡아지고 쇠해져서 기본구원 이라는  말 한 마디로 벌써 기본구원 다 얻었다. 사죄 칭의 화친을 얻었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기본구원에 대해서 새기지를 안합니다. 새기지를 안해서, 기본구원이  무엇인지 그것을 뜻 깊이 새겨서 자기가 실감하고 실제로 그 기본구원을 입은  자로 살려고 하면 기본구원이 어떻다는 것을 그것을 알게 될 것 인데 입은 자로  살지 안하고 기본구원은 기본구원으로 얻었다 이래 버리고 또 지금 구원 이루는  것은 이것은 어디서 나왔는지. 그저 그만 자기가 예수 믿는다는 그런 이름만  가지고 그저 몇 가지 남아 있는 형식과 제도 이것만 행하면 된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고함만 지르고 큰소리만 하고 돈 가지고 운동만 많이 하고 이렇게 크게  운동이나 많이 하고 고함이나 치고 세상 권세 이런 것 가지고서 디리 날뛰면  그만 거게 끌려 가지고서 움직이는 것이 오늘 우리 한국 교회요 또 세계 교회가  다 그러합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그것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래. 그러니까 지금 사람들이 어떻게 살 줄을 모른다. 어떤  사람이 돼야 되느냐 하는 그것을 말해 주지 않는다.' 고것은 기본구원을 새겨  가지고서 아주 좋은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거게서 늘 말씀하신 그것은  기본구원을 우리가 확실히 믿고 입고 사는 사람이 되라는 그것을 말하는데, 고  기본구원과 구별을 지우지 안하고 그라기 때문에 고것이 건설구원인지  기본구원인지 요렇게 아롱아롱 돼 가지고서 있어서. 따지지 안하는 사람들은  은혜가 될 것이고 고걸 심히 따져서 들어가는 사람은 가다가 길이 멈추어지는  그런 일이 생겨질 것입니다.

 '어떻게 가느냐 걸어갈. 걸어갈 길을 가르쳐 주지 안하고 방편을 가르쳐 주지  안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구원이 지체돼 가지고 있다' 그 말이 참 현실을 바로  말한 것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 불파니 지시파니 방언파니 예언파니 또  신유파니 이렇게 쌓는 이것이. 물론 신앙생활을 바로 나갈 때에 그런 것들이 다  거게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마는서도 그것은 말하자면 외모의 색깔에 지나지  못합니다. 외모의 색깔에 지나지 못하고, 외나 속에 살이나 살이나 뭐 피부 안에  있는. 피부부터 근육 골수 그런 것은 아니고 하나의 화장한 거 같은 색깔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서 모두 기울어져서  이렇게 어떨 때는 이리 와 모우고 저리 모이고 마구 많은 사람들이 이리 모이고  저리 모이고 이렇게 하나 그 목사님도 '그것은 속성이 되지마는서도 또 속히  폐해진다. 속성 속폐가 된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속성 속폐가 돼지 안하고  천천히 성공이 되나 길이 성공이 된다' 하는 그것을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그런 말도 들을 때에 우리가 들은 것은 배운 것은 잘 구별해 가지고  무엇인지 그것을 자기가 가지고 이미 있는 교리와 신조가 있고 우리의 터는  기본구원이기 때문에 기본구원을 자기가 받아서 기본구원을 입고 있다는 것과 또  자기가 이 구원을 이루는 이 도리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그것이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어도 '내가 저게 대한 것을 들었나 안들었나, 조 구원 도리를  내가 배웠나 안 배웠나, 조 구원은 내가 입고 있느냐 입고 있지 않느냐?' 그  자기에게 있는 것을 그것을 살펴 가지고서 자기에게 있는 것이라면 '내가 있는  것을 이것을 활용하지 안했다. 내가 기본구원을 입고 있으면서 입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이것을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그러면 이것을 다시 새롭게 이것을 다시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하는 그 사데 교회에 말씀한 거와  같이 그렇게 할 것이 있고, 또 '이것은 이제까지 내가 받지 못한 은혜요 깨닫지  못 하던 진리라. 이러니까 이것은 새로 받아 가지고서 간직해야 되겠다! 그렇게  '새로 받아서, 새로 받아서 간직해야 될 것이니까 새로 받아 간직해야 되겠다'  요렇게 할 고런 부분들이 있고, 또 '이것은 내가 배운 것과 지금 가르친 것과  이게 서로 상치되니까 이것이 옳은지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으니까' 이런 데에는  이것을 놓고서 심히 깊이 숙고해 가지고 이것을 판정을 내려야 되지, 그러면  이것은 마치 참 비유에 당나귀 팔러 간 사람모양으로 여기서 이라면 이리 쭉  따라서 그만 과거의 이거 다 치워 버리고 이리 쭉 따라오고 또 저라면 저리 따라  오고 그런 사람들은 그것은 터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은 암만 해도 그래  가지고는 구원은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자기가 깨달은 교리와 신조라면 그 교리와 신조를 자기가  단단히 가지고 무슨 소리를 어떤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내가 알고 있는 교리와  신조를 내가 그만 그것을 쓰지 안하고, 교리와 신조를 내가 그 교리와 신조를  내, 영생인데 그게, 그것을 교리와 신조를 내가 이렇게 귀중히 여겨서 그 교리와  신조를 힘입어서 그 신조에게 내가 복종을 해야 되는 것인데 복종을 하지 안하고  있으니까 그만 그것이 묵어 버렸습니다. 묵었으니까, 내게 있는데 내가 그  교리와 신조를 무시하고 내가 거게 순종하지 안하는, 믿음을 지키지 안해서 이  교리와 신조가 내게 묵어서 있는 것인지 그 교리와 신조가 내게 없는 것인지 또  내가 이 교리와 신조를 지금 듣는 것은 요것은 다 과거에 내게 있는데 요걸  묵혀놔서 썩혀 놔 버렸다' 그러면 그 죄를 회개해야 될 것이고, '요것은 내게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인데 들어 보니까' 내게는 없는데 들어보니, 우리가  중생됐고 영감됐기 때문에 들어보면 비판이 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이랬기 때문에, 그 목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인데 영감의 말씀을 말합니다. 목자의 음성은 듣는다, 양은 듣는다. 중생된  사람이라면 벌써 그 중생된 사람 속에 내적 조명의 영감도 있고 또 안에 있는  역사적 영감도 있고 있기 때문에 들으면 자기를 중생시킨 영감이 자기를 깨닫게  해 줍니다. '아, 이거는 내가 이제까지 듣지 못 한 새로운 참 진리를 내가  발견했으니 이걸 내가 몰랐더라면 내 구원이 그 만치 미달되었을 게 아니겠느냐'  이래 받아들일 것이 있고, 또 자기가 이미 간직하고 있는 그 교리와 신조, 모든  신구약 성경은 다 교리요 다 신조입니다. 한 절수도 빠짐없이 다 전부가 교리와  신조입니다.

 이런데 이 교리와 신조, 내가 이미 들어서 간직하고 있는 이 교리와 신조와  오늘 지금 여게서 어떤 분에게 들은 교리와 신조가 이거 서로 일치되지 안하고  상치되어 있다. 그러면, 상치되어 있으면 오늘 들은 것을 취하고 과거 것을  버리느냐 과거 것을 취하고 오늘 것을 버리느냐?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없으니까, 이 둘이 그럴 때에는 이 둘을 두고서 자신이 그것을 연구 제목으로  두고 연구를 하고. 또 자기가 신앙의 모든 선배들에게 또 물어서도 또 연구도  하고. 또 뭐 주석이나 그런 것을 참고를 해 가지고서 그렇게 해서 어짜든지 그게  확실히 이렇다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판정이 돼야 되겠고 성경적으로 판정이  돼야 되겠고. 자기 속에 양심 속에 있는 영감적으로 '옳다' 요게 판정이 되고  자꾸 이렇게 판정을 해서 그렇게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씩 봤아 나가야 이  세상을 이기지, 그저 뭐 '그러면 그렇고 안 그러면 안 그렇고, 그래도 그렇고.

그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렇다 하면 그렇고 안 그렇다 하면 안 그렇고.

이러면 어떠며 저러면 어떠냐?' 교리와 신조에 단일적으로 이렇게 판정이 안 된  사람은 그 신앙생활이 다 창기 신앙이기 때문에 시대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절대 생명을 내놔도 그 사람은 외길을 걸어가는 그런 길을 걸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기 한국에서 있는 모두 왜정 말년에 수난당한 성도들의  전기를 저 구미 각국에서 읽어 보고서 막 기절하고서 참 놀래고, 어데 이럴 수가  어디 있겠느냐?' 그 사람들이 안 믿어 그렇다 말이오. 우리가 볼 때는 그거  예사로, 다 그 생활 다 하고 있다 그말이오. 하고 있어도 그게. 그만한 것을 뭐  유명하게 이름이 안나 그렇지 평신도로서도 다 생명을 내놓고, 대번에 죽는  것보다도 참 더 기묘하게 어려운 그런 다 순교 순생적인 그런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저녁에 내가 이거 말하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간직치  안하면 여러분들의 신앙이 창기 신앙이고 정절을 지키는 그 정절 신앙이  아닙니다. 창기 신앙이 되고 정절 신앙이 아닙니다. 어떻게 교리가 교리와  신조가 하나로 확정이 안 됐는데 그 사람의 걸음이 어떻게 하나로 확정될 수가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 하나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스스로 속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말하기  쉽게 획 하나도.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 말씀을  입에 발려서 가지고 있지. 그런 말씀이 와 가지고 우리를 심판할 터 이니까,  그러면. 우리 신앙 행위가 그 심판 앞에 설 것 아닙니까? 이런데 어떻게 자기가  교리와 신조에 대해 이러면 이렇고 저러며 저렇고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저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그러면. 자기 가지고 있던 것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해서 당장 던져 버릴 게  아니라 틀렸으면, 대개는 벌써 우리가 성경을 그래도 다 상식적으로도 성경에  대한 상식이 있고 또 우리가 중생됐고 우리가 또 양심을 가꾸어 나갔고 우리의  심령이 그래도 밝고 이라기 때문에 옳은 것은 옳다 인정이 돼집니다. 옳다  인정이 돼집니다.

 인정이 돼지고 또 성경적이고 하면은 우리가 과거에 알았던 교리와 신조가  잘못됐으면 그것을 고쳐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만일 어떤 사람에게 교리와 신조를 더 똑똑히 배웠습니다. 아주  명확하게 똑똑히 배웁니다. 배우면. 과거에는 비유컨댄. 한 육십 점짜리 교리와  신조를 배웠고 지금은 한 팔십 점짜리 교리와 신조를 배웠으면 우리는 육십  점짜리 교리와 신조를 버리고 팔십 점짜리 교리와 시조를 우리가 다시 가져야  되겠습니까 이제 육십 점짜리 교리와 신조를 그것을 다시 거게다 더 수정해  가지고, 그 교리와 신조를 수정해서 그 교리를 팔십 점짜리를 만들어 가지고  자기의 교리와 신조로 삼아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바로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이 돼집니까? 녜? 그거 한번 좀  자세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꾸 아무나따나 그러니까 우리가 이거 판정이, 이거, 예수 믿는 사람은  진실이라 하는 것은, 내가 늘 말해야 여러분들이 못 알아 들어요, 무슨  말인지를. 진실이라는 그것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건 하나입니다. 진실이라는 말은 하나라는 고 말을, 하나라는  말입니다. 하나라는 말. 하나. 거룩이라는 말은 뭐입니까? 거룩은 많은 복잡한  것 가운데에서 구별하고 구별하고 해 가지고서 많은 구별의 그 과정을 통과해  가지고서 하나에 도달 했을 때 그것을 가리켜서, 많은 과정을 통과해서 하나에  도달된 그 전체를 말할 때에 거룩이라고 말하고,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많은 그 사이비한 것을 그 과정을 통과해 가지고서 하나된, 그 과정은 떼 내  버리고 하나가 돼진 하나에 도달한 고 하나 고것을 말할 때에 진실이라 고렇게  말합니다.

 이러니까, 거룩과 진실을 가져야 되는데,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하는  진실한 자들을, 진실한 자들이 세상을 이기는데,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것은  온 세상인데, 그 세상 전체를 이기는 것이 진실 가지고 이기는 건데 그라면,  마귀도 이겼고 모든 정권도 이겼고 온 세상 전부를 다 이기는 것이 진실 하나  가지고 이기는 건데 그 진실이 입에 발려서 그저 '성경대로의 지식, 성경대로의  행위, 성경대로의 사람' 그까짓 거야 얼마든지 외우지마는서도 아무 가치  없습니다. 거게는, 그 진실은 하나에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 네가 교리도 하나  가지고 있어야 된다, 신조도 하나 가지고 있어야 된다, 성경에 이래 많이  있지마는 너는 이거냐 저거냐. 하나 가지고 있어야 되지 너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래 ○○○ 목사님이 ○○○ 박사의 조직 신학을 읽어보고 '이거 생명이  없다.' 나는 직전 못 들었는데, '생명이 없다.' 그 밑에 있는 제자들이 '왜  생명이 없습니까?' '여게는 이 사람은 이렇다 저 사람은 저렇다 다 이렇게 모든  걸 엮어 대서 이건 책보따리이고 책만 있지 제가 이거라 저 거라 하는 고 진실이  없다. 그 하나가 없다. 그게 없으니까 생명 없는 거 아니가? 생명 없는 책을 써  놨다' 그렇게 말하더라고서. 그 말이 참 깊은 말입니다. 그 말 해 봤자 그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그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 학자는 이라고 이라고 이라고  이라고' 너는? 자기는 없오. 그게 죽은 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하는 진실이라는 것도 말씀대로의  고 지식, 말씀대로의 지식이니까 그 지식은 하나이지 이래도 되는 지식 저래도  되는 지식이 아니라 말이오. 거게 뭐이냐? 절정의 절정의 생명은 진실이라  그말이오. 그 지식이 이래도 이 지식도 저 지식도, 아니오. 그러면 하나 외의  것은 다 틀렸어. 자기가 삐뚤어졌다 할 지라도 자기로서는 자기가 아는 요  하나의 요 지식, 요 지식 하나, '요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요렇게 아는 거 외의  것은 다 틀렸다' 이래야 하나가 그게 틀려서. 틀렸든지 말았든지 저에게는  생명의 힘이 있는 것이지 그 게, 그게 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이렇게 되어  있는 그 지식은 그것이 이럴 때는, 이게 편리할 때는 이게 나오고 저게 편리할  때는 저게 나올 터 이니까 그 사람에게 무슨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거는 벌써  십자가에서 피난 할 구멍이 열 개도 스무 개도 백 개도 넘은데 그 사람이 뭣  때문에 십자가를 푹푹 걸어서 십자가로 걸어갈 것입니까? 갈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 이 없으면 우리 신앙은 다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냐 저거냐 하나로 그래 돼야 되는데,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교리와 신조를 가지고 있으면 단일. 교리와 신조를  가지도록 해서. 자기가 교리와 신조를 가졌으면, 그래도 뭐 우리 한국으로  말하면 장로교가 와서 그래 했고, ○○교를 거석한다고 말했지마는서도 ○○교는  교리와 신조가 하나가 돼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 신앙은 그만치  널펑하고 속화적입니다. 타협적입니다. 그러나 장로교 교리와 신조는 이게 바로  돼 가지고 있는 점이 좋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어떤 면의 교리가 뭐, 빠진 것이 없이 성경에는 다 갖추어  가지고 있습니다. 빠진 것이 없이 갖추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으로도  빠진거 없이 갖추어 있으니까, 성경대로의 지식이면 다 구비할 수 있고 이런데.

고 여러 면으로, 여러 면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고것도 이 세상에는 수십 명이  수십 가지를 말합니다. 오늘 내가 여기 신명기 28장 찾을라고서 칼빈 주석을  찾으면서 칼빈 주석에 이거 있을 리가 없다 하고서 칼빈 주석에 찾으니까 없어.

또 뭐 다른 이래 좀 ○○○목사님 주석에도 찾아봐도 없어. 그래서 또 낮에 ○  목사님이 왔기 때문에 '야, 이거 좀 좋은 주석 없나?' 뭐 지금 양성원 도서실에  무슨 주석이 있다고. '가 찾아 봐라.' 거게도 없다 해. 내가 성경에서 '요게  뭐라고 해석을 했는고 요거 보자' 하고서 반드시 좀 어려워서 누구에게 좀 들어  가지고 요걸 좀 배웠으면 좋겠다 싶어서 찾으면 고 성구에 대한 해석은 전혀  없습니다. 내가 찾아 가지고 본 걸 내가 이제까지, 찾아 가지고 그 해석 본 걸  못 봤어. 그만 내버려 둬 버리고 말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소용없는 걸  말 해 그런지 다 가 봐야 알기는 알지마는서도,  우리가 교리와 신조 그런 것도 자기가 암만 잘못 알았어도, 잘못 알았어도  그것을 쉽사리 버리지 말고 다른 교리와 신조가 있으면은 먼저 교리와 신조와,  이 교리와 신조를 자기가 바꾸는 데는. 교리라 말은 자기의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깨달음. 자기 깨달음이 요렇게 깨닫고, 요렇게만 요렇게도  깨닫고 저렇게도 깨닫고 그거 못쓰는 창기의 신앙이라 그말이오 요러면 요렇고  조러면 조렇고 깨달음이 하나라야 된다 말이오.

 요렇게 하나로 깨닫고, 신조라면은 자기는 이렇게 믿는다는 그 믿음이니까  이렇게 믿든지 저렇게 믿든지 고것이 하나로 해서 가지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접촉하고 많은 사람에게 듣고 성경을 읽고 이럴때에, 자기가 성경을 읽어도  성경에서, 자기에게 있는 그 교리가 그것이 성경에서 그 교리를 더 삣고 깎고  씻고 할지라도 자기에게 있는 그 교리가 자기의 종자이기 때문에 그 종자를 삣고  깎고 씻고 또 모자라면 더 보태고 이렇게 해서 기르고 이래 나가야 되지,  오늘까지 있던 교리 교리와 신조 집어 던져 버리고 또 이 부흥회 가니까 그거 다  집어 던지고 그 부흥회 가서 또 새로 또 교리와 신조 또 가지고 또 저기 가서  저거 가지고 이라는 사람은 아직까지 교리와 신조를 잡지 못한 그런 뿌리 없는  화초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받아서 자기의 있는 것보다 좀 더 정확하고 명확하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더 명확하게 정확하게 그렇게 더 깨끗이 길러야 될 것이요  자기의 교리를 길러야 될 것이요. 또 다른 것이 와서 다른 거 있으면은 그게  맞나 내것이 맞나 그만 많은 사람이 간다고 훅 따라갈 게 아니라 그것을 자기가  가지고서, 벌써 자기가 오늘까지의 교리가 바꿔진다는 것은 자기가 바꿔지는  건데. 자기가 바꿔지는 것인데 그걸 쉽게 하면 얀 된다 말이오. 그럴 때에는  여러 가지로 심사 숙고 해 가지고서 성경도 보고 많은 사람에게 물어 가지고  나중에는 '이게 틀림없다' 하는, 그게 참 아주 자기에게 그거는 성경적으로도 백  프로 또 사람들에게 물어서도 백 프로 또 자기의 깨달음으로서도 확신있는  백프로 이래 됐을 때에 그걸 바꾸지 그걸 그냥 휘뜩 휘뜩 언간하면 주 바꿔  버리는 그런 사람 되면 못 씁니다. 우리가 벌써 아주 바꿀 만한 그런 것은  우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종자가 바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꾸  수정해서 그래 나가도록 그렇게 해야 그 사람의 신앙이 요동치 안하고. 또  언제든지 그래 하는 사람은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거룩함과 진실함,  진실하사, '거룩하고 진실 하사 다윗의 열쇠를 잡은' 거룩은 진실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 보면 저 사람이  거룩성이 있다 없다 그걸 사람을 우리가 그렇게 우리가 보는 대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거룩성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뭣을 들으면 그저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그렇게 둘을 가지지 못합니다.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이러니까, 거게서 어짜든지 그것이 자기에게 거룩이 진실에  도달하기까지는 자기에게 번민이 되고 또 연구 과제가 되고 이렇게 가 가지고서  꼭 요거면 요거 저거면 저거 하는 고 참이라는 바른 데 거기 딱 자기대로는  명중이 뇌어져야 그때 안심을 하고 고대로 믿고 고대로 해 나가는 이 사람이  되어져서 자기에게 진실성과. 거룩성과 진실성을 이거 자꾸 길러 나가야 되지  이거 기르지 안하면 그 신앙이 뭐이냐? 그거는 뭐이냐? 장사군 신앙입니다.

장사군 신앙.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보면 학자가. 불신자들도 말하기를 학자의 정신이라  또 상인의 정신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상인의 정신은 이렇게 저렇게  팔방미인으로 이렇게 자꾸 변동되는 그걸 상인의 정신이라 하는 것이고 학자  정신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죽었으면 죽었지 자기가 깨달은 그 학을 요동치  안하고 자기 생명과 자기가 깨달은 그 학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안 믿는 사람도  그런 것인데 하물며 우리 믿는 사람이라는 사람이 신조와 교리를 이래도 된다  저래도 된다 이렇게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진실해 나가는데에는 자기가 거게 대해서 달리는 알도 리가  없고 자기가 실험해 봐야 되겠다 그거요. 실험을. 해 봐야 돼. 아무리 앉아서  논리적으로 연구를 했다 할지라도 논리적 연구 한 것을 실험을 해 보면 또 논리  연구가 틀린 게 많거든요. 또 논리 연구가 없으면은 실험 연구가 전진이 안  됩니다. 실험 연구 논리 연구 이래 가지고 논리 연구를 실험을 해야 되는 것처럼  실험해 보면 그걸 안다 그거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자기가 실행하는 그것이 실험하는  것입니다. 실험하는 것. 실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리로 듣고 실험을 해야 알지  실험해 보지 안한 자는 거짓말 많이 하는 자가 다 더 옳습니다. 거짓말 하는 게  더 옳소.

 이러기 때문에 모두 우리가 이 교계를 봐도 참 눈을 뜨고 잘 봐야 합니다.

이러니까 뭐 이런 운동 저런 운동 큰 운동들이 있는데 그것을 하나씩 둘씩  처음부터 요것을 구별해 가지고서 진실을 가지고 이라면은 환한데, 대번에 그만  천인 만인이 다 있어도 그걸 판단 못 해도 그렇게 한 사람은 그만 진실이라는  잣대 그게 바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갖다 대면 틀렸다 그말이오. 다 틀려. 다  알아.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눈이 밝은 사람으로서 모든 시대를 바로 정평  정가 할 수 있고 이 세상의 운동들을 정평 정가 하지마는서도 그렇지 안하면  그거는 다수에 따라갑니다. 다수에 따라가. 돈 많은데 따라가고 세상 권세  많은데 따라가고 숫자 많은데 따라가고 많은 사람들이 찬동하는 데 거게  따라가지. 그게 무슨. 그거 따라가는 사람이 거게 따라가고, 하나님도 우리를  만나기가 어렵고 우리도 하나님 만나기가 어려운데, 따라가기 쉬운데로 그리  도망가는데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붙들 수가 있으며 또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찾아서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요거 회개해서 진실한 사람이 돼야 됩니다. 성경 도리를  진실히 배웠으면 어데다가 교만을 부린다 말이오? 어데다가 교만을 부리겠오?  성경 말씀을 진실히 배웠다고, 진실히 깨달았다고 하면은 어디서 주먹을  내놓겠오? 참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어데서 또 하나님이 계시는데 심판받을  그 입술을 자꾸 마음대로 놀리고 그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우리가 다  이거, 이것이 다 거짓이라는 증거이니까 고쳐야 됩니다.

 그래서 여게 지금, 여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삼가  듣는다는 건 뭐 쉽습니다. '삼가 듣고' 뭐 조심해 들으라 말이지요. '삼가 듣고'  '삼가 듣고' 왜, 허 할라고 삼가 듣겠습니까? 삼가 듣는 것은 그 다음에 보니까  오늘날 네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되는데, 뛰어나게 되는데 그 반면에 잘못되면 저주로써 완전히 망해 버리는 데  그 문제가 여게 달렸으니까, 문제가 달렸으니까 뒤에 영과 육, 금생과 내세,  자타의 죽고 사는 것과 망하고 흥하는 것 승리하고 패전하는 거, 고생과 평강  이것이 여게 달렸는데 몇 해나 달렸습니까? 십 년 달렸습니까 천 년 달렸습니까  만 년 달렸습니까? 영원히 매 달렸어. 영원히 매 달렸는데.

 자, 시험, 무슨 대학 입시든지 그래 아니면 아주 고등강의 뭐 아주 그런 뭐  고시 시험이든지 거석할 때에 그때에 시험 문제를 시험 문제를 불러 준다고  하면은. 시험 문제를 불러 준다고 하면은 그때 쓰는 사람들이 잠들며, 자면서  쓰겠습니까 어떻게 쓰겠습니까? 이거 잘못 받아써서 시헙 문제 잘 모르면, 시험  문제를 잘 모르면 시험 틀릴 것 아닙니까? 답안이 틀릴 것 아니겠오? 이러니까  얼마나 조심있게 받아 쓰겠습니까? 또 들을 때에 틀릴까 싶어서 암만 마음에 '하  내가 뭐 이럴 거 뭐 있나?' 온유함을 마음을 먹을라고서, 간 크게 마음을 먹을라  해도 손이 떨떨떨떨 떨리고 마음이 그렇게 벌써 정신에 그것이 벌써 영향이 미칠  것이고 자기의. 심리에 그것이 벌써 영향이 미칠 것이고 자기의 태도에 나타날  것이라 그말이오.

 이것도 이런데, 이것도 이런데 하물며 그 억억억억만 배도 더 되는 이 인생의  영원무궁의 죽고 사는 것이 여게 매인, 그까짓 거 학교 입학시험 해 봤자. 누려  봤자 뭐 한 사오십 년 잘 누려 봤자 누리지. 또 그거는 마음대로 그대로 또 사실  되기나 됩니까? 이것도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으니까.

'막 떨어라 막 떨어라. 아주 네가 기절을 해라' 이렇게 안하지마는서도 이 밑에  있는 대로 이 사실이 좌우되는, 좌우되는 근거가 요 말씀에 있다는 요 사실을  자기가 믿는다면은 벌써 그이의 심령과 정신이 다를 거라 그말이오. 고것을  가리켜서 여기 한 말로 '삼가듣고' 이랬으니까, 우리가 여게 대해서도 얼마나  에누리하고 얼마나 거짓부리이고 뭐 얼마나 지금 여게 대해서 참 천부당  만부당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서 이 말씀을 상대하는 것인지 이것도 우리가 참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정말로 어느 정도 내가 그 말씀에  대한 권위성을, '요 말씀대로 된다.' 요 말씀대로의 나는 그것을, 그대로 나중에  가 가지고 죽을 때나 심판 때나 그때 가 가지고 후회되는 그 후회만한 그런  후회는 못 될지라도 그만 비슷한 그런 놀람이나 떨림이나 그런 거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거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우리 심령이 강팍해졌다 말이오. 우리  심령이 강퍅해졌어.

 우리가 지금 인사 전도지라고, 나는 그 인사 전도지를 못 받으면 그날 좀  아무것도 못 먹어서 똑 배고픈 것 모양으로 허전해 못 견딥니다. 왜? 그저 인사  전도지를 받을 때에는 '밤낮으로 회개의 눈물을 강처럼 흘리라 하는 그 회개  전도지를 받을 때에 내가 자꾸 내 마음이 강퍅해서 내가 회개의 참 뜨거운  눈물이 없고 감사의 뜨거운 눈물이 없고 감사와 회개의 눈물이 없으니 내가  노쇠해서 노병의 눈물이 나온다. 이 눈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그 전도지 줄 때에  내가 한번 새기면서 전도지 주고 받을 때에 내가 그라고, 암만 바빠도 내가,  길을 가고 무슨 암만 급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내가 전도지를 줄 때에는 조금  멈추어 가지고서 전도지 받을 때에는 거게 대해서 깊이 한번 느끼고 이라니까 내  마음이 많이 새로워지는 것 같애요 마음에, 그게 없으면 그만 마음에 꼭 무슨 똑  먹장 가운데에 빠져 들어가는 것같이 영 구렁텅이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같이  마음에 불쾌해서 견디지를 못하겠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는다는 여게 대해서도 자기가 얼마든지 새기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이 말씀에 대한 권위를 내가 백분지 일이나  인정하나? 천분지 일 이나 인정하나?' 여게 대해서. 그러면, 우리가 모르니까 이  세상의 이런 말과 비교해. 이런 말과도 비교하고 저런 말과도 비교해 보고 저런  말과도 비교하고 모든 말과 비교할 때에 내가 이 말을 모든 말보다도 뛰어나게  그렇게 내게 그런 뜨거운 마음의 감촉을 주는 감촉을 줘서 그 말씀에 내가  뜨거운 감촉을 받아서 내 마음이 도무지 그저 떨리고 요 말씀을 뭐 잊어버리고  던져 버릴 수가 없는 고런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줄 터인데,

 고다음에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요것은 내가 독단 해석입니다.

오늘날이라는 요거 독단 해석인데, 이것이 다른 데 동지가 있는가 싶어서 뭐  주석을 암만 찾아봐야 없어서 독단 해석이라도 내가 요거 확신이 가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요걸 해석을 합니다.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이거는 하나님께서 단수로 나타냈습니다. '내가  오늘날' 요것도 단수입니다. '많은 세월 가운데에 어느 때든지' 이런 거 아니고  '오늘날' 하는 고것은, 오늘 날은 시간적으로 단수요 또 오늘날 속에는 반드시  요 시간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 시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게 명하는' 왜 위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삼가  들으라 했으면 삼가 들은 이 말씀을 네가 지켜 행하라 이랄 것인데 뭣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오늘날이라는 그 시간을 여기서 말했을까? 오늘날 또 네게  명한다, 네게 명하는, 위에 벌써 말씀 다 했는데, 그 말씀이 그 말씀인데 뭣  때문에 새로 또 내가 네게 명한다. 내가 네게 명한 다 이렇게 단수로 서로 바로  직접 대화적으로 말씀했을까? 그러면, 주님이 직접 우리에게 대화적으로 직접 이  시간에 명하는 그 말씀이 뭘까?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그러면, 우리가,  그다음부터는 복수입니다. 고 다음부터 명하는 고 한 마디 한 마디를 네가 지켜  행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니,  그러면, 네게 명한다는 그 명령이 어느 명령이겠습니까? 육십 육 권 도리의  모든 말씀은 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에게 말씀이요 명령인데, 그러면,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말씀이 무엇이겠느냐 이말이요 그러면, 어느 성구를 우리가  지켜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신구약 그저 토탈로 놓고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된다' 그러니까 좋지. 좋지마는서도 하나님의  도는 그렇지 넓은 게 아닙니다. 꼭 좁기가 더 이상없이 좁은 것이 하나님  말씀이요 또 이상없이 넓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펴면 한없이 넓고  오글트리면 한 없이 좁습니다.

 이러니까 자, 그러면, 신구약 성경 말씀 가운데에 어느 말씀을 지켜야 되겠는가  말이오. 어느 말씀을 지켜야 되겠는가? 그러면. 지킬라 할 때에 주님이 무슨  종이에다 써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그렇지 안하면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줍니까? 뭐 어째 합니까? 주님이 '요 계명 지키라. 요 계명 지키라.' 여게는  보니까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하니까 복잡한 게 아니고 한 계명을 말한거  아닙니까? '한계명 요거 지키라, 요거 지키라.' 오늘날이니까 오늘날이니까  오늘날 속에 축소를 하면 이 시간일 것이고 이 시간에 축소하면 바로 현재라는  요 현실 아니겠습니까? 여게서 명하는 고 명령의 말씀이 무엇일까? 고거  지키는데 생명이 있지, 고것 지키는데 생명이 있고 거게서 뭐 하나님이 주실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것이지 그냥 이래 가지고서 이 모든 말씀을 지켜서 행한다는  그거다, 다 그것이 헛된 소리입니다. 다 헛된 소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대화적으로 그렇게 나가지 그렇게 모든 명령한 것을 모든 말씀을  삼가 듣는 거. 삼가 듣는 거는 뭣 때문에 삼가 듣느냐? 삼가 듣는 것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고 명령을 당신이 명령하는 고 명령을 우리가 바로 찾기 위해서  삼가 듣는 것입니다. 삼가 듣는 것은 삼가 듣는 데서 오늘날 네게 명하는 고  명령을 바로 찾을 수 있는 거기에 효력이 있기 때문에 고걸 위해서 삼가 듣는  거라 말이오. 그러면, 삼가 듣는 건 그것 때문에,  그러면 이 명령이라 저 명령이라 무엇입니까? 그것이 다 거게 해석 돼 가지고  있다 말이오. '오늘날' 했으니까 오늘날이 무엇입니까? 오늘 내 형편이지. 그거  축소하면은 내 현재이지 현실이지, 내 현실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현실 저런 현실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 현실은 이것도, 현실은  다 우리가 현실에, 뭐 자기 현재. 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듣고 그 말씀대로  살자' 하는 이게 보통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자' 하는 이게 많고 거게서  더 좁게 나가는 것은 '현실에서 살아라, 현실에서 살아라.' 현실에서 살지 안한  것을 여러분들이 자꾸 들으니까 이거 아무 생각 없이 들으니까 예사로  여기지마는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는 성경대로 살아야 된다' 하는 거게서  '성경 말씀대로만 살게 아니라 이 현실에 대해서 살아라.' 요 현실을 지적해  가지고 현실을 말한 그게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릅니다. 그게. 그렇게 짜다라 이 세계 교리에 그렇게 많이 있는 게 아니라  그말이오.

 이런데. 그러면. '현실에서 살아라.' 또 현실은, 현실은 그거는 뭐 현실에는.

그 현실이 만들어지는 요소로 말하면 사람도 들었고 돈도 들었고 자연도 들었고  귀신도 들었고 또 정권도 들었고 뭐 가족도 들었고 원수도 들었고 낭파되는  어려운 난제도 들었고 오만 게 그런 게 다 종착이 돼 가지고 현실이 안 됩니까?  현실이 되는데, 그 현실을 사람들이 외모적으로 언뜻 볼 때에는 그 현실은 누가  만들었다 누가 만들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말하고 있지마는서도 그 현실은 주님이  혼자 만든 것이 틀림없습니다. 주님이 혼자, 우리에게 닥치는 천태만상의 현실은  주님이 혼자 만드셨다 하는 그것을 그래 어떻게 확정할랍니까? 그거 맞습니까?  그거 확실히 그냥 맞다 하는 그거 소용없어. 이거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자기에게 있어야 돼. 진실한 확신이 있어야 돼요.

 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은 당신의 주권 의지로 예정했습니다. 예정 아닌 거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조그만한 순서도 예정 안한 순서가 하나도 없습니다.

주권적으로 예정한 그것을 당신의 홀로 주권의 능력으로 혼자서 통치합니다.

어떤 피조물에게 하나도 간섭 받지 안해요. 주권 의지의 예정을 주권 능력으로  성취시킵니다. 이러면 이 현실이 온 이 현실은 누가 만들었다 말이오? 당신이  예정한 대로 당신이 혼자 만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걸 믿어야 된다 말이오.

이걸 믿는 데에서 뭣이 되는 것이지 이런 걸 다 떼 놓고 자꾸 허풍쟁이 같이  이렇게 떠들기만 떠들고 이라면 어리석은 교인들은 다 이렇지마는서도 진실한  교인은, 진실한 사람은 '저 허풍쟁이 말이다, 풍자적인 설교다.

 다 과장의 헛된 말이다. 하나도 진실이 없는 말이다. 실천할 수 없는 안내다.'  이거 알 수가 있다 그거요. 자기가 진실하게 살라고 하면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라. 막상 하니 뭐인지 압니까?  이러니까, 자기 현실은 주님이 혼자 만들어 준 현실이 현실마다 그 현실에  해당되는 성구가 있다 그거요. 현실마다 거게 해당되는 성구가 있어요. 고것이  고 현실을, 요 현실을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요 현실에 내 명령' 그러면,  당신의 명령이 뭐인지 모르는데 그분이 현실을 갖다 주면서 '아나, 자, 이  현실에 네가 어떻게 살래?' 하는 그것이 바로 당신이' '요 명령을 지키라' 하면  고 현실에 해당된 명령을 지키라는 그것이 당신의 명령이라 말이오.

 그래서. 그러면, 현실에서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삼가 들어 가지고서,  거게서 빠진 것 없이 다 말했으니까 그때에 그 현실에서 주님이 명령하신 고  명령을 지켜야 되는 것이지 거게서 안 지키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거게서 안  지키는 거는 아무 소용이 없어. 거게서 안 지키는 것은 그것은 뭐 지키기 힘도  안 들고 소용도 없고 당신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요렇게 하나님의 도는  좁습니다. 현실을 딱 주시면은 '여게 네가 해당된 요 성구 지키라' 고거 지키는  것이 당신에게 순종하는 것이지 그거 놓고 우리가 '의롭게 살자. 거룩하게 살자,  진실하게 살자. 서로 사랑하고 화친으로 살자' 그거 다 소용없는 소리요. 그거는  다 신사 참배 지나가고 나니까 '신사 참배 안 해야 된다' 뒤에 떠들어 대며 하는  그것이지 바로 신사 참배 안하면 지금 잡혀 간다 죽는다 하는 고때에, 고날 이제  팔월 십 오일 이내에 필요있는 것이지 팔월 십 오일 이후 지나고 난 다음에 아무  소용없는 말이오, 그 말이.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요 현실에서 당신의 명령을 고 현실에 해당된  명령지키는 것이 당신이 '오늘날' 오늘날, 오늘날, 오늘날, 이 시간 내가  여기에서, 너에게 명하는 거게 해당된 말씀이 그 말씀이 그. 말씀이라. 요  말씀을 요 28장에서 요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28장은 다 인간에게는 아무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제가. 천인 만인이 뭐 아무리 떠들어 쌓아도 생명은  없습니다. 여게 생명이 있다 말이오, 여게 생명.

 인제 그래 가지고. 그러면. 자기 현실에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전능자라,  하나님을 전능자라 이렇게 말하면, '전능자가 나를 보호한다. 지극히 큰 능력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 이라는데, 그것이 뭐이냐? 다니엘과 같은 그런 일이  나타났을 때에 전능자를, 전능자를 믿으라 했으니까 믿는 것이 순종  아니겠습니까? 믿으라 했는데, 전능자가 자기를 보호하고 있는 데 다리오 왕이  무서울게 뭐 있겠습니까? 우리가 전부 하나님께 대해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하나님의 보호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우리가 주권을 정말 어디서  믿느냐? '내가 주여, 당신의 주권을 믿습니다. 당신의 전능을 믿습니다. 당신의  전능을 전지를 믿습니다. 당신의 창조를 믿습니다.' 그게 아니라 현실에 믿는 게  그게 필요하다 말이오. 현실에 믿는 그게 필요해. 현실에 믿지 안하면 다 생명  없어요.

 예를 들어서 주권 개별 섭리를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은, 그러면. 자기에게  독침이 오든지 뭐 사자굴에 집어넣는 일이 오든지 그 거야 불미 속에 잡아넣는  일이 오든지 그러면, 오면은 그 현실을 고런 현실을 만들기를 누가 만들어  줬습니까? 주님이 만들었습니다. 고때에 주님이 만든 것을 믿는 거게 생명이  있는 것이지 고거 믿지 안하고 지내 보내는 그까짓 거 아무 소용없어요. 주님이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믿고, 그러면, 거게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명령  하시는가? 어떤 무슨 일이. 뭐 독침이오 고 뭐 사자 구더기가 오고 불미불이  오고 뭐 어떻게 온다 할지라도 고럴 때에, 고럴 때에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를  믿느냐 안 믿느냐? 고거 믿으라는 것이 명령 아닙니까? 고때에 주권 개별 섭리를  믿어라 하는데 믿으면 당신이, 불미도 당신이 만들었고 사자 구더기도 당신이  만들었고 독침도 당신이 만들었고 이랬으니까 그때에 내 앞에 와 가지고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은 주권적으로 개별 섭리하신 당신이, 무형의 당신이 유형의  이런 거 저런 것을 이용해 가지고서 그것을 나에게 나타내시니 그것도 내  현실이라 그 말이오. 현실이니까 거게서 나 할 것이 뭐인가? 거기서 나는 당신의  주권을 믿는 것이 나 할 일이라 그말이오. 당신의 주권을 믿는 것이.

 그러면. 주권을 믿으면 내가 입술로는 믿고, 입술로는 믿고 내 속에 마 옳은  지금 두려워 견디지를 못하고, 내가 그냥 억지로 믿기는 믿고 내모든 마음이나  고기 덩어리나 피부에 다니엘처럼 그렇게, 스데반처럼 그렇게 이 피부에 믿고 안  믿는 게 나타날 거라 그말이오. 나타나. 나타나. 피부에 나타날 터이니까 고렇게  진실한, 거짓이 섞이지 않는 고 믿음을 가진 고것을 당신이 원하십니다. 그러면,  그거 믿으면 그분이 온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날 수밖에 더 있습니까? 그  사람 위에 누가 올라가겠오, 가기를?  이러니까. 우리가 이리 빼 버리고 저리 빼 버리고 해서 다 힘드는 거는 다 빼  버리고 그라기 때문에 우리에게 능력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현실 현실에서 명령해 놓은 명령이 있는데 그 명령을 다시 참고로 말하면  그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그 명령  은 둘이라고 볼 수 있소.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거 있고 하라는 거 있고 두 가지로 나눌수 있소. 뭐 간단해. 하지 말라는  거 하라는 거 두 가지뿐입니다.

 이러니까. 거게서 당신이 두려워하지 말라 했으면 두려워하지 안해야 그거는  안해야, 하지 말라 했으니까 두려워 안 해야 순종하는 것 아닙니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했으면 두려워하지 안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쉽지 안해. 그게  쉽지 안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 오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쉬운 줄 알아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지 안하면 안 됩니다.

 ○○○ 목사님 여기 있지마는서도 6. 25 때 공사주의자들이 와 가지고 벌써  점령 다 하고 사람을 오십 명씩 칠십 명씩 엮어 가 가지고서 저 산에 다 끌고  가서 그만 총을 놔 죽이고 지금 바로 옆에서 그라고 있는 판인데 우리가 집회  하고 있는, 거기서 집회 하는 것도 그것도 하나님의 권능이오. 집회 하니까 뭐이  철컥 하는데 보니까. 내가 설교하면서 보니까 보니, 문 이 출입구가 세 군데인데  세 군데 인민군이 와 가지고서 총을 이래 거석 하면서 조용하라고 고함을  지릅디다. 고함을 지르거나 말거나 그대로 내가 설교를 하니까. 그래 가  가지고서 저쪽에서 나오라고, 암만 나오라 하니까 나갑니까? 설교만 더  고함지르고 한다 말이오. 하니까 ○○○목사님을 '가서' 총대를 대며 가서 빨리  나오라 한다고서 이라니까 원첨 겁이 나고 하니까 기어 들어와. 기어 들어오는데  내가 거기서, 그거 하나님이 하신 거라. 고함을 지르며 어데라고 들어오느냐고  뭐 할라고 들어오느냐고. '안 나가나?' 고함을 내가, 그때는 그만 안 나가느냐고  고함을 지르니까 할 수 없어 뒤돌아 나가요. 이라니까 거기 앉습디다 그거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어데 총 앞에서 그럴 수가 있겠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으로라야 되지 우리가 안 됩니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갈 때. 앞 세워 놓고 뒤에 총 들고 이래 오는데도 뭐 '사택으로 가자'  이라면서, '아. 좀 앉으십시오.' 내가 거기서 복음 전하고 이라니까 가자고.

저리 가면서 이제 뭐 어디로 갈란고, '갑시다.' 가니까, 가며서 나는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복음 전하고 똑 친한 친구같이 이래 내가 이래 합니다. 이래 하니까 떡  말하기를 '순수한 예수를 믿으십시오. 순수한 예수를 믿으십시오. 우리도 믿는  사람입니다. 가시이소.' 그래 놓으니까 예배당에서는 다 도망 다 쳐 버렸고 남은  거 몇 사람 있는 사람은 인제 죽었다고 뭐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러니까, 총독과 감사 앞에 설 때에 네가 어떻게 말할까 준비하지 말아라.

말하시는 이는 아버지 성령이시니라' 우리가 평소에 당신을 대우해. 내가 대우  할 수 있을 때에 대우해야 내가 할 수 없을 때 당신이 하는 것이지 그렇게, 그런  것도 하나도 느껴지지를 안해. 하나도 느껴지지를 안해. 제가 ○○교파에 있을  때에는 그런 소리를 하나도 안 했어요. 자랑될까 싶어서 자꾸 안하고 이랬는데  부득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지금 가르치다 보니까 자꾸 이런 말 하요. 내가 뭐  ○○○ 목사님이 여게 앉았으니까, 그때 왔다가 나한테 혼나 가지고 나간 사람이  ○○○목사님이오. ○○○장로님도 요번에 왔는데, 보니까. 그분도 그 자리에  같이 앉아 있었어.

 우리가 평소에 내가 안 믿으면 안 믿는 줄 알아야 되지 믿지도 안 하며 믿는  줄로 알기 때문에 그게 뭐이냐? 라오디게아 교회, '더웁지도 안하고 차지도  안하고 미직지근하다.' 그러면, 안 믿으면 안 믿는 줄 알면 된다 그거요. 안  믿는 줄 알면 자꾸 회개하고 믿도록 노력할 것 아닙니까? 믿으며 믿는 사람이 될  건데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안하지, 안 믿으면서 안 믿지 않는 자로 그렇게 알고  있지. 그게 미직지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축시켜 가지고 이 시간 당신이 현실을 주시는 이 현실에  여기에 당신의 명령이 무엇인가? 현실에서 당신의 명령을 찾아라. 당시의 명령을  찾아서, 찾는 일을 연습을 해서 찾는 일에 숙달하고, 그러면 현실에서 당신의  명령을 지킬라고 하면 하루 종일 가서 계산 대 보면, 계산 하루 종일 끝에,  계산대면 금방도 나는 주님의 말씀을 어긴 것뿐이고 지키지 안한 것뿐이고, 전부  지키지 안한 것뿐이고 어긴 것뿐이고 범한 것뿐이지 지킨 거는 없습니다.

요것을. 요렇게 자기가 하나님의 도를 상대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는 뭐 일 년 내  내 가도 지킨 것뿐이오. 지킨 것 뿐이고 말씀 순종한 것뿐이고 잘 믿은  것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에게 오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강퍅하게 만들고 어둡게 만들어서 삐뚤어지게 만듭니까?  그러기 때문에 여게서 오늘날 명한다는 요것을 하나 기억하고,

 또 하나 기억 할 것은 이렇게 우리가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는데 고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될란지 그거 우리가 모릅니다. 당신이 현실 주시는 대로 해야  되지 어쩔 것이오? 제딴에는 '내일 내가 무슨 일 하겠다' 어림도 없오. 내일  무슨 일 할라고 했는데 그일 커녕 어만 일이 나서 딴 데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무슨 일 하게 될지 모른다. 당신이 나에게 어떤 현실을 줄란지  모르니 내게 주신 그 현실에 나 할 일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미래에 어떤  일이라도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서 그렇게 계획할 수 없다는 것을 요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요 참 경험있는 사람이요 철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뭐 하겠다고서?  그러면 현실 주면 그 현실에 대해서 이라든지 저라든지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이라든지 저라든지 하는데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면 생명이요 명령을 어겨서 제  생각 제 마음대로 하면은 사망 아닙니까?  이렇게 해 나가면 우리가 모든 일 하는 것을 자기가 하는 데에는 무슨 일  하든지 그 일을 할 때에 두 가지입니다. 자기가 이 일을 잘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 있고, 일 하는 사람 있고. 하나님이 내게 명한 고 명령 순종 하는 사람  있고 두 종류 있습니다. 제가 뭐 제딴에는 뭐라 하지마는서도 실은 보면 벌써  제가 '요 일을 잘해야 되겠다.' 아주 설교 일도 그렇습니다. 설교 일도 '내가  설교 잘해야 되겠다' '하면 설교하는 사람은 안 돼. 우리는 실은 설교를 해도  그거 뭐이냐? 설교하기 위해서 내가 설교 하는 게 아니라 그 설교는 당신의  명령이 설교하라 하기 때문에 내가 설교하는 것이지, 내가 설교하고 싶어서 설교  하는 게 아니라 설교하는데 그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설교하는 사람 있고,  당신의 명령 복종 할라고 명령 복종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이러니까. 이 사람은  명령을 복종하는 것으로 설교하라 하니까 설교하고, 기도하라니까 기도하고,  당신의 명령 복종으로 하고, 목회는 뉘가 해 주느냐? 목회는 지극히 큰 능력  당신이 와 가지고서 복으로 해 줍니다. 복으로 해 줘.

 내가 그 일을 내 힘으로, 내 지능, 내 지능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로 시키는 대로 한다 할지라도 내 힘 가지고 한다 하면은 제 힘 가지고  하구로 내두지 하나님이, 제 힘 가지고 하는 자는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그자가  일이 성공되고 난 다음에는 제가 했다고 교만해져 가지고 더 배나 마귀 자식이  될 터이니까 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떠든다고 일이 되는 것 아니오. 아니고,  또 현재 보기에 뭣이 일어나고 됐다고 안심 못 합니다. 성공 같은 실패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 얼마나 크게  지었겠오? 이렇지만 그것이 다 하 나님 말씀의 불로 태울때 다 태워지지  안하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의 지능은, 우리의 지능이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들은 그것이  우리 지혜요 또 우리에게 있는 심신의 힘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지능은  당신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명령에 복종하는 그 일에 불과합니다. 고것만 해야  됩니다. 그 일에. 그 명령에 복종하는, 그 명령에 복종하면 그 복종 하는데  당신이, 이 복종 하는데 저것도 주고 저 복종에 이것도 주고, 내가 꼭 돈 만드는  복종해야 돈 주는 줄 압니까? 아니오. 당신이 돈에 대한, 내가 돈에 대한 복종을  했는데 당신이 권세 줄 수도 없고. 내가 돈에 대한 복종을 했는데 당신이 다른  믿음 줄 수도 있고, 이러니까, 그 주시는 것은 당신이, 나는 당신의 명령  복종하는 것을 복종하면 당신이 복 준다 했으니까 복은 이 복 줄란지 저 복  줄란지 복의 종류의 결정도 당신이 할 것이오 복을 주니까 그 복 받아가지고  뭐이 되는 것이지 내가 뭐 해 가지고 되는 것 아니라 말이오.

 그러면, 그 복이 뭐이냐? 얼마 전에 제가 가르칠 때에 모든 존재는 형체가  있다. 형체가 있고 형체 속에 그 형체의 자연의 힘이 있다. 자연의 힘 속에  지극히 큰 능력의 힘이 있다. 이 세 가지 삼중으로 되어 있는 모든 존재이니  삼중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그러면, 기독자는. 기독자는 자기의 형체를  가졌고 형체의 자연의 힘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의 법칙에 맞춰서 그러면  지극히 큰 능력이 온다. 그게 믿음 지키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인데 온다. 안  믿는 사람들은 형체와 자연의 힘 그것뿐이고, 우리는 지극히 큰 능력이 오는데  지극히 큰 사망이 그들에게 와 있습니다. 지극히 큰 사망이거기 와 있는 것은  뭐이냐 하면 악령과 악성과 악습의 그 세력이 그 속에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건 지극히 큰 사망의 능력이요 우리는 지극히 큰 생명의 능력이 있는 것인데  그 능력이 뭐이냐? 지극히 큰 능력.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큰  능력의 보호를 입었나니 그 능력이 어떠하심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해서 죽는 성공을 했고 산  성공을 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그 능력이 와 가지고서 일하는 것만이 영생에 도달합니다.

여러분들, 완전치 못한 것이 완전한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영원치 못한 게  영원한 거 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혈과 육은 하늘나라를 얻지 못한다'  이랬습니다. 썩을 것은 썩지 안할 것을 얻지 못한다 했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어떻게 만듭니까. 만들기를? 우리가 다 불완전한 것이요, 유한한 것이요, 다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요, 사망 아래에 있는 것이요 다 이런 심신은 다. 이런  것들인데. 이것이 무슨 완전을 만들며 영원을 만듭니까? 영원불변을 만들  것입니까? 우리 구원은 다 완전의 것이요 영원불변의 것이오. 이것은 다 이런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연단하는 것이라, 믿음을 연단한다 말은, 불로 금을  연단하는 것보다 더 보배롭다 그 말은 뭐이냐?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와  가지고서 복으로 해 주시는 거, 복으로 해 주시는 거. 지극히 큰 능력이 와  가지고 우리에게 해 주는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충성이라는 그  충성은 다만 당신의 계약 상대자로서 우리가 그 계약을 '네가 이렇게 내게  순종하면 내가 해 주겠다' 하는 고 계약을 지킬라고 바들바들 고 계약을 지킬  때에 우리 할 일 다 했습니다. '네가 이 계약을 지켰으니까 이 계약 한 대로  내가 계약을 이행하겠다' 하며 해 주는 것이 그것이 당신의 축복이요 지극히 큰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능력이 와서 하는 그것이, 그것은, 창수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안하는 반석 위에 세운 집이라는 반석이 뭐입니까? 그 반석은  곧 하나님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반석은 하나님을 말한 것이니까 그 위에  세운 것은 뭐이냐? 지극히 큰 능력이 와 가지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 그말이오.

지극히 큰 능력이 만들어 놓은 거. 또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라는 것은  불 탈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보기는, 외형은 꼭 같지마는서도 이것은 다 인간의  지능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요 인간의 지능으로 만든 것이요 하나님의 지능으로  만든 게 아니라. 이러니까 진리에 불타고 말지.

 이러니까, 그것을, '모든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것이 믿음을  연단하는 것이다.' 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완전한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완전하신 그 능력이 만들어 놓은 것은 타지  않는다. 그 능력이 만들어 놓은 것은 세상이 태우지 못한다. 해하지 못한다. 왜,  그것이 피조물 위에 있는, 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한 고차원의 것인데, 근본이  거게 있는 것인데 그것이 이 피조물들에게 피해를 받습니까? 이러니까, 네가  속고 있는 거, 네가 속고 있는 거 사이비한 것에 네가 속고 있는 거, 아니면  그걸로 알고, 없으면 있다고 아는 거 그것이 이제 드러나 가지고 그게 다 타서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거는 마치 금을 불로 연단할  때에 연단해서 잡것이 다 타져 버리고 순금만 남는. 그보다 더 귀하다는 말은  가치있다는 말 아니오. 금을 불로 연단해서 잡철이 다 타고 순금만 남는  그보다도 더 귀하다 그 말은 그보다 더 정밀히 정선돼 가지고서 하늘나라에 간다  그 말입니다. 하나도 섞여 있지 못해요.

 이러니까. 뭐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그 집이 얼마나 않습니까? 한번 보지?  제가 조그만한. 매일, 자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자꾸 매일 시험  닥치는데, 조그매라도 하나님의 전능을 바란다면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은  그따위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건데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기 때문에 제가 안  하면 안 된다고 해 가지고 제가 날 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제가 무슨 어떻게 하면 변동을 될 줄 알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사람은 당신에게 맡겨 놓고 당신의 명령 복종할 것뿐이지 뭐  깨진다고 해서 걱정하고 사람이 죽는다고 걱정하고. 당신의 예정대로 되는 일을  누가 변동을 시킬 것입니까, 시키기를? 왜 거게 대해서 애가 터져 그랍니까?  그게 하나님의 주권 의지의 예정을 믿지 않는 증거라 그말이오.

 그런고로, 우리가 모든 일을 하는 데에는 우리의 지능은 당신이 우리에게 지킬  수 있는 정도의 계약을 말씀했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전심전력을 다 기울이면  당신의 그 조건부로 주신 그 계약을 이행할 수 있는 거게 지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계약 이행하는 데 내 전심전력을 기울였으면 당신의 제약을 지키는  자로서 당신이 계약하신 대로 그것을 줄 수 있는 그 대상이 되었고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돼서, 내가 계약 지킨 그 계약 지킨 그것이 뭐 돈되고 은 되는  것 아니오. 계약 지킨 것은 계약 지킨 그것대로 계약 지킨 그거고 계약 지켰기  때문에 당신이 주시는 것은 복으로 주시는 거는 딴거 주시는 거라. 복으로  주시는 거. 제약 지킨 그것이 뭣 되는 게 아니라. 계약 지킨 고것이 뭐이 되는  게 아니라 계약 지킨 거는 따로 있고 당신이 주시는 거 따로 있다는 고것을  우리가 또 구별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 당신의 조건부를 지키는 계약 이행의 우리의  노력이지 우리가 썩지 않을 것을 만드는 노력이 아니라는 것을 요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썩지 않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그걸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썩지 안할 것을 만들 만한 그런 실력이 없다 하는 것을 그것을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실력이 없습니다.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으로 만들겠습니까?  이래도. 이렇게 가르쳐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걸 알 것입니까?  이러기 때문에. 나는 그래요. '이 가르치는 것이 참 이상하다. 뭐 할라고  이렇게 가르치노? 암만 가르쳐 봐야 뭐 무슨 희망이 있느냐? 암만 가르쳐 봐야  모르는데, 암만 들어 봐야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만 쉽게 그라니까 몰라.

 제가 대구 집회 가 가지고서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가르친 거 거기서 하나님이냐  자기냐. 하나님이냐 자기냐, 인간의 여론이냐 하나님의 뜻이냐 하나님의  축복이냐 땅위에 있는 모든 조건들이냐 고걸, 내내 말했습니다. 고거 내내  했는데 고것을 정말로 잡았으면은 다 살아났습니다. 정말로 잡았으면  뛰어났습니다. 고 하나 알면 다른 거 다 아는 거라. 이래도 그것을 알기는  아는데 실지로 고렇게 자기냐 하나님이냐 할 때에 자기 버리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없고, 모든 인간의 여론 이런 모든 여론들이 이래 있는데  하나님의 뜻이 뭐이냐, 인간의 여론을 다 집어 던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을라고  고렇게 나가는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그래 안 살아요 살기를. 안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위에 있는 조건이 좋아야  되지.' 이 조건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이지. 아브라함은 모든 조건보다도. 롯은  조전을 찾아서 택해 갔지마는서도 아브라함은 조건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을  따라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뭐 한 말씀을 가지고서 뭐 참 일년 아니라 평생 새김질해도  남고, 그 말씀과 나와 말씀대로의 사람이 돼야 되는데 내가 말씀대로 사람이  되는 것은 일년 아니라 평생해야 되는데 무엇이 전부 외식이고 껍데기이기  때문에 다 자기 속는 것뿐입니다. 이러니까, 그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 이래  말이 그럴 게 아니라 내가 정말 모래 위의 집인지, 집이 모래위에 지은 집인지  반석 위에 지은 집인지 모르면 비오고 바람 불면 알지. 비 오고 바람 불면 알아.

신사 참배 같은 비와 바람이 안 와도 매일 비와 바람이 온다 말이오. 매일 비가  와도 매일 창기 모양으로 다 버려 버리고 다 거석해 놓고 무엇이 하나님  섬긴다는 것입니까? 하루를 계산해 봐요. 우리는 진실하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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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316 하나님의 지식의 이치로 따지자/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1988. 5. 2. 월밤집회 김반석 2016.01.03
315 하나님의 진노를 풀자/ 신명기 6장 4절-15절/ 1981. 6. 13. 토새벽 김반석 2016.01.03
314 하나님의 진노를 풀자/ 신명기 6장 4절-15절/ 1981. 6. 12. 금저녁 김반석 2016.01.03
313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것/ 요한계시록 18장 1절-3절/ 1981. 1. 9. 금새벽 김반석 2016.01.03
312 하나님의 참사랑과 우리의 현실/ 마태복음 25장 46절/ 1982. 3. 20. 토새벽 김반석 2016.01.03
311 하나님의 총애받는 방편/ 요한복음 15장 1절-14절/ 1983. 5. 18. 수저녁 김반석 2016.01.03
»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14절/ 1985 1. 7. 교역자회 선지자 2016.01.05
309 신명기 28장 1절∼19절/ 신명기 28장 1절-19절/ 1986. 3. 19. 수저녁 선지자 2016.01.05
308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 1985. 1. 6.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05
307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6절/ 1986. 4. 24. 목새벽 선지자 2016.01.05
306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4절-19절 / 1985. 1. 4. 금저녁 선지자 2016.01.05
305 하나님의 축복/ 사도행전 8장 6절-8절/ 1986. 3. 20. 목새벽 선지자 2016.01.05
304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 1985. 1. 3. 목새벽 선지자 2016.01.05
303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2절/ 1984. 12. 31. 월새벽 선지자 2016.01.05
302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2절/ 1985. 1. 2. 수새벽 선지자 2016.01.05
301 하나님의 축복/ 로마서 8장 18절∼25절/ 1986. 5. 19. 월새벽 선지자 2016.01.05
300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19절/ 1984. 12. 30.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5
299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19절/ 1986. 6. 22.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5
298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19절/ 1986. 6. 22. 주일 오후 선지자 2016.01.05
297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 1986. 6. 24. 화새벽 선지자 2016.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