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지식의 이치로 따지자

 

1988. 5. 2. 밤집회

 

본문 :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에는 여러 종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근심이 물러가는 그런 은혜도 있고 또 기쁨과 평강이 내 속에 돋아  오르는 그런 은혜도 있고 또 범사에 강하고 담대한 그런 은혜도 있습니다. 또  자기에게 소망이 뜨거워지는 은혜도, 또 의에 간절히 불붙는 그런 열심나는 그런  은혜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자기의 지식이 변화되는 그런 은혜도 있고 또 자기의 모든  소망이 변화되는 그런 은혜도 있고 또 행위가 이루어지는 그런 은혜도 있고 또  자신이라는 그 사람이 자타가 볼 때에 변화되는 그런 은혜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우리에게 올 때에 오는 그 순서의 과정을 말하면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렇게 우리에게 와서 부딪혀지는 그런 일도 있고,  분위기라는 것은 혹은 한적한 곳이라든지 또 정숙한 곳이라든지 또 사람들의  모임의 수효의 무슨 변화되는 그런 일이라든지 그런 것으로 인해서 오는 일도  있고,  또 자기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에서 자기의 감정이 발동돼가지고  그렇게 되는 그런 은혜의 방편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들을 때에 방언의 은혜를 받아서. 방언의 은혜라면  오순절에 방언의 은혜가 있었는데 오순절 방언의 은혜는 어떤 것이 방언의  은혜인고 하니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성령의 권능이 와가지고 그 말씀을 전하는  데에 역사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도 사람만으로 전함이 아니고 인간을 무한히  초월한 초인간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는 그 역사가 있는 것은 전하는 자에게  방언의 은혜가 역사한 것입니다.

 또 말씀을 듣고 깨닫는 데에도 그 사람만으로가 아니고 초인간의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오셔 가지고 역사하셔서 그 성신의 지극히 큰 능력으로 들어 알고  깨닫는 그런 역사를 가리켜서 방언의 은혜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요사이는 그 방언이라고 오순절 방언 이후에 한 지엽적인 그런 사소한 방언  역사가 있었는데 그런 것을 성경에도 말해 놨고 지금은 모두 다 그런 은혜를  사람들이 방언의 은혜라고 그렇게들 일반 상식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의 은혜의 제일 시발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이요,  또 제일 크게 강하게 권위 있게 역사한 그 방언의 은혜가 곧 오순절 방언의  은혜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 집회를 시작할 때에 각자들이 하나님 앞에 방언의 은혜를  달라고 기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집회를 두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늘 기도할 때에 자주  방언의 은혜에 대해서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성경 보고 알아서 증거하는 이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증거해서 그 증거가 인간적이 아니고 초인간의 성령적인 그 증거가 되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했고, 또 듣는 성도들에게도 저희들의 선천 후천의 모든 주관  은혜 그것만으로써 하나님 말씀을 들어 깨닫는 그것만이 아니고 그 위에 성령이  오셔 가지고 그들을 도와서 듣게도 하고 깨닫게도 하도록 해 달라는 그런 기도를  했었습니다.

 오순절에는 한 사람이 한 나라 말로 말할 때에 그 전하는 그 말씀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들을 때에 다 자기 나라 말로 말이 들려져서 다 알아 듣고 깨닫기도  하고 했습니다. 이것이 첫째 권위 있는 방언의 은혜입니다.

 제가 이 첫시간을 계시 3장 1절 이하에 있는 사데 교회에 대해서 증거해야  되겠다, 하는 것은 이 집회를 앞두고 약 일 년 동안 늘 종종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복을 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대해서 재촉하시는 것은 ‘너희가 그 사데 교회와 같다.

은혜받은 것을 다 귀중히 여겨서 간직하지 안하고 그 은혜를 ‘흘려 떠내려  보내는 그런 죄를 범하고 있다.’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늘 계속 주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을 합니다.

 또, 우리 총공회 진영에서는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을 이것을 하나님 앞에  저도 그 진노를 받고 그저 주님의 노를 푸는 일이 될까 해서 늘 자복을 하고서  약속을 했습니다.

 저 지난번에 이 자리서와 또 거창에서 집회 때에 하나님이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사람병을 고쳐 준 것은 심히 많았습니다.

 집회를 시작할라고 천막치러 오든지 모두 모였을 때는 순 귀신 덩어리들이  왔는데, 뭐 봐야 참 정상인 사람의 그 인격 형상을 가진 사랑이 없다고 할 만치  그렇게 아주 속화되고 타락되고 부패해진 사람들이 그 집회를 하는 가운데에서  자신이 자신을 봐도 자신이 많이 변화가 됐고, 또 다른 사람이 봐도 참 별로 이  흠을 잡을래도 잡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거의가 다 변화된 것을 우리가  봅니다.

 이래서, 사람병 고친 것은 어떤 게 사람병 고친 거이냐 하면 그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서 병든 것, 또 의에 대해서 병든 것, 진리에 대해서 병든 것 이것이  곧 도덕병이라 할 수 있고, 믿음병이라, 사상병이라, 지식병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그런 병든 것은 하나 예를 들면은 믿는 사람이 범사를 비판하고  평가하고 계획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지식으로 삼지 않고 이 세상  배암에게서 나온 인간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그 지식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경영하는 그것이 큰 병입니다. 그거는 참 뭐 무슨 지금  병이라고 형언 못 할 만치 아주 중한 병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사람이 어떤 기회는 그게 인간병인 줄 알고 그 병을 고쳐서  치료 받을라고 애를 쓰지마는 어떤 때는 그 병이 너무 얕으니까 그 병이 짙기를,  그 병에 붙들려서 완전히 생명이 끊어지는, 하나님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는  여기에까지를 소원하고 분발하고 날뛰기까지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병을 고친 것과 또 이 고깃덩어리의 병 고친 것을 이것은 사람들이  다 알기에 뭐 자기네들이 혹 써 낼 때에 이거 나았다 소리 안하면 안 낫을까 해  가지고 써 내는 그런 꾀쟁이들도 더러 있기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보면 나은 것을 나았다 했다가 뒤에 안 나으면 실없는 사람  되어지니까 좀 두고 봐 가지고 틀림없이, 확실히 나았으면 기록해 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랜 후에 기록해 낸 사람들이 대개 많았었습니다. 그것도 한  집회에 오륙백 명씩이 고깃덩어리의 병 나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 앞에 그것이 송구스럽고 죄송스러워서 ‘이래도 너희들이 이  은혜를 다, 배반하고 던져 버렸고 이 은혜를 생각하고 간직해서 받은 그 은혜를  계속 되살려 가지고 그 은혜가 은혜로 자라가도록 그렇게 한 자가 있느냐?  너희들이 완전히 받아서 버려 버리고 받아 버려 버리고 이 사데교회가 아니냐?’  하는 그런 것을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제가 첫 약속하기를 ‘주님이여 그러면  그것을 기록해 내라 해 가지고. 그것을 책에다가 기록을 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책을 나눠 줘 가지고 기억하고 볼 수 있도록 또  하겠습니다.’ 또 그 뒤에는 하나님이 독촉해서 ‘그러면 녹음을 해 가지고  이렇게 듣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래 나와서 나 혼자 쫄려 가지고서 나온 것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사람병은  냅두고 고깃덩어리 병 나은 그것만을 기록한 것이 일권 이권삼권 사권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면 나온 거기에 수는 사람 수로 말하면은 뭐 아마 한 이천여  백이 될 겁니다. 오백이면 얼마 되노? 오백이면은 사오 이십 이천이가? 그렇지?  이렇게 됐는데 이번에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이 주시는 이 은혜를  멸시하는 이런 죄를 회개하고 그 은혜를 신중히 감당해서 그 은혜로 불을  일으키는 그런 일을 하기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다시 증거  하기로, 오늘은 여기 와 가지고 제가 생각 했지마는 하나님 앞에 내가 이 말씀을  가서 증거하겠습니다 하는 약속은 벌써 뭐 수십 번 약속을 과거에는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 말씀에 대한 이치를 잘 바로 깨닫고 이 성경이 과연  그렇게 말씀하고 있느냐 안 있느냐 하는 그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그 이치,  이치를 바로 깨닫고 거기에서 믿음도 나오고 힘도 나오고 또 능력도 나와  가지고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  그 분위기에서, 뭐 소리가 웅장하니까 그 소리에서, 또 무슨 정서 감정의  정서에서 하는 그런 것은 다 속이는 것이요 그거는 마치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지 자기 속에 실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꼭 요 은혜받는 것은 하나님의 이 도의 이치를 자기가 성경대로 바로 깨닫고  ‘요 이치가 맞다’ 신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치로 깨닫는 사람, 또 이치로  하나님의 그 주시는 선물인 은혜와 모든 믿음의 능력 이것을 이치로 깨달아 굳게  잡고 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다 실력 있는 신앙을 가지고 환경과 주위에 피동되지  않고 세상을 이기는 생명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 벌써 자기가 성경을 하나 둘 읽을 때에 거기에 대한  정확한 도리를 깨닫고, 이치를 깨닫고, 도리라 말은 길 도(道)자 이치  이(理)자이기 때문에 도리라 말은 자기가 어떻게 지금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되느냐,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느냐 하는 그 이치를 가리켜서  도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 도리를 성경을 읽든지 혹은 누구의 설교를 듣든지 서로 믿는  사람들끼리나 안 믿는 사람과에나 이야기를 하든지 할 때에 자기가 이미 받은 바  하나님의 도리가 있으니까 이 도리를 잣대로 삼아 가지고 이 도리를,  마치 장사꾼이 저울을 가지고 다는 것처럼, 목수가 다림줄을 가지고서 이렇게  곧고 굽은 것을 다루는 것처럼 이 도리를 가지고 내가 말을 할 때도 이 도리에  맞도록, 또 들을 때도 이 도리로 가지고서 심사를 하고 또 모든 경영을, 할 때도  이 도리로 가지고서 경영을 해서,  마치 장사꾼이 저울로 달아 주고 달아 받고, 또 목수가 잣대를 가지고서 길고  짧다, 굽었다 곧다 이렇게 하는 것처럼 이렇게 도리를 가지고서 모든 사람과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 또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이 도리를 가지고서  측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벌써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치 생명이 없는 것은 비유컨대 바다에, 지금은 뭐 배로 싣고 다니지만 옛날은  그 나무 떼를, 떼 나무라고 그 떼를 모으면 나무를 아주 뭐 수백 톤되는, 수천  톤되는 것도 주 엮어서 떼를 모아 가지고서 그 강에다가 띄워 가지고서 그래 그  운반을 하는 그런 일 했는데 그렇게 큰 무더기지마는 생명이 없으니까 물이  내려가는 데에 물 따라서 흘러내려 갈 줄만 알았지 올라오지는 못합니다. 또  물이 머물러 있는 데에는 가 머물러 있습니다. 또 풀이 굽이를 트는 데에는 또  가서 굽이를 틉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는 물에 따라서 피동되나 생명 있는 조그만한 뭐  생명체라도 고기라든지 무슨 풀벌레들이라든지 그런 것도 생명 있는 것은 절대로  제 욕망대로 가지 그 환경에 따라서 이렇게 피동돼 가는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요렇게 믿는 사람이 도리를 가지고서 심사해서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환경에 주위에 자기를 수십 년 동안 기른 목사의 말이라도 틀린  말은 틀렸다 하고서 따라 붙지 안하고, 또 자기의 원수의 말이라도 옳은 것은  옳다 인정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기의 편에 선 사람의 행동도 옳고 바른 것을 정평정가하게  되고 또 아주 원수에게도 정평 정가를 하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생명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바로 그게 생명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게 생명인가? 대주재이신 이 조물주, 유일하신 하나님,  대주재, 하나님, 이분과 자기와 연결이 돼 가지고 그분으로 인해서 동하고  정하는 그것이 생명의 움직임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장기와의 연결되어 떨어지지 않는 연결된 그것이 강하든지  약하든지 그게 생명이요, 또 그로 인해서 피동돼서 움직이는 것은 다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들은 생명이 뭐이 생명이냐 하면은 하나님을 말씀과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이 세 가지로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이세 가지 외에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선천. 후천의 특수한 재능을 가졌든지 또 어떠한 위치나 많은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세나 뭐 어떤 많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죽은 것이요 생명이 아닙니다.

 이래서 주님이 ‘썩은 것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토록 있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 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과 연결을 가리켜 말함인데 하나님 연결된 것이  생명이요 하나님과 끊어지면 사망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행동을 했으면 행동한  그것은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이다. 하나님과 끊어진 것은 사망이다.’ 하는  이 말도 제가 지금으로부터 한 삼십 오록 년 전, 뭐 교계에 다니지는 안했고  산꼴짝에서 그냥 예수 믿었습니다마는 더러 강사, 부흥강사들을 만났고  신학자들도 만났고 이랬는데 그때 그 많은 사람들을 접했으나 그 사랑들이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이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사망이다’, 하는 그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못 하다가 고려신학교 오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거기에 대한 것을 무시하고  있는데 오종덕 목사님이라는 그 목사님이 계셨는데 설교할 때에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래 제가 그분을 존경하고 좋아했습니다. 왜? 그 면이 저와  깨달음이 같습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이요 그분과 끊어지면 사망이라 하는  그것을 듣고서 저는 그때 또 그게 이단이라고 또 정죄받을까 했는데 동지가  있어서 좋아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뭐 인제 다 들어서 일반 상식화 돼 가지고 있지마는 그것도  그렇게 아마 여기 외국에 무슨 일본이나 미국이나 그런 나라가 가지고 이 생명을  성경에 말했는데 생명이 뭐이 생명이냐 하는 그 생명을 말할 때에 하나님과  연결된 그것이 생명이다 하는 그것을 생명의 정의를 말하는 그런 소리를 듣기가  좀 드물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 신앙이 그저 은혜받는 거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마는 그 중에  제일 좋은 것은 뭐이냐? 신구약 성경에 문서로 기록되어 있는 이 문서 계시  안에는 영감이 있습니다.

 이래서, 베드로후서에 보면 변화산에서 아버지의 음성도 들었고, 또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예수님과 셋이 예루살렘의 어려움 당할 것을 의논하는 것도  들었고, 또, 그들이 거기에서 어찌 좋아 놨든지 장막 셋을 지어 가지고 하나는  주님, 하나는 모세, 하나는 엘리야 이렇게 계시도록 우리가 모시고 살면 뭐 그  이 세 분 모시고 살면 그외에 더 원할 것이 없고 만족이 돼서 거기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그때에 그 산 밑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변화한 것을 보고 친히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한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더 가치 있는, 더 고귀한, 더 확실한 예언이 우리에게  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 그것은 곧 문서 계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에 제일 근거로 삼는 것은 문서 계시를 우리의  신앙에 근거로 삼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문서 계시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영감 계시가 와야 되지 문서 계시를 떠나서 자기가 무슨 환상 중에나  무슨 비몽사몽 중에나 또 어떤 음성이나 어떤 일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자기의 신앙,  (얘! 왜 그리 돌아다녀? 나갈라면 나가고. 아이들 데리게 되면 비니루 봉지  하나씩 가지고 다녀요. 비니루 봉지 그래 가지고 거석하고 조그만한 깡통 가지고  또 누여 가지고 부고 그래 인제 먼데까지 나갈라 하면 한참 나가면 그거  되겠어요? 그거 또 그래 돌아다니면 그만 그 때문에 봐. 이 마귀가 그만 이래  가지고 지금 안 되는 거라. 꼭 하나님의 도리를 들어서 하나님과 접선이 될라  하면은 고만 귀신이 나와. 접선될라 하면 저게, 어떤 사람은 저 공연히 버뜩 서  가지고서 일어나 가지고서 뒤적뒤적 그라면 자연히 그 사람 보게 되지 그만 이래  가지고 분위기가 이래 되지고,  무엇보다도 문서 계시로 되어 있는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우리 신앙도리의  근거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해 가지고 거기에서 더 진보된 영감이라야, 또  거기에서 움직여져 가지고서 무슨 흑, 그 환상이나 음성이라 하는 것은 아주  문서 도리 그 밖에 껍데기 중에 껍데기입니다. 꿈이라든지 그런 것은. 사람들이  심령이 어두워서 신령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이 육체적인 그런 걸  가지고서 깨닫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무슨 기적이 있어 가지고서 병이 나앗다, 또 무슨  환상을 봤다, 음성을 들었다 그걸 크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까지 예수 믿는  도리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어떤 전도 부인이 늘 서부교회 왔었는데 그분이 세상을 떴는가 지금은 안  옵니다. 그분은 오면 늘 와서 식사도 하고 이라는데 자기는 은혜받은 게 뭐이냐  하면은 주님이 언제 오시더니마는 ‘사랑하는 내 딸아’ 하시면서 이 팔목을  이래 잡아 주시면서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래서 항상 이걸  감고 다니면서 ‘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 손목을 잡아 주셨다’ 그게  자기로서는 평생 기쁘고 자랑하고 항상 자기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 주님이 내  손목을 잡아 주셨는데’ 이거가지고 위로를 받고 하는데 그것도 이제 아주 어린  신앙 때는 그런 것도 하지마는 그런 것은 마귀란 놈이 뭐 얼마든지 삼킬라면  많이 얼마든지 삼킬 수 있습니다.

 마귀가 환상으로 나타나 가지고서 믿는 사람에게 말도 할 수 있고 얼마든지  그런 환상 같은 것 그런 걸 얼마든지 하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런 거는  아주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방편으로써 자기 신앙 방편을 삼는 그런 것은  아주 금물이니까 그런 것 안 해야 됩니다.

 성경 계시보다 꿈 본 것. 내가 음성을 들었는데, 또 이런 무슨 환상을 봤는데,  또 자기는 뭘 하나 생각이 났었는데 그 생각이 과연 그 생각대로 들어맞던데,  그거 다 잡탱이 신앙입니다.

 제일 든든한 것이 이 문서 계시인데 문서 계시를 여러분들이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거기에 대한 그 이치를, 도리를, 그러면 거기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며 어떻게 걸어가야 되느냐? 어떻게 행동해야 되느냐? 그것을 가리켜서  도리라, 도리라 말은 길 도(道)자 이치 이(理)자인데, 길이라 말은 자기가  걸어갈 길이라 말이요, 그 걸어갈 길. 이치, 자기가 걸어가는 이치. 그 말을  합해서 도리라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성경을 읽고 거기에서 바른 도리를 이치적으로 깨달아 가지고 예수믿는  사람들이 제일 건전한 사람이요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처음부터 믿을 때에 깨닫기를 성경을 이해할라고 애를  씁니다. 이치로 해석해라고서 그렇게 애를 씁니다. 그러면 성경한 군데 봐  모르면은 여러 군데 봐서 이 성경을 저 성경이 가르치고저 성경을 이 성경이  가르쳐서 거기에서 이치를 깨닫는 것, 이치를 깨닫는 것으로써 그렇게 성경  깨닫는 일을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번에도 들을 때에 그저  마음에 무슨 감정이 동하도록, 기분이 좋도록, 또 뭣이, 뭐 마음이 콱콱 찔리고  뜨끔뜨끔하도록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지마는 그런데다가 정신을 쓰지 말고  말씀을 들을 때에 꼭 그 이치를 깨닫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 가지고, 그 이치가 곧 지식인데, 그 이치가  지혜인데, 그 이치를 가지고 자기도 혼자 생활을 그 이치 가지고 생활하고, 또  다른 사람의 생활도 그 이치 가지고서 그 사람의 생활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또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관계를 가지는 데도 그 이치로 가지고 재어봐서 그 이치에  맞나 안 맞나 요렇게,  그 이치 그것을 가리켜서, 도리라 하는 말은 자기가 길 도(道)자, 자기가  걸어갈 이치, 살아갈 이치 그걸 말해서 도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이치를  가지고서 자기는 계획하고 소원하고 살아가고 모든 것을 상대해서 비판하고  평가해 나가기로 요렇게 작정을 한 사람,  그러기 때문에, 성경 이치를 모르면 내가 모르는 것만치 사람을 대하든지  물건을 대하든지 일을 대하든지 내 당면된 것을 그만치 무식한 사람이 되니까  성경 이치를 모르는 것만치 나는 내가 당면한 모든 것에 대해서 모르는 자가  되고 또 성경 이치를 모르고 이 벌로 이래 하면은 그것은 그 일을 벌로 하는  거기 때문에 거기에는 실패가 되지 벌로 해가지고서 성공되는 일이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일은 세상 일은 벌로 해 가지고 성공되는 일이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사망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마귀란 놈이 그렇게 벌로 해도  맞아 떨어지도록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일은 하나님이 마귀를 지금 승리해 가지고서 마귀를 당신이  부리는 신으로서 이와같이 두셨기 때문에 악령은 믿는 사람이 믿는 일에  대해서는 방해할 수 있는 대로는 방해합니다. 어짜든지 방해할 수 있는 대로는  방해하기 때문에 이치에 틀린 그것이 멸망으로만 걸어가지 이치에 틀린  그것으로써 혹 신앙 이치에 들어맞게 되는 그런 것은 천부당 만부당입니다. 그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신자들이 벌로 해서 옳은 결과를, 그들 말하는 대로 옳은 결과를  내는 그거 모양으로 믿는 신앙생활도 혹 벌로 하다가도 옳은 결과를 혹 만날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이거는 마귀를 하나님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고 하니 믿는 사람의 신앙을  어짜든지 삐뚤어지도록 하고 또 가지 못하도록 해라. 이 추를 달아 놨는데  이것이 실상은 신앙생활을 잘 조절해 가지고서 실력 있게 튼튼하게 연습하고  연단하고 연성한 정금 같은 그런 온전하고 구비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지식은 둘 뿐인데, 하나님의 지식과 배암의 지식  둘 뿐인데 하나님의 지식은 신구약 성경 이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이요 하나님의  지식 그 외에는 전부 배암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고 사람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거는 왜 배암의 지식이라 하느냐 하면 타락한 그 후에는 택한 자라도 영감과  진리로 살 때만 그것이 영감과 진리 생활이지 그 사람이 세상 지식대로 영감과  진리를 떠나서 사는 생활은 그게 전부 다 마귀생활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라고 마귀 생활 안 하느냐 하면은 믿는 사람이 마귀 생활을  많이 합니다. 진리와 영감대로 살 그때는 새사람의 생활이고 그 외에 거는, 전부  마귀 생활입니다.

 이래서, 에베소, 2장에 보면 ‘안 믿는 사람들은 공중에 권세 잡은 그 악령이  주관해 가지고 있다’ 이랬습니다. ‘불신자들은 공중에 권세 잡은 악령이 그  마음을 주판하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불신자 속에서는 어떤 과학이나 철학이나  나오는 그 전부는 다 그것이 다 악령의 작용으로 나오는 것이지 성령의 작용으로  나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 외의 것은 전부이 다 인간의 지식이요 인간의  지식을 그것을 듣기 좋게 말하면 인간의 지식이라 그렇게 말하고 그걸 꼭 바로  정의를 딱 가져서 똑똑히 말할라 하면은 그 속에는 공중에 권세 잡은 악령,  인간을 타락시킨 그 악령이 인간을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지식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꼭 성경대로 바른 자식입니다.

 이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도 보면 ‘세상에는 옳은 지식이 없다. 다 그게 다  인간들이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부인하기 때문에 그 전부 하나님이  버려서 인간은 다 어두움에 속해 있고 옳은 지식은 모른다.’ 그렇게 말씀해  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이냐? 이것을 어떻게 하면 바로  하느냐 삐뚤어지게 하느냐, 어헤게 하면 성공이냐 실패냐 그것을 선택하기 전에,  그것을 연구하기 전에 제일 처음 우리는 일이든지 물건이든지 자기의 미래든지  자기의 과거든지 어떤 거든지 그것을 비판하고 평가해서 계획을 하든지 그뭐 또  처리를 하든지 할라고 할 때에는 제일 일호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람들이라는 것은 그만 일 어짜면 되겠나 안 되겠나, 어짜면 성공이 되나 안  되나 이렇게만 생각을 가지고, 또 어짜면, 어떤 사람은 그 일을 ‘여기에 자,  어떻게 하면 좀 돈벌이가 되겠노? 어떻게 하면 내가 권세가 올라 가겠노? 어떻게  하면 내가 지금 조금 유익을 취하겠느냐? 이거는 천부당 만부당의 그 탈선된  행위입니다.

 사람은 벌써 그 사람이 금전을 두고서 그 금전에 이해를 따져 가지고서 모든  것을 판결할라 하니까 금전 위주니 금전이 무슨 권리 있어서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소? 금전 그게 완전입니까? 완전이 아닙니다. 완전 같으면 완전을  표준해서 하면 거기에서 뭐 좀 나을 수 있지마는 그게’ 아니라.

 이러기 때문에, 지혜 있는 사람은 세상에는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이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을 경영하고 비판하고 평가할 때에 제일 일호로 자기가  힘쓸 것은 뭐이냐?  내가 사람의 지식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서 경영 할 것이냐  하나님의 지식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 경영 할 것이냐, 내가  지금 뭘로 할 것이냐 이것부터 찾는 사람이라야 거기에서 영원한 성공이  조그만치라도 거기 생겨질 수가 있지 이것이 아닌 그 생활은 전부가 멸망입니다.

 이래서, 그걸 가리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곧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간 지식으로 해 가지고 하는 거기에는 천이고 만이고 전부가  하나도 섞임 없이 다 풀 노릇입니다. 풀. 풀과 풀의 꽃. 다시말하면 육체  놀음입니다. 육체 놀음. 이러니까 거기에는 산 것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전부 사망뿐이지.

 이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이 제일호로 생각할 것은 ‘세상에 지식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산지식이니 곧 살리는 지식 곧 하나님의 지식이요. 하나는 죽은  지식이니 곧 인간의 지식이요 죽이는 지식이라’  그러면, 인간의 지식이 살려 놓은 것이 먼지만치라도 있습니까? 자, 인간  지식이 살려 놓은 것이 먼지만치라도 있습니까? 한 번 좀 사람들이 좀 생각해  보면 압니다. 인간 지식이 살려 놓은 것이 아이들 말로 쌀내끼만치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거는 영생하는 것은 하나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전부 다  사망의 것이지.

 이러니까, 인간 지식으로써는 전부가 다 죽은 지식이 죽이는 역사를 하고 있는  것이지 사는 것이나 살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것을 확정을짓고 가지는 사람이  잘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보통 이 자연인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자연인을 초월한 사람이라. 멸망의 사람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이게 뭐 쉬운 것 같지마는 아니오. 이것이 천명 만명 있다고 거기에 하나 섞일  수도 있고 하나도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이 있다. 사람의 지식은  죽은 지식으로서 죽이는 일란 한다, 하나님의 지식은 산 지식이요 살리는 일을  한다.

 이것만 가지고, 그러면 자기가 모든 것을 현실에서 하나님의 지식을 내가 써  가지고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를 하고 경영을 하느냐 내가 사람의 지식을  가지고서 비판하고 평가하고 경영하느냐 여기에서 생사는 완전히 결정됩니다. 또  흥망은 결정됩니다.

 흥이라 하는 것을 눈에 보이다가 없어지는 그런 흥을 성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착각해서 그런 것이지 영원한 성공, 영원히 없어지지 안할 성공, 천년  만년 억만년 가도 실패없는 성공, 완전 성공, 영원 성공, 그 영원 성공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비판해 가지고 그 지식대로의 맞은 길을 걸은 거기에서부터  산 것이 생겨지는 것이지 다른 데는 산 것이 생겨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믿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산 사람은 언제가 살았느냐?  하나님의 지식만이 산 지식이요 그 지식으로 산 자가 산 생활하는 자요  거기에서만 생명이 나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지식으로만 살라고 애를 쓰고  인간 지식에게 유혹받지 안할라고 애쓰는 그 사람이 산 사람이요 그때가  살았습니다. 그게 산 사람이오. 그것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거 뭐 그만 그저 하나님의 지식 사람의 지식 그걸 구별하지 안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식은 자기와 거리가 멀고 인간 지식은 자기가 대대로 내려왔고 몸에  꽉 배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지식은 자기에게 뭐 본능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지식을 채택하기는 자연히 되어지고 본능적으로 돼지고  하나님의 지식을 잡을라하는 데는 심히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제일 먼저 힘쓸 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지식을  붙들고 하사님의 지식으로 나는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경영하고 해야  되겠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식 이게 가치 있다 하는 것은 영원히 가치 있습니다.

천하 사람들이 가치 있다 하는 그것 하나님의 지식이 가치 없다 하는 그거는  가치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저를 속이는 것뿐이지. 공연히 저를 속여서  좋아하고 우쭐하고 나중에 멸망받고 심판이나 마련하지 하나도 유익이 없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식을 구별해 가지고서, 깨어 있는 게 뭐이 깨어 있느냐?  이것도 깨어 있는 것 중에 하나라‘그말이오. ‘나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경영하겠다’ 그러면 깨어 있는 것은 그거는 자기가 그  지식을 가지고서 사는 것이고 자는 것은 중생됐기 때문에 산 생활을 할 수  있기는 있지마는 벌써 하나님의 지식을 쓰지 안하고 불신자의 지식과 꼭 같이  있으면 생명은 있지마는 자는 자라 그 말이오. 그걸 자는 자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두 가지 지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자기가 그 모든 지식  가운데에 신구약 성경 하나님 말씀이 산 지식이니 이 지식을 내가 읽든지 듣든.

지 설교를 사람에게 배우든지 할 때에 요 지식에 이치를 깨달아 가지고서 요  이치로 가지고서 무엇을 할라고 하는 사람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천인 만인이 다 꺼꾸러져서 멸망으로 당해져도, 시대가 다, 완전히그 시대가 다  전명로 다 타락해 나간다 할지라도 요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의  이치로 살라고 하는 그 사람은 천인 만인이 실패하고 다 떨어져도 그 사람은  멸망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노아 시대에도 그때 사람이 아마 숫자는 안 기록했지마는 몇 십억이  되지 안했느냐, 몇 십 억은 되지 안했느냐? 뭐 이거는 번식이 잘 되고 했으니까  그리 될 수 있다 말이오.

 그런데, 그렇츰 많은 사람 가운데에 자기 행위 구원으로서는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는 그 생활은 다 죽은 생활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외에는 다 죽은  생활했다 말이오. 노아의 여덟 식구만, 산 생활했지,  노아 여덟 식추는 심판을 이기고 산 생활 했지마는 그 외에 사람들은 뭐 준비한  것이 자기가 각각으로 별 걸 많이 준비 했지마는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 다  이하에 정죄받아서 멸망받았지 그 하나님의 심판을 꿰뚫고 사망을 벗어난 그런  산 생활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사람들은 ‘아이고 또 그말 초 하고 또 한다’  또 하는 게 아니라. 또 하는 게 아니라. 네가 모르기 때문에 이걸 알면 네가  사는데 모르니까 죽는다.

 이거 참 몇 닢푼치 안 됩니다. 뭐 예수 믿는 사람이 몇백 명 된다고 해도  이거는 팔십프로 아니라 백프로 틀려도 웅변만 토하면 따라 갑니다. 정서만  토하면 따라갑니다. 애정만 붙으면 따라 갑니다. 돈만 주면 따라갑니다.

 마귀란 놈이 꾀우는 방법은 백도 천도 넘은데 하나만 꾀워도 톡톡 떨어져서 다  절단나니 그게 언제 그런 장애망을 다, 장애가 되는 그런 모든 그물을 다  벗어나고서 자유로운 생명길을 걸어가겠습니까?  이러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아무리 썬위 있는 목사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형제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도, 또 자기가  자기에게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그 이치를 가지고 따질 줄 알아야 됩니다.

이거 따질 줄 알아야 되는데 따질줄 모르면,  나는 그때 그 하도 따지는 일이 귀해서 여기 OOO조사님이 언제 설교를 시키니까  라오디게아 교회 설교를 그때 해요. 설교를 하면서 말하기를 그 거룩이라는  그것은 설교를 하면서 뭣이든지 구별하고 따져야 된다. 따져야 된다. 뭣이든지  따져서 이래 맞나 안 맞나 따져 가지고 해야 된다. 따져 봐야 된다 그말 하는데  나는 그만 거기에 반해버렸어.

 반해서, 저게 어리기는 어리지마는 따져야 된다는데-그거 거짓말했는지  모르겠어. 나는 지금 요새 들으면 그거 거짓말 설교 안 했나그래 내가 들어져.

왜? 따지기만 하면, 하나님 말씀 가지고 따지기만하면 벌써 악 가속도로  올라갑니다. 가속도로 올라가요. 따지기만 하면 전체가 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권능에서 권능으로, 하나님의 축복에서 축복으로 올라가는데 피조물들이 무슨  방해를 하며 장해할 것이요? 못 합니다. 이런데 아마 따지는 일을 지금 뭐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만 그것 보고 다른 사람은 다 안 시키는데 그만 전도사로 시켜  가지고서 전도사로 해서 삼 년 만 되면은 내맘에는 따지는 생활만하면 삼 년이면  저게 이제 그만 어느 정도의 그런 목회도 될 것이고 목사도 장립할 수 있다. 삼  년이면 된다 하고 기다렸는데 그 뒤에 그 설교만 그래 했지 따지는 생활을 안 한  모양이오. 안 올라가요. 안 커 올라가. 분명히 따지는 일 안 했습니다. 따지는  일 하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저, 따지는 것은 환경과 주위가 어찌 되든지 거기에 휩쓸리지 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지는 데 거기에 피동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따져서 그 이치를 생각하고 생각해서 그 이치에만 자기가 끌려가지 인정에나 뭐  정실에나 돈에나 친구에나 감정에나 혈육에나 지방에나 그런 데 끌려가지 안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서 따져서, 그 지식으로 따져서 그 이치에 들어맞는 그  길을 걸어갈라고 하는 그것이 영생인데 그 길을 걸어가는 자는 전능의 걸음인데  누가 방해하겠소? 아무도 방해할 자 없습니다.

 그러기에 지금도 보면 뭐, 지금 총공회에 속한 이 교회가 한 백 여 교회 된다  하지마는 이거 뭐 봐야 따지는 그게 없기 때문에 마귀가 와 가지고 후루룩 둘러  마시면은 한꺼번에 다 둘러마셔지지 않느냐?   봐야. 혹은 거기에 둘러마셔 가지고서 죽다가도 요나 모양으로, 요나 모양으로,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도 어쩌 살아 나왔소? 따져서 살아 나왔습니다. 거기에서  이치에,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이치, 하나님의 말씀의 그 이치를 가지고  ‘여기에서도 믿으면 되지 그 믿음은 능치 못함이 없는데 여기에서도 믿으면  된다. 암만 내 위에 물이 여러 수십 길 돼있지마는 여기에서도 믿으면 하나님은  날 구원하시고 나에게 부르짖는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여기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믿고 당신에게 구하면 된다.’ 구하니까 고래가 그만 견디지를  못해서 확 토해 내트렸다 말이오.

 그게 뭐이냐? 어떤 가운데서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이 진리를 가지고서 이치를  자꾸 따지고 따져 가지고서 하나님의 진리의 그 이치에 딱 들어맞게 하는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에는 삼키는 자가 없습니다. 생명은 삼키지 못합니다.

 생명은 큰 고기가 있으면 큰 고기가 생명의 양식이 되고 또 뭐 여러 수천 평의  토지가 있다 해도 생명이 있으면 토지는 결국 그 생명에게 삼켜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이 피조물은 다 생명에게 삼켜지기 위해서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앞으로는 지금 무슨 일이 있을는지 모르니까 그저자기 교회  교역자라고 가는 대로 따라갈 게 아니오. 그게 없으면 여러분들 죽습니다.

 꼭 하나님 말씀을 " 배울 때에 이치를 배와 가지고 그 이치로 따져 나가  보십시오. 따져서 요 이치로 한 번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해 보자. 하나님  말씀의 이치를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심사해 가지고서 그 이치에 딱 들어맞게  할라고 하는 그것 하나 가지고 있으면은 그 사람은 아무데서라도 썩히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합니다.

 이게 없으면 뭐 그까짓 거 뭐 다 죽은 거라. 다 죽은 거. 말 잘한다고  소용없어. 또 설교 잘하는 것도 소용없어. 설교는 청산유수에 하고도 이치를  자기가 찾아 가지고서 그 참된 이치와 자기와 동행하지 안하면 그거는 생명이  없다는 요것을 확정짓지 못하고 그 이치에만, 참된 이치에만 생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 사람이야 다 죽은 자인데 그게 생명이 사는 생명의 호흡이요  그게 생명으로 사는 생명력인데 그게 없는 자가 뭐 하겠습니까?  그래서, 여기 사데 교회에 대한 것을 여러분들이 그전에도 많이 들었지마는 자꾸  인제 또 가르치고 난 다음에 또 한 껍데기 가르치고 또 그 다음에 속 껍데기 또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자꾸 가르쳐서, 그러면 이렇게 정도에 따라서  자꾸 그라는데 이 사데 교회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잘 읽어 보고,  오늘 저녁에는 이 말씀으로서 그만 지금 그치겠습니다. 사데 교회를 많이 읽어  보십시오, 많이 읽어 보면. 읽어 보고 여러분들이 여기서 배울 때에 자기 혼자  읽어 보고, 이런가 저런가 읽어 보고 그라고 난 다음에 나는 요렇다, 나는 요게  대해 깨닫는 게 이렇다. 모든 성경을 가지고서 보니까 요게 요런 뜻이다 조런  뜻이다 이거 깨닫는데,  깨닫는 고것이 ‘나도 깨달았는데 보니까 그 백 목사님이 가르치는데 그분의  깨달음과 내 깨달음이 같다. 나는 이렇게 깨달았는데, 그분의 깨달음은 이렇다.

정반대다. 그러면 어느 게 옳으냐?’ 또 따져 보고 평가해 봐요.

 작년에 여기에서 가르칠 때에 가라지 비유를 가르칠 때에 그 가라지가 그거는  불택자로서 지옥 간 사람을 가리켜 말한다. 또 그것도 가라지도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것은 그거는 택한 데서 결정되어지고 가라지는 지금 행위를 가지고 말하기  때문에 그 행위가 다 불타도 택한 자면 하늘나라 갈 수 있다. 홍포입은 부자가  그가 행위에로는 다 지옥갔지마는 그가 택했으면 그 영은 하늘나라 갔다 하는  그런 문제가 있어가지고 여기에서 질문하다가 그 질문이 그것이, 질문 그것이  암이 돼가지고서 폭발이 된 것인데 잘 나왔습니다. 고것도 여러분들이  해결지워야 될 것입니다.

 택함받고 중생된 기독자의 그 생활이 하나도 믿음으로 살지 못했으면 그 심신의  기능은 다 그것은 범죄한 기능인데 범죄한 기능은 그거는 지옥간다 하는 것은  그것까지는 다 이해가 거의 되는 모양이고 범죄한 기능이 지옥 가 가지고서  지옥에서 그 고통의 호소하고 있다 하는 그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하는데,  이해가 안 된다 하는데 그것도 좀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저는 확실히 믿어집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무엇이든지, 이 교리와 신조는 우리의 생활을 낳고 우리  생활은 우리의 구원을 낳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래 깨달아도 되고 저래  깨달아도 된다 아무래 깨달아도 된다. 그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 아니야.

 그 깨달음이 옳은 깨달음이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하나에 대해서 옳은  깨달음이, 그 한 가지에 대해서 옳은 깨달음이 하나가 있겠습니까? 둘이  있겠습니까 열 있겠습니까? 어떤 게 있겠소? 옳은 깨달음은 하나겠소 둘이겠소?  하나야, 하나.

 깨달음이야 백도 있지, 백점이면 요거는 일점짜리, 요거는 이점짜리, 요거는  삼점짜리, 요거는 십점짜리, 요거 오십점짜리, 고만치는 맞고 나머지기는 틀렸다  말이지.

 그러니까, 바로 맞은, 바롯 하나도 틀리지 안하고 백분지 일도 흘리지 안하고  백에 백이 다 들어맞은 것은 거기에는 하나이지 둘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거룩이라 진실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별해 가지고 온전에 도달한  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 하니 거룩이라 하는 것은 모든 온전에 나아가는  과정까지를 다 연결시켜 가지고서 거룩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진실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완성된 그 온전히 완성되어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진실이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무엇이든지 가만히 가가지고 따지다가 중간에 가다 마는 그것이 진실이  없는 사람이요 거룩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무엇이든지 좀 파져나가 보면 이거는 틀리고 옳은 게 확실히 나타나는데  틀린 줄 알고 할라 하면 양심에 가책 더 될 것이고 어라 그만 말자, 하며  시지부지 말아 버리는 그게 가증스러운 것이요, 그게 주님을 적으로 삼는  행동입니다.

 좀 따져 보면 옳게 그른 걸 환하게 알겠는데 틀린 줄 알고 할라 하니까 양심에  가책되고 그러니까 그만 중간에서 그만 말아야 되겠다 요래가지고 따져 나가지  안한 그것이 거룩을 대적하는 사람이요 거룩을 버린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는 버림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저녁에는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며칠 동안 공부하는 가운데에 꼭  하나님의 말씀에 이치를 깨달을라고 애를 써야 됩니다.

 그러면, 인간의 지식은 죽은 지식이라, 죽이는 지식이라, 사람의 지식이라,  거기에는 살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말이 맞아요 안 맞아요? 이치를 생각하면  맞아요 안 맞아요?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것이 거기에 하나도 있을까? 택한  자라도 그 지식대로 한 것으로써 영생되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혹  먼지만치라도 있을까? 먼지만이라도 있겠습니까? 없어. 말은 하면 쉽지마는  없어.

 그것도 이치로 생각해 가지고 ‘보자 보자, 그라면 그 사람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대로 하지 안하고 사람의 지식대로 한 그것은,’ 사람의 지식은 다 예수님의  대속을 부인하는 게 사람의 지식 아닙니까? 거기에 맞은 게 아니라. 이러니까’  거기에는 생명이 하나도 없어.

 이래서, 우리가 뭣이든지 요번 집회에서는 하나님의 도리, 하나님의 지식의  이치를 자기가 배우자. 하나님의 지식의 이치를 배우자. 하나님의 지식의 이치를  배우자. 자기가 살아갈 이치를 배우자. 또 이치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는 만날  때까지 혜매 가지고 ‘요게 이치다, 요게 참된 이치다,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에  딱 들어맞다,’ 할 때 비로소 행동하고 그 미달된 것은 언제든지 연구 과제로  두지 그것을 결정을 짓지 말아라.

 이래서, 하나님의 지식의 이치를 가지고 자기의 전생활을 돋파서따져가고  그렇게 해 나가는 요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는 그것을 오늘밤, , 첫날밤 은혜로  받습시다.

 이래 가지고서 이제, 뭐 아무리 부모 말이라도, 부모 말이라도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이치로 따집니다. 남편 말이라도, 아내 말이라도, 자녀 말이라도, 원수의  말이라도, 원수의 말이라도 하나님 말씀의 이치를 가지고 따집니다. 따져서,  그러면, 요렇게 해 나가는 사람이면 앞으로 이 환난을 다 벗어날 수가 있고  요거 없이 인정으로 끌려가고, 또 돈에 끌려가고, 동무에 끌려가고, ‘우리  목사니까, 우리 정든 목사니까.’ 목사에게 따라가는 너는 죽었다.

 죽고 또 죽고 뿌리까지 뽑힌 열매없는 가을 나무다. 네가 하나님의 도리가  있는데 하나님의 도리의 이치로 네가 모든 것을 생각해서 비판하고 평가해 보지  못하고 너는 인간이 구주가? 그 어리석은 일이 얼마나 많은 지!   오늘밤에 하룻밤에 이제 인간에게나 물질에게나 나라에나 사회에나 국가에나  어데서든지 내가 뭐 생명이야 끊어지든지 죽든지 살든지 그거는 다 냅두고. 옳은  이치를 따져서 그 이치에 성경 지식 가지고 이치를 따져서 그 이치에 맞춰 나는  살아 가겠다 요것만 작정을 해가지고서 요대로 나가는 사람이라면 뭐 이  집회에서 그만하면 은혜다 받았어. 그만하면 은혜 그만 다 받았어. 요것을  무시하면 죽습니다.

 다 같이 한 번 기도합시다.

 주님, 악령은 인류 시조를 자기중심의 영의 미혹으로 자기중심의 본성,  자기중심의 모든 버릇 이런 것으로써 날마다 택한 자라도 유혹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여서 사망케 할라고 하는 이 말세지 말을 당하여 우리를 여기에 모으시고  모든 것보다 문서 계시가 더 확실하고 이 문서계시의 이치로 우리 걸어갈 길을  확정짓는 이 도리를 바로 깨달을라고, 걸어가는 이치를 바로 깨달을라고, 듣고  보고 접하고 생각하고 명령받고 지도받고 가르침 받는 모든 데 다 주님의  말씀으로 이 도리로 깨달아서 한 자욱 한 자욱 걸어가기로 작정하라는 말씀을  오늘밤에 주셨사오니 이 말씀대로 여기에 모였는 무리들이 다 이 말씀을  영생으로 받아 이 말씀대로 작정하고 실행의 열매로 여생을 계속할 수 있는 이  축복을 저들에게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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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지식의 이치로 따지자/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1988. 5. 2. 월밤집회 김반석 201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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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하나님의 참사랑과 우리의 현실/ 마태복음 25장 46절/ 1982. 3. 20. 토새벽 김반석 2016.01.03
311 하나님의 총애받는 방편/ 요한복음 15장 1절-14절/ 1983. 5. 18. 수저녁 김반석 2016.01.03
310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14절/ 1985 1. 7. 교역자회 선지자 2016.01.05
309 신명기 28장 1절∼19절/ 신명기 28장 1절-19절/ 1986. 3. 19. 수저녁 선지자 2016.01.05
308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 1985. 1. 6.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05
307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6절/ 1986. 4. 24. 목새벽 선지자 2016.01.05
306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4절-19절 / 1985. 1. 4. 금저녁 선지자 2016.01.05
305 하나님의 축복/ 사도행전 8장 6절-8절/ 1986. 3. 20. 목새벽 선지자 2016.01.05
304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 1985. 1. 3. 목새벽 선지자 2016.01.05
303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2절/ 1984. 12. 31. 월새벽 선지자 2016.01.05
302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2절/ 1985. 1. 2. 수새벽 선지자 2016.01.05
301 하나님의 축복/ 로마서 8장 18절∼25절/ 1986. 5. 19. 월새벽 선지자 2016.01.05
300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19절/ 1984. 12. 30.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5
299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19절/ 1986. 6. 22.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5
298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19절/ 1986. 6. 22. 주일 오후 선지자 2016.01.05
297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 1986. 6. 24. 화새벽 선지자 2016.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