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기능부활

 

1988. 5. 25. 수밤

 

본문 : 요한복음 5장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제 8 공과입니다.

 이제 공과 작성을 좀 달리 하기로 부장들과 의논을 했습니다. 너무 공과를  반사들을 알리기 위해서 좀 어렵게 세밀히 깊게 이래 하니까 반사들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 안하고 또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데는 좀 어렵고 이래서 좀 어린  학생들에게 알맞도록 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과가 아주 앞으로는 짜르게  됩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5장 29절  제목은, 부활  요절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5장 29절 입니다.

 서론에,  사람은 누구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 부활이 있습니다.

 본론에,  첫째, 부활은 사람이 죽었다가 예수님 재림하시면 누구나 다 살아납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 합니다.  둘째, 부활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부활,  하나는, 성도의 부활,  하나는, 불신자의 부활입니다.

 셋째,  예수님 부활은 우리를 대신하신 부활이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받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받습니다.

 문답에,  첫째, 사람은 죽음이 끝이뇨? 답에, 부활이 있습니다.

 둘째, 부활이 몇 가지뇨? 답에, 세 가지입니다.

 셋째, 부활 후는 어찌 되느? 답에, 생명 부활은 영생하고 심판 부활은 영원히  사망합니다.

 넷째, 선한 행위가 무엇이뇨? 답에, 하나님 중심의 행위입니다. 아주 간단한  공과입니다.

 요새는 기독교와 모든 사이비한 이종교들 이 모든 교훈이 혼합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인간들이 따다가 저거가  만들어 놓은 그 종교마다 꼭 같은 말을 씁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은 어리석게  여기에 속아 가지고 종교는 다 같다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는 그 일을 하지 안해 그렇지만은 꼭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들이 성경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다가 저거  교주가 말한 것처럼 또 저거가 섬긴다는 그 신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사람들을 꾀웁니다.

 유교에서도 말하기를 사람은 생부지 사부지라, 나는 것도 어떻게 나는지 모르고  죽는 것도 어떻게 죽는지 모른다 하는 것이 유교의 전사상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유교도 또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그 총 중에 불교는 그 철학인데 자기네들이 자꾸 연구하고 사색해 가지고서  만들어 놓은 철학인데 블교에서도 부활이라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들이 부활은  없고 또 그들은 말도 모르고 들어도 알지도 못하는데 요새는 하도 교회에서  부활이라는 말이 많이 있고 부활 주일이니 이라니까 부활이라는 말을 고들이  끌어다 씁니다.

 불교에서는 환생이라 하는 말 있습니다. 죽으면 다시 그것이 태어난다 이래서  좋은 일 한 사람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또 나쁜 일 한 사람은 배암으로도  태어나고 개로도 태어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개에게 나쁜 일 한 사람은 뒤에 죽어  가지고 개로 태어나고 또 소에게 나쁜 일 한 사람은 소로 태어나고 배암으로도  태어나고 이렇게 태어난다. 좋은 일 한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난다. 이래  가지고서 환생이라, 다시 돌아와서 살아난다. 그것은 석가모니가 그 물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가 짐승의 육체도 되고 개의 육체도 됩니다. 왜? 사람의 육체를  흙을 얼마 하고 사람의 시체하고 하나 한테 섞어 가지고서 그러면 썩으면 그게  거름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채소도 됩니다. 그러면 풀도 됩니다. 그 풀을  소가 먹으면 소 몸뚱이가 됩니다. 그풀을 또 사람이 먹으면 사람 몸이 됩니다.

 이래서, 사람이라는 것은 죽으면 그것이 다시 살아난다 하는 그말은 내나  물질이 돼 가지고서 물질이 이렇게 다 변화함을 받아서 된다 하는 그런 뜻을 그  사람이 깨달았지 사람이 죽어서 그 사람의 인격이나 모든 영육이 부활한다 하는  그런 것은 근방에 가지도 못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윤회주의를 말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짐승됐다가 짐승이 또  풀 됐다가 풀이 사람됐다가 이렇게 자꾸 빙빙 돌아가면서모든 것이 이루어져  간다 그런 말 했지 부활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불교에도 부활 없고 다른  이종교도 아무데 부활이 없는데 기독교에만 부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활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켜서 부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다시 부(復)자 살아날 활(活)자, 다시 살아난다.

 그러면, 부활은 몇 가지 종류가 있는고? 부활은 성경에 보면 세가지 부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부활이 있습니디, 이 부활은 우리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죄값으로 영원히 죽어 있는 것을 거기에서 해방시켰고  사망에서 해방시켰고 마귀에게서 해방은 시켜 놨지마는 이것이 다시 살아  가지고서 행동하고 영생으로 이래 살수는 없습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서  해방은 받았지마는 다시 살아 가지고 이렇게 활동하고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우리 죽음을 대신했고 우리 행할 것을 대신 행하셨고 우리가  서로 원수된 것을 대신 화친해 가지고 상죄, 칭의, 화친으로 사망과 죄와  마귀에게서 해방은 시켜 놨었지마는 우리들을 다시 살아가지고서 영생을  누리도록 이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서는 안 됐습니다.

 이래서, 예수님 이 다시 우리를 해방시켜서 거기에서 다시 살아 가지고 영생을  하면서 이 영생에 행복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다시 우리 대신 사는  이 일을 하지 안 하면 살아나는, 죽은 것이 살아나는 길이 열리지를 안합니다.

죽은 것이 살아나는 길이 열리지를 않습니다.

 다시 살아난다면 이는 완전인데 인생이 살아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이 피조물로 당신이 대신  살아나야 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그 길이 열리고 문이 열리기 때문에 우리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시기 위해서 주님이 하나님이 다시 사람으로 이렇게 살아나지  안 하면 안 됐습니다.

 당신이 우리 대신 대형도 하고 대행도 하고 대화친의 대속을 베푸셨다 할지라도  이 베푸신 이것만큼은 죽음 해결을 짓고 죄 해결을 짓고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해결만 지웠지 영생으로 살아 가지고서 영생을 누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서 대신한 것은 죄를 대신했고 사망을 대신했고 마귀에게서  대신 이 값을 내서 마귀에게 지배를 받고 시달림을 받아가지고 그래 가지고서  해결을 짓고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해결지워가지고서. 그렇게 이제 죽음에서는  끌어냈지마는 새생명으로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 대속으로 끝냈다고 하면우리는  죄에서 해방은 되어 있고 마귀에게서 해방되어 있고 사망에서 해방되어 있고  하나님과 화친된 자가 되어 있지마는 죽은 자로 되어져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나지는 못합니다.

 죽은 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죽은 자를 살리는 데에는 당신이 다시 피조물로  살아나야 되기 때문에 당신이 다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우리 위해서 큰 사랑의 희생을 베푸신 것이고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도 우리를 위해서 사랑의 큰 희생을 베푸신것 입니다.

 진리를 똑똑히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것은 우리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참 그는 고난을 당하셨다고서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지마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다행이고 참  좋겠다 이렇게만 생각하지 부활이 예수님에게 고통이라는 것은 깨닫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이나 또 인간으로 다시 살아나심이나 희생은  꼭 같은 중량의 희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으심도 우리 위해서 큰 고난당하신 것이고 또 부활하신 것은  우리 위해서 영원히 고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부활 중에 세 가지 부활이  있는데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하는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있고, 이 부활은 우리를 영원히 영생으로 살아서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영생으로 하늘나라와 또 우주에 충만한 그 영광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으로 다사  살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람으로 살아나시는 이 일을 안 하셨으면 우리는  부활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부활하는 데에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다시 부활하는 이 큰 희생의 댓가를  냄으로 우리가 부활하게 됐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부활을 못 합니다. 부활도  못하고 중생도 못하고 새생명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성도의 부활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부활하는 부활.

 그러면 이 부활은, 제일 먼저는 예수님이 우리 대속하기 위해서 부활하셨고  그다음에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부활하신 부활로 길을 열고 이  부활하심으로서 당신이 큰, 하나님이 인간으로 부활하심으로서 이 큰 희생의  제물이 됨을 인해서 우리들이 중생과 부활의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부활 하나는 성도의 부활인데 성도 부활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천년이 지난  뒤에 이 불신자들의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은 성경에 세 가지 종류의 부활을 마련했으니 하나는 예수님의  대속의 부활이요, 하나는 성도들의 부활이요, 하나는 불신자의 부활로 이렇게 세  가지 종류의 부활이 있습니다.

 이 부활은 언제 되느냐? 이것은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그때에 성도의  부활이 됩니다.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부활할 때에는 그때에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믿고 세상 떠난 그 사람들이 먼저 부활합니다.

 먼저 부활하고, 그러면 지금 오늘 만일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면 우리보다  일찌거니, 아담 해와로부터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이구원을 바라보던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래 자는 성인들이 먼저 일어나고, 부활하고. 그  다음에 우리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이 부활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활하는 것은 죽어 가지고서 뭐 오래 동안 있다가 부활하는 게  아니고 즉시 죽어 가지고서 즉시 부활하기 때문에 그 부활을 홀연히 변화한다  이래 했어. 홀연히 변화한다 그거는 그만 언제 죽어 가지고 있는 여가도 없이  죽었다가서 즉시 살아납니다.

 이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땅 위에는 환난이 있습니다. 땅 위에는 환난이  있어서 칠 년 대환난 그 전쟁이 있고 그 전쟁이 있는데에 공중에는 주님이  재림하셔 가지고서 자던 성인들이 다 일어나서 공중으로 끌려 올려갑니다.

 그러면, 그때 예수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부활해 가지고서 공증에 가서  주님을 영접하고 그 땅에는 불신자들이 있고 또 믿는 신자들이 있는데 이  신자들이 그때에 불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예수를 못 믿구로 하는 이 박해를 당할  때에 그때에 신앙을 배반치 안한 사람들은 다 목베임을 당해 죽는다 이랬습니다.

그때 그만 다 순교를 합니다.

 그래 인제 죽으면, 처음에는 두려워하지마는 보니까 먼저 죽은 사람이 죽고  나서 즉시 부활해 가지고서 공중으로 올라가고 부활해 공중으로 올라가고 하니까  이제 모든 사람들이 나도 죽어서 이제 공중에서 주님 영접하겠다 하고서 담대히  그때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믿는 걸 증거해서 만 전부 다 순교자입니다. 전부 다  순교를 해서 그만 이래 봤고 하기 때문에 빠른 그 기간에 죽고 부활하는 그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홀연히 변화함을 받는다 그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죽어야  부활하지 죽지 안하고는 부활하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홀연히 변화한다는 이 말을 가지고서 마귀들이 유혹을시켜서  ‘예수 잘 믿으면 안 죽고 이제 천국 가는 길이 있다’ 해가지고서 사람들을  유혹시키니까 죽 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안 죽고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 하니까  안 죽고 가는 그 길을 택할라고서 그 이단으로 돌아갑니다.

 이래서, 여호와의 증인도 안 죽고 천국 간다는 것이요, 또 OOO씨가 천년성을  만들어 놓고 말한 것은 이 천년성에만 들어오면 다 안 죽고 이제 그대로  하늘나라로 간다 이렇게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돌려갔지마는 거기에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많이 죽어 버렸습니다.

 죽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거 그거 공연한 말이고 속이는 말이고거  짓말이로구나 그래 가지고서 천년성에는 지금 사람이 별로이 없습니다. 아주  그거 이제 일생을 가서 바쳐서 그만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람들만  거기에서 근근히 연명해 살고 있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우리 믿는 신자들의 부활은 신자들의 부활은 두 가지 부활이,  신자들만 부활하는데 신자들 부활이 어떤 종류로 부활되느냐? 선을, 선한 행실을  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을 받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받으리라  요렇게 말씀했습니다.

 29절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러면 부활할 때에 그때에, 믿는 사람은 다같은 게 아니라  믿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에게 생명의 부활 받은 것이 얼마 있고 심판의 부활  받은 것이 얼마 있으니 그때 그 부활하는 것은어떤 것이 부활을 합니까? 영이  부활합니까 육이 부활합니까? 육이 부활합니다. 육이 부활합니다.

 육이 부활하는 것은 우리의 심신이 부활하는 것인데 심신이 전체가 이렇게  부활하는 것은 단번에 부활을 하지마는 우리의 그 심신의 기능 부활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래서,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선한 일을 행했으면 생명 부활 받고 또 악한  일을 행했으면 심판 부활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심판받을 때에 그때에 믿는  사람도 보면 선한 일을 하나도 안 했으면 그 사람은 심판의 부활만 받습니다. 또  그 사람이 선한 일을 백인데 백의 구십 구는 선한 일을 하고 백의 일을 선한  일을 못 하고 악한 일을 했다고 하면 그 사람의 백의 구십 구는 생명 부활 받고  백의 일은 심판 부활 받습니다.

 심판 부활 받는다 말은 하나님의 심판 받아 가지고 영원한 유황불 구렁텅이에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받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시고, 생명의 부활받는 것은 그  부활받아 가지고서 영원히 죽지 안하고 영생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있습니다.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러면 우리가 다 부활은 받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어떤 부활을 받느냐? 그 사람들은 전부 심판의 부활뿐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전부 심판의 부활뿐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들은 어찌 되느냐?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두가지 부활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만일 반은 선한 일을 행했고 반은 악한 일을 행했으면 반은 생명  부활 받아서 영생으로 들어가고 반은 심판 부활받아서 부활해가지고 심판받아  가지고서 무궁한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의 택한 자들의 그 악한 행동 해 가지고 심판 부활받아서  영원한 유황불 구렁텅이로 가는 것은 그것은 택한 자의 그사람의 그 영이  갑니까, 영과 육이 영육이 갑니까 심신의 악한 행위를 한 심신의 기능만 갑니까?  어떤 걸 간다고서 여러분들이 배웠습니까?  택해서 중생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악한 일을 행했으면 그 사람은 악한 일  행한 것이 얼마가 됐든지 그것은 심판의 부활을 받아 가지고 심판받아 가지고  영원히 지옥을 가게 됩니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은 한 부활만 받습니다. 한 부활. 심판의 부활만 안 믿는  사람들은 받습니다. 또 택해서 믿는 사람들은 어떤 부활을 받는가? 그 사람은  생명의 부활도 받고 심판의 부활도 받고 두 가지 받는 사람, 또 생명의 부활만  받고 심판의 부활은 안 받는 사람, 또 중생된 사람으로서 전부 안 믿는 사람과  같이 심판의 부활만 받고 생명의 부활은 받지 못하는 사람 이것으로서 인생은  끝이 마쳐지는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공과에서는 학생들에게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는 부활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됩니다. 부활이 있는것을 단단히  가르쳐.

 이 부활이라 하는 것이 믿는 사람에게는 하도 말을 많이 하고 이러니까 예사로  여기는데 이 부활이라는 것이 다른 이종교나 다른 뭐 철학에나 아무데도  부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없는데 기독교에서 이  부활을 이걸 말한 그 부활을 그들이 말만따다 써 가지고서 다 그들이 저거  것이라 하고서 사람들을 유혹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면을 우리가 힘을  써야 되겠는가? 우리는 이세상에서 뭐 이래 살든지 저래 살든지 한 번 죽기는  죽습니다. 혹 안 죽고 승천하는 일이 없는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안 죽고는  승천하지를 못합니다.

 왜? 안 죽고는 왜 승천하지는 못하느냐? 왜 못한다고 말을 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안 죽고는 승천하지 못하는 것은 승천하면 거기에는 천  년 만 년도 아니고 영원토록 사는 것이 하늘나라인데 하늘나라에는 혈육, 피와  고기덩어리 이 혈육은 하늘나라를 가지를 못합니다.

왜 못 가느냐? 이 혈육이라는 것은 썩을 것이기 때문에 썩지 아니하는 세계를  가지를 못합니다. 또 썩을 것은 썩지 안하는 세계에 가 가지고서 있을수가  없습니다. 썩어 버리니까.

 이래서, 혈과 육은 하늘나라 가지 못한다. 이러기 때문에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안할 것을 입어야 되겠고 또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습니다. 그것  때문에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을 입기 위해서 우리가 죽는 것이고 또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기 위해서 우리가 죽는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마치, 이 무슨, 보자기가 물 속에 들어갈라 하면 보자기 옷을  입어야 물 속에 들어가고 또 육지에 나을라면 또 육지의 옷을 입어야 육지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는 이 썩을 혈육을 입고 있지마는 영광의 그  영생하는 나라에는 혈육 이거 가지고는 제한이 돼 가지고서 안 됩니다.

 이거야 뭐 좀 구멍이 작아도 못 들어가고 이런 이거 가지고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한 신령한 몸으로우리가 변화받아  가지고서 그렇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보면 자꾸 그저, 여깃 끝에 말하기를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받는다 이렇게  말씀해 놓으니까 이 선한 일 악한 일에 대해서 해석하는 것이 세상 도덕가들이  해석하는 거와 같습니다.

 불교에서도, 불교에서는 선한 일이라는 건 선한 일 하면 다른 사람밥이나 주고  옷이나 주고 또 아픈 데 치료나 해 주고 봉사나 해 주고 이런 것을 그 선한  일이라고 이러니까 그들은 이 성경을 보고 성경에도 보라 선한 일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명의 부활 받고 악한 일 하는 사람들은 심판 부활을 받는다고 하지  안했느냐 이래 가지고 그 사람들은 적선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 자꾸  선을 쌓아야 된다 이라는데 이 선을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아주 판이합니다.

 이 모든 이종교에서 말하는 선악, 또 유교에서 말하는 선악, 철학가들이 말하는  선악, 이 모든 정치가들이 말하는 선악,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선악, 커단한  종교 뭐 회회교나 또 천주교나 불교나 이런 데서 말하는 그 선악은 다 그들은  공통으로 같습니다.

 그라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경이 말하는 선악은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악은 무엇을 가리켜서 선이라고 했는가? 선은 창조주 하나님곧 우리를  대속하신 주 하나님, 주님이시요 하나님이신 하나님 중심하는것을 선이라고  말씀했고 악은 하나님 중심 아닌 것을 전부 악이라고 말했습니다. 피조물 중심은  전부 악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족 중심 했으면 그거는 뭐입니까? 일행 동안 가족중심 했으면 그  가정에는 아주 선한 호주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악한, 성경이 말하면  악한 호주입니다.

 또, 그 사람이 자기 민족을 위해서 민족 중심으로 했으면 그 사람은  애민족자라고 아주 선한 사람이라고 말하겠으나 성경은 아주 악한사람으로  정죄합니다.

그 사람이 국가를 위하든지 전인류를 위해서 선한 일을 했쓰면 그 사람은 아주  선한 사람이라고 모두 다 평가하지마는 성경은 그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정죄를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선이 뭐이며 악이 뭐이라는 이것을 바로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래서, 우리 진영에서도 이 선악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 대개 지성인들  지식층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망령을 부립니다.

 성경에 악하다 선하다 하는 것을 이 하나님 중심 피조물 중심 이두 가지로  해석을 하고서 모든 성구를 해석하면 성구가 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안하면  다 헛일입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안하며’ 하면 악인의 계획을  따라가지 안한다 말인데 그 악을 도덕적 악으로 이 세상이 말하는 악이라면  공산주의에서는 악이라고 하는 것을 민주주의에서는 선이라고 말합니다. 또  민주주의에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산주의에서는 선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다 자신들 중심이기 때문에 뭐 공산주의가 아무리 선이라고 인정해도  하나님이 인정 안 하면 아무 소용없고 민주주의가 인류가 다 선이라고 인정해도  하나님이 인정 안 하면 소용없어.

 이러기 때문에, 완전자이신 자존자이신 주권자이신 이분 중심이라야, 완전  중심이라야, 완전을 중심한 거, 유일하신 하나님을 중심한 거 이것이 선이요  하나님 중심 아닌 것은 피조물 중심이라면 제 중심이든지 인류 중심이든지 국가  중심이든지 민족 중심이든지 뭐 과학 중심이든지 무슨 중심이라도 그거는 전부  하나님께 대해서 악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애쓸 것은 무엇을 우리가 애쓰느냐 하면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것은 뭐이라고 생각합니까? 살고 있는 이것은  죽을 것이라고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살고 있는 것은 죽을 것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세상에 사람들 가운데에 자기는 죽을 것이지마는 죽을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은  천에 하나가 없습니다. 전부 살 것으로 알고 살 준비만합니다.

 살 준비만 하는 것이 그것이 인생인데 성경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오늘 끝날란지 내일 끝날란지 모른다. 혹.

준비를 잘못해서 곤란스러워도 곤란스러운 것이 오늘 끝날란지 내일 끝날란지  모른다.

 또, 네가 만일 지금부터 한 오륙십 년 한 칠팔십 년 산다 하자.’ 네가 모든  고난 당해 봤자 칠팔십 년 고난 당하고 잘 살아봤자 칠팔십 년 잘살지마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다음에 부활해가지고는 영원 무궁토록 잘  사느냐 못 사느냐, 고난스러우냐 평안하냐. 존영하냐 천해지느냐 하는, 인생은  이 세상살이는 하루밤과 같고 다음 부활해 가지고는 영원 무궁하다.

 잘못 걸리면 영원 무궁토록 유황불 구렁텅이의 사망의 고난을 당해야 되고 바로  잘 걸리면 영원 무궁토록 생명 부활로서 생명과 평강의 존영을 누리게 되는  것이니까,  이 세상에서 하루밤 나그네와 같은 이 짧은 세상에 좋은 것을 보고 ‘오늘  끝날지 내일 끝날지 모르는 하루밤과 같은 이것도 좋은 것이 이렇게 좋거든  거기에서 영원 무궁토록 좋은 것은 얼마나 좋겠느냐?’ 또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에는 ‘이 짤막한 고난 이것도 고난스럽거든 하물며 영원 무궁한 고난은  얼마나 고난스럽겠느냐?’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보아 영원 무궁한 좋은 것을 연상해서 생각해야 되고 이  세상에 짧은 불행스러운 것을 보아서 영원 무궁의 불행스러운 것을 깨달아서,  깨달아 가지고 사람들이 사는 것은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죽는다’ ‘또  죽은 가운데서 나는 부활한다’ ‘부활하면 하나님의 심판 받아 가지고서  심판에서 잘 걸리면 말할 수 없는 영원 무궁토록 영광스러운거고 잘못 걸리면  영원 무궁토록 불행스러워진다’  그러면, 심판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 세상에서 심판은 두 가지로 심판합니다.

네가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영원한 멸망을 너는 쥐야 되겠느냐 영원한 영광을  줘야 되겠느냐 하는 그거 멸망이라면 그 멸망이 되겠고 행복을 받는다면 그거  구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구원과 멸망을 받는데 구원과 멸망을 판결 지울 때에 뭘 가지고서  판결을 지우는가? 구원과 멸망을 판결을 지울 때에 무엇을가지고 판결을  지웁니까? 이걸 알아야 됩니다.

 뭐 잘 가봤자 여기 결혼도 시키면 한 벌써 처녀가 스물 다섯 살만 넘어 가면  자꾸 수지 계산을 따지고 비판하고 평가해서 참 중매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거  그렇기는 그렇지. 만일 결혼 잘못하면 그래 결혼하고도 한 사십 년 살아야  되니까. 사십 년 살아야 되니 사십 년 동안을 잘못 걸리면 사십 년 동안  고생하고 잘 걸리면 사십 년 동안 잘 살수 있는데 여자 팔자는 버드나푸 팔자라  그말이오.

 시골 가면, ‘여자 팔자는 버드나무 팔자라’ 버드나무 팔자라 말은 버드나무는  저 시골에 가면 냇물에 버드나무가 수해가 지면 떠내려습니다. 버드나무 가지가  떠내려 오다가 어째 바위에 걸렸는데 잘 걸리면 옥토에 걸려 놓으면 그만 몇 해  안 가서 이렇게 속히 커서 이래 아름드리가 됩니다. 잘못 걸려 가지고서 돌밭에  돌 때에 걸려 놓으면 몇 해가 돼도 항상 요맨 해 가지고 더 크지도 안하고 물에  썰려 고생만 실컷 하고 죽지도 안하고 그래 가지고 있습니다. 그거 그러기  때문에 이 따지는 것이 지혜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한 사십 년도 잘못 걸리면 안 되겠다 해서 따질 줄 알면서 부활을  믿어서 부활 후에 영원이 있는 영생이 있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 그 사람이 참  믿는다고 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하루밤 나그네같은 이것을 여기에다가 다  주력해 서 기울이고 부활 영생하는 영원에 대해서 기울이지 안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말하기를 ‘목사님- 우리 진영에 있던.목사님인데-목사님  자꾸 행함을 강조하면 그만 믿음이 무효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합디다.

우리 총공회 위원들이 같이 앉았는데’ 자꾸 행함을 많이 강조하다 보면 믿음이  무효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데.’ 기가 차는  소리를 했어.

 봐라. 행함이 무슨 소용이 있나마는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믿느냐 하는 것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맏는다고 말은 해도 행동은  만일 부활을 믿는다 하면은, 부활을 믿는다 하면 부활이 있으니까,  토, 죽음이 있으니까 죽음을 믿는다면 부활을 믿는다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까 뒤로 미루지 안하고 그날 그날의 자기. 할 일을 다 간추려서  정리하고 그날 밤에 자리에 눕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쭉 뻐들트려 놓고 그럴  리가 없는 것이고,  또, 부활이 있다고 하면 부활에 잘못되면 영원한 멸망을 받는데 부활이  절단나는 그 일을 일시에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해 가지고서 할 리가 없다. 그  행동을 보면 부활을 믿는지 안 믿는지 행동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이 믿음이라는 것은 믿어서 행동이  나타날 수 있도록 그렇게 실상의 믿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실상이  없는 믿음은 다 거짓 것이요 홀로 있어 죽은 믿음이요 그거는 다 거짓 믿음이라  말씀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그 행함이 구원이 되는 게 아니고 행할 수 있기까지에믿는  믿음이 없으면 그 믿음은 아무 구원을 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믿는지 안 믿는지 자기가 자기를 잘 판단해 봐야되겠습니다. 판단해서  첫째 판단하기를 ‘그라면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것만 인정하나 내가 오늘 죽을지  오늘 밤에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른다. 내 생명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햇는데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으니라 너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이랬는데 성경이 말한 대로 내  생명은 오늘뿐이지 내일 어찌 될란지 그것을 모른다고 성경이 말했는데 이것을  믿느냐?’ 자기가 자기를 자문 자답 해 가지고서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우리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언제 죽을란지 모른다 하는 그것을  성경에 말했는데 과연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이것으로서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까 나는 이제 살아 있을 때는 이런거 저런 거 다 필요하지만  죽으면 그만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오’.

 이러니까, 나는 죽음을 성경에 말한 이 죽음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이 죽음을  인정하고 사나 입술로는 말하지마는, 입술로는 죽는다고 ‘한번 죽기야 죽지’  말하지마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죽는다는건 생각지 안하고 내가 사나?  죽는다는 걸 생각하고 사느냐? 이것을 자기가 자문 자답해서 물어봐야 될  것입니다. 이거 하나도 안 묻고 그냥 삽니다.

 자, 오늘도 여러분들이 산다는 것만 생각하고 살 준비만 오늘 종일했지, 살기  때문에 이것도 해야 되고 살기 때문에 저것도 해야 되고 살기 때문에 뭐 이것도  뭐 해결해야 되고 살기 때문에 전부 살기 때문에만 오늘 종일 살았지 죽기  때문에를 생각하면서 산 일이 있느냐? 오늘 죽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어짜노?  죽기 때문에 나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 죽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해야 되겠다, 자기가 죽기 때문에라는 죽는다는 이것을 생각하고 오늘 긴  시간이든지 짜른 시간이든지 죽는다는 걸 생각하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걸  생각하고 오늘 종일 한 시간이고 반 시간이고 단 십 분이라도 산 사람은손 들어  봅시다. 죽는다는 것 생각하고 산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이렇츰 없어? 죽는다는  걸 생각하고 산 사람이 이렇게 없어? 그거 없으면 그라면 어짤라고?  ‘나는 오늘 밤에 죽을지 자다가 죽을지 가다가 차 사고로 죽을지 가다가  심장마비로 죽을지 나는 모른다.’ 오늘 죽는다는 것을 이걸 생각지 못하고 그만  ‘오늘 사니까 이게 있다, 사니까 이거 필요하다, 사니까 이거 해야 되겠다 저거  해야 되겠다.’  그러면, 산다는 것만 생각하고 죽는다는 전 생각지 안하고 살았으면그 사람이  성경에서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네 생명은 언젠지 모른다. 오늘만 네 생명  있을 때만 있지 네 생명이 오늘이라 끝날지도 모른다.’하는 이 성경 말씀을,  우리의 생명은 언제 떠날지 그걸 모른다는 이말씀을 믿는 사람압니까 안 믿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입니까 안믿는 사람입니까? 안 믿는 사람이오.

 안 믿어도 ‘죽는다는 거 나는 알기는 아는데’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믿어야 구원이 되지 믿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살아 있기 때문에’ 하는 그것은, 살아 있기 때문에  산 것에 대해서 준비 못한 것은,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필요한 준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사는 데에 필요한 준비  그 준비는 못해 봤자, 못해 봤자 그다음에 살때 좀 고난스럽게 살지 뭐 별게 뭐  있습니까? 만일 준비 못 했다고할지라도 죽으면 그것으로 뭐 끝나 버리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상관없지 않습니까?  이런데, 이래서, 자기가 살아 있으니 살아 있으니 산 자로서의 산자에게 필요한  준비를 하는 그것은 눈이 어두워서 산 데에서 죽음이라는 그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살이요 이거는 짐승입니다. 짐승이 그래 살지 사람은 이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사람이 수성화가 돼서 그렇지사는 것만 보고 살고, 사는 것만  보고 살았기 때문에 사는 준비하는것은 고거 사는 준비만 하는 것은 짐승이 하는  준비요. 사람이 하는 준비는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으면서 내 사는 것은 오늘 끝날지 모르니까 현재  먹고 입고 마시고 현재 살았으니까 됐고 내 준비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 죽으면 다시는 다시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 죽으면 다시 그거는,  잘못됐으면 잘못된 것으로 죽어서 뭐 심판받아 가지고 죽어 가지고 심판받아  가지고 무궁세계에 갈터이니까 이 죽음에 대해서 잘못 준비한 거는 할 도리가  없어. 삶에 대해서 준비한 거는 못 해 봤자 죽으면 그탄이야. 또 못 했으면 또  내일 살면 내일 살 때 또 그때 준비하면 돼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과 삶이라는 이 둘을 보는 데에는 나는 삶에 대해서  전력을 기울이는가 죽음에 대해 전력을 기울이는가? 삶에 대해서는 그저 임시 살  때 살 것만 우리는 힘을 기울일 것이고 죽음에 대해서는 영원한 그 죽음과  구원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문제애 대해서 우리 마음은 기울랴야 됩니다.

 학교 공부하면서 요새 뭐 열시까지 공부해야 된다든가? 그래 가지고내가 저게  오며 내가 보니 남학생들은 그래도 신체가 좀 튼튼하니까 그렇지마는 여학생들은  그거 아주 약해서 얍실한 것이 이 뭐 책보따리를 짊어졌는데 보니까 어깨가 다  모두, 어깨가 요라다가 안 되니까 막 요래가지고 전부 허리병 다 들었을 거요,  허리병 다 들었어. 실은 처녀들보면 허리병 다 들었습니다. 그거 언제 신문에  나지 안했습니까? 이래가지고 꾸부리니 이 허리병 들었고 어떤 거는 그만 기운이  없으니 이래가지고 그만 이래 처져 가지고 이래 늘어져 가지고 질질 끌며  그래가고,  이것도 자기가 자, 커서 결혼하는 데에 그래도 무식하면 안 돼 토가서 세상에서  뭐 학교 다닐 때는 한 열댓 살 먹으니까 한 칠십까지를 살라 하면 얼마요? 오십  오 년이가? 오십 오 년이면 팔십이지. 오십오 년 동안 사는데 이거 무식하면 안  된다고서 오십 오 년 동안 그것도 확실히 오십 오 년이 살갈지 안 살란지  모르지마는 일반으로 알아서한 오십 년 살터이니까 내가 그것을 준비해야 되지  않느냐 하고서 그렇츰 밤잠 못 자고 아침으로 일찍 하루 밤에 늦게까지 일해도  그거 준비한다고 애를 쓰는데,  자, 그 학생들은 자기가 학교 준비 하면 그래도 한 오십 년 자기로서 복되게 살  수 있고 학교에서 준비 안 하면 한 오십 년 아주 가난하게 천하게 못난 사람으로  살 수 있다 하는 것을 그 학생들이 학교 가느라고 그렇게 전심전력 기울이는 걸  봐서 그 공부하는 거기에서 자기 한 오십년 동안에 그 준비가 되는 것을 확실히  믿는 증거입니까 안 믿는 증거입니까? 믿는 증거입니까 안 믿는 증거입니까?  뭐이요? 믿는 증거입니까 안 믿는 증거입니까? 믿는 증거라.

 그런데, 그깟짓 거야 해 봤자 또 뭐 오십 년 사나? 학교 졸업해 가자 마자 타  죽는 거 빼 버렸는데. 그 재학 중에 죽는 것도 꽉 찼는데. 뭐 행복해 봤자  결혼해 가지고 첫날밤에 그만 다 둘이 다 죽어 버리는것도 꽉 찼는데.

 그것은 그 꼭 그렇다고 할 수가 없고 그저 대충 준비를 해야 한 오십년 잘 살  수 있다 해서 뭐 부모나 저나 전심전력 기울여 준비하는데 우리가 부활해 가지고  심판 후에 영원한 영생이 있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고 하면 그 사람이 그 준비를  안 하겠습니까? 준비를 안 기울이겠습니까?  준비 기울이는 행동 보면 믿는 것이고 준비에 기울이는 행동이 없으면 안 믿는  거라! 이런데 ‘자꾸 행함을 자꾸 주장을 해 쌓으면 믿음이 헛 일입니다’  ‘네가 더 헛일이다!네가. 인간을 죽이는 사탄아!’ 내가, 말은 내가 안 해도  속으로 ‘인간 죽이는 사탄아, 거짓 목자야! 삯군아!’  행동이 없는 믿음이 무슨 믿음입니까? 참말로 믿는다면 어떻게 행동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다 판단찌요. 자세히, 생각해보십시오.

 각자 자신이 살아 있는 이것만 알고,‘나는 살아 있다’ 이거는 확실히 알고  믿고 죽는다는" 거는 믿지 안해. 죽는다는 거는 믿지를 안해요. 또, 죽음을  닥쳤을 때에 죽으면 이 다음에 부활하니까 선한 일을 행하다가 죽으면 생명의  부활 받고 악한 일을 행하다가 죽으면 심판 부활 받는데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서  너 이놈 예수 믿으면 당장 내가이 독침으로 찔러 죽일란다. 그럴 때에 독침 안  맞기 위해서 예수 믿는것을 부인하면 그게 선한 행위입니까 악한 행위입니까?  악한 행위아니요? 그라면 이다음에 심판의 부활 받지 않소?  만일 아노라고 주님을 위해서 나는 주님을 믿노라 하고서 그 사람이, 생명을  애끼지 안하고 독침 앞에서 자기는 예수를 믿는다 하고서 진리를 배반치 안하면  그 사람의 행동은 선한 행위입니까 악한 행위입니까? 그 행위는 무슨 부활  받습니까? 생명의 부활.

 생명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 자라면 죽음 앞에서 진리를 배반치 안합니다.

하나님을 배반치 안 합니다.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배반치 안하는 그 행동이  있는 거라야 믿는 것이지 그 행동 없는 건 믿는 게 아니라.

 이런데, ‘행함을 자꾸 주장하면 믿음이 없어집니다’ 교인들 잘 꼬와먹지. 잘  꼬와 먹어! 못써. ‘공연히, 우리가 뭐 믿음으로 구원 얻지 뭐 행함으로 구원  얻는가? 이런데 자꾸 행함을 자꾸 강조하면 믿음이, 믿음은 어짜고?. 다 누가  인간이 의인이 있습니까? 다 믿음의 의로 구원 얻지.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게  어데 있습니까?’ 행함으로 구원얻는 게 ‘아니고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되지 거짓부리 믿음 말고 행할 수 있는 그 믿음을 가진 참 믿음을 가져야 구원  얻지 참 믿음이 아니면 구원이 안 된다 하는 것을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 죽는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나는 산다 살아 있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또 그다음에 뭐입니까? ‘나는 반드시 부활한다.

부활한다. 부활할 때에 생명의 부활 심판의 부활 둘중에 반드시 부활 한다.’ 또  부활해 가지고 또 뭐 합니까? ‘심판 받는다. 너는 선한 일 했나 악한 일 했나  심판 받는다,’ 심판받고 난 다음에 뭐입니까? 영원 무궁한 유황불 구렁텅이든지  영광의 구원이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몇 가지입니까? 자, 몇 가지요? 한번  손가락으로 혜아려 봐요.

 살아 있다 하나, 죽는다 또 하나, 부활한다 하나, 심판받는다 하나, 또 영원한  보응 받는다 하나, 그라면 영입니까? 다섯 가지. ‘우리는 적어도 현실에 무슨  일을 계획하든지 이 다섯 가지를 똘똘 뭉쳐 가지고서 이놈에도 계산 대 보고  저놈에도 계산 대 보고 이 다섯가지에 종합적으로 계산을 대 가지고서 무슨  행동을 하지 살아 있는 것만 생각해서 일방적으로 계산하는 그런 인간은  짐승이라! 오늘 죽으면 네가 준비한 게 뉘것이 되겠느냐! 성도는 그래 안  삽니다.

 사는 것은, 사는 것은 이것은 내가 살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 살면서 조심 없이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덕이 안 되고 구원을 주지  못하고 죄지을까 해서 조심하는 것이지 뭐 옷 먹을까 굶을까 뭐가 어쩌 될까  거기 대해서 조심하는 그런 인간이 어데 있습니까, 있기를? 그거는 짐승같은  인간이지 거기에 대해서는 관심없어. 거기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어짜든지  사는데 내가 하나님에 거리낄라 사람에게 거리낄라 여기에 조심하는 사람은 먹을  거는 저절로 생깁니다. ‘어째야 내가 안 굶고 먹겠노 !’ 먹는 것만 생각하는  그자는 반드시 먹는 데에 곤고당하고 천한 인간으로 거지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러는 말을 하든지 행동을 하든지 무슨 장사를 하든지 뭐 결혼  생활하든지 가정을 이루든지 뭐 직장을 가지든지 뭐이든지 언제든저 요 다섯  가지는 함께 끼여 가지고 요 다섯 가지를 다 한테다 계산해 가지고 요 다섯  가지를 똘똘 뭉쳐서 계산해 가지고 요 다섯가지가 있으니 요 다섯 가지에 다  유익이 되든지 손해가 되든지 하면은 요 다섯 가지에, 한 가지만 유익이 아니고  요 다섯 가지에 그래도 손해가 적고 요 다섯 가지에 유익이 되는 거 요 다섯  가지를 통틀어 놓고 계산을 해 가지고 고게서 유익된 것이 유익이고 고게 손해  간 게 손해 가는것이지. 일방적으로 살아 있는 데에 고게 손해 가면 뭐 어쩨다  말이요, 그라기를?  사도 바울이 살아 있는데에 순교당하니까 살아 있는 것만 생각하면 형벌 받아  죽으니까 불행이지. 그러나 불행이지마는 이제 그 죽는 것만 보면 불행이지마는  거기다가 부활을 생각해, 심판을 생각해, 영원한 보응을 생각해, 살아 있는 걸  생각해,  살아 있는 것은 못 사니까 손해지. 죽기는 언제 죽을 거라도 죽을 것이지.

이러니까 넷은 수지 계산이 맞아. 하나 계산 맞을라고 안 죽고 살아 있을라고  계산 맞으면 그 네 가지가 다 파훼가 되기 때문에 그 수지 계산 맞춰 보니까  그걸 하는 거라.

 그러기 때문에, 이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 이거는 요 간단하게 지금한 것은  여러분들이 뭐 무슨 말을 주 대든지 학생들에게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이 있다. 죽음이 있다. 죽으면 끝나느냐? 죽고 난 다음에 반드시  부활이 있다. 부활이 있으면 다 같은 부활이냐? 하나는 생명부활 하나는 심판  부활이 있다. 부활 받으면, 그 부활 받아 심판 받으면  어찌 되느냐? 부활해 가지고 심판 받으면 그다음에 영원 무궁한 지옥을 가든지  천국을 가든지 영원한 상급이 되는지 영원한 벌이 되든지 그둘 중에 하나가  된다. 이것을 아이들에게 자꾸 주입을 시켜 줘.

 이래 가지고서 어떤 선생은 강하게 주입해서 그 아이 속에 그만 그 상상부대  기억부대에 팍 들어 가지고 있어 가지고서 이거는 자다가 헛소리를 해도 아이구  죽음 부활 나는 어찌 됐든간에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나는 좋은 부활받도록  나는 준비해야 되겠다 이것이 그 아이에 꿈에 헛소리라도 할 수 있을 만치  강하게 속에 박아 넣으라 말이오.

 제가 믿지 안한 것이 그 속에 뭐이 들어가, 믿지 안하는데! 그 안에 뭐이  들어가, 제가 믿지 않는데. 한 마디라도 거짓말입니까? 세상은 몰라.

 그러기 때문에, 삶을 보고 사는 인간은 언제든지 헛일 한 번은 합니다. 제가  억만 년 살 것입니까? 산 것만 보고 사는 자는 반드시 낭파 한번은 당합니다.

죽을 것을 보고 죽을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은 낭패안 당합니다. 또 죽었다가  부활한다는걸 생각하고 준비한 사람은 더 튼튼합니다. 부활해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받는다 하는 걸 생각하고서 준비한 사람은 더 튼튼합니다. 심판받아 가지고  무궁세계가 있다’ 이거 보고 준비한 사람은 그는 반석이라. 사람이 이렇게 좀  지혜롭게 살아야되지.

 이러니까, 이 요번 공과에서는 학생들에게 요 부활만 가르쳐도 좋습니다.

부활을 가지는데 생명 부활 또 심판 부활, 심판 부활이라면 조사받아 가지고  지금 벌받아 죽는다 그말이오. 심판 부활. 심판은 재판한다 말 아니요? 생명  부활은 뭐 생명 부활이기 때문에 그건 재판받지 안해, 그만. 양민이 무슨 재판을  받습니까? 재판 받는 놈은 잘되면 무죄고 그리 안 하면 정죄받지.

 이러니까, 고라고 난 다음에 생명의 부활은 선한 일 행하는 사람, 악한 일  행하는 사람은 심판의 부활 요거 우리 장년반들이 요거 단단히 기억합시다.

 그러면, 멸망의 부활은 어떻게 산 자가 멸망의 부활 받습니까? 저O집사, O장로  아들 O집사, 악하게 사는 게 뭐인고? 다른 사람 뚜드리고 뭐 이래 물건 뺏들고  그런 거? 뭐라 하노? 악하게 사는 것이? 악하게 사는 것이? 고거 안됐는데, 고게  한 칠십점이나 될까 안됐어. 악하게 사는 것이 뭐인데? OOO, ‘피조물 중심’  하면 넓어서 잘 모르나자기 중심이오.

 자기 중심도 피조물 중심이요 국가 중심도 피조물 중심이요 민족 중심도 피조물  중심이요 인류 중심도 피조물 중심이요 가족 중심도 피조물 중심이요 뭣이든지  하나님 그분이 있기 때문에 그분으로 먹고 마시고 그분의 구속받은 사람들이  그분 중심으로 살지 안한 건 전부 망한 행위 입니다. 알겠습니까? 요게서 판단을  해요. 주님 중심 아닌 것은 전부 악한 행위입니다. 다 심판의 부활받습니다.

 선한 일은 뭐인가? 선한 일은 하나님 중심 하나님 중심이 뭐인가 ‘하나님하고  뭐 몇이 하나입니까? 하나님은 몇이 하나입니까, 손가락으로? 하나님은 몇이  하나입니까? 셋이 하나라. 진리, 성령, 예수님의 대속의 피, 셋이 하나라. 이  셋은 진리 중심이라도 상관없고 피 중심이라도 상관없고 영감 중심이라도  상관없고 하나 되면 서이다 거기들어가 가지고 있어요.

 이러니까, 이 하나님 중심 외에 거는 전부 멸망받습니다. 하나님 중심외에는  ‘나는 민족 중심’ 민족 중심도 멸망입니다. 국가 중심도 멸망입니다. 인류  중심도 멸망입니다. 가정 중심도 멸망입니다. 문화 중심도 멸망입니다. 주님  중심만 하나님이 영생을 줍니다. 그라면 가정은 어찌 되고? 사회는 어찌 되고?  네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면 너 하나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행복되다.

하나님 중심의사람이 하나가 있으면 그 나라가 행복되다. 하나님의 중심의  사람이 하나가 있으면 공산주의가 쳐 못 들어와요.

 엘리사가 엘리야를 보고 ‘이는 참 이스라엘의 마병이요 불병거라’ 이스라엘을  원수가 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은 엘리야 이분이 막고 있었다는 것을 눈을  뜨고 난 다음에 그때 봤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있는 가정은 안 망해. 하나님의 중심이 되어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 그 사회는 안 망해. 네가 예루살렘 거리를 빨리 왕래해 봐라. 진리를  구하고 공의를 찾는 자가 한 사람이 있으면 네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지 안하고  그 사람 하나 때문에 기다리고 있겠다 했어. 이게 뭐입니까? 하나님 중심 사람  아닙니까?

 이러니까, 우리는 어리석게 살지 맙시다. 산 것만 보고 사는 참 일방적이고  너무 치우치고 어리석소. 네가 젊으면 ‘젊으니까 나는 살아야 겠다. 젊은 거는  안 될지나? 건강하면 안 될지나? ‘내야 잔발이가 이거 오글오글하게 이래  있으니까 내가 지금이야 설마 하나님이 불러갈까?’ 오글오글하게 잔발을 그래  놓고도 죽어. 뭣이 안 죽는 조건이안 돼. 언제 죽을지 몰라.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 중심이 아니면 다 멸망입니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 하나심 중심 선한 일을 행하고 있느냐 네가 인간  중심 피조물 중심으로서 악한 일을 하고 있느냐 뭘 하고 있느냐? 네가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하고 살지.

 살아 있는 것도 무시 못 해. 산 것. 또 하나는? 하나는 뭐이요? 큰 소리로 해  봐. 하나는? 죽는 것, 또 하나는? 부활, 또 하나는? (심판) 또 하나는? 영원  무궁의 보웅 이 다섯 가지를 보면서 다섯가지 다 요게 다 넣어 가지고 계산해야  되지,  장사하는 사람이 그 팔면 돈받는 그것만 계산을 대야 되겠소? 그거거기에는 산  값도 있고 또 점빵 세도 있고 점원 또 비용도 있고 또 돈이자도 있고 모든 걸  계산을 다 빠짐없이 다 대 가지고서 남는 게 남는 것이지.

 다른 것 다 계산 댔는데 ‘이렇게 많이 남았다’ 물건 값을 계산 안댔어. 물건  값을 계산 안 대고 많이 계산해 ‘오늘 돈 많이 벌었다’ ‘이 바보야 물건 값을  안 댔으니까 그걸 한번 계산해 봐라’ 해 보니까 밑졌어. 인간이 이 다섯 가지를  생각해서 모든 언행심사를 하고 살아야 되지 이라기 때문에 이 다섯 가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하고 싶은 말 다 못해. 하고 싶은 말을 못 해. 하고 싶은  행동을 못 해.

왜? 이 다섯 가지에, 삶에 안 절릴라고만 생각하면 죽음에 걸리고  심판에 걸리고 부활에 걸리고 영원 무궁세계 보응에 걸리기 때문에 이거저거 다  보니까 꼼짝도 못해. 입이 광주리같이 있지마는 말 못해. 이 말도 못하고 가만히  벙어리같이 있을 수밖에 없어.

 욕을 들어도 욕 들은데 욕 들은 말로 대항을 해서 이래 할라 하고 보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가면 또 걸려.

 그런고로, 오늘밤에는 우리가 고요히 생각해요. 이 다섯. 가지를 보면서 살아야  됩니다. 나 살고 있는 것만 생각지 말고,  나는 살아 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른다. 내게는 죽음이있다. 죽으면  끝나느냐? 아니다. 부활이 있다. 부활해 가지고 뭣할라고?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했든지 행동한 대로 심판받는다, 그러면 심판 받아 가지고 뭐할라고? 영원  무궁토록 유황불 구렁텅이냐 하늘나라냐, 상급이냐 벌이냐 그 영원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거까지를생각해서 계산 대 가지고 사는 것이 오늘 우리의 생활인  것입니다.

 학생들이게 부활이 있다는 것을 똑똑히 가르칩시다. 부활을 모릅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나는 줄 압니다. 부활해 가지고서 심판 받소. 심판하고 난 뒤에  무궁세계에 갑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다 외우고 환하게 외워 가지고서 이제 간단하니까 외워  가지고 학생들에게 강하게 가르치되 자기가 안 믿는거 가르치면 거짓말쟁이라.

안 믿는 거 가르치면 거짓말쟁이라. 자기가 믿어야지.

 부활은 죽어야 부활이지. 죽음을 생각지 안하는 사람은 부활 생각안 해요. 살아  있으면 죽는다는 걸 생각하고 나야 그다음에, 죽는 걸 생각하면 부활이 없으면  기가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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