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마음


선지자선교회 1983년 7월 10일 주후

 

본문 : 딤후4:1-8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 편지는 로마 옥중에서 기록한 편지인데 곧 바울이 순교당할 직전에 기록한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4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바울은 항상 모든 사람에게 빚진 그  눌림에서 살았습니다. 오전에도 읽어본 대로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여기  바울이 자기가 주님이 복음을 위해서 이렇게 고난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나 또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고난받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다 정신  없는 말이라.

 주님 앞에 큰 희생의 사랑을 받아 참 우리를 영원한 정죄에서 해방시키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에 그 공로는 얼마나 힘이든 것을 아무도 인간으로서는  영원히 모릅니다. 하늘나라 가도 얼마나 그 힘드심은 하늘나라 가도 우리가  모릅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도들은 알았는가? 모릅니다. 그저, 그저 짐작만  하지. 그 사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 공로의 어떠한 큰 고난이  있었다는 것은 알 대로 실상대로 알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고난인데 그런 고난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 구원을 보수하기 위해서 오는 어려움이나 또 주님의 구원을 다른  이에게 전하기 위해서 오는 그 어려움, 그 어떤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그  어려움을 자랑하거나 어려움 그것을 할 일들 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  정신 없는 소리라 하는 것입니다.

 참 큰, 주님이 희생을 하셔 가지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는데 이 구원을 받은  저희들이 이렇게 힘들여 이루어 놓은 구원을 우리가 간직하려고 함으로 뭐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그 어려움을 이렇게 힘들여 주신 이 구원을 보수하느라고  어려움을 닥칠 때 내가 이 구원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봤다, 이 구원을  전하느라고 이런 어려움을 봤다 하는 그 어려움이 자기 마음에 어려움이라 또 큰  일이라 할 일을 했다 이렇게 느껴지는 것은 다 그는 정신 없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말을 하니까 그 사람들만  사도요 참 하나님 일꾼으로 알고 미혹을 받아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지  안하기 때문에 부득이 내가 정신 없는 소리를 할 수 없어 너거 때문에 한다. 또  다른 데는 내가 미친 소리를 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부득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 형제들이 전연히 이 사도 바울은 아무 그런  어려움도 당하지 안하고 희생 없이 복음을 전한다고 이렇게 해서 바울 자기가 뭐  냉대를 받거나 푸대접 받거나 그런 것은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도 마땅하고  그래야 만족이 되는 그 바울이 자기를 대우하지 않는 데 대해서 섭섭한 그런  것은 전혀 아니고,  다만 주님이 이렇게 피흘려 구속하신 이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에 이 복음이 그  거짓 일꾼들이 와 가지고 자꾸 거짓 자랑을 하고 이래 함으로써 바울은 아무것도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바울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도 상관 없지마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다 헛되게 되기 때문에 부득이 내가 이런 말을 한다. 주님을 볼  때는 이런 말 하는 것이 이게 도무지 두렵고 부끄러워서 참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는 미친 말이지 마는 부득이 이 복음을 위해서 너거들에게 이 말을 한다  그렇게 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바울이 수고한 것은  그것은 어떻게 뭐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수고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이지.

 수고한 그 일면을 말한다면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다가 유태인 들에게 그  송사를 만나 가지고 꼭 그 지방에서는 죽이려고 해서 마지막에 로마에 가서  복음이나 전하고 죽어야 되겠다 하고 '가이사에게 내가 할 말이 있다' 하는 그것  때문에 로마로 끌려가게 됐습니다.

 가다가 그 지중해에서 풍랑이 일어 가지고 열나흘 동안을 풍랑이 심해서 배에  있는 짐 다 물에 헐어던지고, 또 배안에 있는 쇠로 만든 기계들도 다 해체해서  가볍도록 하기 위해서 전부 다 밖에다 던져 버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저 기진맥진해서 뭐 있어봤자 먹지도 못하고 그저 목숨만 붙어 있었지 아무도  그 정신없이 있는 그런 때에도 바울은 다 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고통을  느꼈지마는 자기는 거기서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그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이렇게 하고 하나님  앞에 구원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이러니까 열나흘째 되는 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바울아, 네가 이 풍랑  만난 이 무리를 위해서 이렇게 네가 고심하고 죽을 것도 생각지 안하고 그런  고난 가운데서 뭐 심하게 그러니까 속에 것은 다 나왔을 것이고 그저 다 목숨만  붙어 있지 정신 없는 그런 때에 자기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죽음의 그 힘을 다 기울여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다문 얼마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봉사하고 이렇게 한 것을 하나님께서 감동받아서, 바울의 한 일에  하나님이 감동받으셔서 천사를 보내시면서 하는 말씀이 '바울아 안심을 해라.

내가 이 배 안에 있는 사람을 다 네게 주겠다. 이제는 다 네게 준다. 배 안에  있는 사람은 네가 죽으면서 남아 있는 죽음의 힘 그걸 가지고 네 형제들을  위해서 전부를 기울여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그것으로써 이백일흔여섯 사 이  사람들은 다 오늘 내가 네게 준다. 네게 준다.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과연 천사가 와서 말하는 대로 그때 한 사람도 죽지  안하고 멜리데 섬에 가서 걸려 가지고 거게서 그 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독자가 됐던 것입니다. 다 신자가 됐습니다.

 그러면 그는 그것을 보아서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했다' 하는 이 말을 그가  어떻게 힘써 일했으며 어떻게 고난과 어려움 중에 일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뭐 풍랑 일어 그러니까 다 같은 사람이니다. 그러니까 그때야  그저 자기도 생명이나 붙어 있으면 어떻게 하면 지금 물에 안 빠져 죽을까  그것이나 생각하지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감동받을 만치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쓴 걸 보아서 그가 일생 동안 이 복음에 얼마나 충성하고 수고한 것을  우리가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우리 한국에서는 뭐 그렇게 쌓아도 기독교는  그렇게 박해가 없는 셈입니다. 안 믿는 정치가들도 그 정권 잡으려고 하면  옥생활을 몇 차례나 하는데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난 다음에 터먹터먹이  개별적으로 당한 어려움은 있었지마는 전체적으로 말하면 왜정 말년에 감옥에  들어간 그런 일밖에 없습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서 한 육 년 고생했고, 또  어떤 분들은 외국으로 망명을 해 가지고 몇 해 유리 생활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몇 차례 일본 그 형사들에게 고문과 고형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는 뭐 우리 남한에서는 그런 참 기독교 전성기라 박해라 하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국기 배례 때문에 이학인 목사님 아들이 국기 배례를  반대하다가 매를 맞고 그 어찌 어찌 해 가지고서 죽습니다. 순교가 되는지는  모르지마는 죽었고. 주일학교 학생들이 국기 배례를 안 하려고 한 보름씩 짚동에  숨어서 굶고 학교를 다니고 학교에서 가정에서 박해를 당하고 피를 흘린 그런  일들이 얼마 있었습니다.

 그 외에 6·25때에 참 하나님의 종들이 위협은 받아서, 오늘 죽인다 내일  죽인다 하는 그런 위협은 받아서 심적 고통은 느꼈지마는 별로 그들에게 뭐  고문이나 고형이나 그런 일은 이남에서는 당한 일이 없 었습니다. 순교는 당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제 밑에 따라다니던 변판원 선생이라고 주일학교 선생인데 땀내기라 하는  잿만당이 있습니다. 인민군들이 와 가지고서 예수님 믿는다고 잡아 가지고 가  가지고 나무에다가 열십자로 팔을 꾀서 이래 놓고 묶어 놓고 성경을 앞에 들고  '네가 이 성구를 믿느냐?' '믿노라.' 그러면 또 칼로 한번 쿡 쑤시고 그래  가지고 또 성경 찢고, 온 성경을 가지고 믿느냐 믿느냐 해도 다 그래 찔려  가지고도 내가 믿노라 이렇게 말을 하니까 나중에는 '이놈 속에 뭐이 들어서  이러느냐?' 하면서 그 칼로 가지고서 뱃구멍 밑을 도려서 뒤에 척추까지 도려  가지고 이만치 구멍이 뚫혔습니다. 척추도 끊기고 이래 가지고서 그래서 거게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제 그것을 그때에 안 믿는 사람이 하나 같이 잡혀 가 가지고서, 그 사람들  짐을 지고 갔는데 그 사람은 죽지 안하고 살아 왔는데 그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  증거를 해서 갖다가 장례를 지냈습니다.

 또 하나는 주일을 그들이 주일날 일을 시키는 것을 주일날 내무서에 가둬 놓고  '오늘 네가 이 각목 이것을 각재 이것을 하나 지고 가자.' '오늘은 주일이기  때문에 못 지고 가겠습니다. 내일 내가 져다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네가 꼭 못 지고 가면 죽어도 못 지고 가겠느냐?' '그래 오늘은 주일이라서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되기 때문에 못 지고 갑니다.' 그래 가지고 끌려갔습니다.

끌려가서 저 산골에 가서 죽였는데 어데 가서 죽었는지 몰랐습니다. 어데 가  죽였는지 몰랐는데 그 뒤에 얼마 후에 소문이 들려와서 가니까 읏이 있어서 표가  나고, 옷을 그 조사님 옷이라서 표가 나고 벌써 살은 다 썩어서 녹아버리고 뼈만  있는 것을 그래 주남선 목사님과 모두 거창읍교회로 그때 교회 장으로 장례를  했습니다.

 순교자 서이 났는데 하나는 배추달 선생이라고 주일학교 반사입니다. 반사인데,  그들이 잡아다 놓고 주일날 도야지를 한 마리 짊어지고 가자 하는데 '주일이기  때문에 못 지고 갑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네가 개를 이거 한 마리' 백성들  개를 잡아 가지고 저거가 해 먹으려고 가지고 가면서 '이 개를 좀 끌고 가자.'  또 '주일이라서 못 끌고 갑니다.' '그러면 네가 이 마당을 한번 쓸어라. 마당을  한번 요 마당을 쓸면 살려 주마.' '당신들이 도야지 지고 가자 하다가 또 개를  끌고 가자 하다가 마당을 쓸라 하는 것이니까 이것도 역연 거게서 연결된 것이니  주일을 범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집에서 평소에  주일날 소제를 합니다. 마당을 씁니다.마는 자기네들이 주일을 범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요 내나 이것이 그것이 연결돼 나온 것이기 때문에 주일을  범하게 되는 그런 소제를 하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끌고 갔습니다.

 끌고 가 가지고, 총을 한방 놓으면서 '이래도 네가 못 하겠느냐?' '녜, 주일은  범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저를 놔 놓으면 내가 열두 시만 지나면 내가  깨끗하케 소제를 해 놓겠습니다.' 또 한방 놓으면서 '그래도 지금도 네가 쓸지  못하겠느냐?' 그때 벌써 팔은 양쪽 팔이 다 끊겨졌는데. 넘어갔다가 또  일어서면서 '주일 범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 마지막에는 총으로 놔  가지고서 총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다 성도들 깨달은 성도들은 주일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주일을  지키려고 함으로 순교당한 사람들의 숫자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거 주일이라 하는 것이 영 아주 그만 다 흐려져 버려서 마귀가, 산업 전도하는  그런 데서는 '아무 날이라도 주일로 하루 정해 가지고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  되지 하필 일요일이라 하는 그날을 주일로 지킬 게 뭐 있겠느냐?' 이렇게 말해  가지고 저거 마음대로 주일을 바꿔 가지고도 만들어 지키고 또 뭐 주일에 온갖  자유 다 합니다.

 제가 고신에 있을 때에도 ○○○목사님이 구제품을 차에다 싣고 가난한 그때  모두 우리 백성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서 싣고 오다가 중간에 그만 차가 고장이  나 가지고 못 떠나서 그걸 고쳐 가지고 오다 보니까 주일날 새벽에  도달했습니다. 새벽에 거창 도착하니까 열두시가 지나고 난 다음에 도착해서  주일을 범했다 해 가지고서 그때 노회적으로 치리를 해서 치리를 받았습니다. 다  모두 그렇게 엄격하게 주일을 지켜 나왔습니다. 나왔는데 요새는 뭐 주일  지킨다는 것이 너무도 다 타락하고 속화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옥에 한번 갔다가 왔으면 거게 대한 대우는 얼마나 합니다. 대우도  하고 존경도 받고 참 많이 울궈먹습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때문에  들어갔다가 나온 분들 뭐 교인들에게 어떻게 영광을 받고 존대를 많이  받았습니다. 또 6. 25 때에 그런 어려움을 당한 분 들도 참 많은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주님은 생각지 안하고 영광받을 계획만 가지고  자기 높일 연구만 하고 이러다가 옥중에 나온 성도들 가운데에 타락한 사람들  많습니다. 예수를 안 믿지는 안하지마는 옥에 들어갈 그때의 신앙을 그대로 지켜  계속한 사람들이 많지를 못합니다. 다 마지막에는 참 노망을 했다 할 만치 모두  다 변질이 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옥에 갇히기를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요거 또  딴 겁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주야를  신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이거 참 복음을  전하면서 강의 위험, 또 여행의 위험, 강도의 위험 이런 위험을 뭐 지금도  당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복음 전하려고 하면 참 별별 일이 다  있습니다.

 '동족의 위험' 이것도 다 여러분들이 여기 지금은 요새는 기독교 전성 시기라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박해를 당하는 분들은 당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다리를 톱으로 켜다가 중단한 그 사람을 봤습니다. 제가 개명교회 있을 때에  어떤 집사 한 분은 예배당에 가지 말라 간다고 해 가지고 그 남편이 묶어놓고  톱으로 그 다리를 켜서 얼마 좀 끊겼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당에 간다고 못 가도록 모가지를 홀랭이로 끌어 가지고서  땅가시 밭에 자기는 군인 구두 군화 신고 끌고 가니까 막 질질 끌려 그래서 그래  가지고 피를 흘리고 그래도 신앙을 배반치 안하고 그러니까 그 믿음의 효력으로  그 남편이 믿습니다. 그 아들도 믿고. 아마 그 남편이 여게 와서 지금 있으련지  모르겠습니다. 이 듣는지.

 또 어떤 분은 교회 못 가도록 그 남편이 항복받으려고 꺼꾸로 달아놓고 불로  지지는데 이웃 사람이 냄새가 나서 가 보니까 고요히 그저 입울 다물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고 있는데 벌써 지져서 몸의 거의 누릇누릇하게 다 그래 탔는데 그래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신앙을 배반하지 안하고 그 남편 위해서 기도하고  그래서 그 자녀들이 다 믿습니다. 그 남편온 지금 믿는지 내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그 자녀를 봤는데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창 있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남편이 믿는다고 그저 하도 박해를 해 쌓고 이래서 맞기도  수없이 맞았고, 예수 믿는 것 내놓으라고. 그래 뭐 살림은 어떻게 그러니까  알뜰히 살아야 핍박 안 오겠다 싶어서 아이 둘 남편 자기 네 식구에 머슴 하나  데렸는데 머슴하고 남편하고는 방 안에 밥을 해 주고 아이 둘 데리고 자기  어머니는 부엌에 앉아서 죽을 써 가지고 이래 먹으면서 '우리가 교회 목사님을  보려고 하면 교역자를 보려고 하면 연보해야 되는데 빤한 살림살이에 쌀을 내고  이러면, 돈이 없는데 그걸 내 가지고 연보를 하면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양식이 그대로 지내가는데 우리만 모자라면 예배당에 퍼다 줬다고 그럴 터이니까  또 싸우고 뚜드려 맞고 그러니까 그게 낫겠나 우리가 죽을 먹고 모르게 방에 안  들어가고 부엌에서 먹는 것은 남편이 알면 죽 먹고 죽 먹은 쌀 그것 다 남군 쌀  어쨌노 이래 할 터이니까 '모르게 부엌에서 죽을 먹고 그래' 이러니까 '그게  좋다'고서 이래 하면서 그래 가지고서 연보를 해서 교회 교역자를 보고 참 시골  교회는 보면 그렇게 충성된 교인들이 있습니다. 뭐 나중에 가면 시골에 참  면류관 쓸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번은 저게 산기도 가서 금식기도 하고, 그때 모두 한 이십 명이  가도하러 갔는데 모두 금식기도를 일주간 동안 하니까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어떤 사람이 괭이 몽챙이를 가지고 와 가지고서 제가 인도자라며 뚜드립디다.

뚜드렸는데 그만 그때 그만 여게가 터져 가지고 원청 피가 많이 나오니까 그  사람이 그만 잘못했다고 그러며 도망을 가기 때문에 나는 괜찮으니까 염려  말라고.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이 마지막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제가 위천 가 있을  때에 '장례식은 꼭 백 조사님을 청해서 내 장례식 해 달라.' 해서 제가 그때  가서 장례식을 했습니다.

 그렇게 박해 가운데에 그러면서 예수 믿어 가지고 참 그 아들은 전성수 목사로  이제 세상 떴고 작은아들은 지금 또 목사로 시무를 하고 있습니다.

 가조에도, 그거 내 이름은 잘 모르는데 그 부인이 예수 믿는다고 남편이 그래  쌓아 가지고서 맞아서 이 갈빗뼈가 둘이 뿔라졌습니다. 그래도 그거 상관치  안하고 그 남편 회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 하고 이러므로써 다 그 당대에  기독 가정이 되고 또 어떤 데는 그 이세에 가 가지고서 다 기독 가정이 그렇게  됩니다.

 여기 박인순 선생이라고 거게 집회하러 왔다가 그 남편이 예수 믿는다고  뚜드리고 칼로 가지고 이런 칼로 가지고 자꾸 이래 거석하는 걸 보고, 이제  죽거든 자기 버선을 신겨 보내라고 이렇게 하면서 왔는데. 그분도 그래 가지고  그 남편도 믿고 자녀도 다 믿고 그랬습니다.

 모두 다 보면 참 예수 믿을 때에 신앙을 지키려 하면 그런 어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정 집사라고 저 위천 있는 그분은 자기 남편이 예수 믿지 안하고  박해를 하니까 그 조그만한 대밭이 있는데 대밭에 가 가지고서 가마니를  깔아놓고 얼마나 울며서 기도를 했든지 그 가마니가 다 썩고, 그래 가지고 그  자녀들이 어머니 그 기도를 생각하고서 그뒤에 다 독실한 신앙가들이 됐습니다.

그 남편은 마지막에 죽을 때에 회개를 하고.

 우리는 지금 참 너무 평안한 예수를 믿습니다.

 '세 번은 파선 하는 데에서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배도 없는데 바다  가운데 파선돼 버리고 나니까 바다 물 가운데서 거에서 일주야썩 세 번을 거기서  이래도 낙망하지 안하고 낙심하지 안하고 후퇴하지 안하고 그래도 또 하고 또  하고 열심히 열심히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번 뭐 위험도 있고 이방인의 위험 또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 또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굶으며 헐벗고 추웠노라' 이렇게 고난을 당해도 이 고난이 주님의 이  복음을 전하는 데에 전함으로 인한 고난, 또 주님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도 내 사랑을 알았거든 내가 너를 구원하는 것같이 너도 형제를 구원하는 이런  사랑을 가지라' 이렇게 부탁하신 이 말씀을 인해서, 우리가 잠깐 읽으니까  그렇지 뭐 감옥에, 감옥에 몇 번이나 매도 수없이 맞고 바다의 위험 강의 위험  수없이 당하고 이래도 그것이 자기 마음에 내가 이렇게 했다 하는 그게 없고  부득이 다른 사람들이,  요 밑에 보면, 저거만 일꾼이지 사도 바울은 가짜 일꾼이라 해 가자고 바울이  참 복음을 전했는데 이단자들이 바울의 복음 전하는 것을 복음이 참된 복음이  아니라고 이래 가지고 미혹시키기 때문에 그들이 수고한 것을 자랑하면서  거짓부리로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이 말을 하면서 내가 미친 말 한다. 내가 정신  없는 말 한다. 왜? 이렇게 이런 어려움을 당해도 자기를 구원하신 주님의 이  고난을 생각할 때에 그런 어려움이라는 것이 자기 생각에 어려움이라고 느껴지지  안하고 항상 부족한 것밖에 없었습니다. 항상 부족한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눌림이  있으니 마음에 눌림이 있으니, 이렇게 여러가지 고난을 어려 움을 당해도 고난과  어려움 그런 것은 기억도 안 나고 생각도 안 나고 마음에 눌리는 게 있으니,  이렇게 큰 고난으로 주님이 나를 십자가에서 구속하셔서 참 영원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나에게 '내가 너를 구원하는 이 사랑과 같이 너도 형제를  구원하라' 하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에 내가 암만 낮아져도 그분이 나 위해  낮아진 것만치 낮아지지 못했고, 내가 암만 가난해도 그분이 나 위해서 가난해진  것만치 가난해지지를 못했고, 내가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주님이 나 위해서  고난당하신 것과 같이 당하지 못해 자기 고난 당한 것은 참 얼마 안 되고 주님의  고난 당하심이 크기 때문에 그 큰 걸 볼 때에 자기의 고난이 보여지지를 안하고  오히려 마음에 눌리는 것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그래도 그저 어짜든지 '내가 너를 사랑한 것같이 네가 네 형제를 사랑하라'  사랑하라 말은 구속하라 말입니다. 거게서 죄에서 해방시키라, 하나님 앞에  연결을 시켜라, 하나님과 화친을 시키라 하는,  주님이 이렇게 사랑의 고난으로 구원하신 주님이 자기에게 부탁하신 그 부탁을  생각하므로 여러가지 어려움 있는 것은 자기에게 기억이 안 되고 주님이  부탁하신 이 교회를 지금 내가 어떻게 하나? 이 교회에 대해서 내가 아직까지,  하고도 또 못한 것 같고, 희생을 하고도 또 안 한 것 같고, 주님 앞에 대할 때에  마음에 자꾸만 마음이 눌리기만 하고, 그저 오만것 다 희생해서 줘도 자기에게  준 것으로 여겨지지 안하고 늘 부족한 것 아직까지 주님 위해서 하지 못한  그것만 생각되어진 것이 이것이 바울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 하는 그 눌리는 마음으로 가지고서 늘 살았습니다.

 우리도 바울이나 꼭 같은 그런 참 다 같은 사랑의 구속을 입은 우리들인데  우리들은 그저 조그만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만 마음에 비관을 가지고, 또  낙망을 가지고, 또 너무 지나치게 수고했다, 지나치게 희생했다, 그런 생각을  우리가 가진다는 것은 이는 참 가질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영감이 없기 때문에, 영감이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미련하고  둔하고 어두워서 깨달음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다.

 여기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옥에서 지금 인제, 고문과  고형을 하다가 하다가 마지막에 너는 아무래도 너는 죽여야 되지 달리는 하는  수가 없다 하고서 사형을 딱 정해 놓고 이제 사형 하기로 딱 언도를 했으니까  불과 그저, 뭐 여유 시간이 혹 몇 시간 있는지 며칠 있는지 몰라도, 혹 며칠  있는지 몇 시간이 있는지 모르지마는 그럴 때에 거게서도, 그러니까 뭐 잘못하면  죽음이나 생각하지 죽음이나 생각하지 언제 뭐 그런 것 생각할 여가가  있겠습니까?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거게서 마지막으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는 말이 이 말입니다.

 '하나님 앞과' 디모데후서 4장 1절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주님의 나타나실 그것과 주님의 영원한 나라를 두고서 내가  너한테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교인들을 인도하고 전도해서 기를 때에 네가  속단하게 그만 좀 섭섭하고 좀 아무런 듣지 안하고 망령되고 패역하다고 네가  그렇게 속단하지 말아라. 길이 길이 참아라. 오래 참아라. 죽음 앞에서 한  말입니다. 지금 사형 언도를 받아 가지고 지금 그중에서 하는 말이오.

 '오래 참음과 갸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면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리워져서' 마음의 귀가 가리워져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 말은 이 교훈이 말이요,  이 세상에서 학교에서 모두 배운, 전부 배우는 것이 사욕, 하나님이야 어찌  됐든지 저만 아는 사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말은 다 그겁니다. 하나님이야  어찌 됐든지 저 좋을 것, 저 생각하는 것, 저 위하는 것, 제 욕심, 제 유리한  것, 배우는 것 전체가 그것뿐입니다.

 그런 것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러니까 아무 근거 없는 얘기, 아무 실속 없는 얘기, 아무 결실 없는 얘기 암만  떠들어봤자 노아 홍수 때에 흥수 오니까 그거 무슨 소용 있습니까? 다 멸해져  버렸지.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재림하시면 다 없는 다 허무한 헛된 얘기라  말이오. 그런 것만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할 터이라.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낙망하지 말고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모든 일에 조심해서, 삼가 조심하고  삼가 조심 해서 '고난을 받으며'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네 복음의 직책을 다하라.

 '관제와 같이' 제주, 관제는 제주 말합니다. 제주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제주를 제단 위에 붓는 것처럼 이제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요 몇 시간이나 있는지 며칠이나 있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아주  가까운 벌써 곧 이제 형틀에 사형을 받을 그 앞에서 한 말입니다.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로운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 내게만 아니라 모든 바라는  성도들에게 주실 것이니라'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바울은 자기가 주님이 주신 이 세 가지 구속을 세상에게 뺏기지  안하고 이 구속을 보수하기 위해서 이 구속을 지키기 뮈해서 오는 그 모든 고난  또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는 고난 그 참 말하기 어려운 수없는 그런  고난이지마는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심으로 당하신 그 고난을 생각하고 깨닫고  느끼는 그 느낌과 주님이 부탁하신 그 부탁을 자기가 느끼는 그 느낌에서 자기의  온갖 고난과 애로의 그런 것이 자기에게 나타나서 자기를 오만하게 하지를  못했고,  자기를 자랑하게 못 했고, 그게 보여서 안심하게 못 했고, 그런 게 있어도  주님의 대속하신 그 십자가의 공로를 설정하는 대애 그 어려움, 그 어려움, 또  이렇게 어려움으로 구원하신 주님이 부탁하신 부탁을, 요 두 가지를 자기가  느끼고 느껴서 자기가 죽는 데 이르는 그런 고난도, 사형 선고를 받아 놓고,  받아 놓고도 그 사형 선고가 보이지 안할 만치 그렇게 주님의 사랑의 이 고난을  자기가 깨닫고 느끼고 그 부탁하신 부탁을 깨닫고 느끼는 그 느낌에서 모든,  복음을 인해서 자기가 복음으로 살려 할 때에 앞에 뭐 태산이 가리워도 막지를  못했고, 태산에게 막히지 안했고, 바다에도 막히지 안 했고, 모든 대적하는 어떤  그 박해에도 막히지 안하고, 어데든지 막히지 안하고 이 복음을 전하게 된 것,  복옴울 전함으로 인에서 온갖 자기에게 닥쳐온 모든 자기가 받은 애로, 또 이  구원을 보수하기 위해서 닥친 그 모든 어려움, 그 모든 어려움이 자기 마음에  나타나지 않고 또 자기의 이 주의 사랑에 빚져서 이 전하는 주의 부탁하신 그  말씀에 자기의 그 느낌에서 그런 것이 생각나지도 안하고 그것으로 자기가 그만,  깨달음으로 인해서 오만한 자리에도 앉혀지지 안하고, 만족도 안 되고, 또  이만하면 됐다고 자기의 가는 걸음이 중단도 안 됐고, 그는 오만 하지도 안했고  피곤하지도 안했고 낙망하지도 안했고 만족하지도 안 했고 항상 빚진 자  갈급으로 마지막 순교 때까지 지낸 이 영감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  영감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영감을 주님이 주셔서 우리도 꼭 사도 바울 같은 그런 실상을 우리가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어둡고 영감이 우리에게 빈약해 그렇지  성신의 감화가 우리에게 오면 그 감화를 받는 사람마다 주를 위해서 다, 있는  충성 다하고도 마지막에 죽을 때에 만족하지 안했고 베드로도 자기를 꺼꾸로  못을 박아 달라고서 원하고 주를 위해서 하고도 하고 또 못한 것 같고, 바치고도  또 못 바친 것 같고 이렇게 언제든지 갈급하고 갈급하고 빚지고 빚지고 눌리고  눌리고 이래 사는 이것이 영감받은 성도의 마음인데 우리는 그런 요소가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배반했던지 우리가 성신의 감화를 소멸하고 그저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수백 번 성신의 감화가 와야 멸시해 버리고 멸시해  버리고 이래 놓으니까 우리 마음이 화인맞은 것같이 강퍅해져서 도무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감각이 없고, 우리에게 부탁하신  인간 구원에 대한 이 부탁에 대한 감각이 우리에게 참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래도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하루 몇 시간이라고 바치고  어려움을 그래도 겪고 하는 그런 사람은 조그매씩이라도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다소라도 느끼고 또 주님이 맡기신 이 부탁에 대해서도 느껴질 것인 것입니다.

 오후에 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이 구원을 보수하기 위해서 이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이 구원의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이 세상에서  드러내서 우리가 증거해 기념하기 위해서, 나타 내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오는 참 바울과 같은 이런, 이런 어 려움을 우리가 겪지 않고는 마음에 안심이  안 되고 만족이 안 되고 이런 어려움을 겪고도 그 겪은 것이 우리 마음이  느껴지지를 안하고 그저 항상 주를 위한 충성 못한 데에 배고프고, 충성을 못  해서 충성에 배가 고파서 '어째 좀 더 충성할까?' 하는 충성에 기근이 들고,  충성에 갈증이 들고 이 사명을 감당치 뭇한 데 대해서 갈증이 들고 갈급이 드는  이런 사람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 마땅한데 우리에게는 이런 영감이 너무  빈약합니다.

 이러니까 우리 각자들이 어떻게 하든지 기도해서 우리의 이 참 아주 낡아서  이렇게 완패해지고 아주 굳은살같이 이렇게 된 우리의 이 신앙의 마음도 아주  새살과 같이 예민해서 주님의 고난과 주님의 맡긴 사명과 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심에 대해서 우리가 실감하는 그 느낌과 깨달음에 좀 예민한 우리 마음이  돼야 되겠으니까 이런 마음을 달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너희들이 오늘이라 하는 이 때를 만나거든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마음을'  스스로 제가 자꾸 마음을 자꾸 완패케 함으로 '내가 새벽 기도 가면 내가 변해질  거다. 자꾸 성경만 많이 읽으면 내가 미쳐저 예수 미치괭이 될 거다.' 이래  가지고 부러 자꾸 성경을 멀리 하고 감화를 안 받으려고 하고 기도를 안 할라  해서 자기 마음이 강퍅해지지 안하면 이 악한 세상에서 악을 부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서 자기 마음을 역부러 이스라엘 모양으로 마음을 완패케 하는 이런  일을 우리가 자꾸 일삼아 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언제 우리가 떠날지 모르니까 '너희 마음을 완패케하지 말라. 과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후에 믿지 안함으로 다 광야에서 죽어 멸해지지  안했느냐? 너희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면 너희들의 생애가, 너희들의 생애가 사십  년을 살든지 오십 년을 살든지 모태서부터 믿은 사람은 칠십 년이나 팔십 년을  이 세상에 세상 생활 한다고 해도 너희들의 심신의 그 기능은 완전히 다 이  광야에서 썩어져 버리고 만다. 이 광야 위해서, 광야 같은 이 세상 위해서 살아  세상에서 다 썩어지고 말지 그것이 하나도 옮겨지지 안하고 다 이스라엘과 같이  망해지리라.' 이 말씀하신 대로 오늘은 우리가 너무 마음이 강퍅합니다.

 참 예수님의 구속을 생각하고 홀려지는 멈추지 못하는 눈물도 우리에게서 마른  지가 오래 됐고, 또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그 부탁에 대해서 언젠가 주님  앞에 곧 설 터인데 그 일을 너무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고 등한히 한 거게  대해서도 아무런 감각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도 바울, 바울이 바울 되는데 우리는 바울 안 될 게 뭐 있습니까?  우리도 중생됐고 성령과 진리와 주님의 피공로가 우리에게 보증이 됐고 만물이  다 우리 이 구속을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도 하면 됩니다.

 이러니까 첫째로 우리 마음을 강퍅하게 말고 우리 마음을 바울과 마음 같은  그런 예민한 마음 되도록 우리가 기도해서, 안 되면 단식이라도, 산에 가서라도,  뭐 안 되면 사업 그게 좀 절단나도 그거 못해도, 오늘이라도 떠나면 그것 다  끝나는 것 아닙니까? 우리 마음은 아무래도 좀 우리를 좀 마음을 새살같이  예민한 마음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예민한 마음을 만들어야지 우리 마음은  너무 강퍅하고 너무 완패합니다.

 뭐 주님이야 하거나 말거나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이러는 이것은 당신이  못 보십니까? 못 듣습니까? 당신이 길이 길이 참아서 한 사람도 멸망에 이르지  안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기다리시는, 이것읕 알아야 되지 그만 아무래도 장 아무  일 없고 그러니까 '주님이 뭐 알겠나? 주님에게 무슨 감각이 있으랴? 무슨  지공이나 심판이 있으랴? 징계가 있으랴?' 우리는 그렇게까지 지금 속화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그가 이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죽음은 생각지 안하고 죽음은 생각지  안하고 죽는 그 직전에도 교회를 위해서 권면하고 부탁하고 또 앞으로 이런  위험성이 있으니까, 으례히 그리 될 터이니까 '네가 너는 낙망하지 말아라.

세상이 말세가 되면 진리를 듣지 안하고 자기 소원대로 하는 그말만 잘 듣고  자기의 욕심대로 하게 하는 그런 말을 책에서도 보고, 라디오에서 보고, 양사방  전부 그말뿐이다. 세상이 이리 된다. 그러나 너는 낙심하지 말고 너는 게으로지  말고 복음으로 더불어 고난 받으며 주의 일을 하면 네 의무를 네가 잘  감당하도록 그렇게 해라.' 이렇게, 그 죽음 앞에서 죽음이 보이지 아니하고  그렇게 남은 두고 가는 교인들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그것이 어데 나왔느냐?  그는 죽음을 보지 안하고 이걸 봤습니다. 1절에 '하나님 앞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이러니까 나타나실 주님과 주님의 나라, 주님의 심판, 모든 것을 행한  대로 공평되게 심판할, 주님과 주님의 심판과 주님의 심판 거쳐서 무궁한 나라,  이 모든 것을 공변되게 심판하실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 무궁에 공변된 보응을  받을 이 두 가지,  이 두 가지를 보는 이것만이 그 마음 가운데 가득 찼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내가 이거 안 죽으려는 그런 생각 그런 것은 만에 하나도 없었고, 그저 '내가  죽으면 뭐 죽는 이거 다 됐지. 죽는 것 죽은 것만 해도 내가 큰 희생 아니냐?'  그렇게 생각지 안했고 죽음 앞에서 마지막 최후의 한 시간까지라도 그분의 심판  앞에 설 때에 심판에 걸리지 안하도록 아무 거리낌이 없이 심판 앞에 걸리지  안하도록, 그 심판을 통해서 무궁세계에 나아갈 때에 모든 존재들에게 부끄럽지  안하도록  무궁세계를 바라보는 그것과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봄으로써 그 심판과 무궁을  향하여 마음이 거게 둬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죽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안하고 어짜든지 이 죽음에 어떻게 하면 흠과 점이 없이 바로 죽겠느냐 하는  거기에만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는 참 생각할 걸 생각했고, 바라볼 걸 바라봤고 욕심낼 걸 욕심냈고,  겁낼 걸 겁냈고, 주의할 걸 주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허무합니다. 우리  고요히 눈 감고 집에 돌아가면 명상해 보십시오.

 '내가 참 생각할 절 생각했나? 내가 가치로 여길 걸 가치로 여겼나?' 내가  가치로 여기는 그 가치가 다 썩은 게 아니냐? 다 헛된 게 아니냐? 내가 생각한  것이 다 헛된 게 아니냐? 내가 이런 저런 경쟁할 경쟁이 경쟁할 만한, 경쟁할  안한 가치가 있느냐?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진땀을 흘리면서 노고를  기울인 그것이 노고를 기울여서 취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너무도  우리는 다 죽은 것 헛된 일만 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아무래도 새사람 됩시다. 아무래도 우리는 새사람 돼야 됩니다. 뒤로  미루지 말고 빨리 새사람이 돼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새생각 가져야  되겠고, 우리의 마음도,우리의 가치관도, 이 세상 사람의 가치관은 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그런 다 죽음에 속한 가치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 가치만이 참된 가치입니다.

 성경이 우리 할 일을 말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그 일이 우리 할 일이오. 성경이  말하는 그 사모가 우리가 사모할 것이오. 성경이 두려워하라는 그거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오. 염려도 성경이 말하는 그 염려 우리 염려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그리스도를 벗어버리고 세상에 속해 가지고 꼭 세상 사람과 같이  지금 모든 지정의, 희로애락, 모든 그 사고 방식이 다 세상적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아무래도 돌아서야 되고 아무래도 일어서야 됩니다.

 이것을 돌이켜서 바로 잡으면 뭐 조만간에, 바로 잡고 가면 우리는 이 세대가  어찌 되든지 뭐 남침이 어찌 되든지 뭣이 어찌 되든지 그것은 그런 건 우리에게  침노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이 침노할 그것을 우리가 가진다고 하면 그까짓 거야 위험 천만  아닙니까? 오든지 말든지 불로 사르든지, 원자로 사르든지 말든지, 뭐 나를 불로  굽든지 지지든지 아무런 해도 상관 없는 이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털끝만치도  손해 없이,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유익되고 영광되지 손해가지 안하는 이런 반석  같은 든든한 길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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