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떡


선지자선교회 1985년 3월 29일 금새

 

본문 : 요 6:45-51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선지자의 예언에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하였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나  신약에 와 가지고 또,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예약하시고, 미리 약속, 예약하시고 선포하신 그 하나님 그 분이 또, 이  신약 시대에 와 가지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알기에는 옛날 말한 말과  현재에 이루어지는 그 사이에는 많은 세월이 들어 있으니까 그와 이와. 그  행하는 자 말하는 자가 다른 것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쉽고, 또, 인간은 이  범죄로 인해서 시간의 자유를 얻었던 그 범위 내의 시간도 다 빼앗겨서 제한적인  시간을 가지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이 시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과 또,  하루 지나면 또, 달라지고 또, 한 달 지나면 또, 달라집니다. 지나간 일도  과거가 자꾸 세월이 지나갈수록 아주 달라집니다. 그러면 하루 지나간 일. 한 달  지나간 일, 또, 일 년이 지나간 일 대개 느낌이 달라지고 또, 앞으로의 일도,  앞으로의 일도 한 시간 다음 일 그것보다 하루 다음 일은 뭐인지 모르고, 또, 한  달 다음이 될 일, 일 년 다음이 될 일 그렇게 아주 과거에 대해서도 지나간  일이지마는 이것은 기억이 없어 가지고 다 잊어버려서 깜깜하고, 또, 미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깜깜한 과거 미래에 대해서 아주  어두워진 우리들입니다. 그저 현재만 보기 때문에 현재의 웃음이 미래의 울음이  될 것이라도 현재의 웃음만 되면 좋다고 웃고 현재의 근심이 미래의 한없는 그  평강과 영광이 될 일이라도 그만 찔찔 울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모든 면으로 다 구원하시는데 시간에 대해서도 과거도  차차 차차 하나님을 닮아서 좀 넓게 길게 상세하게 정확하게 알고, 또, 미래에  대해서도 그렇게 차차 아는 사람이 되어 시간의 이 제한 받는 그 제한을  초월하는 이런 사람이 되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 사고하는 것이  아주 차차 달라집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전에는 예수님의 대속을 알기 전에는 우리가 언제든지  직견적이고 또, 현감적이고 바로 고 시간 보고 고것만 보고 또, 고것만 느끼고  거게 대해서 우리는 계산을 대 가지고 행동하고 삽니다. 이러기 때문에 말하자면  시간적으로 많이 우리는 좁아져서 갇혔습니다. 시간적으로 감옥에 갇혔고,  완전히 갇혀 있는 자유가 없는 사람들이 된 요것을 악령이 이용해서 우리의 모든  평가나 비판이나 계획이나 희로애락 전부를 다 요 감옥에 가둬 가지고 아주  자유하지 못하는 어두움의 그 비판과 평가를 가지게 해 가지고서 모든 우리의  생활에 대해서 우리가 그렇게 비판하고 평가하고 계획하도록 고렇게 악령이  만듭니다.

 이래서. 참 모든 사람들이 지금 기뻐하고 좋아하고 뛰놀고 있는 그거. 뭐 요새  결혼 상담에 혹 가 보면 모두 다 결혼의 상대자는 제가 평가적으로 제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을 제가 결혼의 상대로 삼으려고 다 할 것인데 그 평가하는 것을  보면 참 기가 막힙니다. 전부 미래적으로 안 됐을 것, 아주 불행스러운 것 그거  뭐 당장 한 십 년만, 한 십 년이 아니라 일 년만 지나도 가슴을 치고 참 죽을  지경이 하나도 자유 없는 그 종이 되고 썩을 것에게 종이 돼 가지고서 자유하지  못하는 그것은 좋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평가하기 때문에 뭐 그 총각도 처녀도 막  뒤로 우쭐합니다. 배가 이만한데 뭐 내야 뭐 상당히 얼마든지 고자세로 해도  된다 이라고 있고, 참 그것은 갈수록 영광이요 존귀요 그 사람이 형언할 수 없는  그런 존귀한 그 가치를 가진 사람은 삐쭉거리고 미치괭이 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오늘 사람들입니다.

 권찰님들도 중매하는 걸 보면은 그래 하는데 그것을 제가 말하기를 '우리  권찰님도 전부 다 눈이 어두워서 전부 눈이 다 육적이라. 뭐 육체적이고 전부 이  하는 것이 세상적이고 마귀의 감옥 속에 들어가 가지고서 이렇다.' 이라면  그래도 또, 인제 그 소리는 듣기가 싫어서, 권찰님들 뭐 권사님들 다  그렇습니다. 장로님들은 더 그렇고, '그 상대 당사자들이 안 할라 하니까 부득이  거기 따라서 그렇게 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을 하지마는 본인이  평가하기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주 유식하고 부자 있고 권세 있고 똑똑한 그 남자를 다 원하고 있는데, 그  남자한테 시집 가 놓으면 새벽 기도 못 나오지 오일 예배도 못 나오지 신앙에  자유 없지 심방 전도 하나도 못 하지 이거는 감옥에 갇혀 가지고서 꼼짝없이  말이지, 하나님도 아닌데 하나님도 아닌데 그 가짜 하나님 그 남편을 하나님으로  삼아 가지고서 꼼짝 못하고 거기 동하고 정하고 돼지니까 이제 그 남편의 수족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 남편의 수족이 되는데, 그 남편이 또, 하나님의 수족이  됐으면 좋습니다. 그게 인제 정상적인 가정입니다. 남편은 하나님의 수족, 또,  아내는 남편의 수족 이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움직일 때에 남편도 이래  움직이고 아내도 이래 움직이니까 전부 하나님에게 피동된 전체가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고 하나님을 떼내 버리고 제가 하나님이라고 제가 주권자,  제가 독권자, 제가 왕, 제가 제 중심, 제 위주, 내 위주가 아니면 아내는, 내  위주가 아니면 아내는 용납지 안한다. 내 중심이 아니면 용납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가짜배기 하나님 그걸 하나님으로 모시고 내나 돈을 하나님 하지  안했습니까? 두 주인인데 하나는 재물이라고 하지 안 했습니까? 이 모양으로,  이러니까, 이거는 참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거는 사형을 받는 것이며 이것은  완전히 사망에게 붙들려 매여서 참 불행 중에 그런 불행이 없는데 그런 행복  중에 행복이 없다고 평가하는 것이 마귀들에게 눈이 감겨져서 이 마귀의 이  미혹의 감옥 속에 든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저희의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그 좀 영광이라는 거는 전부  부끄러움 그것만 총총 가지게 해서 영광이라고 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무슨  옳은 생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너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 시간 그  제한이라는 아주 제한. 부자유, 자유가 없는 제한 뽈끈 묶인 속박, 속박을  당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나 비판하는 것이나 욕망하는 것이나 그런  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후서 3장에는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 보라'  고말은 주님의 재림때까지 네가 눈을 똑 뜨고서 재림 때까지 이렇게 멀리 봐라.

또, 네 죽음까지 멀리 봐라. 보고서 그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거게다가 네가 소망을 둬라. 계산을 거게까지 다 포함을 해 가지고서 계산을  대라.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 너 죽음 그때까지 계산 대 가지고 그때까지의 전  총 계산에 유익이 된 그 점을 네가 찾아야 되자 암만 이 시간 계산에 유익이  돼도, 그 다음 시간에 다 결손이 돼서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것을 하지 말아라.

그래서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거게 것을 네가 항상 마음에 두고,  거게다까지 제산을 대 가지고 거게 소망 둔 그것을 현실에서 네가 모두 다  성취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라 하는 그 말씀입니다.

 이런 축소되어 있는, 속박되어 있는 아직까지 해방 받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 되었은즉'  '기록되었은즉' 요거는 과거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사 과거에 선지자들이  말한 것.

 '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내게로 오느니라'  하는 요거는 현재사를 가리켜서 말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는 주님은 이렇게  인성을 가지고 계실 때에 신인 양성 일위 인성을 가지고 계실 때에 하나님이  옛날 선지자들 통해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 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또,  현재 모든 이루시는 그 일을 다 그분이 이루신다. 그러니까, 옛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그 선포해 놓은 그 선포가 오늘 이루어지는 개별 섭리나 사람  죽고 사는 모든 개별 섭리의 현재 우리들이 그런 것이나 그분 한 분이 하고 있다  하는 것을 여게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그러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 창세전에 당신이 영감하신 것이나 창조하실 때에 그  창세기 1 장에 그때에 역사하신 그 하나님이나 예언하신 그 하나님이나 오늘에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이나 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분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없고  변치 않다. 이래서 베드로도 말하기를 '주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 그렇게 발표한 것입니다. 고거는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안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 속에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그 사랑의 본성의  고통이 여기 다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지자들 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은즉' '기록되어 있은즉' 그대로 된다 그  말이오.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하였은즉' 그분이 기록하신 분이 그 분이시요  기록한 고대로 틀림없이 이루시는 분이 그분이라 이렇게 주님은 믿었습니다.

주님이 그 아버지 하나님을 어떻게 보았으며 또, 아버지 하나님의 선포해 놓으신  그 약속에 대해서 '어떻게 보았으며 그 약속하신 대로 오늘에 이루시는 그  이루심이 어떠하다 하는 것을 그렇게 본 것을 여게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원  전 예정하신 그분이, 영원 전 예정하신 그분이 또, 오늘에 지금 그 주권의  능력을 가지고 성취하십니다. 예정하신 그분이 오늘에 성취하시기 때문에  예정하신 그분이나 오늘날 성취하시는 그분이 나 내나 그분이 한 분이기 때문에  거게 딴것이 들어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 여러분들이 지금 교리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 주 좋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 나는 내가 요새 그저 늘 듣지는 못하고 이래 오며 가며 듣는데  그 아주 좋은 것을 배우고 대단히 그저 아주 잘된, 아주 잘됐는데 아주 정확하게  됐다 할 수 있을 만치 그만치 잘됐습니다. 이 말이나 하는 것은 말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둔한 것이라서 그 사람 속에 있는 사상을 말로 다 발표 못 합니다.

또, 그 사람 속에 있는 그 감정을 다 말로 발표 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그 이상적 무엇은 말로는 어림도 표시를 못합니다. 그 말이 너무  둔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면을 우리에게 서로 대화하고 역사하는 것이 성신의  감화이기 때문에 성신의 감화를 그 문서로 나타내니까 아주 둔해서 그저 참  그림자만치도 안 되게 그렇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거게서  여러분들이 배우면서 고 안에 그 깊은 진리를 말로 표현하는 그 표현에 말 들을  때에 말 그 속에 영감이 와 가지고서 말로 표현하면서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그저 그 대략 그 윤곽이나 그런 그림자 같은 그런 정도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 표현을 통해서 그 속에 있는 영감을 여러분들이 받아들입니다.

문서에서 문서에서 진리를 이제 만나야 된다. 수요일날 밤 설교에 그랬지.

문서에서 진리를 만나야 된다. 진리에서 영감을 만나야 된다. 예? 영감에서  하나님의 온갖 나에게 주실 은혜를 만나야 된다. 은혜에서 이제 내게 주시는  그분을 이제 만나고 알아야 됩니다.

 아주 그 잘 듣기가 쉬운 그런 흔한 말이 아닙니다. 흔한 말이 아니오. 뭐 그  조직 신학이라는 그런 데 대해서 보면은 지금 이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그분들은  또, 우리보다 훨씬 뭐 우리와 같은 분들이지요. 같은 분들인 데 그 서대에  깨달았기 때문에 그 시대에 깨달은 것으로 그 시대를 감당하지마는서도 지금은  백 년 전과 지금과 보면은 인간 지혜가 얼마나 발달 됐습니까? 상상도 못 할  만치 발달 안 됐습니까? 이러니까 또, 지금 시대를 감당할 수 있는 그 진리  깨달음이 있어야 될 것이기 때문에 몇 백 년 전에 깨달은 그분들의 깨달음과  우리의 지금 깨달음이 같으면 안 됩니다. 아주 심히 크게 차이가 있어야 될  겁니다. 왜? 시대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세대를 감당하게 되니까.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그 모든 종교의 경전과 같이 그들은 자꾸  이제 인간이, 인간이 주관이 돼 가지고, 주장이 돼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 생각해 보니까 또, 내일 또, 딴거 생각해야 되겠고 또, 생각해서  거기서 그것을 가리켜서 진화라 그렇게 말해요, 진화. 진화적인 모든 종교는  진화적입니다. 진화적이지마는서도 기독교는 진화적이 아니고 계시적입니다.

요거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기독교는 계시 종교요 진화 종교가 아닙니다. 진화  종교라 하는 거는 이렇게 자꾸 보니까 아, 이래 보니 요거 틀렸다 또, 요래 보니  요거 보니 틀렸다. 자꾸 이렇지마는서도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께서 열어 주면  보여 주고, 보여주면 알고 그래 아니면 모릅니다. 계시의 종교.

 이래서, '그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그와 같이 말씀하셨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그러면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듣고 배울라고 하면 그 선생님을 만나야 듣고 배우지 안  만나고 듣고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듣고 배울라면 선생님을 만나야 듣고 배운다  그 말이오. 요런 절수는 다 이거 껍데기로 지나가고 있다. 껍데기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요거 진리를 똑똑히 알아야 돼. 그러면 이런 절수는 난해절입니다.

아주 깨닫기가 어려운 절이기 때문에 그만 그냥 껍데기로 슬 하고 만다 그  말이오.

 46절에,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듣고 배운  자라야 내게 온다' 이랬는데 아버지를 보지도 못하며 어떻게 들으며 어떻게  배우겠습니까? 배우고 듣기는 들었는데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그 말이오. 그러면  거게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만나지 못했는데 듣고 배웠다 하니까  그 듣고 배운 것은 그 선생님을, 하나님을. 아버지에게 듣고 배웠다는데  아버지를 만나지도 못하고, 못한 그분에게 들었고 그분에게 배웠다 하는 그  말입니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예수님만 보았지 예?' 예수님의 신성만 보았지  예수님의 인성도 못봤다 그 말이오. 예수님의 신성만 봤지. 신성이 봤는데 곧  그리스도가 봤다 그 말이오. 그리스도의 영이 봤는데 예수님의 신성 이 봤는데  신성이 이제 인성을 가지고 오셨지요. 이러니까 여게 보았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러기 때문에 고 위에 또, 보면 또,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목적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세우신  거게서부터 시발된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것을 예택이라 그렇게  말하는데 목적에서부터 시작된 구원이 그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에서, 예정에  우리 구원이 들어야 됩니다. 예정에 우리 구원이 들어야 됩니다.

 여게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끌지 아니하면 올 자가  없다' 그 말은 하나님의 그 예정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예정. 이끌지  안하면 하나님이 구원 얻는 자를, 구원 받을 자를 예정을 했기 때문에 오지  예정하지 안하면 구원 없다 그 말이오. 마지막 날에 살린다는 것은 예정  구원에서 이 세상 통과해 가지고서 예수님의 구속의 토막의 시작 시발을  가리켜서 예정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예정 구원보다 먼저 되는 건 뭐입니까?  목적 구원인데 목적 구원인데, 목적 구원에는 그때 우리가 존재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존재한 것 아니오. 우리가 존재한 것 아니고 우리 존재가  언제서부터 시작됐습니까? 우리 구원이 어디서부터 존재가 시작됐습니까?  예정서부터 시발이라. 알겠습니까? 예정서부터 시발이라. 이래 꿰뚫어서 딱  뚫어서 이래 보면 그 다음에 모든 것이 창문을 열어서 환하게 볼 수 있도록 그  영감의 문을 이래 열면 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요번에 공부할 때에 잘 공부를 하십시오. 아주 좋은 것을  공부하는데 내나 그 하나님, 옛날 칼빈을 거머쥐고 역사하시던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역사하십니다. 내나 그 하나님의 역사기 때문에 변함이  없는데 그때와 지금과 이 깨달음이 다른 것은 이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그 감당  할 만한 그힘이 달라야 되기 때문에 그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지금 주는  은혜가 더 하나님께서는 더 새로 계시적이라 그 말이오. 더 그때 계시되지 안한  것이 더 계시된 것이라 그거야 그러면 그때 연구해서 진화된 것이 아니라.

그런고로 이종교는 전체가 다 진화적입니다. 이종교는 전체가 진화적이요,  기독교는 계시적인 계시로 되어 있는 계시라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하나만  구별해도 꼭 똑똑히 알면은 된다 그 말이오.

 그래서 '이끌지 안하면은 내게로 오지 못한다' 거게서부터. 예정서부터 시작해  가지고서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 그 말은 이 세상 끝에 부활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생명의 부활로 부활 받을 것. 그때 부활한 거, 그 부활이  거게서부터 시작해 가지고서 이래 왔다 그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구원이 저  하나님의 그 목적하신 거게서 우리가 존재하지는 안 했지마는 목적을 정한 그  목적있는 거게서부터 우리의 구원이 뿌리박았습니다. 거게서 뿌리박아 가지고서  예정으로 이제는 예정부터는 내가 예정되었기 때문에, 예정부터는 내 개체가  벌써 예정에 존재하게 됐다 말이요. 목적 속에 내 존재 개체로 존재한 것은  예정에 존재 됐고, 예정에 존재된 것이 그 다음에 창조로 존재됐고, 이래서  아버지에게 듣지 안하면, 듣고 배우지 안한 자, 듣고 배운 자는 뭐이냐? '이끌지  안하면' 예정 구원을 말하고. '듣고 배우지 안한 자는 모른다' 그 말은 뭐이냐  하면은 창조 구원이라 말이오. 창조 구원, 내가 벌써 내가 창조됐기 때문에,  내라는 것이 있는데, 내가 창조 될 때 벌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도록 그 은택을 우리가 입고 있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듣고 배우는 그  은택을 우리가 입고 벌써 창조됐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이렇게 이 말은 인간적으로 인간적으로 이렇게 인간이  생각한다면 서로 대면하는 이 대면은 이 사람들이 대면한 것이 아니고 이  대면하신 분은 예수님의 신성뿐이시다. 그리스도만이 그 대면했지 이 인간들은  대면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정에서 벌써 그분과의 관련이 있었고 창조될  때에 벌써 구원 얻을 자로 창조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울 자로 그 은택을  입고 창조됐다. 그 자가 예수 믿게 된다 그 말입니다. 그렇게 목적 안에서  예정되고. 목적 안에서 예정되고, 목적 안에서 창조되고 그자가 이체 목적대로의  속죄함을 입고, 목적대로의 이제 중생을 입고, 그대로의 중생. 입은 자가 이제는  다시 그 중생한 생활을 시발하는 것이 그것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

이래서 그래 요것이 순서가 바로 되면은 바로 되게 되는데 요 순서를 바로  한다는 것이 이 얼마나 그참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릅니다.

 어제도 보니까 선택설 후택설을 말하고 있는데, 그래 우리는 어제 말한 대로.

어제 가르친 대로 우리는 그 선택설입니다. 그 선택설은 나갈수록 이  성경적이요, 또, 하나님적입니다. 하나님의 그 신성에 대해서 정확합니다.

그러나 이 후택설은 그것은 인본이요. 그걸 여러분들이 잘 고걸 구별 해야  됩니다. 이 후택설은 인간에서 뿌리박았기 때문에 그게 후택설을 말합니다. 그  선택설은 하나님에게 뿌리박았기 때문에 선택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저런 변증이 있지마는 또, 거게 대해서 뭐 대속에 대해서도 이런 것이 이래  맞다 안 맞다 할 게 아니고, 우리는 그분이 완전자요 그분이 완전자요, 그분이  자존자요 그분 혼자만 있어. 그분만이 자존자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지음 받았고 그분의 목적을 그분의 예정을 그분의 창조를 믿으면 그분이 해 놓은  것은. 성경에 나타난 것은 이것이 없어도 되는데 있어도 되는데 뭣 때문에  있는가? 그거 우리는 어찌 됐냐 하는 것. 뭣 때문에 있는지 그거 안다고 해도  그거 안다는 것이 참 너무 흐미한 것이 무한한 것을 어떻게 우리가 압니까?  하나님이 알게 해 주신 것만 알지. 그런데 그 완전자가 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 완전한 일이다. 그건 다 절대 일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 나타낸 일 이 예언한 일은 전부 절대성입니다. 전부 절대성 없어서는  안 될 절대성, 절대성 이 완전성이요 영원성이요 불변성입니다.

 47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그 목적 구원 얻어, 예정 구원 얻어 창조 구원 얻어,  현재에 부름 받아 예수 믿는 행위가 그에게 발생된 자는 벌써 그 속에 영생이  있다 그 말입니다. 믿는 자라는 건 이거는 현재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지고서 우리 주관 행위입니다. 믿는 자 거게서부터 우리 주관 행위입니다.

믿는 자 거게서부터 우리 주관이라하는 것이 시발 된 것입니다. 시발됐는데 믿는  이 주관이 시발되는 것은 벌써 그 속에 생명이, 영생이 들었다 그 말이오.

영생이 들었다 그 말은 하나님과 연결이 벌써 연줄이 연결이 돼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영생이 들었다 그 말은 하나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이요, 사망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것이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 연결이 이 문서 계시 연결,  그 다음에 영감 연결 그 다음에는 이제 하나님의 직접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렇게  역사의 그 능력에.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그 역사에 연결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 좀 어렵지마는,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내가 곧 생명의 떡 이로라' 요 떡이라는 요것을 잘 깨달아야  됩니다. '생명의 떡이로라' '생명의'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로라'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신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또, 살린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떡이다.' 요렇게 그 떡이라는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요게 생명은 뭐이 생명인고  하니 하나님과 연결된 고 연결이 생명이라. 연결이 생명이라. 사망은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 사망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죽은 것이 우리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다  죽었습니다.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영도 죽어 있고 마음도 죽어 있고 몸도  죽어 있고 다 죽어 있는데. 죽어 있는데 이 죽어 있는 것이 사는 것은 뭘로  사느냐? 사는 것은 연결로 삽니다. 우리 생활도 죽고 우리의 몸도 죽었고 또,  우리의 마음도 죽었고 다 죽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차차 차차 죽어집니다.

나무를 끊어놔도 끊긴 나무가 시간이 지나가면 차차 말라 죽는 거와 마찬가지로  죽기는 죽었는데 하나님과 끊어졌다 말이오. 죽기는 죽었는데 이 죽는 시간이  걸리지요. 이래 가지고서 안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루 살면 고만침  죽었습니다. 고만침 살아 있는 생명은 끊어졌고 죽음은 많아졌습니다. 이래  가지고 만일 칠십이나 팔십이나 되면은 남은 생명은 조매 남아 있고 죽은 것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상 끝날로 생명 딱 끊어지면은 고거 아주 완전히  죽어 버리고 만다 그 말이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 택한 사람들은 이제 죽은 것이 자꾸 살아나는 것이라.

살아나니까 하루 지나가 놓으면 고만침 살아났고 살아났고 자꾸 살아났는데,  속에 그 기능은 살아나고 기능은 살아나고 껍데기는 자꾸 이렇게 주글주글  늙어지고 하지마는 속에 기능은 자꾸 살아난다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겉사람은 후패하나,' '후패하나' 겉사람은 자꾸 썩어. 자꾸 이래 주글주글  썩어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날로 자라간다 그 말이오. 그러면 이렇게 우리의  기능은 지금 자꾸 살아나고 우리의 몸은 자꾸 부패했다가 이몸은 예수님의  대속을 지금 입음으로서 사는 게 아니고 이랬다가 이달에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대속을 입혀 가지고서 우리를 다시 이몸을 부활시킵니다. 부활을 시키면 그때 이  부활이라 하는 거는 다 합니다. 택한 자면 부활 다 합니다. 택한 자는 부활 다  하는데 그부활은 뭐이냐? 생명의 부활이요,  또, 불택자들은 다 사망의 부활이요 부활하는데 부활할 때에 그때에 빌립보  3장에 바울이 말하기를 '부활의 능력에 참예하기 위해 가지고' '부활의 능력이  참예하게 해 가지고서 주의 그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하든지 그의 고난에  참예하기를 원한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이제  죽어야 산다 그 말이오. 죽어야 산다 말은 변질이 되어야 살고 변질이 돼야 살고  변색이 돼야 살고 이제 그 힘이 변해서 산다 말이오.

 그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은 그 힘이 무슨 힘이냐? 죽는 힘이라. 죽는 힘인데  이제 우리는 사는 힘으로 바꾸어져야 된다. 바꾸어지는데 그 연결 되어서  살아나는 살아남이 뭘로 살아나느냐? 처음에는 문서 계시로 살아납니다. 문서  계시와 연결이 되나 말이오. 문서 계시와 연결이 되면은 살아났지마는서도  불완전한 그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 다음에 그 영감과 연결이 되고 문서와  연결이 되고 그 다음에는 영감과 연결되고, 문서와 연결되면 내나 그 안에 내나  그 문서 안에는 진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연결 이 됩니다. 연결되고, 그  다음에는 또, 하나님의 그 영감이 내나 하나님의 뜻이라. 영감과 연결되고 고  다음에는 마지막에는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이 돼 버린다 그 말이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그의 몸이라는 거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성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데, 왜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냈느냐 하면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특별히 이 세 가지 역사를 하시는  그 하나님으로 역사하실 때에 그 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라 성자의 위라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것만 말하고 말겠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이제 고렇게 피조물은. 피조물은 죽는 것이 하나님과 떨어지는 것이  죽는 것이요, 하나님과 하나님과 떨어지고 난 다음에는 영감과 떨어지고 영감과  떨어지고 난 다음에는 진리와 떨어지고, 이러면 다 떨어졌어. 이제 말씀과  떨어져 버리면 다 떨어졌어. 다 떨어지면 그 다음에 떨어지는데 따라서 이  불법과 차차 잇겨지고 악령과 잇겨지고 이래 가지고서 완전히 사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생명의  떡이로라' 하는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나는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라' 이랬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로라'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연결이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어?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연결이다 그 말이오. 그러면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연결이라면은 어떤 연결이냐?  하나님과 연결이 됐는데 하나님의 뜻과 연결돼서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하신 하나님의 일과 연결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내가 연결되고  하나님의 일과 연결이 돼 가지고서 그러니까 내 언행 심사의 움직임이 하나님의  언행 심사의 움직임 밖에 연결되는 고것이 사는 것이요 고게 연결이다.

영생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시 다른 말로 말하면 '나는 생명의 떡이로라' 한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인고 하니, 너희들이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인데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는, 하나님의 뜻은 진리인데 진리가 내 진리가 되는 진리가 내 지식이  되고 진리가 내 주관이 되는, 또, 하나님의 역사, 모든 역사가 내 역사가 되는  그것이다. 그러면 너희들이 할 일이 뭐이냐? 너희들이 영생하는 영생하는 그  진리는 뭐이냐? 내가 진리다. 영생하는 진리는 내가 곧 너거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이다. 내가 너거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다. 내가 너거들에게  대해서 영생하는 그 길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고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할 일은 뭐이냐?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라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새생명, 요 세 가지  대속은 우리가 영원히 우리 할 일이다, 영원히 우리 할 일이 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또, 우리가 할 생활이다. 우리의 일이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는 뭐 할 것이냐? 이 나무나 돌이나 그런 것도 뭐 고기고  짐승도 할 일이 있는데 우리 할 일은 뭐이냐? 우리 할 일은 우리 할 일이 그것이  사망도 되고 영생도 될 수 있는데 우리 할 일이, 하나님의 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이 우리에게 영생하고, 마귀가 하는 그  일 우리 일 되면은 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은 곧 예수님의 사죄를 입고 벗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의 문서 계시를, 문서 계시를 배반치 안하고, 문서 계시를 어기지 안하고  한 말씀 내가 문서 계시 어기지 않겠다. 하나님 말씀 한 말씀도 내가 어기지  않겠다. 어기지 안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런데 어기지 안하는 고것이  표준을 잡았기 때문에 살다 보니까 더러 어기는 일이 있으니까 자꾸 이거 하는  것이지 어기지 안하고 살 수 있다 말이오. 그게 어기지 안하고 문서 계시에 하나  되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사죄를 입는 것이오. 하나님 말씀 어기지 안할라 하는  것이 사죄를 입으려고 애쓰는 것이요, 하나님을 어기지 안한 것이 사죄를 입은  것이라 그 말이오.

 그 다음에 칭의는 뭐이냐 하면 내 주관대로, 내 주관대로 동하고 정하고  했는데, 내 주장대로 동하고 정했는데 내 주장대로 동하고 정하지 안하고  하나님의 성령에게 피동돼서 거게 피동되어 동하고 정하고, 내가 거게 피동돼서  동하고 정하고, 내가 그분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내 마음대로 동할려고 하는 것을  이것을 안 할라고 애를 써 가지고서 그분에게 피동되는 것을 소멸하지 안할라고,  영감을 소멸하지 안할라고 애를 쓰고 그분에게 피동되고 영감에 피동될려고  애쓰는 것이 칭의를 입는 것이라.

 이라면, 처음에는 말씀을 범하지 안하고 말씀을 지킬라고 애를 쓰다가,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지 안하고 성령의 감화에게 순종할라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화친의 새생명이라 말은 이제는 고 단계를 밟아 올라가면은 자연히 그런, 가운데  내가 무슨 변화가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내 안에 주인이 돼 가지고서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시고 당신이 나를 주장한다 그 말이오. 이제는 내가 뭐 당신에게  순종하고 영감대로 순종이 아니라 당신이 나를 그만 주장을 해 주권을 잡았다 그  말이오. 그런 일 하다 보니까 나는 완전히 내 주장권은 박탈당했습니다. 내  주장권은 완전히 박탈당했고 내 주장권은 완전히 박탈당했고. 자유는 완전히  박탈이 당했고 완전히 사욕은 박탈이 당했고 완전히 박탈이 당했다 말이오.

박탈당하고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주권하시고 나를 주장하시고 하나님 당신의  소욕을 이 소욕을 네 소욕으로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나는 죽고 그분은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랬는데 박탈을 당하고 주권을 박탈당하고 자유를 박탈당한 그것이,  그러니까 그 사람 비참하지 않소? 자기주장을 박탈당했지 자기 사욕을  박탈당했지 자기의 박탈당했지 자기의 자유를 박탈당했지 완전히 박탈 된게 그만  죽은 거 아니요? 그런데 이 자가 누굽니까? 이 자가 누굽니까? 이 자가  누구지요? 이 자가 누구? 양성원 학생 말해 봐. 아. 이 자가 누구요? 아, 이  자가 사죄의, 사죄의 공로를 입으려고 살라고 애를 쓰고, 칭의의 공로를  입으려고 애를 쓸라고 애를 쓰고 나니까 나중에 그만 화친의 새생명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내 자율이 완전히 처음에 말씀대로 나는 그 하나님 말씀에  복종해라 이러다가 나중에 하나님 영광에 피동돼라 이라니까 자꾸 누구 권리가  없어집니까? 누구 권리가 없어지요? 내 권리는 없어지지 않소? 내 권리는 자꾸  없어진다 말이오. 내 권리가 없어지고 나중에 화친의 새생명 받고 보니까 나는  완전히 내 권리는 하나도 없소. 당신이 날 주장한다 발이오. 내 마음도 주장하지  내 뜻도 주장하지 내 소원도 주장하지 내 욕심도 주장하지 그만 당신이 내게  완전히 그만 권리를 잡아 버리고 나는 완전히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했습니다.

완전히 박탈되고 아무것도 없고 완전히 박탈당했습니다. 박탈당했는데 박탈당한  그 자가 누굽니까? 고게 누구지요? 네, 옛사람, 그렇지요? 박탈당한 거는 그게  옛사람이야. 고놈이 죽은 게 좋다 말이오. 알겠소? 고게 나 아닌 나, 나 아닌  나, 나를 죽인 나, 그 원수인 나 고놈이 나인 줄 알아서 내 마음 이 고 놈하고  합작해 가지고서 사고를 일으켰는데 이제 고놈이 원수인 줄 알고 고놈이 완전히  벗겨져 나가 버리니까 벗겨져 나가니까 이제는 옛사람이 완전히 죽어졌다  말이오. 죽어졌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내가 생명의 떡이로라 하는 요것은, 떡이라 말은 양식이라 말 인데  양식이라 말은 양식이라 말은 참사람이 먹고 자라는 것이라 그 말이오. 양식이라  말은 참 사람이 먹고 새사람이 먹고 자라는 것이라 그 말이오. 또, 이 떡은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 그 말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 준다 그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위해 연결시키시는 주님이시요, 또, 우리 연결되면  살아났는데 살아난 새사람이 예수님으로 양식이라. 예수님으로 양식이라 말은.

살아난 사람은, 살아난 새사람 참사람은 그 고기 먹고 음식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 이는 하나님의 신성의 모형인 인격성이기 때문에 인격성은 그것은 뭘  먹고 사느냐 하면은 고 깨달음의 뜻을 먹고 삽니다. 진리를 먹고 살아요. 진리를  먹고 살고 고 진리대로 행함으로 살고 진리를 그 진리대로 모든 일이 성취가  되어지므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고거는 조금 어려운데, 이제 해석을 다른 거 여러분들이 그저 듣고만 있어요.

기억하고 자꾸 명상하면 나와요. 사람은, 사람은 이 영육이라 이렇게 말하는  그것이 이분설이 좋은 점도 있지마는서도 삼분설이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이분설으로 하라면 이분설로 할 수 있고. 삼분설로 하면 삼분설로  해야 되지 이분설에게 갇힌 사람도 그 사람도 자유하지 못하는 사람이요.

삼분설에 갇힌 사람도 자유하지 못합니다. 삼분설은 이 우리의 이 영과 마음과  몸뚱이 이것을 나누어 가지고서 그 연구를 할 때는 좋고 이분설이 좋은 점은 그  하나는 영계에 속하고 하나는 물질에 속하고 거게 대해서 좋은 점이 그게  장단점이 있다 그거요.

 그런데 이거 나뉘어지면 안 됩니다. 그 나뉘는 것은 고 우리 사람이 정상의  사람은 정상의 사람은 어떤 게 정상의 사람이냐? 몸, 마음, 영, 하나님 요  연결되어 있는 요것이 정상의 사람입니다. 정상의 사람이오. 정상의 사람인데,  요 비정상의 사람은 뭐이냐? 하나님과 우리와 나뉘어진 그것이 존재하지마는  비정상의 사람입니다. 죽었습니다. 기능은 없습니다. 또, 뭐이냐? 영과 우리  마음이 나뉘어 있으면 비정상의 사람이오. 그러나 그 영과 마음이 연결 됐을 때  그 마음은 기쁩니다. 자기 산 영과 자기 마음이 연결됐을 때 그때 참 환하이  밝아지는 것이 그만 그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 버려서 영의 모든 기능이 거게 다  비춰지는데. 또, 이 마음과 몸이 연결됐을 때에 행복이 됩니다. 이래서, 병이  들어서 병이 들었을 때에 비정상의 것이 변질이 되었을 때에는 나눠지지마는서도  정상이 될 때에는 다 이것이 하나가 돼 가지고 정상이 되지 하나가 안 되면  정상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말이오. 어떨 때는 말이지 아주 쓰지 못할 아주 천한 음식  천한 음식도 먹으니까 꿀맛 같습니다. 꿀맛 같은데 아주 고양 진미도 맛이 없을  때 있어요. 그거는 뭐이냐 하면은 마음이 말이지요 마음에, 그 마음과 몸이  연결이 됐고 영과 연결이 됐을 때는 그는 기쁘지마는서도 그게 안 기쁠 때는  마음이 기쁘지 안할 때는 밥맛이 떨어져.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소화가 잘 안  돼. 또, 금방 그 사람이 아주 지금. 다 죽어가는 새파랗게 색깔이 이래 다  죽어갈 수 있는데 다 죽어가던 사람이 금방 화색이 확 돌아오며 막 이렇게  살아납니다. 그건 밥을 먹은 것도 아니요 물을 먹은 것도 아니요 아무것도 안  먹었어. 그런데 그 재판에서 그 사람이 사형이라. 사형 선고가 딱 내리니까  사형이라고 사형이라 이렇게 구형이 되니까 그만 새파라이 해 가지고 다 죽어  갔는데 그래 어째어째 이 변호사하고 이래 자꾸 토론을 하고 이래 변증을  하더니마는서도 무죄 석방이라 이라니까 그만 얼굴이 벌거이 올라오더니 완전히  표정이 납니다. 그거는 뭐이냐? 그거는 마음의 작용이 자꾸 몸의 작용까지  하나라 그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이 몸은  하나라는 것을 그걸 얼마든지 자기가 체험하고 경험할 수가 있지마는서도 영과  마음이 하나라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중생되지 안한 사람들은  몰라요. 그러나 영과 마음이 하나된 우리 중생된 사람들은 반드시 중생된 영을  통해서 영감을 접하지 중생된 영을 통하지 안하고 영감을 접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생된 영을 접할 때에 그때가 뭐이냐면 성령을 접할 때인데 그때는 참  죽음이 있는 그 사형 속에서, 만일 새파라이 질려 가지고서 우리 마음도 몸도 마  음도 죽을 지경이었었는데 영과 자기 중생된 영과 연결이 될 때에는 나는 오히려  죽음을 피하는 게 아니라 죽고 싶다 그 말이오. '아이구 이거 참 하나님이 좋은  기회 줬으니까 좋습니다. 어짜든지 이 기회를 놓지 말고 어짜든지 여게서 내가  꼭 생명을 끝나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죽기가 두려워서 새파라이 질렸었는데  오히려 죽음을 원하는, 죽기를 원하는 이 사람으로 화해지더라 말이오. 그러면.

그게 뭐이냐면 중생된 영과 내 마음이 연결된 것이고 그 마음과 연결될 때에  몸까지 연결되니까 이제 사형을 지금 받는다 하는데 고만 기쁘고 즐거워. 금방  죽을라 하는 사람이 금방 기쁘고 즐거워서 못 견딘다. 그게 무슨 마취제의 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와 가지고서 영에 왔고, 영에 온 능력이  이제 마음에 왔고 마음에 온 능력이 자기의 몸에 왔고, 이러니까 그 모든 하는  일에 못 할 게 없다 말이오. 모든 게 다 소망적이라. 뭐 안 할 거 없다. 하면  되지. 다 소망적이 된다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 이 생명의 도는 지극한 도인데 이는 이러기 때문에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자기 인격을 다하면 못나도 다 될  수가 있고, 자기라는 것, 자기라는 것,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게 모 두 이 세상  사람의 실력이 뭐인가? 세상 사람의 실력 이게 산 실력이요 죽은 실력이요? 이거  대 답해봐요. 말로 하기는 쉽지마는 죽은 실력이라는 것 똑똑히 알아야 돼. 죽은  실력, 죽은 실력, 죽은 실력인데 죽은 실력 이것이 하나님의 이 구원을 방해해요  유익하게 해요? 예? 방해해요. 방해하는데 이 죽은 실력 이것을 죽은 실력 이것  죽이는 실력인데, 죽은 실력 죽이는 실력인데, 죽이는 실력을 없애야 이 산  실력이 나을 터인데 죽이는 실력, 죽은 실력을 죽이기가 얼마나 힘들다 했지요?  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랬어. 얼마나 어렵습니까?  아이구 그라면 누가 하겠습니까? 아,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거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하고, 또, 하나님이  작정된 그대로 된 사람만 하지 그리 안하면 안 되는 것이오. 이게 기독교라  얼마나 이 기독교는 이 세상의 이종교와 비교될 고런 게 아니라 그 말이오.

 이런데, 요새는 기독교가 이종교와 종교 통일을 해 가지고 이와 같이. 기독교를  전연히 모룹니다. 기독교를 완전히 가리워 놓고 있어요. 가리어 놓고 전부 이  첫째 아담이 설교 아담에 속한 자가 설교하고 첫째 아담에게 속한자가 예수 믿게  되기 때문에 다른 이종교와 같다. 이종교는 인간 자기가 전부 주관해서 옛사람  이놈은 안 믿을라 하는데 첫째 아담에게 속한 건 안 믿을라 하는데 하나님께서  위에서 강제로 믿도록 이와 같이 하기 때문에 믿어진다 말이오. 그러나 거게서  자유성을 줬기 때문에 유기적으로 그와 같이 역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 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여러분들이 자꾸 와서 새벽에 나와서 들어야 되지 안들으면 예수 믿는 건  모릅니다. 예수 믿는 걸 저거가 믿는 줄 알아도 안 믿어요. 껍데기 믿고 있어요.

이러니까 새벽으로 꼭 나와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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