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기쁘시게


선지자선교회 1986년 5월 16일 오일밤

 

본문 : 창세기 26장 1절∼33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뻔 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 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에 있을 때에도 큰 흉년이 들어서 어려움을 당하고 애굽으로 내려갔었는데 또 이삭 때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드니까 흉년에 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서 이삭이 그랄로 내려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습니다.

그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인도하는 곳에 가서 머물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복을 줘서 네 자손이 창대케 되고 또 그뿐만 아니라 너로 인해서 세계 모든 민족이 다 복을 받는 복의 기관이 되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신 대로 머물렀습니다.

머물렀는데 하나님께서, 12절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대케 되고 아주 거부가 됐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물론 한 알을 심어 가지고 열매가 백 알을 맺는 그런 일은 있지만 백 배나 얻었다는 그런 말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한 마지기에 쌀 한 요새는 좀 많이 난다고 하니까 한 댓 가마니 난다 합시다. 우리가 그전에 농사지을 때는 한 마지기 좋아야 쌀 세 가마니 그리 안 하면 한 가마니 그렇습니다. 이런데 백 배나 얻었다 하니까 만일 다섯 가마니 보통으로 수확하는 것이라면 백 배니까 오백 가마니를 얻은 택입니다. 이런 것은 참 물에 넣어도 붓지 안할 말이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들리지만 하나님 말씀은 거짓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 해에 백 배나 수확을 했다 그래 가지고 그만 큰 거부가 됐다 했습니다. 거부가 되고 또 짐승들도 많았고 또 거기에 따른 종 업자들도 많았다 이랬습니다. 참 이거, 농사를 지어 봐도 일군이 지금은 더욱 귀하고 옛날도 귀합니다. 아마 회사를 지금 경영하는 사람들은 그 회사에 알맞은 사원들을 모집하기가 심히 어려울 것입니다. 좋은 사원들을 만나면 그만 그 회사는 잘 됩니다.

그런데, 여게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을 당할 때에 어려움을 못 견뎌서 지금 애굽으로 내려갈라고 향하고 있는데 "애굽으로 가지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서 머물러라. 그라면 내게 네게 축복해 주겠다" 또 축복을 해 줘서 네 자손이 크게 번성할 뿐만 아니라 세계 천하에 모든 사람들이 너로 인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복의 기관이 되게 해 주겠다. 또 그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머물라고 했는데 그곳에 머물 때에, 목축업이라 하는 것은 참 풀이 있어야 되고 또 물이 있어야 되지 풀과 물이 없으면 목축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물이 귀해서 우물을 파 가지고 물을 먹이게 되는데 물 얻기가 심히 힘들었습니다. 힘들었는데, 이삭의 모든 목자들이 우물을 파 가지고 겨우 물을 얻으면 또 그 블레셋 사람들이 와 가지고 덮쳐서 우물을 뺏들었습니다. 또 뺏들면 또 그냥 쫓기고 또 쫓겨가 가지고 딴데 가서 또 우물을 팠습니다.

또 거기서 하나님이 이 이삭에게 복을 주시니까 농사지은 것이 그 해에 백 배나 얻었다 이랬습니다. 그뭐 여러 해가 아니고 그 해에,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또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까 모든 육축들이 심히 많아져서 떼를 이루었고, 또 아주 종들이 많이 생겨서 노복이 심히 많았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해서 `너거가 우리 본 족속보다도 더 강성해지고 많이 강해졌으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너거를 그대로 둬 둘 수가 없고 이라니까 떠나가거라. 만일 너희들이 여기 있으면 우리가 너거 때문에 치여서 못 살겠고 너거가 나중에 가서는 주인이 되고 우리는 쫓겨나야 될 그런 형편이 닥칠 터이니까 이곳을 떠나 주면 좋겠다.' 할 때에 또 떠났습니다.

떠났는데, 떠나고 난 다음에 얼마 있다가는 그 블레셋 왕 아비멜렉 하고 또 그의 친구 아훗삿하고 비골이라는 군대장관하고 같이 이삭에게 찾아왔습니다. 찾아와 가지고 그때 `우리가 서로 화친하자' 하면서 찾아오니까 이삭이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싫어해서, 미워하고 싫어해서 나를 쫓아보내서 내가 쫓겨서 이리 왔는데 나를 쫓아보내 놓고 또 뭐할라고 나를 찾아왔느냐? '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아비 멜렉과 모든 사람들이, 같이 일행 말하기를 `우리가 보니까 너는 분명히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너에게 축복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 그들이 본 것은 그런 것을 본 것이 아니냐 싶습니다. 자, 그들이 거기서 참 우물을 하나 팔라고 하면 뭐 요새는 기계가 있으니까 쉽고 또 인수하는 것도 다 모두 다 사람들의 지능이 늘어서 그렇지만 거게는 아주 우물하나 마련하기가 참 힘이 많이 듭니다. 이래서 우물에, 물을 길러 갈라 하면 짐승의 그 껍질을 벗겨서 가죽 부대를 만들어 가지고 가면 예사 십 리 뭐 십 리나 한 십 오 리 또 먼데는 이십 리 이래 가 가지고 가죽 부대에 물을 넣어 가지고 오래 오기도 하고 아주 물이 회귀한 곳입니다.

이랬는데, 그들이 물 없는 굿에 가 가지고 우물을 팔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생수 자리를 주어서 생수 근원을 얻어 가지고 우물을 팠습니다. 좋은 우물을 파니까 또 이 사람들이 용심이 나서 아, 저것들 이제 물 없으면 죽을 줄 알고, 물이 없으면 죽고 딴데로 도망가고 이제 물 있는 곳으로 달리 멀리 도망가리라 이랬더니만 또 물을 얻어 가지고 살게 됐으니 하고 그만 그들이 시기가 나 가지고 우물을 또 메웠습니다. 우물을 파면 메우고 또 그 물 하나 얻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데 그 어디 뭐 다행히 참 생수를 얻어 그렇지, 물구멍을 얻을 수차 없다 그말이오. 없는데, 또 어떻게 참 하나님의 은혜로 물구멍을 얻어 가지고 우물을 파면 또 메우고 이래서 한 서너 차례 메웠습니다.

메우니까, 쫓겨갔습니다. 우물 파 놓은 것을 메우면서 `이거 우리 우물이라 너거 먹으면 안 돼. 우리 우물이라.' 무례한 짓을 하면 아무 말도 안 하고 또 그 우물 뺏기고 양보하고 또 쫓겨가고, 또 파고 그렇게 하면 또 꼼짝 못 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또 쫓겨가고, 또 파고 그런 걸 또 가서 메우고 불량을 지기면 또 쫓겨가고 이렇게, 쫓으면 쫓겨가고 우물 판 것을 빼앗으면 뺏기고 이거 뭐 등신 바보 같은 그것인데 보기에.

그렇는데, 보니까, 우물을 빼앗았으니 이제 저거들은 그만 목축 실패하고 망한다 했는데 그렇게 자기네들은 우물 팔라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못 파는 우물이 또 뜻밖에 우물이 생겨서 또 우물을 파지, 뺏기고 나면 또 우물을 파서 또 우물 있고 또 쫓아 보내면 쫓겨 가 가지고 또 가는 곳이 아무리 박토 지경이라도 쫓겨가면 거기가 또 그만 옥토가 돼 가지고 그 초장이 잘 되지 또 농사짓는 데도 그 사람들 좋은 옥토는 다 차지하고 아주 토지도 쓰지 못할 거 아주 박토 얄궂은 거 뭐, 내버린 거 그런데다가 농사를 짓는데 그 해는 백 배나 그만 얻어 버렸어. 이래 놓으니까 암만 봐도 이것이야 하나님이 분명히 저는 이삭하고는 같이 하기 때문에 그렇지 그렇지 안하면 저럴 리가 없다. 뭐 망치고 나면 또 왕성되고 망치고 나면 또 왕성이고 망치고 나면 왕성이고 도무지 이것을 감당할 수가 없는 그것을 보고 이제 아비멜렉 왕하고 또 그 군대장관하고 또 친구하고 같이 왔습니다.

와 가지고, 찾아 와서 이삭을 찾으니까 이삭이 있다가서 `그래 뭐 할라고 찾느냐?' 웃으면서 친근히 하면서 찾아오니까 `나를 미워서 쫓아보내서 우리가 쫓겨 가지고 이래 왔는데 쫓아 보낼 때는 언제고 또 뭐 찾아오기는 뭐 하러 찾아왔느냐?' 이라니까, 그뭐 그럴 때 참 아주 분을 다 푼 택입니다. 이라니까 그 왕이 있다 말하기를 `우리가 보기에 당신은 하나님이 분명히 같이 하시고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까 아무래도 당신들을 대적하다가는 우리가 망하겠으니 우리가 지금 찾아 온 것은 서로 화친을 해 가지고 우리와 당신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과 우리 후손들과 당신의 후손들이 서로 다투지 말고 어짜든지 화친을 해서 이렇게 하도록 그렇게 우리가 약속을 하고 계약을 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하자.

그거 때문에 찾아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삭을 아주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워한 것이 뭐 이삭이 악을 부려서 두려워한 게 아니고 불량을 뽑아서 두려워한 게 아니고 아주 모든 웅변이나 또 무슨 궤변이나 이런 술책이나 그런 걸 써서 두려워하지 안하고, 보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분명히 하나님이 이삭에게 해 주시는 일이 뚜렷하고 분명하니까 그만 그게 두려워서 와 가지고 화친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때에 `그러면 뭐 그것은 그럽시다. 우리는 언제든지 남을 해하는 일은 안 하고 그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할라 하는 것이니까 그러면 그렇게 서로 맹세할라면 맹세하고 계약 쓸라면 계약 쓰고 마음대로하자.' 이라니까 그들이 계약을 썼습니다. 잘 대접을 해서 계약을 쓰고 그들이 떠났습니다.

여게서 몇 가지를 깨달아서 우리 신앙생활에 참고를 삼을까 해서, 이 본문을 선택한 것입니다. 첫째는, 만일 하나님께서 이삭의 생각대로 애굽으로 갈라고 할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이삭의 가는 길을 조정해 주시지 안했더라면 그 이삭이 어떻게 됐겠던가? 만일,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인도하시는 그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강성하고 복을 받았지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면 어떻게 됐겠는가? 이것을 첫째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요거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인 것을 언제든지 굳게 잡고 또 이분은 전지 전능의 완전자이신 것도 우리가 굳게 잡고 또 그분이 목적을 정하신 것도 굳게 잡고 목적을 위해서 전지한 그 지혜를 가지고 영원까지의 모든 것을 단번에 예정해 놓으신 것을 우리가 또 굳게 잡아야 합니다. 또 예정해 놓으시고 또 당신이 예정의 순서대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날마다 이 섭리하시는 이 섭리를 주권능력으로 모든 개별까지를 다 섭리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확고히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치, 뭐라고 비유를 할꼬? 이 공중에다가 아주 수백 길 높은 이 공중에다가 이 모든 철로 같은 이 선을 가설했습니다. 이 선을 가설해서 그 철로 같은 선이 공중에 꽉 이렇게 다 깔려 가지고 있는데 깔려 가지고 있는 그것이 예를 들면, 그 참 복잡하지만 개인 개인의 그 사람에게 대해서 그 사람에게 대한 그 길이 앞으로 수많은 굴곡을 가지고 이렇게 그 노선이 꽉 깔려 가지고 있는데 그 노선이 꽉 깔려 가지고 있어서 그 종착이, 종착점이 행복된 그 종착점도 있고 또 멸망의 종착점도 있고 이렇는데 택자들에게는 구원의 종착점이 돼 가지고 있고 불택자들에게는 멸망의 종착점이 돼 가지고 있는데 그 노선이 굽이도 여러 수천 수백이요 둘러가는 돌뱅이도 수천 수만이요 이렇게 이 선이 공중에 깔려 가지고 있는데, 지금 간단하게만 말하겠습니다. 깔려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선과 선이 얽혀 있기를 측량할 수 없는 만침 복잡하게 이렇게 복선적으로 엉켜 가지고 있는데 저 종착에 행복된 그 구원이라는 그 종착에 그 노선을 사람들이 어떻게 그 선을 짐작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선을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걸어가면 그 행복된 종착에 도달할 수 있다 하는 그런 것을 사람이 행복된 노선을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구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없는데, 이렇게 가다가 만일 그 노선에서 그 철로에서, 그 노선에서 거기서 그만 한번 잘못 가서 떨어지면 다시는 올라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만 떨어져 가지고 혜매다가 멸망하고 맙니다. 이런데 택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선에서 떨어지면 땅에 부딪혀서 죽지 안하도록 중간에 무슨 보호망 같은 그런 걸 해 놔 가지고 있어서 떨어졌다가는 다시 붙들고 그 선에 올라설 수 있도록 그렇게 되고 불택자들은 한번 타락하면 다시는 그 본선에 올라서지를 못합니다.

이래서, 불택자는 한 번 타락으로서 그것이 영원한 멸망이지 다시 두 번 타락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택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한 번 타락한 것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그 타락에 다시 복구되고 또 타락했다가 복구되고 타락했다가 복구되고 하는 그런 것이 뭐 수천 수만 번이라도 되어지는, 복구할 수 있는 복구의 구원 길이 열려 가지고 있는 것이 기독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선이 복잡하게 이렇게 돼 가지고 있는데 그 선을 아무도 내 행복된 선은 어느 선을 타고 가야 행복된 종착에 이르겠다 하는 행복된 그 행복에 도달하는 그 행복선을 아무도, 전지하신 예정하신 그분 외에는 아무도 그 선을 모릅니다.

행복선은 아무도 모릅니다. 뭐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예정하신 전지하신 그분이나 알지 다른 이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는데, 그 행복선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 행복선으로, 행복선으로 갈라면 어떨 때는 돌뱅이 백 번도 돌고 천 번도 돌고 요리 갔다 요리 갔다 마구 복잡하게 돼 가지고 이래 있는 그 선을 제 단독으로 절대 찾을 수 없습니다. 전지하신 분이 예정해 놨는데 그 예정이, 예정된 그 행복의 길을 우리가 찾아갈라 할 때에 어떻게 가면, 내가 선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선이 있는 줄 안다 할지라도 그 행복선을 찾을 수는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행복선을 인도하십니다. 인도하시는데, 그러면 졸졸졸 인도하시는 그 인도는 뭣이 인도냐 하면 우리 택자들에게 현실을 주시는 그 현실이 행복선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시는 그 현실이, 현실이 그냥 닥치는 현실이 아니고 그 현실이 지금 내게 대한 행복 노선이 딱 하나님께서는 예정을 딱해서 그 예정된 노선은 변동 못 합니다. 못 하는데, 그 예정된 노선으로 주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요리 졸졸 따라 오너라.' 인도해 주십니다. 인도해 주시니까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면 잘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는데 그러면 인도하심이 어떤 것이 그 인도하심인가? 그분이 이런 현실을 주시고 저런 현실을 주시고 자꾸, 현실에서 현실을 주시는 것은 그것은 뭐이냐? 현실 주시는 것은 그 분이 우리에게 구원의 종착을, 종착에 행진할 수 있는 그 노선을 우리에게 인도해 주시는 그 인도입니다.

현실이라 하는 것은 그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도를 받아서 현실을 만나 가는데 그 현실에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구원 노선에 거기에 현실이라는 그 현실로 우리 노선을 인도해 주십니다. 인도해 주시는데, 거기에서 내가 지금, 노선을 줄 때에 그 노선을 내가 걸어가야 됩니다. 길을 가르쳐 주시면, 길을 인도해서 가르쳐 주시면 그 길을 내가 한 자욱씩 떼 놔서 걸어가야 됩니다. 아무리 길을 가르쳐 준다 해도 내가 걸어가지 안하면 그 길은 가지지 않습니다. 내가 걸어가야 됩니다. 내가 걸어가는 것은 뭣이 내가 걸어가는 것인가? 그것은 내가 그 현실에서 내 언행심사의 행동하는 그것이 그 현실을 밟아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 현실을 밟아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걸어가는데, 거게서, 인도를 받았지만 인도받은 거기서 또, 현실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러면 현실로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노정을 인도하시는 것이고, 노정을 인도하시고 난 다음에는 '우리에게 이렇게 걸어라 저렇게 걸어라, 발자욱을 이래 떼 놔야 된다 저래 떼 놔야 된다, 우리의 그 일보 일보의 발자욱 떼 놓은 것을 또 당신이 또 인도하십니다. 네가 발자욱을 이래 떼 놔라 또 요게는 저래 떼 놔라 요게는 네가 아주 돌이 뽀쪽하고 매끌매끌하니까 여게는 네가 어떻게 조심해서 발자욱을 떼 놔야 되지 그리 안 하면 미끌어지면 저 밑에 떨어진다.

인제 그렇게 또 아주 매끄러워서 참 걸어가기 어려운 곳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말이지 요런데는 내가 이렇게 발을 좀 빗디뎌서 요래, 비틀트려서 요래 디뎌야 되지 요 잘못 디뎠다가는 떨어지면 너는 절단나니까 해라 그렇게, 한 자욱 한 자욱 걸어가는 것을, 우리의 인도자 되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안내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 인도자가 인도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바로 그것이 우리 현실에서, '너희들이 사람에게 배울 것이 아니고 너희 안에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옳고 바르고 참되게 가르쳐 주나니 그대로 거하라' 하는 대로, 성경은 우리가 다 알지만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한다고 말씀하신, 그 현실에 있어서 내가 발자욱을 이렇게 떼 놔야 되느냐 저렇게 떼 놔야 하느냐 하는, 아무리 길을, 노정은 인도하셨지만 그 노정에 내가 걷기를 바로 걸어야지, 암만 길은 바로 인도했다 할지라도 그 길에서도 탈선돼서 다른 길로 갈 수도 있고 바른 길로 갈 수도 있는데 길은 인도하셨지만 그 길 인도하시는 데에 내가 바로 걸어가야 되지 바로 걸어가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해라 조렇게 해라 현실에서 기름 부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영감이 우리에게 인도해 주시는 그 영감은, 신구약 성경을 우리가 알고 그라고 난 다음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마음이 정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본다' 말씀한 대로 정결한 마음이나 착한 양심이나 한 마음인데 고때에, 착한 양심을 쓰게 되면 기름 부음이 인도하는 인도를 받을 수가 있고 양심을 쓰지 안하면 기름부음이 인도하는 것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양심을 쓸 때에는 내가 하나님의 문서 계시 말씀을 따라서 옳고 바르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갈라고 애를 쓰는 마음을 가진 때지만 양심이 없는 때는 분명히 무슨 어떤 욕심이 저를 주관하고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감정이 주관하고 있든지 무슨 악독이 주관하고 있든지 무슨 행락이 주관하고 있든지 분명히 양심이 우리 마음을 주관하지 안할 때는, 양심이 우리 마음을 주관할 때는 믿는 사람의 신앙 양심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게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가지고 가야 되겠다 하는 그게 신앙 양심인데 고 양심이 자기를 인도하치 안할 때에는 분명히 그 사람의 인도자는 자기치 원죄나 본죄, 악령이나 악성이나 악습, 원죄나 본죄나 그것들이 인도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그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에 봉착되도록 할라고 우리 노선을 이렇게 딱, 그래 함부레 예정해 놓은데 그 예정해 놓은 그 예정 순서대로 이렇게 이렇게 자꾸 순서를 다가서 요리 오너라 요리 오너라 요래 자꾸 순서를 한 현실 한 현실에서 순서를 다가 주는데 제가 거기서 자욱만 옳게, 떼 놓으면, 요 현실에 옳게 떼 놓으면 또 그만침 가까워졌고 또 그 다음 현실에서 옳게 떼 놓으면 그만침 가까워졌고 자꾸 가까워지는데 고 현실에서 성령이 인도해 주시는 고 인도를 따라가면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의 구원을 예정하신 고 예정을 탈선하지 안하고 고 예정대로 졸졸 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떤, 그것은 뭐 이래 말로 잠깐 해 가지고는 거석할 것이고 어떤, 말할 수 없는 그 노선이 말이지요, 이 지도도 보면 거기서 뭐, 이 세상 도로로도 말해도 기차 선로 뭐 고속도로 선로, 배선로, 아주 번화한 번창한 그런 곳으로 말하면 그 선과 선이 얽혀서 어덴지 모르지 않습니까? 이거와, 수많은 인간들이 이 세상을 거쳐 가는데 반드시 사람마다 출발하는 출발점이 있고 이리이리 이리이리 틀어 가지고 저 마지막에 종착하는 그 사람이.

천 명이면 천 선이 있고 만 명이면 만 선이 있고 억만 명이면 억만 선이 있고 뭐 몇 백억만이면 백억만 선이 있는 그 수많은 선이 있으니 그 선을 누가 바로 찾아가겠느냐? 아무도 찾아갈 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선을 바로 찾아갈 수 없는데 택한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선을 바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 뭐이냐? 우리에게 현실 닥쳐오는 것이 그것이 불신자들의 그 현실은 그것은 멸망하도록 하는 그런 현실이지만 택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현실이라 하는 것이 이렇게 복잡한 자기 노선 자기 궤도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인도라 하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믿어야 합니다.

인도로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현실을 만날 때에 그저 참 `새털같이 많은 날이라 어제가 지나갔으니까 오늘 또 하루 닥쳤다. 오늘 닥쳤으니까 오늘에 이런 저런 모든 현실을 닥쳤다.' 이렇게 생각할 게 아니라, 눈을 감고 여러분들이 그런 것도 좋습니다. 좀 `아, 하나님의 그 예정이 얼마나 복잡할까? 하나님의 예정이 얼마나 복잡할까? 그러면 개인 개인의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에 개인 개인의 선이 다 예정돼 가지고 있는데 천 명이면 천 명의 일생 노선이라 하는 것이 다 예정돼 가지고 있으니까 그 선이 얼마나 복잡할까?' 그런 것도 한번 명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수많은 있는 가운데 거기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행복된 길이 `이 길로 가면 행복되겠다 저 길로 가면 행복되겠다' 그것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복잡한 가운데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현실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시는, 우리의 노선을 하나님께서 인도해서 자기 노선을, 그러면 자기 노선을 인도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일생 동안 세상에서 만일 천 현실을 통과했다 하면 천 현실은 자기 예정된 노선을 천 토막을 걸어갔다 만 현실을 당했다 하면 만 토막을 걸어갔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에게 복잡한 이 노선을 예정해 놓으셨는데 예정된 이 복잡한 길을 주님이 큰 힘들어 가지고 한 현실 한 현실로서 우리의 노정을 순서적으로 이렇게 안내해 가지고 우리에게 통과하게 하는 것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굳게 잡고.

그러면 이렇게 인도하시는데 거기서 노선은 인도하셨지만 그 노선에서 내가 바로 걸어야 되는데, 그 노선에 바로 걷지 못하면, 아무리 만일 우리가 이 노정도 안 그렇습니까? 현재 이 자리 닥쳤습니다. 이 자리에 섰지만 이 자리 서 가지고 서울도 갈 수 있고, 이 자리 서 가지고 부산도 갈 수 있고, 이 자리에 서 가지고 대구도 갈 수 있고, 이 자리 서 가지고 바다로 빠져 죽을 수도 있고, 이 자리에 서 가지고 불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이 자리 여기서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그 분기점이라 하는 그 분기점이라 하는 것은 그것도 수없는 모두, 분기라 하면 갈래길이라 말 아니요? 현실에서 수없는 갈래길이 돼 가지고 있는데 그 수없는 갈래길 거 게서 또 하나님은 내 노선을 딱딱 순서적으로 이렇게, 노선을 순서적으로 안내하시지만 안내한, 노선이라는 고 현실에서도 거기서도 지금 분기점이 백도 천도 넘으니까 이리도 갈 수 있고 이리도 갈 수 있고 이리도 갈 수 있으니까 어느 길로 가야 될란지,그 길을 누가 `요리 가면 행복되겠다 조리 가면 행복되겠다' 누가 그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까? 그거 누가 비판할 수 있습니까? 그걸 비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짐작도 비판도 못 합니다. 이런 것을 좀 우리가, 좀 명상해야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이 그러면 나를 일생 동안 내게 대해서 내 정로를 하나님이 인도했습니다. 정로를 줬습니다. 정로를 줬지만 정로 준 그 현실에서 수많은 갈래길이 있으니까 이리 가야 살란지 저리 가야 살란지 어디로 가야 내가 성공하고 실패를 안 할란지 그거 도무지 모르겠다 그말이오. 모르겠는데 고 현실에서 우리에게 열 길 백 길 뭐 수많은 수십의 갈래길이 있는 그 중에라도 자기가 걸어가야 될 생명의 길은 꼭 하나뿐입니다. 생명의 길은 한 구멍뿐이지 두 구멍 없습니다. 생명의 길은 한 구멍뿐이라.

그러면, 한 구멍뿐인 고 구멍으로 들어가면 돼지고 고 구멍으로 들어가지 안하고 탈선돼 버리면 삐뚤어졌으니까, 탈선돼버렸으니까 거게까지 간 것이 도리어 화가 되겠습니다. 자기 노선을 걸어가는 데에 또 탈선이 됐겠습니다.

탈선이 됐는데,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또 현실을 주는데 현실을 주면 그 현실에 내가, 탈선됐으니까, 탈선이, 과거에 탈선된 그것과 또 현실과, 과거 탈선과 현실과 맞주면 탈선하고 현실하고 맞주니까 그것이, 탈선 그것이 현실에 또 부작용을 일으켜 가지고 현실에서 아무리 이렇게 바로 갈라 해도 벌써 탈선됐기 때문에 그것이 지장이 있어 가지고 잘못 가게 된다 말이요, 그걸 가리켜서 거리끼고 얽매이기 쉬운 것을, 삐뚤어진 것을 벗어 버리라.

전부 성경에는 `죄는 망한다'하는 그게 말하자면 삐뚤어지면 망한다 그말이오.

삐뚤어지면 망한다 하는 그 말은 무슨 말이냐? 다른 말로 말하면 네 길이 있는데 길을 잘못 들어가면 헛일이다 하는 그말 한 가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부 도리라 이렇게 말하는데, 고 복잡하니까 그거 언제 시간 있으면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이 간단하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셨으면 예정한 데 대해서, 예정에 대해서 예정론이 같지 않습니다. 수많은 예정론이 있지만 예정론이 있기를 뭐 어떻게 하고 있느냐? 예정론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예정이 없다, 그 되는 대로 오늘 이러고 내일도 이러고 자꾸, 되는 대로 순서가 이루어진다.' 그렇게 말하고 `다만 믿는 사람들에게만 대해서 예정이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또, 믿는 사람에게 대해서도 구원에 원 강령이 되고 줄기되는 것만 예정돼 있지 세부적인 그런 것은 예정이 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거 다 머리가 둔해 그렇습니다. 세부가 예정되어 있지 않으면 줄기가 예정될 수 없습니다.

줄기가 예정됐으면 세부는 필연적으로 예정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별 예정이요 다 예정인데 이렇게 그 수많은 예정이 되어 있는데 그 예정된 수많은 예정인데 자기 정으로의 길을 걸어가는 데에 누가 자기 정로의 길을 걸어가겠는가? 그러니까 그거 다 질팡 갈팡, 불택자들은 질팡갈팡으로서, 불택자들의 현실과 믿는 사람의 현실이 다르다 말이오. 이거 좀 깨닫기가 참 어렵습니다. 아주 어려운 말이오.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정은 다 해 놨는데 예정에 이래 가다 푹 빠져 버리고 질팡갈팡 돼 가는 대로 이와같이 가지만 택자들에게 대해서는 인도하시는 것이 그 현실 현실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러면 내게 대한 영원한 걸, 내게 대한 영원한 길을 내가 어떻게 찾아서 내게 대한 영광스럽고 존귀한 구원이 되어 지는 영광의 그 구원의 길을 하나님이, 내가 가는 대로 그 영광의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정하신 고 예정대로 걸어가야 되지 예정을 걷지 안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예정돼 있기 때문에 그 예정된 그 길 외에는 행복된 성공의 길이 없습니다. 고 길로 가야 되지, 그 길로 가야 되는데, 이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힘 들여서, 현실 현실을 만들어 주시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예정된 그 길을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정된 그 노정을, 우리 노정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니까, 현실에서, 또 자기가 현실을 만나고 보니까, 현실에서 이 구멍으로 나가야 될란지 저 구멍으로 나가야 될란지? 이 구멍으로 나가면 빠져서 죽어 버리고 또 저 구멍으로 나가면 지금 호랑이가 있고, 저 구멍으로 나가면 또 사자가 있고, 이 구멍으로 나가면 또 뱀이 있고, 이 구멍으로 나가면 큰 불덩어리가 타서 죽고, 예를 들면 비유컨대.

이렇게 갈래길이 많은 고 현실인데 고 현실에 수많은 갈래길에 하나만 되는 이 생명길을 어떻게 찾아서 갈 수가 있겠느냐? 다른 거는 복잡하니까 다 미루고, 그저 여러분들이 언제 시간 있으면 좀 말하겠는데.

현실에서 하나만 되는 생명 구멍으로, 생명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구멍은 하나뿐인데, 현실에서 생명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구멍은 하나뿐인데 이 구멍이 어느 구멍인지 구멍이 백 개도 천 개도 넘으니까 어느 구멍으로 같지 모른다 말이오. 어느 구멍으로 갈 줄 모르는데 이 많은 구멍 가운데에서 내 생명에, 생명을 걸어갈 수 있는, 내가 살 수 있는 그 구멍은 한 구멍뿐이라. 그러면, 살 수 있는 구멍은 한 구멍뿐인데 그 한 구멍뿐인 그 한 구멍은 누가 아는가? 한 구멍은 그것은 오직 성령님밖에는 모릅니다.

성령님밖에는 그 길을 모르는데 이 성령님이, 생명 구멍은 하나뿐인데 하나뿐인 생명 구멍을 가르쳐 주시는 이는 성령님뿐이신데 그러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생명 구멍을 빠져나갈 수가 있는데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라고 하면 누가 받느냐? 우리의 의지가 받을 수 있느냐? 의지가 절대 못 받습니다. 우리의, 그러면 이성이 받을 수 있느냐? 이성이 못 받습니다. 이성은 둔한 것이오. 이성도 못 받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받느냐? 감정도 못 받습니다. 우리의 욕심이 받을 수 있느냐? 욕심도 못 받습니다. 우리의 그 무슨 지능이 받을 수 있느냐? 지능도 못 받습니다. 우리의 명철이 받을 수 있느냐? 명철도 못 받습니다. 우리의 총명이 받을 수 있느냐? 총명도 못 받습니다. 아무도 못 받습니다. 아무도 못 받소.

성령의, 기름 부음의, 성령의 인도하는 인도는 누가 받을 수 있느냐? 그 인도는 내 눈이 받을 수 있느냐? 내 무슨 명철이 받을 수 있느냐? 내 무슨 감정이 지 능이, 어떻게 내게 있는 어떤 그 정력이, 내게 있는 욕심이, 내게 있는 무슨 지식이, 아무도 받을 수 없습니다. 받을 수 없고 다만, 이 기름 부음의 인도를 받아야 될 터인데 기름 부음의 인도는 양심 외에는 받을 자가 없습니다. 기름 부음의 인도는 양심밖에는 받을 수 없어.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정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 했고 착한 양심이 하나님 향해서 지금 찾아간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잡한 요 현실에, 분기점에 많은, 백 구멍이, 창구멍이 백이 있는데 요리 가면 사망 조리 가도 사망, 어디로 가야 사망인지 어디로 가야 생명인지, 이 수많은 창구멍이 있는데 거게 사는 창구멍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 사는 창구멍은 성령님만 알지 다른 이는 아무도 모르는데 이 성령님이 가르쳐 주시는 가르쳐 줌을 받을 수 있는 그 명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그 명철은 우리에게 양심이라는 요소뿐입니다. 양심이라는 요소뿐인데 양심이 없는 사람은 받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양심이라는 요소밖에 없지 양심 외에 딴것은 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에는 이렇게 수많은 분기점이 있는데 수많은 이 분기점에 생명문은 하나뿐인데 생명문으로 인도하는 이는 성령님뿐이시라. 그러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라면 그는 신앙 양심 외에는 우리에게는 받을 요소가 우리에게는 없어. 명철이나 총명이나 지능이나 이런 거 아무것도 받지 못해.

양심만이 받을 수 있어. 양심만이 받을 수 있다 그말이오. 요거, 우리가 하나 기억하고, 또 하나는 이렇게 우리에 이 행복된 그 길이 이렇게 수없는, 참 수없는 이 복선 가운데서 수 없는 복잡한 이 노선 속에 막 비비 틀려 가지고 이래 가지고 굽어대 가지고 있으니까 이 길을 아무도 일보도 알 수가 없어. 그러면 사람이, 내일 일을 모 른다는 게 그거요. 내일 일을 모르는 그게 내일 일을 모르는 게 아니라 자기의 촌보의 앞에도 인생은 모릅니다. 이렇게 복잡한 선이 되어 있는데 이 선을 하나님께서 현실이라는 요 현실로서 '요 현실 따라 오너라' 고 현실 따라와서 고 현실에 딱 가서 서니까 바로 왔어. 또 그 다음에 또 현실에 또 오면서 `따라 오너라' 또 현실에 가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노선해 놓은 것을 현실 현실에서 바로 안도해 주시는데 그 현실에 닥치고 보니까 어느 창구멍으로 나가야 살란지 창구멍 찾는 것이 문제라 그말이오. 그러면 첫째는 그 복잡한 노선인데 복잡한 노선에서 내 노선 내 궤도 내 길이 뭐이냐 하는 내 노선 내 궤도를 찾는 것이 심히 어려운데 내 노선 내 궤도를 주님이 찾아 주시는 것이 요 현실이라는, 현실이라는 요것을 기억하고, 또, 내가 그러면, 이 현실에 닥쳤는데 그 현실에서 발자욱만 바로 떼 놓으면 되겠는데 이 현실에서 수많은 창구멍이 있지만 그 창구멍 가운데에 생명 길로 인도하는 그 생명 구멍은 한 구멍뿐인데 그 한 구멍으로 누가, 수많은 구멍 가운데서, 이거는 사망 구멍이라 사망 구멍이라 이거는 생명 구멍이라 하는 하나만 되는 생명 구멍을 누가 아느냐? 아무도 모르고 오직 성령님만 압니다.

성령님만 알지 다른 이는 아무도 몰라.

모르는데 그러면 이분밖에 모르는데 이분의 인도를 받으면 그 현실에서 생명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가 있는데 이분의 인도를 받을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신앙 양심의 활동이 있어야 되지 양심 외에는 이 성령의 인도를 받을 자가 없다. 이 두 가지만 생각하고, 그러면, 이 2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이 어려움을 당하니까 그만 애굽으로 내려갈라 할 때에 `네가 애굽으로 가지말고 내 인도를 받으라' 할 때에 이삭이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행복됐지 만일 받지 안하고 제대로 갔더라고 하면 그 탈선됐으니까 그 탈선된 것이 뒤에 복구가 되나 안 되나 하는 것이 그것이 문제입니다.

발람이 그가 발락을 따라서 간 그 걸음이 노선을 잘못 들어서 그리 가기로 씻지 가고 난 다음에 충성은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그 발람이 생명 내놓고 하나님 도를 받았습니다. 발람이 생명을 내놓고 하나님의 도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생명 내놓고 지켰어. 내놓고 지켰지만 다시 그는 고침을 받지를 못하고 망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좀 많이 좀 명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요셉이가 그가 뭐 애굽 나라 총리대신 된 것이 그 성공이 아니라 그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를 인도하셔 가지고 그에게 세상에서라도 보여 주고 또 그분의 걸은 것이 멸망이 아니고 구원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노정으로 여러 노정을 보여 줬습니다.

그러면, 요셉이가 일생 걸어온 그 노선도 너무 복잡하고 이리 해서 그 노선을 사람이 어떻게, 이리이리 이리 한 끝에 애굽 나라 총리 대신에 종착했다 하는 그런 것을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말이오, 없는데, 다만 그 요셉이가 걸어간 것은, 자기에게 준 현실은 자기를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라 하는 것을 굳게 잡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현실은 자기의 생명 궤도에서 걸어가는 생명 궤도라는 것을 똑똑히 잡았고 그러면 그 노선에서, 그 궤도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가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닥쳤지만 현실 속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에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생명길을 걷고 걸어서, 탈선하지 안하고 생명길을 걷고 걸어 가지고 수많은 거리를 걸어서 이제 거기에 종착된 그런 것을 우리가 한번 잘 명상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럴 때 어디 한 군데서라도 탈선이 됐다면 그 사람이 어찌 그걸 다시 복구를 시키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요것을 생각하고, 그러면 이게 큰 문제인데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줬기 때문에 이제 가서 교역자들이든지 좀 지능이 있는 사람들, 좀 지성인들이 그걸 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영원까지에 노선을 다 예정하셨는데 사람들마다 다 개인 개인에 노선이 다 예정돼 있다, 자기 노선이 다 되어 있다. 자기 노선이 다 되어 가지고 있는데 불택자의 노선은 그것은 질팡갈팡으로 택자들의 노선을 협조하고 택자들의 노선을 가르쳐 주고 택자들의 노선에게 이용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니까 그것은 우리가, 아무런 질서 정연도 하지도 안하고 철두철미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택자들의 이 노선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절대성 있는 이 노선이 되어 있는데 이 노선을 인간 스스로 아무도 이것은 인도받을 수가 아무도 이 노선을 바로 찾아갈 자는 없다. 바로 찾아갈 자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현실 현실 주시는 것은 자기 노선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자기 노선의 순서대로 자기에게 봉착 되게 해 주신 것이다 하는 요것을 깨닫고 자기에게 현실 주신 이 신비한 비밀을 깨달아서 진정 자기가 감사하는 것이 깨달아져야 여게서 바른 길을 걸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자기를 이렇게 하나님께서 현실을 만들어 줘서 내가 모르는, 내가 앞으로 이리 가야 되냐 저리 가야 될지 모르는데 하나님이 그 현실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그것은 내가 걸어갈 고 순서라 그말이오. 그러면 우리에게 천 현실을 주었든지 만 현실을 주었든지 그 현실 주 그 현실은 하나님께서 내게 대한 예정을 그대로 이렇게 주신 것인데, 그러면 여게서 그 현실에서 생명 구멍과 사망의 구멍이 많이 있으니까 그 생명 구멍으로 내가 인도를 받으면, 생명 구멍 인도를 받았으면 생명 길로 걸어갔지만 거기서 탈선길을 걸어갔으면 또 다 헛일했다 말이오. 헛일하고 또 그 다음 현실 주면 그 다음에 또, 또 생명 구멍은 하나뿐이니까 이 생명 구멍을 찾는 데에는 이것은 기름 부음이 가르쳐 주는 것이니까 양심을 쓰지 안하면 이 길은 갈 수가 없다 하는 그것을 기억하고.

사람이, 아브라함도 보면 그 흉년이 들어서 벧엘에서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그가 애굽으로 찾아 내려갔습니다. 애굽으로 찾아내려 가는 것은 뭐이냐? 그때에 흉년의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 좋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 좋아하도록 할라는 것은 멀어지고, 어려움을 당하니까 자연히 자기 고기덩어리 좋아하도록 자기 마음 좋아하도록 그걸 따라갔습니다.

자기 마음에는 배를 곯고 못 먹고 하니까 견디지 못하니까 마음도 고통스럽고 몸도 고통스러우니까 그 마음에 좋도록 몸에 좋도록, 마음에 좋은 것과 몸에 좋은 거, 마음 좋고 몸에 좋은 것을 따라갔으니까 요것이 뭐이냐 하면 육신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요 육체의 소욕으로 사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

그러면, 아브라함도 육체의 소욕으로 살았다가서 절단났고 또 이삭도 육체의 소욕으로 갈라고 하는데 육체의 소욕으로 갈라하는 걸 하나님께서 가지 못하도록 그 지시해 주실 때에 육체의 소욕으로 가지 안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삭은 육체의 소욕으로 가지 안했는고로 그 자손에게 대해서 화가 오지 안했고, 아브라함은 육체의 소욕으로 간 약간의 실수로써 그 자손들이 애굽에 가 가지고 사백 년 동안 종 노릇한 결과를 맞게 됐습니다.

이래서, 26장에서 우리는, 그 어려움을 당할 때에 이 흉년을 당해 가지고 어려움 당할 때는, 이 흉년당한 어려움은 누구의 어려움입니까? 이 어려움은 영의 어려움입니까 육의 어려움입니까? 영의 어려움입니까 육의 어려움입니까? 육의 어려움입니다.

육의 어려움인데 이 어려움에서, 육의 어려움에서 육이 어려우니까 육의 어려움을 피해서 육의 어려움이 없는 길을 택했고, 육의 편리한 길을 택했고, 육의 원하는 길 육이 좋아하는 길을 택한 그것이 곧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실수했고 이삭도 실수할 수 있었는데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을 하실 때에 `네가 그 길로 가지를 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하는 그곳을 가 가지고 이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축복받은 거 뭐? 추수가 백 배나 됐다 하는 그것이 축복받는 게 아니라 천하 만민이 너로 인해서 복을 받으리라 하는 이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이니까, 믿음의 조상들 이 걸은 것을 우리를 위해서 지금 가르쳐 주고 있는 노선이니까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에, 영의 어려움은 없습니다. 영의 어려움은 없는데, 육의 어려움을 당할 때에 육의 어려움을 피해서 육의 좋아하는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우리이기 쉽습니다. 그 길을 택해 가지고는 아브라함이 망했고 또 이삭도 그 길 택했으면 망할 터인데 하나님께서 그 길을 가지 말라 할 때에 그 길을 가지 아니하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머물러 있으라 하는 그랄에 머물러 있었음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게서 우리의 현실에 육의 어려움이나 마음의 어려움, 마음의 어려움이나 육의 어려움은 다 육덩이 어려움이오, 마음의 어려움이나 육의 어려움을 당할 때에 마음의 어려움도 자꾸 어려움을 피할라고, 어려움을 피하는 그것이 목적이요 육의 어려움도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목적이지 그 현실에서 육이야 어렵든지 마음이야 어렵든지, 육이야 어렵든지 평안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이것을 찾는 이것이 신앙 걸음인데 우리는 자꾸 심신의 어려움을 피해서, 어려움을 피해서 심신의 평안한 곳을 자꾸 따라갈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걸음이고, 그러면 심신의 어려움을 따라갈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심신의 어려움을 따라갈라 하는 것도 못쓸 거 심신의 어려움이 없는 평안을 따라갈라 하는 것도 못쓸 거, 그러면 우리는 현실을 당할 때에 심신의 어려움을 따라가는 것도 못쓰는 거 심신의 평안을 따라가는 것도 못 쓰는 거, 심신의 난제가 해결되는 걸 따라가도 못 쓰는 거 심신의 어려움을 당하는 걸 따라가는 것도 못쓰는 거, 현실에서 이 심신은 언제든지 저 좋도록 할라 합니다. 심신은 언제든지 저 좋도록 하는 것이 이 심신인데 심신은 저 좋도록 할라 하는 것이 심신이라 하는 그것을 기억하고, 그러면, 심신 좋도록 하느냐 하나님 좋도록 하느냐, 요 둘이 맞섭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신 좋도록 하느냐 하나님 좋도록 하느냐? 하나님 좋도록 하고 그 다음에 심신 좋도록 하고, 첫째 하나님 좋도록 하고 또 그 다음에 심신 좋도록 하고, 그러면 하나님과 심신이 좋으면 그 길 좋고 만일 심신이 좋고 하나님이 좋아하지 안하면 우리는 심신 좋은 것을 버리고 하나님 좋은 것을 택해 가는 이것이 이 축복 받는 길이니까 우리는 그 현실에서 언제든지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간다 또 `육신을 따라 살면' 또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이걸 늘 성경에 많이 말했습니다.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것은 뭐이냐 하면 육신은 자꾸 저 편리하도록만 저 수월하도록만 저 평안하도록만 또 마음도 저 평안하도록만 저 수월하도록만 저 좋아하도록만 하는 그것이 이것이 육신입니다. 철이 없기 때문에.

이러니까, 우리는 육신 좋아하는 대로 하면 안 되고 육신이 싫어하는 대로 하면 되느냐? 그것도 안 되고, 육신이 좋아하는 것도 안 되고 육신이 싫어하는 것도 안 되니까 아예 육신은 이것은 내가 하는 데에 내게 따라서 복종하고 이용당하고 복종할 물건이지 나는 그저, 하나님의 뜻이 뭐인가 하나님이 좋아하는 그것만 택해 가지고 할 때에 이 육신을 끌어서 복종시켜 가지고 이와같이 가야 되지, 언제든지 우리는 현실을 만날 때에 요거 쉬운 말 같지만 현실 만날 때에 그만 사람이라는 하는 것은 육신 좋아하는 대로, 육신이 좋아하는 대로 제 마음이 좋아하는 대로, 제 마음이 좋아하는 대로 제 고기 덩어리가 좋아하는 대로, 제 마음과 고기덩어리가 평안한 대로 수월한 대로 자꾸 이걸 따라가기 때문에 이것이 우상이라 말이오.

그래서 요한 1서 5장 마지막 절에 자기를 삼가 지켜서 우상을 멀리 하라고 이렇게 말씀했는데, 우리가 아브라함은 그때 실패를 했는데 이삭은 실패하지 안하고 하나님께서 네가 애굽으로 가지 말고 나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라'하는 요러 말씀해 줬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걸은 걸음 우리도 걸을 수 있고 이삭이 걸은 걸음 우리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것을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현실 만났을 때에 나로 하여금 내 마음과 내 고기덩어리가 좋아하는 대로 내가 한 자욱씩 걸어서 가는 이제, 그 좋아하는 그 길을 택해서 내가 가기 쉬운데 이삭이 그렇게 갈 때에 주님이 나타나셔 가지고 네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에 있으라고 말씀해 주신 거와 같은 주님의 이런 간섭과 인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요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 되어져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때 이삭에게 이런 간섭이 없었으면 절단났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평소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또 우리는 요런데서 깨달아 가지고 내가 현실 만났을 때에 나는 어려움 만나면, 어려움은 뉘 어려움인가? 어려움은 마음의 어려움 고기덩어리 어려움, 이 심신의 어려움이라 말이오.

심신의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나는 필연적으로 심신의 어려움이 없는 곳을 심신이 평안이 있는 곳을 그 길로 갈라 하는 것이 이것이, 물이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다 이렇게 다 일률적으로 다 되어지는 것인데 이 길은 가 가지고 다 망했으니까, 우리는 그럴 때에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내 생각이 원하는 대로 내 고기덩어리가 원하는 대로 이 길 따라서 가지말고 당신이 인도해 주옵소서.' 하는 요것을 평소에 간구해 가지고 당신이 인도해서 애굽으로 가지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하는 이것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현실에서, 현실에서 하나님 인도를 따라서 이렇게 갔을 때에 그때에 그 이삭의 길이 어찌 됐는가? 그 이삭의 길에. 그 길 따라갔을 때에 이삭의 길에는 뭐 그저 평안한 것만 있는 거 아니고 그 길로 따라가라 했는데 우물을 그렇게 세 번이나 뺏겼지, 가는 곳마다 쫓겨다녔지, 쫓겨다니고 자꾸, 쫓겨다니고 뺏기고 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애굽으로 가지 안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갔으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갔으면 만사가 형통이어야 되겠고 모든 사람들이 다 존대해야 되겠고 이렇게 해야 되겠는데 그런 일 닥치지 안했습니다. 우물을 세 번이나 파 가지고 또 쫓겨가고 쫓겨가 가지고 파고나면 또 따라와서 그래 또 쫓겨가고 또 쫓겨가고 이렇게 쫓겨가고 또 그들에게 쫓겨서 딴데로 피해서 다 이사를 가고 이렇게 값으나 이삭은 거기서 대항하지 안하고, 뺏으면 뺏기고 쫓아 보내면 쫓겨가고 이렇게 했으나 그 결말에 보면 나중에 어찌 됐느냐? 그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와 가지고 말하기를 `이제 우리가 서로 화친을 하자.

너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걸 봤다. 함께 하는 걸 봤다.' 뭘로 봤습니까? `우리가 쫓아내고 우리가 망치는데, 우리는 너를 망치는데 망치고 나면 푹 들고 일어나고 망치고 나면 더 왕성되고 망치면 왕성되고 이러니까 우리가 너거를 암만 망칠라고 해봤자 망치면 더 왕 성되고 망치면 더 왕성되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너희들과 같이 하는 것을 우리가 봤다.' 하고 그리 굴복됐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실을 당할 때에 우리는 그만 나 좋도록 내 심신 이놈이 하자는 대로 가기 쉬우니 거기서 멈추어 가지고 하나님이 나에게 인도해 주셔서 어짜든지 내 갈길을 바로 가르쳐 주옵소서. 나는 심신 좋도록만 이와같이 갈라고만 하는 것인데 내가 이 길은 아닌 줄, 아니까 심신 좋아하는 길을 안 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길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내 앞길을 인도하셔 가지고 당신이 기뻐하시는 길을 주옵소서. 심신이 좋은 이 길이 당신의 뜻인지 심신 좋은 이 길이 당신 뜻이 아닌지 나는 모릅니다. 소경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래 나는 본능적으로 심신 좋은 이 길을 자꾸 갈라 하는 것이 내니까 여게서 이삭에게 당신이 나타나셔 가지고 애굽으로 가지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그때의 여호와 오늘도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셔서 이럴 때에 내 철없는 내가 내 마음대로 갈라 하는 대로 두지 말고 당신이 인도하시는 길을 분명히 보여 주시옵소서. 보여 주시면 내가 죽으나 사나 내가 그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하는 이런 사람이 돼 가지고 우리가 따라가야 되겠고 이 길을 따라가면 당장에 무슨 형통이 있으리라 생각지 맙시다.

생각지 말고, 거게 보면 어려움이 있었다 말이오. 어려움이 있으나 어려움이 있으나 나중에 결말적으로 결산을 대 보니까, 마지막 결산을 대니까 어려움이 있으나 어려움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시는, 만민이 보고 이삭을 두려워할 수 있는,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시는 그 증거만 나타냈지 이삭에게 손해간 게 뭐입니까?' 우물 뺏기고 또 가니까 또 우물 있고 뺏기고 가니까 우물 있고, 이러니까 망치는데 망하고 대항하지 안하고, 뺏으면 뺏기고, 뺏겼는데, 뺏기고 보니까 하나님이 더 많이 주시니까 `아이구야, 이상하다,' 망 쳤는데 더 유익이 나니까 `이상하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가는 길은, 가는 길은 당장에 뭣을 우리 욕심대로 뭣이 형통할 거라 그런 생각지 말고, 이렇게 인도하는 길을 걸어갈 때에 이삭과 같은 이런 애로와 굴곡들이 많이 있으나 그것이 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염려 없고 문제없고 그 길을 그와같이 걸어가면 그 결말에 결론에 가서는 뭐이 됐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신다는 그 증거를 보여 줬고 만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려워했고, 신명기에도 보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천하 만민이 너를 두려워하리라' 이 두려워 하도록까지 되는 데에는 우리가 여러 가지 굴곡과 애로의 그 모든 마찰의 그런 경로들을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지켜서 순종해서 나가야 이 영광의 날이 오지 그렇지 안하면 이런 일이 올 수가 없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현실에서 나하고 싶은 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가겠습니다.' 인도를 받기 원하고 인도 따라간다고 해 가지고 대번에 형통이 아니라 인도 따라간 길이 뭐 엉망진창이오. 인도 따라간 길이 엉망진창이라.

망하고 뭐 엉망진창, 망했는데 망해도 주님의 인도 따라가서 망한 그 멸망은 어떻게 하면 회복됩니까? 어떻게 하면 회복됩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마라에서, 인도 따라가다 가서 마라에 물먹고 막 사람이 죽습니다. 사람이 죽습니다. 인도 따라가 다가서 망했습니다.

인도 따라가다가서 망하는 그 멸망을 뭐 가지고 치료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무 쪼가리를 꺾어서 저 물에 던지라' 하니까 `하나님 인도,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다가 우리가 망했는데, 시키는 대로 하다가 망했는데 또 시켜? 이만침 죽이고 나서 또 뭐 시켜, 뭐 나무가지 던져?' 이럴 건데 인도 따라서 큰 어려움 당한 것을 그 다음에 다시 인도로 치료되고 말았습니다. 인도로 치료. 요 우리가 비밀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이래 갈라 하면 어려움이 있으나 어려움 있을 그럴 때에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사는 자이기 때문에 인도를 따라가는 그 길이 형통만 돼 버렸으면 그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줄 수가 없어.

왕성되니까 그들이 왕성된 줄만 알았지. 인도 따라가니까 망했는데 또 일어나고 망했는데 일어나고 자꾸 이래야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고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해 주산다는 것을 알았지, 만일 이삭이 가 가지고 크게 부자가 됐으면, 세상에 강성된 나라가 많이 있는데 부자가 됐으면 이삭에게 하나님이 와서 함께 하는 걸 어찌 알겠습니까? 좀 우리가 좀 넓게 알자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하나님을 보여 주기도 했고 또 자기들도 하나님을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고 이러니까 인도 따라서 가는 어려움은 인도 따라가면 그것은 해결이 된다. 하나님께 순종으로 당한 어려움은 순종으로라야 치료가 된다. 인도 따라 어려움 된 것은 인도 따라가야 그것이 회복이 되어 진다.

인도 따라가는 길에 여러 가지 어려움 당하는 것은 거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 주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로 경험하게 하기 위함이요 이래 가지고 그 길 따라가니까 뭐이 됐습니까? 그 길 따라가니까, 그들이 와 가지고 사화하자고 화친하자고 하는 것은 자꾸, 망치면 또, 망했는가 하면 또 튀어나왔고 망했으면 또 튀어나왔고 이러기 때문에 이제 그들이 두려워했는데 믿는 신자에게 요구는 뭐이냐 하면 하나님을 따라서 망해지는, 하나님을 따라서 망하는 요 자가 좀 돼 보라 말이오. 요거 자꾸 좀, 하나님을 따라서 망하는 자가 되면 당신이 드러내 가지고 역사할 터인데 망하는 자가 안 되기 때문에 문제가 그말이오. 이 무슨 말인지를? 그러기 때문에, 주를 따라서 망해 보라 그말이오. 주를 따라 망해 보고 주를 따라서 뺏겨 보고 주를 따라서 손해 보라 말이오. 손해 봐 보면 그 다음에 주로 인해서 유익되고 부요되고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터인데 도무지 주를 따라서 망하는 일을 보지 안하니까, 십자가를 지지 안하니까 이 영광이 드러날 수가 없다 그거요.

이러니까 뭣 때문에 이삭이 두려워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인인 관계에 살 때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 하면 전부 손해 보는 것이요 전부 지는 것이요 뚜드려 맞는 것이요 망하는 것이요 욕 얻어먹는 것이요 세상이 망치는 것이요, 세상은 망치고 하나님은 들어올리고, 세상은 망치고 들어올리고, 망치고 들어올리고, 조금 하나 망치고 나니까 둘 들려 올라가고 둘 망치고 나니까 너이 들려 올라가고, 다섯 망치고 나니까 열 들려 올라가고 자꾸 더 들려 올라가니까 이제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 주고 그들이 두려워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화친을 청하는 요 결과가 맺어지는 것이오.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가 깨닫고, 또 여게 보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하니까 뭐 자꾸 한 쪽으로는 멸망이 옵니다. 멸망이 오는데 자꾸 왕성 됩니다. 멸망보다 왕성이 많아지니까 남는 게 있거든, 남는 게 있어. 그러기 때문에, `백 배나 얻되' 뭐라 했습니까? `백 배나 얻되 핍박을 겸하여 받으리라' `핍박을 겸하여 받으리라' 백 배나 얻는데 다른 사람 보기에 `야, 저 망했다' 하나님 때문에 망했다 싶은데 또 일어나고 망했다 싶은데 일어나니까, 망했다 싶은 것은 조금 망하고 일어난 건 또 많이 일어나고, 이러기 때문에 `핍박을 겸하여 받으리라' 요 경로를 모르는 사람, 요 십자가에 비밀을 모르는 사람, 십자가에 죽어야 3일 만에 부활이 있지, 요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를 못합니다.

이라고 나니까, 모든 사람의 인권도 올라갔지 우양도 많아졌지 또 그 해에 추수가 백 배나 올랐어. 이런 일이 있습니까? 추수가 백 배나 오른 일이 있어요? 한 섬 나는 데에서 백 섬이 나요? 하루 만 원 벌이 되는 그 자리에서 이제 백만 원 벌이가 돼져요? 그런 일 있습니까? 도부 장사, 하루 많이 하면 한 돈 만 원 얻는데 하루 종일하면 돈 만 원 수입되는 도부 장사에게 하루 백만 원 수입 온다 말입니까? 하나님이 거짓말입니까? 이거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이분에게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에 요는, 어려움당하니까 애굽으로 내려가는 거 `가지 말아라.' 그분의 간섭을 받았고 간섭을 받을 때에 순종한 거 요거, 요거 우리가 요 신앙으로서 받아야겠습니다.

이라고 나니까 뭐 노비는 꽉 찼어. 노비가 꽉 찼어. 이러니까 우리가 돈 없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 없어 그렇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멸시 천대하는 것도 축복 없어 그렇고, 일군을 데릴라 해야 일군이 없는 거 축복 없어 그렇고 이거 성경대로 보면 노복이 심히 많았다 했어 노복이 심히 많아.

사람이 없는데 이거, 우리 집에 일 하는 사람 말이오. 밥해 줄 사람이 없는 것도 이것도 하나님이 축복 안 해 그래요. 축복 안 해서. 나 오늘 저녁에 지금, 밥해 주는 사람도 일을 안 해서 쉬고, 되니까 쉬고 입도 쉬고, 오늘 저녁에 쉬라 했는데 다른 밥을 해 줘서 오늘 저녁에 입이 쉬지를 못했습니다. 이거 뭐이냐? 노복이 없는 거라 말이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니까 노복 꽉 찼어요. 얼마든지 말이지요. 이것도 우리가 여기서, 노복이 심히 많았다 이랬어. 물질 심히 많았지 다른 사람에게 인권이 마구 올라갔지 또 모든 것이 다 형통했어.

이러니까, 그랬는데 여게 그게 하나 나타나 가지고 있어요.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5절에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하니까 믿음만 가지고 됐는가보다 이렇게 생각하겠는데 여게 보니까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아브라함을 인해 가지고 `이삭아, 이삭 너도 좋지만 너보다도 너거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내가 너한테 복을 준다' 이랬어. `너거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내가 복을 줬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는데? 5절에 보니까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율법을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무슨 이유냐? 그 이유는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이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의 법도 명령 율례를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좋아하셨고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그 자손에게 복 줬습니다. 이러면 우리가 말이요, 우리가 잘 살면 우리 때문에 자손이 복받는 것이 환하고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줬다' `너거 아버지 다윗 때문에 네 당대에는 네가 망치지 안하도록 내가 복을 주시겠다' 이랬는데 우리가 잘 살면 우리 때문에 자손이 복을 받는데 우리가 잘못 살면 삼 사 대까지 망한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이제, 우리가 모든 문제를 이제, 모든 문제를 다만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하지 안하고 내 생각대로 하는 여게서 망치는 것이지 뭐, 돈 문제가 뭐 있읍니까? 여게 보니까 돈 문제 없어. 우리 여기 돈 없는 사람들, 돈 없는 사람들 말이요 돈 문제없어. 돈 문제가 없다니? 그 해에 백 배 얻었는데, 그 해 백 배 얻었는데, 그해에 수입이 백 배나 됐으면, 백 배 됐으면, 수입 백 배 됐으면 여기 빚 다 갚을 거라. 빚 다 갚아요. 하나님이 수입을 백 배나 줬다 했어.

백 배나 줬지, 부근에 있는 왕들이 전부 화친하자고 와서 그라지, 짐승떼는 자꾸 우글우글 해서 자꾸 많아지지, 밑에 일군은 자꾸 찾아와 가지고 막 어글어글하지, 주님이 좋아하시니까 다 돼.

이러니까, 이렇게 하는 데는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브라함은 하나님만 믿었다 이랬는데 여게 나타나 있어.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문에 그 자손에게 복을 줬느냐?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을 순종하고 내 계명을 지켰고 내 율례를 지켰고 내 법도를 지켰기 때문에 그렇다' 이랬어.

아까 그 예정에 대해서 잠깐 말했는데 그건 여러분들이 많은 명상 가운데서 깨달아져야 됩니다. 그러면, 수많은, 우리의 그 선이, 우리 노선이 어덴지 모릅니다. 우리 갈길이 어덴지 모릅니다. 여기 밀림 속에서 길 잃은 거 그까짓 거는 말도 아니오. 우리 앞에는 길이 억억만도 넘은 것이 막 섞여 있는데 제 노선을 누가 찾아가겠소? 못 갑니다. 이런데 우리에게는 아무나따나 닥쳐서 현실이 오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그 닥친 현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택자들의 노선을 다 인도해서 주시는 인도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수많은 노선 가운데 내 노선을 가르쳐 주신 그 현실이라 하는 것을 깨닫고, 남의 노선이 무슨 소용 있어? 내 노선이 소용 있지. 아, 호박넝쿨이면 다 소용 있습니까? 호박 넝쿨 아무리 있어도 제 호박에 달린 그 넝쿨이어야지 딴 넝쿨이 무슨 소용있소? 제 노선이니 제 노선 이거 하나님께서 현실을 주시는 것인데 요 현실은 후회 없는 바른 그 생명 노선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도해 주시는데 요 노선에 생명 구멍으로 나가는 것은 성령의 인도로만 나갈 수 있는 것이니까, 이삭이, 이삭이 여게서 바른 길 걷고 가니까 모든 게 이렇게 형통했어.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여러분들 예수 믿는 사람 부자되기도 쉽고 아주 고관대작되기도 쉽고 아주 권세 잡기도 쉽고 뭐 존영해지기도 쉽고 모든 사람에게 우러러 보이기도 쉽고, 우리는 행복이 하나님 한 분이 주권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 한 분하고 나하고만 관계만 바로 되면 다 됩니다. 이렇게 이 첩경, 이 지름길이 있는데 이 길은 찾지 안하고 엉뚱한 길을 우리가 찾아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기를 따라 사는 사람은 망합니다. 주님 따라 사는 사람은 절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실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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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주님의 마음을 다 빼앗아라/ 마태복음 9장 1절-8절/ 1981. 1. 22. 목새벽 선지자 2015.12.26
370 주님의 동행/ 마태복음 28장 16절-20절/ 1984. 2. 5.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6
369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믿음/ 요한복음 6장 26절-35절/ 1985. 4. 2. 화새벽 선지자 2015.12.26
368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믿음/ 출애굽기 14장 15절-25절/ 1985. 4. 28.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6
367 주님의 공로는 내것 되고 나는 주님의 것/ 요한복음 8장 31절-36절/ 1986. 12. 8. 월새벽 선지자 2015.12.26
366 주님의 5가지 인정/ 마태복음 25장 19절-30절/ 1987. 8. 16.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4
365 주님을 위해/ 고f린도전서 15장 58절/ 1983. 9. 16.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24
364 주님을 사랑하는 자/ 야고보서 1장 12절/ 860907주전 김반석 2015.12.22
363 주님을 사랑하는 자/ 요한복음 14장 15절-24절/ 871216수야 김반석 2015.12.22
362 주님을 사랑하는 자/ 요한복음 14장 18절-19절/ 871220주새 김반석 2015.12.22
361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아는 것/ 시편 91장 14절/ 841003수야 김반석 2015.12.22
360 주님을 대접하는 법/ 창세기 5장 21절-24절/ 841029월새 김반석 2015.12.22
359 주님을 기쁘시게 하자/ 고린도후서 5장 8절-10절 / 890512금야 선지자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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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주님을 기쁘시게/ 고린도후서 5장 9절-10절/ 860620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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