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큰 능력있는 신앙생활

 

1985. 2. 3. 주일오후

 

본문 : 마태복음 14장 25장-33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 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오전에는 우리가 가질 것은 하나만 가지면 하고 또 움직일 것도 하나로만,  움직이면 되는 것을 공부 했습니다.

 주님 한 분만을 자기의 전부로 가지는 이것 외에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땅에 속한 것을 하나 하나를 가지기 시작하는 데에서 예수님과는 차차  멀어지고, 또 자기가 주님이 명하시는 대로 행하는 이 하나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일이 이런 거 저런 거 있다고 해서 하나 씩 둘 씩  모아 들이다가 보면 그것으로만 가득 차고 복잡해지고 예수님이 시키시는 그  일은 다 저버리고 또 사람이 바꾸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하고 필요한  예수님은 자기에게는 쓸데 없고, 하나만 하면 되겠다고 깨닫고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자들도 세상에 필요하고 요긴한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느껴서 하나 둘  주워 모우다 보면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그 일은 아주 어리석은 천치  바보가 하는 일같이 보여지고 또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하나의 무슨  체면술에 걸린 그런 병과 같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변해지는  것입니다.

 마귀가 오면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 해와에게 제일 해독이 되는 것은  선악과인데 마귀가 들어와서 그에게 유혹을 받고 보니까 그것은 하나님보다도  좋고 남편보다도 좋고 온 세상보다도 좋고 그렇게 좋아서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먹었던 것입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로울 만치  탐스럽기도 하기 때문에 먹었는데 막상 먹고 난 그 결과는 전체가 사망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귀신이 들어오면 이렇게 우리의 비판과 평가는 정반대로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가 거게서 깊이 깨닫고 굳게 잡지 안 하면 안 됩니다.

 이 제자들이 예수님 한 분으로서 저희들의 전부를 삼고 한 분 외에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주님 한 분이면 내게는 다다. 할 일은 주님이 명하시는 대로 고대로  복종할 것뿐이다. 이런 사람으로 완전히 영감화 되었을 때에 그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라고 할 때에 순조로웠고 아무런 어려움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계시해 주신 것은 갈릴리 바다와 같은 세상을 거쳐서 우리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서 이루어 가는 걸음에는 이 두 가지로만 순조롭게 평온하게  세상을 발 아래 밟고 갈 수가 있지 이 둘 외에는 다 구원의 길은 걷지 못사는  것인데, 사람은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다가 보면은 주님은 잊어 버리고  주님이 시키셨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기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또 노력하고 접하고 하는 고만 그것으로 바꾸어서 그것만 순전히  자기에게 전부 되어 있고 주님도 주님의 명령도 다 잊어 버리게 되는 것이  사람이요, 잊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환난이요 곤고요 비참이요 또  실패와 고통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전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라고  달라들던 그 제자들과 같은 그러한 영감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가 노력하자 하는  것을 오전에 증거했습니다. 그 제자들이 그런 사람 된 것은 첫째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그 말씀과 함께 성령의 감화를 받았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모든 이적들을 봤던 것입니다. 이적들을 봤는고로 그들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그렇게 고백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 믿는 신앙들도 너무 이 표적이라 하는 이적이라 하는 것을 무시하는  데에서 한국 교회는 절단났고, 또 이적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이적을 팔고 그걸  가지고서 돈벌이를 삼는 데에서 한국 교회는 또 침체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표적이라는 이것을 자기가 보고 듣고 실제로 체험하고 경험하는  데에서 우리는 믿음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에 요단강을 건너면서 매 지파마다 큰 돌 한 개씩을 운반해서 강 건너 언덕에  쌓으라고 했습니다. 그 쌓아 놓고 여리고 성을 돌고 와서는 또 그 열두 돌을  포개 놓은 것을 보고 또 한 바퀴돌고 와서는 포개 놓은 돌을 봤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의 힘이 유지가 되고 그 유지됨을 인해서 여리고성을  점령하게 됐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이 하시는 그 역사를 그만 잊어 버리면 안 됩니다. 자기가  기도해서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그 기적에 이르든지, 또 자기가  무슨 사건의 사건 해결로 혹은 질병으로 또 어려운 난제 모든 대적들의 그 모든  물리침이라든지,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으신 거, 하나님이 자기가 믿는 대로  도와 주신 것.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대로 할 때에 이루어진 거 그런 것을  우리가 잊어 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에 보면은 어떤 교파에서는 그 무슨 이적이나 기사나  있는 것을 말을 하면 무슨 육덩이같이 생각하고 '그것은 모두 믿음이 없어  그렇다, 그 뭐 신령한 것이 귀하지 그것이 뭣 이 귀하겠느냐?' 그렇게 무시해  버리고. 또 어떤 교파에서는 그것을 한 두 가지만 있어도 책에 다 기록해  가지고 그것을 돌리면서 회람을 시키면서 이런 일이 있었다 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그 일이라면 거기에 같이 나가는 교인들이라면 그 사실을 하나도  모르지 않도록 이렇게 다 널리 알려서 하나님께서 과연 이런 역사를 하셨구나,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인식을 시키는 그런 교파들도  있습니다. 그래 그런 교파들이 대개는 요새 다 부흥을 받고 있습니다.

 부흥을 받고 있는 그런 교회들이 그만 그리 치우쳐 가지고서 그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은 그 일을 적당하게 필요한 때만 해 주시는데 아무  데나따나 자기 욕심대로 그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을 하고 하다가 안 되면  무리도 가고 억지의 인간 방편도 쓰고 이래 가지고 다 기도원에서 사람이 뭐  구타로서 죽었다. 또 너무 모든 일을 강행함으로 죽었다 이런 아주 폐단된 그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기도원에서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지금 불교 그 절은  어디서든지 자꾸 허가가 잘 돼서 섭니다. 과거 사이비 종교를었앤다는 그  ○○○씨가 그 일을 시작했는데 그래 가지고 많은 기도실을 없앴고 또 이 모든  암자와 그런 것들을 많이 없앴습니다. 없앴는데 암자를 없앤 것은 다 큰 절들이  됐습니다. 기도원을 없앤 것은 그 뒤에 서지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주의자들 돈 많고 권세 많고 지혜 많아서 세상 정치를  등어리에다가 업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은 그런 기도원에 가 가지고 하루 밤도  지내기가 괴롭고 항상 비단 요 이부자리에 누워야 하기 때문에 거게 기도실에  갔다 오는 사람들이 이러니 저러니 말하면 그 골치 아픈데 잘됐다 하고서 또  거게서 그 혹 나쁜 거 그런 거 한 두 가지를 보고서 기도원은 없애야 된다.

이래서 모두 요새 한국 교회는 기도실들을 없애서 기도할 장소가 없고. 이래도  그 세상 정권과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기도실 짓는 것을 방해를 하지  기도실을 짓자는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 안하기 때문에 점점 불교는 성해지고  기독교는 쇠퇴해 갑니다.

 기독교는 암만해도 좀 매를 맞아야 하겠습니다. 그저 어떻게 하든지 기독교에  자기 교파가 몇만 되면 이것을 가지고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상품처럼 팔아  가지고 돈을 벌라고 생각을 하고, 또 얼마가 숫자가 되면 이것을 종다수  가결이니 다수라 권위를 팔아 가지고서 세상에 자기의 무슨 사욕을 달성할라고  하는 이런 것들만 지금 노려서 자꾸 하고 있기 때문에 암만 봐야 이거는  하나님이 노여워 할 일이지 칭찬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리 저리  치우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게서 예수님 당시도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능력 있는 설교를 했지마는서도  그 설교한데 대해서는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게 강력 한 반대만  받아서 어렵게만 됐지 다른 사람들이 믿어 주지를 안 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살아났다 또 오병,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 또 수많은 환자들이 살아났다, 고침을 받았다, 또 풍랑이 잔잔해 졌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나타날 때마다과 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또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이래 가지고 그 전한  말씀이 그들에게 효험 있게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것이 아주  필요한 줄 압니다.

 저도 그전에는 이것을 무시하고 죄악시 했습니다. 제가 처음에 집사로 있을  때에 그때 그 사경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사경회 강사로 많이 다녔었는데 그때  참여한 사람이 여게 많이 있습니다. 뭐 온갖 병자들이 다 낫고 이러니까 집회를  하면 고만 병자들만 전부 앞에 와서 다 차지해 앉고 장소가 없으니까 건강한  사람들은 저 서서 참석을 하고 이라니까 이것이 순전히 병 낫는 것이지 사람의  그 심령을 구원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 해서 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것을  폐지했습니다.

 가조 교회에 가가 가지고 집회할 때에 그때에 그런 형편이어서 그날 밤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이제는 병 낫는 이란 것은 안수 기도라든지 거게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날 밤에 출발했습니다. 그 날  밤에 설교를 할라 하니까 암만 설교할라 해도 설교가 안 돼서 뭣 때문 인가  찾다가. 찾다가 나중에 그 병 낫는 그거 위주가 된 그것이 하나님 앞에  거리꼈던가 저는 병 낫기 위주로 하지는 안했는 데도 그만 나중에 보니까 그런  집회가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만일 주님이 이것을 원치  안하시면 내가 오늘부터 이 일을 안 하기로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나  안수하는 것이나 하지 안할 터이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그날 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서 설교하게 하시고 내가 이렇게 작정해도 설교를 주시지  안하시면 이거는 공연히 내 주관 생각이요 그런 것은 다 취소 하겠습니다.'  하고서 그래 온 교인들이 한 오 분 동안 기도할 때에 그 강단에서 비좁어서 이  강단에 사람하나 섰는 밖으로는 꽉 다 모여서 빈틈 없이 섰었는데 그날 밤에 그  자리에서 같이 강단 위에 비좁어서 올라와 가지고 기도한 사람, 내가 아는 대로  여게도 두 사람 있습니다. ○○○집사님이 그때에 그 강단 위에 올라와서  비좁아서 거기서 기도했고 ○○○집사님도 거게서 기도했고 또 그때  ○○○목사님도 거게 올라와 거게 와서 기도 했고 모두 그랬었습니다.

 그라다가 제가 신학교 들어가니까 모두 다 그 이적을 말한 지금은 이적이  없다, 지금 이적을 말하는 것은 전부 다 마귀 놀음이다 해 가지고 그렇게  정죄하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그때 저는 아직까지 믿음이 처음 믿을 때니까  그런 걸 잘 모르고 나도 그런 줄 알고 그렇게 동감으로 그렇게 지나  갔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다시 병 낫는다는 그런 것은 말하지도 싫고 또  제가 그러니까 저와 관련된 신앙의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뭐 병  낫는다 그런 거는 큰 수치같이 여겨서 지금도 그 관념들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서부 교회서는 참 다른 데서 그 하나만 해도 큰 광고가 될  만한 그런 병자들이 많이 낫았지마는서도 지난번 대구 집회서 백 오십 명이나  낫았고 이번에는 백 팔십 명인가 거창 집회에서는 나았는데 여게다가  권사님들도 다 나았고 그런 분들 많이 나았습니다. 이래도 부끄러워서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다 그럴 정도로 그렇게 묻어뒀다가 저번에 교역자회 때에 아무래도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데에는 이 하나님의 말씀도 필요하고 영감도  필요하고 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기적도 필요 하고 필요하다 이랬는데 요새  깨달은 것으로서 늘 가르치기는 했지마는서도 하나님의 징계도 필요하다.

이래서 이 네 가지가 다 필요하다. 말씀도 필요하고 영감도 필요하고 모든  기적도 필요하고 하나님이 징계를 때려서 그저 징계를 맞아서 그만 개갈개갈  거리면서 그래야 회개하지 안 되니까 하나님의 징계도 필요하다 이렇게  느꼈습니다.

 느껴서 제가 좀 전 여기 강단에 파서 기도하면서도 이거 그런데파 같이  여게서도 누구를 월급을 줘서라도 예수 믿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짓말로  자꾸 하면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기 때문에 그런 짓은 하지 말고 꼭 하나님의  은혜로 낫은 것이 있으면 그 낫은 것을 낱낱이 기록해 가지고 누구든지 보고  줄줄 읽으면 다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좀 그 문장이 괜찮은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사실을 사실대로 만들어서 교인들이 이것도 보고 하나님이 과연  이런 거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예수교에 과연 인간이 아닌 객관의  그 역사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려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제가 좀전에  강단에서 엎드려서 기도할 때에 제가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앞으로 될란지  안 될란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될 것입니다.

 그러고 또 예수님 앞에 따라다니면서 얼마동안 따라다니니까 말씀을 자꾸  들으니 이 사람들이 됐습니다. 이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라고 출발 할 때에  그때에 제자들은 순전히 그 둘만 가진 사람들이 됐습니다. 주님 한 분이면  다다. 뭐 전쟁도 필요 없고 무기도 될요 없고 돈도 필요 없고 양식도 필요 없고  의학도 필요 없고 의사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다. 주님 한 분이면 됐다.

주님 한 분으로서 저희들의 필요한 전부가 되고도 무한히 남을 수 있다는  그것을 확실히 믿는 그 사람들이 됐고, 또 그게 공연히 헛되이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는 그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도 말씀하시기를 '창조의 근본되신  이가 찾아왔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없는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  창조주가 라오디게아 교회에 찾아 왔으니 너희들에게 내가 할려면 못 할 것이  없다' 하는 것을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창조의 근본되신 이가 가라사대  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이렇게 믿는 사람. 할 일은 뭐 이것 저것 복잡한 일 많지.마는서도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밥 먹으라면 밥 먹고 취직하라면 취직하고 직장에서  죽도록 충성하라면 죽도록 충성하고 아무리 충성하다가도 오늘이라도 손 딱  떼고 일하지 말라면 안 하고 어쨌든지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그 외에는 할  일이 없다 하는 요 사람드로 그들이 되어졌으니 그때에 갈릴리 바다는 아무런  풍랑 없이 순조롭게 자기의 목적지를 진행했지마는. 가다가 고만 그 배 타고  노력하는 가운데에서 옛사람이 나하서 옛날 생각 나왔고 순전히 인간과 인간  방편과 세상 방편으로 완전히 주님과 주님에게 복종하는 이 두 가지는  바꾸어져서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도 없어져 버렸고 세상으로만 가득 차게  되었고 그랬을 때에 그들이 갈라는 걸음은 하나도 가지를 못했습니다. 조금도  못 갔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가게 됐지 그  전에는 가지 못 했습니다.

 이런고로, 이것을 생각해서 그 제자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요. 우리와 같은  다 마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요. 원죄와 본죄가 있는 사람들인데 그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 그 두 가지만을 가진 그런 성령의 사람들이 그 때에  됐던가. 일시적이나마 그라고 난 다음에 변해졌습니다. 낙심하고 뭐 했지마는  그때 그런 사람이 됐던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서 어쨌든지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려는 여기에 우리가 주력을 해야 되겠다. 주력을 해서 이런  사람이 돼야만 우리는 이 참 죄악과 악령과 미움과 모든 냉정이 가득 찬 이  세상을 무난히 통과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수많은 미혹, 사이비한 거짓말, 가득 찬 세상에서 구원을 바로 이루어 나가지  못하겠다 하는 그런 것을 우리가 여게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토막의 한 토막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이 우연한 일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첫째는 주님의 말씀을 자꾸 듣는 데서  됐으니까 성경을 읽는 것이 곧 성경을 듣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목사님이  그 사모님이 무슨 말을 연락이 왔기 때문에그러면 나한테 한번 내려오라 하라.

그래 내려 오라 하라고 해서 내려오기로 하고 했었는데 제가 전화를 하니까  그때 내가 마치 좀 시간을 늦게다가 전화를 해서 안 계신다고 이래요.

○○목사님 안 계신다고 이래요. 안 계시는데 '조금 뭐 하러 갔느냐?' 하니까  '성경 공부 하러 갔습니다.' 이래요. '성경 공부하러 갔으면 어디로 성경  공부하러 갔느냐?' 그 예배당으로 갔다고서. '그러면 예배당에 성경을 배우러  갔나 가르치러 갔나?' 성경 공부를 시키러 갔다 이래요. '성경 공부를 시키러  갔으면 어떤 사람들에게 공부를 시키러 갔느냐?' '우리 교인들에게 공부 시키러  갔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내가 그 사모님에게 그래 말하기를 '그러면 됐다.

이제, 마음을 엉뚱한 데다가 두니까 교회도 안 되고 모든 게 안 되는데 성경을  가르치기로 시작해서 성경을 자꾸 연구하고 연구 하면은 이제는 교회도 생각  밖에 자꾸 부흥이 될 것이고 사람은 변화될 터이니까 내가 내려오라  했지마는서도 내려올 것 없다, 인제. 내려올 필요 없다. 내려을 것 없다.

고것만 계속하라 해라.' 하고서 내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뭐 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만 그거 하면 됩니다.

 이러니까 어짜든지 우리가 성경을 읽읍시다. 예레미야서. 예레미야 애 가서  에스겔서, 요한계시록 이렇게 읽으라고 이랬는데 어짜든지 이 성경을 많이 읽어  보십시오. 성경을, 그 중에도 이 네 종류의 성경을 읽게 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알게되고. 또 하나님이 두렵기도 하고 참  의지할 만도 하고, 또 그 분만이 상대할 분이지 그 외에는 상대할 무엇도  없다는 것도 차차 알게 될 것입니다. 이래서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야 되겠습니다.

 새벽 기도 나오도록 하십시오. 뭐 자기는 나는 이런 요긴한 일 중요한 일 이런  사정 때문에 이런 큰 일 때문에 뭣 때문에 하고서 새벽 기도못 나 오는 것은  분명히 어떤 큰 일이라도 자기 일은 아닙니다. 자기 일 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일이 자기 일인데, 자기 일이라면 그날 첫시간에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일하고 신앙 생활하고 신앙 생활로 이것 저것 할 일이지 신앙 생활을 버리고 할  일은 다 마귀가 주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신앙 지키고는 할 수 없고 신앙을 양보 해야 할 수  있다는 그런 일은 마귀가 주는 일이지 하나님이 주는 일은 절대 아닙니다. 고  결과가 행복은 절대 없습니다. 절대를 붙입니다. 절대를. 인간이 알고 말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이면 하나님 앞에 다 심판을 받을 말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큰 심판 받습니다. 뭐 일시 여러분들예게 뭐 위협을 주고 또 무슨  인기를 끌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그런 말을 할 줄 압니까? 안 합니다.

안 하면 심판받지 칭찬 받을 줄 알고 내가 합니다.

 그런고로. 새벽 기도에 열심히 나오도록 하고 빠지지 말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와 새벽 기도 안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무슨 일이 바빠서 안 나옵니까! 바쁜  그 일은 다 자기 망치는 일이요 자기가 죄악이 가득 찼기 때문에 그걸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끊고 나와야 됩니다. 차차 차차 정리해서 대번에는 안 된다  할지라도 기간을 두고 빨리 빨리 정리해 가지고서 새벽 기도할라면 새벽  기도하고, 기도 할려면 기도하고 성경볼려면 성경 보고, 전도 할라면 전도하고  신앙의 자유가 있고 양심의 자유가 있어야 되지 자유 없는 그런 사람은 죽은  사람 아닙니까?

 그 새벽 기도 나오도록 하고, 또 자기는 경험의 경험의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말씀대로 살면 고대로 되는 걸 자기가 볼 거라 말이오. 다른 사람은 못 봐도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마구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 말씀대로 하면  된다는 것 이거 뭐 전체가 경험할 것이오 전체가 시험할 것이요 전체가  기적입니다. 내가 말씀대로 순종 안 했기 때문에 순종하는 자에게 이루어지는  그 역사가 이루어지니까 구경 못 하는 것이지 말씀대로 하면은 조그만한 것  하고 난 다음에 조그만한 것 주고 큰 것하면 큰 것 주고 전부가 이적이요  기사고 다 그런 것이니까 봐서 자꾸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하고 이렇게 했으니까 암만 천인 만인이 의심하라 할지라도 내가  봤는데, 내가 겪었는데, 내가 체험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 말 듣고 혼들릴  수가 있겠습니까? 혼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가치 있는 이런 일에다가 주력을 합시다. 공연히  소용없는 그런 일에 뭐 사람들 보고서 사치나 하고 뭐 아무 집에는 가구가 뭐  이렇다 저렇다. 또 어떻다 저렇다. 남여 미인이니 미남이니, 또 어데 영화가 뭐  있다 뭐 있나 그 까짓 거 암만 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암만 좋아 봤자  소용없어. 창세기 5장에 보십시오. 또 6장에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미인 찾아서 날뛰다가 홍수 속에 다 매장된  것이 그것이 창세기 6장 이하에 기륵되어 있지 않습니까? 미인이면 뭣하며  미남이면. 뭐 할겁니까? 그까짓 거 뭐 세상 실력이 있으면 뭣하며 박력이  있으면 뭣하며 건강하면 뭣 할 겁니까? 하나님 없는 거는 다 죽은 것이요 진리  없는 거는 다 죽은 행위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자기가 자꾸 신앙 생활하면 하나씩 체험이습니다.'아.

말씀대로 하니까 참 그렇구나' 이게 자꾸 새여져야 됩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다고 자기가 받은 증거가 돼져야 그게 힘이 되는 것이지 그거  없이 무슨 이런 거 항상 속힌 것 같고 끌려가는 것 같고 이거는 이야기 하는 것  같고 이거는 허무한 일 하는 것 같이 그리 되니까 그 사람이 무슨 신앙이  있겠습니까?  이래서, 우리가 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때 나사로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난 것은 그 후입니다. 그 후이지마는서도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것이라든지 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것이라든지 삼십 팔 년 병자가  고친 것이라든지 오병 이어로 오천 명이 먹은 것이라든지 또 반신 불수가  살아난 것이라든지 문둥병이 깨끗해진 것이라든지 뭐 물이 포도주 된  것이라든지 그런 뭐 이적과 기사들을 많이 따르며 봤습니다. 또 고기잡은 그런  것이라든지, 이래서 아, 이 주님의 말씀에는 모든 만물이 다 복종 하는구나.

이거 바다도 복종하고 이거 누구기에 바다가 다 풍랑이 다 복종 하느냐, 바다가  복종하느냐? 이것도 복종 저것도 복종 모든 것이 다 복종 한다는 것을 그것을  봤기 때문에 이분 한 분이면 됐다. 뭐 다른 거 못할거 없이 예수님 한 분만 내  주님이 됐으면 됐다.

 이러니까 전부 한 분에게만 떨어지지 안할라고 주님 한 분만이 자기 주님을  삼을라고 이렇게 전심 전력을 거게 다 기울였고, 할 일은 그저 주님이 어떤  일이든지 뭐 베드로 보니까 물 위로 걸어오라 하니까 그 높은데 푹 빠지면 안  죽습니까? 이런데 푹 내린다 말이오. 주님이 명하는 건 뭐 이든지고대로  복종하면 다 성공이요 생명이요 행복이다 하는 것을 그렇게 요 느끼는 요런  사람들이 되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어져서 그랬을 때에 갈릴리  바다를 갈라 하니까 아주 순조롭게 그렇게 항해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한 토막  보이는 것이 우리에게 요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보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어짜든지 우리는 지금 다른 그 더러운, 더러운 습관 더러운 재미 뭐  테레비 그것도 보면 얼마든지 볼만하지만 암만 봐 봤자 허무하지 거게 살 것  하나도 안 나옵니다. 소용 있는 것 하나도 안 나오요. 또 이런 뭐 영화관에 가  봤자 전부 만들어 놓은 거짓말. 만들어 놓은 거짓말 그거 암만 봤자 우리의  미혹만 되는 것이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땅 위에서 어떤 일을 해도  여러분들이 해 보십시오. 돈벌이를 하든지 뭐이든지 해 보십시오. 해 보면 하고  난 다음에 시원하게 잘 됐다 하는 그 일이 별로 이 없고 혹 있는 것도 몇 해  지나가면 소용없다. 이 일은 잘 됐다 싶은 것도 마지막에 죽을 병이 들어  놓으면 모두가 다 헛되다 헛되다 예수 못 믿은 것만 후회됩니다. 어떤 것은  무슨 재미를 누리고 구경을 했든지 하고 나면 딱하고 돌아서는데 '에히 시간  아깝네. 시간 허비했네. 오늘 헛일 했네. 오늘은 그만 많이 손해 갔네.' 세상  것은 다 그런 것입니다. 즉시 후회하는 거 조금 있다가 후회되는 거. 심령이  어두운 자는 마지막에 죽을 때에 후회되는 것이지 다 좋은 거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쓸데 없는 더러운 거 우리가 눈을 안 뜰거는 안 떠야 됩니다.

 아담 해와가 눈이 밝아짐으로 눈이 밝아졌으니까 좋은 줄 압니까? 안 볼 거  보는 그게 탈입니다. 어떤 사람 보면은 저 사람은 그것만 몰랐으면은 되겠는데  모든 게 좋은 사람인데 안 볼 거 하나 보고. 안 가질 취미 하나 가졌고 안 가질  욕심 하나 가겼고 뭐이든지 뭐 취미 하나 욕심 하나 또 몰라도 좋은데 또 그 뭐  아는 거 하나 이것 때문에 일생을 망치는 사람이 얼마나 않습니까? 이래 간추려  보면은 뭐 그게 다 빠져 버리고 남아 있는 사람 별로이 없습니다. 그런 거 다  버리고 어떻게 하든지 성경 열심히 읽고, 또 새벽 기도 나와 성경 말씀 또  열심히 듣고. 또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자기가 아, 아멘. 과연 과연 경험과  체험을 자꾸 쌓아요. 말씀대로 살면 압니다.

 ○○○ 권사님도 그 간 경화병이 들어서 경화증이 들어서 그때 뭐 희망  없습니다. 없는데 우리 ○장로님이 다니며 치료를 해 가지고서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아래도 실은 요 배 타고 가는 제자들이 고거 하나 보니까 하나님께  돌릴 영광 요리 딱 들려 가지고서 하나님이 진노해서 낭파당하는 거와 같이  되기 쉽다 그말이오. 이랬는데, 한 달 지나고 난 다음에 그 사진을 찍어  가지고서 그래도 한국에 간에 대해서는 권위자라는 ○○○ 뭐 박사가? ○○○  박사한테 가서 보이니까 '이거 사진이 잘 못 됐습니다. 어느 기계에 갔다  왔습니까? 어느 기계에 가서 사진 찍었습니까? 아, 그 기계가 오래돼서  노후해서 이거 이래 나올 리가 없습니다. 한 달 안 됐는데 이거는 암만 무슨,  이제까지 의학적으로 아무래도 이런 일이 없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적어도 한  삼사 개월 돼야 이만한 정도로 되어지는 것이지 한 달 동안에 이렇게 된다는 거  한 달 동안에 아무 것도 없이 완전히 백 프로 낫아 버렸으니까 이럴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거는 기계가 잘못돼서 사진이 잘못됐습니다. 그라니까 새로 가  찍으십시오. 새 기계가 찍어 보니까 내나 그래. 그 뒤에 다 낫고 뭐 별표 안나.

그 박사가 말하기를 '이거는 참 내가 이제까지 간을 취급했지만 이런 소리는  듣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한 일입니다. 이거 처음 본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래도 기적이라 하는데. 나은 기적을 말하는 데는 자기 이름을 쓰지 안 해.

내가 야단을 쳤어. '하나님이 낫운 것 아니냐?' 지금은 하나님이 낫았다 해도  또 그 나았다 하면 지금 이 말하는 것도 '아이구 부끄러워라. 우리 아들  ○○이도 있는데, ○○ 선생도 있는데, 우러 어머니가 간 경화병 들었다가서 이  하나님의 이적으로 낫았단다. 아이구 부끄러라' 부끄러워 한다 그말이오.

하나님이 하신 일 뭘 부끄러운가? 이러니까 이런 사람 들이니까 나아도 예사라.

돈을 들여 가지고 나았으면 그거는 평생 잊어 버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낫운  지는 그만 그거는 그만 예사입니다. 그 사람은 그래요.

 공기는 하나님이 공으로 줘서 먹는 것인데 이 공기 이게 밥만 못 합니까? 제일  중요한 게 공기입니다. 이래도 그거는 공짜배기로 먹으니까 거게 대해 감사한  마음이나 필요성이나 뭐 귀중성이나 이런 거 하나도 느끼지 안하는 것처럼  인간은 부패해서 그런 것입니다. 도무지 정평 정가를 하지 못해요.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씩 신앙을 지켜 가지고 '보자. 하나님께 기도해 보자.

되는가?' 여러분들이 기도해 가지고 되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기도 해  가지고 되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전심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순종 생활하는  사람은 전부 기적입니다. 아, 이것도 '아. 참 하나님 감사 합니다.' 자기 한  감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한 감이, 자기가 이랬는데 이리  됐으니까 하나님의 기적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저 되는  대로 하나님께서 끌어다 붙여 가지고 저거 하나님의 은혜라 기적이라 뭐 저  소리 한다고서' 이라지만 본인은 안다 그말이오 다른 사람이 뮈라 하든지  본인이 겪은 그 경험과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이래 가지고서 예수 한 분으로서 전부를 삼고 그 분이 하라는 명령 복종 하는  거 이 외에는 할 일이 없다는 요것을 깊이 느끼고 굳게 잡는 이 사람이 돼야  되겠는데 이 일을 빨리 빨리해야 앞으로 공산주의 앞에서도 독침 앞에서도 뭐이  올란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기 전에 그런 환난이 일어납니다.

환난이 일어나 가지고 다 이 신앙을 배반치 안함으로 전부이 목 베임을 당한다  했오. 신앙을 배반치 안한 사람은 목 베임 당하고 목 베임 당해 가지고 다  부활해서 다 승천하고, 그때에 죽기를 두려움으로 피하는 자들은 나중에 가서  구원을 얻지마는서도 비참한 고생으로 아주 멧돌에 갈리 듯이 갈려 가지고  고생만 하고 뭐 희망도 없는 가치도 없는 일에 고생만 하고서 그렇게 만다는  것을 요한 계시 20장에 보면은 내려 보면은 20장 4절 이하에 있습니다. 가 읽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없는가?  이러니까 어짜든지 우리는 앞으로 지금 어려운 일이 오는데 그 일 오기 전에  주님 한 분으로서 내 전부를 삼고 그 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는 동하고 정하는  그 분에 따라서 동하고 정하는 그 분으로 인해서 움직이는 요것 둘만이 하는  요것을 확실히 누구 말을 듣고 따라 가는 거 아니라 자기가 경험했고 체험했고  해 봤고. 또 자기에게 영감으로 믿어지고 요런 사람이 돼 가지고 있으면은  주님이 구름타고 언제 오시든지 뭐 어떤 환난이 오든지 뭐 사회적인 환난,  세상적인 환난, 국가적인 환난 뭐이 오든지 독침이 오든지 뭐이 오든지  상관없습니다. 상관없이 언제든지 평안하고 즐겁게 사자 구덩이에 집어 넣는  일이 왔는데 다니엘은 그 소식 듣고서 좋아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했습니다. 왜? 그 온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있지 해 되는 것이 없고 그때  하나님의 큰 권능이 나타날 터이니까 기쁘고 즐거우니까 누가 보배 보고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보배 보고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  환난이 자기에게는 큰 보배의 결과를 맺을 것이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빨리 돼야 되겠습니다. 빨리 돼야  되겠고,

 {{}}오후에 하나만 더 말하겠습니다. 요 제자들이 이렇게 주님과 주님의 말씀  버리고 난 다음에 풍랑이 이니까 그들이 두려워서 아, 주님이 오시는 것 보고  유령이라고 그만 비명 소리에 고함을 질렀습니다. 고함을 지르니까 주님이  내비두면 그만 기절해서 뭐 정신이 돌든지 사람들이 그만 미쳐지든지. 원첨  되게 놀래 놓으면 정신이 돌아서 미쳐지는 거 아닙니까? 이럴 터이니까 주님이  '내로라 두려워 하지 말아라' 빨리 '내로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말씀한 것을  봐서 그들이 얼마나 다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급했는데, 그렇게 아주 참 큰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 다급한 일을  당했을 때에 주님이 내로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는 주의 음성을 딱 듣고  나니까 고만 그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의 마음이 훈훈하게 그만 그 모든 두려움의  어려움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거는 주관적 평안입니다. 그 제자들 마음  속에 평안을 받았다 말이오. 마음 속에. 주관적 평안은 받았지마는 여전 배  밖에는 풍랑이 일고 배는 막 이렇게 그 풍랑에서 지금이라도 엎어질라고 이라고  있습니다. 이라고 있지마는서도 주의 음성 듣고 나니까 그 제자들의 마음이  평안했어.

 그 평안한 것을 조작배기 해석 아닌가? 뭐 평안한 거 아는가? 평안한 것이  분명한 것이 그 듣고 난 다음에는 그렇지 베드로도 같이 놀래고 아주 참 놀래서  기절할 만치 놀래던 사람이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라고 그 소리 하니까 물  위에 척 내려서는 걸 봐서 그들이 마음이 얼마나 평안으로 변화됐다는 것은  그게 확실하지 그게 억지 해석이 아닙니다. 아무나따나 성경을 해석하면은  정죄받고 심판받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나니까 그들에게 평안이 왔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 개인의 뭐. 일이든지 단체 일이든지 교회 일이든지  무엇이든지 있으면 그만 사람 거머쥐고 이 사람 만나 가지고 이 말 하고 저  사람 만나 가지고 저 말하고 자꾸 이래할라 하면은 일만 저질러지고 복잡하게만  해지지 아무 효력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 제가 존경하는 그 신앙 선배 중에  한 사람인 한 상동 목사님이 언제 그런 말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교회 얘기를 할라니까 '교회의 어려움이 있거든 사람하고 얘기하지 말고  그만 주님 앞에 가서 주님에게 가서 의논을 하십시오. 사람하고 의논 해 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주님하고 가서 의논을 하십시오.' 하는 그런 소리를 제가  한번 들었는데 항상 기억되고서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런 일이 있을 때에는 여게는 주님의 그 말소리를  듣고 고만 그 사람들이 주관적 평안을 가지고 주관적 그 번민 고통이 다  없어졌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이 뭐입니까? 주님의 소리가  뭐입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이 내나 주님의 음성 아닙니까? 이 신구약 성경은  문서뿐 아닙니다. 이 문서로 기록한 이 성구 안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신  성령이 이 안에 내재하셔 가지고서 이 성경 안에 영감이 내재해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내재적 영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내재적 영감이라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성경 안에는 성령이 내 재하셔 가지고서  우리에게 감화 역사를 하고 계신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성경을 보고서 깨달아  가지고 증거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마 정통, 신학자라고 하면은 성경 안에  내재적, 성경 안에 영감이 내재해 계신다 하는 것은 다 그렇게 다 공통으로 다  믿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런 일이 있거든 그만 성경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하는 이거  외에는 자기 심령을 평안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자기의  잘못으로든지 남의 잘못으로든지 어떤 문제로서든지 우리의 심령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때에는 고통스러울 때에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  외에 다른 방편이 없는 것을 여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때에는 그만 어디 조용한 자리에 가 가지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을 자꾸 읽으면 성경을 읽고 또 성경을 묵상하고. 성경  읽고 성경 묵상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친 데가 있으면 가서 얼른  말씀을 가르친데. 가서 배우고 자꾸 이렇게 하면 차차 차차 그라는 가운데에서  우리 이 마음이 가라 앉습니다. 우리 심령의 이 모든 번민 고통스러운 이 일이  가라 앉습니다. 해결이 됩니다. 몸 밖에 있는 그 사건은 실지로 해결이 안 되고  있을지라도 우리 심령은 평강을 가지게 됩니다. 이 심령은 평안을 얻게 됩니다.

심령이 평안하게 되면 벌써 우리 심령이 안정이 되고 우리 심령이 이런 저런  모든 못쓸 것에게 충격이 돼가지고서 이 심령이 정상적이 아닌 이런 그  변질적인 심령이 돼 가지고서 공연히 놀래고 공연히 부애 나오고 공연히 밉고  공연히 원수되고 공연히 분하고 공연히 욕심내고 이런 어떤 것이 이 성경  말씀을 보면은 차차 차차 정상화 되어집니다. 정상화 되어지면 우 심령이  온유해지고 그 모든 쓸데 없는 그런 잘못된 그 충격된 그런 것들이 다 가라  앉아서 안정된 이 심령이 돼서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 안에 벌써 그 심령이 평안해지면 깨끗함이 되니까 성령이 내  가운데에 마음 가운데에 오시고 이라면 우리 마음에 모든 것이 다 희망으로  변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읽고 자꾸 이래서 성경으로 말미암아 주관적인  불안이 해결이 돼지면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그만 모든 절망이 다 없어집니다.

절망이 다 없어지고 낙망이 다 없어지고 원망이 다 없어지고 불평이 없어지고  다 시비가 없어지고 모든 시기도 없어지고 미움도 없어지고 모두 다 분함도  없어지고 다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고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왜? 큰 걸  만나니까. 큰 걸 만나니까 작은 것들이 문제가 없다 그 말이오. 이렇게 해서 내  심령안에 평안함이 오지.

 그랬는데, 그래도 자기가 타고 있는 배 밖에는 풍랑은 그대로 일고 있습니다.

이는데 그 풍랑은 언제 그 풍랑이 조용하게 다 잔잔하게 되어졌더냐? 잔잔하게  된 것은 주님이 배 안에 들어 오니까 그만 그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할 때에 성경 말씀을 가지고서 자꾸 성경 말씀만이.

성경 말씀을 듣든지 성경을 읽든지 성경 말씀만이 우리의 심령을 정리 정돈해서  안정해질 수가 있다, 평안할 수가 있다 하는 요것을 꼭 잡아야 됩니다. 이 외에  다른 방편이 없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이제 주님이 오시니까 주님이  오시니까 자기 몸 밖에 있는 객관적인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돼서 정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해결 짓지 않하는데 내 몸 밖에 어려운 그런 일들이 다 정리가  되어졌을까? 여게 보이기를 풍랑이 이는데 제자들이 뭐라고 해서 풍랑이 잔잔해  졌습니까? 예수님 오시니까 그만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러면 풍랑을  잔잔하라고 호령을 쳤습니까? 아니오. 예수님이 오시니까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킵니까? 우리가 성경 말씀에서 자기 주관적  모든 안정과 평강을 얻고 그라고 난 다음에 주님이 자기에게 오시면 됩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오셔서 주님 만나면 됩니다. 주님이 오시면 주님이 먼 데  계십니까? 주님은 우리 현실에는 언제든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우리  현실에는 우리와 같이 계시는데 주님이 없어서 나와 같이 안 계시는 게 아니라  같이 계시는데 내 눈이 어두워서 내 눈에만 안 보입니다. 내 눈에만, 내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같이 계십니다. 계시는데, 그러면  주님이 내게 오시면 문제 해결이라 하는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을 자기가 확실히 보고 인정하고 알게 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몸 밖에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것은 성경을 자꾸 읽고 듣고 이라면은 차차 차차 주님이 보여서' 아. 이거  과거 같으면 이럴 수 있는데 과거 같으면 이랄 수 있는데 이랄 수 있는 데  주님이 보고 계시니 그 일을 못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못 하는 일을 차차 차차 한 가지 못하고, 또 안 됐지마는서도 암만  주님이 안 계신다 이랄라 해도 주님이 보고 계시니 못 하겠다 그말이오. 자꾸  성경을 읽었으니까. 성경을 자꾸 읽어서 성경이 자기에게 자꾸 증거를 해주니까  이제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면서 보고 계시는 주님이 날보고 계시는 그 주님의  안목을 보시니 안목을 보니까 내가 그 일 할 수가 없다 말이오.

 이래서 처음에는 사람이 봐도 못 할 일을 주님이 보시는데야 보거나 말 거나  무시하고 합니다. 이렇지마는 차차 하면은 사람이 보는 데에 할 수 없는  그것보다도 주님이 보시는 데는 더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게 더 주님이  더 똑똑히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주님이 보시니 주님이 보시는 주님의  눈 때문에 내가 할 것을 못 하게 되고 주님이 보시는 그눈 때문에 하기  싫지마는 내가 그 일을 안 할 수 없게 되고. 주님이 보고 계시니 당장 거게서는  내 오기대로 할 마음이 있지마는서도 만 가지에 빚진 주님이거게서 같이 보고  계시니 주님 안면 때문에 못 하겠다 말이오. 주님 안면 때문에.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사람도 자기보다 어떤 높은 사람이 나 참  자기가 어떤 큰 은택을 입은 그런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자기에게 자기 옆에  있는데 있는데 자기에게 어떤 사람이 조그매 자기에게 손해를 보였다고서  그렇게 박하게 할라 하다가 그 사람이 떡 보이면 '아, 저 분이있기 때문에 내가  말 못 하겠다. 저 분은 나한테 대해서 이렇게 용서도 하고 이렇게 큰 아량도  베풀고 또 은혜도 베풀었는데 나는 이것 가지고 그라면은 그 분의 마음이  섭섭하고 도리어 분해지겠다.' 이래서 우리 못 하는 일 많다 말이오. 옆에 있는  그 어른의 눈 때문에 못 하는 일 많고, 옆에 또 점 잖은 사람 때문에 못 하는  일 많고, 옆에 또 원수가 보고 있으니 못 하는 것 많고. 이것 모양으로 주님이  차차 차차 성경을 보니까 내 마음의 눈에 마음의 눈에 보여지고 내 지식으로  보여지고 또 내 이성 비판에 보여지고 내 생각에 보여지고 내 감정에 보여지고  주님이 자기에게 함께 계시는 그 주님이 차차 차차 보여지니까 자기가 마음대로  날뛰던 그 행위가 조금씩 제재가 됩니다.

 차차 제재가 돼서 마음 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말이오. 뭐 이까짓 거 야  슬쩍 속여서 그만 이렇게 하지마는서도 주님이 보는 그 눈을 보고 '아, 주님이  계시는데 주님이 보시는데' 하는 것이 벌써 자기가 보아서 주님의 보시는 그  시선과 자기가 마주칠 때에는 그 일을 못 합니다. 그일을 못 해. 이거는 사람을  보고 하는 것 같으면 사람이 이래 거석하면 그만 사람었으면 할 수  있지마는서도 이분은 뭐 불을 꺼도 아시지 밤에도 아시지 아무도 없어도 아시지  이라니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이 성경을 자꾸 읽음으로써 자기에게  새로워지고 깨달아지고 해서 자기 지식의 눈에 보여지고 또 이성 판단의 눈에  보여지고 자기 감정에 보여져서 이분 때문에 자기가 하나 둘 하고 싶은 것도  제재를 받아 못 하게 되고. 또 이분 때문에 하기가 싫지마는서도 안 할 수  없고, 이분이 아니면 조그만한 것 해 놓고 고만 큰 일 한 듯이 그만 이렇게  한번 후유 하고서 이랄수 있지마는 서도 또 그 분이 보니까 또 무익한 종이라.

'아이구 나는 이렇게 약합니다. 이거 해 놓고 참 가증스러운 참 무익한  종입니다.' 이분 보니까 이분에게서 참 뭐 겸손도 나오고 또 그 모든 그 잘못된  걸 다 금하는 것도 나오고 이분이 두려워서 이분이 두려워서 이분에게 거리끼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고 또 이분의 안면 때문에 하기 싫지마는 하게 되고,  또 이분 때문에 사람에게 대해서도 그렇게 박하게 하지 못하고 조심하게 되고,  이분 때문에 자기의 그 모든 크고 작은 생활이 조그매씩 제재를 받으면은  제재를 받으며은 제재 받을수록이 이분으로 인해 제재를 받을수록이 이분은  내게 더 확고 해지고, 제재 받으면 제재 받으므로 없어지는 것은 옛사람의 살이  깎아지는 것이요 그것이 옛사람의 뼈가 부러지는 것이요 옛사람의 살이 깎아  지는 것이요 그것이 심하면 옛사람의 눈이 빠지는 것이요 자꾸 옛사람은 병신이  돼서 절단나고 새사람이 일어나고 주님이 자기에게 확실히 보여지기 때문에  이렇게 됨으로써 자기는 하나 둘 이라다 보니까 자기는 이제는 주님을 떼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고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도 없고, 뭐 보면은 사람보다  주님이 먼저 생각이 나서 먼저 사람 안면보다 주님 안면, 사람의 인정보다도  주님 뭐 다 이래 놓으니까 모든 생활이 이래 돼지니 이래 되면 자기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언행 심사의 행위가  변화되는 변화는 나 혼자 변화됐는데 언행 심사 행위가 변화되면은 자기 몸  밖에 있는 모든 문제를 주님이 다 변화 시켜서 자기는 상상도 못 하는 그게  변화돼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이 해 보십시오. 자기가 집에서 아. 아무것이가 지금 오면은 나하고  큰 충돌이 있을 터이고 이럴 터인데 내가 집에서 기도하고, 또 하나님을 봄으로  하나님으로 인해서 내가 그 분에 대해서 오히려 그 분에게 부담을 주지 안하고  부담을 내가 가지고, 또 내가 잘못한 것을 가지고 내가 그 분에게 대해서 원망  불평할 거 아니라 내가 그 분에게 대해서 원망들을 사람이라. 내가 잘못된 그걸  하나님 앞에 자복을 하고 회개를 하고 나 혼자 다 해결하고 이랬는데. 가니까  해결하고 가면서 '나는 이런데 그 사람이 오늘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할꼬? 하면  뭐 그렇게 하면 내가 뭐 잘못했는데 내 다 모두 사과하고 뭐 그 뭐 뺨 때리면  뺨 맞고 발질로 차면 채이고 뭐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곤욕을 당해야 되고  값을 당해 받아야 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고 갔는데 가니까 의외에 그 사람이 더 그렇습니다. 의외 그  사람이 더 그래. 나는 그랬는데 내가 그랬는데 그 사람은 내게 무슨 맹수같이  달라 들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 사람이 백 팔십도의 전환으로서 내가 상상  못할 만치 그 사람이 변해져 버렸습니다. 변해져 가지고 그 사람도 그 사람대로  자중하고 그 사람이 내게 도리어 오히려 미안하다 하고 뭣이 나를 위해서 뭘  협조를 할라 하고 내게 대해서 자꾸 그렇게 과거에 그래된 것을 다 무마를  시켜서 없앨라고 이래 애를 쓰는 그 화평을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말이오.

 이럴 때에 '아 주여 감사합니다. 참으로 주님 앞에 기도하니까 내가만 나지도  안했지마는서도 주님 앞에 기도해 주님은 그 마음, 사람의 심리를 주권하시는  주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서 다 이와 같이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해 주신 걸 자기가 체험을 할 것이고, 주님이 달라 들어서 그 일을 해  주셨으니 그 일에 대해서 제가 예사롭게 경솔히 할 수 없고, 그러니까 거게,  대해서 제 생각대로의 할 일은 하나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도 못 하고 주님이  계시니 그저 그분의 뜻에 맞춰 가서 모든 일 해야 되겠다 하는 사람으로 자꾸  이런 것이 쌓여져 가지고서 경험이 됩니다.

 이래서 이 자연 계시라는 중에는 자연 계시 중에는 세 가지인데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섭리. 인간들의 마음의 구조라. 요 세가지가 자연 계시에 그  등용된 모든 요소들인데, 인간의 마욤의 구조라 하는 것은 하루 열 번도 더  변합니다. 백 번도 더 변합니다. 더 변합니다. 더 변하는데 자기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요 생활을 해 보면 하루에도 열번  더 변하는 것이 내가 요렇게 하면 그 사람이 요렇게 변해지고 요라니까 요렇게  변해지고 조라니까 조래 변해지고 벌써 내가 주님과의 어떻게 관계가 바로  되어지는 요 하나에서 그 모든 사람들의 심리가 이것이 이래 변해지고 저것이  저래 변해지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 한 부에게 주권되어 가기고서 과연 주님이  인간의 심리 세계를 다 주권하고 계신다. 인간의 활동 세계를 주권하고 계신다.

뭐 모든 걸 주님이 주권하고 계신다는 걸 자꾸 제가 경험하고 체험했기 때문에  믿어지지 안할 수가었는 것입니다.

 이러면 이것이 주님이 자기에게 같이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계셨기마는  자기가 몰랐는데 자기가 알게. 자기 주관으로 주님이 자기와 같이 계시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된다 말이오. 주님이 자기와 같이 계심을 알게 되어서 주님 때문에  자기의 주관이라는 것이 좋은 거나 나쁜 거나 제재를 받아서 그분에게 제재  받아서 그분에게 그 분으로 인해서 그 분에게 피동되어지는 이 결과가 맺어질  때에 주님은 벌써 내 몸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그러면 어디 지극히 큰 능력이 다 역사하시면 다 되지  않습니까? 다 된다 말이오.

 이래 가지고서 언제 내 손이 가지 안했는데 그 일이 돼지고 내가 가서  사과하지 안했는데 그 사람이 먼저 사과하고 내가 화평을 청하지 안했는데  화평을 청하고 내가 협조해 달라고 하지 안했는데 반발하던 사람이 뉘우쳐  가지고서 아 내가 이 옳은 일에 내가 협조를 하겠다 해 가지고서 뭐 이라니까  모두가 다 봄 동산과 같이 전부가 원수들도 다 인인 성사인데 모든 인류가 다  협조하지 사건도 협조하지 어떻게 돼서 이래 되는지?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서 되는 그런 경험과 체험을  가진 사람은 어찌 되어 그런지 모르겠다. 부자가 되고도 어찌 돼서 됐는지  모르겠다. '아, 자네가 이렇게 높은 권세를 가지고 지위를 가졌는데 어찌 돼  그런가, 뭐 어떻게 운동을 했노?' '아, 나는 몰라. 아무것도 하지 안 했어.

아무것도 하지 안했는데 떨어진다는 것이 올라가고 떨어진 다는 것이 올라가고  나는 몰라. 어찌 됐는지 몰라. 나는 이 자리가 참 진정 지금도 원치 안하는데  공연히 지금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됐는지 이래 돼 가지고서 지금 나는 좀 더  평안한 자유로운 저 낮은 자리에 가고 싶은데 자꾸 이래 됐어.' 모든 사람이  그것이 어찌 된 줄 그 신앙을 거석해서 주님이 자기를 돕는다는 요 사실을  발견하고 보는 사람은 다 하나님 은혜라 입술로 하나님 은혜라 하는 거 아니라  진정 속에 느껴서 아, 하나님 은혜라 다 이렇게 말하지마는서도 그걸 모르는  사람은 그거는 모르고 하나님 말씀대로 하고 지켜서 순종만 한 사람은 어찌 된  줄 몰라. '야. 이거 하나님 은혜가?' '그 참 웃으며 아마 하나님의 은혜인가  봐' 이렇게 해서 '제가 손대지 안하고 제가 상관하지 안했는데 그 주변에 있는  들에서 복 받는다. 들에서 복 받으면 들이 자기를 복을 준다 말이오. 들이  들어서 자기를 복을 준다 그말이오. 들이 자기에게 복을 주는 복 덩어리가 된다  그 말이오. 그걸 하나님이 하셨지 자기 손으로 한 거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복된 이런 큰 구원을 얻었는데 요게 순전히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인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표준해 가지고 믿음은 순종인데 순종인데 하나님에게 순종으로 다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해 하나님이 이렇다면 이렇고 하나님에게 따라서  하나님을 따름으로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름으로 되는 것인데 하나님을  따름으로 되는 것인데 따름으로 만 가지가 다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께 따름으로  되는 이 딿는 이 일의 방해자가 누구입니까? 딿는 이 일의 방해자 가 내나  배암의 지식. 자기의 기관, 선입적 관념 이러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도적이고 강도라. 너를 중생시킨 이 진리보다 먼저 너에게 와 있는 모든  세상 지식은 도적이요 강도다. 너를 다 죽일라고 하는 것이지 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런 것이 들어서 자꾸 우리들이 믿을 때에 와 못 믿느냐? 어린 아이들은 대번  믿는데, 어린 아이는 믿는데 왜 어른들은 못 믿느냐? 어른은 이 마귀 지식을  가지고서 마귀 지식을 이것을 근본을 삼아 가지고 마귀 지식 가지고서 요  지식으로 요 지식의 잣대를 재어 봐라. 이러니까 이거짓말 가지고서 하나님의  참 말씀을 재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거짓말이 되고 이거짓말은 다  참말이 됩니다. 거짓말이거짓말이 되고 거짓말 치워 버리고 하나님 말씀으로써  하나님 말씀하신 것을 재보면 이 말씀 보니까. 더 믿어야 되겠고 이 말씀  보니까 더 믿어야 되겠고 하는데, 이 믿는다는 거 하나님의 지식으로 믿지  안하고 인간 지식 가지고 비꽐해 믿을라 하니까 정반대가 되고 의심이 되고 안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기 전에는 못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원수가  자기라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은 뭐이냐면 이것을 가리켜서 음행의 포도주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지식이 필요 없느냐? 아, 세상 지식이 필요  잇는데 내가 그것들에게 지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도 받을 필요는 없고  그놈 시키는 대로 하면 안 됩니다. 그 놈은 내가 잡아 막고 이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용해야 돼. 시키시는 하나님 말씀대로 내가 사는데 세샹 지식을  내가 이용합니다. 요거 똑똑히 알아야 돼. 이거 뭐 얼마나 이거 뭐 밝히  가르켰는데 요것을 밝히 알고 하면 됩니다.

 이래서 오후에는 위의 모든 어려움은 성경 말씀으로 우리 주관적 펑강의  해결이 되어지고, 내 몸 밖에 있는 모든 객관적인 그 모든 여파에 모든 이  문제들은 주님이 내게 오셨을 때에 된다. 주님이 내게 오셨을 때에 된다.

주님이 와서 계시지마는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데 자기의 주관으로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을 자기가 주관이 인정해서 인정해서 그 분 때문에 그  분이 봄으로 봄으로 다른 것이 봄으로 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이 주님이 봄으로  못 하게 되고 남의 눈을 주목해서 안 할 수 없는 그 일이 주님 봄으로 내가  하게 되고, 주님이 봄으로 안 할 일을 하게 되고. 주님이 봄으로 할 일을  못하게 되고, 이러니까 다 그 분에 따라서 내가 하고 안하고 동하고 정하는  일을 하게 되는 이 일이 되면 차차차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되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하는 것이 알아지는  사람이 되자 자기 몸 밖의 있는 모든 문제는 가 보니까 다 해결이요 다 해결돼  가지고 제대로 되어지고 있는 것이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전에 배운 거 오후에 배운 거 뽈끈 잡고 놓지맙시다. 내나 신명기 28장에  있는 말씀이나 꼭 같은 말씀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꼭 같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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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증거를 마친 때에(순교)/ 마태복음 10장 40절-42절/ 1982. 6. 30. 수새벽 선지자 201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