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관-역항신앙

 

1987. 3. 8. 주일오후

 

본문:마가복음 10장 5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 말씀을 여러 날 계속해서 증거를 하고 있읍니다. 46절 하반절에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그 길가라 하는 그 길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또 52절 하반절에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그 길이라는 말이 두 번 기록돼 있읍니다.

여게 기록되어 있는 이 바디매오는 역사에 그런 사실이 있었던 것을 우리에게 그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러면 예수님이 그런 소경을 낫게 해 주신 그런 권능을 가졌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바디매오라는 이 소경은 그때에 때마침 그 소경이 있었고 또 주님이 그리 지나가시고 한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은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는 계시를 문서로 우리의 구원 도리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도 있고 또 이런 한 형식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것도 있읍니다. 이것은 한 형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게 있는 이 소경 바디매오는 곧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이 계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난 토요일날 아침인가 금요일날 밤이든가, 이 소경 바디매오에 대한 한 그 순서도 빼지 말고 이것은 내게 대해서는 어떤 것이며 저것은 내게 대해서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낱낱이 다 비교해서 깨달아야 구원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 그런 일이 있었읍니다.

이러기에, 다만 육신으로 소경된 바디매오를 통해서 우리에게 신령한 소경이 되어 있는 우리들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 계시를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형식을 가지고 계시할 때에 “길가에서” 혹은 “길에서” 하는 그런 말씀이 종종 있읍니다. 그러면 그 길이라는 것은, 우리를 가리켜서 나그네라 그말은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이것이 우리의 영주처가 아니고 우리는 이사갈 사람들이라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를 나그네라 그렇게 말씀했고, 또 행인이라, 행인. 길 가는 행인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지금 길을 걷고 있다. 무슨 길을 걷고 있느냐? 자기는 하나님을 향하여 천국을 지금 향하여 가고 있든지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든지 사람의 한 생활 한 생활은 다 자기의 종착을 찾아서 가고 있는 걸음이다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길에서 바디매오가 앉아서 주를 기다렸다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으면서 곧 예수 믿는 일생 생활에서 주를 기다렸다 하는 말을 표시한 것이고, 또 길에서 좇았다 하는 것은 눈뜨고 난 다음에는 그만 눈뜨는 그때부터 남은 나그네 생활, 행인 생활. 남은 길 가는 행인 생활의 전부는 다 주님을 따르는 생활로 계속했다 하는 그런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 계시에서 우리에게 구원의 도를, 구원의 도. 구원의 길,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을 그대로 똑똑히 알아야 우리에게 확신이 생겨지고 요동치 아니합니다.

이래서 오후에는 간단하게 설교를 하고 말라고 하는데, 한번 그라면 따라 적으십시오. 그러면 제가 적어 놓고 간단하게 말을 해 드리겠읍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 제목, ‘여생 전부를 주님 좇게 한 정관’ 정관이라 말은 바를 (正)정자, 볼 관자 그것을 가리켜서 정관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바로 본 것을 가리켜서 정관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거게 첫째로 ‘전존재 정관ㅡ바를 정자, 볼관자ㅡ전존재 정관, 또 전가치 정관, 또 전인과 정관 가지지 못한 비참을 믿는 믿음.’ 이제 둘째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이 정관하게 하여 줄 수 있음을 믿는 믿음’ 예수님 한 분만이 정관하게 하여 줄 수 있는 믿음. 정관하게 하여 줄 수 있는 믿음.

또 셋째로, ‘예수님으로 인한 정관의 은혜를 받는 일에 방해하는 모든 환난 박해를 역항한 믿음’ 역항, 항은 대항한다 말입니다. 역항한 믿음.

또 넷째로, ‘모든 것 버리고 초비상적 전력으로 주를 향하여 달린 믿음’ 다섯째로, ‘모든 희망 다 버리고 정관만을 최후까지 구한 믿음’ 또 여섯째로, ‘여생 전부를 주님 좇게 한ㅡ주님을 좇아간다ㅡ주님을 좇게 한 정관’ 녜, 이라면 다 됐읍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보고 집에 가서 새겨서 연구를 하십시오. 연구를 해서 이것을 바로 깨닫는다면 아주 복이 있고 참 인간 성공을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간단하게 거게 해석을 한다면 전존재 정관이라 말은 존재로 말하면 창조주와 피조물 둘을 합하면 전존재가 됩니다.

세상 지식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이 지구 땅덩어리 중에 몇 가지, 또 좀 가까운 모든 위성들에게 있는 거 몇 가지 그걸 가지고 일생을 야단을 지기지마는 그것은 피조물이라는 존재 중에도 몇억억억억?의 만분의 일도 안 되는 그것들입니다.

알겠읍니까? 떠들어 쌓고 큰 척해도 그렇게 극히 부분적이요 아주 미약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전존재라고 하면은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을 다 합해서 전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존재의 정관이라. 모든 존재를 바로 보는 것, 바로보는 것.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도 바로 보고, 또 피조물도 뭣뭣이 가지 수가 얼마나 되며 또 그게 뭐인가 똑똑히 바로 보는 것. 아주 이 말이 큰 말입니다. 굉장히 큰 말입니다. 큰 말인 것을 알고 여러분들이 들으십시오. 모든 존재를 바로 보는 것.

바로 아는 것 말이요, 바로 보는 것 바로 아는 것.

또, 전가치를 바로 보는 것. 모든 것의 가치, 흙도 제 가치 가지고 있고, 사람도 제 가치 가지고 있고, 나무도 제 가치 가지고 있고, 구더기도 제 가치 가지고 있고, 모든 존재들은 제대로의 가치를 다 가지고 있읍니다. 가지고 있는데 이거는 얼마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는 그 가치를 바로 보는 것이 정관입니다. 모든 가치에 대해서 바로 보는 것, 정관하는 것.

그러나 이 세상에는 큰 것을 작다 작은 것을 크다 이래 가지고 가치에 대한 정관이 하나도 없읍니다. 인간은 가치에 대해서 정관을 할 만한 그런 자격이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가치에 대해서 바로 볼 수가 있지.

이거 뭐 무슨 말인지 좀 이해가 됩니까? 이 청년 이해 돼요, 이 키 큰 청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전가치의 정관? 저 무슨 의사더라, 성이 뭐이더라? 저 의사, 가치 알겠어? 전가치의 정관이라는 거 알겠어? 저 치과 의사 말이오. 전가치의 정관이라는 말 알겠어? 전가치 정관이라 하는 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겠어? 그라면 치과해 가지고 돈 버는 돈의 가치는 얼마나 있는지 알아요? 돈의 가치는 얼마나 큰지 알아요? 잘 몰라. 새벽기도 나오는 것과 그 돈의 가치와 두 가지 비교하면은 가치가 어찌 되지? 하루 새벽 나와서 하나님 도 듣는 거와 치과 해서 한달 내 번 돈과 그 가치를 중량을 달면 가치가 어느 게 많아요? 어느 게 많아요? 돈번 게 많아? 모르지, 뭐이 많은지? 모르겠지? 몰라 몰라, 다 몰라.

몰라요.

이것이 인간들이 어두워져서 도무지 모릅니다. 도무지 몰라. 얼마나 어려운 거라고. 모든 가치를 다 이것도 가치 가지고 있고 이것도 가치 가지고 있고, 이것도 가치 가지고 있고, 똥도 가치 가지고 있고, 구더기도 가치 가지고 있고, 다 제 가치 다 가지고 있어.

가져 있는데 ‘요것은 가치가 얼마다 저건 가치가 얼마다, 이 가치와 이 가치 두 가치를 비교하면 이게 크다, 이거 가치 비교하면 이게 크다.’ 이렇게 모든 가치를 바로 볼 줄 안다면은 이 사람은 참 하나님 되는 것입니다. 알겠읍니까? 바디매오가 자기 보지 못하는 것으로, 자기의 불행하고 비참하게 되어 있는 그것이 보지 못한 그 연고로 비참하게 돼 가지고 있다는 그 사실을 가지고 우리에게 모든 데 대해서 관찰이 바로 되지 못해서 우리가 비참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 있는 사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요것으로 가르쳐 주신 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전가치의 정관 그거는 모든 것들은 다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치, ‘이 가치는 이것보다 이 가치가 크다, 이것보다 저거 가치가 크다, 저것보다 이거 가치가 크다, 이것보다 저거 가치가 크다.’ 이 모든 우리의 행동에도 가치가 있고, 물건에도 가치가 있고, 사람에도 가치가 있고, 계획에도 가치가 있고, 소유에도 가치가 있고, 웃음에도 가치가 있고, 활동에도 행동에도 다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치가 어떻게 되는지 그 가치를 바로 볼 줄 안다면 인간은 하나님 됩니다. 속지 안해. 어리석지 않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거는 등한히 하고 제가 무슨 서울대학 또 뭐 옥스포드 대학인가 뭐 하바드 대학인가 또 무슨 대학인가 대학, 동경 또 무슨 제대 그것과 예수님 믿는 이 신앙 생활 바로 하는 것과 가치를 바로 모르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합니다.

‘여게서 이 진리는 배우지 못해도 서울대학 가야 되겠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것도 좋지마는 그것보다는 진리 배우는 게 낫기 때문에 진리를 배울라면 어데 가 배워야 되느냐? 진리 배울라면 아무 데 가면 좀 더 잘 배우겠다. 그라면 아예 나는 이 좋은 학교 치워 버리고 저 나쁜 학교 가도 내가 진리 많이 배우는 데로 잘 배우는 데로 그리 가겠다.’ 그 사람은 거기 대해서 가치관이 바로 됐읍니다.

모든 가치를 정관하는 데서 사람은 완전히 변해집니다.

모든 존재에 대해서 보이는 이 모든 만물이 있는데, 모세는 눈으로 보이는 모든 애굽에 있는 그 왕의 계대가 되는, 바로 왕의 계대가 되는 그 모든 많은 애굽의 재물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비교 못 할 가치가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애굽 바로 왕의 바로 후계자 될 그까짓 걸 집어 던져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그거 히브리서 11장에 있지 않소? 노아 때에 노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방주 모으는 그 가치가 천하에 있는 모든 것보다 가치가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택했어. 노아를 모든 사람은 등신이라고 하지마는 노아는 다른 사람들을 등신이라 합니다. ‘나는 이거 하나님께서 말씀해 놓은 방주 모으는 거 택했는데 너는 왜 세상 부귀 영화 과학 그런 걸 택하노?’ 서로 등신이라 하요. 이러니까 노아가 본 가치관과 모든 세상 사람들이 본 가치관이 달랐어.

잠시 후 홍수가 내리고 난 다음에 누구의 가치관이 발랐읍니까? 누구의 가치관이 옳았읍니까? 저 치과 의사, 누구의 가치관이 옳았어? 노아의 가치관이 옳았어 그때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그 가치관이 옳았어? 왜 몰라? 그라면 왜 대답하지 못 해? 내가 지금 치과 의사 뿌리를 싹 뽑을라고 하는 거라. 뭐 때문에 그까짓 거 가지고 쭉발시고 앉아서 새벽기도도 안 나오고 그라고 있어? 해 봤자 소용 없어, 그까짓 거 암만 해 봤자. 하나님이 제일이지 그게 뭐이야? 가치관을 바로 가져.

셋째는 전인과의 정관을 가져야 됩니다. 전인과의 정관이라니? 인과라는 말은 원인이라는 말이요 결과라는 말이오. 모든 것은 원인이요, 오늘에 하는 것은 다 내일의 원인이요, 미래로 닥치는 것은 내가 현재 한 그 원인의 결과로 닥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의 그 보응되는, 인과의 보응되는 이것을 바로 보면 사람들이 후회되는 일을 하지 안할 터인데 요 세 가지를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은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정관을 가지지 못하고, 또 모든 가치에 대해서 정관하지 못하고, 인과에 대해서 정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비참합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이 비참하다 하는 그런 것을 느끼는 사람은 예수님밖에는 없읍니다. 이 불교를 믿으면 이 불교의 결과가 어찌될 건가? 성경대로 보면은 비참한데 모르기 때문에 불교에 열심히 가지. 천하에 어떤 종교로써도 구원 얻는 일이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기독교 외에 딴데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든지 모든 사람들의 본 것이 잘못됐든지 마지막에 결말은 나고야 말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저희들이 생각한 대로 따라가겠읍니까? 천명 만명이 다수가 말한다고 하나님이 꺾어지겠읍니까? 당신이 말씀한 대로 그대로 될 터이니까 모든 사람은 그 인과에 대해서 바로 보지 못하는 데에서 모든 금생 내세 영과 육이 전부 다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걸 깨닫고 여러분들이, ‘보자, 나는 가치에 대해서 바로 보나? 우리 아들이 여기 있으면은 주일학교 반사할 것이고 또 어떻게 할 것인데 이것보다 내가 서울대학에 들어갈라 하다가 서울대학 못 들어갔으니까 자식대라도 소원을 이루어야 되겠다.’ 이러니까 서울대학 가 가지고 입학이 안 되니까 일 년 또 재수해 가지고 한번 들어가 보겠다. 안 되면 이 년 재수.

네가 모든 것에 가치관을 바로 가졌나? 서울대학의, 가치는 얼마나 크며 신앙은 가치가 얼마나 크며 진리 배우는 거는 얼마나 가치가 크나? 네가 여기 있었으면 그것이 신앙 잘 지켜서 일등 신앙을 가졌는데 서울에 가니까 배암 지식만 잔뜩 배워 가지고 이제 예수 믿는 거 시시하게 여깁니다.

‘야야 기도해라’ 하면 ‘예예’ 해도 속으로 삐쭉하이 `헤, 참 아이구 다 미개한 사람들 기도는 무슨 기도? 모든 것이 과학 세계요 모두가 다 실질 세계인데 뭐 기도한다고 돼?’ 보이지 안하는 하나님을 대번에 반대하면 좋지마는 그라면 학비 대 주는 아버지 어머니가 다 지금 학비를 안 대 줄 거고 하니까 ‘예 잘 믿지요. 내가 주일에 잘 갑니다.’ ○장로님, 들립니까? 들려요? 반성이 좀 돼져? 없어? 아들 여게 있는 것보다 거게 갔음으로써, 서울 가서 공부함으로써 여기 있는 것보다 신앙은 떨어졌읍니다. 신앙 떨어진 게 보입디까? 그게 바로 망하는 거라, 그게 망하는 거.

모든 존재에 대한 정관, 모든 가치에 대한 정관, 모든 인과에 대한 정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여게 대해서 소경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비참하다는 이것을 느끼는 사람이 예수 믿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알겠읍니까? 아직도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모든 관이, 가치관이나 존재관이나 인과관이나 모든 관이 성경대로의 관이 되어 있으면 하나님과 관찰이 같다는 말이고 성경대로 되지 안했으면 마귀대로 돼 있다는 말입니다.

바디매오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그가 보지 못함으로 비참한 그 사람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셨다. 우리가 모든 존재관이나 가치관이나 인과관이나 이런 것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살 행위를 하고 있다.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자멸 행위를 하고 있다. 공연히 미쳐 날뛰고 공연히 환장 들어 날뛰고 공연히 분해 날뛰고 야단을 지기니 이 모든 비참의 사고가 모든 것을 다 모르기 때문에, 꺼꾸로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요것을 요 바로 정관하지 못해서 자기의 비참을 알고 ‘어떻게 하든지 나는 정관해야 되겠다. 모든 것을 바로 알아야 되겠다. 바로 알아야 바로 행하지.’ 요것이 자기의 전 포부 중에 전부요, 소원 중에 전부요, 자기 가슴 아픈 거 중에 전부요, 자기 탄식 중에 전부 요것이 되어 있는 그 사람이 자기를 바디매오로 가르친 것을 깨닫고 나는 과연 오늘의 바디매오다 요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요게 제일 중요하요, 중요하고.

둘째로는, 그러면 모든 것을 정관하지 못하는 이것을 모든 것을 똑바로 보도록, 지금 보나 이 천지가 불탈 때 그때 보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서 보나 영원 무궁한 세계에서 보나 바로 본 거야 꼭 같지.

우리는 오늘 이 보는 것과 6.25와 같은 전쟁만 와도 여러분들의 그 모든 관이, 여러분들의 모든 관찰이 다 꺼꾸로 뒤비질 것이오. ‘이렇게 전쟁 날 줄 알았으면 내가 이 짓 안 하는 건데.’ 뭐 땅을 사 놓고 뭐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이래서 막 이래 가지고 아주 자기딴에는 참 태산같은 기대를 가졌는데 전쟁이 나서 확 나라가 변동돼 버리니까 부동산 사 놓은 게 다 헛일돼 버려. 그런 건 다 정관이 아닙니다.

바로 본 거는 난리가 나도 변동 없고 죽음이 와도 변동 없고 심판에도 변동 없고 무궁세계에도 변동 없고 변동 없이 보는 그것이 정관입니다. 알겠읍니까? 이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나는 모든 존재관이나 가치관이나 인과관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바로 하지 못할 사람 되어 있으니 비참하다 가련하다’ 이걸 좀 깨달아야 될 터인데, 짜다라 좋다고 벙긋거리면서도 ‘보자. 이것 때문에 내가 벙긋벙긋하며 웃고 좋아하니 과연 이것이 좋아할 만한 가치가 있나? 또 이 좋아하는 이것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맺겠노?’ 이것을 알면 오늘에 우리가 취할라 하는 것보다 던져버릴 게 많은데.

하나님은 다 던져버리라 했어. 던져버리고, 취하지 말고 던져버리라 했어.

던져버리면, 던져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씩 둘씩 필요한 것만 필요한 종류 필요한 분량 그대로 딱딱 맞춰서 정확하게 우리에게 해 준다 했어.

이분이 있으니까 이분을 이런 줄 알면 누가 그분 뜻대로 안 하겠소? 이걸 몰라.

존재관을 몰라. 우리를 위해서 대속하신 주님이 어떤 분인 줄 우리가 몰라.

그러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지, 정관 못 하는 것이지.

둘째로 귀중한 것은 주님만이 우리에게 금생 내세, 또 창조주 피조물, 영원 무궁, 현재, 심판, 병, 고통,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 이런 것들을 무엇이든지 나에게 똑 바로 알도록 가르쳐 주실 이는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아무도 없어. 예수님 한 분뿐이라. 요것을 둘째로 아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존재관도 예수님만이 나를 바로 가르쳐 줄 수 있고, 모든 가치관도 예수님만이 나에게 바로 가르쳐 주실 수 있고, 모든 원인과 결과의 인과의 그 조화가 어찌 되느냐? 인과의 조화성도 바로 가르쳐 주실 이는 주님밖에 없다 하는 것을 아는 것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요 믿음을 가져야 돼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그 믿음은 이 믿음이라.

모든 데 대해서 정관을 가지지 못한 자기의 비참을 아는 믿음. 예수님만이 모든 것을 바로 보여 줄 수 있는 분이신 것을 믿는 믿음.

셋째로는 예수님이 나를 바로 알려 주실 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바로 알려 주심을 받을라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모든 것을 바로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바로 가르쳐 주심을 받을라고 하니까 모든 방해물이 많습니다.

돈이 방해합니다. 권세가 방해합니다. 친척이 방해합니다. 아내가 방해합니다.

남편이 방해합니다. 친구가 방해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실 내 구주이신데 이분을 가까이 해야 될 터인데 이분에게 모든 것을 바로 알려 주시기를 받을라고 하니까 부모가 반대합니다. 형제간이 반대합니다. 친구가 반대합니다. 가족이 반대합니다. 자기 몸뚱이가 반대합니다. 내 속에 있는 악령 악성 악습 이놈이 반대합니다. 마구 안팎에 이런 것이 반대를 합니다.

바디매오가 주님에게 바로 봄을 받을라고 애를 쓸 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읍니까 없었읍니까? 얼마나 있었읍니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니까 어떻게 했읍니까? 예수님에게 바로 보여 주심을 받을라고 애를 쓰고 있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읍니다.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어. 요거 몇 호 입니까? ○집사, 요거 몇 호요? 손가락으로, 몇 호? 틀렸어. 이거라. 셋째라. 뭐 넷째라, 넷째? 똑똑하지마는 죽은 호랑이가 산 개를 못 당해. 아무리 똑똑해도 마음 안 들이고 그만 그라면 다 헛일이라. 서이인데 떡 너이를 들어. 똑똑한데, 아주 똑똑한데 그만 등신이라.

이렇게 방해할 때에 바디매오는 그 방해를 받았읍니까 방해할수록 역항했읍니까? 어떻게 했소? 방해하니까, 슬그머니 눌리니까 눌려버렸소 역항을 했소? 역항이라 하는 건 뭐이 역항이냐 하면은 가지 말라 하면은 어겨서 더 갑니다. 이 뭣이 콱 반대가 될수록이 반대가 될 때 더 거슬려서 마구 하면서 달라드는 그게 역항입니다.

따라합시다.역항 신앙!역항 신앙!역항 신앙이라야 돼. 알겠읍니까? 예수님만이 나에게 바로 가르쳐 주시고 알려 주시는 줄 알고 예수님에게 달라붙으니까 예수님에게 바로 배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꽉 찼어. 꽉 찼는데, ‘너 그라면 직장 뗀다, 너 그라면 감옥에 가둔다, 너 그라면 사형 준다.’ 해도 할수록, ‘너 지금 사자구덩이 집어 넣는다, 불미 속에 잡아 넣는다.’ 이럴 때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다니엘은 그는 그 환경에 순응 신앙 가졌읍니까 환경을 역항한 신앙 가졌읍니까? 어떤 신앙 가졌어? 역항 신앙 가졌어. 역항 신앙을 가져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는 그 믿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역항 신앙.

우리가 예수 믿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압니까? 아니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은 잘난 사람만 예수 믿습니다. 어느 잘난 그 선 이상 사람이라야 믿지 그 이하 사람은 못 믿어. 암만 등신 같아도 그 사람이 보통 사람보다 잘난 사람이라야 믿어요.

또 넷째로, 역항하면서 막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함을 지르니까 예수님이 ‘오라 해라’ 하니까 그때 바디매오가 어떻게 갔읍니까? 일어서 가지고 부지런히 쫓아갔읍니까 훌떡 뛰어 가지고 일어섰읍니까? 꾸불뚱이 훌떡 뛰었어, 어짤 줄을 모르고.

부를 때에 초비상적 방편으로 예수님을 향해서 달렸어. 보통 방편으로 달린 게 아니라 그 비상 방편으로 달린 게 아니고, 비상 방편으로 달린 게 아니라, 비상 방편은 보통 방편보다 좀 센 것이 비상 방편입니다. 초비상이라. 얼마나 좋아 놨던지 말이지. 좋아 놨던지 그만 훌떡 뛰어 가지고, 뛰니까 아마 그게 훌떡 뛰니 다른 사람 보면 미쳤다 할 거라. 그만 어짤 줄 모르고 확 그라니, 마치 아주 무슨 자극을 크게 주면, 이런 짐승도 이래 누웠는데 칼로 가지고 푹 찔러 보이소. 막 어짤 줄 모르고 확 뛰어 가지고 일어서지 않는가? 그거 모양으로 그렇게 바디매오가 초비상적 방편으로 주님을 향해서 달려갔어. 이게 넷째 믿음입니다.

다섯째 믿음은 뭐입니까? 주님이 ‘이제 내가 너한테 뭐 소원 성취를 이루어 줄테니 네 소원이 뭐이냐? 네 소원 성취를 이루어 주겠다.’ 이라니까 이 소원 저 소원 주님에게 구할 것 많은데, 이것도 소원하고 저것도 소원하고 소원하면 주님이 다 이루어 주마 했으니까 소원할 것이 많은데 이 바디매오는 모든 희망, 자기에게 소망도 여러가지고 희망도 여러가지지마는 모든 희망 다 버렸어. 모든 희망 다 버리고 “보기를 원하나이다” 모든 데에 대한 정관을 원하는, 모든 소망 다 버리고 정관을 원하는 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거 아니고 다 되는 줄 압니까?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은 부업은 안 됩니다. 예수 믿는 거는 부업은 안 돼요. 자기가 이것 저것 하고 난 다음에 자기 시간이고 정성이고 기운이고 모든 소유고 자기의 기능이고 모든 것 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난 다음에 찌끄러기 남은 거 찌끄러기 그거 가지고, 찌끄러기 가지고 예수 믿는다고 다 하고 나서 어정어정 나머지기 찌끄러기 가지고 믿을라고, 볼일 다 보고 예배 볼 때 되면은 어정어정 뒤에 와 가지고 보는 거, ‘이 인간아!! 주님은 하나님이신데 너 위해서 생명 바쳐서 구속했는데 찌끄러기 그런 거 가지고 오는 거 나는 받지 않는다!!’ 하는 게 주님이십니다.

무슨 찌끄러기를 가져와 가지고 예수님을 믿을라고! 다 그런 행동이 저주받을 행동인 줄 알고 어서 회개해야 되지 안 하면 마지막에 큰 저주 받습니다. 죽을 때에 제가 가슴쳐서 후회해도 소용 없어. 이 세상이 불탈 때에 제가 와 가지고 가슴 치고 울어도 소용 없어. 앞으로 전쟁이나 큰일 날 때에 급할 때에 가서 아무리 떠들어 쌓아도 소용이 없어.

따라합시다.머리 떼어 주님 섬기라!머리 떼어 주님 섬기라!수지를 주님에게 바쳐라!수지를 주님에게 바쳐라!주님은!큰 공로 베풀었기 때문에!찌끼는 받지 않으신다!찌끼는 받지 않으신다!나머지기 그런 것 받지 안하신다! 이거 알아야 됩니다.

소망도 희망할 거 많이 있지마는 둘째 것 바쳐서는 안 된다 하고서 ‘내가 필요한 거 많지마는 보기를 원하나이다, 요거 하나를 내가 원합니다. 제일 좋은 거 내가 요거 원합니다.’ 할 때에 주님이 ‘야, 귀하다, 네 믿음. 다섯 가지를 구비해 가졌기 때문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읍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는데 그라니까 그 다섯 가지 믿음 가지니까 뭣 했읍니까? 그 다음에는 정관 했읍니다. 모든 것을 바로 봤어. 눈이 환하게 뜨였어. 모든 것을 바로 봤어. 요 다섯 가지를 구비한 그 믿음을 가졌을 때에 ‘네 믿음은 능히 너를 구원할 수 있다’ 말씀하시고 그 다섯 가지 믿음이 구비되었을 때에 그 바디매오 소경은 그만 눈이 떴읍니다. 그만 눈 떠서 바로 봤어. 눈을 떴어. 모든 걸 바로 봤읍니다.

바로 보고 나니까 그 사람 행동은 뭐합니까? 그 사람 행동 어떻게 했소? 말해 봐.

성경 보고 말해 봐. 이 모두 바보들이네, 시집도 못 갈세. 거기 뭐라고 해 놨어, 거게? 길에서 주를 좇았어, 길에서. 당장 그 시간부터 죽는 날까지 주님 좇았어.

주님 따라가, 주님 배우고, 주님 본받고, 주님 닮고, 주님의 제자됐어.

여러분들, 모든 존재관이 바로 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 외에 탐할 게 있지 모든 존재관이 성경대로의 바로 되면 주님 외에 구할 것 아무것도 없읍니다. 주님 외에 구할 것 아무것도 없어.

그 찬송 뭐이지? ‘예수밖에 무엇을 달리 찾아 보리요?’ 그 찬송 몇 장에 있읍니까? 그 찬송 우리 한번 합시다. 113장? 잘 외우고 있네. 자, 113장 우리 찬송 한번 합시다.

잠깐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남은 여생을 주님만 따라갈 수 있는 이 정관을 가지도록 노력합시다. 죽어도 주님 따라가고 살아도 주님 따라가고 주님 한 분만 따라가는, 어데든지 따라가는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바로 보면 요대로 따라갑니다. 요 정관을 우리가 가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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