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사람의 소원

 

1980. 3. 9. 주전

 

본문: 요일 3: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지난 주일에도 이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의 모든 움직임은 생활이 사랑과 미움 이 두 가지 종류로만  되어있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원하는 것이나 경영하는 것이나 지식 하는 것이나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미움에 속하지 아니했으면 사랑에 속했고 사랑에 속하지  아니했으면 미움에 속한 것이라 이 둘 뿐이고 이 둘 중에 하나에게도 속하지  아니한 중립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사망과 불행에 속한 것은 다 그것의 원천이 미움이요 생명과  행복에 속한 것은 다 근원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보다 앞으로 모든 면이 좋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랑에 속하고  사랑을 가지도록 노력을 할 것이요 자기가 이미 있는 모든 불행적인 것과  사망적인 것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미움에 속한 것과 미움의 것들을 다 끊고  없애 버리도록 노력을 할 것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두워져서 어떻게 미움이 사망의 원인이 되고 사랑이 생명과 평강의  원인이 되는 그것을 알만한 지능이 없어졌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리와 성신의  감동을 받았을 때에 짐작해서 희미하나마 판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움과 사망과 고통과 실패 모든 불행스러운 이것을 한테  묶어서 하나인 줄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불행의 그 원인이 미움이요 또  그것들은 다 미움하고 한 덩어리입니다. 미움이 내게 왔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나에게 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미움이 나에게서 떠났으면 인간 불행이라  사망이라 하는 그런 종류의 것들은 견뎌 배기지 못하고 그것이 서서히 봄날에  얼음 녹듯이 다 제거 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이 남을 위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여기에서 인간의 원죄인 자기 중심이  거리껴서 이것을 가지기가 힘드나 사랑은 모든 생명과 인간의 행복과  하나입니다.

 사랑이 임할 때에 모든 생명과 평강의 움이 트고 움이 트고 또 생명과 평강의  요소들이 차차 생겨지고 이 본질과 본성들이 이루어지며 또 그 힘이 차차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대할 때에 아무리  비상시 과도기 극단 어떤 경우에 이르러서라도 우리 앞에 닥쳐오는 미움을 잠깐  멈추고 그것을 초월한 사랑의 눈을 뜨고 맞이해야 합니다.

 그것은 미움은 순전히 사망선 아래 저주선 아래 파괴선 아래에 있는  것들입니다. 사랑은 사망을 초월했고 파괴를 초월했고 절망을 초월했고 저주를  초월한 다 생명선 위에 있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물건을 대할 때에 그 물건이  밉고 짐승이 밉고 사건이 밉고 사람이 밉고 행동이 미워도 그 자리에 머물면  저는 사망에게 삼켜졌습니다. 절망에게 삼켜졌습니다. 파괴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 대한 구체적인 논리적 해석을 평가적 비판을 가지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인 줄 알고 일단 미움을 포기하고 미움 위에 미움을  한층 뛰어 올라서 미움 넘어 한 걸음 그것을 지나가서 사랑에 내가 속해야 되고  사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미울만한 그 자체가 나쁘고 미울만한 그 행위나  일들이나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그 상대라 할지라도 자기가  미움에 속하면 그 복수는 바로 못됩니다.

 미움에 복수가 되지 아니하고 그것이 도로 반동되어서 자기를 멸하는 결과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잠깐 멈추고 좀 진정해서 거기서 벗어나 사랑으로  옮겨서서 사랑에 서서 사랑에 속해서 사랑을 가지고 그것을 다시 심사합니다.

다시 그것에게 사랑을 가지고 그 원수를 그 못 쓸 것을 삐뚤어진 것을 상대할  때에 거기에 완전한 복수가 성공되고 그 속에 새생명 새 희망의 움이 터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건설의 비결이요 파괴는 성공의 자본이라 실패는 성공의 자본이라  무식은 지혜의 원인이라 어머니라고 이렇게 말들 하는 그 철학적인 모든 말도 이  미움과 사랑의 그 원리에 속해서 그 이치대로 통계를 잡아서 말하는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예를 들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미움만 가지고 그를 상대한다면 그가  물론 나쁩니다. 부모의 원수든지 민족의 원수든지 나라의 원수든지 자기의  사업의 원수든지 하나님의 원수든지 진리의 원수든지 어떤 원수라 할지라도  그것을 미움적인 직관 직형에서 한 걸음 초월해서 사랑에 건너가서 그것을  상대하지 못하면 먼저 자체가 사망 요소화 돼 버립니다.

 미움을 가졌을 때에는 자기 자체가 전부 사망해야 될 요소로 변질돼 버립니다.

하나님과 모든 존재의 큰 단체라고 하는 이 단일체 통일성 여기에 배치가 되어서  그 자체가 사망 본질화 돼 버립니다.

 또 거기서 움직여 나오는 모든 계획이나 계산이나 방편이나 역사나 그 모든  것이 다 사망적의 것이요 다 그것이 하나님과 변질되지 않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대적과 저주가 되어지는 그런 움직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리되나 그것은 여러분들이 자세히 생각해서 많은 명상 시간을  가지고 무식할지라도 성경 또 성경을 모르면 성경보다 이 자연 만물 이 자연들을  인용해 가지고서 이 자연들이 보여주는 자연 계시를 통해서 넉넉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세상에 살 때에 일차적으로 당면한 것이 미움입니다.

일차적으로 미움 없이 미움을 초월한 사랑이 아닌 사랑으로 자기에게 당면될  때에는 그것이 다 하나의 공중의 집 짓는 거와 같이 실상이 없는 그 미혹의  존재들의 사랑이라 반드시 터가 없기 때문에 깨어지는 것처럼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미움이 나쁜 것 아닙니다. 이 말은 인간이 타락한 이 타락이 나쁨이  아니라 말입니다. 타락뿐이면 사망이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이 이 구원을 끌어오게 된 그 원인이며 순서인 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는 타락이 그 원인이 된 것입니다.

 범죄가 사죄의 원인이 된 것이고 불의가 칭의의 원인이 된 것이고 사망의  생명의 원인이 된 것이고 하나님과의 원수 된 것이 하나님과의 화평의 원인이 된  것처럼 범사에 미움이 먼저 우리에게 부딪쳐 오는 이 미움을 그대로 받아 드리면  자기는 완전히 거기에 삼키어졌고 소속했고 자체가 자기가 미워하는 그 존재의  그거 화 됐습니다.

 본질과 본성 모든 요소가 완전히 그 화 됐기 때문에 사망된 것입니다. 거기서  비판하고 평가하지 못하면 못할지라도 미움은 사망 뿐이라. 사랑은 생명과  건설이니 생명을 사랑하고 건설을 원하고 영원한 승리와 정복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인하여 무조건 사랑을 가질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그 미움을 발로 밟고 미움을 초월해서 내가 사랑에 서 가지고  내가 정신 차려 가지고 내 자체가 신자가 되어져 가지고 그 다음에 미워하는  대상을 똑똑히 대적해서 살해를 시키고 복수를 해서 멸살을 시킬 것입니다.

그래야 완전히 멸해지는 것입니다. 완전한 승리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미움과 사랑이 거기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을지라도 다  우리는 희미한 지식을 가졌지마는 자기가 지식 가진 대로 비판을 하고 그 지식을  초월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계명이 사랑입니다. 일 계명으로부터 십계명 66권  도리 모든 도리가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명령 또 우리를 주의시키는 주의 우리를  경고시키고 경계시키고 주의시키고 경성 시키는 그 모든 경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모든 명령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요구 이것을 똘똘 뭉쳐서 한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계명인데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명령했으니 나는 이 성구를 의지해서 무조건 우리에게 미움은  물리치고 미움은 자기 속에 용납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움은 용납지 말아야  됩니다. 15절에 보면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너희가 아느니라 사람 미워하면 살인이고 물건을  미워하면 물건을 죽이는 것이고 일을 미워하면 일을 죽이는 것이니 그러면 내  자체가 생명에서 끊어집니다.

 생명에서 끊어지고 내가 경영하고 움직이는 마음의 움직임이나 성질의  움직임이나 몸의 움직임이나 내 모든 움직임은 다 영원한 사망입니다. 영생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가지고 어떤 만물에게 사랑을 이  사랑을 그대로는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을 가지고 그를 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형적으로 우리에게 왔고 우리가 가진 사랑이 또  모든 사물들에게는 모형적으로 가 가지고 그것이 형태를 이룹니다. 그것이  말물이 새롭게 되어서 만물도 영생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 대한 확고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을지라도 어쨌든지  우리가 미움은 벗어나야 됩니다. 미움과 함께 있으면 자기의 본질과 본성이 벌써  사망화 돼 버립니다. 또 자기에게 있는 요소가 다 저주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움을 처음에 가질 것입니다. 모든 것을 대할 때에 미움을 가질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적 생활입니다. 이것이 법리적 생활입니다. 미움을 가질  것이요 이것이 법리적 생활입니다. 이치의 생활이요 법의 생활입니다. 법리의  생활은 심판을 초래하는 생활입니다. 심판은 하나님 외에는 다 정죄 받아 멸망을  끌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법리의 생활인 미움을 우리는 발견하고 먼저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움의 것을 발견하고 미워할 권리는 없습니다. 미움을 발견해서 미워할  그 자체며 미워할 대상이며 미움의 것인 것을 발견 안 하면 안됩니다. 미움의  것을 발견하고는 미워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  명령하신 것이 사랑이지 미움은 금했습니다.

 미움은 금했으나 미워, 미움의 것을 보지 말라 미움의 것을 발견하지 말라  미움의 것을 미움의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미움을 발견하여  미움을 똑똑히 미움으로 발견하고 미움으로 지식하나 이것은 우리에게 권합니다.

우리는 평가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할 권리가 있습니다. 논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잘못에 속한 것을 저주적으로 심판적으로 그를  파괴적으로 대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런 세력은 없습니다. 그런 명령은 받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을 정평 정가할 이 법리를 받았기 때문에 정평 정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명령이요 정평 정가 하여 그를 상대할 때는 우리는 건설 면으로만  상대하지 파괴면으로는 상대 못합니다. 사랑으로만 상대하지 미움으로는  상대하지 못합니다. 그를 구원으로만 상대하지 살해로는 상대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제한적 권리입니다. 이것이 속권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미워할 것이 없으니까 다 사랑하라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미워할 것과 사랑할 것을 이것을 비판해서 미워할 점을 먼저 발견하고  미워할 점을 발견하고 미워할 거기에 머물면 내 자체가 미워한 그것으로 피동  되고 거기 감염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 자체가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말  아닙니다. 미워할 것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법리를 줬습니다. 담음줄을 줬습니다.

저울을 줬습니다. 잣대를 줬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재볼 그 권리가 있고 재볼  그 사명이 있습니다. 굽은 것은 굽고 곧은 것은 곧고 긴 것은 길고 삐뚤어진  것은 삐뚤어지고 바른 것은 바르고 이렇게 평가하고 논평할 그런 권리는  가졌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어떤 것을 대하든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내가 그 법리로  이렇게 비판하고 재보고 할 때에 사랑할 것으로 되어있는 사랑할 것으로  되어있는 그것은 그대로 둬 둬도 됩니다. 그것은 사랑할 것이 되어있는 그것은  사랑할 것으로 되어있는 줄로 알고 미워하지 안 하면 됩니다. 사랑할 것으로  되어있는 그것은 내가 할 일은 그것을 미워하지 아니하는 것이 내가 할  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감의 법리로 그것을 살펴볼 때에 미움의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미움의 것을 발견하는 게 옳으냐 발견치 아니하고 다 이것을 평하지  말고 사랑의 것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옳으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미움의 것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미워할 권리는 없습니다.

미워할 행동은 못합니다. 미워할 자격도 없고 미워할 요소는 예수님에게 내가  받은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받은 내게 있는 요소는 미워할 그런 요소는  아닙니다. 내가 미워할 때에는 벌써 예수님에게 받은 영생에 속한 요소가 아니고  이것은 첫째 아담에게 받아서 마귀로 말미암아 감염되어서 사망화 된 그  요소입니다.

 이러기에 내가 사랑할 것과 미워할 것을 비판할 권리가 있고 비판할 때에  사랑을 그것은 미워하지 안 하면 나 할 일 다 했소. 사랑을 그 자체의 대상에  대해서는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 할 일 했고 미워할 수 있는 미운 그것은 내가  그것을 미워하면 내 자체가 변화돼 버려요. 미워하면 내가 그 찰나에 나는  바꿔집니다. 새사람은 파묻히고 옛사람이 나와서 나를 주장하게 됩니다.

옛사람이 날 와서 주장하게 되게 되기 때문에 그때에 내게 있는 주체성도 사망의  것이요 이 주체성에게 피동 되는 내 마음이나 내 몸이나 이 모든 것도 다  사망적인 것이요 사망에게 피동 되어서 사망의 도구 사망의 기관이 되어 내  속사람 남겨 논 외 전부가 다 사망화 저주화 파괴화 멸망화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있는 사랑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또 상대방이야 어떻든지 사랑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또 상대방을  비판하고 평가해서 사랑의 것이라면 내가 조심할 것은 그것을 미워하지 말 것  사랑의 것이 되어 있으면 완전입니다. 거기 대해서 내가 손댈 필요가 없습니다.

더 손을 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의 대적이 안 되는 그것만이 내가 할 일이요 거기에 분명히 미워할 것이  있습니다. 미운 것이 있습니다. 분명히 미운 것이 있는데 그 미운 것을 내가  미워하는 데에서 끊기면 나는 다시 예수 믿지 안 할 때의 사람입니다.

옛사람입니다. 이것은 파괴와 저주아래에 같이 죽어 있는 것이요 내 자체도 같이  미워하는 것들입니다. 내가 그를 미워할 때에 나도 그 미워할 그 요소와 같은  요소로서 동질 동서의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이런 위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내가 분명히 그것을 미워할  수 있는 미움의 것들이나 그것을 미워할 때에는 내가 멸망할 나로 바꾸어집니다.

자기 아닌 자기로 바꾸어집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서 영생을 가진  새사람이 옛사람으로 그것을 계기로 해서 그 유혹으로 인해서 자기가 순간에  바꾸어져서 참 자기는 자기에게서 물리침을 받고 누구에게 마음과 고기 덩어리  자기 모든 지식 사상에서 물리침을 받고 자기 아닌 자기 그것이 그것을 기회로  타 가지고서 이제 옛사람으로 완전히 바꾸어집니다. 그것이 기회가 되어서  분별하지 못하고 거기서 새사람이 옛사람으로 바꾸어져 분명히 그것은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가 미워하고 거기 대해서 미움의 역사를 하게 될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는 바꾸어져서 완전히 새사람이 옛사람으로 바꾸어진  때입니다.

 그러기에 거기는 생명이 하나도 없고 전체는 사망 뭉텅이요 사망만 역사 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판까지는, 비판까지는 정평 정가 했다면 정평 정가까지는  새사람과 옛사람이 함께 있으면서 그것이 둘이 아무 대립되는 일이 없습니다.

둘이 대립되는 일이 없소, 새사람과 옛사람이 서로 대립이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 되어서 이렇게 비판을 할 수가 있으나 비판한 결과 미워할 것과 사랑할  것이 뚜렷이 따로 나타났을 때에 나타났을 때에 그때에 비추어서 자기와 자기  둘이 이제 불리하게 됩니다.

 불리하게 돼서 사랑할 것과 미워할 둘이 이래 뚜렷이 나타났을 때에 요 행동은  사랑한다 요 행동은 밉다 요 행동은 사랑하는 행동인데 요 행동은 미운  행동이다. 요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요 사람은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요것이 비판해서 그 결과의 답안이 나오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그 다음에  행동이 뚜렷이 옛사람과 새사람 두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 비판하고  평가할 때에는 그때까지는 이 두 사람이 서로 엇갈리는, 엇갈리는 이런 하나가  되지 안하고 서로 대립이 되는 이 엇갈리는 것이 약간 있지마는 그렇게 표가 안  납니다. 표가 안나나 이제 그것이 판정이 돼서 미워할 것과 사랑할 것 요 둘이  뚜렷이 나타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사랑할 것을 대하는 것 미워할 것을  대하는 것 요 두 가지를 대할 때에 자기에게 두 사람이 있는 이것이 뚜렷이 각각  달라져 가지고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그 참된 것 온전한 것 그것이 나타날 때에 그것을 사랑합니다.

그것을 사랑합니다. 그것을 사랑할려고 할 때에 그것을 사랑할려고 그것을  사랑하니까 그것은 새사람에게 속한 것 같지마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로 자기가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자로 자기에게 있는 요소를 그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움직일려고 할 때에 그때에 움직이고 보면 움직이고 보면 움직이게 하는 그 자는  옛사람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이 되어있는 사랑의 것이 되어있는  요것을 위해서 자기가 노력하고 수고하고 그것을 상대해서 자기가 연구하고  노력하고 수고하고 할려고 할 때에 그게 좋은 것 같은데 그것이 옛사람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것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노력합니다. 노력을 하면 그때는 의를  사랑하고 참을 사랑하고 옳은 걸 사랑하니까 바른 것 아니겠습니까? 바른 것  같으나 조금 지난 지 후에 결과가 열매를 맺는 걸 보면은 분명히 그 발동을 한  자가 그 계획을 한 자가 그것을 주체되어 가지고 움직인 자가 옛사람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비판해서 옳은 것이라 바른 것이라 평가된 그것은 내가 할 일은  무어냐? 거기 대해서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사랑의 것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사랑을 거기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그걸 미워하지 안 하면 됩니다.

 그때에 그것을 미워하고 사랑하고 옛사람 이놈이 미워하다가 사랑하다가  미워하다가 사랑하다가 저 혼자 이렇게 날뛸 때에 우리는 어리석어서  미워하니까, 미워하니까 이놈은 옛사람이로구나 못 쓸 내로구나 사랑하니까  이것은 참 옳은 사람이구나 해서 사랑의 역사를 했는데 필요 없는 것을 제가  그에게 사랑의 역사를 한 그것으로서 결과를 보면은 옛사람 그것이 움직인  그것이 나타나서 다 마지막은 다 온전한 것을 때 묻히고 더럽히고 그것을 바루고  파괴시키는 역사뿐이지 건설하는 것은 되지 안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발견되고 난  다음에 사랑할 대상은 그것은 미워하지 안 하는 것으로만 족하고 이제 미움의  대상이 나왔습니다. 미워할 것이 나왔습니다.

 미워할 것이 나왔는데 미워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은 금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의 요소로 받은 것은 미워할 수 있는 요소가  없습니다. 본질이 없습니다. 본성이 없습니다. 법이 없습니다. 권세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때에 그것을 이제 미워할 그것을 사랑을 가지고 미워할 그것을  내가 사랑하고 미워할 그것을 그 미움 넘어 미움 넘어 내가 사랑으로 소망을  가지고 그것을 미워하는 그게 사랑하는 게 아니라 미워하는 그게 사랑하는 게  아니라 미워하는 그것을 사랑으로 변화시켜 미워할 그것에게 미워할 그것에게  사랑의 것이 맺혀질 수 있는 더러운 그 더러운 아주 썩은 것에게 거기에 좋은 그  꽃과 열매가 맺을 수 있는 미워하는 그 바탕에 사랑의 것이 심어져서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이 면을 소망하면서 그를 사랑합니다. 미워할 그걸 사랑하는 게  아니라 미워할 그거 속에 사랑의 능히 자라고 거기 심으면 자라서 그것이 이것  사랑의 것이 자라 가지고 미움 그것을 완전히 빨아먹어서 다 이 사랑의 것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그것을 보고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내 자체는 그것이 옛사람으로 바꾸어지지 안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중생 된 새사람으로 내가 주체가 돼서 사는 것이고 그럴 때에 내  자체가 산 사람이 내가 되었고 내가 경영하고 움직이고 계획하고 비판하고  평가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산 것이 되었고 그 욕망이 다 산 것이 되었고 그럴  때에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를 통해서 그 사망 속에 생명이  심어지고 그 사망된 그 미운 그것은 생명이 삼킴으로 그것이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어서 죽은 똥이 산 화초의 빛깔도 되고 향기도 되고 열매도 되어지는  것처럼 되어지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는고 하니 저 지난번에 무조건 사랑해라 미움은 금물이니까  미움은 버리고 무조건 사랑해라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에 사랑해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 사랑하지 말고 미워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랑해라 미워할 것이라도  그것을 대할 때에 사랑으로 네가 대하라 사랑으로 대하고 미움은 금물이니까  무엇이든지 미워할 것이라도 네가 무식해 모르면 미워할 것이라도 무조건  사랑해라 요것은 요 사람은 미운 사람이다 요 사건은 미운 사건이다 요 물건은  미운 물건이다 요렇게 그 미운 그것이라도 네가 그것을 어떻게 해서 살아야  되느냐 그것을 몰라도 또 네가 분명히 너는 미워할 수 있는 미운 것이라도 미운  것일지라도 무조건 네가 사랑해라 미움은 금물이기 때문에 사랑해라 원수도  사랑하고 파괴된 그것도 사랑하고 악인도 사랑하고 삐뚤어진 것도 사랑하고  무조건 네가 평가 못하니까 무조건 사랑해라 하는 그것은 비판해서 미워할  대상을 사랑하라는 그것은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사랑해라 미움을 물리치고  사랑해라 사랑을 가지는데 네가 그 미움을 그것을 물리칠라 하면은 어렵고 또  그것을 변화시킬라 하면 어려우니까 네가 무조건 미움은 금물이요 사랑만 가지고  그를 사랑하는데 다만 그 사랑하면서 목적과 방편을 네가 바꾸어라  그러면 네가 미워하는 그 미움이 사랑으로 바꾸어질 수 있다 미움은 사랑으로  바꾼다는 것이 심히 어려우니 네가 이거는 미워할 것이냐 이거는 사랑할 것이냐  이것을 네가 선택할려고 하면은 선택할만한 그런 지능이 없다. 이거는 미워할  것이다 이거는 사랑할 것이다 그것을 분별해 가지고 미워할 것은 미워하고  사랑할 것은 사랑할 수 있는 이런 상태는 안되니까 무조건 사랑해라 무조건  사랑하고 다만 그 사랑하는 그것에 대해서 목적을 네가 바꾸고 방편만 바꾸어라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왔으니 그 사랑으로 목적을 그 사랑의 목적을  미워하는 그것을 네가 미워하는 그것을 내가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그 목적인 그 목적으로 네가 미워할 미운 그것을 사랑하는 그 미움의 그것에  대해서 목적을 네가 이 목적으로 바꾸어라 또 방편을 이 방편으로 바꾸어라  그러면 그 목적과 방편이 바꾸어진 데에서 잘못된 사랑이 녹아지고 참 사랑으로  화해진다 하는 그것을 말씀했기 때문에 지금 이 말씀을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의 종류가 너무 많습니다. 사랑은 하나뿐인데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 하나님의 사랑 하나뿐인데 이 사랑 외에 인간들이 이  사랑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사랑이 천도만도 넘습니다. 사랑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랑을 다 좋아합니다. 사랑이라면 다 좋아합니다. 사랑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원형적 사랑을 사람들이 그 맛을 보고 그  비추어 나오는 그 빛을 보고서 사람들이 사랑에서 조작배기로 만들어낸 것이  인간들의 사랑입니다.

 이래서 세상에는 크게 말하면 사랑 미움 둘이 있는데 제일 해독이 많은 것이  뭐냐 미움보다도 사랑이 해독이 더 많습니다. 작용적 해독이 더 많습니다. 또  제일 생명과 평강의 그 좋은 것이 제일 많은 것이 또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는 미움과 사랑 두 가지 뿐인데 무조건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하라 무조건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가지라 그러면 사랑을 가지면 참 사랑은 하나  뿐이고 못 쓸 사랑은 천도만도 넘어서 사랑으로 인해서 모든 만물이 멸해지는데  인류 시조도 사랑으로 아담과 해와가 서로 죽여서 멸망을 받았고 그 뒤에 세상은  사랑으로 잘못된 사랑으로 멸망을 받는데 그러면 이 무조건 이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가지면 되겠습니까 미워할 것은 미워하고 사랑할 것은 사랑해야 되지요  이라는 것이 일반적 논리입니다. 위험합니다. 안됩니다. 미워할 것은 미워하고  사랑할 것은 사랑하면 결국은 그 자체가 미움으로 말미암아 먼저 죽어 버리고  맙니다.

 미움으로 죽어 버리고 말기 때문에 묵은 자에게는 다시 새움이 나지 않습니다.

송장은 살아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조건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가지라 사랑 중에는 별별 종류의 해독을 가진 사랑들이 많다 사랑함으로  가정을 망치고 사랑함으로 민족을 망치고 사랑함으로 일생을 망치고 사랑함으로  교회를 망치고 이 무서운 사랑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무조건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가지라고 하는 이 교훈이 위험하지 안  하느냐 위험하지 안 하느냐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미움 둘이 있는 데에는  먼저 미움을 버리고 사랑으로 옮겨 서야 희망이 있습니다. 어쨌든지 희망이  있습니다. 미움에 속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없으니까 논리를  모르고 이치를 모르고 방편을 모르고 무엇 때문인지 몰라 무조건 하나님의  계명에 사랑하라 했기 때문에 사랑으로 옮겨 서서 사랑을 가지라  그러면 사랑을 가지면 사랑 속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 독 중에 제일 독한  독이 사랑 속에 있는데 그 사랑을 가지게 되면은 멸망하지 않느냐 그래도 좋다  그래도 좋으니까 무조건 사랑을 가지라 그러면 사랑을 가지면 네가 사랑을 행할  때에 이제 사랑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사랑으로 움직일 때에 사랑으로 움직일  때에 사랑할 때에 사랑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가지고는 해독을 못  줍니다. 사랑을 가지고만 있는 것 가지고는 해독을 못 줍니다. 이 아무리 속에  해독이 가득 찬 사랑이라도 해독이 가득 찬 사랑이라도 이 사랑이 움직이지 안  하면 움직이게 되면은 해독은 미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움직이게 되면은  해독을 끼치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 이 사랑이 움직이게 되면은 해독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니 일단 사랑을  가져서 네가 사랑의 사람이 되고 네가 사랑으로 살려고 하고 사랑할려고 하고  이에 사랑의 네 마음을 사랑의 생활을 사랑의 행동을 사랑의 계획을 이렇게 네가  가지고 사랑의 사람이 되라 뭐 악독이 있는 사랑이든지 생명이 들어 있는  사랑이든지 진짜 사랑이든지 가짜 사랑이든지 일단 미움을 벗어나서 사랑을  가지라 사랑을, 사랑을 가지라 사랑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 사랑의 둘을  바꿔라 그거는 쉽다 사랑의 둘을 바꿔서 사랑의 목적을 바꾸고 사랑의 방편을  바꿔라 사랑의 목적만 바꾸고 사랑의 방편만 바꿔라.

 그러면 제일 사랑의 독이 많은 그 사랑도 목적과 방편을 바꾸게 되면은 해독이  제일 많은 그 사랑도 생명과 행복이 제일 많은 사랑으로 변화된다. 방편과  목적만 바꾸면 변화된다. 그것은 사랑의 자체는 종자가 다르지마는 목적과  방편이 다른데 따라서 이것이 결과가 이 사랑이 변화가 되어진다. 마치 그 꿀벌  그 꿀벌의 종자가 왕봉 종자다 동봉 종자나 종자는 꼭 같은 종자입니다.

 왕봉 종자나 동봉 종자나 꼭 같은 종자인데 동봉은 평생에 새끼 한 마리 못  놓는 것이고 또 작고 또 그것의 정신이 꿀만 탐을 내서 꿀만 빨아오고 뭐 꿀을  빨아 가지고 배가 부르니까 다른데 게우기는 아깝고 저거 집 있으니까 이거  저축해 먹을라고 또 갔다가 게워놓고 또 갔다가 꿀 욕심에 또 꿀 가지러 가  가지고서 자기 배에 꽉 찼으니까 이거 내버리기는 아깝고 또 저축했다 먹을려고  갔다 놓고 평생 꿀 욕심뿐이지 딴 건 하나도 없고 새끼 한 마리도 못 놓습니다.

이러나 꼭 같은 종자인데 먹이는 사료를 달이 먹이면 사료를 달리 먹이면 그것이  이 자체가 동봉의 세 마리 택이나 커지고 이 왕봉은 평생 소원이 평생 소원이  자기의 부하입니다.

 많은 부하를 통솔해서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 평생 소원입니다. 평생 소원이 꿀  욕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꿀 욕심은 하나도 없어 다만 자기 부하 욕심,  부하욕심,  이래서 자기가 벌통에 꿀이 이렇게 많이 차여 있어도 대개 강한 새 왕봉이 강한  왕봉이 나옵니다. 이놈이 나와 가지고서 이 모든 자기 백성 이 모든 동봉을  이놈을 통솔해서 왕이 되면은 자기를 쫓아낼까 싶을 때에는 이제 뭣이 벌써 나올  때가 되면은 아 이놈이 나오면 나라 빼앗기겠다 싶어서 막 동원을 합니다.

돌아다니면서 동원을 해서 나갈 때에 너거도 나가자 나 나갈 때에 너거도 나가자  이래 가지고서 곁에 있는 동봉을 따라 나오는 대로 데리고 데리고서 딴 데로  도망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거는 소원이 자기 부하밖에 소원이 없습니다. 동봉저금은 소원이 꿀밖에  소원이 없습니다. 또 동봉 저거는 같은 종자인데 새끼 한 마리 못 낳습니다.

요거 왕봉은 꼭 같은 종자인데 먹고사는 것이 사료가 달라 가지고서 요것은 하루  동안에 새끼를 얼마나 낳느냐 하루동안에 많으면 똑똑히 내가 들었는데 그 사천  마리까지 놓는다. 하루 동안에 사천 마리를 놓는다던가 그 보통 사천 마리  놓는다고 이랍니다. 하루동안에 4천 마리 새끼를 놓습니다.

 똑 같은 종자이지마는 사료에 따라서 다른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참사랑이요  생명이 충만하고 세상에는 악독이 가득한 사랑이 많이 있지마는 악독이 가득 찬  이 사랑이지마는 이것을 놓고서 그 사랑의 방편을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대로 요  방편을 사용해서 요 방편을 요 사랑에게 먹이고 요 사랑을 목표를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그 목표를 두고서 요 사랑을 기르게 되면은 악독의 사랑이 변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돼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래서 언제 어떤 창기에게 대해서 창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버리지 안하고  그 사랑의 사랑을 가지고 창기를 사랑하는 그 남자가 그 창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이제 복음을 듣고 난 다음에 이제는 회개하고 나서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을 가지고 그 창기를 사랑했고 그 방편을 가지고 창기를 사랑했고 그 창기를  사랑한 목적이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가지고 사랑해 그 사랑으로 그 창기가  동봉이 변해서 왕봉된 것처럼 그 창기가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을 먹고 하나님의  사랑의 목표로 이것이 점점 자라가게 되니까 마지막에 그 창기가 어떤 사람  됐는가 하면은 성녀가 됐습니다.

 창기를 사랑하는 그 남자가 회개해 가지고 믿어 가지고 그 창기의 사랑을 버려  **을 기록한 창기니까 이제 이것을 원수라 하지 안하고 그 창기를 사랑하던  이제는 그전에는 창기를 사랑하던 방편이 이 사랑에 방편을 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방편을 썼지마는 하나님의 참사랑에 방편을 가지고 창기를 사랑했습니다.

참사랑의 방편을 가지고 창기를 사랑하고 참사랑의 목표를 가지고 그 창기를  사랑하는 사랑을 변하지 안하고 사랑을 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창기를  사랑하는 방편이 달라졌고 목적이 다릅니다.

 이러니까 얼마 지나가는 가운데에 그 창기가 그 사랑의 양식을 먹고 그  목표대로 자라가고 보니까 자기가 비로소 돌이켜 회개하고 '아, 이분 보니까  이게 인생이로구나 인생 가는 길이 이 길이로구나' 창기가 회개를 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미인이고 이런지 다른 남자들이 와 가지고서 아무리 신앙  생활할라 해야 신앙 생활하지 못하게  이러니까 아무래도 나를 사랑하는 그 기독자 그자가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그대로 그게 참사랑이요 그 목표가 참사람이니 내가 또 이 사람들이 내한테  찾아오는 이 창기를 사랑하는 이 창남들 이 창남들을 내가 사랑하는 것이 이  창남들을 사랑하는 이 사랑이 내가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되겠다 하고서 그  사랑으로 사랑할려고 하니까 이것이 그 너무 강제에 있어서 당하지 못하고  안되니까 이 창기가 소산수 물에다가 낯을 씻어 버렸소 하나님의 법대로  사랑하기 위해서 소산수 물에다 낯을 씻어 버리니까 얼굴이 엉치가 되고서 꿈에  볼까 겁이 나.

 이러니까 그 사람들이 와 가지고 창기를 괴롭게 해야 괴롭게 하는 것은  물러가고 그 창기가 그렇게 까지 해 가지고서 이제 하면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그런 남자들을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찾아갑니다. 사랑함으로 찾아가  가지고서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을 가지고서 그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을 가지고서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목표를 두고서 자기가  창기였을 때 찾아 왔던 그 남자를 찾아가서 사랑합니다.

 이러니까 그 남자들이 다 이제는 이 여인에게서 감화를 받아 가지고서 그들이  다 변화되어 가지고서 기독자가 되었다는 어떤 책에서 내가 봤습니다. 하나  극단적으로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에 목표는 뭐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냐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어떤 사랑입니까? 그가 우리 죄를 위해서 독생자를 내어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목표는 사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으니 그 사랑의 목적은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죄 속에서 죄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요 죄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시키는 하나님의 심판에 무난히 통과되게 만드는  것이요 이것이 칭의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하나님과 한 덩어리 만드는 것 이리하여서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온전한 사람  만드는 것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아서 영생 만드는 것 무궁한 하늘나라에서 살수  있는 하늘나라의 시민을 만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향방이 이것이 무궁세계에서 무궁세계에 가도 무궁세계에 가도  영원무궁토록 죄와 점점 멀어져서 점점 멀어지고 죄와 십리 먼 것이 백 리 멀고  천리 멀고 만리 멀고 의에 가까운 것이 백 리 가까운 것이 십리 가깝고 일리  가깝고 오리 가깝고 의에 도달하도록 하나님과 하나된 것이 무궁세계에서 점점  하나되어 우리가 하늘나라 가면 하나님과 그렇게 하나된 가까운 게 아니고  완전하신 이분을 향해서 점점 향하여 가까이 찾아가는 것 하나님의 그 모형  하나님의 신격 같은 그 인격성을 그 참 사람이 되어지는 것 하나님 법도대로  살아서 영생하는 것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 진리와 생명 속에 하나님 안에 살 수  있는 것 이것이 사랑의 목표입니다.

 참사랑의 목표는 이겁니다. 이것을 목표로 삼고 단편은 뭐냐 단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법도대로 이 법도대로 사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대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그 방편은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그것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 사랑의 방편으로 사랑 그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에게 대해서 행하는 이것이  사랑하는 것이요. 내가 그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목표는 하나님의 이 여섯 가지  구속 이것은 내가 그에게 입혀서 이 화 되도록 하는 이것이 사랑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이 목표와 방편만 바꾸면 어떤 사랑이라도 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화  됩니다. 물질을 사랑하는 것도 좋습니다. 어짜든지 미움보다 낫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의 방편을 바꾸십시오. 사랑의 목적을 바꿉시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점점 변화가 되어져 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목표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의 목표는 그 사랑의  목표는 어떤 목표를 가진 것이 참 사랑이냐 어떤 목표를 가진 것이 참 사랑이냐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이 참 사랑이냐?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고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데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목표가 이때 말한 이것이라면 참  사랑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목표가 이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하는데도 그 사랑은 안 돼. 변질되어서 사망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원수를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의 목표가 죄에서 해방시켜 죄 없게 하라는 것 의롭게 하라는 것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려는 것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아서 영생을 하게 하려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 요 목표가  사랑입니다. 요 목적이 사랑입니다.

 이 목적이 아니면 다 그것은, 그것은 사랑이나 그것은 독한 사랑인데 해독이  있는 사랑인데 그 자녀를 사랑하되 이 목표를 가진 사랑이 아니면 이 목표를  가진 사랑이 아니면 그 사랑은 멸망시키는 사랑인데 그 사랑이라도 목표를  바꾸면 됩니다. 목표만 바꾸면 그거는 순전히 자녀나 형제간이나 이웃이나  사랑한 것이 한 것 만치 그를 살해시키고 멸망시킨 것이 되어집니다.

 또 자기가 어떤 관계에 사랑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의 그 방편이 하나님의  법도대로가 아니면 그것도 그 사랑은 결국은 살해를 주고야 마는 것입니다. 어떤  그 해독을 가진 사랑이라도 사랑의 방편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방편을 바꾸면  희망이 있습니다. 목표를 바꾸면 방편을 바꾸면 희망이 있습니다. 목표를 바꾸면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망에 속한 인종의 사람이라도 그 사랑은 미움보다 낫지 그 사랑을  가지고 어서 목표와 방편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방편과 목표를 바꾸자 하나님의  사랑도 목표와 방편이 바꾸어지면 살해의 사랑이 되고 살해의 사랑도 목표와  방편을 바꾸게 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바꾸어지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일단 우리에게서 무서운 미움을 우리가 벗어나자 미움을 가지면  참 자기는 그것으로 잊어 버려 버렸고 자기 아닌 옛사람 자기가 완전히 자기의  주체가 돼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움직이는 전체는 사망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제일 무서운 것이 미움입니다. 미워할 수 있는 조건이 있는데 안  밉겠느냐 조건이 없다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에 오늘 그 먼저 비판하고 평가해서 미움부터 먼저 찾아오는 것입니다.

미움부터 먼저 찾고 그 미움을 미워하면 내가 옛사람으로 바꿔지기 때문에  미움의 조건을 찾고 미워하는 그것, 그것을 거기서 넘어가면 사랑의 세계 있기  때문에 이제 사랑에 소속하지만 네게 모르거들랑 비판 못하거든 무조건 미워하는  걸 그 네가 미워하는 것 네 마음에서 뽑아버리고 그것을 억지로 사랑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사랑의 그 방편을 쓸라고 하면 자기가 됩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참 미워할 그것을 사랑하기는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사랑을  미움을 사랑으로 옮기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모릅니다. 논리 해 가지고도 못  옮깁니다. 못 옮기니까 그것이 옮겨지지 안 해도 미움을 내가 사랑을 가지고  사랑의 방편을 가지고 해 보면 그 다음에는 수월하게 바꾸어지고 수월하게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나 단체나 어디든지 그만 미움이 거기 있으면 생명은 없습니다.

미움이 그 속에 있으면 영생은 그 속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회사라도  미움이 거기 있으면 그 회사는 벌써 암이 속에 들어 왔습니다. 어떤 정치가라도  미움이 벌써 그 속에 들었으면 거기 그 실패의 암은 들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미움을 물리치고 사랑에 내가 속하고 사랑을 가지고 사랑에  내가 행동을 할려고 사랑에 속해 가지고 사랑에 방편과 목표를 목표로 바꾸게  되면 그 다음에 쉽게 모든 불완전한 사망 적인 사랑은 생명의 사랑으로 완전히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늘 오후에 계속해서 증거 합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도 계속해서  오후도 참석해 가지고 요 사랑의 해결이 되어야 평강의 세계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닌 해독된 잘못된 사랑을 갖가지로 가지고  가지고 있는 저희들 이것을 내놓기도 버리기도 바뀌기도 심히 어려워 아닌 줄  알면서도 온갖 것을 사랑함으로 자타를 망치는 연약한 우리들을 긍휼히 여겨  주사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을 이미 가진 자로서 이것을 버리고 바꾸면  좋지마는 버리기 어려운 자로 바꾸는 방편이 곧 주의 사랑의 방편과 목적으로 이  둘을 바꿀 때에 용이하게 그것은 바꾸어지게 되고 미움을 사랑으로 바꾼다는  것이 말뿐이지 심히 어려운데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그 방편이 미워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과 목표를 가지고 상대할 때에 잠시 잠깐 후에는  미움이 완전히 사랑으로 바꾸어져 땅위에 모든 미움이 다 사랑으로 바꾸어지고  거짓 사랑이 다 참사랑으로 바꾸어져 사랑 안에 있어 주와 동거할 수 있는 이  비결을 가리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굳게 잡고 실천함으로 경험과 체험에서  깨달아 구원을 이루게 가게 해 주십시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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