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아짐으로 넓어지는 것.절대저항주의

 

1988. 11. 5. 토새벽

 

본문: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 좁은 문이라는 이 말씀의 뜻이나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가는 때에도 몰약산과 유향산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 또  레바논 산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 또 주님과 레바논 산에서부터 동행할 수 있다. 그 부터라는 말이 있는 데 레바논 산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자.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또 아마나 산, 스닐 산, 헤르몬 산 꼭대기, 또 사자굴 표범산에서 내려다 보자 하는 그 모든 것 이 다 주님 만나는 곳 주님과 동행하는 곳 또 주님과 함께 하는 곳, 그것은 전부 왜 이 산봉우리로 다 말했는가? 그거 내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과 꼭  같은 말 씀입니다.

점점 신앙생활이 높아져 가면  동지가 적으니 동지적으로 좁은  길이오. 또 이렇게 오든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혼잡되고 타협되는 일이 차차 차차 적어져서, 타협이 적어져서 깨닫는 것도 점점 외로와지고 또 높아지면 자꾸 좁아지고  하는 그런 것을 말해서 산으로 비유했고, 그러면 신앙적으로도 점점 그 차원이  높아지는 거, 정도가 높아지는 거 열심으로 해도 열심  많은 사람은, 열심 있는  사람은 적어지고 열심이 적은 사람은 많아집니다.

이래서 사람의 사랑도 천인 만인이 가진 사랑보다 그 사랑을 실천해 나아가면 자꾸 사랑이 좁아집니다.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숫자가 적어질 뿐만 아니라 이런 것도 사 랑하고 저런 것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거게서 구별하다 보니까  자연히 사랑이 좁 아지고 미움이 커지고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러면 사랑으로 말하면 점점 사람 숫자를 많이 사랑하다가 숫자를 적게 사 랑하는 그것이 산으로 올라가는  좁은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데 '이런 것도 사랑할 수 있다 저런 것도 사랑할 수 있나' 하는 데에서 이것은 이제까지는 이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열 가지를 다 사랑했지마는 보니까 하나는 잘못됐었기 때문에 하나 그거는 제하고. 아홉 가지는 내가 사랑할 수 있지만 한 가지는 인정할 수 없다.

이러면 인정이나 사랑이나 한가지인데, 평가나 한가지인데 그게 좁아 지게 됩니다.

또 그 사람이 점점 더 올라가게 되면 '그  사람하고 나하고 아홉 가지가 서로 맞았 는데 이제 지금은 여덟 가지만 맞고 두 가지는 틀린다.' 자꾸 나아가게되면은 '그 사 람에게 다섯 가지는 인정할 수 있고 동행할 수 있지마는 다섯 가지는 그  사람과 함 께 할 수가 없다.' 나중에는 점점 가면 '그 사람에게 아홉 가지는 내가 하나될 수 없 고 한 가지만 하나 된다' 자꾸 이렇게 좁아지면서, 그러면 그 사람은 내가 그러면 버리는가? 내가 그 사람과 동행하거나 그 사람하고 타협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을, 이게 하나 나쁘니 까 그 사람을 내가 버리고  구원할 수가 없다 하는, 하나  나쁘니까 구원할 수 없다 이러다가 차차 차차 그것이 하나 나쁜 게 아니라 백이 나빠도 그 사람을  내가 구원 하는 일에 있어서는 내가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의 단점이 점점 많이 발 견이 돼도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구원하는 역사를 계속하는 그  구원 역사적으로 자 꾸 좁아집니다.

좁아지는 것은 만일 그 사람에게 단점이 하나만 발견해도 '이 사람 못쓸 사람이라.' 버렸는데 이제는 백의 단점이 발견돼도 이 사람도 소망을 가지고 구원할 수가 있다, 이라니까 소망의 그 도수가 점점 높아지고 또 그 사람을 구원하는 그 이해성과 관용 성과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그 노력이 점점 도수가 산  모양으로 높아지니까 점점 좁아 집니다.

좁아지는 것은, 열 명 가운데에 열 명이 다 '그런 정도는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구 원할 수가 있다.' 그 사람세게 전도하고 이러는데 그 사람의 나쁜 점이 만일 한 다섯 점이나 되면 그만 소망 가지고 사랑하고 구원하던 사람들도 '에, 안 됐다. 그거는 뭐 희망이 없으니까 그만 버려야 되겠다.' 이래서 자꾸 죄인의 죄를 보고 낙심하고 낙망 하는 그 면이 같이 이래 하다가 자꾸 사람들이 뚝뚝 떨어집니다.

떨어지고, 그러면 이 사람은 그 사람에게 나쁜 점이 열이 있어도 그 사람을 구원하 는 구원에 대해서는 욕망을 가지고 구원하는 그 사랑의 역사가 쉬지 않고 또  그 사 람의 단점이 백이 돼도 쉬지 않고 천이 돼도 쉬지 않고 자꾸 이렇게  그걸 절망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고 구원하는 그 역사가 계속되는 그 계속이 처음에는 만일 백 명이 같이 시작했다가도 차차 그 상대방의 죄악의 그 강함과 험한에 따라서 그 사람을 구 원하려는 그 용기가 모든 사람이 다 떨어지고 이런데 그 용기를 끝까지 가진 사람은 나중에 보면 열이 동지 됐다가 다섯이 동지 됐다가 자꾸 동지자가 또 떨어집니다.

이러니까 그 이웃을 사랑해서 구원하려는 이웃에 대한 그 관용성  이라든지 구원하 고자 하는 사랑의 그 용감이 그것이 자꾸  갈수록 좁 아집니다. 좁아지고 숫자가 적 어집니다. 숫자가 적어지는 것은 그것은 죄악에  대해서 구원하고자 하는 그 욕망이 나 사랑이나 노력이나 그런 노력이  차차 차차 적어져가는 그런  일이 되는 동시에, 그러면 적어져가는 것과,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하려고 사랑하는 그 사랑의 노력이라 든지 이해하는 것이라든지 관용하는 것이라든지 그런 것을 자꾸 이렇게 해서, 그러면 사람들이 조그만한 일에도 그만 각박해 가지고 그렇게 그  상대방에게 나쁜 점이 하나만 보여도 '에, 그 사람 못쓸 사람이라.' 하고 떨어져  버리고 또 이 사람은 열을 봐도 '그 사람 구원할 수가 있다.' 하면서  또 떨어지지 않고 계속하고 그 사람 에게 만일 백의 백이 다 아무짝도 못쓸 것뿐이지마는 그래도 또 소망을 가지고 사랑 하고 이렇게, 사랑하는, 구원하고자 하는 그 구원의 사랑의  그 심지라든지 노력이라 든지 그런 것이 자꾸 좁아져갑니다.

그러면 사람을 구원코자 하는 그 면의 노력은 자꾸 좁아져가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상대방이 나쁜 것 보고 동지가 열 명이 나섰는데 나서 가지고 보니까 '에, 나는 그만 포기하겠다, 그 사람에게 대해서 그만 포기한다.' 또  저 사람도 포기하고 자꾸 모두 다 포기해 버리고 나중에 보니까 저만 외롭게 남습니다. 저만 혼자,  하는 사랑의 구 원 역사를 혼자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혼자만 계속하고 있는 그것은, 그것이 사랑으로  말하면 그것이 넓어지는 것입니까 그게 좁아지는 것입니까? 상대방을 사랑하는 사랑이 넓어지는 것입니까 좁아지는 것 입니까? 사랑이 넓어지는 것입니까  좀아지는 것입니까? 넓어지는 것이요  좁아지는 것이요? 그러면 사랑을 다 같이 이렇게 열 명이 나서 가지고 우리가 저 사람을 구원해 보자 하고 그 사람을 구원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섰는데 차차 차차 그 사람, 상대방 의 희망 없는 점을 보고 그만 낙망해 버리고 이 사람도 포기하고, 저 사람도 포기하 고 자꾸 포기를 해 버렸습니다. 포기를 하고 나머치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남았으면 그 사람이 상대방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것이 넓어졌습니까 좁아졌습니까?  그 사 랑이 높아졌습니까 낮아졌습니까? 녜,그게 높아졌습니다.

높아져서 썩어지는 것으로서는 점점 좁아졌고  생명으로는 전부 점점 높아졌고  그 썩어진 것을 배격하는 그런 생명으로서는 점점 좁아졌지마는 사람으로 더불어, 불의 로 더불어 타협되는 그것은, 타협되는 면은 어찌  됩니까? 그러면 하나밖에 안 남았 는데 전도하다가 상대방의 그 불의한 것 불의한 점으로 더불어  타협되는 면은 어떤 사람이 타협이 많이 됐습니까? 타협이 많이 된 것은 불의함에 물든 곧 불의함에 감염된 사람은, 감염된 사람은 많 습니까 숫자가 적습니까? 감염됨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나중에  열 명이 나섰다가 아홉 명은 다 낙망하고 말았는데 한 사람 이 사람은 끝까지 한다면 그 사람의 그 불 의에 대해서 감염됨이 많이 감염됐습니까 감염이 안 놨습니까? 감염이 안 됐습니다.

안 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억지로 송사해서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줘라, 또 오른뺨을 치 거든 왼뺨을 돌려 향해라, 또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해라' 하는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이제 모든 면에 대해서 대항하지 말아라, 대항하지 말아 라 하는 그런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뭐 그 사람이 뭐라 하든지 오른뺨을 쳐도 대해서 감아서 대항해서 그래 하지 말아라.

대항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서 기독교는 '무저항주의라' 대항하지  않는 대항하지 않 는, 무엇이든지 환영하고 화평하고 이래 가지고 하고 대항하지 않는 주의라, 그렇게 기독교는 저항이  없는 무저항주의라 이렇게 그 성구 를 해석한 사람도 있고 기독교는 '절대 대항주의다'하는 그렇게 해석을 한 사람도 있 으니까 정반대입니다.

절대 대항주의라 말은 그의 싸움의 그 질이,  싸움의 본질과 본성이 다르고 싸움의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싸우는 것이 죄로 더불어 싸우기 때문에  이 사 람은 뭐 어떤 상대방이 하더래도 네가 죄에게 지지 말아라 하는 그것을 주님께서 말 씀하신 것이고, 죄에게 지지 말라 하는 그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또 세상에 있는 일 반 사람들이 그것을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라 하는 그것은 죄로  더불어 싸우는 그게 아니고 사람을, 이렇게 인간으로 더불어 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어쩌든 지 그 싸우지 말고 대항하지 말아라 하는 말이고 또 하나는 죄로 더불어  싸우기 때 문에 죄에게 지지 말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답안이 그렇게 정반대로 나옵니다.

사람으로 싸우는 사람은 뭐 뺨을 때려도 네가 싸우지  말아라. 또 뭐 어떤 네 재산 을 다 탈취를 하더래도 네가 뱃겼으면 뺏겻지 사람하고 싸우지 말아라. 이러니까 그 거는 저항하지 말라는, 대적하지 말아라, 다투지 말아라 하는 그 말이고, 또 주님은, 한 해석은 있다가, 그렇게 해도 네가 네 소유를, '속옷을 뺏드려고 할 때 도 겉옷까지 네가 아예 줘라, 오른뺨 치거든 왼뺨까지도 맞을 각오를 해라, 또 오 리 가자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해라.' 하는 그 말씀은 또 어떤 사람이 해석하는 것은 그것 은 기독교는 절대 저항주의다, 절대 대적주의라 죽었으면 죽었지  지지 않고, 소유를 다 뺏겼으면 다 뺏겼고, 또 자기 뭐  인격이 다 그거에게 눌려서 매장됐으면 매장돼 도, 너는 모든 것이 네  인격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위나  위신이나 자존심이나 모든 것이 다 박살이 나도 어쨌든지 네가 죄에게 지지만 말아라 하는 그것을 두고 해석한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는 '절대 죄를 대항하고 죄를 용납지 말아라.' 하는 그 주의다 이렇게 봐서 기독교는 절대 투쟁주의요 대항주의로서 절대 지지 않는, 지지 않는, 그 러면 지지 않는다는 것은 뭐이 지지 않는 것인고 하니, 죄악에 지는 것은 죄악의 종 이 되는데 죄악에 지지 않는 것은 자유하는 것이라. 그래 기독교는 절대 자유주의다, 기독교는 절대 자유다.

그러면 자유라는 그것도 또 뭐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자유라는 것도 주님이 말 씀하신 그 자유가 있고 인간들이, 인간의 자유가  있고 단일 자유가 있으니? 하나님 이 자유케 하기 위해서 너희를 불렀다'고 이래 하신 그 자유가 있고 또 인간들이 전 부 다 가진 자유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유가 다 있습니다. 자유로  사람이 죽고 자 유로 사람이 삽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 절대 대항해라, 대항해서 절대 지지 마라. 절대 지 지 말고 절대 대항으로, 대항으로, 대항이라 말은  싸우라 말이오. 지지 말고 양보하 지 말라 말이오. 양보하지 말라는 그 대항으로  사람이 살고 또 그 대항으로 죽습니 다.

이러니까 성질과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싸움은 안 싸우면 죽고  어떤 싸움은 싸우면 죽습니다. 그러면 그거는, 싸우는 것도 불의적으로 싸우는  거는 죽는 것이고 불의로 더불어 싸우는, 죄로 더불어  싸우고 사망과 마귀로 더불어  싸 우는 그거는 또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게, 이걸 여러분들이 잘 알아 듣지도 못하고 내가 또 이렇게 하려 해도 내 속에 있는 걸 여러분들에게 말해 주지를 잘 못하겠습니다.' 이러니까 어쨌든 지 이 예수님을 만나는 곳도 동행하는 곳도  다 산입니다. 산인데 이 산은 평지보다 높은 곳이요, 또 높을수록 거게서 다른 사람의 주목도 많게 되고 또 마찰도 많게 됩 니다. 이 산이라는 것은 올라갈수록 좁아집니다. 또 올라가는 성격을  가지고 올라가 야 되지 내려가면 산이 없어집니다 올라가면 산이 있어지고.

이러니까 여게 내가 오늘 아침에 증거하려 하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리 가야 생명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러니까 찾는 사람이 적고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문 은 사망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고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자는 생명으로 인 도하는 자기 때문에 그자는 성령이고 또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은 문인데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자는 사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거는 마귀다. 네 현실에서 너를 인도하는 그 신이 둘뿐인데, 성령과  마귀 둘뿐인데 너를 인도하는 것이  좁은 길로,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이요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것은 마귀다.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도착지가  어데인고 하니 도착지가 생명이 요 또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들어가면 마지막에 네가 도착하는 곳이 어데인 고 하니 그거는 사망이다.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 생명이요 사망은 하나님 과 끊어지는 것이 사망이기 때문에  네가 좁은 문으로, 자꾸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문을 피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그것은 성령의 인도받는 것이다. 네가 넓은 문을 내버려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그것이  성령 인도다. 그게 바로 하나님하고 연결하는 그 연결 인도다. 네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그것은 마귀 인도요 사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라는 것은 타협을 할 수가  없다. 진리의 능력이 역사하는 데에 는 범위를 자꾸 넓혀서 얼마든지 이렇게 할수록, 범위를 넓힐수록 그게 높은 산이요 범위를 넓힐수록 그게 크지마는  진리를 양보한다는 그거는,  진리 양보해서 그렇게 나가는 거는 넓은 문으로 가는 것이다.

이래서, 여게 좁은 문이라 말은 유일이라는 그런  뚱을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 다. 유일, 네가 유일을 찾아라. 자꾸 이것도 좋다, 뭐 사람이 이것도 저것도 좋다, 좀 착각해 가지고 그런 것인데. 이것도 저것도 좋다 이렇게 타협적으로, 자꾸 모든 것을 감염적으로 이래 나가지 말고 너는 하나만 되는 유일을 찾아라. 유일을 찾아서 들어 가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이 좁은 문이라는 이 문은 이 문이, 좁은 문이, 좀 알기 가 어려운데. 좁은 문이 사람들이 그 찾아 가기에는, 찾아 들어가기에는 좁은 문입니 다. 찾아 들어가기에는 좁은 문인데, 그 좁은 문인데 그 좁은 문 그 자체가 인간적으 로 볼 때에는 좁은 문이지마는 실은 그  문의 실력적으로 보면, 그 문의 실력적으로 보면 그 문이 좁은 문입니까 넓은 문입니까? 그게 굉장히 넓은 문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더 이상  없는 좁은 길이 기독교요  또 기독교는 그 이상 없는 넓은 길이 기독교입니다. 이래서 인간 편에서  이래 갈 때에는 좁은 길이고 그 게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그것이 모든 만물을 구원하는 자유의 율법입니다. 자유 의 율법. 모든 존재들을 자유케 하는 고  참은 하나뿐인데 하나 그것은 넓어서 모든 종류들이 존재을이 다 자유하고 생명과 평강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그곳이오. 그러나 사람들이 넓은 그것은 진리에서 떠나서 넓은 길이기 때문에 크  길은 아주 자유하고 넓은 곳인 줄 알지마는 나중에 가서는 터럭만한,  털끝만한 것도 용납할 수 없는 그 런, 털끝만한 것도 유자할 수가 없고 거게서 머물 수 없는 그런 아주 좁은 곳입니다.

이래서, 이 면 저 면 여러 면을 좀 생각해야 되는데 그저 양면을 다 말하려 하니까 복잡해 여러분들이 모르니까 어쟬든지 좁은  길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이 성경 해석도, 성경 해석도 지금 모든 그 학자들이,  김현봉 목사님이 OO O목사님의 그 주석을 보고 이 책은 죽은 책이다 그렇게 정죄를 해 버렸습니다.

또 말하기를 뭐 말하기를 이 책은 죽은 책이다 하다가 이 사람의 신앙은 죽은 신앙 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러라 하니, 제자들이  물으니까 '이분은 이 사람은 이 래 말한다 저 사람은 저래 말한다  자꾸 그래만 말하지 자기는 나는  이렇게 믿는다 하는 자기 주장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산 사람이면 자기 주장이 있을  터인데 자기 주장이 없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의 책보따리고 포 이것은 '하나의 이거 책이지 생명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한 그 말이 참 깊이 깨닫고 하는 말입니다.

이래서, 요거 뭐 다는 못 해도  하나 자기가 체험을 해야 알지  체험을 안 하면 알 수가 없어요. 만일 사람이, 교리 신조라면 이게 우리가 걸어가는 길인데 교리 신조도 어떤 사람이, 이 대학자가, 이  학자는 이런 이렇게 교리를  주장했다, 또 이 학자는 이렇게 교리를 주장했다, 이렇게 이게 다 유력한 학자이기 때문에 이 유력한 학자가 다 세계의 제일 삼대 유력한 학자인데 이 학자들이 다 이렇게도 말하고 이렇게도 말 하고 이렇게도 말했다 이러면, 그럴 때에, 이거 다 대학자들이 말했기  때문에 이 셋 다 보수파요 이 다 진리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까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이오. 그 사람은 그 런 사상으로 인도하는 그것이 마귀가  그런 사상으로 인도하고 벌써  자기가 그렇게 인정하는 그것은 벌써 속에 마귀가 자기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이라.

그러면 거게는 암만 가 봤자 사망뿐이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뿐이지 하나님과. 가 까와지지는 못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가까와지는  게 생명이요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이 생명인데 될 수가 없다 그거요.  그러고, 또 자기가 무슨 개인 생활할  때도 이 일은 이렇게 해야 되나 저렇게 해야 되느냐  그 판단이 날 때에 요래도 될  것 같고 저아도 될 것 같고 이러니까 '아, 요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 또 생각해 보니까 그때 도 될 것 같고 그래. 그래도 되겠고 요래도 되겠고  저래도 되겠고 고 세 길이 자기 에게 나타날 때에 그 세 길 다 요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까 어느 길이든지 택해서 하 나 해야 되겠다 하면 그 사람은 넓은 길 가는  사람입니까 좁은 길 가는, 어느 문으 로 들어가는 사람이요? 그 사람은 어느 문으로 들어간 사람입니까? 넓은  문으로 들 어가기 때문에 고게 마귀 생각이라 말이오. 고게 마귀 인도라 말이요, 마귀 생각이요 고게 결국은 사망하는, 망하고 죽는 것뿐이지 거게는 가야 아무것도 없어.

이런데 이 셋이니까 이 셋이 다 맞을 리가 없는 것이고 맞은 것은 하나뿐이지 맞은 게 셋 될 수 있습니까? 맞은 거는 하나뿐이오. 옳은 거는 하나뿐이라.

이러니까 비판을 해도 하나를 찾고 평가를 해도 하 나를 찾고 시비를  해도 하나를 찾고 교리와 신조를 찾아도 하나를 찾고 하나를 자꾸 찾아서 나아가는 그 사람이 뭐 이냐 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라. 하나를  찾아 들어가는, 뭐이든지 하나를 찾아 들어가는 거는 옳은 거는 하나뿐이니까 옳은 것  하나인 그걸 찾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좁은 문이 있는 줄 알고 좁은 문이 좋은 줄 알고  좁은 문으로 들 어가려고 애쓰는 사람이오. 그 사람이 그저 그러면서 '뭣이든지  여러 가지로 마음을 먹지 않고 한 가지로 마음을 먹고 해야 된다' 그러면 그 한 가지로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자기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이런 데 '이 학자들이 서이를 말하니까  서이 가운데 뭐이든지 하나를  잡고 이래 나가야 되지 서이 잡고 나가면 안 된다. 이거 어느 거든지 하나 잡아, 어느 거 하나 잡을꼬? 그러면 이지 일호 이호 삼호가 있는데 일호를 잡을까 이호를 잡을까 삼호를 잡을까? 아, 나는 삼호를 잡겠다.' 삼호 하나를 잡고 이렇게  힘써 나가면 그 사람은 넓은 문 들어간 사람입니까 좁은 문 가는 사람입니까? 일호 이호 삼호가  있는데, '나는 삼호 를 잡겠다. 나는 이호를 잡겠다. 나는 일호를 잡겠다. 뭐이든지 하나를 잡고 내가 들 어가야 되지 이거 여럿 잡고 들어가면 안 된다.하나 잡아야 되겠다.' 하나 잡고 들어 간다고 자기가 일호를 하든지 이호를 하든지 삼호를 하든지 잡고  나가면 그 사람은 지금 좁은 문으로 그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까 들어가는 사람입니까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넓은 문보다 도 '아무 문이든지 좋다' 아무 문이든지 좋다는 사람이오. 그렇지 않소?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도 아 니고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도 아니고 뭐 이 문이나 저 문이나 어데 든지 열심히만 가면 되는 것이지 딴게 뭐 있느냐 하는 그것은 아무 문이  나따나 가 는 사람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데,  이 문이 서이니까 '서이니  나는 이 문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저 문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여게 여게도  암만 서이 말하지마는 이 서이 가운데 하나가 옳은 문이 되든지 이 서이 다 전부 거짓부리고 옳은 것은 딴 데 있든지 어찌 됐든간에 자기 마음에 양심에  이거다 하는, 아무리 자기 신앙 양심 으로 자기가 성경 지식을 아는 대로 비  판해서 이 비판 자꾸 이래 비판을  해 봐도 이것은 마음에 안심이 안 되고  요것도 요런 면에서 안심이 안  되고, 이 자꾸 이래 해 나가며 뭐인가 이게 다 틀렸다. 틀렸는데 어데인가  참을 가리자. 참, 세 사람 말 한 그게 맞다 할지라도 자기 마음에 확실히 요게 옳다 하는 것이 인정이  돼지기 전 에는 항상 미결로 두고 연구 중에  지금 '어느 게 참 길인가?  이 길이 내가 부득이 길이 딴길이 없으니까 이 길 가기는 가지마는 이 길이 바른 길인지 그른  길인지 모 르겠다.' 자기는 미결로 두고 자꾸 참을 찾는 사람은 그 사람은 지금 좁은 문으로 지 금 들어가는 사람입니까 좁은 문을 지금 찾고 있는 사람입니까? 좁은 문을  찾고 있 는 사람입니다. 그러는데, 그러다가 자기 마음에 '요거다' 하는 그  깨달음은 서이 말 하는 그 서이 말하는 것 속에 들어간 게 아니고 딴 데 어만 데  있는데 고걸 보니까 아, 요게 옳다 싶어서 양심으로 생각해도 이 성경을 비추어봐도 저 성경을 비추어봐 도 모든 자연계시 특별계시를 자꾸 비추어 봐도 요거다 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확정 이 되어지고 이거는 틀림없다. 염려가 돼 가지고 또, 성경은 법전이요 성경은 판사인 데 성경에 또 이거 한번 성경법에  한번 비추어 보고 또 재판소  판사는 그리스도가 판사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판사인데 곧 성령이 판사인데 성령에게 또, 그럴 때에 마 음의, 자기 마음의 양심으로 생각해 봐서 그렇다, 양심 보다도 더, 자기 양심으로 이 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 하는데 그 차기 양심이 아닌 객관 역사로써 자기에게 감동시 켜서 눈이 환하게 보여지고 심령이 밝아지는 그 밝아짐으로써 이게  옳다 하는 고게 또 자기에게 보여진다 말이오.

그러면 우리가 자기 양심과 영감을 구별해야 됩니다. 자기 양심은 어데까지든지 자 기 주관이요 영감이라 하는 건 주관이 아니고 저 객관 역사가 객관이 내게  푹 튀어 들어와 가지고 나에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객관  역사라 말이오.

객관 역사나 우리 마음에는 객관 역사지마는 중생된 영은 자기 주관 역사입니다.

그러면 중생된 영은, 왜? 성령은 하나님이요 중생된 영은 피조물이지마는 피조물과 하나님이 모든 행동으로는 합일이 됐습니다.  행동은 합일.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합해서 한 격위가 됐고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이 한 격위는 이루지 못해도 한 일행은 된다 말이오.

이래서 자꾸 이 하나만 되는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내가 살지 좁은  문으로 안 들어가면 살지 못한다. 이래 가지고 좁은 문 찾으려고 자꾸 애를 쓰요. 좁은 문 찾으 려고 애를 쓰고 그 학자들이, 아무 학자들이 이리 말했다. 이래 서이 말하면 그 서이 가 다 좁은 문이 될 리가 없다.

이러니까 그거 대학자들이 말하니까 이것이든지  저것이든지 어느 것 이든지  하나 택해 가지고 대학자들이 말했으니까 나보다 높은 대학자들이 말했으니까  이것을 어 느 것이든지 택해 가지고 열심히 가자 하는 그 사람은 뭐이냐? 좁은 문을 찾는 사람 이 아니고 아무 문이나 다 같다. 한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하는 그 사람이고, 아무리 대학자들이 말해도 자기가 성경 보고 상고하고 이래 해서 '아멘! 요거다!' 하는 자기 양심이 확실히 확정을 지우고 양심뿐만  아니라 자기를 중생시킨 그  성신의 감화인 객관 역사가 자기에게 성령이 오는 걸 알 수가 있다 말이오.

마귀의 감화가 오는 것도 우리가 알 수가 있고 성령의 감화가 오는 것도 우리가 알 수가 있고 자기 양심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없는 게 아니라. 이래 성신의 감화 가 와 가지고 요렇게 확정을 지울 때 그때 단정을 지우고  안심을 가지고 '요것이다' 하고 가는 요 길을 찾는 사람어 좁은 문을 찾는 사람이오. 요실 때에,  요실 때에 가 면, 요길을 찾아 가지고 가려 할 때에 옆의 사람들이 이러니까 그만 깨닫는 그 깨달 음의 동지, 교리 동지가 떨어지고 신조 동지가  떨어지고 또 모든 행동하는 그 행동 하는 것이 행동 동지가 떨어지고 다 떨어지고 이러니까 이제 이 동지를 이걸  참 얻 기가 어려운데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얻었는데 이 동지 하나 이걸 내가  잃어 버리느 냐 내가 이 동지를 내가 잃어버리지 않고 같이 가느냐? 꼭 매일 때에 동지냐 진리냐 요 둘이 딱 매였기 때문에 고 둘이 비판 될 때는 다른 것 돈이냐 동지냐 할 때는 그 까짓 거 뭐 돈 그까짓 것보다 동지가 얼마든지 낫고 또 그 생명이냐 동지냐 할 새도 생명보다 동지가 낫다고 이렇게 할 수  있어도 요 진리하고 딱 들어  매였기 때문에 요거는 할 수가 없다 말이오.

없으니까 이것은 자기가 알기를 자기 소유나 모든 몸이나 생명보다  귀중하게 여기 기 때문에 똑 요 교리 신조와 꼭 요게서 견제가 되는, 요 두 가지가 저울질 해. 다른 거와 견제가 아니고 요 둘이 딱 견제가 될 때에는 그때는 할 수 없어서 모든 것 다, 그래도 옳고 바른 그것을 뭐,  그러려 하니까 신앙 동지들이  다 헐어지고 떨어지고 이렇게 외로와져도 가는 그 길은, 그 길은 좁은 문입니까 넓은 문입니까? 고게 좁은 문이라. 좁은 문인데 그 좁은 문이, 좁은 문이 실상은 좁은 문이 넓습니까 넓은 문이 넓습니까? 좁은 문이 넓습니까 넓은 문이 넓습니까? 좁은 문 속에는  영계와 물질계 의 모든 피조물들과 하나님이 다 같이 다 들 수 있는 그렇게 넓은 것이지마는 이 넓 은 문에는 나중에 들어가다 들어가다  보면 자기 하나도 들어가서  있을 수가 없고, 자기 하나도 들어가서 있을 수가 없고  자기에게 있는 몸이나 모든 사상도  다 거게 들어갈 수 없으니까 다 쪼개내야 되고 쪼개내야 되고 나중에 보면 자기라는 존재 그 영 하나도 거게 들어가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영도 졸려 가지고  죽을 지경이고 지금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굉장히 좁아서 하나도  용납할 수 없는 곳이 그것이 그 넓은 문이요, 이제 그 좁은 문은 모든 존재들이 들어가 가지고 자유 활동할 수 있는, 영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넓은 세계의 문인 것입니다.

이런데 이제 인간이 아는 것과 하나님이 아는, 하나님 편에서 말하는 것과 인간 편 에서 말하는 게 달라. 이러니까, 그럴 때에 자기는 거게서 안심하지 않고 '아니다. 이 거는 뭐이 하나를 찾아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그것을 옳은 것을  찾기 위해 가지고 그 문제되는 것은 자기가 여기 처음에는 이거 이 포켓트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자 꾸 이래 보고 이래 하다가 나중에는 자기 속에 그만 박혀져서 '이거냐 저거냐?' 이래 가지고 그 문제를 일 년도 가고 이 년도 가고 십 년도 가고 어떤  거는 뭐 십 년 몇십 년 가도 그 문제 이거는  해결이 안 되고 이러니까 숙제로 장  뒀다가 언제 그거 참 영감이 올 때에 확실히 '이거라!' 하는 것이 확실히 깨달아지면 그렇게 깨달 을 수가 있는 것도 많이 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좁은 문으로 자기가  들어가려고 하는 이 소원을  이것을 가지고 노력할 때에 좁은 문을 찾는 것이, 좁은  문을 찾는 것이 당장 찾는  것도 있고 일 년 만에 찾는 것도 있고 평생 찾아도 못 찾고 마지막에 죽을 때야 그때사 비로소 깨닫고 '아, 이거다!' 하는 그런 죽을 때야 깨달을 것도 있는 것이고 이렇게 좁은 문 찾기가 어려 운 것인데 제가 어쨌든지 이걸 찾으려고 하지  않고 인간 타협으로써, 인간 비위 맞 춰 가지고, 사람보다, 사람보다 진리는 얼마나 큽니까, 몇 배나 크요? 인간 전체보다 진리 하나는 무한히 큰 것입니다. 진리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하지 않고, 진리에만 생 명이 있지 진리를 떠나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진리 떠난 길을 내가 가면서 모든 사람들을 다 이거 화친하는 것은  진리를 이것을 떠난 것을 가지고 화친하는 이거는 뭐이냐 하면 진리보다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것이 요 그 사람을, 자 진리를 떠나서 그 사람으로 더불어 타협하는 것과 진리를 떠날 때 에 이것은 아니다 하고 그 사람에게 아니라고  증거하는 것과, 또 진리가 아니기 때 문에 나는 이런데는 너와 같이 할 수가 없다 이렇게 하는 거와 서로  타협하는 것이 어떤 것이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며 살리는 것입니까? 타협 안 하는 것이 그게 살리 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이라.

암만 이래도 그 사람이 나하고 공간적으로는 대립이 되고 이 눈에 보는 가견적으로 는 대립이 돼도 옳은 걸  말해 놓으면 그게 들어서 그  속에 가서 역사합니다. 저는 뭐 대항적으로 '아무것이나 총공회파는 이런데 우리는 이렇다' 이렇게  해도 그 옳은 것을 말해 놓으면 그 껍 데기가 사람 보기에는 나뉘었지마는 그 사람 속에  들어 가 지고 역사해서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은 이 진리가 살리고 있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닌 것을 이렇게 두려워하고 미워해야 됩니다. 속담에 그런 말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목욕탕에 있었는데, 사도 요한이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 다가 보니까 이단자가 거게  목욕하러 들어와. 이단자가  목욕하러 들어오니까 사도 요한이 그만 이단자 들어오는 걸 보고 발가벗고 옷을 아듬고  그만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어.

왜? '왜 뛰어나갔느냐?' '아이구, 이단자가 여게 들어 왔는데, 하나님이 이거 벼락을 새려서 여게서 지금 다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렇게 이단자에게 대해서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과 이단자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온다는 거게 대해서 그렇 게 여긴 게 사도라 말이오.  사도 요한이, 사도. 그래서  이단자로 더불어 같이 하지 않고 멀리 하려고 하는 그게 사도들의 신앙이오. 모든 다 이단이라, 삐뚤어지게 가면 당장 멸망받는다 하는 것을 그 것을 하나님이 멸망 안 시켜도 자기는 멸망받을 것인 줄 알고 이렇게 피하는 사람들이 신앙의 사람이지 '뭐 이단은 이단이고 아무리 삐뚤 어지게 간파고 멸망하겠느냐?  그래도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그거는 자기 구속받은 신자로서 가질 심장은 아니고, 그 심장은 아니고  그것은 그 심정은 어떤 심정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그 심정이기 때문에 그것이 뭐이냐 하면 하나님을 정죄하고 제가 하나님 자리에 서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삐뚤어지면 이거는 사망이라 하는 것을 어누리 없이 생각하는 것이 우 리들이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해 보는 것이고 이렇지 제가 하나님보다, 하나님은 삐뚤 어진 건 죽는다고 이랬는데 그걸 더 관대해서 뭐 그렇지마는 용서할 수가 있고 이해 할 수 있고 할 수가 있지 않느냐 하는 그것이 뭐이냐? 성경에 말하기를 새끼 양, 두 뿔 가진 새끼 양. 어린 양이  더 순진하요 새끼 양이 순진하요?  어느 게 더 순진하 요? 어린 양이 더 깨끗한가 새끼 양이 깨끗한가? 어린 양은 큰 양 아닌 거는  다 어 린 양입니다. 새끼 양이라는 거는  이제 갓낳아 놓은 그거라,  갓낳아 놓은 것. 그게 새끼 양이라. 새끼 양이 깨끗하요 어린 양이 깨끗하요? 어린 양은 벌써 세상에 나와 가지고 이리저리 했기 때문에 더러워졌지만 새끼 양은 이제 어머니  모태에 쏙 나왔 으니까 그거는 아무 거 더러워지지 않고 이 세상의 뭣이 물들지 않으니까 제일 깨끗 하다 말이오.

그 어린 양과 새끼 양은, 예수님은 어린  양이오 새끼 양이오? 예수님은 어린 양이 요 새끼 양이요? 예수님은 어린 양이라. 그런데 새끼 양 그거는 예수님보다 제가 더 선한 척 더 제가 관대한 척 제가 더 위하는  척 요렇게 하는 그것이 새끼 양입니다.

그자가 뭐이냐 하면 짐승으로 더불어 권세를  받아 가지고 일하고, 그것은 나오기를 어데서 나왔느냐 하면 고거 어데서 나왔습디까? 어데 바다에서 나왔나  육지에서 나 왔나? 새끼 양이 땅에서 나왔어? 그 몇장이지? 계시록 13장이가?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 하더라" 용처럼 말하니까 이거 그 용은 마귀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마귀인데 이것은 새끼 양이니까 어린 양보다 훨씬 선량합니다. 어린 양보다 훨씬 선량하요. 그런데 이 것은 어데서 나왔습니까'? 땅에서 나왔어, 땅에서. 땅은 뭐라고 해석했지요? 땅은 뭐 라고 해석했지? 도덕을 말했어 아주 도덕주의를 떡 타고 도덕주의에서  나왔는데 어 린 양, 예수교 보다도 더  예수교보다도 더 선량해. 아주 예수교보다도  더 선량해서 그 사람은 예수님은 아니라 하는 것도 뭐 이해해야 되지 관용해야 되지 이렇게 해서 아주 예수교보다도 더 선량한 도를 만들어 낸 요것이 새끼 양인데 요놈이 바로 마귀 요, 용은 마귀를 말하요.  요게 바로 마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얼마든지 선량히 말하면 자꾸 좋은 줄만 이렇게 알지  말고, 성경을 전체를 모르면 다 헛일이 돼요.

이러니까 뭐 오늘 아침에는 여러분들에게 다 말하지 못하고 어찌 됐든간에 좁은 문 으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이요 또 그 문으로  들어가면 생명 얻습니다. 그 문으로 들 어가면 주님하고 결합됩니다. 그러나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것은  악령이요, 넓은 문 은 뭐이 넓은 문입니까? 참은 하나뿐인데 참을 둘이라고, 참을  셋이라고, 옳은 거는 하나뿐이라, 그러면 어쨌든지 옳은 것,  참은 하나뿐이다, 신도 참  신은 하나뿐이다.

이래 유일을 찾으려고, 유일을 찾으려고 애쓰는  그것이 좁은 문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인데 이렇게 타협적으로 뭐 아주 신사적으로 뭐 그거는 뭐  천주교에서도 다 구원 있고 여게도 구원 있고 다 이래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그거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 고 우리는 그래 할 일 아니라. 우리는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할 일이고 우리는 자 꾸 구원하는 일만 해야 되는데 우리는 좁은 길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우리  갈 일이 지 넓은 길에 있을지라도 나는 그 사람을 어째 구원해 보겠다 하는 이런  말을 하는 그것은 우리가 할 그 자유성과 본분이 아니고 우리의 위치가 아니고 우리 위치를 넘 어서 월권하는 그런 행위가 돼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쨌든지 뭐 그 해석을  좁은 데서 할 수가 없는,  이러니까, 유일에 는, 유일을 찾는 것이 곧 성령의 인도를  찾는 것이요 유일을 찾아 가지고 걸어가는 그것이 생명길을 절어가는 것이요 생명을 만나게  되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여게 는 타협을 아주 배격하는 말입니다.

또 그러고 이제 예수님 만난 것이 전부 산봉우리라 하는 그것도 자기들이 기도하며 가며 생각해 봐요. 산봉우리라 하는 게 타협인가? 그게 타협이  아니라. 그런데 이거 사람들이 오해를 해, 좁은 게 넓은  것이요 넓은 게 좁은 것인데. 좁은  것이 한없이 넓은 것이 되고 넓은 것이 한없이 좁은 것이라. 넓은  게 그것이 아주 뭐 이렇게 타 협적으로 해서 요새 이 세상이 하나돼 가지고 이래 다 이 화평 화평 해 가지고 하는 그런, 고 화평 그게 화평주의로 나가는데 그  화평주의로 나가는 이 화평 속에 화평 이 들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화평 속에 화평이 들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도 안 들어 있어. 하나도 안 들어 있어. 거게는 뭣만 들어 있어? 전부 불목만 들어 있고 사 망만 들어 있어. 요걸 깨달아야 돼요. 넓은 것 속에 좁은 게 있고 좁은 것 속에 넓은 게 있다는 요것을 깨달아서 요 각도에서 보는 것과 조 각도에서 보고 견해하는 것이 다른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이래서, 산봉우리로 말하는 것도 자꾸  이거 좁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또 이 일곱 머리 열 뿔이 하나가 돼 가지고 어절 양으로 더불어 싸우는데, 일곱 머리, 열 뿔, 또 짐승 이게 하나가 돼 가지고 한 뜻을 가지고 이게 하나가 돼 가지고 어린 양으로 더 불어 싸우는데 이것이 신약 교회의 종말 전투인데  이 싸울 때에, 그러면 여기 싸우 는 데 제일 싸우기 일호로 어려운  게 뭐이요? 일호로 싸우기 어려운 게  뭐입니까? O군의 부인, 짐승, 일곱 머리  열 뿔이 하나가  돼 가지고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 는데 그 진실한 자들은 예수님 이 이기실 때 같이 이기지만 나머지는 다 패전하는데 거게 일호의 우리가 싸워야 할 전쟁이 뭐입니까? 하나되지 않는 그것이 일호의 싸움 입니다. 일호의 싸움. 하나되지 않으려 하는 것, 하나되지 않으려 하는 게 일호의 싸 움이라. 하나되지 않으려 하는 그게 일호의 싸움이라. 그러면 하나되는  것이 일호가 안 되고 어째 하나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일호가 돼? 왜 그래요? 그거는  세상을 말 한 것인데 세상하고 하나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일호 싸움이고 하나되려 하는 건 일 호 싸움이 아니다 그말은 무슨 말이오? 우리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되지 않으 려 하는 그것이 우리의 제일 첫째 싸움이 됩니까?  저 OO교회서 오신 분. 한번 대 답해 봐.

왜? 일곱 머리, 열 뿔, 또 짐승은 한덩어리인 세상인데 세상하고, 세상은 똘똘 뭉쳐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그것이 종말  싸움인데 그때에 어 린 양은 의혜히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이기실 터이요 거게 속한 자들 진실한 자들은 이길 터인데 우리가 그러면 이기려고 하면 싸워야 이기지. 전투가 있 어야 승리가 있는 것이지 싸움 없이는 승리가 없어요.

그러면, 싸우는데 우리가 첫째 싸움 하는  것이 무슨 싸움이라고요? 하나되지 않으 려 하는 것이 우리 싸움인데 그러면 우리 싸움이 왜 하나되려 하는 그게  컷 싸움이 아니고 하나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우리 싸움이 됩니까? 우리가 누구기  때문에? 우 리가 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어떤 자이기 때문에? 그러면 세상 그것은 뭐입니까? 세상 그것은 죽음의 뭉텅이입니까  생명 뭉텅이입니 까? 죽음 뭉텅이하고, 죽음 뭉텅이하고 한 덩어리 안 되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 첫째 싸움이라. 그러면 우리는 어째 가지고 있다 말이오? 죽어 있다 말이오 살아 있 다 말이오? 살아 있다 말이오, 살아 있다는 말.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일호 전쟁 이 뭐이냐 하면 뭉치지 않는 거라. 뭉치지 않는 것은, 뭉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뭣하 는 거라? 뭣하고 뭉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까? 죽음과 뭉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안 죽으려 하는 거라 말이오. 안 죽을, 우리의 첫째 싸움이 안 죽으려 하는 게 우리 첫째 싸움이라. 안 죽으려 하는 것이 우리 첫째 싸움.  안 죽으려고 싸 우는 것이 우리 첫째 싸움은 죽은 자라 말이오 산 자라 말이오? 산 자라 말이오. 이 러니까 자꾸 이래 단편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좀 넓게 생각해.

이러니까 거게도 뭐이냐? 거게는 타협하지 않는  것이 우리 일호 싸움입니다. 이러 기 때문에 말세는 온 세상이 다 한덩어리되는데, 짐승, 일곱 머리 열 뿔이 한 덩어리 가 돼 가지고 나가는데 거게 제일 일호 싸움이 뭐이냐? 그것들로 더불어  타협해 가 지고 하나되지 않은 것이 그게 지금 제일 큰 싸움이라 말이오.

오늘은 지금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거게 하나되지 않 는 것, 세상하고 하나되지 않는  것이 지금 우리 싸움인데  세상하고 하나되는 것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도 하나되고 뭐 소련하고  뭐 해 쌓다가도 다  하나되고 요번에 보니까 뭐 OOO씨도 이제 소련  방문한다, 또 OOO씨도 그때  중공 가면 뭐 죽을 줄 아는데 중공 방문한다. 이러니까 뭐  국경이 없어지고 이러니까 국경이 없어지면 하, 이제 참 기독교 만능 시대가 왔다  이렇게 말하지마는 기독교가 국경이 없는 것 인뎨 기독교가 국경이 없는 그 국경이 없는 것과 이 세상에서 공산주의 민주주의 모 든 이래 군주주의 모든 각 종류들이 국경이 없고 정치 경계가 없는 것과  그 종류가 다르다는 요것을 파악하지 못하면 헛일이라.

그걸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이거 뭘로  통일인지, 뮐로 통일인지 이것을 구 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 죽어!  이걸 말하면 다 싫어 합니다.  다 싫어해! 싫어해서 이제 뭐 지금은 이렇지마는 조그매 되면 나중에 가면 무슨 박해가 올란지 모릅니다.

박해 오면 박해가 와서 사자가 오고  표범이 와 가지고 그러면 그  사자굴 표범산이 뭣하는 곳이오? 뭣하는 곳이라? 그것이 주님하고 가장 단둘이 가깝게 연애하고 주님 하고 둘이 좋아하고 놀고 모든 세상 교회를 내려다 보고 사는 그곳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아무리 세상의 피조물이 어떤 강한 게 와도, 피조물의  아주 맹수 혹독한 것이 오면 그 혹독한 것이 오는 것의 목적이 뭐이야? 맹수와 혹독한 것이 신앙 걸음 에 몰려오는 것은 그것은 주님이 오게 하는 것이오 저희가 오는 것이오?  주님이 오 게 하는 것. 뭐하려고 오게 합니까? 뭐하게 오게 하는 건니까? 성결인데,  주님만 상 대하는 자 되도록, 네가 나만 얼마나 보느냐? 간부를 보내는 거라 말이오.

간부 아주 간부를 보내는데 맹수 공산주의면 독약 독침,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으로 이런 거는 그런 것을 보내는데 그런  것 보내는 것은 어떤 걸 보내는  것이냐? 아주 간부를 보내는데 미꿈합니다. 눈섭도  잘생기고 입도 잘생기고  코도 잘생기고 귀도 잘생기고 스타일이 미꿈한 아주 미남이오. 아주  미남이라서 그만 반하지 아니할 수 없을 만치 그런 미남을 떡 보냅니다. 아주 천하의 미남을 보내요.

천하의 미남을 보내는 것은, 본 남편이 천하의  미남 보내는 것은 '보자, 이런 미남 보내는데 이 미남보다 나를 좋아하나 미남의 유혹을  받나?' 이런데 보내 보니까 미 남의 유혹 하나도 안 받습니다. 하나도 안 받고 그거는 뭐 아주 아무것도 아닌 것으 로서 그렇게 보고 아주 더러운 것으로 보고 그것을 아주  멸시하고 천대하고 거게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봅니다 이러면 최고로 시험해.  천하의, 천상 천하 의 영원 무궁의 최고의 미남을 보내도 이 여자는 미혹이 하나도 없고 나만  보는 여 자로구나 이러면 주님이 '이제야 네가 나를 참 좋아하고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때에 최고의 연애를 가지고 이제 결합을 가지는 것이라 그 말이오 그거 위해서 하는 것이 고 또 주님의 사랑을 솔빡 다 받도록 하는 거라.

그러니까 그때 그것을 미혹을 받아서, 그 미남으로 미혹받아서, 미혹  안 받으면 그 거는 마찰이요 적이기 때문에 전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보호를  받지 않으면 안 돼. 이것이 뭐이냐? 이것이 골방이라. 잠근 동산이요 이것이 골방이라.

이러니까 이제, 그런 것이 암만 와도 해치지는 못해. 해치지 못하고 도리어 그로 인 해서 내가 뭐이냐 하면 미남 오니까 눈뜨는 거와 마찬가지로  막 얼룽덜룽하게 두려 움이 돼 가지고 사자 표범같이 이와같이 오니까 그게 두려워서 그 두려움에 자기가 현혹돼 가지고 그  두려움에 자기가 끌려 서 두려움에 조그만치라도 마음이 자극이  가면 그게 내나 주님만  두려워하는 그게 갈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뭐이냐? 그걸 좋아하는, 내가 비유하기를 미남 보냈다 하는 그 말이 뭐이냐 하면 유혹에 강한 자, 유혹의  강도가 강한 자를 보냈다 그 말 이오.

유혹의 강도가 강한 자를 보냈다는 말은 신앙 지킬 때에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 하고 상대하는 그것을 조그만치라도  흔들리게 만들고 조그만치라도 나뉘게  만들고 저쪽으로 조그만치라도, 고문과 고형을 하니까  그때 그리 기울어지기 쉬운  그것을, 미혹받기가 쉬울 것을 말 해서 내가 말하기를 미남을 보냈다 내가 그렇게 지금 비유 로 말한 것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고문과 고형이 어떤 것이 와 가지고, 어떤 유혹이 와도 주님  한 분만 바 라보는 그것이 '나의 신부야' 하는 말은, 신부라 말은 주님만이  상대한다 말이오. 주 님만이 대하는 거, 상대. 주님만 상대하고 딴거는 상대 안 해. 주님과 자기와의 사이 에 아무것도 그 사이에 끼어 있으면, 끼어 있으면 그게 간부라.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고  주님만 상대하는 것,  주님만 바라보는 것, 주님만  믿는 것, 주님만 의지하는 것, 주님만 기뻐하는 것, 주님만 좋아하는  것, 주님만 두려워하 는 것, 주님만 섬기는 것,  모시는 것. 주님과 자기와  단둘이만 딱 들어붙고 아무도 붙지 않는 그것이, 신부라 말은 상대자라 말 아니오? 배우자라 말이오. 상대자, 배우 자.

이걸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여게 아가서에 보면 제일 최고가 나의 신부  이렇게 말 하고 나의 누이라 말은 근본이 같다 그 말이요, 근본. 누이라  말은 동태에서 나왔다 말이오. 근본 그거는 우리 구원이 전부 다  하나님 한 분에게서 발원된 우리 구원인 것입니다.

이래서, 그러면 이 신앙 생활은 이렇게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데도 이게 타협 은 못씁니다. 또 산봉우리로 말한 것도 이게 타협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이거 좁은 문이라는 것도 타협을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온 산이라 해 가지고 시온  산에 간 사람들은 여인으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 여인으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함께 시온 산에 있는데 여인으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 말은 그거는 평생  장가가지 말라 말 입니까 그 여인은 뭘 가리 킵니까? 장가가지 말라 말인데 그거 뭐이오? 자기의 배우자를, 배우자를 정하지 말라는 말인데 그 여인은 뮐 가리키지요? 이 모 든, 모든 피조물, 자연 만물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자연 만물 피조물과 이거 너 부부 되지 마라. 그거와 짝되지 마라. 그거와 배우되지 마라, 배합되지  마라. 그거와 그것 으로 네 이 모든 피조물을 네 배우자로 삼지 말고 조물주만 배우자로 삼는  고 사람 이 여인으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입니다. 그 사람이 시온 산에서 어린 양으로 더불어 같이 있어요.

이러니까 그거 그것을 뭐 결혼하지 않아, 결혼 안 해도, 결혼 안 해도 또 평생 독신 으로 살아도 그 사람이 간부가 몇이나 돼.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가 네 남편이 일곱 이 있었으나 지금 그거는 네 남편이 아니다 하는 그것도 하나의 계시로 형식으로 보 여 준 것인데 그 사실에 있어서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에 대한 중요한 종류 일곱을 말해서  이것도 네 남편 이것도 네 남편  돈도 네 남편, 권세도 네 남편, 지위도 네 남편, 미남도 네 남편, 좋은 가정도 네 남편. 네 배 우자 네 짝은 가정도 네 짝이요, 가정이 네 짝된  것도 나하고 짝된 것보다 더 두껍 고 이 세상 네 사업이 네 짝된 것도 사업이  네 배우자된 것도 나보다, 나와 배우자 된 것보다도 더하고 사업도 뭐, 그거 신랑이  일곱이나 있지만 그거는 네 남편이 아 니다. 네 남편은 지금 온 이가 네 남편이다 이렇게 한 뜻으로서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쨌든지 말세에는 제일 이것이 어렵습니다. 타협하는  것 타협해서 자꾸 속화돼 나가지 않고 이와같이 해야 되지,  하나님 앞에 참된 경건은 환난 중에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스스로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 것이라야  되지 자기가 자꾸 이와같이 지금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기는 구원하는 그 면은  넓혀가는 게 좋 지마는 자기가 물들지 않아야 되지 자기 자체가 더러워져 가지고는 일을 못 하는 것 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포 돌아갑시다.

반은 말했으나 어쨌든지 유일을 찾으십시오. 뭐이든지 유일 찾아서 가면 살고 유일 을 안 하고 사람이 그만 흐리멍덩하게 그만 퍼져 자빠져서 이렇세 타협으로 아주 자 기가 유력한 줄 알고, 사람이 뭣이 관대해야 된다 관용해야 된다 하고 이 진리를 양 보하고 진리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이렇게 관대해지는 것이 진리로  관대해져서, 그러니까 자꾸 좁아지는 게 넓어져야 돼.  자꾸 좁아짐으로 넓어져야 되지 넓어지면 다 죽습니다. 좁아짐으로 넓어지는 것, 좁아짐으로 넓어지는 요  신령한 진리의 권위 로 넓어진 걸 그래야 되지 이 보이는 유형적인 것으로써 넓어지는 그런 거는  다 사 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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