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주님의 사랑을 연구함에

 

1987. 8. 28. 밤 (금)

 

본문:베드로후서 3장 10절∼13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불택자들은 하나님의 초피조물인 그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알래야 알 수도 없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무한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에 피조물로서는 이 은혜를 감히 접할 수 없는 그런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자로서는 이 지극히 큰 구원을 접할 수도 있고 또 자기 구원으로 이루어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주님이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고로 여게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불타고 소멸될 터이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날이라 말은 주님이 오시는 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날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사람들은 주님 만나고자 하는 이것만이 마음에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 있습니까? 그 날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오시는 날이기 때문에 주님 오시는 것을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필요한 일도 많고 중요한 일도 많아서 매우 할 일이 많아 분망한 것이 말세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택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 한 분만을 사모하는 자가 되고 늘 생각하는 자 되고 또 원하는 자 되고 바라보는 자 되어야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요새 늘 계속해서 시간마다 증거해 나온 말씀인데 믿는 사람의 성공은 주님 사랑, 사모, 간절, 생각 이것이 성공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고 사모하고 바라보고 좋아하고 고대할 것인가? 이것을 우리가 억지로 할 것이 아니고 주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가 모든 것보다 사랑하고 사모하고 간절히 생각하고 고대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과 모든 몸의 행동이 본능적으로 주님만 사랑하고 사모하고 간절해져서 심신의 생애 전부가 마구 주님에게만 솔빡 다 기울어지는 그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우리가 지식적으로가 아니고 또 우리가 무슨 하나의 제도나 형식적이 아니고 우리의 그 심신과 인격에 본능적으로 그렇게 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예수님을 더 바로 알고 또 깊이 알고 구비하게 알고, 알아서 참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바라보고 그만 생각할 수 있는 이런 대상이 되는 이 사실을 자기가 알고 깨닫고 인정하는 것만치 그분을 향한 모든 생애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존자 하나님이시며 지극히 존귀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하지마는 아무리 훌륭하고 잘났다 할지라도 위대하다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치 아니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결혼 상대를 한다든지 어떤 그 친구를 정한다든지 할 때에 그 상대방이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그 인격자는 두 가지가 겸해야 하는 줄 압니다. 하나는, 제일 중요한 거 하나는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구비하고 잘나봤자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은 내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나는 거게 그저 붙어 돌아다니면서 아무리 따른다 할지라도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안하고 나를 멸시하고 천대하고 업신여긴다면 그뭐 따르는 것이 참 그것이 복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친구간이나 부부간이나 요 인격 교제에 대해서는, 인격 교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사랑이요 하나는 상대방의 실력입니다.

아무리 나를 깊이 넓게 세밀히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 상대방이 무능하다면, 무지 무능하다면 다 안타까운 것과 후회될 것뿐이요 조만간에 변해질 것뿐이지 아무런 인격 교제가 장구하지는 못하게 됩니다.

또 상대방이 온갖 면에 지혜에나 능력이나 소유적으로나 모든 면이 다 훌륭하고 구비하다 할지라도 나를 사랑치 않는다면 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게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어서 처녀가 총각을 지금 결혼 상대로 사귀어 볼라고 할 때에 그 총각이 모든 실력이 아무리 구비하고 원만하다 할지라도 나를 사랑치 않는다면 내게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나를 사랑치 아니하고 나를 싫어하는데 내게 무슨 소용 있겠어? 그 사람이 뭐 모든 실력에 구비한 것이 내게 복될 것이 뭐 있으며 내게 필요할 것이 뭐 있으며 만족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도리어 마음에 눌리기나 하고 도리어 마음에 부담이나 되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아무리 실력이 구비하다 할지라도 나를 사랑치 않는다면 그와 나와의 인격 교제에는 이루어질 수가 없고 또 거기에는 상대가 된다면은 결국은 피차가 다 오랑케가 되고 말지 아무런 유익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 그 상대방이 나를 아주 사랑하기를 유일로 나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이 아주 무지 무능한 거지라면 내게 대해서는 안타깝고 짐될 것뿐이고 항상 어두움과 고통뿐이지 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데, 인격 교제의 상대방이 나를 극히 사랑하고 또 상대방이 모든 면에 실력이 갖추어 구비해져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를 서로 인격 교제를 할라고 사귈라고 이렇게 다 힘을 쓰고 애를 쓰는 것이 그것이 필연한 일이요 또 가면 갈수록이 그 인격 결합은 더 두터워지고 행복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를 두고 우리가 주님을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끝이 없는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비유컨대, 깊은, 아주 깊은 그 소 속에, 깊은 그 물 속에, 깊은 물 속에 자기의 사랑하는 상대를 그 물구렁이가, 물구렁이라고 이런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물 속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만 물고 들어가 물 속에서 녹혀버립니다. 삼켜버립니다.

물 속에 내가 그 물구렁이에게 삼켜서 나를 물 깊은 속으로 끌고 들어가 거게서 나를 삼키고 있는데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를 구원할라고 하면 대신 물 속에 들어가 그 물구렁이의 밥이 돼야, 그가 들어가서 그 물구렁이 입에 들어가 밥이 돼야 사랑하는 자 그를 먹고 나를 거게서 게워낼 수 있는 그런 형편됐을 때에 나를 그 깊은 물 속 물구렁이 그 입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안하고 대신 나 대신 죽어서 구렁이의 밥이 되고 거게서 나를 구출해서 밖으로 나오게 했다고 하면 그 사랑이 어떠하겠습니까? 만일 그렇다고 하면은 그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우리가 충족합니까 혹 그 사랑에 대해서는 그래도 모자람이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내가 그와 같은 지경에 있을 때에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그 나의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나의 남편이라든지 친구라든지 나를 사랑하는 그 애인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이 그 물구렁이의 밥이 되지 않고는 나를 건질 수 없을 때에 그가 나를 건져 내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그 물구렁이의 입에다가 넣고 나를 거게서 뽑아서 건져 냈다고 하면 그 사랑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 사랑에 대해서 만족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불만하겠습니까? 만족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거는 하나의 비유인데, 이것은 그저 하나의 비슷한 비유지 그 실상에는 억억만의 일도 안 됩니다.

우리가 악령 그놈에게 인류 시조 아담 하와 때부터 삼키워 가지고서 깊은 사망 속, 깊은 이 죄악 속, 영원 멸망 속에 마귀에게 삼켜서 영원히 마귀의 밥이 되어 있는 우리를 거게서 구원하는 데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지위와 존귀를 가졌지마는 당신의 능력 가지고는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죄값은 사망이라고 하나님의 법에서 정해 놨기 때문에 우리의 원죄와 본죄로 말미암아 그와같이 멸망되어 있는고로 대신 당신이 죽지 안하면 우리를 구출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그 부요를 다 내놓고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 이 깊은 사망 속에 빠져 있는 우리 대신 당신이 이 사망에게 삼켜지고 우리를 거게서 구출해서 완전한 이 깊은 사망, 죄악, 마귀 속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신 것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여서 하나님의 부요도 아까워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부요를 다 내놔서 가난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셨습니다. 또 우리를 사랑함으로 무서운 그 멸망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당신이 그 멸망을 대신 받으시고 마귀에게 삼키워져서 마귀에게 말할 수 없는 그 권세 아래서 곤욕을 당하는 이런 대신 사망의 저주와 진노를 받고 우리를 거게서 구출해 내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구출했을 때에 당신은 우리 위해서 생명을 완전히 바쳤습니다. 완전히 죽어 끝났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완전히 죽어 끝났습니다.

끝났는데, 하나님께서 많으신 긍휼로써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셔 가지고 우리의 이 구출해 놓은 우리의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영원한 자유와 행복 이 생명을 위해서 당신이 부활의 대속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영생하는 생명으로 중생시켜 주셨고 또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들을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상대해서 사는 자로 만드셨고 또 이 진리대로 사는 영감대로 사는 이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고 영광스러운 제사장 선지 왕직을 우리에게 맡겨 하나님의 후사, 자존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대해서 행하시는 그 모든 하나님의 업을 하나님의 기업을 우리의 기업으로 상속시켜 주시기까지 하신 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그 사랑이 너무도 커서 우리가 측량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 자연계시, 이 세상에 일반적인 우리 인인관계에 대한 것으로 또 이 모든 사물관계에 대한 것으로 이런 것으로 이렇게도 맞춰보고 저렇게도 맞춰보고 또 이렇게도 비교해 보고 저렇게도 비교해 봐서 주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을 점점 깨달아 아는 가운데서 자라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아는 지식이 자라가고 그분이 나 위해서 어데까지 생각했으며, 나의 죽음 속에 있는 것을 당신이 생각했을 뿐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시기를 생각하시고 역사하셨고 구출하시는 데까지만 생각한 게 아니라 구출하셔 가지고 우리를 다시 행복되게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까지 하셨고 살게만 하실 것이 아니라 천상 천하에 제일 피조물로서 존귀한 그 기업이 되는 이 제사장 선지 왕의 기업을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셔서, 이렇게 뭐 그는 참 말할 수 없는 광대하고 온전하고 구비하고 부족함이 없는 이런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에게 대해서 세밀한 관심을 가지시고 또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안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아버지 우편에서 항상 기도하고 계시고 영원 끝까지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겠다고 하신 말씀은 재세뿐 아니라 영원 무궁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런고로, 이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생각해서 어데까지 생각할 것이냐?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를 위해서는 우리가 순생도 꺼리지 안하고, 주님을 위한 어떤 그 고난의 생활 죽음의 생활도 꺼리지 안하고, 또 주님을 위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 역사인 이 도를 위해서 우리가 죽는 그 순교의 생활도 꺼릴 수 없고,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순생과 순교의 이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감히 이것으로써 주님 앞에 무엇을 한 듯이 무엇이 있는 듯이 그렇게 나타날 수 없는, 참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순교당하면서도 ‘나는 주님 앞에서 나는 이렇게 바로 십자가에 못박힐 수 없으니까 나는 꺼꾸로 못 박아 달라’고 그 전설이 있다는 거와 같이 이렇게 우리가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분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바치고 바치고 그분을 위해서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해도 부족하고, 또 사모해도 부족하고, 생각해도 부족하고, 간절해도 부족하고, 우리의 전심신의 기거동작은 다 여게 마구 기울어져서 참, 물을 그릇에 떴다가 팍 대접 물을 붓는 것처럼 마구 주님에게 내 전부를 쏟아서 마구 기울여 부을 수 있는 우리가 되고도 남고 영원히 그래도 부족하고 만족이 안 되는 이런 이 사랑의 대상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지마는 우리가 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이리 저리 다 모두 어두워져 가지고 이 큰 사실을 우리가 참 뭐 놀래지도 않고 혹 생각이 나면, 가끔 어떤 기회를 만나면 주님을 위해 참 우리가 뭐 하루도 울고 며칠도 울고 또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나도 이 사랑의 상대가 되었으니 나도 주님을, 주님이 나 사랑하는 것에 억만분지 일이라도 나도 사랑의 대상으로서 주님을 사랑해 볼까?’ 하는 이런 일들이 있지마는 그 생활이 또 잠시 있다가 없어지고 또 그만 무미하게 그렇게 감각 없이 그만 예사롭게 여기고 지내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렇게 뜨겁고 참 그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그 넓이가 이는 무한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사랑을 궁구해서 이 사랑의 세계에서 주님의 사랑을 점점 깨달아 주님의 사랑 속에 파묻힌 사람은 그 이상 더 행복된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랑에 파묻힌 사람은 어데서든지 만족하고 주님 한 분 생각하고 그분 위하는 생활, 그분이 원하는 생활이면 그것으로써 자기는 죽어도 불만하고 또 살아도 불만하고 항상 그저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음같이 항상 주님 사랑에 갈급해서 해도 해도 부족하고 부족하고 한 여게서 사는 것이 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가는 성도들의 전반의 고백이요 전반의 그 생활 형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간단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가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도 많고 사랑하는 부모도 많고 사랑하는 처자도 많지마는 우리가 눈이 열려서 뚝 떼고 보니까 그거조차도 나를 사랑함으로 나 좋게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부모를 예비했고, 사랑하는 내 아내를 예비했고, 사랑하는 내 가족을 예비했고, 사랑하는 자녀를 예비해서 그거조차도 이분이 나를 사랑함으로써 내게 필요하고 구비한 것을 구비해 준 것이요 그분이 아닌 것은 땅위에 있는 것도 없고 내게 필요한 것도 없고 사랑하는 그런 상대도 없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에 또 기암할 수 있는 그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여게서 우리가 인격 교제 하는 데에 사랑으로써는 우리가 교제할라고 하는 우리 주님이 사랑면으로써는 뭐 이만하면 우리가 모자람이 없고 만족할 수 있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한 가지 더 있는 것은, 그러면 그분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지마는 실력이 없으면 언젠가 그것이 다 중단될 날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세력에게 밀려서 다 파괴를 당할 날이 있을 터이니까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 조만간에 큰 비극을 이루는 거 외에 딴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극을 이룰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떠한 그 실력을 가졌는가? 그분은 영원 자존하신 홀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존재들이 있는데 모든 존재는 그분으로 인하여 생겨졌습니다. 그분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은 그분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존재해졌습니다. 이만하면 내 사랑의 대상의 그 실력이 이만하면 부자겠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전지하신 지혜를 가졌고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능의 능력을 가지셨고, 아무리 이렇다 해도 호랑이가 그 맹수의 용맹을 가지고 제 새끼는 사랑하고 보호하지마는 다른 짐승은 맹혹하게 잡아서 먹고 이렇게 맹혹한 점이 있으면 그것이 지식이 어두워서 ‘나 사랑하는 것이 어쨌든지 타에 대해서야 어떻게 맹혹하게 한다 할지라도 내게는 좋게 하니까 좋다’ 하는 맹수의 새끼와 같은 그런 그 머리를 가졌으면 그런 자에 대해서도 맹수처럼 좋아하고 만족하지마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된다, 전지의 지혜와 전능의 실력을 가졌다, 모든 것을 다 창조한 창조주이기 때문에 원인이 됐다 할지라도 그분이 그 성품이 맹수처럼 맹혹하다면 우리가 만족할 수 없는 그런 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무한하신 인자를 가졌습니다. 무한하신 인자를 가져서 지옥에 있는 그 마귀 하나까지도 그분의 그 인자하심에, 그분의 따뜻한 그 사랑에 감격해서 주라 시인하지 않는 존재가 없는, 그분은 사랑과 인자의 그 온유의 후덕을 가졌으니 이것도 우리의 상대의 실력으로서는 우리가 만족합니다.

아무리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이 사기 협잡 횡령을 해 가지고 모든 것을 끌어다가 아주 물질에나 권세에나 부족함이 없이 해 준다 할지라도 그 남편이 덕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잔인한 그런 일을 한다고 하면은 그 아내로서는 만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항상 한 쪽 구석에는 늘 불안하고 불쾌하고 결단코 명랑한 그런 그 심지는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데 주님은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을 가지시고 모든 존재들이 다 만족할 수 있는 사랑과 긍휼을 가지셨으니까 이도 우리가 우리의 상대로서는 그 이상 없는 완전한 사랑, 완전한 자비, 완전한 긍휼을 가져서모든 존재들이 다 우러러보고 주라 시인하고 영광을 돌리는 이런 존재가 돼 가지고 있고, 또 그렇다 할지라도 그분이 어둡고 어큼한 일이 있으면 안됐을 터인데 그분은 진리십니다. 정직합니다. 털끝만치도 굽은 것이 없습니다. 불공평한 것이 없습니다.

조그마치도 어두운 게 없고 굽은 것이 없고 삐뚤어진 것이 없고 조그마치도 어데라도 어떤 존재에게 하후하박으로 조그매라도 거치게 하시는 일이 없는 그분이시요 또 그뿐만 아니라 천상 천하의 모든 존재가 다 그분의 것이라. 모든 것의 주재시라.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시라. 그러면서도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겸손해서 어느 하나에게라도 교만한 그런 것이 없이 온유하고 겸손한 그분이시니 자, 이만하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사랑하는 대상이 이만하면 거게 또 무슨 부족함이 있습니까? 뭣이 또 좀 뭣은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분은 “나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나의 깨끗하심과같이 깨끗하라” 그분은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성결하십니다. 성결하십니다.

어떻게 좋은지! 이래서 아가서에 보면은 이분을 깨달은 자는 사랑함으로 병이 났고, 이분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그 역사가 찰나도 끊칠 수 없는 그 생애가 계속됐고, 어떻게 하면 이분을 좀 더 사랑할 수 있을까 해서 찾아다니는 곳이 순생할 곳을 찾아다녔고 순교할 곳을 찾아다닌 것이 이분의 사랑을 안 사람들입니다.

이러기에, 자기 문화국에서 모든 것이 구비한 그런 행복을 누리고 있는 문화 선진국의 국민으로서 저 미개해서 아무리 말해도 들을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고 아주 참 머리카락 속에 뚫혀 있는 구멍처럼 그렇게 좁은 그런 모든 견해를 가지고 있는 그런 미개한, 짐승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 그런 데 와 가지고 당대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안 들으면 이대채 와서 전하고, 이대채 안 들으면 또 유전해서 ‘내 손자 너도 전해야 된다’ 삼대채 가서 전해서 삼대 사대를 그 미개한 모든 야만들에게 전함으로써 이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온 것입니다.

그분의 완전하심에 반해서, 그분의 완전하심에 완전히 미쳐서, 예수님에게 미쳐서 그분에게 완전히 자기 이성은 다 잊어버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으로 전폭이 됐고, 사모하는 것으로 전폭이 됐고, 그분을 갈급함에 전폭이 돼서, 이래 가지고 모든 세상 사람들은 다 볼 때에 미련타 어리석다 다 미친 자라, 이래 가지고 이런 소리를 들은 거리 먼 그리스도의 사랑에, 그 인격에, 그 존귀에, 그 실력에, 그 능력에, 그 온전함에, 그 성결함에, 그 인자함에, 온유함에, 겸손함에, 그분의 쉬지 않고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한다” 말씀하신 그 사랑하심에 끌려서 이렇게 일생을 산 것이 그것이 성도들이요 이렇게 사는 그 사랑의 능력이 거게서 발휘돼 와 가지고, 거게서 비추어 발휘돼 와 가지고 우리 이 한국에도 깜깜 어두운 모든 범신론, 다신론, 모든 미신, 우상, 어떤 잘난 개인의 그 사욕대로 꾸며 놓은 모든 풍속 이 더러운 데 매여 가지고 짐승보다 낫다 할 것 하나도 없는 이런 데 와서 복음을 전해서 우리가 복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참 오늘밤 찬송에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그 찬송을 했는데 이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그저 예사로 두고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는 참 스스로 망할 일이며 또 저주받을 일입니다. 이래서 성령이 말하기를 “주를 사랑치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이 사랑을 우리가 그저 내대로에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는 그런 것은 안 되지마는 신구약 성경에 이 주님의 사랑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씀해 놨으니까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연구해야 되겠고, 또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특별계시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사랑이 우리에게 이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모든 동물 세계, 모든 동물 세계, 모든 곤충 세계, 모든 식물 세계, 모든 무생물 세계에서, 그것도 유한한 것이지마는, 유한한 것이지마는 자기가 파고 파고 들어가 보면은 백 길 파고 들어가 보니까 더 넓고 천 길을 파고 들어가니까 더 오묘하고 더 깊고 이런 하나님의 이 자연계시에서도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궁구하는 것이 이것이 마땅한 일이며 또 자기의 행복을 찾는 유일한 법칙입니다.

이 사랑을 연구해서 들어간 것만치 자기는 생명과 평강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이 깊고 높은 가치적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그 사랑 세계에 들어가 그의 생명이나 그의 모든 기능이나 그런 것은 든든하고 튼튼한 그런 생명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밤에 제가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은 뭐이냐,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우리의 전소원과 사모와 생각과 신경과 본능과 욕심과 우리에게 있는 지능과 생명 전부가 솔빡 막 예수님에게 쏟아 부어지는, 쏟아 기울어지는, 남김이 없이, 마치 대접에다 담은 물을 팍 들이 부어서 들이 쏟기는 것처럼 우리의 전폭이 주님에게 부어 쏟아지는 이 사람이 되고 되고 얼마든지 되고도 유위부족해서 갈급해서 견딜 수 없는 이것이 우리의 처지요 우리의 그 상대를, 우리의 배우자, 우리의 상대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인데 우리가 여게 대해서 마귀의 미혹받아 가지고 헛된 데에 다 미혹받아 가지고 이런 거 저런 거 소욕하고, 이런 거 저런 거 연구하고, 이런 거 저런 거 탐심을 가지고 이래 가지고, 이렇게 한없는 생명이 말할 수 없는, 무변대해로 비유할 수 없는 이 생명의 세계요 끝이 없는 생명의 세계요 한없이 뜨겁다면 뜨겁고 말할 수 없는, 기쁘다 하면 기쁘고 만족이라면 만족이고 이거는 뭐 형언할 수 없는 모든 면에 만족 만족할 수 있는 이런 상대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왜 이렇게 빼빼 말라 가지고 항상 곤고하게 지내는가? 마귀 그놈에게 끌려 가지고 돈 한 푼에 죽겠다 살겠다 뭐 오늘 이사가도 이사가면 그만인데, 이사가면 그만인데 이런 것을 가지고 이렇게 우리가 곤고하고 빈궁한 처지에 있는가? 탕자가 그 부요한 아버지를 두고서 쓸쓸한 그 돼지막에 가 가지고 고통하는 그게 누군가? 우리가 아닌가! 이렇게 한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우리는 만족하고 만족하고 끝없는 이런 행복에서 충만하고 행복에 충만해서 뭐 그분에게 보는 것도 완전해서 본 것도 봄으로써 내가 완전해지고, 들음으로 완전해지고, 접함으로 완전해지고, 만남으로 완전해지고, 받음으로 완전해지고, 생각함으로 완전해지고 전부 완전해지는 이런 뭐 이런 보배로운 우리의 대상이 있는데 이분의 이 어떠함을 우리가 연구하지 안하고 이래 말라서 죽는다는 것은 너무도 이거 기막힌 일입니다.

이러니까, 오늘 저녁에 제가 말할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이 모든 서론만 말했지 본론은 지금 내놔야 안 될 것이기에 시간이 없어서 말을 안 했습니다. 본론은 내일 아침에 계속하겠습니다.

이제 요것을 가지고 오늘밤에 여게 있는 사람들은 뭐 모든 것이 다 중요하고 급하고 요긴한 일 많지마는 다 제외해 놓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이것을, 그분의 사랑이 어떠하며 그분의 실력이 어떠한가 이 두 가지를 연구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행복은 거기 있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거기 있습니다! 우리의 평안은 거기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거기 있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작정합시다. 밤이나 낮이나 이제 예수 더 알기를 원해서 나는 여생은 내가 여게서 확실히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그 실력에 대해서 연구하여서 내 소유와 내 몸과 생명이 완전히 그분에게 솔빡 다 쏟아질 수 있는 이런 내가 되기를 내가 원해서 지금 이 연구에 나는 착수하겠습니다, 이 연구에 나는 지금 착수하겠습니다 하는 이것을 오늘 밤에 작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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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351 주님으로 동하고 정하자/ 요한복음 6장 55절-58절/ 871009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9
350 주님위한 매맞음은 세상에서만/ 요한일서 3장 3절/ 861114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9
349 주님에게 가는 걸음 두 발로/ 마태복음 10장 16절/ 881111금새 선지자 2015.12.19
348 주님사랑이 양을 사랑함/ 요한복음 21장 15절-22절/ 880228주새 선지자 2015.12.19
347 주님만 바라보고 순종하자/ 마태복음 14장 27절-33절/ 810803월새 선지자 2015.12.19
346 주님만 바라보고 순종하자/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810802주후 선지자 2015.12.19
345 주님만 기쁘시게/ 고린도후서 5장 8절-10절/ 841228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9
344 주님께 맡기라/ 베드로전서 5장 5절-11절/ 860720주전 선지자 2015.12.19
343 주님께 맡기라/ 베드로전서 5장 5절-11절/ 860720주후 선지자 2015.12.19
342 주님과의 연관성 연결성 / 마태복음 10장 40절-42절/ 860217월 선지자 2015.12.19
341 주님과의 결혼/ 마태복음 25장 7절-13절/ 831103목새 선지자 2015.12.19
340 주님과의 결혼/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831102수야 선지자 2015.12.19
339 주님과 친밀의 기회/ 요한계시록 1장 6절-8절/ 820725주후 선지자 2015.12.19
338 주님과 진리만 사모하라/ 요한복음 15장 7절/ 840506주일오후 선지자 2015.12.19
337 주님과 주의 말씀/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830320주후 선지자 2015.12.19
» 주님과 주님의 사랑을 연구함에/ 베드로후서 3장 10절-13절/ 870828금야 선지자 2015.12.19
335 주님과 자기 사이에 가로막고/ 요한복음 5장 5절-18절/ 830422금야 선지자 2015.12.19
334 주님과 연결 연습/ 요한계시록 3장 17절-22절/ 871028수새 선지자 2015.12.19
333 주님과 연결/ 요한계시록 3장 7절-13절/ 840929토새 선지자 2015.12.19
332 주님과 연결/ 요한복음 15장 1절-8절/ 850107월새 선지자 2015.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