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날의 은혜

 

1987. 6. 14. 주일오후

 

본문:요한복음 20장 13절∼29절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안식일이 주일로 날짜 변경된 데 대해서 저 지난 주일에 성구들을 가리켜서 여러분들이 기록해 가지고 갔고 또 참고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게 “이 날과 저 날에 대해서 시비하지 말고 정한 대로 그대로 지키라” 하는 그 말씀을 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그때에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은 다 돌로 쳐서 죽이는 때입니다. 그저 누구든지 안식일을 범하면 돌로 쳐서 죽이는데 그때에 안식일을 지키지 안하고 주일을 지키는 사람은 그거는 안식일을 지키지 안하니 돌로 맞아서 죽을 일이고 또 주일을 지키니 돌로 맞아 죽을 일인 그런 어려운 때입니다.

그런 때인데 날짜로 가지고서 시비하지 말고 작정한 대로 지키라 하는 그것이 생명을 내놓고 주일을 너희들이 이미 지키는 그대로 계속 지키고 유혹을 받지 말라는 그런 엄격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 배경을 모르고 그 형편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게 대해서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 주일 지켰다는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예수님도 늘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시면서도 예수님께서 신약 교회 시대에 하실 일은, 안식일 지키시면서도 신약 교회 시대에 하실 일은 언제든지 제팔일에 지키셨습니다.

이래서, 제팔일이 주일이 될 때 대해서 예언적으로 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할례 받은 것도 난지 팔 일 만에 할례 받는 일을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주셨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세례 받으신 것도 제팔일에 세례를 받으셨고,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를 대표한 세례입니다. 대표한 세례도 팔일날 받으셨고, 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셔 가지고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과 셋이 만나 가지고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그날도 또 제팔일입니다. 그때는 다 안식일 지킬 때지마는 제팔일날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나귀 타고 입성한 그것은 주님이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실 것을 예표하신 예표의 행사인데 그도 제팔일 주일날 행사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도 또 주일날 했고, 또 오순절 성령 강림도 주일날 해서 신약 교회를 세우는 원동력이 되는 성령 강림이 주일날 됐습니다. 또 신약 교회의 마지막 종결을 지우는 요한계시록을 밧모섬에서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주일날, 주의 날, 주님의 날에 성령으로 충만시켜 가지고서 그 모든 예언도 하시고 또 신약 교회의 결론적 계시를 내리셨던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벌써 생시에도 언제든지, 지나가는 일은 안식일날 이렇게 하셨지마는 언제든지 새생명에게 속한 이 천국에 속한 일은 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안식 후 첫날에 행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주일날로 변경된 것은 선지자들의 예언에도 말씀을 많이 하셨고 또 신약 성경에도 주일날에 대해서 많이 증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뭐 주일날과 안식일에 대해서 이렇게 변경된 데 대해서는 별로이 큰 문제시 안 하는 것은 개혁교들이 다 안식일을 이제 주일로 다시 변경시켜 가지고 지키기 때문에 별로이 큰 유혹이 없지마는 이런 것도 성경대로 근거해 가지고 믿는 그 성경적 신앙을 가지지 안하는 데에서 자꾸 다른 유혹들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이 제일 첫주일날, 부활하신 첫주일날 예수님이 하신 일이 많았습니다.

첫주일날 제자들에게 하신 그 일은 곧 우리에게 이 주일날 하실 것을 그때에 종자적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일이기 때문에 그때 시작한 일이 오늘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 주일날 하신 일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마라’ 하도 반가워서 만질라 하니까 `만지지 말아라. 내가 아직까지 아버지에게로 올라가지 못했으니 곧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에게로 지금 올라가지 못했는데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내가 부활한 후에 아직 올라가지 못했으니까 부활해 가지고 올라가야 내가 이제 이 대속하시는 일이 완성이 된다.’ 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만지지 말라 했습니다. 그라다가 잠시 후에는 다시 그 막달라 마리아에게 만지라고 하셔서 발을 만지고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에게 대해서 감사를 했습니다.

그 첫주일날 하신 일이, 아버지께로 올라간 것은 구약 그 성막, 성전 구원으로 모형해 가지고 있을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고 휘장 안에 지성소 있고 지성소 안에 거게 법궤가 있고 법궤 위에 그룹이 있고 그룹 사이에 법궤 위에 하나님의 단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하고 서로 마주 대해 가지고서 대화하는 그런 것을 하나의 모형하는 것으로 그렇게 성소에 지어 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죽으심으로 휘장이 갈라졌고 또 갈라지고 난 다음에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제 법궤 위, 모든 법궤 위, 또 하나님의 그룹 사이 하나님의 그 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 일로써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서 대속하신 그 일을 하시고 난 다음에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그 부활의 완성으로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자리잡는 그 일을 이루시고 우편을 점령하시고 그 후에 다시 내려오셔 가지고 제자들로 더불어 사십 일 동안 같이 있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사십 일 만에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셔 가지고 지금 어데 계시는가?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신다고 성경에 말씀했고 또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같이 계신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수님께서 신성과 인성, 신인양성일위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셔 가지고 아버지의 우편으로부터 이 모든 우주를 다 점령하시고 신인양성일위로 택한 자들과 항상 같이 계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시고 또 그라면 우리 그 수많은 성도들과 어떻게 동거 동행을 할 수가 있겠느냐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기 쉬우나 아버지 우편에서 기도하시고, 또 이 세상에서도 성도들과 같이 하면서 한 사람만 아니라 모든 구속받은 성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모든 성도들로 더불어 동거 동행을 하고 계시는 이 몸으로 예수님께서 성화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영화된 거.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그 영화의 신인양성일위는 신성은 물론 전지하신 하나님이시지마는 인성은 유한한 피조물이었는데 피조물로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신성이 무소부재, 계시지 안하는 곳이 없으신 그 신성같이 예수님의 인성도 무소부재의 그런 인성이 됐습니다. 인성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할 몸은 어떤 몸인가? 우리가 부활할 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음식을 잡수신 거와 같이 우리가 부활할 때에 부활한 몸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입니다. 또 부활하신 후에 사람으로 더불어 동거 동행하고 이렇게 모두 같이 동역하는, 같이 역사하시는 역사하는 일을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고 난 다음에는 우리가 무소부재의 이런 존재로 우리가 변화되고, 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몸으로 변화되고, 또 이 지금 있는 육체의 활동 같은 그런 활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초월해서 이렇게 보이지 안할 수도 있고 보일 수도 있는 이런 몸으로 예수님께서 부활시킵니다.

이것은 빌립보 3장에, “주의 그 거룩하신 몸과 같이 우리도 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된다” 해서 우리의 부활체는 예수님의 부활체와 같은 부활이 된다고 그렇게 성경이 증거했습니다.

오전에도 말했지마는 그래 이 주일날 아주 평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기쁨을 주셨습니다. 또 성령을 주셨습니다. 죄 사하는 것과 죄를 정하는 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을 만나서 보는 일이 주일날 만나보게 됐습니다. 또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 먹고 눈 밝음을 받았고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그 뜨거움이 생겨졌습니다. 둘째 주일에는 도마가 의심을 다 풀어버리고 믿음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러면 이 주일날은 이런 은혜를 받는 날이라 이렇게 우리가 깨닫는 것이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요,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이 주일날이, 미리 주일날 되는 안식 후 첫날에 모든 행사를 하신 그것을 우리가 보고 이 주일날은 주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이런 행사를 해 주시는 것이라 하는 것을 그렇게 우리가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으로써 우리가 주일날 받는 은혜가 뭐라 하는 것을 그저 참고로 삼으라고 우리에게 이렇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날은 주님이 주시는 우리가 떡을 먹고 눈이 밝아지는 날이라. 또 주일날은 우리 눈이, 신령한 눈이 밝아짐을 받는 것이 주일날이라. 또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해서 뜨거운 마음, 마음이 뜨거워짐을 받는 것이 주일날 받는 것이라. 또 어데서든지 기쁠 수 있는 것, 어데서든지 기쁠 수 있는 그 기쁨을 받는 날이 주일날이라. 또 평안을 받는 날이 주일날이라. 그렇게 성령 받는 날이 주일날이라. 죄에 대한 권위를 받는 날이 주일날이라. 의심을 푸는 날이 주일날이라. 또 특별히 이제까지 받은 성령이 아닌 새로운 성령의 은혜를 받는 날이 주일날이라. 또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계시의 종론을 받은 날이 주일날이라.

이래서 주일날은 하나님께서, 이 신약 교회는 신령한 이스라엘인데 신령한 이스라엘들이 천국에 관련되는 모든 은혜를 이렇게 받은 것을 토막 토막에 기록해 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해서 보인 것이고, 우리가 오전에도 공부한 것처럼 이 주일은 어떤 날이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을 베풀어 놓은 그 구원과 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베풀어 놓은 그 구원을 주일날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요 우리는 주일날 받아 가지고 엿새 동안에, 받은 그 은혜로 가지고서 실상을 만드는 것이 엿새 동안입니다.

그래서, 주일날은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 다섯 가지, 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 여섯 가지, 이 열한 가지 구원을 다 만들어 놨습니다. 이 구원은 다 만들어 놨는데 요것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잡지를 못합니다.

열한 가지 구원을 다 완전히 만들어 놓고 완전히 만들어 놓은 이 구원을 우리들에게 은혜로 공짜배기로 주십니다. 주시는데 특별히 주일날은 이 열한 가지의 은혜를 우리가 받되 이 열한 가지 은혜에 종자적인 은혜를, 비유컨대 종자적인 은혜를 주일날 받고 또 그 원형적인 그 은혜를 받고, 받아 가지고서 엿새 동안에 그 종자를 기르는 거와 같이 우리가 건설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주일날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활로 설정하신 이 구원의 이 은혜를 주일날 우리에게 주신다 하는 요것을 똑똑히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이제 이 성경에 이런 증거도 있고 저런 증거도 있는 거는 그날 다 이 열한 가지에 관련된 은혜를 다 우리에게 직접으로 주신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뭐 평안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성령이라든지, 또 죄에 대한 권능이라든지 이런 것은 다 거게 관련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일날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속의 구원을 베푸신 것이 다섯 가지인데 그 구원과 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대신 베풀어 주신 구원 여섯, 열한 가지인데 열한 가지는 예수님이 언제 다 이루셨느냐? 열한 가지를 이루신 것은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 곧 우리의 선택을 작정하신 그때부터 이 공사는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공사가 시작돼 가지고서 이 공사가 예정으로 진행되고, 창조로 진행되고, 하나님의 보존으로 진행되고, 또 그다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형의 죽음, 대행의 죽음, 대화친의 죽음 이 세 가지 죽음, 곧 다섯 가지의 구원입니다.

세 가지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다섯 가지 구원이 이루어진 이 구원은 언제부터 시작해 가지고서 언제까지 이 구원이 완료되었느냐 하면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을 택했다고 하신 그때부터 시작돼 가지고서 주일날 새벽까지 이 구원은 완료가 됐습니다. 이 구원은 그때까지 완료됐습니다. 요것을 꼭 잡고 놓지 말아요. 마귀란 놈은 이것을 삐끌트릴라고 애를 써요. 놓지 말아요.

그러고,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그 구원은 언제까지 완료를 하셨느냐? 완료하신 것은, 근본적으로 완료하신 것은 주일날까지 완료하셨습니다.

주일날까지 완료하셨는데 이 완료가 당신이 완료하는 것으로서 완료되는 게 아니고 이 완료가 이것은 우리 택한 자들에게 이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져야만 완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이루어져야만 완료가 되기 때문에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언제까지 이루어지겠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실 때까지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구원을 이룬 것은 주일날까지 완전히 이루었습니다.

창세 전부터 시작한 것을 주일날 새벽까지 이루어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구속한 것 이 다섯 가지는 완료가 됐고, 다섯 가지라 말은 죄에 해방, 마귀에 해방, 사망에 해방을 당한 그 사죄를 말하고, 또 나머지기 두 가지는 예수님이 대행해서 하나님의 공심판 통과의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또 그다음에 하나는 대신 화친의 제물이 되셔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이 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그 주일날 새벽까지 이 일이 완료가 됐습니다.

그러면 그 완료가 됐으면 몇 해나 걸렸습니까? 대략 한번 말해 보이소. 천 년을 하나로 잡고 그래, 얼마나 걸렸습니까, 그 완료 하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봐요, 얼마나 걸렸는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사천 년 걸렸다 하면 어찌 됩니까, 사천 년 걸렸다 하면? 안 됩니다. 창세 전 영원 전부터 이 다섯 가지 대속의 계획은 시작해 가지고서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그 새벽, 부활하시기 전까지 그 일을 다 완료했습니다.

그러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대속하신 일은 완료는 주일날 그날로써 완료를 했습니다. 완료를 하시고 이 완료하신 것을 우리 택자들에게 나누어 줘 가지고 이 택자들이 받아서 자기 것을 삼게 하는 데에는 언제까지 그 시간이 걸리느냐 하면은 경건과 경건치 않는 자들을 다 완전히 끝내는 예수님의 구름타고 재림하실 우주를 다 불태울 때 그때까지 완료를 합니다.

그래서, 저먼저 주일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서의 대속한 다섯 가지는 토요일날 열두시까지 완료가 되고 또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서의 우리의 그 대속하신 것은 주일날 영시부터 됐다’ 그 나누는 것을 영시로 죽음의 대속과 부활의 대속의 그 시기를 나누는 것을 토요일날 끝시간으로 주일날 첫시간으로 그렇게 나누었던 그것은 제가 그 계산을 잘못해서 나눈 것을 잘못 증거해서 오전에도 몇 번 말했습니다. 그거는 잘못 증거했습니다.

또 제가 말하기는 그렇게 주일날 이 사활의 대속의 공로는 주일날 이루어졌다 하는 그 말로는 증거한 것이 그거 바로 됐는데, 이루어졌는데. 다 주일날 이루어졌다고 하면은 죽으심으로 대속하는 것도 주일날 끝나야 되고 또 부활하심으로써 구속하신 것도 주일날이라야 끝나야 되는데 그 날짜를 토요일날 끝시간으로 끝났다 하기 때문에 그 증거를 제가 잘못한 것을 오전에도 여러분들한테 그걸 교정을 했고 또 잘못 증거했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활의 대속으로 베푸신 것은 주일날 완료를 하셨습니다. 그라고 또 이 사활로 대속하신 두 가지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주일날 주기 때문에 주일이라 하지 않고 자꾸 주의 날이라 이렇게 말해, 주의 날이라. 주의 날. 그래서 사도 요한이도 밧모섬에서 “주의 날이라” 이렇게 말해.

주의 날이라 말은 우리를 책임진 자의 날이라 하는 말인데 그 책임진 자의 날이라 말은 우리를 책임진 그 책임진 구원을 주는 주일날이라. 그러면 우리의 구원을 책임진 주님이 그 책임지신 것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는 것은 주일날이라. 이루어 주시는 날이라. 주님이 주가 되신 그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날이 주일날이라 하는 그런 뜻으로서 주일이라 하지 않고 자꾸 주의 날이라 자꾸 그렇게 주의 날이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그러면 이 주일날 무슨 일 했느냐 하는 그것을 좀 전에 여러가지를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 가지고서 제자들에게 주일날 평안을 줬고, 주일날 기쁨을 줬고, 주일날 성령을 줬고, 주일날 죄에 대한 권세를 줬고, 또 주일날 예수님을 만지기도 했고, 또 주님으로 더불어 음식도 먹게 됐고, 눈도 밝게 됐고, 또 모든 의심도 풀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렇게만 보여 주는 것이 그저 주일날 주님이 우리 구원에 대한 일체 근본적인 그 은혜, 또 종자적인 은혜 이것은 다 주일날 주신다. 주일날 주시고 주일날 받은 은혜 가지고 그 은혜로 가지고서 자기의 그 건설구원, 행위구원, 평생구원을 주일날 받아 가지고 그렇게 구원을 이루게 된다.

이래서 주일날 신약 교회들에게, 주일날 주신 성령 가지고 신약 교회가 건설됐습니다. 신약 교회 건설은 전부 주일날 주신 그 성령 가지고 신약 교회 건설이 됐습니다. 또 사도 요한 같은 그런 사람은 굉장한 신앙의 사람이지마는 그 사도 요한이 신앙을 마지막으로 결론짓는, 결론짓는 신앙의 마지막에 결말을 짓는 것도 또 주일날 성령의 은혜 받아 가지고서 결말을 지었다.

또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 안식일을 지키시면서도, 구약에 속한 일도 있고 신약에 속한 일도 있는데 구약에 속한 일 신약에 속한 일을 겸해서 구약에 속한 일이 신약에 속한 일이고 곧 신약에 속한 일이 구약에 속한 일이라고 하나로 이렇게 돼 가지고 있는 일은 안식일날 그때 했고 신약에 속한 신령한 이스라엘에게 속한 모든 행사는 할 때에 제팔일에 했다. 안식 후 첫날에 했다.

그것도 미련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지마는, 왜 안식 후 첫날 이 일 했을까?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입니다. 살아 계실 때 안식일날 하시던지 하시지 왜 안식 후 첫날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신약 교회에 속한 그런 신령한 일은 전부 주일날 했는데 어떻게 이래 주일날 자꾸 이런 일 했을까 하는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하고 양심을 가지고 찾아 보면은 맞습니다. 그게, 그거는 주일날 행사해야 되는 신약에 속한 일이요 신령한 이스라엘에게 속한 일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 주일날 은혜 받는 것이 엿새 동안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그 원료를 받는 거와 같습니다. 엿새 동안 구원 이룰 수 있는 원료를 받는 것이요 종자를 받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면 주일날 은혜 받아 가지고 받은 그 은혜를 엿새 동안에 은혜 생활해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지 주일날 받지 안한 것은 다른 날은 받지 못한다 그렇게 또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평소에도 설교도 하고 다 이랬지마는 주일 볼 그 주일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시대 시대에 다 특별한 은혜 역사가 올 때에 주일날 아침에, 주일날 오전에, 주일날 은혜 임한 것을 우리가 역사로 다 전달돼서 받고 또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도 집사로 있을 때에 그때에 그 해방 직후인데 집회할 때에 그 집회 중에 큰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역사하는 날은 일주간 중에도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모두 주일날 그때 큰 은혜를 받으니까 우리가 주일날 이날은 하루 종일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준비해야 된다 그렇게 생각도 하고 그렇게 해 나왔었습니다.

그라다가 이 부산 와 가지고는 전부 사람들이 다 나태해서 예수 믿는 데 어떻게 게을한지, 뭐 간이 크기가 짝이 없고 마음이 강퍅하고 완패해서 예수 믿는 일에는 어떤 소리한다 해도 눈도 꼼짝 안 합니다. 이거 전부 거짓부리 예수를 믿고 있어.

지금도 뭐 성경과 우리 믿는 거와 성경대로 대조하면 우리는 다 구원은 절단이지 뭐 구원 이루는 거는 없는데 전부 꺼꾸로 해석을 해 가지고서, 기본구원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하니까 ‘예수님의 대속으로야 얻지뭐 행함으로 구원 얻느냐?’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 얻는 거는 기본구원 얻는 것이고 우리 건설구원은 대속을 네가 참 입고 있나 안 입고 있나, 대속을 믿나 안 믿나? 대속을 참 믿는 자는 대속을 입고 살게 되고 대속을 입고 사는 사람은 다 건설구원을 이루게 되는데 그 능력을 전부 주일날 받는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래서, 모든 성도들이 다 그렇게 생각을 가지고 있고 또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은 밤엔지 낮엔지 모른다. 또 월요일인지 화요일인지 뭐 토요일인지 어느 날인지 모른다.’ 이러나, 속으로는 ‘아무래도 주님이 구름타고 오실 그날은 주일날이다.’ 이래서 주일날을 범하지 안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거 또 모형적 표가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신 것은 그것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실 것을 모형적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라면서 그때는, 나귀 새끼를 몰고 올 때에 ‘이 주인이, 왜 나귀 외양간에서 나귀를 몰고 가느냐? 이 주인이 만일 뭐라 하면 뭐라고 말하랍니까?’ ‘그라거든 주께서 쓰신다고 그렇게 말해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남이 먹여 놓은 외양간에 있는 남의 나귀를ㅡ나귀 새끼라 말해도 사람이 탔으니까 아주 작은 건 아닙니다. 아주 큰 나귀와 작은 나귀 하니까 나귀 새끼지ㅡ남의 나귀 새끼를 돈도 주지 안하고 가져 왔으니까 어떤 사람은 ‘그거 도둑놈의 행위가 아닌가?’ 그렇게 말합니다. `남의 외양간에 있는 남의 나귀 새끼를 돈도 주지도 안하고 공짜배기로 제자들이 가서, 끌고 오너라 해 가지고 몰고 왔으니까 이거는 무례한 일이 아니냐?’ 물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만일 주인이 뭐라 하면 뭐라 하랍니까?’ `내가 쓴다고 해라’ 이라니까 ‘예수님의 친한 친구인갑다.' 그게 아니야. 그 뜻이 따로 있습니다. 뭐이냐? 주님이 구름타고 와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오시는 그 걸음이니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오시면 그때까지는 나라든지 뭣이든지 이거는 내것이라 제것이라 하는 주인들이 있지마는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실 때에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 되는 것을 나타내서 알려 주기 위해서 그와같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타고 오실 것을 예표로 예루살렘 나귀 타고 입성하신 그날이 주일날이라. 또 성령 강림도 주일날이라. 또 이렇게 담대와 기쁨을 가진 것도 주일날이라. 평강을 가진 것도 다 주일날이라. 이러니까, 이래서 모두 다 미루어 ‘주일날 모든 은혜를 받는다.’ 우리 서부교회서는 ‘날 중에 제일 귀한 날은 주일날이요 또 시간 중에 제일 귀한 시간은 예배드리는 시간이라’ 이렇게 모두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래서, 주일날은 거룩히 지키라. 일하지 말고 거룩하게 지키라. 이러니까 주일날은 일 안 하는 날로만 모두들에게 다 인식이 깊어져 가지고 있고, 또 일 안 하고 그날은 하나님께 예배드려 섬기는 날로만 이렇게 강조해 가지고 있지 주일날은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로 설정하신 은혜를 근본적으로 받는 날이 주일날이다 하는 그 해석은 나는 아직까지 보지를 못했어. 혹 어떤 주석에 그런 게 있는가 여러분들이 찾아보고 그런 주석이 있거들랑은 저한테 좀 알려 주십시오.

이래서 오늘까지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들이 ‘주일날은 일하면 안 된다. 주일날은 일하지 안하고 일을 안 하는 날이다.’ 구약에 보니까 일하는 사람은 죽이라 했으니까 일하지 안하는 날로만 알지, 주일날은 일을 할래야 할 여유가 없는 날이라, 주일날은 일주간 가운데도 제일 힘드는 날이요 큰 일 하는 날이요 중요한 날이라, 큰 수입을 받는 날이라 하는 그것으로서 이 주일 인식 가진 사람들이 별로이 없는데 그걸 우리가 완전히 가져야 되겠고, 주일날은 뭐 노는 날이 아니라 그날은 일할 여가도 없이 이 열한 가지 구속을 우리가 받았지마는, 구속을 받았지마는 또 구속을 더 받고 더 받고 충만히 받고 이렇게 해서 열한 가지 구속을 받는 날이 주일날이다.

그러면 새로 받는다 말이오. 구속을 받고 또 받고 받고 또 받고 또 구속에 대해서 깨달아 감사하고 또 깨달아 감사하고 또 깨닫아 감사하고, 그러면 주일날은 이 열한 가지 구속을 깨달아 새로 깨달음 가지고 새 감사 가지고 이 한 가지 하는 날이 감사하는 날이 주일날이요, 또 하나는 열한 가지 이 구속을 종자적으로 근본적으로 이 열한 가지 구속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받는 날이 주일날이라. 그러면 능력 받는 날이 주일날이라.

또 한 가지는, 이 감사와 능력 받는 이 두 가지가 주일날 하는 일인데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하느냐? 그 주일날 남은 시간에는 이 두 가지를 연습을 해서 앞으로 월요일날부터 이 일을 능숙하게 해 나갈 수 있도록 예비해서 예비적으로 연습해 가지고서 엿새 동안 살면서 엿새 동안 주님의 열한 가지 구속의 이 구원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이 열한 가지 구속의 구원을 똑똑히 깨달아서 감사하다, 감사하다는 것은 알고 깨달아야 감사되지 그래 아니면 감사가 되는 것 아닙니다.

이러니까 열한 가지 구속을 감사하는 것은 다시, 잊어버렸더란대도 새로 추억하고 새로 깨닫고 이래 가지고서 그 열한 가지 은혜를 똑똑히 기억하는 것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억지 안하면 감사 안 합니다. 기억하고, 생각하니까 기억나고 기억나니까 감사하고, 감사는 알고 거게 대해서 감격해서 감사하는 것까지 되기 때문에 이것은 감사하는 날이라 그말은 이제까지의 열한 가지 구속의 은혜를 받은 것을 낱낱이 들춰 가지고 자기가 단단히 기억하고 놓지 말고 단단히 강직하고 여게 대해서 이 열한 가지 구속의 구원의 이 가치를 감사하면서 이것을 단단히 보존해라 하는 그런 뜻으로서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받은 바의 은혜를 감사할 줄을 모르는 자는 그 은혜를 모르는 자입니다. 그 은혜의 가치를 아는 자는 감사합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자는 그 은혜의 가치를 보배로 많이 아는 자고 감사함이 적은 자는 적게 아는 자고 감사함이 없는 자는 그 은혜에 대해서 가치를 모르는 자입니다. 모르면 뺏기고 많이 알면 더 강하게 간직하고 더 보배로 귀중하게 여기면 더 굳세게 간직이 더 됩니다.

이래서, 세 가지 일 하는데 하나는 감사해라 하는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열한 가지 구속에 대한 은혜를 네가 받은 것을 단단히 강직하고 놓지 말아라 하는 그말이고, 또, 새로 그 받은 바의 열한 가지 은혜 그 은혜를 더 깊이, 더 넓게, 더 강하게, 더 확고히, 더 충만히 네가 받아서 이전보다 엿새 동안에 열한 가지 구속의 이 구속 생활을 할 수 있는, 지난 주보다 더 할 수 있는 그런 실력을 권능을 받는 날이다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이러면 깨달아 감사하고 또 새로 주시는 것을 받고 해 가지고서 이것을 남은 시간에 연습을 한번 해 가지고서 이것을 연습을 해서, 연습하면은 마치 병아리가 알 안에서 부화가 돼 가지고서 툭 터져 나와야 이제 그 알 밖에 나와 가지고서 활동하고 살고 자라는 거와 마찬가지로 네가 이 주일이라 하는 요 테두리 안에서, 받은 것도 네가 똑똑히 기억해서 단단히 강직하고 새로 또 받고 그것을 또 새로 연습을 해 보고, 연습을 해 가지고서 요 셋이 완료가 돼서 이제는 월요일날부터 이 생활을 실지로 할 수 있는 데에, 계란 속에 있는 병아리가 부화가 바로 되니까 그 알 밖에서 자유로 활동하는 것처럼 이렇게 주일이라는 테두리 너머 엿새 동안이라는 그 공간에서, 그 세월에서 거게서 넉넉히 열한 가지 구속을 보존하는 생활, 열한 가지 구속으로 사는 생활, 열한 가지 구속으로 사는 생활, 보존하는 생활, 사는 생활 이렇게 해서 네가 연습을 해 가지고서 네 일을 착실히 이루는 그런 원동력을 받아라, 실력을 받아라 하는 그것이 주일날입니다.

이래서, 이 주일날에 대해서 그러면 이것을 알고 자기가 받으면 됩니다, 받으면.

주일날 우리가 이 감사할 것은 주일날 감사할 것은 몇 가지에 대한 감사를 해야 됩니까, 손가락으로? 열한 가지. 안 든 사람이 있어? 안 든 사람 그런 자는 교만한 자라. 다 들어. 뭐 제까짓 게 열한 가지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도 알지도 못하고.

열한 가지 은혜에 대해서 감사가 돼야 됩니다. 자꾸 열한 가지 은혜를 생각하니까 감사가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자꾸 생각하면 감사가 무진장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주일 준비하는 것이라. 감사가 자꾸 나와. 자꾸 나오고 난 다음에 또 열한 가지 이 은혜를 자기가 새로 자꾸 받습니다. 이미 받은 위에 더 덧붙이기로 받고 덧붙이기로 받고 거게다가 더 충만히 충만히 받고 이래 가지고서 열한 가지 은혜에 충만해야 돼.

이래 가지고 충만히 받은 것을 주일날 예배 끝나고 난 다음에, 예배 또 중간에, 이 열한 가지를 자기가 생각해서 이 열한 가지가 주일날 오후에 자기 몸에, 심신에, 행위에 충만해져야 월요일부터 그 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있어. 그 안 하면 안 돼요. 요거는 뭐 과학적이기 때문에 변동이 없습니다.

그래, 주일날 그래 가지고 엿새 동안에 자기 일을 힘써 한다 했는데 엿새 동안에 자기 일을 힘써 하는 자기 일은 무슨 일입니까? 자기 일은 무슨 일? 여게 이분, 자기 일은 무슨 일이요? 엿새 동안에 자기 일을 힘써 해야 되는데 자기 일은 몇 가지 하는 것이 자기 일입니까, 손가락으로? 뒤퉁이. 똑똑한 것 같은데 뭐 조니까 그만 헛일이야. 어만 거 생각해. 뭐 생각했어요? 뭐? 집에, 집에 뭐 생각했어? 단스? 뭐 피아노? 뭐 또, 남편? 암만 생각해야 소용 없어. 이 시간에는 요것만 생각해야지.

그러면 엿새 동안에 힘써 자기 일을 해야 되는데 엿새 동안에 힘써 자기 일을 해야 될 자기 일은 뭐이요, 요 학생들 여기 좀? 자기 일을 해야 되는데 자기 일 몇 가지 해야 돼? 여기 해 봐. 몇 가지 해야 돼? 한번 대답해 봐. 열한 가지 일을 엿새 동안에 부지런히 해, 열한 가지 일. 열한 가지 일을 부지런히 해야 돼.

그것이 자기 일이라.

열한 가지 일 무슨 일? 열 한 가지 일은 죄에서 해방받아 자유하는 일, 죄에 자유, 사망에 자유, 마귀에 자유, 하나님의 공심판에 자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노릇, 이라면 몇 가지요? 몇 가지지? 저 조그만한 것도 아는데, 인제 배워. 다섯 가지.

다섯 가지 이거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신 것이 다섯 가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하신 것은 뭐입니까? 자, 중생, 또? 하나님을 향해서 진리로 영생, 또 영감으로 영생, 또? 또 뭐? 제사장, 또? 선지자, 또? 왕. 이래 가지고 여섯 가지라. 이러면 이 열한 가지 생활을 “자기 일을 힘써 하고” 열한 가지 생활이 자기 일이기 때문에 열한 가지 생활을 힘써 해야 됩니다.

그러면 열한 가지 생활을, 열한 가지 일을 자기가 힘써 해야 되는데 열한 가지 일을 어데서 해야 됩니까? 산에서 해야 됩니까 들에서 해야 됩니까 어데서 해야 됩니까? 자기 현실이라 하니까 이거 사람들이 좀 얼떨떨해 잘 모르는데 각 분야에 자기 있는 곳에서 해야 됩니다.

학교 학생들은 학생이 자기 업이기 때문에 학생 업에서 해야 되고, 공무원은 공무원 업에서 해야 되고, 직공은 직공 업에서 해야 되고, 또 이 주부는 주부 업에서 해야 되고, 정치가는 정치 업에서 해야 되고 그것은 다 자기 일이 아니고, 자기 일이 아니고 참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장소요 위치입니다.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위치라.

이 사람은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거게서 자기 일 열한 가지 하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거게서 열한 가지 하고, 또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하는 거게서 열한 가지 하고, 그것은 열한 가지 자기 일, 자기 일은 뭐이요? 자기 구원이라. 자기 구원 하는 그 일을 거게서 하는 위치라 장소라 그말이오.

이런데 장사하는 사람이 자기는 장사하는 그것이 열한 가지 이 예수님의 대속해 주신 구원을 이루는 것이 자기 일인데 이 일은 하지 안하고 그 일은 새벽기도나 나오면 한번 생각하고 또 주일날이나 생각하고 ‘그거는 그게 그래 구원 이루는 것이지.’ 다른 날은 다 돈벌이 하든지 뭐 공부하든지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 구원 모릅니다. 이 구원을 몰라요. 건설구원은 하나도 없어요. 나중에 가 보면은 노아 홍수 때에 그 사람이 그때에 현실 구원을 이룬 사람은 노아 여덟 식구 외에는 다 멸망받았어. 하나님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님이 이다음에 구름타고 오시면 자기 건설구원을 이룬 사람은 그렇게 드물 것입니다. 드물 수밖에 없어. 성경은 분명히 이런데 요것을 깨달은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적고 암만 가르쳐 줘도 반박합니다. 가르쳐 줘도 반박해. 하기가 힘들거든. 목사는 그 설교를 안 해요. 왜 안 하는가? 하면 교인들이 다 싫어해.

사이다 설교를 해야 좋아하고 또 테레비 하는 거와 같은 그런 설교를 해야 좋아하지 밤송이 모양으로 까끌까끌 찌르니까 에이 귀찮다고 집어던져 버려.

왜? 그것은, 요 모로도 보니까 보니까 요거 틀렸다. 꼭 찔리지. 요것도 고쳐라, 꼭꼭꼭 찔려서 요것도 조것도 요래 보니까 뭐 전부 잘못된 것뿐이니까, 그래도 자꾸 고쳐 나가면 되는데 고쳐 나가지 안하면, 세상에서도 어려워도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인데 영원 무궁한 그 천대와 존귀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건설구원에 주력하지 안하는 사람 없습니다.

이 건설구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어짠다 했습니까? 마태복음 13장 44절에 어떻게 한다 했어? 뭐라고 했어? “있는 걸 다 팔아서 산다” 했어.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을 다 바쳐서 다 이 건설구원을 이룹니다. 건설구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 여게 전부를 전심 전력을 다 기울이요. 모든 거 다 기울이요.

이 구원을 뺏들라 하면, ‘네 이놈 생명을 내가 뺏들겠다. 생명 안 뺏길라면 이 구원 내놔라.’ 구원 내놔라 하면 생명 내주고 구원 차지하지 생명 제가 가지고 이 구원 주지 안해요! 그게 예수 믿는 사람이오. 이거는 순교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데, 뭐. 아무리 환난 때라도 그 사람이 신조와 교리를 어길 수 없어. 신사참배, 죽었으면 죽었지 신사참배 한다 소리를 하지 못해. 인민군들이 아무리 뭐라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 어기는 그 일을 그 앞에서 할 수가 없어. 아는 사람은 어짤 수가 없어. 그렇지 안해요? 자기 생명과 자기 소유와 두 가지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자연히 ‘이놈 네 소유 이거 내놓을래. 생명 내놓을래?’ 도적이 와 가지고서 ‘너 지금 네게 있는 보석이 지금 한 뭉텅이 있는데 이거 나를 줄래 네 생명을 줄래? 이놈 그러면 죽여버린다.’ ‘아이구 그것 가지고 가십시오. 이거 내가 생명 하겠습니다.’ 그거야 귀한 것 가지고 천한 것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이 건설구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치기 마련이오. 그러기 때문에 “있는 것을 다 바쳐지 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영생을 얻지 못한다.” 이랬어.

이런데 요새 뭐 건설구원을 어떻게 헐하게 봐서,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제 욕심대로 다 하고 예수 믿으면서 찌끄러기 그것만 가지고서 예수 믿으면서 그저 가끔 가다가 한번씩 예배당에나 오고 또 그리 안 하면 대예배나 보고 새벽예배나 보고 그라면 되는 것, 어림도 없습니다. 안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해서 이 구원을 이루어야 되지 그리 안 하면 안 됩니다.

이라니까, ‘그렇게 너무 어렵게 말하니 교인들이 안 모인다. 어렵게 말하니까 교인들이 안 모인다. 그러니까 할 수 없어 그런 소리 하면 안 되고 그저 이래도 예, 구원 됩니다, 저래도 구원 됩니다, 술 먹고 예수 믿어도 됩니다, 또 도적질하며 예수 믿어도 됩니다, 어떤 죄 짓고도 예수 믿어도 됩니다 하는 것 모양으로 그래도 그래야 와 들어붙지 그리 아니면 안 오니까 그렇다.’ 그것은 처음에야 그렇지마는 제일 잘 믿는 것을 가르쳐 줘야, 옳게 믿는 걸 가르쳐 줘야 그 사람이 옳게 믿지 항상 그래 사람을 꼬우고 말 겁니까? 목사들이 사람 꼬운 사기 협잡 횡령 죄가 제일 많습니다. 알겠습니까? 왜 구원 얻는 길을 바로 말하지 안하고 그렇게 꺼꾸로 말해 가지고 자꾸 어누리를 해 가지고 그렇게 합니까? 안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이면 되지’ 이렇게 말하는데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 살아도 예수님의 대속이 효력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벗어도, 예수님의 대속을 벗어도 예수님의 대속이 효력이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어. 저거가 몰라 그래, 논리로.

그라면 보자. 내가 저 아레도 어떤 목사들하고 여기서 내가 만나 가지고 얘기를 했는데 ‘믿음으로 구원 얻는데, 잘못하면 자꾸 행함을 말하다 보면은 믿음을 그만 잊어버려 믿음을 무시하게 되기 쉽습니다. 지금 목사님은 자꾸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벗지 안하는 그 행위라야 된다 이라니까 대속을 자꾸 말하니까 지금은 괜찮지마는 나중에 목사님이 세상 떠나고 나 그라면은, 너무 행함만 주장하니까 그만 믿음은 없애버리고 행함만 가지고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

그래 내가 있다가 ‘그라면 예수님의 대속으로 믿으면 구원 얻으면 예수님의 대속을 믿습니다 하고서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 올 때는 예수님의 대속을 다 휘뜩 벗어버리고 난 다음에 한 것도 예수님의 대속이 부담한다 말이냐? 그거 대답해라.’ ‘그거야 될 수 없지요.' 어짜든지 교인들도 힘 안 들고 예수 믿어서 구원 얻는 이것만 원하고, 교인들이 다 원하니까 목사도 그 설교 해야 돼. 그 설교 안 하면 십일조도 안 낼 모양이지 그 설교 안 하면 에, 거기 까다롭다고 오지도 안할 모양이지 이라니까 부득이 밥통이 떨어지니까 또 그렇게 해야 될 거라. 이거 삯꾼이라.

우리 서부교인들은 제법이라. 이렇게 막 해도, 내가 알지. 이렇게 뭐 기본구원 건설구원을 억세게 이렇게 강하게 막 그대로 솔직히 다 말해도 오는 것은 그런 것 같애. 오는 것은 ‘원래 목사님은 그라시고 우리가 조절하면 안 되느냐? 우리가 조절해 가지고 어쨌든간에 이거는 암만 그래도 그저 원래 그라는 것이니라 하고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예수 믿으면 구원 얻지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위로 받으면 뭐할 겁니까? 아예, 건설구원은 자기가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살지 안하면 안 돼 버립니다. 절대 안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 살아도 구원이 된다는 그런 목사 데리고 오십시오. 천명 만명이고 데리고 와 보십시오. ‘왜 그라면 그래 설교하노?’ ‘그렇지만 그거는 너무 그라면 교인들이 안 모이고 다 그만 도망가 버리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가난한 교회야. 왜? 우리 교회는 좀 잘나고 권세 있고 똑똑하고 부자 그런 사람들은 여기 오면 알아주면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바로 말하니까, 이거 뭐 다른 데 가면 막 이렇게 추켜 올리는데 와 보니까 ‘땅위에 그것이 무슨 가치 있노? 믿음이 있어야 되지. 하나님을 모셔야 되지. 진리를 모셔야 되지. 무슨 꿩만 한 마리 날아가도 진리고 뭐이고 확 다 내 버리는 그까짓 거 무슨 가치 있노?’ 하니까, 저거 가치를 안 알아 주니까 가치 알아 주는 데만 갑니다. 돈 가치 알아 주는 데로 다 가요. 권세 가치 알아 주는 데로 다 가요. 지식 가치 알아 주는 데로 다 가요. 얼마든지 가거라. 갔으면 내게는 책임 없고 이제 나는 책임 벗었기 때문에 잘 됐고, 있으면서 그라면 골탕을 쥐먹을 건데. 어리석지 맙시다.

이래서, ‘주일날은 이 권능을 받는다.’ 무슨 말인가? 자, 하나씩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첫째는 죄에서 자유하는 권능을 받습니다, 죄에서 자유하는 권능. 죄에서 자유하는 권능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죄가 몰아쳐 와도, 어떤 죄가 한 가지 죄, 열 가지 죄, 스무 가지 죄, 뭐 이 죄악의 세력, 죄악의 세력이 어떻게 몰아쳐 와 가지고서 죄 지어라 해도 죄 안 짓는 사람은 죄의 종이 아니니까 죄에 대해서 자유하는 사람입니다. 죄가 한 가지 두 가지 죄의 세력이 와 가지고 부딪히니까 그만 죄 안 지을 수 없고 그 세력에 못 이겨서 범죄하는 자는 죄의 종입니다.

알겠습니까? 이게 쉬워요? 쉬워요? 나라에서, ‘오늘 주일인데 주일날 뭐 해야 된다. 너는 장관이기 때문에 주일날에 네가 뭐 해야 된다.’ 주일날 범하는 게 죄 아니요? 이렇지만 이 세력이 ‘네가 장관이지마는 오늘 주일날은 주일 지킬 수가 없다.’ 이라니까 그 세력이 들어 와서 죄 지으라고 하는데 그 죄 안 짓기가 어려워. 그래 놓으니까 요렇게 살라하는 사람은 그만 떡이 돼 버리고 그만 사람이 파김치가 돼 버려. 알겠소? 내가 어떤 사람 며칠 전에 만나 가지고서 ‘그 어떻습니까?’ `아이고 녜, 뭐 참 죽을 지경입니다.’ 주일 지키기가 그렇게 힘든데요, 주일 지키기가 그렇게.

그러니까 항상 모가지 내놓고 있어야 돼. 오늘이고 내일이고 모가지 내놓고 지키지 그리 안 하면 주일 못 지켜. 또 언제 내가 또 만나 가지고 ‘주일 그렇츰 못 지키구로 하는데 어떻습니까, 지금? 심히 어려울 건데.’ ‘그렇지마는 뭐 이미 목사님이 가르쳐 놓은 진리 없습니까? 그거 그냥 뭐 안 되면 쫓겨나오지 어떻게 주일이야 범할 수 있습니까?’ 이러니까 그 참 세상 사람이, 그게 뭐이냐 하면은 쓸쓸한 빈들판이 됩니다. 쓸쓸한 빈들판이 돼.

이래서 뭐 정권을 가지고, 공산주의 독침을 가지고, 뭘 가지고 어떻게 와도, 어떻게 와서 죄를 지으라고 해도 죄를 안 짓는 그것이 죄의 종이 아니고 죄에 대해서 자유하는 사람이니까 그거 자신 있소? ○○○집사님 자신 있어? 있어? 할렐루야! 그 어짜면 될 것 같애. 그 보면 뭐 실행이 있어요. 실행이 있는데, 그래.

인제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독침 가지고 이래 찌르는데 그거 제일 문제라. 독침 가지고 찌를라 할 때 위협을 줄 때는 괜찮은데 독침 가지고 쿡 찔러버리고 말이지, 독약을 강제로 둘러마시고 나면 약을 먹고 나면 사람이 변질돼. 그거 나는 지금 기도해. 그거 기도해요. 알겠어? 그거 기도해야 돼.

‘주여, 독침을 찌르고 독약을 마시면 그때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본능적이라 안 되니 그때도 주님께서, 독한 것을 마셔도 상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독침 독약을 마셔도 주님에게 대한 변절되지 안하도록, 진리에 어기지 안하도록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서 기도하니까 그 기도가 제일 지금 부지런히 해야 될 기도야. 그렇게 앉아서 자꾸 그런 연습하는 사람은 돈 몇푼 때문에 죄 안 짓습니다. 알겠습니까? 이것이 자꾸 명상하고 기도하는 거라. 죄에 자유.

또 마귀에 자유가 뭐입니까? 마귀에 자유는 마귀 그놈이 이 사람을 가지고서 꾀우고 저 사람을 꾀우고 이리저리 하는데 우리가 뭐 실수하기 쉬워. 마귀에 자유, 그라면. 잘못하면 마귀 이놈이 와 가지고 꾀우는데 잘못하면 그만 그때 찰나 동안에 갑자기 우리 속에 죄악이 있으면 죄악 그놈이 툭 튀어 나와 가지고서 그만 죄 짓기 쉽다 말이오. 마귀에게 자유는 마귀란 놈이 암만 죄 지으라고 해도 죄 안 짓는 그게 마귀에 대해 자유라, 마귀에 대한 자유.

나는 요번에 교역자회 때에 그만 마귀에게 졌어요. 마귀에 져서 죄를 지었어. 죄 무슨 죄냐? 하도 교역자들이 강퍅하고 완패하고 전부 하는 행동이 전부 귀신 놀음만 하고 이거 귀신하고 한 덩어리지 도무지 성령의 사람들이 없어. 그래 놓으니까 부애가 나서 말이지 부애가 나서 그게 너무 미워서 그만 그 행동 밉다가 이라다 보니까 그만 행동이 미우니까 미움으로써 내가 실수하는 말을 하나 했다 그거요.

무슨 실수 하는 말을? ‘모두 죽었나? 썩었나? 어찌 그리 모두 못났고 간도 꼭 어데 콩쪼가리 같노?’ 이래 놨는데 그거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거 안 할 말 했어.

우리가 그런 게 참 말에 실수 안 하도록 할라 해도 얼마나 힘드는지! 이러니까, 마귀란 놈이 뭐 이렇게 저렇게 어떤 사람 와 가지고 마귀란 놈이 우리를 추켜 올리고 우리를 넘겨트리고 어떨 때는 와 가지고 애매한 소리, 억울한 소리, 별별 마귀란 놈이 우리가 죄 짓도록 만들라고 이렇게 해도 죄를 안 지어야 이거 죄에 대해서 자유하는 사람이니까 이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러니까 항상 그 연습이라. 엿새 동안은 그 연습이라.

주일날은 그 엿새 동안 연습해 가지고 이길 수 있는 그 원동력을 받는 것이 주일날이기 때문에 이 날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요. 이 날은 뭐 돈이나 받고 그런 것 받는 날이 아니라 이거 받는 날입니다.

또 사망에 자유하는 것, 사망에 주님이 해방해서 자유 주지 안했습니까? 당신이 죽음으로 우리에게 자유 주지 안했습니까? 사망에 자유하는 것, 사망에 자유는 죽음이 와 가지고서 어떻게 협박해도 자유는 죄 안 짓는 게 자유고 죄만 지으면, 사망이 와 가지고 협박할 때에 내가 죄 지으면 사망에 종 돼 버렸어. 사망에 종돼. 종은 죄 짓는 게 종입니다. 알겠습니까? 이 사망이 뭐 고문도 하고 고형도 하고 또 왜정 말년에도 ‘이제 신사참배 안 하면 전부 잡아다가 전부 죽여버린다.’ 공산주의가 ‘죄 안 지으면 잡아 죽여버린다.' 이라니까 사람들이 다 죄를 지어.

박재봉 목사님도 ‘너 이놈 네가 박재봉이라 하지? 네 이놈 네가 돌아다니면서 공산주의나 반대하고 이래 이리 이라고 다녔으니까 네가 지금 우리 시키는 대로 할래 안 할래?’ 죄짓는 일 하라 한다 말이요, 죄짓는 일. ‘못 합니다.’ `못 해? 정 못 하나? 죽어도 못 하나?' `예, 못 합니다.’ 이러니까 그 사망에 지금 종노릇 하라고, 그러니까 가슴이 도근도근 하게 이래 죽인다고 이라면서 이라는데, 그래 ‘암만 죽어도 내가 사망이, 죽음이라 하는 것이 위협을 하면서 죽인다 해도 내가 죄는 짓지 않는다.’ 요렇게 지금 하고 있는데 그만 ‘그라면 죽여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모두 결안이 되고 뭐 여기 주먹으로 쥐박고 뭐 이래 결안이 되는데, 그래 거게서 ‘아이구, 주를 위해서 죽으면 뭐 순교니까 영광이지’ 요렇게만 되면 평안합니다. 그런데 그거 안 가지면 고통스러워요. 그 6.25 때도 살라 하면 고통스럽고 ‘어라, 주를 따라서 죽자.’ 하면 평안하고, 그러니까 죽었을 때 죽을 때는 평안하고 살라 하면 고통스럽고 그게 6.25 때 석 달 동안 지나가는 때라.

박재봉 목사님이 그래 가지고서 이라니까 어떤 장교가 있다가 ‘요놈이 박재봉이라는 놈이가? 요놈이 뭐 시키는 대로 안 해? 우리에게 순종 안 한다 해?’ ‘예' `그래. 요놈은 내가 죽여야 되겠다. 이놈 가자.' 그래 가지고 세워 가지고 딱 총에 탄환 넣어 가지고서 딱 ‘요리 가자 요리 가자.’ 살살 요래 가지고 이라는데 이제 그라면 죽으러 가는 줄 알았지. 저 재넘어 가더니마는 ‘꽝’ 하며 총을 놓는데 그만 이 박재봉 목사는 깜짝 놀래 죽는 줄 알고 이런데 총 한 두방 놓더니마는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 꼴이 됐습니다. 목사님 부디 가셔서 요리요리 가면은 그만 삼팔선 넘어가니까 요리요리 가 가지고 빨리 가십시오. 겁내지 말고 요리요리 가십시오. 거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리요리 가십시오.’ 그래 지나갔지. 그래 넘어와 살았어요. 그런 것 많애. 그런 사실들이 많이 있어.

이래서, 죽음에 종되지 않는, 죽음에 종되는 건 뭐 하는 게 죽음의 종되는 것입니까? 저 다른 교회서 온 분들? 죽음에 종되는 건 뭐이 죽음의 종되는 거지? 죽음에 종되는 건 어떤 게 죽음에 종되는 것이지? 그것도 쉽지만 그럴 거라.

죽음에 종되는 것은 죽음이 죄 지어라 할 때에 죄 지으면 죽음에 종이고, 죽음이 뭐 할라 하는 건데? 죄 지으라 할 때 죄 안 지으면 죽음의 종 아니라요. 이 세 가지 이제 자유합니까? 세 가지 자유.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시험하셔서 자기 현실을 부딪혀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있도록ㅡ이거는 공심판 문제라ㅡ하나님의 공심판을 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요런 사이비한, 요런 사이비한 죄 요런 거, 그거는 죄인 줄 모르고 짓기 쉬워. 요런 자꾸 복잡한 죄를 요리조리 밀어 넣을 때에도 거게 넘어가 가지고 죄를 짓지 안해야 하나님의 의를 그대로 보수하고 자유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이비한, 저 혼자 있을 때. 기이한 어떤 환경 주위에 뭣이 부딪혀도 복잡한 가운데서 피곤한 가운데서 거게서도 죄짓지 안하는 요것이 하나님의 공심판 자유라. 이거 어렵겠소 쉽겠소? 어렵겠어? 쉽겠어? 쉬워? 이 학생들, 이 반사들 어째? 쉬워? 안 쉬워. 그걸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돼,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이러면 세 가지 자유 생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네 가지 자유 생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 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이라 말이오. 그 연결을 끊지 안할라 하면은 굉장합니다, 끊지 안할라 하면은.

얼마나 어려운 줄 압니까? 6.25 때도, 또 왜정 말년에도, 시대 시대마다 이거 끊지 안할라 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배반치 아니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이 그것이 화친의 그 권능을 받는 거라, 화친의 권능을 받는 것.

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이놈 너 지금 불미 속에 태워 죽인다’ 이라니까 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연결되어 있는 것, 다니엘도 연결되어 있는 그것을, 그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나 다니엘이나 그 사람들이 사자구덩이에 집어 넣는다고 불구덩이에 집어 넣는다고 이렇게 할 때에 그들이 그렇게 담대하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뭣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하지 안했습니까? 뭣 때문에 두려워하지 안했지요? ○○○조사님, 뭣 때문에 두려워하지 안했어? 하나님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전능자와 연결돼 있으니까 그까짓 거 비웃는다 말이오. 전능자와 연결돼 있으니까.

그래 놓으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자꾸 조아대니까 하도 애가 타서 ‘왕이여, 암만 해도 내가 우상에게 절 안 할 줄 아십시오.’ ‘이놈아, 불미 속에 집어 던져도 좋으나? 집어 넣으면 너거 하나님이 구원하나?’ ‘구원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고 구원하시고 싶으면 하실 것이고 또 거기서 타게 해 타서 죽구로 하게 하시면 죽게 하실 것이고 당신 뜻대로, 능력 없어 구원 못 하지 안하고 당신이 죽을 때 되면 죽게 하시고 살게 하시면 살게 하실 터이니까 그분 뜻대로 그분에게 주권 있지 불이 나를 태워 죽일 수 있는 줄 압니까?’ 이랬는데 ‘그러면 안 타 죽는가 보자’ 집어넣으니까 안 탔어. 알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지 않는 거라.

이래 가다가서, ‘주여 주여’ 하지마는서도 뭣이 산에 후닥닥 꿩만 하나 확 날아가도 아이고 그만 주님 다 달아나 버리고 ‘아이고, 죽겠습니다’ 이거는 뭐 주님하고 저하고 떨어진 증거라. 이 일이 평소에 얼마나 연습하고 얼마나 해야 됩니까? 모든 일에.

이러니까 어떤 사람이 일본 부장이 육 년이나 만날 돌아다니며 장 조아도, 장 조아도 나중에는 그 부장이 오니까 그만 ‘곤니찌와’ 하면 집에 들어오라 소리도 안 하고 ‘곤니찌와’ 하면 `곤니찌와' 하고 또 성경 보고 앉았고, 멸시를 얼마나 하는지! 그때는 왜정 말년에는 일본 사람이라 하면 우리 한국 사람이 막 절절 맵니다.

괭이 앞에 쥐 같소. 하나님과 연결되니까 그런 거라. 하만이 앞에 모든 사람은 막 절절 매는데 모르드개는 그때 하만이가 그래 쌓아도 눈도 꼼짝거리지 안하고 있는 그 이유는 왜 그랬지? 저 군인? 그래, 자기. 알겠어? 하나님과 연결 그것 때문에 그래.

이러니까 이 권능을 주일날 받는다 말이요, 이 권능을 주일날 받아요. 다른 날 아니고 주일날 받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의 이제, 그것은 중생한 거. 중생한 은혜. 그러니까 중생한 사람으로 사는, 중생한 사람으로 사는 그 권능을 주일날 받아요. 또 하나님을 향해서 진리대로 사는 그 능력을 주일날 받아. 영감대로 사는 능력을 주일날 받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내가 중보 노릇하는 그 능력을 주일날 받아. 창조주의 그 뜻을 피조물들에게 전달해 가지고서 피조물들이 전달되는 그 진리대로 살므로 그들이 다 복을 받는 그 역할을 하는 그것이 주일날 권능을 받아. 단일 통치권에 일치되는 그 권능을 주일날 받아요.

그러면 주일날 몇 가지 능력 받습니까,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의 능력은 몇 가지 받습니까? 예수님의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써의 그 구원 능력 받는 거는 몇 가지입니까? 잊어버리지 말아요. 요걸 가지고 있어요. 잊어버리면 안 돼.

그라면 주일날은, 주일날은 하나님 섬기는 것이고 다른 날은 그 은혜 받아 가지고서 자기 구원 이루는 것인데 그라면 주일날을 한 시간밖에는 하나님 섬기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뭘 목적해요? 두 시간 지키기를. 또 두 시간에 또 세 시간 지키기를, 세 시간에 네 시간 시키기를, 마지막에는 일주일 내 몇 시간 땅의 일 하고 몇 시간은 하늘나라의 구원 이루는 일을 해요? 우리 교회서는 아직까지 말이지요 별로이 없는데 우리 교회서 일주일 내 하나님 섬기는 일 며칠 하고 자기 땅에 속한 일은 며칠 하는, 며칠 하는 사람이 있었어? 며칠? 자기 일을 며칠 하는 사람이 제일 상등이야? 손가락으로 가리켜. 자기 일 며칠 하는 게 제일 상등이야? 하나 하는 사람, 하나 하는 사람. 이 서부교회 와 가지고서 하나 하는 새끼 하나 내가 낳았어. 하나 하는 새끼를 내가 하나 낳았어.

나도 하나 하는 사람이야. 전부가 하나 하는 사람이 돼 놓으면 나중에 가서 서부교회 전부 하나 하는 사람, 나중에는 전부 다 하는 사람.

이래서, ○○○권사님은 며칠이나 합니까? 세상 일 며칠이나 해요? 하루도 안 해요? 하루도 안해? 하루도 안 하지. 자, 하루도 세상 일 안 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하루도 안 하는 사람. 하루도 안 하고 주의 일만 하는 사람? 없어? 왜 이 없어? 있지. 먹어도 주를 위해서 살아도 주를 위해서 이제 주의 일만 하지 땅의 일 안 하고 그런 사람, 여기 권사님들 다 그렇지. 목사님들도 다 그렇고.

전도사님도 다 그렇고.

우리 ○○○장로님은 일주간에 하루만 일하는데 지금 언제 인제 벗을 때가 다 돼 가는가 몰라, 벗을 때가. 벗을 때 다 돼 갑니까? 그 허물 벗어야 돼요. 누에가 허물 벗을 걸 다 벗어버려야 이제 나비가 돼 올라가지, 안 돼.

그라면 자꾸 하던 일 안 하면 굶어 죽을라고? 뭣이 커져야 커지는 대로 벗어야 됩니까? 뭣이 커지는 대로 벗어야 돼요? 저 치과 의사 선생님? 자, 한번 대답해 봐. 그래. 며칠 인제, 며칠만 땅의 일 하고 주의 일 할 거라? 어데가 목표야? 아직 몰라. 그래 어서 어서 부지런히 해.

축복을 말이요, 축복을 하나도 못 받고 저주받아 놓으면 이레 동안에 죽자껏 해야 밥을 못 먹어요. 조금 축복 조금 받으면 이제 엿새만 일하면 그래도 밥 먹고 살 수 있어. 더 받으면 닷새 일해도 밥 먹고 삽니다. 더 받으면 나흘 일해도 밥 먹고 살아. 더 받으면 하나도 안 해도 밥 먹고 살 수 있어요. 하나도 안 해도 밥 먹고 살 수가 있어.

나는 축복 많이 받았어요. 이거 내가 공연히 잽손으로 이런 것 저런 것 혹 이래 하고 있지 세상 일 하나도 안 해도 막 밥 쌨습니다. 인제 이래 가지고 우리가 다 그래요. 하나님 축복 받으면 다 그래요. ‘목사니까 그렇지’ 목사 아니라도 그래, 목사 아니라도. 수입이 자꾸 많아지면 어짤 거라? 많아지면 자꾸 그래 될 수밖에 없지.

이러니까, 자, 우리는 이제, 우리가 일해 가지고서, 일해 가지고 잘 살라고 목표하는 사람들 손 들어 봅시다. 그게 좋은 줄 알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한 가지 일을 잘 함으로써 주님의 축복으로 잘 되고자 하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알기는 잘 아는데, 이거라! 하면 돼. 하면 돼.

주일날 이 원동력 받지, 원력을 받지, 엿새 동안 열한 가지 이 생활만 꼬박꼬박 해 보지, 하나님이 축복 안 하는가? 축복해 주면 뭐 전부 다 잘살 수 있지. 꼭 이렇게 삽시다.

이러니까 자, 이제는 우리가 한층 더 자랐으니까 회개를 해야 돼. 주일날 새벽에, 일주일 동안 새벽기도 하는 데에 어느 날 새벽기도가 제일 중요합니까? 주일날 새벽기도가 제일 중요해. 그라면 다른 날은 새벽기도 못 나와도 주일날은 나와야 돼요.

자, 주일날은 새벽기도 하나도 안 빠지고 주일날은 새벽기도 나올 사람들 손 들어 봐요. 주일날은 새벽기도 나올 사람? 주일날은 새벽기도 나와요. 다른 날, 월, 화, 수, 목, 금, 토, 못 나와도 주일날만은 새벽기도 나와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주일날만은 새벽기도 나와. 인제 그래 가지고서 권능 받아 가지고 또 월, 화요일날, 자꾸 이래 옮겨서 하도록.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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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주일성수/ 요한일서 5장 8절-9절/ 1985. 5. 5.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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