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큰 능력있는 신앙생활

 

1985. 2. 5. 화새벽

 

본문 :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 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여게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건너편에 앞서 가라 그렇게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제자들은 즉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갈려고 떠났는데 육지에서 수리를 떠나서, 그 수리라는  말은 수십리라 말입니다. 수십리를 떠나서 바람이 일어나므로 그들이 더 가지를  못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바다 물 위로 걸어서 제자들 고난당하는 것을 구원  하실려고 오셨습니다. 그 때 그들은 놀라서 유령이라 하면서 비명의 소리를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로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는 그 말씀을 하시는 그  소리를 듣고 제자들은 좀 마음으로 안심을 가지고, 또 그 베드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보면서 하는 말이 '만일 주시어든 나를 바다 위로 걸어서  주께로 오라고 하십시오' 예수님이 그렇게 오라 하시니까 물 위로 걸어서  주님에게로 왔습니다. 오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서 빠져 들어가니까 소리를  질러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까 주님이 손을 잡아 건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둘이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 있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때에 바람은 그쳤고 배는 잘 가게 됐습니다.

 여게서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찾아 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나가는 데에 필요한 그 말씀을  하셨으니까 그 말씀이 어떤 필요한 말씀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서 믿음의 좋은  방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그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갈라고 할 때에 처음에는  반람도 없었고 아주 순조롭게 그 배가 잘 가다가, 육지에서 몇십리를 잘 가  가지고 고만 그 다음에는 바람이 일어서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한  가지 우리가 또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 고렇게  처음에는 잘 갔는데 바람이 일어서 가지 못하고 고난을 당했던가 그것을 우리가  하나 첫째 생각해야 되겠고.

 또, 두번째는 그렇게 고난을 당하던, 고난 중에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물 위로 걸어서라도 주님에게 오라고 명하시라고, 물 위로 주님이  명령만 하면 물 위로라도 걸어갈 수 있는 그런 담력 있는 사람들로 변화된 것이  뭣 때문인가 그것도 하나 적게서 깨닫는 것이 좋겠고.

 또, 세째는 그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갈 때는 어떤 사람이며 물 위로 걸  어가다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그때는 어떠한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는가 하는 것을 여게서 생각하면 우리 구원에 크게 곧은 길을 찾게  됩니다. 처음의 것만 간단하게 증거를 하겠습니다.

 그 제자들이 바다 위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갈려고 출발했을 때에는 바람도  불지 안하고 물결도 잔잔하고 또 배도 참 순조륨게 잘 갔습니다.그 라다가  중간에 그만 바람도 일고 물결이 그쳐서 조금도 앞으로는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저 그때에 한 역사적인 하나로 그렇게 우리가 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온 세상에 둬도 둘 곳이 없을 만한, 주님이 말씀하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이렇게 복잡하고 양이 많은데 그 중에 육십 육권 도리를 우리에게  간추려서 말씀해 주시고 우리의. 많은 주님의 교훈을 받아야 될 터인 데 그렇게  간추려 놨으니까 주님이 주신 한 성구는 말하자면 그걸 다 기록 할라고 하면 몇  천 권이 되는 그 몇천 권을 한 성구에다가 그렇게 다 함축 시켜서 말씀한  것으로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또, 이 모든 일반적으로 되는 일도 다  주님께서 영원 전에 단번에 예정하신 그 예정이 영원까지의 다 예정되어  가기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만 아니고 영원 무궁토록의 그 모든 것이 다  예정된 그대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다 그 일을 이루시는 그 일인 것을 우리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일도 하나님께서 영원 전 예정하신 그 예정대로의 이 역사 적인  사실이 이루어진 것들이며, 또 이 이루어지는 이 일이 우리에게 간추린 구원  도리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니까 이 일은 일반적인 그  일과 예정적인 것은 같지마는서도 우리의 구원 도리로 주신 것은 아주  판이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일을 예정하셔 가지고 이 사실이  이루어져서 그런 역사적인 일이 이루어겼고 또 그것을 문서에다가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또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일은 그때 제자들에게는 형식  계시로 그들에게 구원 도리를 계시해 주신 것이고 그것을 또 문 서에 기록해서  문서 계시로 우리에게 기록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저 배 타고 의례히 바다 건너로 가라 하니까. 그들은 배 타고 갈  수밖에 없고 또 배를 타고 가면 바람 일 때도 있고 바람 없을 때도 있고 배가  순조롭게 잘 갈 때도 있고 못 갈 때도 있지 그것을 별스럽게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겠습니다.

 지난 밤에 ○○목사님이 증거를 했는데 그 증거하는 데에 저도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증거하는 그 증거의 제일 중요한 깨달음의 중점이라고 하면 그렇게  하나 하나 형식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렇게 된 그 일이 하나의 그칡 과거 역사로  우리에게 알려 주는 그것이 아니고, 그 한 토막 한토막 되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그 하나 하나를 우리에게 지도 하시고 있다는 것, 그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구원의 이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니까 그 이치대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걸어나가면 내나 그대로 우리에게 된다는 그런 것을 가르쳐 주신  우리의 구원 도리로 주셨다 하는 것을 깨달은 그 깨달은 점이 대단히  장점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이치를 깨달아 준 것인 것을 우리가 알고  바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려 주는, 하나님이 열어 보 이신  계시해 준. 열 계(啓)자 보일 시(示)자, 열어 보여 주신 이 사실로 자기가  받아서. 그러면 여게서는 나로 하여금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라 고 또 어떠한  위험성이 있다고, 또 어떠한 그 방편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또 어떠한 실수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그것을 가르쳐 주신 아주 우리에게 중대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준 것으로 이렇게 자기가 알고 연구하면 자기 구원에 크게 변동할 수  없는 그 길이 여게서 다 나올 것이고, 이런 생각었이 그저 연구를 한다고  하면은 과거의 한 가지 그런 역사적인 그런 얘기 처럼 하나 지나갔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울 것이고, 만일 그렇다면 거게 대해서 사람들은 이렇게도 관찰하고  저렇게도 관찰해서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겠다  그렇게도 또 사람들이 이탈해 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에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은 과거에 형식 계시로 주신 것을 다시  문서 계시로 후대에 우리들에게 전해 주신 이 말씀은 바로 길이요 영생입니다.

영생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나따나 그렇게 거게 대한 것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자기가 잘못 깨달으면 바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하늘 나라  가는 길을 잘못 깨달은 게 되기 때문에 큰 낭파가 되겠고 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도 잘못 깨달아서 가르친다고 하면은 큰 책임이 있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깨달은 것이 혹 그 길의 십의 십을 다 바로 가르칠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의 사람도 있겠고 가르침도 있겠고, 그렇지 못하고 그저 한 십분지  일을 깨닫고 가르칠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십의 구를 다 깨닫지  못했으니까 못한 그것은 자기는 그만치는 거게 대해서 깨닫지는 못했으니  걸어가지 못할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또 고 길을 안내하는 데에 그저 다  안내하지 못하고 조금만 안내한 그런 일이 되겠지마는 만일 그것을 삐뚤어지게  엉뚱하게 달리 길을 깨달아서 가르쳤다고 하면 심판이 크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거는 달리 잘못 깨달아 가지고서 동으로 갈 것을 서로 인도했다고 하면은  그거는, 좀 덜 가르치고 다 가르치지 못하고 적게 인도한 것은 그 다음에 인도  안 했기 때문에 잘못 인도한 데 대한 심판은 있지마는서도 만일 잘못  인도했으면 거게 대해서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승된 자는 받을  심판이 크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한 진리를 잡고 깨달을 때든지 또 깨달은 걸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든지 할 때에 가르침으로, 처음에는 깨달은 것이 비유컨대 한 발을  깨달아서 한 발밖에는 자기는 못 봤고 못 걸어갔고 한 발 가르치고 또 그  다음에 또 두 발 가르치고 그 다음에 또 열 발 가르치고 그 다음에 백리를  가르치고 그 다음에 천리를 가르치고 그렇게 좀 적게 미달되는 그런 가르침과  또 깨달음을 가지는 그것은 심판은 없지마는서도 그것을 잘못 삐뚤어지게  가르쳤다고 하면 거게는 스승된 자의 받을 심판이 크다 하는 그 심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한 설교를 할 때에 가르치는 것도 사람들이 다 모르는  것이니까 처음에 그것을 십분지 일을 가르치고 혹은 백분지 일을 가르치다가 또  그 다음에는 백분지 십을 가르치다가 뭐 몇 번이든지 차차차 가르쳐 가지고서  다 끝까지 깨달을 수도 있고 가르칠 수도 있으나 잘못 깨닫고 잘못 가르치는  그런 길에 우리가 빠지지 안하도록 심히 조심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가르치는 것이 동으로 가라 했다가 나중에는 서로 가 라  했다가 그렇게 향방이 틀려지는 그런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가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깨닫는 것을 허퍼도 깨달을 때에나 가르칠 때에  자기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에게 길이 되는 그 길을.가르치고 있는 이 중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고, 또 곧 그것이 그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 생명을 주는 것인데, 그 생명을 주느냐 사망을 주느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혹 사경회를 나갈 때에 잘못하면 실수하기 쉽습니다.

사경회 나갈 때에 가르칠 때에 첫째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벌써 선포해 놓은 계약의 말씀과 인도의 교훈의 말씀이 있으니까 그  말씀대로 우리가 했다고 하면은 우리는 심판은 면합니다. 그저 혹 참 완전성에  대해서 미달하고 또 다 완성하고 있는 차이는 있지마는서도 '잘못 됐다, 남을  죽였다, 남을 삐뚤어지게 인도했다' 그런 심판 받을 그런 염려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둘을 생각하고, 그 다음은 생각할라 하면은 이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이 도리를 어짜든지 착오었이 하는 대로는  바로 증거를 해서 그들에게 혼란되지 안하고 바로 가도록 해야 되겠다 하는 요  마음이 있을라면 있어서. 그저 요 셋 만 가져야 되지,  그 이상 자기가 이거 꺼꾸로 돼서.'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이 은혜를 받도록  할까 감동이 되도록 할까 또 마음들이 움직이게 할까'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그보다도 더 위험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인정을 받아서,  인정을 받아 사람들이 내게로 끌려 오도록 하는 인기 전술을 쓰는 그런 것은 참  그거는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거는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벌써 그리 되면은  얼마 안 가서 실족하게 됩니다.

 이래서, 대개 부흥사가 탈선되기 쉽습니다. 그 부흥사가 가면서 가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 하지 안해서 증거하다가 그만 입이 딱 막혀 가지고서  증거를 못 하는 때도 있고 또 하는 때도 있고 그렇게 각주 자기를 다져지는  그런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대단히 위험한 사람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는, 그런 외부적에 나타나는 그런 간섭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 속으로 하나님과 자기와의 은밀한 관계에서 다른 사람이 모르는  스스로의 내적 그런 간섭을 받는 그런 간섭이 계속 있어서, 내적 간섭이 늘  있어서 거게서 주님 앞에 간섭을 받고 충고를 받고 또 경계를 받고 함으로써  그것이 외부에 나오지 아니함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면 좋지마는 만일 그런  일이 없이 아무 그런 것 없이 언제든지 세상에 있는 학자들이 자기 학을 강의할  때에 그만 밤이나 낮이나 언제든지 그 거 강의하는 것처럼 이렇게 지식적으로  강의하는 그런 거와 같이 돼진다 고 하면은 그 사람 얼마 안 가서 부흥사가  껍데기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부흥사 된 사람들이 끝까지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적고 나중에는  껍데기가 돼 가지고서 그저 사람이 듣는, 만일 녹음을 한다고 하면은 틀림없는  녹음인데 그 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없으니까 자기에게 성화의 은혜가  없게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말뿐이지 영감 없는 권능 없는 그런 말이  되어진다고 하면은 큰 낭파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다 어디서  생겨지는고 하니 집회 나가서. 고만 집회를 나가지 안한다고 하면 자기가 뭐 좀  생각할 것도 있고, 또 본교회 늘 있는 것이면, 본교회서 하는 것이면 교인들이  또 뭐 좀 약간 자기가 깨닫지 못하고 또 막히면 거기서 중단할 수도 있고  하지마는서도 집회 가는 사람들은 자기 인기 위주로 된다고하면은 그때에 뭘  끌어 대야 인기가 날 건가 해서 마구잡이로 끌어대는 그런 일을 해 가지고 그만  큰 실수를 합니다.

 또, 자기가 인기로 한번 이거는 가 자(字)라 해 놨으면 또, 뭐 가자로해  놨다가 그 다음에는 나 자라 하고 그런 사람도 있지마는 그런 사람은 또  하나님이 쓰시기도 그럴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 그렇게 신임을 받을 만한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고 '저 사람은 뭐 동으로 갓다 서로 갔다 그 사람은 뭐 아무  주장하는 거는 일관하지 않다' 그런 헐한 사람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별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언제는 이것을 가 자라고 말했나가 언제는 나 자라고 말 한다  하는 그런 일이 있을 때에는 자기에게는, 교훈을 하고 남을 인도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보다 더 큰 수치가 없고 그보다 더 아주 죄를 범한 일이 없고,  자기는 언제는 이렇게 주장했다가 언제는 이렇게 주장하는 그것이 얼마나 큰  수치인 것을 느끼는 것이 다 우리 그역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을 때에는 즉시 그것을 대중이 지나가기 전에 사과를 해서 그것을 고쳐서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왜? 뭐 우리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이 아닙니다.

완전이 아니니까 잘못 깨달을 수도 있고 잘못 증거할 수도 있으니까 잘못  증거는 잘못 증거했다고 고쳐서 다시 말하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두 버무려서 묻어 버리면. '묻으면 뭐 모르겠다.또세 뮐이  지나가면 다 망각성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잇어 버리겠다' 이런 걸로 해서  그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고 묻어 놓으면 사람들이 잊어버리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은 큰일납니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들은 것이 그 사람에게  없어지는 것 같아도, 사데 교회가 받은 거와 들은 것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잊어 버렸기 때문에 다시 생각하라고, 생각하면 나온 다 그말이오. 사람이 들은  것은 그 사람의 비유컨대 기억 푸대라 하는 그 푸대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들은  것은 그 기억 푸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빼 나오면  나오지 나오기 전에는 벌써 그 안에는 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이라' 하고서 토하여 내치면 괜찮지만 토하여 내지기 전에는 그거는 있다  그말이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은 들었으면 그게 속에 다 자루에 들어  있습니다. 자루에 들어 있는데, 그것이 언젠가 살아 있을 때에 그거는 어느  현실을 만나면 그것이 나와 가지고서 그것이 그 사람을 잘못 지도할 수가 있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신신학자 되는 사람들이 자기의 깨달은 모두가 다, 교리가 다  신신학이 돼 신신학이 되는 것 아닙니다. 깨달은 것이 하나 잘못됐으면 잘못된  그것이 신신학이 되는 그 움싹이 되는 것입니다. 왜? 잘못 깨달은 그것을 그만  잘못 깨달은 줄 알고 '이거 잘못됐다' 고쳐 버리면 괜찮은데 그 다음에 그것을  잘못 깨닫고 고치지 안하고 고것을 보존할라고, 벌써 고것을 '아이구 모든  사람이, 잘못 깨달았으니까, 내가 잘못 가르쳤으니까 잊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라고 다시는 그걸 안 쓰는 사람은 심판은 받지마는서도 화가 적고 고 잘못  깨달은 것을 요것을 고거 하나 변명하기 위해서 요렇게 조렇게 변명을 하고. 또  고것을 변명하다가 상대방에 대항하는 대적이 많아지니까 또 요것을 성경적으로  변증하기 위해서 성구를 이용하기까지라도 해서 잘못된 것을 자꾸 그렇게  변증을 할라고 하면은 하나 잘못된 것을 변증할라 하니까 변중하는 성구가 또  잘못됐고 고 잘못된 걸 변증하니까 고 성구를 또 잘못 이용했다 말이지요. 또  그것을 또 더 할라 고 더 할라고 자꾸 이래 나가다 보니까 나중에 가서는 하나  틀린 것이 나중에 수 십 가지가 틀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난밤에 우리도 말하기를 '강사를 너무 보내면 그 사람  버린다. 그러니까 그리 보내면 안 된다' 하는 그것은 우리가 다 동역자를  사랑하고 또 자기가 가르쳐 놓은 후배들은 잘 압니다. 알기 때문에. '저 사람이  어찌 되는고?' 가 가지고 실수하면 실수하는 것이 자기가 가르쳐서. 잘못  가르쳐서 또 그 사람이 잘못 가르쳐 실수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에게 큰 심판이  있고, 바로 가르쳤는데 그 사람이 잘못해 가지고 한 것은 직접적인 심판은  없지마는서도 그래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책임적인 그런 심판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을 그것을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집니다. 가지는데.

 뭐 지금 다 그것을 지나가서 회개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리라 하기 때문에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여게 ○○○ 목사님이 처음에 여게  이쪽으로 왔을 때에 그때에 아주 대 인기인 사람입니다. 뭐 어디든지 집회  가면은 거게 있는 교역자들은 다 전부 그 밑에 다 사로 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 서울 가면서 한번 보니까. 어디 그때 경주인가 어데인가 집회 그 후,  그쪽 골째기인데'. 집회하고 오는데, 그때 목사님들이 그 차에 아마 한 십여명  탔읍디다. 탔었는데 그때 뭐 ○○○목사님이 그 밑에 있는 목사님들에게 앉아서  잠깐 하는데도 그거는 틀렸다 이래라 저래라 그만 이라니까 뭐 예 예 예 하고서  아주 참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할 만치 그렇게 권위있게 그라고 다 밑에 죽죽  따르는 그런 것을 봤습니다.

 봤는데. 그때에 그 인기 끄는 그것을, 그것이 다 심판받을 일이요 목사들에게  인기는 끌지마는 그것이 교리적으로 신조적으로 하나님 앞에 성경적으로 그게  삐뚤어진 것이 많기 때문에 고만 인기 위주로 그래 하다 보니까 집회에  나가서는 자꾸 그래 돼치는고로 이쪽 오고 난 다음에 그거 틀린 것이니까 그리  하지 말아라' 자기도 안 할라고 이렇게 하고 나가서도 집회 나가면 그만 그게  나와 가지고서 그때. 그때는 얼버무려서 모든 사람에게 인기를 끌지마는 실은  성경적이 아니라 그거요.

 그래서 그 뒤에 그것을 깨닫고 '집회를 네가 나가면 자꾸 이렇게 돼지니까  어떻게 할래?' '아이구, 내 집회를 안 나가겠습니다.' 안 나가서 그 뒤에 또  얼마 있다가 또 나가보면 또 가다보면 왜 그게 나왔느냐? 또 그게 나온 그것을  후회를 하고 이래서 아주 안 나갔습니다. 안 나가고 그만 안 나갈라고 해서  오래동안 안 나가다가, 한 십여 년을 집회를 안 나가고 뭐 그대로 인기를  끌어서 자꾸 이래 만들어 나갈라고 했으면 여게 나 운몽 장로가 거석하지만 나  운몽 장로보다도 더 유력하게 큰 파가 됐을 것입니다. 큰 당파가 됐을  것입니다. 아주 큰 인기를 끌어 나갔을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그게 아닌 줄  알고 그 길을 다 버렸고 이랬는데,  그때에 위천 위산교회에 집회를 갔을 때에 다 바른 진리를 가지고서 잘  증거하다가 나중에 조금 한창 고 은혜를 받아서 좀 강사의 인기가 올라갔을  때에 그때에 아닌 청이 뭐이 하나 나와서 그래 같이 거게 참석한 교역자들이  그것을 가지고서 염려를 하고서 그래 나중에 그걸 그 본인에게 충고도 하고  그래 했다고서. 그 뒤에 또 한 번 말했었습니다. 그때 무엇인지 그거는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본인도 그게 본의가 아닌데 고게 나왔다고, 안  나오기를 위해서 이랬는데, 그 후에 다른 데 집회를, 오래 있다가 집회를  갔었는데 가고 난 다음에는 제가 그걸 살펴봅니다. 들어 보면은 그런 것이 안  나온다는 말, 안 나오고 꼭 진리를. 그걸, 배운 진리를 할라 하니까 서툴고  옛날 하던 솜씨를 내 놓을라 하니까 익숙하고 이러나 배운 진리를 증거할라고  애써서 그런 실수가 없다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들었는데, 또 지금 ○○○교회 가 가지고서 인도하는데, 항상 제가 엿듣고  있는 거는 그것입니다.' 혹 교훈이나 행정적으로 무슨 그런 것이 옛날 것이  나오는가 그것을 늘 이렇게 살피는 대로 엿듣고 있습니다. 지금은 없는데. 무슨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것이 일시에는 나타나지 안하지마는 나중에 가다가는  크게 그게 실수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단자가 되는 이단자의 제일 근본 요소가 뭐이가? 그것이  자기 인기를 끌라 하는 아주 그 위험한 무리입니다. 고것이 뭐인가? 고것이  막바로 원죄요 고것이 막바로 자기 중심이요 자기 위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자기의 교훈한 것이 그것이 아무리 틀린 걸 자기가 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교훈하는 것이 옳고 자기 교훈한 게 틀렸으면 틀렸을 때에 그때에  어떤 사람은 '참 이거 죽기 전에 이거 들어 그렇지 만일 죽기 전에 못 들었으면  내가 어찌 할 뻔 했노?, 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것을 그럴 때에 마음에 좀 그만 섭섭한 것이 '고것이, 고런 주장과 교훈이  안 나왔으면 좋겠다, 요렇게 되어지는 그런 사람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자기네들의  교훈보다. 예수님의 교훈이 앞섰기 때문에, 예수님의 교훈과 자기 교훈이 조금  달라서 예수님의 교훈이 들어오니까 자기 교훈이 치어지니까 치이니까 그만  거게 대한 적개심 시기심이 나와 가지고 나중에는 예수님이 없어야 자기네들의  교훈이 인기가 그대로 유지가 되겠다 해 가지고서 이래 하다가 마지막에는 참  심판받는 그런 끝을 맺고 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설교할 때에, 교역자들이 설교할 때에 교인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 사람에게 감화를 주기 위해서 하는 그런 일을 절대 말아야  됩니다. 그런 시험에 들지 안해야 됩니다. 뭐 인기 끈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인기 끌어서 교인들이 다 크게 막 감탄을 받는다고 해 가지고서 교회 되는 것이  아니고 유익있는 거 아닙니다. 가르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고것을 가르쳐서  또 고 사람들이 고렇게 하나님이 가르치는 대로 고대로 받았을 때에 거게는  지극히 큰 능력이 동행을 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고 동행을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나 뒤가 자꾸 이와 같이 일어나지마는서도 아무리 일시  큰 인기를 끈다 해도 그것이 그만 하나님이 그걸 '이거 틀렸다' 하고서  하나님이 그걸 지금 삭제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고 하면은 뭐이 되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그것 참 인기끈다는 그거는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바울에게 일생동안, 바울같은 그런 사람도 가시 준 그 가시가  뭐 이그 하면은 이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오. 자기가 그저 자고하지 일도록 하나님께서 이 가시를  줬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본교회서 설교하든지 뭐 이든지 어떻게 하면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칠까 하는 그기 참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절대 성경 연구하든지  설교할 때에 그런 생각은 우리 속에 들어오지 안해야 됩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주님이 말씀라라고 하는 그 주님이 말씀하라고 하신 고 말을 전할까? 내가  전할 때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고 말씀을 전할까? 내일 주일은 주님이 무슨  말씀을 우리 교인에게 주실 것인가?' 고것을 채아서 전할라고만 애를 쓰는  고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없이 할라면. 그것이 없이 할라면 먼저○스미스 목사님 그 목사님  식으로 하는 것이 또 좋습니다. 그거는 뭐이냐? 나는 그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지, 성경을 매일 계속해서 가르치는 것이지, '요번 주일에는 주님이 무슨  말씀을 가르칠 건가. 말씀하라 하는가 이것을 찾아서 그대로 전해야 될 터인데  내대로의 내 주관대로 선택해 가지고서 이와 같이 가르쳐서는 안 되겠다.'  그러니까. 그 뜻을 찾을려고 하니까 심히 어렵고, 여러분들도 경험하는 대로  '아, 하나님께서 요 말씀을 증거하라고 한다.' 자기가 찾을라고 애를 쓸 때에는  대개는 뭐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전에 찾아지는 거 아니오. 찾을라고 애를  쓰고 자꾸 이제 신앙 생활은 기도하고 성경보고 주님하고 자꾸 이렇게  접촉할라고 애를 쓰는데 찾아지는 것은 보면은 십분 전에, 혹 잘되면 몇 시간  전에 몇 시간전에 찾아지는 거보다도 어떨 때는 한 십분 전에. 강단에 사회하는  사람이 '이제 나와서 하나님 말씀 봉독하시고 이어서 증거해 주시겠습니다.'  하니까 올라가야 될 터인데 그때까지 없으니 죽을 지 경이라. 그때까지 쫄리고  죽을 지경이라. 죽을 지경인데, 막 일어서 가지고서 이제 어쩔 수 없이 그저  서기는 서지마는서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럴 때에 참 중요한 시험입니다.

그럴 때 일어설 때에 주님이 안 주시면 고만 설교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거는 도무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지 안하니 이거 참 안 되겠다. 내가 아무  말씀 증거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지난 주일의 재독이나 하자든지 그만  그렇게 하고 마는 것이 그게 솔직한 사람이요 진실한 사람이요, 그럴 때에  자기대로의 뭘 택해 가지고서' 얼버무리는 그것이 아주 한 번 두 번 있는 것이  연습돼 나가면 그것이 악습입니다. 악습 중에 제일 큰 악습입니다. 그러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래 나가다가, 그라다가 주님이 한 십 분 전이나 오분 전에 올라 섰을  때에도. 이제 자기가 올라서서. 지금 일어서고 올라가 서는데. 나가서 가서  설라고서 강단에 나가는데 그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많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쫄려서, 아주 쫄려 가지고서. 하나님에게 뭐 애걸 복걸 이렇게 쫄려  가지고 죽을 지경으로 그라다가 쫄릴 대로 쫄리고 그라다가 나갈 때, 강단에  서서 나갈 때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말씀이 있을 때가 많다 그  말이오,  그럴 때는 뭐 언제 성경 연구할 거 있습니까? 연구할 거 없어도 그때 그  주일에 불이 떨어 집니다. 여러분들 그런 경험 있읍니가? 다 그거 목회자라면,  설교자라면 그거 있지요. 그 시간에 성경 읽으니까 그만 성경이 확 열려  가지고서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이 나오고 또 이제 그 말을  하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자꾸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자꾸 말하게 했고  또 이랬는데. 설교하면 저 사람 다 알고 설교한다 이렇지만 모르고 설교하는 것  많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자기는 아무 준비도 안 했고 그저 그때 생각나는 대로  그때 마음에 깨달아진 대로 쭉 설교를 했는데 나중에 보면 아주 자기도, 재독을  하면서 들어보면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씌이라는 것을 자기가 느낄수 있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 ○목사님의 목회 방법으로 그래 하든지 그래 안하면 '나는  요번에 요한일서를 하겠다' 그러면 자기가 제일 은혜되는 것 깨닫기 쉬운 것  '에베소서를 해야 되겠다.' 녜, 에베소서나 요한일서는 깨닫기가 쉽고 이러니까  하겠다, 뭐 하나 해 가지고서 그만, 나는 성경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  가르치는 것이지 딴게 아니라.

 그러면. 그거는 주님이 이 시간 요번 주일에 무슨 말씀을 주실란가 그것을  지금 찾는 그것이 참 힘이 들고, 그때 ○ 목사도 말하기를 '설교 제목을 하나  찾는 데에 심히 고단스러운데, 어려운데 그것이 필요없다. 그만 성경을 하나  찾으면 그 성경을 쭉 계속해서 가르치고 이라는 것이 그것이 제일 편리하고 또  유리하다.' 그거 아주 유리한 점을 찾았습니다.

 뭐 또 성경을 이렇게 좀 연구해 보면 구약은 구약이고 신약은 신약  이렇지마는서도 연구해 들어가 보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내나 하나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꼭 한 개요. 한 개이기 때문에. 구약에도 보면은 신약이 다  들어 있고 신약에도 구약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만.

창세기만 가지고 해도, '창세기는 옛날 지나간 것이라 이래 생각해서 구약은  필요없고 신약만 가지고 어짜든지 설교해야 된다. 구약은 필요가 없다' 하는  그런 주장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창세기에도 신약의 뭐  계시록 끝장에 있는 것까지 진리가 고 안에 다 내포돼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또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연구해서 설교를 하고  또 설교하고 나서 또 좀 보연, '아, 설교하고 나서 보니까 잘못 증거해서  증거가 미달이다. 미달이다.' 그 증거를 원만히 요래 증거 했으면 될 것인데  미달이라, 미달이니까 그 다음에 또 증거해야 되겠고 미달이니까 또 증거해야  되겠고 미달이니까 또 증거해야 되겠고 자꾸 이렇게 증거해서 하는 것은 그거  잘못 가르친 게 아니라 미달은 얼마든지 아주 다 "종달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마는서도 틀린 거는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틀리는 것은 그 틀리는 것이 뭐 때문에 틀리는가? 악령과 악성  때문에 틀립니다. 악령과 악성으로 틀리면은, 악령의 감화로 틀려 지는 것이요  악성으로 틀리는 것은 자기 중심으로서 틀려지는 거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인기나 뭐 또 사람들의 감동을 줄라 하는 것이나 그런 거다 자기 중심입니다.

 이래서 우리 서부 교회에 우리 국내에서 와서 참관하고 간 교회만 해도,  얼마라더라? 기록된 사람, 기록한 사람 누가 있습니까? ○○○나왔어요? 알마라  했지? 사백 팔십 두 교회가 왔다 갔습니다. 이랬는데, 올 때마다 나는 먈하는  거 여러 가지를 말해 주지 안행습니다. 그저 그분들과 다른 것만 말하지 그분과  같은 거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 말해 주는 것이 아동들의 그 심리. 아동들의 심리.를 연구 해서  아동들의 그 심리 위줘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그 심리에 맞도록 할까 하는  그것이 일반 주일학교 다 지도자들이요 연구자들입니다. 그래서, 뭐 강습회라  가 보면은 전부 그것입니다. 그런데. 고것이 아동 심리 위주가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심리 위주로 하자 하는 고것이 다른 교회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심리 위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심리에 맞으며 하나님의 비위에 맞을까,  하나님의 뜻에 맞을까?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하나님의 그 심리를 우리가  거슬리지 안할라고서 성경에 나타난 대로 아동 섬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심리를  연구하자는 그것이, 첫째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다는 고거 말하고. 또  두번째로는 뭘 말하느냐? 이러니까, 교훈을 할 때에 그 정도와 그런 것을.

아동들의 그 지식 정도, 그 정도를 따라서 이렇게 연구하고 가르치고 또 그  아이들의 그 정도에 알아듣기 쉽도록 이래 할라 하니까 이야기 성경이 나왔고,  얘기 성경이 대인기를 끈다고. 어떤 사람이 또 여게 신고함에 써 넣기를 '아  목사님은 자꾸 얘기 성경을 자꾸 이렇게 비판해서 말하지마는서도 그 얘기  성경이 우리는 보니까 더 잘 깨달아지고 훨씬 좋습디다' 하는 그 사람도 우리  서부 교회에 있다 그거요. 이름은 기록하지 안하고 제가 써 넣었으니까 내가  모르지마는 서도 그런 사람도 있다 그거요. 반발하는 사람도 있어. 그래도 옳게  가르쳐서 뭐 반발하는 거 그런 거는 상관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둘째로는 꼭 성경 말씀만 가르친다는 거. 고것이 다른 데와 좀  다릅니다. 성경 말씀만 가르친다는 거. 그성경 말씀만 가르치면 어떻게  가르칩니까? 어떻게 그 아이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쉽게 가르칩니까?''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오전 설교한 거. 언제나 오전 설교하 거 오후 설교는  또 재독입니다. 오전 설교는 문 열다가 말았으면 오후 설교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런 비유컨대 그와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전 오후 설교하고  이래 가지고, 오전 설교 듣고 오후 설교 들으면 오전 설교를 거의 결론적인  설교로 이래 재료가 돼지고, 또 오후 설교만 그만 들으면 되겠다 싶은 사람은  오전 설교는 거게 또 좀 요소적이고 기초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또 안 듣고는  또 좀 알기 어렵다 말이오.

 이러니까, 오전 오후 설교 해 가지고 그 설교를 장년반에게는 알기 쉽도록.

알기 쉽도록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고 해서 뭐 여러 가지 뭐 또 변중도  들고 또 거t게는 누가 방해할 터이니까 이런 미혹도 들지 말라는 그런 것도  하니까지저분한 게 딴지마는서도 학생들에게 그거 말해야 소용없다 말이오.

이러니까, 오전 오후 설교 중에서 제일 간추리고 간추리고 간추려서 제일  간추린 뼈다귀만 이거 좀 알기, 자꾸 여러 번 이래 놓으니까 알기 어려운 제일  어려운 설교를 간단하게, 제일 어려운 설교를 간단하게 기록해 가지고서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그 공과로 가르쳐 줍니다.

 가르켜 주니까. '이거 어찌 깨닫습니까?' 그거는, 깨닫는 것은 성령이 깨닫게  하시니까 문제가 없고, 깨닫는 거는 성령이 깨닫게 하시니까, 뭐 성령이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틀림없이 그대로 전해 주면 우리할 일 다 하는 것이니까  깨닫고 못 깨닫는 거는 성령에게 맡겨야 되다.

 또 그라고, 정도가 다르다 하지마는서도 장년반으로 말하면 국민 학교도 입학  안 한 사람이 있고 또 아주 최고 의학을 연구한 사람도 있는데 한 자리 놓고  가르치지 뭐 두 자리 따로 놓고 가르치더냐? 그러니까 그것은다 그래도  마지막에 결산을 대 보면은 박사는 깨닫지 못 하는데 일자 무식한 사람은  깨달았고, 박사는 그것을 에누리해서 그대로 실행할라고 작정도 없는데 일자  무식은 벌써 작정하고 어떨 때는 그런 사람들은 순교까지라도 다 나갈 수 있는  각오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누가 깨,달았는가? 성시이 깨닫게 해 주시니  다르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깨닫는 것을 책임지지 말고 아짜든지 하나님의  말씀만 가르쳐야 된다.

 그래서 나는 반사들에게 그런 말로 합니다. 학생들은 다 시기도 주입식인  시기가 있고 주입으로 자꾸 받아 들이는, 자루에다 받아 넣는 주입시 기가  있고, 또 연구 시기가 있고, 또 비판 시기가 있다. 이런데, 어린 아이들은  주입시기이기 때문에 뭐든지 들으면 속에 들어간다. 들으면 들어가니까  어짜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옳은 것만 자꾸 넣어 줘라. 이해하든지 말든지 그  속에 집어 넣어라. 이래 주입적으로 옳은 것을 거기다가 아무리 어렵고  하더란대도 하나님의 진리를 거기다가 집어 넣으면 속에 들어가 있으니까  나가지 안하고 들어가 있으니까 그것이 자기 생활할 때 언젠가 나와 가지코  자기를. 다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나중에 그 지식에게  지배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요 둘 다르고 하나 다른 것은, 세상 학교, 국민 학교 학급을 기준해 가지고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학급을 기준하지 말고 자기가 전도해서 자기가 낳은  믿음으로 낳은, 참 아들 디모데라고 바울이 말한 거와 같이 자기가 자기하고  주님하고 둘이 부부 돼 가지고, 지기하고 주님하고 둘이 결합해 가지고 낳은  믿음의 자녀가 있다 말이오. 믿음의 자녀. 믿음의 자녀이니까 어릴 때이니까  부모에게 붙여라. 부모에게 붙여서 그걸 기르고 공연히 젖을 떼 가지고서  유모에게 붙이든지 그래 안하면 고아원에 갖다 붙이지 말아라. 부모가 있는데  고아원에 두느냐? 그러면 아무 상관 없는 반사에게 붙이는 건, 다른 사람이  전도해 끌어 놓은 것을 붙이는 것은 고아원에 갖다 붙이는 것이요 좋으면  유모에게 갖다 붙이는 것이지마는 제가 그거 하나 인도할라고 애를 써서, 기도  많이 하고 애를 써 가지고 하나를 얻어서 이렇게 참 애지 중지 얻어 놓은 그  자기가 기르는 거와 다르다.

 이래서 보면 제가 전도해서 기르는 것과 또 다른 사람이 전도 해다가 붙여  주는거 기르는 거와 영 다릅니다. 달라요. 다르고, 또 대번에 전도 해다가 붙인  것과 또 얼마 동안 다른 데 다른 반에 오래 동안 돌아다니다가 붙은 거와 영  달라요. 대번 처음에 온 거는 나듬질로 그만 빨간 거 데려다가 키운 셈이고,  빨간 것을 데려다가 키운 셈이고. 또 이걸 한 서너살 먹은 걸 데려다 키우는  셈이고, 또 제가 낳은 부모가 키운 셈인데 어찌 같을 수가 있습니까? 뭐  반사들이 확실히 보면 다릅니다. 제가 전도한 거게 대해서는 관심도 낫고,  관심도 더 하고 좀 주력도 더 하고, 다른 사람이 전도 해다가 붙이는 거 영  달라져요.

 이래서, 그 세 가지만 말해 줍니다. 세 가지가 다르다. 그 세 가지는 그 들이  이해 못 하는 사람은 못 하고. 어떤 사람은 '아. 맞다' 이래 가지고 그만  대번에 빛을 보니까 탁 깨달아 가지고서 '맞다' 요렇게 하면서 고 주장으로 가  가지고. 대번에 처음 요걸 바꿀라 하니까 어떤 신강이 있었습니다. '바꿀라  하면 요런 애로가 있고 요런 반대가 있다.' 요것을 말해 주면 ''네, 요래  순서대로 요래 바꾸겠습니다.' 싹 바꾸는 사람이 있고 바꾸고 난 다음에 어떤  큰 교회는, 많이 온 교회는 제가 알기로는 네 번까지 왔습니다. 네 번까지 그  대중들이 와서, 처음에 와 가지고 요라고 또 한 번오 고 또 한 번 오고, 그  교회는 다 역사가 컸습니다. 여기 뭐 큰 교회는 거의 다 두 번 세 번 다  왔습니다. ○○○교회는 여게 오기를 한 번 왔는가? 한 번 왔는가? 한 번  왔어요. 한 번 온 거는 내가 아는데, 그때 뭐 전부 장로님들하고 모두 다 한목  왔습니다. 한 번 왔고, 다른 교회들은 여러 번 왔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바꾼  교회들은 그만 그 주일 학교가 뭐 질은 어찌 되는지 몰라도 양은 아주 가속도로  불었습니다. 가속도로 불어서 영 배 불었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 전화 번호도 다 있을 터이니까 가 가지고, 그때와 지금과, 그때 그  숫자와 지금에는 다 삼사 배 불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십 배 이상  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진영 가운데서도, 우리 진영 가운데에서도 암만 말해도 '일반  교회서 하는 것이 낫지 여게서 말하는 거 아니다.' 이래 가지고 여게  있으면서도 주일 학교 운영은 꼭 일반 교회대로 했고 우리 진영대로 하지 안 한  교역자들 다 나갔습니다. 다 나갔어. 또 주일 학교가 안 됐습니다. 다 나갔어.

다 여게서 탈퇴해 나갔다 그말이오. 나갔는데, 그분들이 주일학교 운영하는  것은 몇 번이나 말해도 안 들어요. 안 듣고 그렇게 한 것은 말하지마는서도  긍정이 가. 좀 다르다 그거요. 긍정이 안간분들은 가만히 지금 생각하면  주일학교를 우리 하는 대로 그대로, 모두 우리가 같이 하는 대로 하지 안하고  달리하는 사람들은 다 나갔다, 지금도 안 하고 있는 사람들 있다 말이오.

있는데, 그 사람들 보면은 '저게 아무래도 위험하다. 있어도 좀 다르다.' 그  교훈을 전적 안 받아 들인다 그거요.

 고 말을 내가 말하는 것은 자꾸 인간들의 그 부패성, 원죄, 인간 중심으로  하면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하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지금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주일학교 여기서도 지금 그렇게 하지 안하고 내나 세상 학급제를  따라서 그래 하고 또 거기다가 학생들 붙여, 암만 붙여보십시오. 그래 가지고는  주일학교는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장 년반은 여러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여도 주일학교는 없다 그거요.

 또 하나님의 말씀만 가르치지 안하고 자꾸 아동 심리를 거석해 가지고서 전부  동화를 만들어 가지고 하는 그거, 아동 심리를 이용해서 동화를 만들어. 그래야  아이들이 듣기 좋아하고 이렇지, 동화 만들고 뭐 또 공작도 만들고 저거  좋도록만 자꾸 이래 하는거 이거 가지고서 일이 안 됩니다.

 언제 가 보니까, 이거 하기 아동 성경 학교 강사들 강습회라 해 가지고서 뭐  전국으로 어떻게 광고를 많이 하고 한다 하기 때문에 한 번 갔다 말이오.

가니까. 그분이 ○○대학의 교수인데 와 가지고서 하면서 뭐 '얼마든지 우리가  동화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면서 '창세기  1장 부터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이라면서 창세기 1장 에덴 동산은. 에덴 동산은  이래 걸어갈라 하면은. 걸어가면은 거게는 발 밑에 장그랑 장그랑 장그랑  장그랑 이란다 하니까 이라면 아이들이 다 듣기 좋아서 다 거석 한다고 이래  말하고 또 의자에 앉으면 에덴 동산에는 의자가 있는데 그 의자에 앉으면은  바바바바 이래 전부 앉으면 이렇게 다 음악이 나온다고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에덴 동산을 가르칠 때에 그렇게 가르척. 이래 뭐 창세기 1장서부터 전부  동화를 다 할 수가 있고 요한계시록도 다 할 수 있다. 이러니까 순전히 성경을  거짓말로 만드는 이것을 인기로 알고 하고 있으니까 이거 뭐 순전히 무슨  놀음인고 여러분들이 비판하면 알 것이라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시고 진리가 일하고 둘이 일하지 딴것은 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진리가 일하고, 하나님과 진리가 우리에게 일하러  오기는 무슨 줄을 타고 왔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줄을 타고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피는 연결시킨 소개자요. 그러니까, 영감과 진리는  뭐하러 왔는가? 예수님의 피를 소개할라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영감과 진리가 우리에게 왔습니다. 영감과 진리는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왔는데 뭐 하러 왔는가? 예수님의 피를 우리에게 알려서 피와 관계를 바로  가지도록 피로 인한 그 은혜를 우리에게 입혀 주도록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꼭 우리가 설교할 때에 성경 말씀에 삐뚤어지지 안해서, 우리도  그렇지 않소? 조금 우리가 좀 된 사람이면 아주 수치스러운 그 자리는 서서  있지를 못해. 내 낯이 간지러워 수치스러운 그자리는 서서 있을 수가 없어.

그만 살짝 피해 나와야 되지 수치스러운 놀음을 할 때에는 거기서 있지 못하지  안해요? 이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이탈된 뭐 순 인본의 뭣을 할 때에  어떻게 당신이 거기 서서 계시고 당신이 어떻게 그 설교에 같이 동참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 설교로 하나님을 이렇게 배척해서 그만 피해서,  피해서 가시도록 이렇게 만들 수도 있고 하나님이 이 일을 책임져서 할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다 그말이오.

 그런데 내가 왜 ○○교회는 못 가구로 하느냐 하면은 이 ○목사님과 좀 더  기도 많이 해 가지고 주의해서, 보면 하나님이 같이 할 수 있도록 고것을  가르칠라고 애를 쓰니까 이제 자꾸 더듬거리고 또 거게서 좀 아무 취미가 없고  하니까 그걸 도(道)로 받고, 문체로 받지 안하고서 웅변을 받을라고 자기  기분들. 옛 사람 기분들 좋구로 하는 게 아니고 이거 하나님의 진리를 배워  가지고 자기를 변화시킬라고, 거기서 참 심판을 받아서 다시 회개할라고 하는  그런 사람 같으면은, 또 실지로 자기가 실행해 살라고 하면은 좋지마는서도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까끌까끌한 것을 자꾸 먹일라 하니까 안 먹을라고  자꾸 지금 마다고 말이지, 자꾸 이라는데 거기다가 사이다 몇 병 먹여 놓으면은  그만 안 됩니다. 겨우 안 먹을라 하는 걸 이거 먹도록 영양 있는 걸 먹도록  이래 만들었는데 그라기 때문에 안 된다 그랬어.

 거게는 누가 가기로 했습니까? 아, ○○○목사가 좀, 좀 비슷한 동질이라.

그러니까 아마 거기 가서 좀 그라면 '아. 저 강사도 저 꼬라지구나. 이러니까  모두다 그만 그 꼴인가베' 이라다가 나중에는 좀 은혜 받으면 '아, 그거 뭐 다  그런갑다. 참 진리를 배워야 되겠다' 이래야 되겠다 해서 강사 보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뭐 시간이 많이 갔는데 결론은 내가 다 못하겠고 여게  본문에 대해서 내가 아침에 증거할라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들이 왜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없고 순조롭게 그렇게 목적지에 잘 가게  됐던가? 가게 된 그 이유는 둘 때문에 그랬습니다. 둘 때문에. 그들이 자꾸 배  젓고 자꾸 이라다가 보니까 이 둘이 다른 둘로 바꿔졌습니다. 처음에 둘로 있을  때에는, 둘로 있을.때에는 그만 풍랑도 없었고 술술 잘 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요 둘만 있으면 잘 가는데 요 둘이 딴걸로 바꿔지 면은 자연히  바람 일고 촨난 일고 방해 일고 또 자기 힘으로 암만 할라 해 봤자, 저거  힘으로 암만 골빠지게. 해 봤자 못 나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일은  절대 못 갑니다. 구원의 성허는 못 합니다. 몇십 년 믿어도 자기 건설 구원은  하나도 되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고 둘이 뭐인가? 고 둘은, 제자들이 그때에 어떤 사람 됐던가? 제자들에게는  '아 이거 예수 한 분이면 다 됐다. 이까짓 거 뭐 이거 저거 아무 것도 없다.

주님 한 분이면 다 됐다.' 왜? 그때. 자, 물로 포도주도 만들었지, 모든 병신들  다 낫았지, 삼십 팔 년 된 병자도 낫았지, 야이로의 딸도 낫았지.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죽어 상여 메고 나가다가 살아났지, 이거 뭐 오병이어로 또 오천  명이 먹었지 이러니까 경제 문제고 일호 문제 고 뭐 행정 문제고 문제가 없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아, 예수 한 분이면 됐다.' 그들이 그래 가지고서, 그때가 어느  때인고 하니 요 오늘 아침에 본 요 말씀이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먹고 난 바로 고 모임에서 헤이는 그때입니다. 이래 놓으니까  뭐 그들의, 제자들의 그 마음은 아무것도 없어. '예수 한 분이면 됐다. 주님 한  분이면 됐다. 주님 한 분이면 못 할 것 없다. 주님 한 분이면 뭐이든지 다  된다' 고것만 가득 찼습니다. '주님 한 분이면 됐다. 주님 한 분이면 됐다.'  주님 한 분이면 됐지. 창조주가. 창조주가 내것 됐으면. 창조주가 내 창조주  됐으니까 주님 한 분이면 이제 그분이 창조주이고, 그 분이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대주재시니까 그분 한 분 내것 됐으니까 그분의 것은 다 내것  됐지. 내것 됐으니까 문제가 뭐 있겠오? 또 그 분 한 분이 내것 됐으니까 엿새  동안에 창조한 이런 거 열흘 동안 창조하면 얼마나 창조하겠습니까? 없는 그런  것도 또 문제가 없다 그말이오. '예수님 한 분이면 다 됐다. 나는 예수님 한  분만 모시면 됐지 예수님 한분 외에 더 가질 것 없다. 더 가질 것 없다.' 요  사람이 되어지고 요 심령 되어 지는 게 문제입니다. 요게 문제요.

 그들이 어떻게 요런 사람이 돼겼던가? 요런 사람이 돼진 것은 그것은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예수님 말씀 들었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 또 성신의 감화를  받았지, 또 예수님이 볼 수 없는 자들에게 볼 수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내 보였다 말이오. 이런 이적 저런 표적 보이니까 그 표적을 보고 받아  낫지 안했습니까? 풍랑 잔잔하고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보고 '참으로 이제 생명의 구주로소이다.' 다 표적이 나타난  그걸 보고서 다 놀래고 감탄했지 예수님이 표적 하나도 없었으면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그 모든 사람은 다 그랬을 것입니,다. '에이, 궤변자. 무슨,  말이야, 말은 잘한다' 이랬지, 그들이 다 강퍅한 마음이 변화된 것은 다 표적  보고서 그때 긍정을 했더라 그 거요.

 이러니까, 표적이 중요합니다. 사도들이 일할 때도 그렇지 않숩니까? 사도  행전에도 보면은 그때 다 표적이 있었기 때문에 놀랬다 그거요. 지중해에서  멜리데 섬에 걸렸을 때도 그때 그 사람들이 '아이구 이거 죄인들이다.' 다  도망쳤었는데 독사가 하나 손가락 끝에, 그때는 그 지방 사람들은 독사만  물리면 다 죽는데 '저거 지금 죽는다' 해 가지고 멀리 피해 가지고 '저 죄인들  옆에 가까이 가면 큰일 난다.' 멀리 피해 가지고 보니까 이래 가지고 툴툴 털고  보니까 아무 일 없어요. 또 그대로 뭐 나무 안아 다 놓고 자꾸 이라니까 그만  그사람들이 보고 '아이구 저거는 사람이 아니다. 저거는 신이다' 이래 가지고  다시 찾아와 가지고 '우리 집에 지금 환자가 있는데 혹 고칠 수 있습니까?'  '데리고 오라' 데리고 와 가지고 척,그만 기도하니까 그만 당장 낫아져  버리거든. 이러니까 그때 그 섬에서 놀래서 되지 안했습니까?  이래서, 예수님의 말씀 듣고, 또 성신의 감화받고, 예수님의 표적 보고 이  셋으로 그 사람들이 그렇게 완전히 '예수 한 분이면 다이다. 더원할 거 없다.

예수님 한 분이면 뭐든지. 우리가질 거는 예수님 한 분만 가지면 된다' 그  사람이 됐더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자꾸 성경 읽으면 예수님을 어길 수 없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 한 분이면 된다는 사람 자꾸 돼집니다. 성경을 자꾸 읽어서 이 사람이  우리가 돼져야 되겠고, 또 우리가 자꾸 말씀을 묵상하고 자꾸 이라면은,  묵상하고 하나씩 둘씩 회개를 하면은 영감이 와 가지고 성신의 감화로 우리가  요런 사람이 차차 되지니까 '어쨌든지 예수님 한 분이면 더 외에 다른 것은  가질 것이 없다. 내가 가질 것은 예수님 한 분만 모시면 된다' 하는 요 사람이  된다면, 어떻게 됐든지 말이오. 요 사람이 됐을 때에 그분들은 갈릴리 바다를  순조롭게 갔던 것입니다. 그 뒤에 그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 아니고 변해지기도  했습니다. 고럴 때에 고럴 때에는 고 사람이 됐다는 고것을 여기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표적을 봐 가지고서. 우리가 신앙에는 체험이라는 것이든지 경험  이라는 것이, 경험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말씀대로 참 기도하고 나서  보니까 '이거는 도무지 이럴 수가 없는데? 이거는 기도한다고 되겠느냐?'  이랬는데 간곡히 기도할 때에 자기에게 알아집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에  '아, 이 기도는 하나님이 들었다. 틀림없이 이 기도는 들었다.' 들었다 싶은  것이 자기에게 주관으로 인정되는 것이 없읍디까? ' 아 아무래도 요번에 이  기도는 주님이 들으셨다' 싶은 거는 나중에 가 보면는 그대로 됐다 말이오.

그럴 때에 기도한 자기는 '아.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 듣기 전에 벌써  '들었을 것이다. 이거는 벌써 기도를 들으셨다. 보자.' 나아보니까 들은 표적이  나온다 그말이오. 표적이 나올 때에 그래 가지고 기도로. 또 자기가 무슨  말씀대로 이와 캐이 행할 때에 '말씀대로 어째 뭐 죽을 요량 하고 한번 해  보자. 어떤고 보자.' 해, 볼 때에뭣이 이루어질 '때에 '하 야, 주님이 과연  함께 계신다.'  언제 ○○○목사님이 설교할 때에. 뭐 6, 25때든가 언젠가 서상인가 어딘 가  올라가면서 '이제는 뭐 어렁다' 싶었는데. 거게는 모두. 그때는 금족령 이  내려서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하는 때인데 그때 가니까 뭘 가니까 뭐  초소를 몇 초소 지나 모두 다 똘에는 아무도 사람이 없으니까 신면총놔  죽였는데 그저 그래도 또 하나님이 같이 하신다 지키신다 문제 없다고서 가니까  한 초소를 또 무사히 통과, 무사히 통과. 고것도 자기 속에 있는 하나의  체험이라.

 우리가 말씀대로 하니 말씀대로 주님이 웅해 주시고 이루어 주신다 하는 고게  한 번 두 번 체험하는 이게 자꾸 있어져야, 이 표적을 자기가 봐야, 남의.

표적도 보지만 자기 표적을 봐야 우리에게 '예수님 한 분이면 된다, 그 외에 써  원할 것이 없다' 요 사람으로 자꾸 된다 말이오.

 요 사람이 되고 어쨌든지 요거는 세 가지로, 성신의 감화와 진리와 표적과 이  세 가지로만 사람이 되어지지,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도는 다 경험의 종교요  체험의 종교라. 실상의 종교라 하는 것이 다 자기네들이 경험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예수님 한 분이면 다이다 하는 요거 제자들에게 가득  찼고,  또 하나 가진 거 뭐이냐? '아 주님은 뭐 무슨 말씀이든지 하면 그대g다.

말씀대로 하면 된다.'  베드로가 이래 가지고, 그물을 깊은데 던져라 어짜라 하니까 국석스런 소 리  같았지마는서도 가서 던지고 보니까 고기가 그렇게 잡혔지. 이렇게 또  병신들에게 믿어라 할때 믿으니까 되지. 또 가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오라  씻고 오니까 돼졌지. 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 닌 것 가지고서 '떼줘라.' 여러 수천 명 앉혀 놓고서 '떼 전라.' 지금은  수천 명 하는 것이. 하도 문명이 돼 가지고서 이제 모든 게 축소가 돼서 지금은  뭐 멎천 몇 가지고 큰 무리로 안 알지만 그때로 몇천 명으로 말 하면 아마  놀래서 죽을 지경일 것입니다. 그렇츰 많은 무리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떼 주라 하는데 '이걸 몇 주라 한다?' 뭐 조그마한 것 주는데,  몌 주니까, 자꾸 몇 주니까 남고 남고 남고 자꾸 떼 줬다 말이오. '헤,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뭐 주님의 말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이게 그만  가득 찼다 말이오.

 이 둘이 가득 차서, 할일은 주님 시키는 대로 할 것뿐이다. 또 예수님 한  분이면 됐다 이러니까 갈릴리 바다는 순조롭게 갔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이 사람이 되어져야 되겠습니다. 이 사람이 되어 지는  이 외에는, 왜 그 사람이 됐다가 그들이 와 풍랑 만났는가? 거게서 자꾸  접촉하는 가운데에서 예수님 한 분 외에 저들에게 있어야 할 필요한 것이 하나  둘 생자지는 데에서 예수님 필요는 차차 적어졌습니다. 예수님 한 분 외에  자기가 가질 것이 '요것도 가져야 되겠다 저것도 필요하다'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 둘 생겨지는 데에서 예수님 필요는 자꾸. 자꾸 어두워지고 멀어지고  삭제됐더라 그 말이오. 또 예수님의 말씀에게 순종하는 고거 하나만 할 일인데  고거 외에 딴거. '요 방편도 써야 되겠다. 저방편도 써야 되겠다' 자꾸 이라다  보니까 자기녜들이 그 써야 될 방편. 써야 될 그 방편 이것이 하나 둘 생겨지는  가운데에서 이제 참 생명된 주의 명령과 주님은 그만 떠나가 버리니까 풍랑  일고 배가 가지 못했다 말이오.

 요것을 우리에게 요걸 보여줘서 요걸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고러한계시 한  토막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에게 순종하는 그 외에 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고게 들어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다 저질러서 환난 일고  대적하고 우리의 구원은 안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 두 가지.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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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 누가복음 16장 13절/ 1982. 6. 13.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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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증거를 마친 때에(순교)/ 마태복음 10장 40절-42절/ 1982. 6. 30. 수새벽 선지자 201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