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에 일치 되도록

 

1984. 6. 5. 화새 

 

본문 : 마태복음 14장 26절∼33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제가 오늘 아침에 안 나올까 이러다가 연락이 있으면 좀 다른 이에게 고만 좀  증거를 하도록 하고 저는 안 나오고 증거 하도록 하는 게 좋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가졌다가 아무래도 이걸 가서 좀 고침을 받든지 그라면 뭘 위사를 하든지  해야 되겠다 해서 그래서 제가 나왔습니다.

 한 시에 제가 깨기는 깨 가지고 일어나서 마당에 나가서 방석을 깔고 거기에서  기도를 하면서 뭘 생각했는데 그 생각하는 그 생각이 심령이 어두워 그는지 확  뚫리지 안하고 자꾸 그렇게 뚫리지 안하고 자꾸 생각만 나서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퍼떡 생각나기를 '아, 이거 아침에는 한 시에 일어났으니까 그래도 한  서너 시간 있으니까 넉넉하게' 이랬는데 거기에 가서 뭘 생각하다 보니까 생각은  뚫리지 안하고 아마 시간이 좀 많이 간 것 같애서 뭐 졸아지거나 그런 거는  아니고 까랑까랑하기는 까랑까랑한데도 도무지 그 연구가 뚫리지 안해서  그라다가 그 시간이 안 됐나 하고서 이거 보니까 벌써 네 시 이십 분입니다. 네  시 이십 분이라서 그만 거기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이 되면 지금 하지 내가 언제  옷 입고 뭐, 난 그때 잠바를 입고 그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려나 했으나  그래도 뭐 이걸 갖다가 알려서 내가 지금 이게 자꾸 노령이 돼 가니까 이거 무슨  노망끼인지 그 은혜인지 내가 그걸 잘 분별을 못해서 이거 한번 말을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오늘 아침에 나왔습니다.

 나왔는데, 이 말씀도 아무것도 준비도 하지 못 했고 그저 한 시에 일어나서 좀  아마 기도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갔었는데 거기에 가서 무슨 좀  문제를 이래 생각을 하고서 이래 하느라고 고만 오늘 아침 무슨 말씀을 증거할까  그런 것도 연구도 못하고 본문도 가지지 못하고 그렇게 나왔습니다.

 내가 그렇게 밤새도록, 밤새도록이 아니지마는 한 서너 시간 생각한 것은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앙생활할 때에 말과 마음이 하나가 돼야 되는 데 말과  마음이 하나가 돼야 되겠는데 그걸,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나 하는 그것을 내가  생각을 했었고 또 행동과 마음이 하나가 돼야 되겠는데 그것을 또 어떻게 하면  그것이 돼지느냐 이렇게 다 말은 말대로 따로, 마음은 마음대로 따로 행동은  행동대로 따로 또 마음은 마음대로 따로 그래 이것이 다 일치가 된다 할지라도  또 지식과 하나가 돼야 되겠는데, 지식도 자기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이 있으니  자기 지식과 일치도 될 수가 있겠고. 그러면 자기 지식과 일치가 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불신자로서는 제일 그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 되겠고, 그러면  그렇게 자기 지식과 일치가 됐을 때에 그때에 그것이 다 한테 집합이 돼  가지고서 단일이 됐으니까 힘 있게 용감스럽게 활동하는 그것이 세상  사람으로서는 제일 지상에 권위 있는 사람이 되겠고 총명있는 사람이 되겠고 그  사람이, 옛사람으로 서는 가장 강한 사람이라. 그것이 참 악령의 큰 일군이  됐겠고, 또 그 부패성으로서 강한 사람이 됐겠고, 자기 모든 늘어놓은 그 생활이  다 전부 집합해 가지고서 똘똘 뭉쳐서 하나가 되기 때문에 아주 힘 있는 사람이  됐겠다, 그걸 생각을 했고,  거기에서 하나가 돼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가 아는 대로 하나님의 지식과 이는 틀림없이 하나라 그렇게 이제는 자기  말과 자기 마음과 자기 행동과 자기 마음과 자기에게 있는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 지식과 하나가 된 그때에 자기가 자신 있게 그때에 나타나는 자기, 그때의  자기가 그것이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참 자기요 그럴 때에 그 넷이 일치 돼  가지고 그 인간 지식과 이제 일치가 될 때에 그때에 옛사람으로 강하겠고, 또 그  넷이 하나가 돼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과 일치가 될 때에 비로소 거기에서 그때에  옛사람은 거기에서 고만 중간에서 녹아져서 벗어지게 됐고, 그때에 자기가 참  자기다. 그 자기가 나타나게 되겠고,

 이제 그라고 난 다음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소원하는 이 소원을  하는데 어떻게 소원해야 되느냐 그 소원하는 그 소원이 그 소원하는 소원이  자기의 생명의 중량보다 자기에게 가진 것 중에 보배는 생명인데 그 생명보다도  중량이 높은 중량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소원을 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뭘 하나님 앞에 소원한다는 그런 것은 다 그분을 모르는 것이고 함부로  입을 벌리는 범성죄가 되어지겠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도 자기 수하에 대해서는 동등에 대해서는 이렇지마는서도  자기가 탁월한 무슨 어떤, 지금은 뭐 대통령해도 정권을 잡아 봤자 사람들이  그렇게 존경성에서 숭배성을 겸한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옛 날은 왕이라면  존경성만 있는 게 아니고 숭배성이 거기에 있어서 마치 신이 아닌 줄 알면서도  신과 같은 그런 숭배성 절대성을 가지는 그때에 아주 숭배적인 그런 경외성을  가졌는데 그런 왕에게 자기가 무엇이든지 허툴이 그렇게 뭐 이것을 원하고  이것을 간청하고 이것 소원하고, 소원하는 것이나 뭐 소원을 그분에게 아뢸  때에는 그래도 그분에게 아뢸 때는 그때는 자기가 그 소원을 아뢰서 만일 그  소원이 아루어지지 안한다면 자기는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말했다가 그말이 안  되면 그저 뭐 이 평민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니고 자기가 일단  의견을 내고 소원을 간청했다가 그 소원이 안 되는 데에는 거기에 일어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그 왕에게 소원할 때도 자기가 그저 돼도 되고 안 돼도 되고  보통 예사로운 그런 소원을 할 수는 없다. 왕을 자기가 존경하는 것만치 왕을  경외하는 것만치 왕을 숭배하는 것만치 그에게 말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그에게  소원한다는 것이 그렇게 아무나따나 지저분하게 소원할 수는 없는 것이고, 뭐  생명까지는 몰라도 참 만일 그 소원했다가 안 되면 자기는 거기에서 그저  지위적으로나 시민적으로나 제일 큰 분에게 참 박살을 당하는 박멸을 당하는  그런 큰 희생이 돼도 이거는 소원해야 된다 하는 그런 소원하는 것에 소원의  중량이 자기의 무슨 소유에 그런 것의 중량 만침에는 중량이 무거워야 그 소원을  하지 그저 자기에게 있는 그런 사소한 그런 소원은 하지 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앞에 소원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소원인데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그런 그 소원은 이것은 이방인들이 소원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그런  걸 소원하지 말아라. 너희 천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될 것인 줄을 아시느니라'  하는 이 말씀에서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님이 대속하신 이  구원을 이루는 거기에 관련된 소원이 아니면 그런 소원은 하지 말아라 하는  것으로 그 한 마디로서 아주 단정을 지어 놓은 것으로 그렇게 우리가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소원 안 하느냐? 뭐 우리는 그저 더워도  시원하게도 해 달라고도 하고, 또 아프면 낫게도 해 달라고도 하고 뭐 이 아주  그런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 그런 아주 낮은 그런 것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든지 구합니다. 이래 구하나 그, 구하는 것이 그것이 그 하나님을 그저  상대해 가지고서 이렇게 우리가 구하기는 구하지마는서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함부로 입을 여는 것이 되지 않는가? 또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해라 의인의  간구는 운동하는 힘이 많으니라' 하는 그런 병 낫기를 위하는 기도하는 그런  것도 그저 낫으면 낫고 안 낫으면 안 낫고 이렇게 뭐 하나님이 들으시면 듣고 안  들으시면 안 듣고 하는 그렇게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하나님에게 대해서 우리가 범성죄를 짓는 일이 안 되는가?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어떻겠나? 아무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원하는 것은  우리의 제일 귀한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보다 중량이 높은 것을 우리가 구해야  되겠다. 그거는 그 가치가 생명보다 가치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 생명을 담보를  해서라도 이거는 하나님 앞에 생명을, 내가 그러면 이걸 구하고 구하는 그것을  구할 때에 그러면 생명이 끊어져도 구할 수 있나 생명이 끊겨져도 그러면 생명이  어떻게 돼도 이거는 하나님 앞에 간구해 가지고서 얻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명보다 중량이 무거운 그런 간구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지당한 간구가  아닌가, 무슨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 또 네게 구하라 주실 것이라 하는  고 모든 그런 것이 그렇게 아주 허무한 그런 것이 아니라 일반적의 것이라도  일반적의 것이라도 우리가 구할 것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요 그것의 중량은  없어질 자연 생명 그런 것 보다는 다 가치 있는 것들이니 그런 것보다 가치 있는  그런 것보다 중량 있는 그런 것인 것을 알고 하나님에게 구하여야 되지 않겠나  하는 그것을 제가 생각을 했었고,

 또, 그러면 구해 가지고 하나님에게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 하시는 대로 순종을  할 때에 그러면 우리 순종은 어떻게 되나 우리 순종은 아무래도 생명의 담보가  있는 그런 순종이라야 되지 않겠느냐 그것을 생각했었습니다. 생명의 담보가  있는 그런 순종. 그러면 그 순종하는 것이 네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그 모든  일 그 일이 안 이루어지면 자기 생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은 자기 생명이  끊어지느냐? 네가 지금 이걸 주장을 하는데 이 주장하는 것이 안 이루어지면 네  생명이 끊어진다, 그러면 생명이 끊어져도 그 순종할 수 있는, 마치 다시 말하면  생명이 끊어져도 주장을 할 수 있는, 생명이 끊쳐져도 그 생명이 끊쳐져서  끊쳐지는 생명으로 담보가 되는 생명의 이 담보가 되는 그런 그 믿음을 가지고서  구해야 되지 않느냐?  그러면, 엘리야가 바알 선지로 더불어 같이 그 나무를 밑에다 놓고 서로 분신  약속을 한 그 기도가 그것이 어떤 기도냐? 그것이 만일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듣지 안하면 자기는 거기에서 나무에 태워 죽임을 받을 것이고 죽임을 받을  것이고 그 바알 선지들의 기도를 그 신이 듣지 안하면 바알 선지들이 죽는  것이니까 생명을 담보한 그 기도가 아닌가? 생명을 담보하고서 그들이 한 일이  아닌가?  또, 베드로가 물 위에서 이렇게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걸어오게  하시옵소서.' 이렇게 말할 때 주님이 걸어오라 했으니 그가 배에서 그렇게  밤새껏 풍랑으로 놀래서 주님이 오시는 것도 유령이라 할 만치 그렇게  자기네들이 참 대단히 마음에 참 아주 공포에 있는 그 사람들로서 주님이  오라하실 때에 물 위에 의심 없이 물 위에 척 내려선 그 내려 설 수 있는 그것이  생명을 담보한 그런 순종이 아니겠느냐? 또 그것이 생명을 생명보다 중량이 높은  그 간구를 했던 것이 아니냐? 그 간구 속에는 생명보다 더 무거운 중량의 그  간구가 있지 안했느냐? 또 그가 순종할 때 에는 그 순종에는 그 생명의 담보가  되는 그 순종이 아닌가? 그러면 순종 하다가 퍽 내려서 가지고서 고만 물에  빠지면 죽어 버리는 건데 죽어 버리는데 죽는 그 일을 하는 걸 봐서 생명을  담보하는 그만한 그저 신앙이 아니었느냐? 그 생명을 생명보다 생명보다 가벼운  그런 신앙이 아니라 자기 생명보다 중량이 무거운 그런 순종이 아니었느냐 하는  그것이 보여지고 또 그렇게 순종을 했다 할지라도 그 순종한 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와 가지고 물 위로 걸어가는 그 결과가 나타났어야 되는 것이니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안했으면은 그는 다 소용없는 일 아니겠는가 이래서 그렇게  주님에게 물 위로 걸어오라 하옵소서 그런 말도 말도 할 수 있겠고 그런데 그  말하는 그 말에 물 위에 내려설 수 있는 그런 속에 알맹이가 있는 그런 말이야  되겠고, 또 그 물 위에 내려서는 그 순종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서 물  위로 걸어갈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권능이 뒷받침이 되는 그 실상이 이루어지는  그런 그 순종이라야 되지 않겠느냐? 이러면 이것을 볼 때에 다 그도 그러고,  또, 모세가 바로 앞에 가 가지고서 그 열 가지 재앙을 말할 때도 그때에  간구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기도에는 다 이런 그 요소들이 구비돼 가지고  있었다. '만일 너희들이. 그러면 내가 무슨 재앙을 내려가지고서 어떻게  하겠다.' 할 때에 만일 그렇게 했는데 재앙이 내리지 안했으면 그 모세는 죽는  것입니다. 어데라고 그걸 그 말한 대로 턱 돼 버리니까 모세의 생명이 유지됐지  그때에 말한 대로 이루어지지 안했으면 모세는 뭐 바로의 손에서 그거는 뭐  죽이는 것은 우리가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보다도 더 쉽게 그는 죽어졌을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구한 것도 그게 다 생명의  중량보담은 무거운 중량을 가지고서 간구를 했고. 또 그렇게 하나님이 '그라면  네가 명해라, 이 우박이 내리도록 명해라 온역이 내리도록 명해라, 이렇게 그  재앙이 내리도록 명해라' 그들 앞에서 그 재앙이 내리도록 명할 때 그 재앙이 안  내려오면 그는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건데 그것도 생명을 담보할 만침 확신을  가지고 생명을 내놓을 반한 생명을 내놓아도 의심 없이 내놓을 수 있는 그  생명으로 담보할 만한 그런 확신을 가지고서 그들이 순종한 것 아닌가? 그럴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안했는가?

 모든 것이 이래 좀 생각을 해 볼 때에 우리가 너무도 말은 말대로 저 혼자  얼마든지 돌아다니고, 또 마음은 마음대로, 또 얼마든지 돌아다니고, 이 행동은  행동대로 얼마든지 돌아다니고, 마음은 마음대로 또 이렇게 돌아다니고 또  지식은 지식대로 이 지식은 저런 무슨 일반된 그런 것도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의  지식에 일치되도록 하려는 그런 것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하지 안하기 때문에  고만 그렇게 만일 일치가 된다 할지라도 지식에 자기 지식과 일치가 되어지니까  결국은 고 옛사람이 나타나서 그 사람은 옛날 사람으로서는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적으로는 가장 슬기 있고 지혜 있고 용단 있고 결심 있고 의지 있고  단결심 있는 그런 세상에서 누구 보다도 그 원죄가 중심의 원죄가 강한 사람이  되어지겠고 또 그 악령의 뒷받침이 돼 가지고서 그 세상 그 망할 일을 가장  성공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겠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이런 것 저런 것 권세를 잡은 그것을 광범위하는 범위에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다 부리는 종들이요 하나님이 부리는 종들이지마는서도 고  소범위로 생각하면은 다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 가지고서 자기중심이 자기를  완전히 망친 것이 세상입니다. 자기중심이 자기를 완전히 망친 것이 그것이  세상인데 우리가 그렇게 예수 믿는다 하지마는서도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느냐 그것을 좀 생각을 했고,  이래서, 이것도 저것도 세상에도 세상 사람에게도 쓰지 못할 이건 참 거름에도  쓰지 못할 이 세상에도 쓰지 못할 이거 뭐 전부 다 분산이 돼 가지고 하나도  생명없는 것처럼 전부 이래 부서져 가지고 가루와 같이 돼 가지고 이렇게  되어지는 이런 우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과연 내가 설교를 할 때라든지  평소에 생활할 때에 이것이 이거 일치가 될라고 애를 쓰느냐? 이것이 일치가  돼야 되지 일치가 안 되면 안 되겠다 일치되기를 원하는 마음이냐? 원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자기 주관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움직이고 그 말은 말대로  움직이고 행동은 행동대로 움직이고 이렇게 각각 각각 이제 분산 돼 가지고서  박살이 돼서 이렇게 움직여지니 그게 무슨 체계 있는 사람이었겠느냐?  또, 그라고 그래 겨우 이게 일치가 된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지식과  일치된다는 것이 참 둘 둘이 일치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지식과 일치 되는  그것이 아주 높은 그 차원인데 일치 된다는 그것이 우리가 얼마나 원 하고 힘을  써야 노력을 해야 되겠느냐? 그러면 일치가 듸면 벌써 이 둘 둘이 합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지식과 일치된다고 하면은 옛사람을 다 이별 해 버리는 것이요  옛사람을 다 배척해 버리는 것이요 옛사람이 다 꺾어지고 죽어져 쫓겨나가는  그런 판이니까 하나님의 진리와 일치되기가 얼마나 어려우냐? 이것이 이리 되지  안하고 그저 말은 말하고 하나님 진리하고 하나님의 진리하고 일치가 되고, 또  이제 행동은 행동하고 하나님과 일치 되고 이래 이게 다 분산이 돼 가지고  일치가, 돼지니까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다 구멍에 빠져 버리니까 하나님  말씀과 일치가 돼지지 이제 이것이 다 합해 가지고 하나님과 일치된다는 것은  이것이 옛사람이 다 절단 나는 것이니까, 이게 얼마나 어렵겠느냐? 그렇게  일치가 되면 그때에 그 사람은 없어지고 일치될 때에 그때에 자기가 자기를 알  터이니까 일치될 그 때에 그렇게 노력하는 가운데에 옛사람은 없어지고  새사람으로 이렇게 바꿔 어진 참자기를 찾는 그것이 찾는 줄 모르게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찾아져 가지고서 자기 되어 있는 그게 참자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자기라면 이 자기가 돼 가지고서 그 소원하는 거 자기돼 가지고  소원하는 것이라면 소원하는 것은 땅에 없어질 것은 소원하지 안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한 그 구속에 관한 자기가 할 소원 자기 소원 그 자기 소원,  안식일에는 자기 일하라고 주일에는 자기 일하라는 것처럼 자기 소원, 우리가  소원할 소원, 성경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소원할 소원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서  중생된 하늘나라의 소망을 바라고 한없는 지극히 큰 능력을 우리가 이미 받아  가지고 우리가 이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우리들이 지금 원할 것은 뭐이냐?  이것은 전부이 이 세상 수평선 아래의 것이 아니고 다 세상 수평선 위의 것이고  사망선 위의 것들이고 다 이 멸망선 위의 것들 제한선 위의 것들 다 불완전선의  위에 것들 전부이 완전선, 그 이상에 그 영원선 이상에 불변선 그 이상에 영생선  이상에 그 다 '하늘나라에 속한 이 영영한 요소 그리스도의 보배 피 공로로만  이루어지는 거기에서는 변화되는 것도 썩을 것이 변화되는 것도 썩지 안할  것으로 변화되고 약한 것도 강 한 것으로 변화되고 또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변화되고 이렇게 모든 더러운 것이 거룩한 것으로 변화되는 그런 것들이  아니겠느냐?  그러면, 그때에 그 소원하는 것은 이런 것들을 다 이새사람이 소원하는 것이니  새사람이 소원하는 이 소원은 그 소원이 다 육체의 생명의 중량보다 높은  것들이다. 육체의 생명보다 더 중량이 높은 것들이니 이런 높은 중량의 것을  높은 줄 알고 이렇게 이 중량 높은 줄 알고 중량 높은 것을 주님에게 구하지  안한다면 그거는 다 허툴은 광고가 아니겠느냐? 또 이렇게 구하고 주님에게  순종할 때도 그분의 지극히 큰 능력이 와가지고서 역사하는 그 일에는 그 믿음이  어느 정도의 믿음이 되겠느냐? 생명의 담보가 된 그 믿음, 내가 이렇게 원해서  원하고 순종한다면 순종할 때에 그 생명이 무슨 관계가 돼도 그거는 뭐 아무  거침이 없이 그렇게 생명을 초월한 그런 순종이라야 그런 믿음이라야 이제  하나님이 붙들고 일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그것을 제가 생각하다가서 그만  시간이 돼서 그렇게 말았는데 제가 그것을 생각을 하다가 만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주일 지키는 거 이거 주일에 대해서 아,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지으시고 안식일을 줬다. 그러면 안식일을 뭐하려고 주셨느냐 하는 그게 대해서  제가 궁구하다가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주일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주일을  뭐하라고 주님이 주셨느냐? 그 주일에 뭐하라고 주신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해도  그 아는 것이 너무도 좀 애매하고 정확하지 안해서 좀 요새는 고민 가운데 있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어제 ○목사님이 마태복음 24장을 읽으시고 구약 말년과 신약 교회의 말년이 꼭  당하는 형편이 같고 타락이 같고 모든 죄악이 같다. 그러기 때문에 멸망도 같다.

이렇게 같다는 것을 어제 ○목사님이 말씀하시고, 또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첩 놓이지 안하고 다 이렇게 멸망할 것을 너희들이 보느냐 이것을 보느냐  하는데. 그 주님은 그것을 보시고 이렇게 첩 놓이지 않고 멸망할 것이라 했는데  과연 그 후에 주후 칠십 년에 그것이 다 그와같이 말씀대로 다 멸망을 받았는데,  주님은 보시고 성전의 아름다운 것 껍데기 번쩍번쩍 아름답지마는서도 주님 보실  때에는 이것이 무너지지 않고는 안 된다는 무너져야 된다는 그 원인을 주님은  보셨는데 제자들은 보지 못 했기 때문에 그때 말한 고 착안이 차이가 있었으니  오늘 우리는 그때와 같다 했는데 그분들 착안대로 우리도 지금 착안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 우리가 멸망받을 자가 아닌가? 주님이 그 제자들이 착안하지 못한 것을  주님이 착안하신 그 착안을 우리가 가져야 될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 그때에  결과가 같은 것 보니까 원인도 비슷할 것이니 뭐 하나님의 도는 상고때나 태초  때나 지금이나 꼭 일관입니다. 세상 종교는 이렇지 마는서도 그 나타나는 형태는  다르지마는서도 속에 진리는 변동이 없습니다. 일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타락도 보면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그때나 지금이나 그 성질과 종류가 꼭 같지,  우리가 둔해 그렇지 조금도 틀림없습니다. 이러니까 그때에 그 이스라엘의  말년에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들이 다 비참하게도 멸해진다. 그런데 너희들이  이것을 보지 못했느냐? 하시는 주님이 보시는 그것을 우리가 지금 봐야 멸망을  면할 터인데 그게 무엇이겠느냐 하는 그것도 어제 ○목사님 설교 하는데에서  제가 하나 제목을 얻는 것이 되어졌습니다.

 제가 늘 과거에 설교한 것은 나는 그래 깨달은 것은 그저 외식이다 외식이다.

껍데기다. 그러면 그 껍데기 외식 중에 제일 중앙되는 외식이 뭐이냐 하면은  성전은 번들번들 지어 놨지마는 성전에는 하나님 속에 계시는 것이 그게 이제  알맹이인데 하나님 계시냐 안 계시냐 그거는 생각지 안하고 자꾸 성전 그 껍데기  형체만 가지고 하고 있으니까 그 외식이니 그 외식하라 하는데, 그러면 그 어떤  양으로 흘러 나와 그리 됐느냐? 어제 ○목사님이 이 세상에 모든 뭐 교회에 교인  수가 많다, 또 그 성전을 잘 지어놨다, 거기에는 그 정권자들이 많이 있다, 또  모든 지성인들이 많이 있다, 학 박사가 많이 있다 유력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돈이 많이 있다 이렇게 말 하는 그것이 여전 성전 건축이 다 미석들로 아주  값비싼 돈으로 건축해서 번쩍번쩍 아름다운 것같이 그런 것들이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이것만 가지고 있고 이 껍데기 이것만 보고 속에 무너지게 되는 그  원인이 속에 알맹이 없는 그게 뭐이냐 하는 거기에 대해서 어제 약간 ○목사님이  말씀이 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게 만족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우리가 연구해서 자꾸 우리가 연구해 가지고 찾아야  되겠습니다. 찾아서 지금은 뭐 아주 급박한 때입니다. 때인데 우리가 이렇게  진실이 없이 이러지 말고 우리가 주님의 그 주권을 믿는다면은 주권을 믿는 것도  우리가 그 생명으로 담보할 수 있는 그 믿음이 돼야 하겠습니다. 만일 내 생명이  끊쳐지는 그때에 그 생명 끊쳐지는 그것이 문제가 없이 생명이 끊쳐질 수 있는  그런 길이라도 주님이 인도하신 것이라면 인도를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주님의  주권을 믿는 것이요 주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 그것이 이  세상에 무슨 사소한 일에도 자꾸 제한돼서 믿음의 그 중량이 또 그분을 바라보는  그 중량이 우리의 최고는 최귀는 육신의 가진 것은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보다  전부 중량이 높은 그 이상의 차원 것이라야 이게 돼지지 그 이하의 것은 다  이것이 소용이 없겠다 하는 그런 것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만 마음과 말과 마음과 행동이 나뉘어졌으면 그거는  뭐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일치되도록 우리가 애를 써서  그게 일치가 되야 되겠습니다. 그 일치되는 그런 것은 좀 쉽지마는 그 일치돼  가지고서 하나님의 지식과 일치되는 것이 좀 힘들고, 그러면 새사람을 찾게 될  것이고, 새사람이 소원하는 소원은 전부 새사람 이 소원하는 소원은 육체의  돈보다도 더 무거운 걸 소원하고 새사람이 소원하는 소원은 자기의 몸보다도 더  무거운 것을 소원하고, 새사람이 소원하는 소원은 육체의 생명보다도 중량이  무거운 것을 소원하지 그것보다 가벼운 것을 소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벼운  것은 주님에게 소원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러기 때문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 하시고 '그런 일은 이방인들이 다 구하는 것이라'  이랬으니까 어쨌든지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생명보다는 중량이 무거운 것을  우리가 구하여야 되겠고, 또 우리가 당신에게 당신을 믿는 믿음은 생명으로  보증할 수 있는 생명으로 보증할 수 있는 생명을 초월한 그런 신앙이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일 할 수가 없겠고, 또 그분이 지극히 크신 분인데 우리와  연결 될 수가 없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에게 믿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표적을 나타내는데.

표적은 베드로가 그물을 던질 때에는 아무 이런 믿음 없었습니다. 이런 믿음  없었으나 자기가 믿음 없는 것 알았기 때문에 고기 잡고 난 다음에는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꺼꾸러져서 죽은 자와 같이 이렇게 되기 때문에 주님이 위로를  하시고 그에게 다시 소망주신 것은 그분이 이제 자기가 주님이 명령하실 때에는  자기 마음과 말과 행동과 마음이 일치되지 아니했던 것을 그때에 발견하지  안했느냐? 발견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기막혀지나 발견해 가지고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인하고 자기 지식이 주장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자기 지식으로 움직였던 그것을 그때 깨달아 가지고서 깨달아서  깨달았을 때 그가 참 깊이 그것을 다 버리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감히 주님을 상대할 수가, 주님을 내가 모실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나는  상대할 수 없다는 그 주님과 자기와의 거리가 너무 멀고 그 주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자라고 느껴지는 그것이 그때 주님이 보시고 쓸모 있는 그런 믿음이  아니겠느냐 하는 그런 것을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와 같이 아직까지 통계는 못 봤습니다마는서도 우리 교회에서 보니까 제가 그  종목을 읽어 봤는데 그 표적이 쉰 두 가지가 나타났고, 또 다른 교회서 난  그거는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표적에 대해서도 본인이 알 때에 그냥  자꾸 억지로 그뭐 끄다 붙이고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지 안한 일을 제가  그라는 것이 억지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안 한 것을 하셨다고 하는 그것도  거짓부리기 때문에 지극히 크신 분 앞에 그 크신 분 앞에 망령되고 감히 할 수  없는 일이고, 또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면 분명히 자기가 알 것이라. 이거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면 크고 작은 게 없습니다.

그분이 하신 것이라면 다 전능자가 하신 것이기 때문에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어제 ○○○목사님이 그 좀 그래 가지고 무슨 부러진 모가지가 낀  것이라든지 떨어진 팔이 하나 생졌을 경우에 이제 그런 거라야 알 수가 있고  믿을 수 있지 그 무슨 그런 그렇게 뚜렷한 것이 아니면 그런 것을 좀 믿기가  어렵다 하는 그것도 우리 마음이 강퍅하고 관심이 없고 빛이 다 어두워져서 그런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신 그런 것을 우리가 참 어느 정도 소중히  여기고 어느 정도 귀중히 여기는가? 옛날은 왕에 대해서는 숭배성을 가진 그때에  군왕 시대인데 그때 군왕 시대는 왕이 대신이라도 손을 잡지 안했습니다. 암만  우의정 좌우정이라도 손을 잡지 안했어요. 손을 잡지 안하고 그저 이래 가지고  말할 때에 '경이 그대가 어떠하고' 이래 암만 나이가 많아도 그저 그대라고 이래  가지고 말로 했지 손잡지 안했어. 만일 왕이 손잡을 때 특수 할 때 참, 좌의정  우의정을 해도 손잡은 그런 일이 없었고 혹 어떤 좌의정 우의정이 참, 극진하게  그럴 때에 왕이 아 손을 손목을 잡은 일이 있다. 손목을 잡았으면 손목 잡고 난  다음에 그 손목을 잡은 것을 언제든지 붕대를 해 가지고서 그 햇빛을 보이지  안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안하고 붕대를 해서 감고 다녔었습니다. 왜  다니느냐? 그 왕이 잡은 고 손을 이것을 누구든지 보도록 나타낼 수가 없고  이렇게 이렇게 헛되이 이렇게 할 수가 없다 해서 그게 뭐이냐? 왕의 존경성이요  숭배성입니다. 그것이 그 충성을 이루는 그런 모두 다 원료가 되어지는 것인데  우리가 그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정말로 하나님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요 이 창조주 이 모든 바다를 만든 바다만 봐도 놀래는데 바다를  만드시고 이 공중을 만드시고 뭐 공중에 무슨 요새 우주 세계라 하면서  우주인들이 그래 쌓아 봤자 그까짓 것 제일 가까운 별에서 가까운 별에 가는  것이지 그 모두 다 억억만분의 일이나 지금 알고나 있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런  넓은 것을 만드신 그분, 창조하신 그분을 우리가 아는 지식이 없고 고분에게  대해서 참, 실지로 그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데서 그분의 하는 일을 이거 뭐  장난삼아 이렇게 여기지 그분을 만홀히 여기는 거기에서 그분의 하는 일을  만홀히 여기고 그분의 하신 말씀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지. 그러기 때문에 이게  다 한목 돼 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지극히 크신 분이 내 기도를 들었다는 것이게 어떻게.

이러니까 사람들이 의심한다 그말이오. 예수님이 하나님이 도성인신해서  대속하지 안했으면 이런 일이 될 수가 어찌 있겠습니까?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 '아, 내가 이렇게 이랬는데 주님 앞에 기도했디마는서도 내 병이  나았다.' 그 병 나은 게 큰 게 아니라 그분이 내 기도를 들으신 것이 큰  것입니다. 그분이 내게 와 가지고서 손을 대 가지고서 내 위에 와서 손을 대셔  가지고서 나를 치료하셨다는 그 일이 얼마나 큰지 그분이 나를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 그분이 나를 기억하는 것이 크고 그분이 내 소리를 들으시는 것이  크고 그분이 내가 간구할 때 내게 와 가지고 그분이 친히 수고하신 것이 크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그것을 한번 자기가 봤으면 다시 뒤에 그것을 또 볼라고 하는 그것도  망령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제든지 시험하다가 망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해 놓으신  것을 자기가 '이제 믿겠습니다' 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또 그런 일 닥치니까  '그때는 하나님이 해 주셨지마는서도 요번에는 하나님이 해 주실는지 안 해  주실란지? 요번에는 하나님 또 할 수 있을는지 없을란지?' 이래 가지고서 그때  한번 거기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안하고 그 다음에 그때에 자기가 보고  믿어지고 작정하고 인정한 그것이 계속되지를 못하고 그때도 끝나고 또 새로  닥치니까 새로 가질려 하는 그것이 뭐이냐? 믿을라고 하는 게 아니고 결국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하나님이 요거 하는가 안하는가 보자'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시는가 안하시는가 보자 할 수 있는가 없는가 보자. 되는가  안 되는가 보자'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을 시험했지 하나님이 하시는 그 표적에서  표적이 나타난 그 속에 하나님이 어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 또 하나님이  자기들과 어떤 관계 가졌다는 것이 실상은 그들이 보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그저  표적의 껍데기 그것만 보되 그것으로서 베드로와 같이 받은 것이 없고 항상 시험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시험하다가 망했다 그렇게 고린도후서 10장에 보면  말씀을 했습니다.

 어짜든지 우리는 이 신앙생활에 일치가 돼야 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이것이 하나인데 이게 하나에  뭉쳐야 하나에 뭉쳐야 신앙생활이지 이게 뭉치지 안하면 신앙생활 아닙니다.

뭉치지 안하면 신앙생활 아니고 우리가 그래 가지고서 설교를 이래 할 때에 이  우리 주관편에서는 뭉쳐야 되겠고 주관편에서는 뭉쳐야 뭉쳐야 하겠고, 또 내게  계시 말씀을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계시 말씀과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 말씀과 뭉치는 것은 우리 주관편에서 할 것입니다. 내가 뭉치고 하나님의  계시 말씀과 뭉쳐지고 이 뭉쳐지는 것은 우리편에서 우리 할 일이고 그래 뭉쳐질  때에 당신이 하시는 것은 영감이 와 가지고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그것이  당신이 하실 것이요 당신의 권능이 와 가지고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이 그것이  당신이 하실 것인데 우리가 이거 뭉치는 이것도 되지 안하고 있었으니까 이것이  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 멸망 받은 것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상살이  하다가 이 세상살이에서 다 멸망하는 것이 광야에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살이에서 죽을 때까지 한 것이 전부 불 탈 세상 생활만  하다가서 불 타고 말았으니까 광야에서 멸망 받은 그게 아니고 뭐이겠습니까?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짜든지 우리는 진실해야 되겠습니다. 뭐 다 자기 속이는 것뿐이지 그 뭐  하나님이 어떤 분인데 내가 염려해 가지고서 사람이 내게 뭐 사람이 내게 뭐라  하면 어짭니까 그 사람보다 하나님이 더 두렵지 않습니까? 사람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더 문제 아닙니까? 우리 뭐 있으면 자꾸 하나님 앞에서 어찌  됐나 살펴서 고칠 일이지 사람에게 대해서 억울하니 뭐니 괘씸하니 하는 그런 말  한다는 것은 너무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그럴 수가 없는 지금 모든 걸 아시는  그분을 지금 상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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