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재림

 

1982. 3. 7. 주일오전

 

본문: 마태복음 24장 32절 - 51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될수록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기다림을 흐리게 하고 없애는 그런 운동이 많이 일어날 것을  말씀했습니다.

 몇해 전에는 '아무래도 세계의 여러 모의 징조를 보아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왔으니 땅위에서 성탄절을 지키는 것은 금년이 끝이 아닌가' 하면서  최종적으로 힘을 기울여 성탄을 성대히 지키겠다고 하는 그런 종교국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기다리다가 예수님의 재림이 오지 않으니 그만 악령의  미혹에 들어서 지금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그런 경고의 설교가 거의  세계적으로 없어져가고 있는 이런 때입니다.

 32절로 35절까지의 무화과나무의 이 비유는 유대인들, 이스라엘을 가리켜  말씀합니다 가지가 연하고 잎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독립할 만한 그런 실력을 가진 민족이면서, 하나님이 이 징조로 한하여 주시기  때문에, 늘 그 독립성을 잃고 유리 방황하다가 만일 이스라엘이 독립이 되거든  예수님의 재림이 바로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이렇게 예언하셨는데, 2천 3백년  기간이나 나라를 잃고, 우수한 실력있는 민족으로 이렇게 나라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 이스라엘이 독립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주 급박한, 지금은 말세지 말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도 아무도 모르고 개인의  죽음의 날도 모르지만 여러 징조를 보아서 짐작은 할 수가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이가 늙어서 아주 구부러졌으면 죽을 때가 가까왔다고 그 징조를 보아서  짐작하는 대로 얼마 안 가면 죽습니다 그 사람에게 불치의 심한 병이 걸렸으면  살아 있지만 이 사람은 아마 죽겠다 그렇게 그 징조를 보아서 짐작한 그대로  얼마 안 가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수많은 예언을 하신 그  예언이 다 이루어졌고, 모든 징조를 보아 예수님의 재림은 아주 급박한 때입니다.

여기 대한 하나의 짐작할 징조도 또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말씀한 것을  보았습니다.

 42절로 44절까지에 보면 사람들이 도적맞지 아니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도적맞는  이치를 깨닫지 못해서 사람들이 모두 도적 맞고 있기 때문에 도적맞는 진리를  가르치면서 도적맞지 않도록 하라 하는 말씀을 여기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재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 이 말씀은, 도적이 주인이  뜻하지 않을 때에 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은 성도들이 뜻하지 아니한 그 일이  가장 심할 때 그때 오신다는 말입니다. 왜?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다  쇠잔해지니까 다섯 슬기있는 처녀들도 다 졸며 잔다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 모든 세계에 있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무관심한 마비 상태에  있는 이것도 하나 예수님의 재림이 이제 급박했다 하는 징조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법칙을 떠나서 자기 주관대로, 인간의  법칙대로, 사욕대로 소유한 그 모든 소유는 그때에 완전히 박탈되는 것입니다.

자유도 도적맞고 향락도 지위도 명예도 지위도 재벌도 재미있는 따뜻한 가정도,  예수 밖에 있는 것은 완전히 도적 맞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도적맞지 않도록  네가 깨어 지키면 된다 하는 것은,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사용하면 다 영원한  것이 되고 믿음으로 보존한 것은, 그것은 보이는 것으로는 없어지나 영원한  보존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법칙에 인정치 않는 소유나 권세나 지위나 행복이나  향락이나 생명이나 그 모든 것은 가진 것 같으나 빼앗길 것이요 있는 것 같으나  없어질 이 사실을 말씀해서 주의 날이 도적이 임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지금 소망하고 있는 것이나 경영하고 추진하는 것이나  얻었다고 가지고 있는 이것이 정말로 내가 빼앗기지 아니하고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으로 가지고 있는지, 오늘이라도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면, 내 생명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다 빼앗기고야 말 이런 것들인지 하는 것을 여기서  깨달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41절로 51절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삼기를 원하고 또 빼앗기기를  싫어하나 빼앗기는 방법을 알고 방비해서 예수 안으로 이끌지 않으면 다  빼앗기는 것이요, 아무리 욕심 많고 세력있는 사람이 빼앗아서 자기 것을  만들려고 해도 안 됩니다. 자기 것을 만드는 방법이 하나님 앞에서 계약으로  선포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 보면 「주인이 와서」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킨  것인데, 주인이 와서 주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긴다 하는 이 놀랄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긴다는 말씀은 영계와 물질계의 하나님의  모든 소유, 물질도 있겠고 권세도 있겠고 지위도 있겠고 자기의 무대도 있겠고  향락도 영광도 모든 것 다 있을 터인데, 하나님의 모든 것, 하나 둘 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긴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자기 것을 삼을  수 있는 길이 이 성경에 나타난 이것이 복음 중에 또 한 복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자기 것을 삼는 것,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이제 것이나 장래 것이나 사망이나 생명이나 바울이나  게바나 이 모든 것이 다 자기의 것이 될 수 있는 길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네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이 모든 것은 너의 것이 된다고 거기는 그렇게  발표를 했습니다.

 여기는 발표하시기를, 주인이 자기에게 맡긴 식구가 있는데 맡긴 그 식구를,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자기 식구에게 먹여 주지는 아니하고 굶기고  헐벗기고 자기 맡은 식구에게 월권이나 행하고 때리고 하는 그런 자들은 주님이  오셔 가지고 큰 형벌에 처하시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자기 맡은 식구를 이렇게  대접하지 아니하고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곤욕을 준 그자에게는  주님께서 와서 복수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맡긴 식구가 누구겠습니까? 곧 자기 이웃입니다. 자기를 보고  듣고 접촉하는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맡기워진 하나님의 식구입니다. 이 식구에  대해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맡은 그 모든 사람들이 귀로 들을 때에, 내게  대한 것을 들을 때에 그들에게 양식이 되고, 내게 대한 것을 볼 때에 양식이  되고, 내가 전하는 그 말로써 그들에게 양식이 되는, 내 언행심사와 내 자체라는  사람됨이 자기와 하나님이 관련시켜 주신 그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는, 양식이  되게 하는, 그 인격이 영화되게 하는, 자라게 하는, 사람이 회개하게 하는 이것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자이니 이자에게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무궁세계에  당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시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는 예수님의 맏아들의  계대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언행심사는 모든 사람을 상하고 모든  사람에게 양식이 되어서 성장되고 강건하게 할 수 있는 양식도 되고 이웃을  상해하는 그런 언행심사도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구원과 다른 사람의 실패를 자기 것같이 생각을 하고 그를  위하여 조심해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 「저들을 위해서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함을 인해서 저희들도 거룩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합니다」라고 아버지에게 기도할 때에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의 불행을 치료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을 도모하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언행심사를 삼가 조심하여 이 때, 저 때, 들을 때에, 보여질 때에, 느껴질  때에, 접촉할 때에 내가 형제의 구원에 손해를 보일까 하는 조심하는 이 인품, 이  본질과 본성의 생의 방편을 가진 그자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겨서 다  위임해서 다스리겠다고 약속을 선언했습니다.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는 여기에서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셔 술 취해 가지고  자기에게 맡긴 식구를 때리는 그자는 누구인가? 그는, 우리는 이런 인인 관계에  중한 영원한 책임을 지고 있는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 책임을 감당하지는  아니하고 술이 취해 가지고 맡긴 사람을 상해하는 것과 같이 이 세상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공중의 악한 영이 주관하고 있는, 마귀로 말미암아 발원되어서  인간의 머리를 통해서 나온 세상주의, 유물주의, 인본주의, 도덕주의, 사회주의,  인화주의,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소망의 그 사상과 지식과 주장들에게 도취가 되어 가지고,  「네가 만일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위엣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어떻게 사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나니 너희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취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이  걸음을 걷고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이것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을 잊어 버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들과 꼭 같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위주로, 자기를 비어 주님의 것으로 주를 위할 것인 줄을  모르고,  요한계시록 18장에 말세에 멸망하는 죄인들은 그 죄를 한 말로 말하면 자기를  영화롭게, 기쁘게, 자기를 단장해서 사치해서 이렇게 꾸미는, 자기 위주로 사는 자  이자가, 말세의 죄악에 간추려서 한마디로 강령을 들어서 말씀한 것이 자기  위주의 죄악입니다. 땅에 있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를 유황불 구렁텅이로  보내거든 하물며 예수님의 구속으로 중생함을 입은 자들이 땅위에서 자기 위해서  사는 그자에 대해서야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수하겠습니까? 택한 자면 하늘나라  가기는 가지만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것과 같은 이런 구원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한 사람을 만나서 한 시간 있으면 그만 그 사람이 배나 땅의 사람이 되고 세상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 갈급하고 세상에 용감스러워서 땅의 사람이 되어지고,  며칠 같이 있으면 완전히 주님과 하늘 나라는 배반하고 세상 욕망자로서 그렇게  사는 사람 만드는 그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는 큽니다. 이것을 여기서  말씀합니다.

 '아, 그 사람을 만나고 보니 헛된 세상을 내가 깨달았다. 그 사람을 만나서  언행심사의 행동하는 것 보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구나. 아, 그 사람이  투자하고 희생하는 걸 보니까 부활을 그 사람은 참 믿더라. 나는 하나님, 하나님  해도 그저 하나의 추상이고 하나의 추론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뿐인데 그 사람을  보니까 그 사람은 참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더라. 그 사람은 참 믿더라 그  사람은 심판을 참 믿더라. 그 사람은 부활과 영원한 세계를 정말로 바라보더라.'  이래서 사람에게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을 배불리고 장성케 하는 이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겠다, 그 위에 보면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천지는 없앨 수 있지만 주님이 선포해 놓은 말씀은 변개 못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참 또 놀랄 일은, 껍데기는 꼭 같은데 하나는 멸망을 받고 하나는 구원을  얻습니다 「두 여인이 같이 매를 갈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두 사람이 한 자리에서 누워 자는데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하나는 데려감을 당한다」 두 사람이 한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외모에는 꼭 같으나 하나는 멸망하고 하나는 구원 얻는다. 동기가 무엇이냐?  목적이 무엇이냐? 네가 신앙 행동하는 데에 주인이 누구냐? 네가 주인이냐 피로  대속하신 주님이 주인이시냐? 네 언행심사의 행동의 주인은 누구냐? 껍데기는  같아도 하나는 멸망이요 하나는 구원입니다.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이분이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이걸 바라보기 때문에 바울은 「내 마음에 자책할 것을 내가  찾지 못하나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앞에 가서 설 것이기 때문에 내가  무거운 짐 진 자와 같이 마음이 눌려 있다」 말했습니다. 외식하지 맙시다.

어리석게 외식하지 맙시다. 제가 자기를 속인 것뿐이지 하나님이 속지 않습니다.

 오늘에 일이 평안하고 형통하다고 안심하지 맙시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인정한다고 안심하지 맙시다. 모든 사람보다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형편보다 좀 더  명철한 것은 자기 양심입니다. 자기가 알 것이오. 자기 양심에 정말로 받을 것이  없다면, 자기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다면 모든 사람과 모든 형편이 증거하는  것보다 더 든든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지의 양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는 이 자리에서도 두려워 떨면서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의 앞에 갈  터이니까 어떤 것이 폭로되고 어떤 정죄가 나을까 두려워 떠는 것이 이것이  성도의 지당한 행위입니다. 지혜있는 노릇이오.

 넷째로, 37절로 39절에 「보면 노아의 시대와 인자의 재림 시대의 사람들이  같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노아 시대 홍수가 임할 때 그때 시대의 사람들과  예수님의 재림하실 때의 시대의 사람들이 같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같다면, 첫째는 구원 얻은 자의 수는 여덟 명밖에 안되었고 멸망 받은 자의  숫자는 심히 많았습니다. 불택자가 많고 택자의 수는 적고, 택자의 수는 많고  건설구원을 이루어 가지고 가는 숫자는 심히 적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성패는 첫째가 지옥가는 것이 제일 큰 실패요 하늘나라 가는 것이  제일 큰 성공이지만 인간과 인간의 그 모든 것이 차이 있어 어떤 사람은 개만도  못한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존귀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늘나라의 구원 얻어  예수님의 공로를 입고 가기는 갔지만, 하늘나라에서 지옥은 가지는 않지만 그  나라에서 부끄러울 것 그 나라에서 영광스러울 것, 그 나라에서 고민스러울 것 그  나라에서 기쁠 것‥‥ 왜?  주님의 구속받아 땅위에서 구속을 팔고 모든 성도를 다 때리고 상해밖에는 한  것이 없는 그자가 같이 하늘나라 갔을 때에 세상보다 양심이 밝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구원을 얻으나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것과 같다고 말씀했고, 천국의 제일 작은 자 큰 자를 구별해서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절대로 하늘나라는 동일의 나라 아니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는 하늘나라의 구원 얻은 자로서도 부끄러운 구원이  있다고 하는 말을 모든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과연 그분이 그말 한  것은 옳은 말이오. 성경대로의 하는 증거입니다.

 노아 때의 사람들과 예수님의 재림 때의 사람들이 같다, 그때에 구원 얻은 자의  수는 극히 적고 멸망받은 숫자가 많다, 불택자는 많고 택자의 수는 적다, 택자  중에도, 택자 중에도 건설구원을 잘 이루어서 영광스러운 구원을 이루어 가지고  가는 사람은 적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하나님이 기적으로 인도해 냈지만 믿지  아니함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광야에 시체가 되어서 멸망을 받은  것이 하나 또 거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에서, 사망에서 빠져나와 중생되어 구원은 얻었지만 광야와 같은 이 세상  교회 생활에서 항상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제 주관대로, 제 욕심대로 이렇게  살다가 광야에서 시체 된 것처럼, 하나님의 도를 듣고도, 구속받은 것이 언제든지  주의 구속은 제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자기 것으로, 주님이 대속해서, 내  마음대로 한 것을 대형해서 사죄해 줬는데 제 욕심대로 제 뜻대로 자기를 위해서  이렇게 살면서도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비유로 말씀해서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 말씀했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자기의 인질 인성을 건설하는 것이나 행위를 건설하는  것이나 모든 인인 관계의 사회성을 건설하는 것이나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건설하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이 구속하신 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분에게 피동으로, 그분의 소원대로 이렇게 건설된 것이 반석 위에 지은 집이요,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수많은 사람들이 했지만 전부 자기입니다. 든든치 못한  자기, 불변의 것이 아닌, 영원의 것이 아닌, 완전의 것이 아닌 자기를 근거해서  자기 위주로 자기 중심으로 해서 한 신앙 모든 생활이기 때문에 이것은 다  멸망이오. 우리가 핑계하지 못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무시하고, 심지어 노아의 행위를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기독교 무신론자들입니다. 기독교  유물주의자들입니다.

 교인들의 욕심이 강단에서 설교해 주는 것이 어떻게 하면 땅위에 있는 것에  부강하며 형통하며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것이 좋게 되느냐, 그것이 잘되느냐  그 방법 말해 주면 입이 벙긋거리고, '네가 이리 하면 거기 대해서 세상 사람보다  탁월한 세상에 부강해지리라' 하면 기뻐 즐거워하고, 십자가의 도, '네가 이미  있는 것을 순종으로 네가 투자해라. 너는 죽어라. 버려라. 바쳐라.

희생해라.'십자가의 도를 말하면 다 어깨가 축 늘어지고 듣기 싫어 가지고 얼굴이  시체와 같이 창백해 가지고 다 달아납니다. 교인들도 땅의 것을 주면 좋다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라」 하는 말씀을 분명히 읽었지만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어서 '무슨 설교를  해야 교인들이 기분이 나고 흥분이 나고 활기를 띠고 일어날까?' 땅의 것을  원하니까 땅의 것을 줘야합니다. 이래서 점점 강단의 설교는 죽음 이편의 설교로  점점 집중되어지고, 십자가 죽음 너머 소망의 설교는 자꾸 희박해집니다. 점점  기독교 무신론이 됩니다. 하나님을 말해도 하나님을 생활에는 인정치 않습니다.

자기의 욕망 달성에는 인정치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데는 인정치 않습니다.

 작은 자는 큰 자의 새끼입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의 종이 되는 것은 필연한  일입니다. 기독교 유물주의는 유물주의 공산주의의 밥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  무신론자는 무신론주의 공산주의들의 밥이 될 것입니다. 그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 종이 될 것입니다.

 남북에 칼을 갈고 있는 이 일을, 미군이 절대 우리 구원하지 못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세상 것 가지고, 그들의 할 일은 국력을 강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할  일입니다. 정말로는 안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하게 하는 것이요  강팍하게 독하게 하는 것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대해서 당신이  요구하시는 일」재촉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유신론주의로 전환하기 전에는, 기독교 신앙주의로 전환하기 전에는, 이  신앙이 아니고는 국가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절대로 무신론  유물주의를 능가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강단에는 이것이 중대합니다! 한국의  복음화보다도 이미 믿는 자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정말로  하늘나라를 소망해야 됩니다! 이것이 강단에 불이 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북에 붙이고 이북을 이남에 붙이는 것은 불택자의 이방인들의 그 행위에  따라서 당신이 동하지 않습니다. 피로 값 주고 산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정말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면 이런  궁지에서 건져 줄 것이요 네가 정말로 나를 아는 자로 행동하면 내가 너를  높이리라」 말씀하신 대로 이북에 있는 형제들은 구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한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와 같이 오늘 믿는 사람들이 성구를 이 세상에 있는 세상  소망에 이용할 성구들은 낱낱히 찾아서 능숙하게 이용합니다. 세상을 하늘나라를  위하여 투자하는 이 십자가의 도는 듣는 자도 싫어하니까, 배우와 같이  일시적으로 듣는 자의 기분을 좋게 하려 하는 자들의 마음은 벌써 이 십자가의  도는 점점 희미해져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로 인해서 살라는 말은 가득 찼지만,  예수로 인해서 부자 되라는 말은 가득 찼지만 예수로 인해서 네가 가난해져라,  네가 굶어라, 네가 죽어라 하는 이 말씀은 강단에 회귀하게 되었으니 주님께서  십자가의 원수의 현실이 아닌가 하는 이 점을 우리는 깨야 할 것입니다.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됩니다. 십자가의 이 길로만 생명과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과 오늘에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등한히 여기는 것이 거의 같아옵니다. 같은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이 긴박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노아 때와 꼭 같습니다. 자기 좋은 대로,  자기 좋은 대로 사람 취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사람 취하고, 자기 좋은 대로  의식주 취하고, 자기 위주로 하는 것 여기서만 멸망하는 그 시간까지 급급하고  여기다가 주력했지, 노아를 통해서 선포한 하나님의 홍수 심판은 우습게 생각하고  하나의 정신이상자와 같이 그렇게 여겼던 것과 같이 오늘도 순 복음이 땅에 있는  복음만 말하면 기분이 좋아서 산과 물을 개의치 아니하고 모여들지만 십자가의  도만 말하면 비쭉비쪽 하면서 다 돌아갑니다. 주여!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정말로 하루종일 사는 생활이,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했는데, 그 구속은 댓가 내야 됩니다. 주의 구속은 댓가를  내야되는 것이오. 댓가를 낼 만한 댓가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댓가가 없어도  값을 내라 했습니다. 주님이 나 위해서 모든 것 다 희생해서 죽어 나를 대형 대행  대화친을 하셨으니, 이렇게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은 주의 구속을 받은 자들은  「다시는」 거기 다시라 말했습니다. 「다시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대신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를 위해서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무슨 욕망에서 살고 있습니까? 이것이 막바로 심판이오. 예비  심판이오. 여기서 심판 받으면 무궁한 결정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여기서  하나님이 예비 심판으로 영감으로 말씀해 주시는 말씀을 받아 자기를 심판하지  않으면 무궁심판에 갈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가지 무서운 것, 노아 때에 인간들이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지만 인간을 탁월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을 초월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생각도  했고 분요도 했고 학박사도 되었고 권세도 가졌고 명예도 가졌고 단합도 했고  온갖 것 다 했지만 인간이 할 수 없는, 인간이 불가능한 그 방어는 그들이  못했습니다. 홍수로 멸할 때에 이 멸망은 저들이 방어 못했습니다. 피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와 노아 홍수 때와 이것이 같습니다. 인간이 방어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인간이 방어할 수 없는 일이 더 크고 큰 일인데, 이것이 영원한  일인데 인간이 방어할 수 없는 일을 인간들이 지저분하게 모든 걸 해 가지고  방어할 줄 알았더니 홍수가 척 내리니까 그들의 모든 해를 방어하는 것, 오만 것  다 첩첩이 방어선을 만들어 장지만 그까짓 게 소용이 없었습니다. 노아 홍수의  멸망은 그들이 방어하지 못했습니다. 이걸 그들이 몰랐습니다.

 인간이 보존할 수 없고 인간이 구원할 수 없고 인간이 성공할 수 없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건설, 인간이 할 수 없는 성공, 인간이 할 수 없는 행동 이것은  그들이 못 했습니다. 얼마나 발버둥치며 살고져 날뛰었을 것이오. 그러나 다  죽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방어도 했고 건설도 했지만 인간이  할 수 없는 그 일이 큰데, 인간이 할 수 없는 그 일은 그들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 힘의 그 선 아래서 날뛰었지, 인간 선 위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방어하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건설을 할 수 있는 이것을 바라보면서 한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습니다. 만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만이 라고 하면  노아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요 천한 사람이요 외로운 사람이요 헛일한 사람이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방어, 인간이 할 수 없는 건설 이것이 있어 이것이  영영하고 온전하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 예비 영감을 받은 사람들, 현실 영감을  받은 사람들, 회고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후회를 하고 미래를 위하여 현실을 아껴  조심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이것을 봤기 때문에 밤낮으로 저들이, 천인 만인이 다 '이게 제일이다,  저게 제일이다' 해도 그까짓 거 깔보고 눈 안에 들지를 않았습니다 인간이 방어할  수 없는 총수의 방어, 인간이 건설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 이것을  주시마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이 말씀을 듣고 노아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또박또박 '끊어라' 끊고, '못을 박아라' 박고, '칠을 하라' 하고, '층대를 질러라' 할  때에 지르고, 노아 홍수가 없으면 노아의 이 한 일은 완전히 미친 일입니다.

완전히 어리석은 일이요 완전히 천한 일이요 가장 불쌍한 일이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홍수의 심판이 왔을 때에 노아가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딱딱한 것이 모든 것을 방어했고 모든 것을 구출했습니다. 이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꼭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이것으로서 끝나고 인간이 할 수 없는 멸망과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지능으로, 우리들의 인본으로,  인간들의 과학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원입니다! 인간들의  노력으로 지능으로 방어할 수 없는 이 멸망이 영원한 멸망입니다! 어리석지를  맙시다.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명심하고 깨어 살아야  할 것입니다. 허영과 허욕에 날뛰지 맙시다. 여러분들, 허욕 하나, 어떤 사람 보면  안 가질 허욕 하나 부린 그것 때문에 그 댓가 내느라고 일생 동안 망합니다. 일생  동안 고생합니다. 허영 위해서 글자 하나 쓴 그것 때문에 일생 동안 대대로  망치는 사람 얼마든지 봅니다.

 아담 하와가 허영과 허욕의 한 행동이 그의 대대 손손이 영원히 멸망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죄의 값은 이렇게 큽니다. 의의 값은  이렇게 큽니다. 첫째아담에서 죄의 값을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고 둘째아담에서  의의 값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속지 맙시다! 우리는 손해가는 것 아닙니다! 믿음 지키는 것이 손해가 아닙니다!  믿음 지키는 것이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불원간에 인간이 할 수 없는 해가  오고 인간이 할 수 없는 무궁세계의 건설이 오는 것이니까 이것은 믿음으로만  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건설구원 얻은 자의 수가 많지를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처럼  오늘도 무시하는 것이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땅의 것만 생각하는  것같이 오늘도 땅의 것만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입니다.

 노아가, 인간이 모든 방편 다해서 낱낱이 했지만 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전멸을  당했고 저들의 건설이 다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믿음 하나를 위주로 한 노아는,  전인류가 막지 못한 것 그 해를 노아는 막았습니다.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또박또박 지킨 그것이 막았습니다. 그것이 구원해서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고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세계를 차지했습니다.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리라」 우리 앞에는 큰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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