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잠을 깨라

 

1984. 6. 23. 토새 

 

 본문 : 마태복음 24장 42절∼51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에 깨어 있으라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깨어 있는 게 어떤 것이, 깨어  있는 건가? 주인이 언제 오실런지.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는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언제 주님이 재림하셔도 상관없는 그런 준비를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또 깨어 있는 게 어떤 게 깨어 있는 건고 하니 그럼으로써  자기의 소유를 도적맞지 않는 그 결과를 맺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도적이 갑자기 와 가지고서 도적질할 때에 자기는 그만 자다가 도적을  맞는 그것을 비유했습니다.

 그퍼면 자기 소유를 도적맞지 않는 것이 깨어 있는 자요. 또 주님이 언제  오셔도 염려 없이 다 준비해 가지고 참 주님이 오시는 그 모든. 이 우주가 큰  변동 있는 그런 변동이 있을 때에. 그 '고대가' 노래의 '고대가' 모양으로  그렇게 주님 오시기를 고대하다가 주님이 오시는 그 모든 징조와 변화가 일어날  때에 그 때에 두려워 놀라지 안하고 기쁘고 즐겁게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그것이 깨어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면 깨어 있는 증거가 자기 것을 하나도 도적맞지 않는 것, 도적맞지 않는  것은 과거에야 어떻게 살았든지 현재로서는 자기의 시간이나 자기의 정력이나 또  자기의 모든 생활이나 자기가 접하는 모든 사물, 일이나 물건이나 그런 것을  하나도 원수에게,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라는 모든 죄악, 이 세상 그런 것들에게  뺏기지 않는 것이, 그것이 깨어 있는 증거입니다. 뺏기지 않는 것. 자기 시간도  뺏기지 안했고 시간도 하루 종일 살고 계산해 보면 오늘은 뺏긴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뺏긴 줄도 모르게 전부 다 뺏겨 버렸다, 시간도 뺏기지  안하고, 또 자기의 정력도 오늘은 산 생활이 직접 주님에게 바쳐 사는 생활, 또  직접만 가지고 안 되기 때문에 간접으로 바쳐 살기 위해서 준비한 것, 모든 것  다 주님을 위한 것을 들면 쪽 다 들려 올라오고, 주님을 위한 것이지 주님을  위하지 안한 그런 것은 없는 것. 자기의 시간이나 정력이나 또 자기의 모든  활동하는 생활이나 자기의 그 닥친 일이나 물건이나 또 자기의 마음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을 다 계산해 봐도 썩는 데 이르지 안하고 그것은 다 없어질 것으로  멸망되지 안했고 전부 다 구원으로 성령의 인을 쳐서 다 구원이 되어지는 그것이  도적맞지 않는 것입니다. 도적맞지 않는 것은 그것이 없어질 것이 되지 안하고  영원히 없어지지 안할 것으로 되어졌으면 그것이 도적맞지 안한 것입니다.

도적맞지 안한 그것이 깨어 있는 증거요,  또 주님이 언제 와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주님이 오시는 모든 광경과 우주의  큰 변동이 있을 때에 모든 사람은 다 '돌로 내 위에 치어 달라' 모두 자살을  할려고 해도 자살을 할 수도 없고 할 만침 그렇게 기절을 할 만침 어려운데 이  사람은 기쁘고 즐거워서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면서 반가이 아무 두려움  없이 평강 가운데서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 그것이 깨어 있는 증거입니다. 깨어  있는 증거요.

 또 깨어 있은 증거는 또 하나는 뭐인고 하니 자기의 모든 이 시간 일한 것 저  시간 일한 것, 이 자리에서 생활한 것 저 자리에서 생활한 것, 여기에 서 말한  것 저기에서 말한 것, 모든 언행 심사를 한 그것이 어디서 언행 심사를 했든지,  자기가 혼자 있으면서 자기의 마음을 움직인 거나 자기 입으로 움직인 것이나 또  여럿이 있을 때 그런 것이나 이 자리에서나 저 자리에서나 모든 그 전부가 다  복음 운동이 되고 다른 사람을 살찌워 주고 다른 사람을 배불려 주고 다른  사람을 다 힘 있게 갈급과 시장을 면해 준 일이 된 그것이 뭐이냐? 깨어 있는  증거입니다.

 때를 따라 양식 나눠 준다는 그것은 이 자리에서나 저 자리에서나, 딱 줄  그때라 말은 언제가 줄 때인가? 자기가 그이와 관계를 가지는 것, 어떤 사람은  몇 십 년 나뉘어 가지고 있다가. 몇 십 년 나뉘어 가지고 있다가 잠깐 한번  만나는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때가 양식을 먹여 줄  때입니다. 또 자기가 그 사람과 더불어 도무지 소식이 없었었는데, 소식이  없는데 자기 소식이 그이에게 들려 갔습니다. 어째 전언해서 전언해서 들려  갔는데, 들려 감으로써 그 사람이 내 소식을 들을 때에 그 때가 뭐이냐 하면  내가 그이에게 양식을 먹여 줄 때요 그때가 내가 그 형제를 때릴 수 있는  때입니다. 그 시기입니다. 내 소식을 듣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그만 '아, 나는,  그 사람은 그래도 신앙생활을 그래 하고 있구나. 나는 이거 참 허송세월 했구나'  하면서 그 사람이 마음을 깨어 가지고서 일어선다고 하면은 그 소식이 가서 그  사람을 양식 먹여 준 것입니다. 소식이 되어 양식이 먹여 줬고, 편지가 가서  양식을 먹여 주고. 한번 만나는 데 그 사람에게 양식을 먹여 주고, 또 조석으로  만나는 사람은 늘 만나 가지고서 같이 생활하고 행동하는데에 한 행동 행동에서  그에게 양식을 먹여 줬고 하는 그것이 양식 먹여 준 것입니다. 깨어 있으면 그  형제에게 때를 따라서 양식 먹여 주는 그 일이 이루어지나니 그것이 뭐이냐?  깨어 있는 증거다. 깨어 있는 증거다.

 또 깨어 있는 것의 정반대, 깨어 있는 것의 정반대는 반대로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반대는 뭐이냐? 반대는 그 사람이 내 소식을 들을 때에 그 사람의  믿음이 흐려지고, 또 내 만날 때에 그 사람의 그만 신앙이 흐려지고, 만나  보니까 믿음이 소생되지 아니하고 만나 보고 난 다음에는 그만 그 사람에게  대해서 실망을 가지고서 자기가 아무런 믿음에 힘을 얻지 못 하게 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때리는 것이라 그말이오. 자기가 만나든지, 자기 하는 행동을 그가  보든지, 자기의 말을 듣든지, 자기가 무슨 관계를 가지든지, 자기 편지를  듣든지, 자기 소식을 전인 전인해서 듣든지 해서 그 사람이 믿음이 소생하지  아니 하고 구원에 더 새로와지지를 안하고 구원이 쇠잔해지든지 또 그 사람의  하늘에 대한 갈급이나 하나님에게 대한 갈급이 쇠잔해지는 그게 뭐이냐? 그게  때리는 것이라 그말이오. 때리는 것. 그라면 때리는 것이 벌써 자는 증거입니다.

때리는 것이 자는 증거요.

 또 자는 증거는 뭐이냐 하면 그 사람이 벌써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신다.

주객이 뭐이 주객이냐 하면은, 어떤 게 주객이냐? 여기 주객이라는 것은 세상  음행의 포도주 그런 걸 두고서 말하는 것인데 음행의 포도주는 세상하고 짝이  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그런 모든 교훈, 그런 지식, 그런 배움 그런 것을  가리켜서 음행의 포도주라 그렇게 말했소.

 그러면 여기 주객으로 더불어 친했다 그 말은 뭐이냐 하면은 세상주의자들.

세상주의자 육신주의자, 그러면, 그거는 뭐 유물주의자가 되겠고 세상주의자.

세상 명예. 영광, 존귀, 부귀, 또 세상의 모든 취미 이런 저런 모두 세상 구비  그런 세상을 위주로 해서 사는 그 사람에게 물들어 가는 것이. 그 사람의 사람을  따라서 그 사람이 세상에 지금 갈급해서 사는 거와같이 자기도 세상에 갈급하게  됐고 또 그 사람이 세상을 담뿍 취해서 그만 세상에 가득 채여 서 세상의 오만  좋은 것 다 누리고 거기 폭 빠져 가지고, 세상에 빠져 가지고서 예수 믿는  것이나 뭐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이나 그런데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 없는  그런 것이 주객인데. 그런 이로 더불어 사귀어서 자기에게 차차 차차 세상에  대한 모든 미비, '세상에 대해서 이것이 미비하다.' 그러니까, 자기가 주님 만날  때에 거기에 대해서 미비한 게 아니고 이제 세상에서 살 일 거기에 대해서  미비한 점이 자꾸 생겨집니다.

 아. 세상에 대해 내가 이거 무슨 요 상식을 내가 가지지 못했다 요것을  예비하지 못 했다, 요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 요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명예를  가지지 못했다, 요 활동을 가지지 못했다, 요 구비한 모든 소유를 가지지 못했다  요 과학적인 모든 혜택을 내가 가지지를 못했다 오만 것 거기에 대해서 차차  차차 그 사람이 물이 들어 가지고 그 생각이 자꾸 짙어져 갑니다. 세상에 속한  소망과 욕망과 갈급과 상식과 주의와 그런 것이 차차 눈에 많이 보이고 귀에  많이 들리고 생각에 많이 떠오르고 해서 그런 것이 짙어집니다. 세상 것으로  짙어지는 그것이 주객으로 먹고 마시는 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에 '깨어 있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보면 거기에서 자는 자는  밤에 잔다, 취하는 자도 밤에 취한다. 너희들은 낮에 속했기 때문에, 낮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자지 않는 것이 그것이 정상이지 낮에 누워 자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낮에 취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깨어 있는 자, 자는 자, 자는 자는 때리는 자가 지금, 동무를 때리는  자가 자는 자요, 자는 자는 또 술친구로 더불어 지금 술을 먹고서 술이 점점 더  취해져가는 그것이 자는 자요. 세상주의로 차차 짙어져 가는 것이 그것이 자는  자요, 또 자기를 접하는 사람, 어떻게 접했든지, 뭐 소식이 날아갔든지 편지가  갔든지 만났든지 어쨌든지, 같이 한자리에 있든지 있는 그 사람에게 믿음의  손해를 보이는 그것이 자는 자라. 그게 때리는 사람이요 그게 자는 사람이라.

 또 자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자는 사람인고 하니 자기의 모든 시간이나  정력이나 자기의 생활이나 소유나 그런 것을 자꾸 없어질 것으로 이렇게  만들어서, 그것이 다 구속을 받아 가지고 속량을 받아서 없어지지 아니할 것을  만들지 안하고 그걸 하나씩 둘씩 자꾸 잊어버린다 말이오. 제딴에는 자꾸  은행에다 저금을 하고 창고에다가 단단히 재고 부동산을 사고 이렇게 알뜰받게  이렇게 했지마는서도 그것은 세상의 테두리 안에 있었지 세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말이오. 세상 테두리 안에만 있게 했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천국 곡간 안에는  들어가지를 못했다 말이오.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그것이 세상 안에 있는  그것이 뭐이냐? 도적맞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지고,  자기가 아주 젊은 소년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남은 생명을 그것을 도적맞는  것은 어떻게 도적맞는 거냐 하면은 그것을 세상에 두고 현실 현실에서 그것을  하늘나라로 옮기지 못했으면 건강도 옮기지 못했으면, 젊음을 옮기지 못했으면,  힘을 옮기지 못했으면, 시간을 옮기지 못했으면. 자기의 모든 지능을 옮기지  못했으면, 자기의 소유를 옮기지 못했으면, 하늘나라로 옮기지 못했으면 그거는  다 도적맞는 거라 그말이오.

 그러면, 자는 자는 그 결과가 어째 되느냐? 도적맞는 거. 또 하나는 뭐 입니까?  하나는? 형제를, 형제를 때리는 거, 하나는? 주객으로 더불어 술이 자꾸 취해져  가는 것 요것이 자는 증거요.

 또 깨어 있는 증거는 뭐입니까? 깨어 있는 증거도. 자, 셋. 하나는 뭐 입니까?  깨어 있는 증거 하나는 주님이 아무 때 오셔도, 주님이 오신다는 어떤 변동이나,  6.25도 오니까 정신 못 차려요. 6.25도 오니까 정신 못 차리는데, 우런 참 이거  얼마나 연약한지 모릅니다. 그만 사람만 몇 사람이 와도 그만 달라져 버립니다.

사람만 몇 사람이 와도 변해져 버리고 무슨 사건만 일어나도 변해지니 이렇게 잘  변해지는 것이 이 우주가 막 큰 진동해서 큰 변동이 있을 터인데 그때에 내가  변해지지 안하고 주님이 오시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그렇게 깨끗이  준비하고 있었느냐? 그러면, 그때에, 변동될 때에 두렵지 안할 수는 없습니다.

두렵다 할지라도 자기가 주님 만날 준비가 잘 돼졌으면 그게 두려워서 어려움이  올수록이 사랑하는 주님이 오시니까 어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이제 붙들어야  돼지겠으니까 기다리고 즐거워지지마는서도 정리가 안 되면 그게 안 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아예 우리가 거리끼고 얽매이는 그런 거 다 정리가 돼 가지고 있어야,  이렇게 우주가 큰 변동으로서 모든 사람이 다 기절하여지는 이런 일이 있을  예수님의 재림이 올 때에 그때에 재림의 주가 반가워지고 기뻐지고 맞이할 수  있어야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된다 말이오.

 깨어 있는 거는 지금 깨어 있는 거는 뭐이냐? 주님 만날 준비를 해서 지금 와도  염려 없을 수 있는 그런 준비가 자꾸 갖추어져서. 그 준비가 자꾸 갖추어져서  점점 주님이 기다려지고 또 주님이 어떻게 오시나 어떤 변동이 있어도 주님이  오신다는 그런 것만 있으면, 무슨 툭 그래도 '아, 주님이 오실란가?' 기쁘고, 또  안 오시면 '아이구, 안 오셨네. 언제 오실란가?' 이렇게 모든 변동을 인해서  주님 오실 걸 인하여 변동되는 것이 기쁘고 즐겁지 그것이 두려워서 어쩔꼬 하는  그런 것이 없는 것이 그것이 첫째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또 깨어 있는 거 하나는 뭐입니까? 하나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도적맞지 않는  것이 캐어 있는 것입니다. 도적맞지 않는 것 도적은 어데 누가 어디로 가지고  갑니까? 도적은 이 세상에 두는 것이 다 도적맞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두는  것이 도적맞은 것이요 세상 위주로 한 것이 도적맞은 거라. 어데 딴 데 뭐 가는  게 아니라. 제 딴에는 '아, 오늘은 내 지위를 든든케 했다. 내 직장을 든든케  했다. 무얼 어떻게 했다.' '네 준비한 것이 전부 땅에 있느냐 하늘에 있느냐?'  땅에 있으면 그게 다 도적맞은 거라 그말이오. 땅에 있어도 한 자리에서 두  연인이 매를 갈며 밭에 일하고 한자리에 누워 자되 하나는 데려 간다 그 말은  땅위에 이런 일을 하되 그 일 하는 것이 전부 주님 맞이할 일, 주님을 위하는  일, 주님을 섬길 일, 그러면, 우리가 밥을 먹어야 주님을 섬기지 굶고는, '네가  십 년을 살아라.' 십 년 살며 주님을 섬기라 했는데 밥을 굶고는 십 년을 살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밥먹는 그것이 주를 위해서 밥을 먹을 수 있고, 직장 가는  것도 주를 위해서 할 수 있고, 뭐 주를 위해서도 할 수 있고 그것이 이 세상이에  있는 옛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가 있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도적맞지않는, 도적맞는 그거는 세상에 두는 게 그만 도적맞는 것입니다.

세상에만 있는 것이 도적맞는 거라. 이러니까, 구속을 입히지 못하는 게  도적맞는 거라. 속량하지 못하는 것. 속량을 해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속량이  돼야 그것이 영생이지 속량되지 안한 거는 다 소용없는 거라 그말이오. 도적맞지  않는 거.

 또 하나는 뭐입니까? 마지막에 하나. 예? 아, 양식 나눠 주는 것 하나 양식  나눠 주는 것. 그러면, 요라면, 몇몇이? 삼 삼. 자는 것도 세 가지 여기에 말해  놨고, 또 깨어 있는 것도 요 세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자,는 거  깨는 거 이것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깨는 것은 어떤 것이 깨는 것인데? 깨는 것은 '성령과 물과 피니라'  이래 증거를 말했는데, 요 세 가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써 사죄를 입었으니 나는 사죄 입은 자라, 사죄  입은 자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내가 사죄를 입었으니 사죄 입은 자로 살라  하고. 사죄를 입은 자로 살라 하니까 사죄를 벗어라고 사죄를 벗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사죄를 벗어 주 지 안하고 또 사죄를 입을라 하니까  또 힘이 듭니다. 사죄를 입기도 힘 들고 안 벗기도 힘드는데. 사죄를 입고 있는  데는. 사죄를 입는 데에는 그냥 입는 게 아니라. 사죄를 입는 데는 저 혼자 입는  게 아니고 입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사죄 입는 데에는 반드시  투쟁이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지금 사죄를 빼앗기지 안하고 사죄를 입기  위해서 사죄로 인한 투쟁을 하는 고 투쟁이 있는 고것이 깨어 있는 것이고  또, 칭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의도 하나님에게 이제는 나는 환경과 주변의 그  현실에 피동될라고 자꾸 현실에 피동되는 이 습성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  피동되는 이 사람이 돼야 되는데 현실에 피동이 안 될라고, 현실에 피동이 안  될라고 이렇게 자꾸 이래 싸우고, '아, 현실의 피동에 이놈에게 또 졌다.' 또  일어나고, 현실에 피동되지 안하고 주님에게 피동될라고 요렇게 하는 것이  의롭게 살라고 하는 것이요, 고렇게 세상에 피동되라고 할 때에 피동되지  안하려고 피동되지 못하도록 하고 할 때, 피동되지 못하도록 할 때에 피동되지  못하도록 하는 그것으로 더불어 싸워서 자기는 피동으로 살라고 하는 요 싸움  있는 요 투쟁, 요 전투 있는 고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요 전투가 있어.

그것도 꼭 같애. 내가 주님에게 피동되는 이것을 못 하도록 이 의를 벗어라고,  자꾸 깨닫기 쉽도록, 이 의를 벗어라고, 이 의를 나는 안 벗고 이 의를 입고  있을라고, 벗어라고 입고 있을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투쟁이 있다  말이오. 고 투쟁을 가지는 그것이 지금 깨어 있어. 그 투쟁이 없으면 벌써 자고  있어. 투쟁이 없으면 벌써, 자고 있다 말은 사람이 바꿔지고 있다 말이오.

옛사람으로 바꿔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죄의 투쟁. 또 의에 대한 투쟁, 하나님을 자기가 모셔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주님이 자기 속에 움직여서 주님으로 인하여 말하게 되고 주님으로  인하여 행동하게 되는 주님을 자기 속에 모시고 주님으로 인하여서 움직이는  그것이 화친의 생명인데, 주님이 자기 안에 주가 되면 생명을 얻고 그 주님에게  복종하면 영생이 됩니다. 자기 안에 주님을 모시면 생명이 되고 그 모신  주님에게 피동되면 그것은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주님을 자기가  모실라고 하니까 딴 것이 들어와서 자꾸 자기 마음을 차지하려고 자기를  점령하려고 애쓰는데 점령을 당하지 안하고 주님을 모실라고 하니까 거기에도  투쟁이 있어야 되고 또 주님에게 복종하는 영생을 얻을라 하니까 그것도 또  투쟁이 있어야 된다 말이오. 이 세 가지 투쟁, 이 세 가지 투쟁이 자기에게  있어야 하고.

 또 이 세 가지 투쟁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와서 협조해 주는 그 협조자가 있는데  성령의 감화입니다. 또 성령의 감화를 자기가 줄 때에 성령의 감화를 입으면 그  감화가 전능한 감화이기 때문에 되어지는데 성령의 감화를 자기가 소멸하지  않을라 하니까 여기도 또 원수로 더불어서 전투해야 되겠다 말이오.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지 안할라 하니까 이거 또 전투해야 되지.

 또 진리를 자기가 인정할라 하니까 또 전투해야 되지, 이 진리의 법칙대로  자기가 살라고 하니까 또 전투해야 되지, 이거 막 전 싸움이라. 전 싸움. 이 세  가지에 대한 자기의 대속에 대해서 대속으로 인해서 나에게 큰 선물로 주신  영감에 대해서, 또 진리에 대해서 이 세 가지에 대한 이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이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 전투가 계속되지  안하면 되지 안해.

 그러면, 이 전투가 계속되지 안할 때에는 어떻게 해서 이 전투가 계속되지  않는가? 그것은 이 세상, 원수, 주객으로 더불어 왔던 것. 주객이 세상주의의  지식이나, 지식이나 사상이나 그런 모든 주장이나 그런 것들이 내 눈으로  들어오고 내 귀로 들어오고 자꾸 이것들이 들어옵니다. 세상이 들어오고, 또  세상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이 세상주의로 자꾸 산다 말이오.

세상주의로 살아서 세상주의로 이렇게 점점 살게 되지, 이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자꾸 이 깨어 있는 거 이 세 가지 전투, 세 가지 전투는 차차 차차  희미해지고 이 세상에 대한 전투로 이 전투가 바꿔져. 이 세 가지 전투가 주님의  대속에 대한 전투, 영감에 대한 전투, 진리에 대한 전투 이 세 가지 전투가  이것이 자꾸 바꿔져. 이 전투는 차차 차차 식 어지고 이 세상 욕망 세상 욕망,  또 세상을 욕망함으로써 세상을 위한 노력, 세상을 위한 노력. 또 세상을 위한  노력을 이래 함으로써 점점 자기. 이 세 가지가 자꾸 돋아 오른다. 그 말이오.

 그러면 주님으로 나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대속 받은 것이기 때문에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함인데 자꾸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차차 차차 움이 돋아  올라오고, 또 이 세상 이 모든 주의 그것이 자기 귀로 눈으로 자꾸 들려오고  들어오고, 또 자기의 행동은 그만 세상을 위해서 행동하는 그것이 차차 차차 더  심해집니다. 이러니까, 요것이 들어서 차차 차차 잠드는 것인데,

 오늘 아침에 내가 증거할라 하는 거는 그겁니다. 그러면, 각자들이 '나는  어떻게 하면 깨어지는가?' 자기가 '어떻게 하니까 잠이 깨지더라.' 물론 낯을  씻으니까 잠이 깨지더라. 나가서 무슨 운동을 하니까 잠이 깨지더라 하는 그  육신의 잠도, 아이들 공부할 때 아이 잠 깨는 것은 얼음을 머리에 대니까 잠이  깨어진다, 한번 찬바람을 획 도니까 잠이 깨어진다, 한번 무슨 운동을 하니까  잠이 깨어진다, 무엇을 음식을 뭘 먹으니 잠이 깨어진다. 어짜든지 공부하는  학생이라 하면은 나는 이 잠 올 때 잠 깨는 방법이 뭐이냐? 잠깨는 방법은  아이들마다 다 각각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잠이 깨어지는 그 방편이  각각 있을 거라 말이오. 제가 어떻게 하면 깨는가? 깨어지는가? 깨어지는 그  방편이 있으니까 그걸 연구해 가지고서 깨어지는 방편을 우리가 써야 되겠고,  또 '아, 저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잠이 드나? 저 사람은 잠드는 게 뭘로  잠드는가?' '저 사람은 누구만 만나면 잠잔다.' 사람 만나서 제가 잠이 드는지,  또 독서, 이 서적 이놈을 봄으로 잠이 드는지, 어떤 데 구경을 하러 가니까 잠이  드는지? 어떤 사람은 만나니까 내가 잠이 드나 내가 어떤 서적을 읽으니까 잠이  드나, 어떤 데 놀러 가니까 잠이 드나, 내가 물건 중에 무슨 물건을 이와 같이  만지고 접촉하니까 고만 잠이 들었나. 그러면. 내가 일도 무슨 일로 잠이  들었나? 자기가 어디서 잠드는가 그것을 연구 하라 그말이오. 자기가 잠드는  그것을 연구해서 자기를 잠들게 하는 그것을 적으로 삼아서 그걸 없애 버리고  자기가 깰 수 있는 그걸 연구해 가지고서 깨는 방법을 취해야 되지 이것 취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잠드는 줄 모르게 잠들어서 삼십 년도 사십 년도  오십 년도 육십 년도 하루같이 지나가 버립니다.

 잠든 사람이 시간을, 이렇게 지루한 시간을 견딜라 하니까 '하이구. 하 먼 한  시간이나 지나갔는가' 하고서 시계 보니까 찍해야 십 분밖에 안지나 갔어. 또 그  사람이 이제 '일어 나거라' 이라니까 가만. 조그매만 더 누웠다가 일어난다고.

'일어 나거라. 얘야. 시간 됐다' 이라니까, 내가 눕자 자꾸 깨운다고서. 인제  지금 내가 찍해야 인제 눈 붙었는데, 인자 잠들었는데 깨운다고서 부애를 내고  짜증을 내. '잠든 게 아니라 여섯 시간이나 잤다. 여섯 시간이나 잤는데 뭐  잠들기는 뭐 잠이 인제 들어? 여섯 시간이나 네가 잠이 들었는데.' 잠든 시간은  피곤이 풀려지기까지는 잠든 시간을 그것을 모릅니다. 그만 아무리 시간이  길어도 어느녘에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지금 ○○신학교에 있는 교수 어떤 분 내가 한 분 아는데, 내가 그분에게 직접  듣지는 안했지마는서도 간접으로 들었습니다. 그분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이러다가 그만 잘 때는 사흘을 자야 된대요, 사흘을 그만 사흘을 자야 돼. 그만  그때는 밥도 먹지도 안하고 어째 깨지도 안하고 그만 계속 사흘을 자. 사흘이면  칠십 두 시간입니까? 칠십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나. 그라면. 이 모든 머리에 모든  피로된 게, 확 회복이 된답니다. 잠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두러 누우면 그만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시간 가는 가는 걸 모르게 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되게 갈급한 사람 그만 이런 사람은 거기에 피로가 딱 되어 가지고서 뭐 예수  믿는 그날부터 죽는 날까지 누워 자도 잠이 안 깨. 잘 때, 죽을 때 그때사  '아이구, 내가 헛일했구나' 이래 말하지 그 안에 잠이 안 깬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 우리가 원수를 잡읍시다. 깨는 것도 우리가 알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자고 있는  가를 아는 것, 그 결과를, 이 결과가 맺으면 자고 있는 증거다, 이 결과가  맺으면 깨어 있는 증거다. 이러니까, 깨어 있는 것은 이 세 가지에 대한 전투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 가지에 대해서 전투해서 내가 이 세 가지를  빼앗기지 안할라 하니까 싸움이 있고, 간직할라 하니까 싸움이 있고, 이 세  가지를 내가, 세 가지로 행둥하고 살라 하니까 싸움이 있는 요 싸움이 계속해서,  벌써 자기에게 이 싸움이 없으면 그 사람은 벌써 잠이 깊이 든 사람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자는 그 결과를 봐서, 열매를 봐서 나무를 아는데 자는 것은  그 결과를 봐서, 네가 자는가 안 자는가 깊이 들면 모르니까, 네가 '자는지 안  자는지' 하는 것은 그 결과를 봐서, 네 결과가 무슨 결과가 되어 가지고 있느냐?  깨어 있는 것도 결과를 봐서 알 수가 있고 이런데, 그러면, 깨어 있는 것은 이  세 가지로 깨어 있는 것이니까, 깨어 있는 때는 이 전투가 계속 있을 때 그때가  깨어 있지 전투가 중단될 때에는 자고 있는 것이니까. 오늘 아침에 우리가 지금  찾을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자는 거는 분명하고, 자는 거는 분명하고, 깼다 잤다  깼다 잤다 자꾸 이렇게, 이렇게 번갈아서 이렇게 하고 있으니,  그러면 하루 동안 산 시간에 깨어서 산 시간이 많은가 자면서 지낸 시간이  많은가 그것을 계산도 안 해 보는 사람 있다 그말이오. 그 계산도 안 해 보고  그만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계산 안 해. 어떤 사람은 죽을때사 그때사 후회하지  그때까지 계산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계산을 하라고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도 없다 그말이오. 그런 데도 없어. 요번에 교황이 왔으니까 그 교황이  와서, 교황을 위대하고 모두, 아마 이 개혁교 사람들도 바오로 2세의 교황이  오니까 '위대한 이 왔다 그 인물은 화평의 사도라, 평화의 사도라, 평화의  사도라.' 아주 유명하고 좋습니다. 이러니까, 평화의 사도라는 그 속에 가장  이기주의, 가장 속에 강한 장성한 악이 거기에 있습니다. 뭐이냐 하면은  이러니까, 모두 나환자들, 모두 어데 구제할 데 그런 데만 떡 찾아다니니까 '아,  그 사람은 성자다. 거기에 아무데 가서 또 찾아가서 환자들을 방문하고 어떻게  했다. 또 그분은 한국 땅에 와 가지고서 땅에다 입을 맞췄다.' 대단히 지식은  높은 사람이오. 지식은 높아서 아주 그렇게 하지마는, 큰 범위로 말하지마는  그래 또 사망 테두리 속에서 나오지를 못 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그 분이 와 가지고서 '아, 한국 교회가  자고 있다. 깨라.' 깨라는 말은 한 마디도 없으니 자고 있는 걸 몰라. 이래  가지고, 어짜든지 평화의 사도니까 어짜든지 구제와 자선에만 주력하자,  그러니까, 불교는 대자대비인데 천주교는 대자 대비의 새끼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런데. 합동 번역 하자고 이걸 말하는데 대해서 아무도 말이 없고, 그자가 무슨  개혁교냐 말이오! 무슨 정통의 신학자냐 말이오! '아, 저라는 사람은 다  유치해서, 너무 그분들은 다 소인이요 범위가 좁아서, 범위가 좁아서' 그라면,  칼빈은 소인이고 루터는 소인이로구만. 예수님은 소인이로구먼. 사도들은 다  소인이로 구먼. 어리석지 말아야 됩니다.

 다 잠이 들어서. 잠이 들다니? 세상주의. 세상주의의 사상. 세상 준비, 세상  사상, 세상 준비, 이러나 저러나 어떻게든지 자기, 자기 자기, 예수 믿는  사람들도 요래야 주님께 영광이 되겠나, 요래야 내 유익이 되겠느냐? 전부 자기  사다리 만들고 있습니다. 요라면 내가 한층 올라가겠나, 요것 만들면 내가 한 층  올라가서 아무것이 위에 올라가겠다, 요라면 올라가겠다, 전부 사다리 만드는  지금 세상입니다. 뭐 사다리 공장이 어떻게 많은지! 전부가 이러나, 저러나,  무슨 회, 무슨 회, 무슨 회장 뭐 뭐 뭐 뭐이라는데 그거 전부 사다리 만드는  운동이고, 또 아무 쓸 데 없는, 필요 없어. 머리만 아프게 되는 소용없는 땅에  있는 말만 기록한 그 책이 어떻게 많이 나오는지! 이러니까, 예를 들면 진주가  요만한데 흙이 여러 수억만 짐이 속에 있으니까 그 억만 짐을 속에다 찾아야  요걸 찾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니까, 도서실에 많이 나오는 책이 사람들을  어지럽게 해 가지고서 참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돕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거요.

 이러니까, 이제 자는 자는 자는 자를 모릅니다. 자는 자는 자는 자를 모르요.

자는 자는 어떻게 잠드는지 몰라. 나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게 대해 자고  있으니까 자꾸, 자다가 잠이 잘 드니까 나에게 알려 주시요. 그 거 아는 거  있어. 나는. 나는 식곤중이 있는지 식사만 하면은 말이지, 식사하면은  식사하면서 잡니다. 식사를 하면 이래 식사 다 마치도 안하고 뮐 뭘 이래 씹어서  먹으면서 그만 잠이 들어서 이라고 있어. 그러니까. 그게 원수인 줄 알아야  돼요, '나는 음식을 먹으면 잠이 온다.' 옆에 사람이 말하기를 '어짜든지 퍼뜩  식사하시고서 이래 좀 빙 돌아다니이소. 빙 돌아다니이소' 이라는데. 그때는  어떻게 피곤한지 돌아다닐라 하면 돌아다닐라 하면은 '아. 내가 좀 누웠어도  잠만 안들면 되니까' 내가 누워서도 잠 안 든다고. 누워서 잠 안 든다고 내가  그러면 또 역부러 해 봅니다. '요번에는 누워 가지고 내가 잠이 안 들지'  요라고서 잠 안 들라고 단단히 결심해 가지고서 이래 누웠습니다. 누웠는데.

어째 잠이 들었는지 그만 잠이 들어 버렸어. 그래 가지고서 잠이 들어서 한 십  분이나 이십 분이나 똑 누워 자고 일어나야 이제 잠이 깨지 안깨진다 말이오.

그게 뭐이냐? 참 잠드는 것을 잠드는 줄 모르면은 그만, 잠드는 것이 어떻게  기묘하게 잠이 드는지 잠드는 걸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우리의 이 신앙의 잠이 어떻게 드는가? 나는 신앙의 잠이 어떻게  든다, 이래서 잠이 안 들라 할 때에는 그만 옆에서 자꾸 말하든지 이라면 '아,  내가 이번에는 내가 식사할 때에 잠이 안 들어야 되겠다' 이라고서 얼른 식사를  맛있는 것 그만 먹을 것 먹고 그만. 자는 것보다 나으니까 얼른 이래 대략 먹어  버리고 난 다음에는 고만 퍼뜩 일어납니다. 그만 벌떡 일어나면 이겼어. 벌떡  일어나 가지고 이래 좀 빙빙 빙빙 돌아다니면서, 돌아다니면, 그냥 이래  돌아다니면 또 잠이 와요. 인제 돌아다니면서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그래서  그것 볼라고 나무도 심어 놨고, 이제 그것 봅니다. 그것도 이래 보면서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이라다 보면 한 삼십 분 동안이라 하는 동안은 그만 시간이  어찌 갔는지 모르고, 그만 돌아다니다. 보면 삼십 분이 지나가고, '아따, 언제  이래 시간이 됐나?' 삼 십 분이 지나갔어. 그라면 벌써 식곤증인가 뭐인가  그것이 시기가 지나갔기 때문에 잠이 안 들어. 잠이 깨어져. 그라고 나면 인제  뭘 좀할 수도 있다 그거요.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 내가 육신의 잠드는 데서  발견했고, 또 믿음의 잠드는 데 내가 발견해서 여러분들도 다 그런 사람이  아닌가 해서 지금 말합니다.

 이러니까,-어쨌든지 신앙의 잠이 어떻게 드나? 잠이 어떻게 드나? 내가 신앙의  잠이 드는, 잠이 들게 하는 그게 원수이기 때문에 그놈을 없애야 되겠습니다.

고걸 없애야 돼. 나는 신앙의 잠이 어떻게 드나? 사람마다 잠드는 것이 달라요.

잠드는 그 사람이 그 잠드는 방법이 다르다 그말이오. 달라. 어떤 사람은 '아,  나는 잠이 안 오는데 성경만 보면 나는 잠이 온다.' 또 어떤 사람은 '아, 나는  음식을 먹으면 잠이 온다. 나는 기대면 잠 온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 하면  이야기 들으면 잠 온다.' 뭐 모두 잠드는 방법이 각각 달라요.

 다르니까, 우리의 믿음이, 믿음의 잠이 어디로 들어오는가 요것을 자기가  연구해 가지고서 그놈을 방어하고 내가 깨어 있을라고 애를 쓰면서 다시 말하면  내가 죄로 더불어 싸우는 이 사죄에 대한 투쟁이 어디서 뺏겨졌나 어디서  없어졌나. 의에 대한 투쟁이 어디서 없어졌나 주님으로 인하여 사는 요 투쟁이  어디서 없어졌나 요것을 우리가. 그 투쟁이 없어진 그것이 내가 자는 것이요, 또  내가 고만 이 투쟁은. 깰 때는 내가 뮐로, 어려움으로 깨나 돌아다니니까  깨지더냐 그 방편도 연구해 가지고서, 내가 누구를 만나, 누구. 어떤 사람을  만나니까 깨어지더냐, 설교를 들으니까 깨어지더냐 내가 산에 가니까  깨어지더냐, 밥을 굶으니까 깨어지더냐 성경을 읽으니까 깨어지더냐, 어떻게  하니까 내 믿음의 잠이 깨더냐? 깨더냐? 어찌 하니까 어떻게 누구를 만나니  주님의 대속의 공로도, 대속의 공로도 자기가 새로 와지고 거기에 대해서 후회가  되고, 살지 못한 게 후회가 되고 그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겨나고.

만나고 나니까 나는 전부 영감을 소멸했구나, 나는 또 여기에 이 진리도  위반했고 저 진리도 위반했구나' 하는 그것이 누구를 맙나니까, 어디를 가니까,  내가 뮐 접하니까, 어떤 일을 만나니까, 무엇으로써 내가 깨게 되었는가, 자기를  깨게 하는 그것을 자기가 연구해서 찾아,  자기를 잠들게 하는 그것을 연구해서 찾아서 그것을 정리해서 거기에 서부터  준비를 해야 되지 자는 줄 모르고 잠 자면은 자고 난 다음에는 뭐 그거는  몰라요. 자는 사람이 옆에서 죽인다 해도 뭐 압니까? 이것 모양으로 그만 이  세상으로 잠들어 잠은 뮐로 드는가? 잠은 세상으로 잠을 들어요. 세상, 세상  주의에, 사상에 잠들고. 또 세상 것 준비하는 그 세상 준비로 잠들고 또 잠드는  것 하나는 뭐이라 했소? 저 여반 한번 말해 봐요. 하나는 뭘로 잠들어? 크게 해  봐 친구로 잠들어? 또 뭘로 잠들어? 세상 주의로 잠들고, 세상 준비로 자고 세상  주의가 나오먼 세상 욕심이 나와요. 세상 욕심이 나오면 세상 준비하는 행동.

세상 위주의 행동해. 세상 위주의 그 사상과 행동으로 잠이 들어. 또 하나는  뭘로 잠이 들어? 남반에, 자기! 자기! 자기 자기 자기. 요래도 자기, 요라면  내가 올라가나 요 라면 내가 내려가나? 이야기해도 보면 벌써 자기란 놈이 속에  들어가지고 말한 그 사람을 말할 필요가 없어. 상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

그 걸 살리기 위해서 이야기 하다 보면 결국은 손해가지 유익이 하나도 없다. 그  사람은 자기 위주니까, '요래야 내가 유익할까?' 참자기가 아니고 옛사람 자기  말이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자기, 그 자기위주 자기중심이니까 그  사람과 말해 봤자 별게 없다 말이오. 그러니까, 옳은 거는 옳다 아닌 거는  아니라 하고 난 다음에 그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어. 말해도 안 되니까.

하나님께 기도나 하지.

 이러니까, 여러분들 누가 우리의 원수입니까? 원수, 우리 원수가 누구요? 자기,  또 원수 하나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 또 하나는 원수가 누구요? 또 하나는  뭐이요? 세상을 위한 모든 지식, 따라해요. 모든 지식! 모든 지식! 저 뒤에도  따라 해, 뭐 시시해요? 모든 지식! 음행의 포도주! 요거 알아야 돼요.

 이러니까, 자게 하는 것은 고 세 가지가 자게 하는데, 그 세 가지로 잔다  말이오. 세 가지로 자는데 그러면 잠드는 방편은 뭐이냐 하면은 뉘가 뉘를  만나니까 내가 이 세 가지가 되나? 또 누구를 만나니까 이 좋은 것 세 가지가  되나, 누구 만나니까 자는 것 세 가지 되느냐, 누구 만나니까 깨는 것 세 가지  되느냐 요것 모르면 자살하는 자입니다. 자살하는 자. 요것이 원수인 줄 알아야  돼요. 요게 원수지. 아, 아무 것이를 만났더니 마는서도- 얼마 안 가서 그만 그  사람 그만 자는 사람 돼 버렸습니다. 그만 자는 사람 돼 버렸어. 그만 자는 사람  돼 버렸다 말이오. 우리 ○목사를 누가 그렇게 잠을 폭 들여 놨는지? 만잠이  돼서 흔들어야 깰 줄도 몰라. 내가 뭘로써 자게 되는지 깨게 되는지, 나를 자게  하는 것 나를 깨게 하는 것 자게 하는 것을 원수인 줄 알아야 되고 나를 깨게  하는 것은, 나를 깨게 하는 것은 그가 내게 대한 선지자요, 그가 내게 대한  성령의 기관이요 진리의 기관인 것입니다. 고거 알아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 증거할라는 것은, 우리가 깨어 있었는데 어째서 잠이 드는가? 내가  잠이 들었나 깨어 있나 그것 살피고, 내가 어짜면 잠이 드는가 어짜면 깨는가  고것 각각 있다 말이오. 자기가 자기를 모르면 다른 사람은 자기를 알아요.

물어요, 다른 사람에게. '나는 어데 잠이 드는가?' 물어도 그것을 가르쳐 주면  그것이 노발대발할 것이기 때문에 못 가르쳐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제가 연구해서 알아야 돼요. 이래 공적으로나 가르치지,  공적으로나 가르치지 개인적으로야 '너는 이것으로 잠든다' 그래 놓으면 그  사람이 마구 원수라고 달라듭니다. 개에게 진주를 던지면 밟고 물고 달라드니까  안 돼. 대중으로 이래 말해서 배 들어가야 되지 직접으로 들어가면 그만 그 사람  죽인다, 그말이오. 어떻게 하면 잠이 드는지,  어떻게 하면 깨는지 다 알아요. 아무 것이는 아무 것이 저 사람으로 말미암아  잠든다, 아무 것이는 직장으로 말미암아 잠든다. 아무 것이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잠든다, 아무 것이는 사업으로 말미암아 잠든다, 아무 것이는 무슨 행락으로  말미암아 잠든다, 아무 것이는 취미로 말미암아 잠든다. 아무 것이는 무슨 가정  재미나 무슨 재미로 인해서 잠든다, 아무 것이는 애정으로 말미암아 잠든다 모두  다 졸게 하는 것이 각각 있다 그말이오 그 원수를 발견해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둥록된 수는 육천 백 삼십 명이 등록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가 이천  삼백 사십 팔 명, 또 중간반이 천 팔백 십 일 명, 중간반은 거의 다 들었네.

장년반이 천 구백 칠명, 장년반이 제일 못됐다. 장년반이 제일 못됐어. 장년반이  제일 적구먼. 중간반은 뭐 거의 다 됐는데, 장년반은 삼천여 명 모이는 교인에게  천 구백 칠십이 명 이천 명도 안 됐으니까 이거 제일 나쁘지 않소? 장년반이  맷정을 제일 써, 그러니까, 장년반을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기도할 체면이 없어.

'이 장년반 신앙 보십시오. 이러니까 공산주위를 막아 주십시오.' 그 기도는  암만 할라 해도 못 해. '장년반을 보면 당장에 매를 때려서, 이 목사들 보면  당장 매를 때려서 절단을 내야 되지마는서도 이 주일학교 학생들 보십시오.' 이  기도가 나와. 그저 '목사는 나 빼놓고' 하면 안 되고 나까지 다 합한 목사요.

나중에 이 목사들 매 되게 맞을 것입니다. 참 꼭 옛날 소련의 혁명 될 때 그때와  비슷합니다.

 이북이 왜 공산주의 됐는가? 이북이 아주 복음 운동이 아주 전성이라. 전성이라  하더마는서도 이북에 신사 참배 때에 이북에서 이긴 사람 몇 사람 없어. 다  졌지. 선천 고을에서는 신사 참배 이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대요. 전 칠홍 목사,  인제 생각난다. 전 칠홍 목사님이 우리 개척 교회 했는데, 전 칠홍 목사님의  동생 교회가 가지고 내가 집회할 때에. 그 전 칠홍 목사님이 선천 고을에서 온  목사님이야. 그 목사님에게 '그 고을에는 참 네 집이 안 믿는 집이 있답니다.'  '아닙니다. 그때 옛날 말입니다. 한 집도 없습니다. 다 믿습니다. 시장 같은  그런 거는 아예 주일날은 아무것도 살라 해야 못 삽니다.' '아, 그런데 신사  참배는 어째' '신사 참배는 이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래 그렇게 이북  신앙은 유물주의 신앙이라. 유물주의라. 여기 이북에서 월남한 성도들 많이  있어. 우리 교회는 이북 교인들 많습니다. 유물주의, 유물주의 회개해야 돼.

여기 또. 또 유물주의 돼. 여기서 월남한 사람들이 시장에 가면 경제권 다  거머쥐고, 돈도 많고, 그 사람들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안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안하고서 돈벌이 위주로만 그렇게 하고 있어요. 또 그런 것 보면 맷정 씁니다.

 이러니까, 어짜든지 뭐 다른 사람이 어찌 됐든지 그저 첫째는 자기가 준비해야.

다른 사람도 살리지 못 살립니다.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 깨어 있는 것 요 깨어  있는 것. 깨어 있는데, 깨어있는 거보다 나는 오늘 아침에 지금 말 하고자 하는  것은 나는 자꾸 잠이 잘 드는데, 인제 잠드는 게 나를 잠들게 하는 원수가  뭐인고 그걸 찾아 봐요. 잠들게 하는 원수를 찾자 그거요. 또 내가 뭘로 깨는가  잠 깨는 그걸 찾아 가지고서 잠들게 하는 원수는 피해 버리고 깨게 하는 그것만  자꾸 접촉하면 내가 깨어 있을 수 있을 것이라 그말이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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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 신앙지도/ 마태복음 24장 46절-47절/ 860815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27
782 신앙준비-죽음준비/ 신명기 28장 47절-53절/ 870628주전 선지자 2015.11.27
781 신앙의지를 꺽지 말라/ 요한계시록 3장 10절/ 840725수새 선지자 2015.11.27
780 신앙의 표시/ 요한복음 8장 31절-34절/ 880903토새 선지자 2015.11.27
» 신앙의 잠을 깨라/ 마태복음 24장 42절-51절/ 840623토새 선지자 2015.11.27
778 신앙의 어려움을 피하지 마라/ 사도행전 1장 4절-5절/ 860613금새 선지자 2015.11.27
777 신앙의 순서,구비요소/ 시편 1장 1절-3절/ 830426화새 선지자 2015.11.27
776 신앙의 뿌리, 둥치, 열매/ 시편 1장 1절-6절/ 840204토새 선지자 2015.11.27
775 신앙의 보배로운 요소 다섯가지/ 누가복음 5장 8절-11절/ 860630월새 선지자 2015.11.27
774 신앙의 목표/ 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831028금새 선지자 2015.11.27
773 신앙의 두길/ 창세기 13장 1절-16절/ 890210목새 선지자 2015.11.27
772 신앙의 두 길/ 창세기 13장 5절-15절/ 840805주후 선지자 2015.11.27
771 신앙의 기초작업/ 누가복음 21장 33절-36절/ 881203토새 선지자 2015.11.27
770 신앙의 3계단/ 창시기 3장 6절/ 880828주후 선지자 2015.11.27
769 신앙은 힘써야/ 베드로후서 1장 1절-9절/ 871120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27
768 신앙은 전진이다-겸손/ 베드로전서 5장 5절-11절/ 800928주후 선지자 2015.11.27
767 신앙은 전진이다/ 히브리서 10장 26절-39절/ 800928주전 선지자 2015.11.27
766 신앙은 독립적이다/ 누가복음 21장 34절-36절/ 850820화새 선지자 2015.11.27
765 신앙영감생활/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50614금야 선지자 2015.11.27
764 신앙양심으로 단속/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81016주전 선지자 2015.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