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구원

 

1987. 7. 3. 새벽 <금>

 

본문: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예수님의 사활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시고 또 계속 구속하시는 그 구원의 표로 우리에게 세례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된 것을 표시하는 표식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첫째 아담에게 속한 자는 죽고 또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연합되어서 하나되는 그것을 표하는 그 표식이 세례인데 그 세례를 침례로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같이 동참하고 부활하심에 동참하는 거게 중점을 두고 그렇게 침례식을 하는 것이고, 우리는 물을 찍어 흩쳐 세례식을 하니 세례식은 예수님의 피공로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구속하시는 그면에 중점을 두고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식이나 세례식이나 다 같은 인정을 정통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의 뜻은 다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물로 세례받으니까 그러면 육체의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는 그런 식인가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그런 식은 아닙니다. 물로 가지고 우리에게 몸에 무슨 더러운 걸 씻어버리는 그런 뜻으로 세례를 물로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내용은 어떤 것인고 하니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선한 양심이라고 하면은 이는 하나님 중심하는 양심을 말하는데 이것은 곧 신앙 양심입니다.

신앙 양심은 외부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 도리 하나님의 계시의 이 진리 곧 하나님의 뜻에 피동되는 양심이요, 하나님의 뜻인 이 성경 말씀에 피동되는 양심이요, 거게 순종하는 양심이요, 하나님의 이 진리 성경 말씀에 순종해서 성경 말씀대로 자기 양심을 쓰는 순종 양심 곧 신앙 양심이요, 깊이 말하면 성령의 감화 감동에게 피동되는 양심입니다.

자기 주관이 능동으로 움직이는 양심이 아니고 은밀히 말하면 영감에게 피동되어서 움직이는 그 양심입니다. 우리 중생된 자에게는 선한 양심이 있어 선한 양심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그러면 이것은 찾아가니까 과거사도 현재사도 아니요 지금 미래와 현재사입니다. 미래와 현재에 속한 것으로서 미래를 향하여 현재에서 자꾸 찾아가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곧 내가 현실에서 앞을 향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그 행동이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이 행동으로 자기 현실에서 미래를 한 자욱 밟아서 그것이 현실이 되어질 때에 이것이 곧 세례 생활이요,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을 입는 생활이요, 예수님의 이 구속을, 사활의 구속을 입은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생활인고 하니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데 여게 하나님은 누구를 가리켜 말했는가? 그다음에 22절에 “저는” ‘저는’ 하는 것은 곧 우리를 대속하신 사활의 공로를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함이니 제이위이신 하나님 곧 성자 하나님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우리의 대속주 구속주를 말합니다.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늘에 오르사” 이렇게 공로를 설정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하나님 우편이라 말은 하나님을 힘입어서 하나님에게, 삼위일체인 그 하나님에게 피동되어 가지고 완전 승리 생활을 이룬 그것을 표시해서 하나님 우편이라, 우편이라 말은 승리했다는 그것을 뜻해서 우편에 계신 자라 하는 말이요, 또 승리했으면 앞으로는 어떻게 하느냐? 앞으로도 하나님에게 전적 피동되고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고 전적 하나님에게만 피동돼 가지고서 영원히 역사하는 승리 생활하는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전투 승리해 가지고 완전 승리를 했는데 완전 승리한 후에도 생활하는 것을 계속 하나님에게 피동으로서 영원 승리 생활을 계속한다 하는 그런 뜻을 가리켜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러면 여게는 세 가지 뜻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여 완전 승리하고 승리한 후에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여 계속 승리한 그 승리 생활을 한다는 그런 뜻을 가리켜서 “여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자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은 착한 양심은 우리의 심신의 요소 중에는 제일 명철하고 온전한, 심신의 빛이 되는 그 양심입니다, 심신의 빛.

심신의 빛이 되는 양심이기 때문에 이 심신의 제일 깨끗한 것을 지도자로, 인도자로, 왕으로, 주로, 주격으로 이렇게 삼아 가지고서 사는 것이 착한 양심으로 사는 것이요, 어떤 사람은 자기 심신 속에는 아주 쓰지 못할 요소들도 많이 있는데 어떤 자는 그 시기, 시기 그것에 그 시기라는 마음의 요소 그놈을 왕을 삼아 가지고서 일생 동안 사는 비참한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미움, 미워하는 미움의 마음이라는 그 요소 그놈을 왕을 삼아 가지고 해서 어데든지 가면은 미운 것만 찾습니다. 어데든지 가면 미운 것만 찾고, 또 이 공명이나, 공명. 자기 공로나 명예나 그런 것을 명예욕 공로욕을 가지는 그 마음 그놈을 왕으로 삼는 것도 있고, 또 어떤 걸 뭐이냐? 용기, 만용 아주 뭣이든지 용감스럽게 뭣을 정복하는, 정복하려는 그런 마음을 선봉장을 삼아 가지고서 모든 것을 사색하고 궁구하고 탐구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웅전을 자꾸 읽은 사람들은, 정치학을 공부하고 영웅전을 읽는 그런 사람들은 자꾸 영웅이 돼 가지고 내가 뭘 좀 해 보겠다 하고서 아무 가치도 없는 거 거게다 생명을 내놓고 뭐 한번 권세 한번 잡아볼라고 야단을 지기는 그런 사람들이 뭐이냐 하면은 자기 마음 가운데에 만용심 영웅심 그것을 선봉장으로 삼아 하기 때문에 온 마음과 몸뚱이는 거게 따라서 움직입니다.

물질 거석한 그런 사람은 물질 거석하고 어떤 사람은 또 지식을 탐하는 탐지의 욕심, 지식을 탐하는 그 욕심 그놈을 또 선봉장을 만들어 가지고 그놈을 내세워 놓고 자기 앞길을 인도하라고 합니다. 그까짓 놈이 뭐 인도합니까? 그까짓 놈 아무 인도 못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 그것을 선봉장을 시켜 놓으면은 그놈이 인도하는 데로 다 따라가는 것이 자기 마음들이요 몸들인데 나쁜 놈 세워 놓으면 그놈 인도하는 것 나쁜 인도하니까 전부 나쁜 행동만 하고서 합니다.

이런데 이 세례받는 것은 우리 구원은 뭐이냐 하면은 우리 마음 요소가 많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님 중심하는 양심,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그 양심 그 양심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가지고서 그 양심이 또 찾기는 뭘 찾느냐? 돈이나, 금이나, 권세나, 이 세상에 부강이나, 영광이나, 고기덩어리의 장수나 그런 것을 찾지 안하고 하나님 찾습니다.

그러면 착한 양심과 하나님 찾는 요 둘이 합해 가지고서 우리가 앞으로 한 자욱 발을 떼놓는 요것이 되면은 요것은 뭐이냐? “성령을 위하여 심은 자는 영생을 거둔다” 그렇게 말씀 했습니다.

로마서 14장 끝절에 보면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하지 안한 것은 모두 다 죄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삐뚤어진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무슨 현실을 만나든지 현실 만나면 그 현실에서, 그 현실에는 내 정력, 내 정력, 내 힘 말이요, 주님에게 받은 마음의 힘 몸의 힘, 힘 요것이 지금 요 현실에서 활동합니다. 현실에서 활동하는데 요 정력 요것이 현실에서 활동하면 무엇을 만들든지 만듭니다. 현실에 활동하면 그것이 뭣 만드는고 하니 기능을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그 정력을 현실에 지식을 탐하는 현실로 살면은 그 현실 한 시간 살았든지 두 시간 살았든지 산 그것으로서 그 정력이 그대로 있는 게 아니고 정력이 화됩니다. 정력이 좀 승격화, 정력이 이래 승격돼 가지고서 화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그 정력은 지식화됐습니다. 지식의 기능화됐어, 지식의 기능.

가만히 있는 노는 사람은 노는 기능화됐고, 또 공부하는 사람은 지식의 기능화됐고, 또 예술을 한 시간 이 정력으로 노력한 사람은 예술의 기능화됐고, 그 한 시간을 또 음란한 음욕의 행동한 사람은 또 음란의 또 기능이 돼 버렸고, 또 그날 무슨 그 한 시간을 이 체육 하는 거기다가 했으면 또 체육의 기능화됐고 어찌 됐든지 현실을 통하여서 자기 정력이라 하는 것은 기능화된다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기능화되면은 기능화되는 데는 썩어진 기능화도 되고 영생하는 기능화도 된다.

썩어진 기능화가 된다. 그러면 썩어진 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 있지 않는 것은 전부 썩은 것입니다. 방주 안에 있지 않는 것은 다 죽은 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열한 가지 구속 안에 있지 않는 것은 다 썩은 것이오.

우리가 착한 양심만 해 가지고서 하나님 향하여 찾아가는 것은 뭐이냐? 그분이 모든 것을 승리하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그분에게 천사들도 복종하고 모든 권세라는 종류들도 복종하고 능력이라는 종류들도 다 거게 순종한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찾아가 가지고서 그분하고 하나가 되는 것, 믿음으로 그분하고 하나되는 것은 우리가 뭣 되느냐? 우리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거는 영육이라는 존재 그뿐이고, 영육이라는 존재 그뿐이고 그 현실을 통해서 영육이, 영육이 뭣 되느냐? 영육이 영은 좋은 걸 하지마는 육이라는 것은 땅에 속한 이런 것들 기능화됩니다. 땅에 속한 이런 것들의 기능화되는 사람도 있고, 또 예수님의 열한 가지 구속의 기능화되는 그 사람 있습니다, 기능화.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 아들의 기능화되고, 또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의의 기능화되고, 또 죄에 자유하는 기능화되고, 마귀에게 자유하는 기능화되고, 사망에게 자유하는 기능화되고, 또 이 제사장 기능화되고, 또 선지 기능화되고, 왕 기능화되고 전부 이기능화가 됩니다.

기능화되는데, 이 기능화가 되는데 썩어진 것을 거둔 사람은 썩어지고 영생을 거두는 사람은 영생합니다. 여러분들 이 현실을 통해서 자기 정력이 기능화된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돼요? 이해가 돼요? 안 돼요? 현실이라는 현실에는 우리의 정력이 가 가지고 일합니다. 정력이 활동해 가지고서 정력이 뭘 만드느냐? 정력이 그대로 있는 게 아니고 정력이 기능화됩니다. 정력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누워서 자든지 그만 이래 버리면 그거는 아무 썩어질 기능화도 되지 못하고 그대로 그 정력이라 하는 것은 소멸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썩어질 기능이라도 자꾸 그 정력을 허비하지 안하고 자기 무슨 지식의 기능이 되든지, 무슨 전투의 기능이 되든지, 이런 훈련 저런 무슨 기능이 되든지, 그 시간에 그 힘을 가지고서 뛰는 것, 내가 엊저녁에 테레비 봤는데 뉴스가 어떤 뉴스가 나오는고 보자 하고 보니까 그때 무슨 뭐 체육인지 뭐인지 하는데 그 하는데 연습하는 사람들은 모두 날아다녀, 보니까. 후루룩 날아요. 이래 공중에 날아 가지고 이라고 모두 이래 하는데 줄도 타는데 보니까 뭐 운동하는 데 보니까 우리 같으면 그거 뭐 서지도 못할 건데 거게 예사로 돌아다녀. 그게 뭐이냐 하면은 다 육체의 기능입니다.

육체의 기능이기 때문에 뭐 세계에 일등이 되고 세계에 참표했다고 야단을 지기지마는 그것은 사망선 이하에 있는 기능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 썩어진 것이라 말이오. 눈을 뜨고 보면 썩어진 거라.

그러고 어떤 사람은 현실에서 예수님의 구속만 자꾸 생각합니다. 자꾸 진리대로 순종하는 일만 자꾸 생각하고 진리만 명상하고 또 순종하는 것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거 자꾸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이러니까 자기 정력이 현실을 통해 가지고서 하나님 사랑하는 기능화되는 것도 있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기능화되는 것도 있고, 또 죄를 이기는 기능화되는 것도 있고, 또 마귀에게 순종하지 안하고 마귀를 승리하는 기능화되는 것도 있고, 이렇게 자기는 또 제사장 노릇을 했다 말이오. 그 한 시간에 자기 정력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화친을 일으켜 가지고서 하나님과 그 사람과 가까와져 가지고 하나님화되고 하나님은 또 그 사람에게 모든 은혜를 베풀어서 관계가 밀접하게 되는 이 제사장 직할, 역할. 또 선지 역할, 왕의 역할, 이래 가지고서 또 그 기능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자기가 현실에서 무엇을 하든지 현실에 정력 없이, 현실에 정력 없이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분, 양성원? 현실에 정력 없이 살 수 있소? 이분 말이요, 이분? 양성원 학생. 없어? 정력 없이 살 수 없어? 정력 없이 살 수 없어.

정력 없이 살 수 없다는 그걸 알아요. 정력이 없이는 살 수 없어요.

그러면 그 현실에 그 정력이 가서 활동을 하는데, 그 정력이 활동을 하는데 그 정력이 무슨 활동을 하든지 그 정력은 활동한 그 기능화된다 말이오. 요거 이해가 돼요? 이해가 돼요? 기능화돼요.

기능화되는데 그것이 썩음에 속한 것, 크게 말하면 생명에 속하고 사망에 속한 두 가지뿐인데 사망에 속한 기능화를 하든지, 기능을 만들든지 생명에 속한 기능을 만들든지 둘 중에 하나 만들지 안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자든지 아무것도 안 하면 그런 거라. 그러나 그 사람은 노름을 하든지 그리 안 하면 술을 마시든지 뭐 이거 춤을 추는 사람은 또 그 기능화돼.

그러면 그 정력 가지고서 자기가 현실에서 무엇을 하든지 행동하는 그 기능이 만들어진다. 기능이 만들어진다. 앉았어도 무슨 일 하면 기능이 만들어지고,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만들어진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유황불 구렁텅이 가 가지고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가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를 가는 기능.

그 기능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거게는 인격이 없이 때문에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왜 없어, 인격이? 인격은, 인격이라 하는 것은 자유하지를 못합니다, 어데든지 소속하지.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인격성이라 하는 그것은 어데든지 소속해야 되지 독립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에게 속하든지, 마귀에게 속하든지,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은 전부 마귀가 그 속에 인격의 주인공이오.

이래서 악령, 악령은 마귀입니다. 악령이 주격이 되고 악령에게 피동된 인격 요소의 악성이 되고 그래 가지고서 행동한 것을 가리켜서 악습이라, 악한 행동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현실에는 자기의 정력이 그것이 현실을 통과해 가지고서 없어지든지 그리 안 하면 기능화가 되든지 뭐이든지 된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이러니까 제딴에는 앉아서 공연히 이런 잽손 저런 잽손 또 이런 놀음 저런 놀음 하지마는 자기가 어떤 가치 없는 일 할 때에 내 정력은 이 기능화된다 하는 걸 알아야 됩니다. 자꾸 기능화된다는 걸 알아야 돼요.

앉아서 바둑을 자꾸 이래 두고 있습니다. 바둑을 두면은 자기의 이 정력은 바둑 기능화됐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 둘은, 사망에 속하느냐 생명에 속하느냐 둘뿐인데 그러면 자기가 바둑 둬서 기능화했으면 그거는 무슨 기능? 그거는 사망에 속한 기능화라.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열한 가지 구속을 연습하는 가운데서 그 기능화되는 것이 그게 다 영생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치 않는 건 다 죄니라” 하는 말은, 죄는 사망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치 않는 건 죄라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 피동으로 하지 안한 것은 다 사망이라 그말입니다. 하나님께 피동으로 하지 않는 건 다 사망이라 그말이오. 그말을 더 깊이 말하면 무슨 말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역사한 그것만이 다 생명이다 그말이오. 이해 됩니까? 이해가 돼요? 양성원 학생들이 이해를 해야 돼. 이거 안 배우면 뭐 딴데 가 배우나 여기 오나 여기 올 필요가 없어. 뭣 때문에 여기 오고 있어? 이 지금 일반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요것이 참인데 요걸 똑똑히 배워야 돼요.

배워 가지고 요게 속에 역사하면 힘이 나고 강하고 세상도 이기고 환난도 이기고 다 이길 수 있지마는 속에 이 생명력, 생명력이 성령의 역사인데, 이게 속에 역사하지 안하고 뭐 지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주님이 전능이라 하는 것을 억만 번 외우고 사람을 억만 명에게 억만 번 가르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전능의 주권이라는 것을 믿지 안하면 거기 행동은 없어, 믿지 안하면.

자기가 독침 앞에서 독침을 찌를 때 ‘이것이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에게 지금 하고 계신다’ 하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그게 없으면 안 되는 거라, 암만 입으로 말해도.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뭐라 했습니까? 말에? “말에 있지 안하고 권능에 있다” 그말은, 권능에 있다 말은 그거 뭐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와 가지고 직접 해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이 구원이 인간이 여게서 노력해 가지고 만드느냐, 이 피조물의 요소로 만드느냐, 그렇지 안하면 하늘에서 새로 내려와서 하나님 그 창조주 자존자 그분의 힘으로 와 가지고서 만드는 것이냐 하는 것이 아직까지 판정 못 하고 있는 것이 이 세계에 지금 조직신학입니다. 이리도 말하고 저리도 말하고, 나는 그것은 뭐 내가 배우지는 안했어. 배우지는 안했지마는 그럴 거라.

그런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그것만이 영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전부 우리의 첫째 아담에게 영육의 요소, 인간 요소, 피조물 요소 이거 있는데 피조물 요소가 창조주 그분의 능력으로 완전히 화해 가지고서 능력에게 완전히 돼서 능력에게 감염돼서, 마치 말하면 흰베쪼가리를 푸른 물을 들이면 완전히 새파래지지 안해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감화되어 가지고서 감염돼서 이 언행심사의 모두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되어져야 구원이 된다 말이오. 이렇게 이 구원이 큰 구원이라.

이래야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통치할 수 있고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다 너희 것이니라” 할 수 있는 것이지 뭐 이래 가지고 너희 것이 될 수 있을 줄 알아요? 안 돼요. 하나님화돼야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화라 그렇게 말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앞으로 시간 있으면 자꾸 계속할 것입니다. 이거 지금 내가 이거 몇 시간 계속했지? 네 번 아니요? 나흘 아침 매새벽 했지? 이래도 여러분들이 못 알아들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자꾸, 이 성경에는 인간 말로 한 것 있고 하나님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게 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험해서 찾는 사람이 적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평탄해서” 그 말은 하나님 보실 때에 그렇다 말이요 인간이 볼 때에 그렇다 말이요? 인간이 볼 때에 험하고 좁고 이렇지 하나님 보실 때는 사망으로 가는 길은 마구 지금 막 돌뿌럭이를 그뭐 전부 한 자욱 걷는 데마다 뭐 박살이 나는 이런 위험한 곳이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길은 이는 평탄해서 구불러도 아무 일 없어. 아무리 구불러도 하나도 상하지 않는 이런 평탄한 길이라.

사람이 말할, 사람의 뜻을 따라서 사람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이는 어떤 범위에서 말씀한 건가 그 범위를 알아야 되지 범위 모르고 해석하면 전부 통통 다 꺼꾸로라.

공과는 ‘하나님을 향한 지식 13가지’ 지금 공과모음에 있으니까 베껴 가지고 외워 가지고 그래 가지고 가르쳐. 제 손으로 베껴 가지고 외워 가지고. 딱 박아 주니까 어떻게 평안해서, 입을 벌리고 있으니까 자꾸 떠먹이니까 언제든지 떠먹이면 그까짓 놈의 새끼 뭐 키워 뭐 할 거라? 십 년 돼도 떠먹여야 되지, 이십 년 돼도 떠먹여야 되지, 육십 년이 되니까 머리가 허연데 그것도 장 떠먹여야 되지, 그까짓 키워봐아 뭐할 거라? 죽일 수는 없지마는 뭐 가치 있어? 이런 것 모양으로 만날 이러니까 반사들 아무 실력이 없어. 이번에는 공과 자기가 공과모음에서 이 공과, 그 공과 몇 공과요? 살펴봤어? 지금 찾아? ‘하나님을 향한 지식 13가지’ 있으니까 그거 베껴 가지고 외워 가지고 그래 학생들에게 해석하지 말고 그저 주입식으로 외우도록 해요.

그 열세 가지 다 외웠는데, 학생들 쳐놓고 주일학교 학생 쳐놓고 열세 가지 외운 학생 많아. 내가 양산동 가니까 여섯 살 먹는 게 말이지 ‘목사님 내 열세 가지 외워 볼까요?’ 졸졸졸 외우대. 거기 오는 학생은 거의 다 외워. 누구 아이지? 자기네 아이가? 아니가? 뭐꼬? 그림쟁이. ○○○ 아이인가? 졸졸졸 다 외워. 그 아이하고 또 여기 ○○○ 아들이라, 내가 얘기하니까. 뭐 열세 가지 조르르 외워요. 또 회개 스무 가지 네가 외우나 하니까, 또 그것도 조르르 외우고. 아이는 잘 낳아 놨어. 그런 게 인제 자식 농사를 잘 짓는 거라. 잘 지은 거. 세상에 농사 쳐놓고는 또 자식 농사가 제일 중요한 농사입니다.

어짜든지 요 공과 다 베껴 외워 가지고 그래 인제 가르치십시오. 이다음에는 무슨 공과를 하고 또 말해 주면 그만 설명 안 해 줘요. 제가 좀 자라야 되지 만날, 제가 떠먹을 줄 알아야 되고, 나중에 제가 제 손으로 밥을 떠먹다가서 또 어째야 돼요? 나중에 제가 밥을 해 가지고 먹어야 되고, 또 밥을 해 가지고 먹다가 뒤에 밥해 먹을 수 있는 쌀을 만들어 가지고 먹어야 되고, 또 쌀 만들어 가지고는 또 어째야 돼요? 제게 속한 식구들을 또 먹여 살려야 될 것이고, 자꾸 이래 커 나가야 희망이 있는 것이지, 자꾸 오그라져 들어가면 무슨 소용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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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긍휼이 제일/ 빌립보서 3장 4절-14절/ 820731토새 선지자 2015.10.26
» 기능구원/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70703금새 선지자 2015.10.26
227 기능구원/ 고린도전서15장36절-42절/ 880522주후 선지자 2015.10.26
226 기능구원/ 빌립보서 3장 4절-16절/ 791227목새 선지자 2015.10.26
225 기능구원/ 마태복음 13장 24절-30절/ 870617수야 선지자 2015.10.26
224 기다림과 간구 두 방편/ 출애굽기 12장 15절-51절/ 871117화새 선지자 2015.10.26
223 기도/ 누가복음 18장 1절-8절/ 810225수새 선지자 2015.10.26
222 기도/ 창세기 5장 21절/ 790724화새 선지자 2015.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