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하지 말라


선지자선교회 1985년 6월 30일 주전 

 

본문 : 요한복음 14장 1절∼1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기독교는 믿음의 도입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을 몇 명을  들어서 증거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일반 이종교와 같지 않습니다. 새벽에도  증거하였거니와 사람은 근본부터 두 종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람의  생의 법칙도 심히 그 종류가 수다한 것 같으나 분류하면 두 종류로 분류되고, 또  사람들이 목적하는 그 향방이 수없이 많은 것 같으나 분류하면 둘뿐입니다. 참된  기독교 외의 것은 다 뭉쳐서 같은 하나이요 기독교는 그와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구원은 다 믿음으로만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외롭다 함을 받고 성공했고. 또 이삭도 야곱도 다 그러했고, 시조의 아벨 같은,  노아 에녹 같은 그런 사람들도 다 믿음 하나 가지고 성공도 하고 승리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믿음의 도입니다. 기독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  오는 무궁세계에서나 믿음 하나가 기독자의 전부입니다. 하나님 이 기독자들에게  주신 것도 다 믿음이요 또 요구하시는 것도 믿음이요 기독자들이 하나님과 만물  앞에서 사는 것도 믿음 하나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떤 게 믿음인가?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모든  경영과 역사하시는 그 모든 것을 당신이 피조물들에게 나타내신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계시 말씀이라고도 하고 또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하고 또  신구약 성경 말씀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같은 것을 이렇게 저렇게 때를 따라서  우리들에게 이해 잘 되도록 표현해 주신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 계시를 우리가 참되다 옳다  정확 무오하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의 시발입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지식이요. 하나님이 모든 데 대해서 정확  무오하게 발표해 놓으신 산 지식이요 살리는 지식인데 이 지식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라 하나님의 그 존재는 어떠하며 그 속성은 어떠하며 그의  계획은 어떠하며 그가 역사하시는 그 섭리는 어떠하며 그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것을 문서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리켜서 영감이라고도 합니다.

영감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마음을 발표해 놓은 것이라  그말입니다. 또 진리라 그렇게 말해. 진리라 하는 말은 올바른 이치라 하는  말입니다. 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뜻이라 그렇게도 말을 합니다.

완전자의 뜻이니까 그것이 진리요 진리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산 지식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참되다 인정하는 것이 이 것이  믿음의 종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다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종자이니.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다 인정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 종합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또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 대해서, 하나님의 모든 목적에 대해서 기록해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한 이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의  종자인데 말씀을 믿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말씀에서 어떻게 발표를  했든지 말씀에서 발표한 것은 참되다 온전하다 정확하다 영원히 변치 않는  완전한 지식이다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그  믿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모든 경영이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기록한 이 내용을 믿도록 할려고 우리가 애를  써야 합니다. 어떻게 믿도록 애를 쓰는가? 이 말씀을 열심히 읽어서 상고를 해서  이 말씀을 연구를 자기가 하고 또 이 말씀이 그런가 안 그런가 하여 이 말씀을  실지로 체험해 보고 경험해 보고 이런 가운데서 이 말씀의 연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믿을라고 믿어지는 신앙을 가질라고  노력하는 것이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이요 또 성경이 그런가 안 그런가 해서  성경 말씀대로 자기가 그대로 실지로 행해 보는 것이요, 그럴 때에 그 사람은 이  말씀이 참되다 인정하는 믿음의 종자를. 종자적인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성령님께서 사람을 통하여서 인간의 방언으로 기록한  것이나 그 문서만이 아니고 이 문서 안에는 영감이 내재해 있습니다. 영감이  내재해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 안에는 성신의 감화의 역사가 이 말씀 속에  내재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내재적 영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세제의 신학자들이 다 공통되어 있는 깨달음이요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다만 그렇게 이치를 말해 놓은 죽은 지식이  아니고 이 말씀은 살았습니다. 이 말씀은 전능의 능력을 가졌습니다. 이 말씀이  일차적으로 하신 일이 있으니 이 말씀이 무슨 일을 하셨는고 하면 하나님의 목적  정하실 때에 같이 있었고 이 말씀이 예정할 때에 이 말씀이 같이 예정을 했고 이  말씀이 모든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실 때에 이 말씀이 창조를 하셨고 오늘까지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또 이런 것들은 다 운영하시는, 활용하시는 이 역사를 이  말씀이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인격 존재인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니, 권위있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니 그 말씀이  능력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들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권위있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인 동시에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독자적인  전능의 능력을 가진 것이 이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세상 지식과 같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모든 존재를 다  창조하셨고, 이 말씀이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 창조하시도록 이  말씀에게 명령했고 이 말씀은 명령받아서 모든 존재들을 창조하신 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진리요 하나님의 뜻이요 영감이요 또 산 지식이요  살리는 지식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피조물들에게 간섭이나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피조물들에게 간섭이나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세상 지식은  그 지식이 사람들에게 간섭과 제재를 받게 됩니다. 왜? 그 지식이 그 지식을  보는 자가 아무리 이 지식에게 못 마땅하다 할지라고도 보는 자에게 따라서 이  지식은 거기에 이용 당해야 되고 거기서 지식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지식은 아무리 원수의 지식이라도 세상 지식 통달한 사람이 그  지식을 보면 그것을 발각 할 수가 있고 알 수가 있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지식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지식이면서 인간들에게 제재를  받는 것이 세상 지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이 지식은 인간들에게 지음  받은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거기서 나올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영감이라 이랍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을 때에 영감이라 하고 영감이 그 다음에  피조물들에게 나타났을 때에 진리라 표현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피조물들에게 제재받지 안하고 이용되지 안하고 거기에 피동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인생보다 무한히 높습니다.

 진리는 인생을 없는 가운데서 지으신 능력 존재가 진리요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계획은 어떠하며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이며 명령이 무엇인가 피조물이  어떻게 해야 창조주 자존자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그분에게 합당하게  하여 그분으로 인해서 축복과 생명과 평강을 받아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피조물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이 이 말씀의 나타나신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애를 씁니다. 알리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이 말씀을 상대하는 사람이 유식하고 무식하고 거기에 대해서  제재받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이 말씀을 상대하는 사람의 명철하고 우둔한 데에  제재받지 않습니다. 다만 진심으로 이 말씀을 인정할라고, 이 말씀으로 인해서  자기가 참 바로 알라고, 첫째는 바로 알라고 바로 알아서 이 말씀에게 모든  소망을 두고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생명이나 모든 바 대해서 모든 불행을  제거하고 행복을 구하고자 하는 그런 소원을 가지고 이 말씀을 상대하는 자에게  이 말씀은 그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12장 절 1이하에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하여 새로운 마음을 품어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가 그렇게 네가 알아 볼라고 애쓰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다 성경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다'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이 깨닫게 해 주시면 그 깨달아진  그것을 내가 다 인정할 것이고 깨닫게 해 주시는 그대로는 죽는 길이라도 이  말씀이 명하는 대로 갈 것이고 사는 길이라도 갈 것이고, 내가 어떻게 되는, 산  제사로 드리라 말은 제물은 잡아서 드리기 때문에 제물 자체의 능동성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자기의 주관이나 사욕이나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주관과 사욕을 온전히 포기해서 살아 있으나 죽여 놓은  송장같이, 잡아 놓은 짐승 같이 그렇게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게 복종할려고 하는 그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다,  옳고 바르고 참되고 외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은 알려고 하는 자가 이 세상 지식 모양으로  이것을 알아서 내가 지식의 고위를, 높은 지위를 차지하겠다 내가 이 지식을  이용해 가지고 내가 존귀해지고 모든 사람들을 통치하고 모든 사람들을 다 내  수하에 두겠다 선생이 되겠다 이렇게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달라드는 사람.

자기의 명철이면 가능하다고 명철을 가지고 달라드는 사람, 자기의 기존 모든 이  세상에서 나온 온갖 인간 지식을 가지고 달라드는 사람, 자기의 열심이나 절제나  무엇이나 인간 요소를 가지고 그것 가지고 할라고 달라드는 사람은 이 말씀에게  죽는 날까지 이 말씀을 외워도 한 마디도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산 복음으로는 가지지 못합니다.

 그 반면에 자기는 이 말씀에게 속하여 살라고, 이 말씀의 인도를 따를라고, 이  말씀에서 자기의 구원을 이룰라고 이렇게 이 말씀을 향하는 사람은 귀머거리도  좋습니다. 언제 어떤 사람들이 걱정하기를 우리 교회는 귀 어두운 사람들이.

맹아의 사람들이 많이 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떤 좋은 대책을 세우면 좋지  않느냐 그렇게 안타까워서 말하는 어떤 장로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에게 '대단히 아름다운 생각을 가졌고 좋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요새 이 모든 과학들이 지금 연구해 가지고 있는 것 그런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듣게 하고 보게 하고 말하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눈이 있고 귀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사람들은 다 되리라  생각하지만 성경에 말하기를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신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전달은,  사람의 교훈은 눈 어두운데 귀 어두운데 제재를 받지만 하나님의 성령은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증거할 때에 인간 말로 증거하지 안하고 영감으로  증거할라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증거할라고 바울이 애써서, 들은 것이  사람의 지식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권능에 있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로  설교하는 자가 영감으로 설교해서 귀 어두운 귀를 뚫고 들어가고 눈 어두운 눈을  뚫고 들어가고 아주 저능의 바보 같은 아주 정신 이상자의 그 심령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성령과 능력으로 진리 자체의 힘으로 설교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위하여는 장로님이 기도하십시오. 기도해서 하는 것이 제일  효력이 있지 그 외에 딴것 가지고는 암만 해 봤자 내나 그게 그것이지 안  됩니다.' 내가 그런 말의 뜻으로서 간단하게 그렇게 그분에게 말을 해 줬습니다.

그분은 알아듣고 갔는지 안 알아들었는지, 여기 지금 앉아 계십니다. 모르지만  제가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다 인정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말한 것은  하나님은 자존자라 하면 '예, 자존자라'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고 맡겨 놓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것이 다 영생이요 평강이라 '예, 그렇습니까? 그대로  인정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해 주는 것을 참되다 인정하는 그것이 믿음의  씨이니 이 인정하는 믿음의 씨를 가질려고, 신구약 성경 말씀이 믿어지는 믿음을  가질라고. 인정되는 인정을 가질라고, 정확 무오한 말씀으로 믿어지는 믿음을  가질라고 우리가 애를 쓰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력을 해서 믿어지는 사람이  되어져야만 하겠습니다.

 믿어지는 사람이 되어지는 데에는 이 말씀을 열심히 상고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상고하는데 어떤 방편으로 상고하느냐? 네 이 세상 많은 광문 다학한 이  지식을 가지고 이 말씀을 상고할라고 하지 마라 네 명철이나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상고할라고 하지마라. 너를 완전히 부인하고, '이 말씀이 나에게 알려  주십시오. 알려 주시면 내가 무엇이든지 알려 주시는 대로 그대로 나는 살든지  죽든지 복종하겠습니다.' 산 제사로 드리는 이것을 네가 가지고 이 말씀을  상대해라. 다음으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하여 새 마음을 품어 가지고  네가 하나님의 옳고 그르고 참되고 거룩한 뜻이 무엇인가 분별할라고 그렇게  상대해라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 말로 말하면 이 말씀을 상고할라고 할  때에 겸손으로 이 말씀을 상고해라 이 말씀은 너를 없는 가운데서 지었고 이  말씀은 지극히 크신 전능의 말씀이니 이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면서 이 말씀  앞에 네가 '살려 주십시오, 알려 주십시오' 하는 뜻으로서 이 말씀을 네가  상대해라. 네가 무슨 어떤 지식 중의 하나들처럼 그렇게 교만한 생각 가지고 이  말씀 대하면 너는 평생 천 번 만 번 외워도 그 말씀은 너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너에게 피동되지 않는다. 너에게 정복을 당할 말씀이 아니다. 너에게 제재를  받은 그런 말씀이 아니시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나는 이 말씀에게 지음을 받은 자요 지금도  이 말씀의 통치를 받고 있는 자요 이 말씀으로 인해서 나는 현상 유지를  일초라도 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이 말씀은, 이 진리는 모든 피조물보다 무한히  위에 있다는 이 지위를 알고 이 말씀을 상대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증거하는 자도 말씀을 증거할 때에는 그거는 다 한글로 썼고 옛날은 언문이라고  말했는데, 언문, 무슨 헬라어나 히브리어나 무슨 영어나 아주 중국의 한문이나  이런 걸로 했으면. 좀 어려운 문자로 기록했으면 가치있지만 쌍놈이 안다고  그전에는 언문이오. 언문이라 말은 쌍놈 글이라 그말입니다. 그때 욕하는  소리지. 우리 한글이라 이렇게 지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거야 뭐 다  읽을 수 있는 것. 아이들도 읽을 수 있는 것. 국민학교도 다 읽는 것 이거는  아주 천한 지식이라 이렇게 생각을 해 가지고. 성경 말씀을 증거하는 것도 성경  말씀 증거하다가는 힘이 안 나니까 철학을 증거하고 어떤 이 세상의 무슨 소식을  전하고 과학을 전하고 인간들의 어떤 높은 술어로 말해 놓은 그런 문자를 쓰고  이럴 때는 힘이 나 가지고 강단을 두드리고 하는 이 마귀 새끼야! 하나님의 종이  양의 껍칠을 입은 이 마귀야! 이리야! 입술을 닥쳐라! 이렇게 하는 자 사람을  죽이지 사람을 절대로 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교만 한 자들에게  정복을 당하고 이용을 당하지 않는 지극히 크고 전능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궁구해서 이 말씀이 믿어지는 믿음을 가져야  종자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니까 이 믿음을 가져야 되는데 이 믿음 가지는  방법은 첫째는 이 말씀을 열심히 읽어서 상고해야 되겠고. 상고하는 데 어떤  자세로 어떤 정신으로 어떤 태도로 어떤 사람이 되어 가지고 상고하겠느냐? 네가  이 말씀 앞에 굴복하고 이 말씀이 어떤 위에 있고 너는 어떤 존재인 것을 네가  알고 이 말씀을 상대하느냐! 그걸 상대하지 안하고 교만하게 저는 어떤 이  세상에 있는 지식 하나처럼 그렇게 경솔히 여기는 그 자는 암만 읽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에 연구하는 방법은 이 말씀을 네가 알고 다 알라고 하지말고 제일  외부적인 뭐이든지 알았으면. 다른 것은 다 몰랐는데 주일날 예배당에 가라 한다  그걸 알았거든 예배당에 가거라. 이 말씀에서 네가 무엇이든지 깨달은 바를  그것을 네가 시험해 봐라. 깨달은 그것을 네가 실행해 봐라. 실행해 보면 너에게  알려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실행해 보면 뭐이 나오는데? 실행해 보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말씀했습니다. 실행해 보면 그 실행을 통해서 자신이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자기가 볼 것입니다.'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네가  성화가 될 것이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변화되고 나서 진리를 보니까  진리가 다릅니다.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라고 보니까 새로 진리가 알아집니다.

'진리를 알지니' 그라고 난 다음에 안 진리는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 진리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고 진리대로 행할라 할 때에 온 천하 세력이 다  달라들어도 하나도 제재받지 안하고 네 자유 자제로 얼마든지 걸어갈 수가 있게  된다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닫고 실행하라, 시험해 봐라. 그것이 이 말씀을 자기가  확신을 가지는, 인정을 가지는, 확신을 가지는 방법입니다. 방법을 배웠습니다.

 또, 이 믿음은 믿음의 종자요. 이 믿음이 장성해지는, 이 믿음이 장성해 지는  데에는 어떻게 장성해지는가? 장성해지는 것은 자기가 이제는 이 말씀을 알고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그대로 또박또박 행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여진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기가 아는 대로 행하는 것 행할 때에 자기에게는 어떤  믿음이 생기느냐? 온전한 믿음이 이루어집니다. 온전한 믿음은 성경에 말하기를  능치 못함이 없다 그렇게 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믿음은 능치 못함이 없다, 믿음으로 하늘의 모든 것도  다 상속받을 수 있고, 세상도, 세상을 이기는 이김이 뭐이냐? 세상을 이기는  이김이 어디 있느냐?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믿음이니라 이랬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믿음이니라.

 그런고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심을 인정하는 이 종자적인 믿음을  가지도록 노력을 하고. 이 종자적인 믿음이 이제는 온전한 믿음이 되어지는 이  실행에 나아가도록 노력을 해서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자기가 참되다 인정하는  자가 돼야 거기서부터 뭐이 되지 인정하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가르쳐 봤자 인정 안 하는 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기에, 요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정하게 하려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구경시키기 위해서,  '아나, 이 말씀도 있고 저 말씀도 있다, 구경하는 것은 구경하고 지나가 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하나님 말씀을 인정케 하려는 것도 하지 안하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케 하려는  것도 하지 안하고 하나님 말씀을 구경시키니까, '아. 이거 내가 지난 주일에  구경시켰는데 또 두 번째 구경시키면 권태 날 건데, 또 세번째 시키면 더 권태  날 것인데' 듣는 자도, 듣는 자도 '아. 또 지난 주일에 읽은 본문 또 읽네. 내  그거 한번 들어 봤는데. 구경했는데.' 평생 자기가 말씀을 들어 언제든지 새  말씀 듣고 싶고 또 구경하고 싶지만 이 말씀을 믿는 데에서 생명이 연결되는  것이니 믿는 자 될라고 애를 쓰는 자는 없습니다. 요것 회개해야 됩니다. 안  믿는 데 사망하지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지식으로 가진  데에서는 자기 구원에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이  말씀을 참되다 인정할 때에 그 때에 자기 구원의 종자가, 종자가 생겨지는  것입니다. 실행할 때에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보면 말씀을 증거하고 난 다음에는. 참 나도 거짓부리요 왜  거짓부리냐? 이것을 느끼고 느끼지만 말씀을 증거하고 '이 말씀 분명히 실행 안  하니까 또 증거해야 되겠는데' 하지만 몇 주일 증거하고 몇 번 증거하다가는  이라면 너무 또 자꾸 권태 나니까 '이거는 들어도 인정 안 하니까 냅두고 또 딴  말씀을 들려 가지고 인정 시켜 보자' 이래 가지고 이것 들어 인정 안 하는 자가  딴것도 인정 안 하니까 이것 인정하도록 몇 십 번이라도 말해야 될 터인데,  제가 말 듣기에 어떤 목사님이 그 교인들이 '아, 이 목사 도무지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니까 재미없으니 이제 갈아 봐야 되겠다 그라니까 삼 년을  거기서 목회 했는데 삼 년을 목회하고 난 다음에 이제는 그 교회 사면을 하고,  배척해서 가면서, 삼 년. 이제 삼 년에 배척해서 마지막 주일로 지키는데  '마지막 주일로 지키니까 아마 무슨 다른 설교가 올란가, 아무래도 모든 그  생활이든지 과거나 현재나 모든 세상 생활에 세상을 이겼고 승리한 그런 것을  보면 상당히 실력있는 유력한 그런 목사는 목사인데 만날 들은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니까 권태 나 가지고 배척을 당하는 데 요번에 마지막에 갈 때에는 지금  아마 설교를 하나 좋은 설교를 하고 가겠다' 그래 그 날 모두 교인들이 기대를  했는데 내나 이제까지 하던 그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암만 해도 믿지  안하고 행하지 안하니까 소용이 없으니 다른 설교를 가르칠 필요가 뭐 있느냐?  이러기 때문에 내가 알지만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 인정치 아니하고 실행치  아니하면 그 말씀이 여러분들을 구원하는 복음이 되지 안하고 여러분들을  정죄하는 심판의 율법이 되어지니까 내가 설교해서 자꾸 망치고 멸망시키는 일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이제, 마지막 나는 지금 가면서 또 이  설교 할 수밖에 없다. 너희들이 듣고 인정치 안하고 행하지 안하니까. 인정하고  행하면 요다음에는 내가 다른 설교하나 해 주고 갈 것이고 그리 안 하면 나는  요것으로 그치고 사면하고 가겠다'. 이라니까 그분들이 그때사 하나님이 불쌍히  여겼든가 '이제는 우리가 말씀을 확실히 인정하고 실행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실행하고 노력하는 데 힘을 써 가지고 실행할라고 인정할라고 이를 애를 쓰니까,  애를 쓰니까 그분들이 그 진리를 깨달아서 그 목사님을 가지 말라고 만류를 하고  그 다음에 그 교회가 크게 부흥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도 그만 어북 잘 믿는 장로님들도 권사님들도 읽은 말씀 읽으면 본문  읽으면 그만 아예 시시하게 여기고 좁니다. 네가 믿었느냐! 믿었느냐! 정말로 그  말씀을 왕 앞에서도, 원수 앞에서도. 김일성이 앞에서도, 공산주의 앞에서도,  네가 독약을 먹이는 독약 앞에서도 네가 그 말씀을 믿겠느냐? 그 말씀으로 인한  능력이 네게 와 있느냐! 전부 거짓부리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은 말씀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요,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요, 말씀을 인정하지 안하면서 주님을  어떻게 인정하겠습니까?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데 주님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은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할 것이요 내가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나는 그를 통해서 내 전지 전능의 모든 포부를 그를 통해서 이 민족 위에 이 땅  위에 이 세상에 이루리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믿지 안하면 말씀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도 이런 말씀은  뭐할라고 해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인정하고 행하는 자에게 말씀을 가르치면  되는 것이지, 이제까지 하는 말도 자꾸 인정해라 행해라 하는 말이니까 이런  말은 만날 해 봤자 항상 되풀이요. 인정하지 안하고 행하지 안하니까.

 1절에 대해서 말씀하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선포해 놓고 곧 며칠 안 돼서  이렇게 된다 하니까 제자들이 지금 근심에 가득 채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항상 들었지만 그들은 땅에 속해 있었고. 소망도 땅에 있었고. 희로 애락도 땅에  있었고, 평가도 땅에 있었고. 비판도 땅에 있었고 전부 땅을 근본으로 해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하니까 주님의 비판과 평가에는 상관도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소망도 하나도 상관도 없는 자들입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다 이라니까 모두 뭐 근심을 하고 야단입니다.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28절 하반절.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너희들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면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언제든지 미결이요 언제든지 전투 중에 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이것은  완전히 승리해서 나 보다 크신 아버지와 연결되어서 아버지의 그 무한하심이  내것이 되어지는 이것인데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것이 세상법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 지식대로의 사랑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간다 하니까 너희들이 근심하고 가지 말라고, 죽지 말라고 나한테 간청을  하고 이와 같이 너희들이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세상 지식대로의 근심은 하나님의 지식대로의  기쁨입니다. 이러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요 말씀에서, 세상  지식대로의 근심은 다 포기해라, 세상 지식대로의 근심은 포기해라 이래야 이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기가 실행하는 것인 데 이것이 그렇게 쉽다고 '이  말씀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랬으니까 그 말씀 다 들었다. 다 알았다.

이제 두 번 들을 것 없다' 얼마나 외식자입니까? 얼마나 거짓부리입니까? 주님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했으니까 근심 안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내  계명을 가지고'는 내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 했는데. 내 말을 지키지 않는 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했으니까 세상 지식적인 근심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식대로의 근심은 하지만 세상 지식대로의 근심은 다  포기할 것. 이래야 우리가 이 말씀을 인정하고 지키는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며칠 전에 나한테 와서 내가 신구약 성경을 좀 한번 익힐라고  이렇게 갔는데 이 말씀을 읽을라고 가 가지고 읽다 보니까 그만 한 장도 못 읽고  몇 절을 읽다 그만 끝을 마쳤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래? 줄줄 와 읽지?'  이러니까 '아. 그만 이 말씀을 읽으면 그 다음이 또 생각나고 생각나고 자꾸  이래 생각 나서 뭘 생각하다 보니까 자꾸 성경 읽는 진도가 나가지를  아니합니다.' 그렇게 말을 해서 그래 내가 좀 고맙게 보고 유망하게 생각해서,  제일 병은 뭐이냐 하면 성경을 읽을 때에 좔좔좔좔 나가서 성경 한 권을 짝 외워  버렸는데 외우고 나니 무슨 말씀인지 모른다 '네가 그리하지 말고 요 한 장을  읽고 그 장에 무슨 말씀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가 읽어 봐라' 쫙 읽고 '뭐꼬?'  '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리 안 되거든 한 절을 읽어라. 한 절을 읽고 난  다음에. '한 절을 읽어라' 한 절 읽고 난 다음에 '아. 외었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 안에 '무엇을 가르치는 고 알아 봐라' 쫙 외우고 난 다음에 '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병은 큽니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 증거입니다.

업신여긴 증거요.

 제가 미국 선교사 가운데 제일 존경하는 선교사가 권이만 목사님이라는  목사님이 호주에서 나온 목사님인데, 그 목사님은 자기가 논문 박사 논문 박사  냅두고 명예 박사만 해도 일곱을 줄라 하는 것을 하나도 받지 안하고 논문  박사는 열인가 되는데 하나도 논문 내지 안하고 하고 있는 그렇게 유식한  분인데, 그분이 내가 처음에 가니까 신구약 성경을 이 성경 말씀을 설교할 때  읽는데 그 말씀 읽으면서 어떻게, 더듬지는 안하고, 그 말씀을 어떻게 못 읽고  뻘뻘뻘 떨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해서 '저 어디 순 무식쟁이. 성경도  읽지 못하는 저까짓 걸 선교사라고 가르치라고 놓고 저래 있는가' 나는 업수이  봤어. 그분이 사람에게 대해서 말을 할때에도 그렇게 말을 어렵게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분의 인격이 그러합니다. 그분을 내가 거기서 두 달 동안  강의를 받았는데 그분은 강의하다가 혹 자기 아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저  쳐다보고 있습니다. 마주 쳐다봤다가 눈이 마주 치이면 딴데로 돌려서 또 다시  강의를 하고 그라는데, 그분이 얼마나 신중한가. 내가 거창읍에 나는 있을  때인데 거창읍에 장날이라 하면 사람이 어떻게 들이 찼는지 옆의 사람도 잘 못  볼 만치 그래 찼습니다. 거기에 내가 보니까 권이만 목사님이 지나가기 때문에  어떻게 반가운지, 거기서 거리가 떨어졌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권이만  목사님이라고 고함을 지르니까 고함을 지르니까 돌아보지 안해요. 돌아보지  안하고 보니까. 고함을 지르니 빨리 걷지 안하고 걸음을 그저 조그매씩 살살  천천히 걸어가니까 내가 따라 붙였습니다. 따라 붙여서 만나가지고 '아 권  목사님 아니십니까?' 이라니까 손을 잡으면서 잘 있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반갑다고 그라고 그래 작별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신중해. 뒤에서 권이만  목사님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휘뜩 돌아볼 것 아닙니까? 돌아보지 안하고 걸음을  천천히 해서. 아마 천천히 걷다가 내가 따라 오지 안하고, 따라올 만한 그  정도에 천천히 걷다가 따라올 만한 그만한 시간 이 지나가도 따라오지 안하면  그분은 그대로 앞으로 걸어갈 그렇게 언행심사에 신중해서 도무지 실수 없이  그렇게 하는 분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렇게 읽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에 더디 내려가는 것이 좋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 말씀에 뭐이 있는지 모르면 안 되니까 처음에는 이렇게 그저  보통으로 읽으면서 자기가 깨닫는 대로만 실행하면 된다. 그라면 한 꺼풀 깨닫고  실행하면 두 꺼풀 깨닫고 실행하고 두 꺼풀 깨닫고 실행하면 세 꺼풀 깨닫고  실행하고 세 꺼풀 깨닫고 실행하면 네 꺼풀 깨닫고 이렇게 깨달아 가지고 성경을  공부해서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앞선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요구하는 사람은 어떤 성경학자를 요구하고  있느냐? 뭐 미국에나 영국에나 독일에나 가 가지고 성경 공부한 성경학자 그런  사람들 우리가 요구하지 않습니다. 요구하지 않습니다. 첩첩 산중에든지 도시  속에든지 자기가 성경 읽으면서 읽고 깨닫는 대로 실행하고 또 실행하니까  실행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변화되어서. 또 변화되니까 새로 깨달아졌고 읽고 그  다음에 인정하고 실행하고 하니까 자기가 성화되고 성화되니까 깨달아지고  깨달아지니까 또 이제 깨달아지는 대로 인정하고 실행하고 이렇게 해서 나가서  자기가 성장돼서, 숨어. 산속에 숨어 있는 자를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지만  하나님이 높이 들어서 자꾸 들어서 내다가 세상에 내놓은 그런 사람이 지금  나오지 않느냐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요 말씀 한  마디에서라도 우리는 회개를 합시다. 이 말씀에서 '아. 무슨 근심을 하지  마느냐?' 근심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있는 근심을 위로 오는  위에 하늘에 속한 근심이라고 말하고, 인간 지식대로 되는 근심을 가리 켜서  땅에 속한 근심이라 말했습니다. 여기에 말씀은 땅에 속한 근심을 다 버리라  말입니다. 땅에 속한 근심을 버리라 하늘에 속한 근심을 가지라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탄식한다  내가 심히 마음에 고민한다' 뭣 때문에?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이것이 살아나고 변화되기 위해서,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내려온 새것을 받아서 새것으로 창작되기 위해서 이것 때문에 근심이  무거운 짐진 것으로서 표현했습니다. 무거운 짐은 갈수록 점점 무거워 지는 것이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속한 근심이 점점 이 근심이 더 강해지고  커져서 자꾸 더 눌림이 더 커진다고 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젊을 때는 열심히 믿다가서. 젊을 때 열심히 믿는  것 보고 말하기를 '에, 다 저거 뭐 풋 믿음, 우리도 다 젊을 때는 저렇게 다  장개비 솥 모양으로 짜글짜글 끓고 그렇게 열심히 가졌다고. 우리는 다 노숙해서  그렇게 열심이 없다고' 이 망령아, 신앙이 늙나? 신앙이 늙나? 너는, 사도  바울은 갈수록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자꾸 육체의 힘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같이  가지는 못하지만 못 하니까 더 답답해서 그 마음이나 정신이나 그런 것은 더  고민 고통해서 무거운 짐진 것같이 되어지는 것인데 너는 잘 믿어서 늙은 신앙을  가졌느냐? 백 년도 못 되어서 늙어지는 신앙 그까짓거 사망의 신앙이지 무슨  생명 있는 신앙이냐 말이오. 그래서 젊은 사람들 열심 있는 것을 비웃고 낙관시  하고, '와 나는 옛날 저와 같은 믿음이, 뜨거운 믿음을 가졌는데 늙어서 뜨거운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가' 이래서 근심하지 안하고 그만 늙으면, 늙으면 낙관시  하고 '에, 이러니까 뭐 정년 퇴직이나 안 됐나? 정년 퇴직이나 하면 놀고 어디  가서 좀 구경이나 하고 또 그저 편하게 살다가 가지. 이제까지 일 했으니까 또  좀 누리고 가야지' 이것이 올바른 신앙 아니오. 그러기에 정년 퇴직을 한  사람들도 부득이 노망한 교역자들을 위해서 정년 퇴직을 했으나 정년 퇴직하고  나서 또 개척 교회 시작하고. 정년 퇴직하고 나서 자기로서 더 과거보다도 더  힘이 쥐이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 산 신앙을 가진 사람이고 하늘의  근심을 가진 사람들이지, 하늘의 근심은 갈수록 근심이 무거워집니다. 막상 오늘  떠날지 내일 떠날지 모르는데 떠나 가지고 모든 성도들 대할라고 생각하니까 그  뭐 대할 안면이 없지, 주님 대할라 하니 참 기가 막히지, 왔다가 죄 지은 것밖에  없고 남에게 거리낀 것밖에 한 것이 없고 이런 것이니까. 이거 참 갈 걸  생각하니, 정말 갈 걸 생각하니 기가 찬다 그말이오.

 우리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땅에 속한 근심은 버립시다. 요것을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이제 모든 것 다 있는 근심 다 버리고 나면 주님이 또  땅에 있는 새 근심을 줄 것입니다. 그것 또 버리십시오. 새 근심. 물질에 대한  근심을 버리고 나니까 나중에는 가족에 대한 근심이 나오고. 가족에 대한 근심을  다 버리고 나니까 자기 가까운 몸에 대한 근심이 나오고. 몸에 대한 근심을 다  버리고 나니까 생명에 대한 근심이 나오고 생명에 대한 근심을 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만 원한다, 내 모든  것은 주님에게 다 맡겼기 때문에 내게 대한 것은 털끝만한 것도 내가 근심  걱정하는 것이 이게 죄인 것을 깨닫기 때문에. 내가 내게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염려가 되는 것도 죄. 내 주장도 죄, 나 할 것은 그분 믿을 것 그분에게 복종할  것이 두 가지 외에는 나 할 것이 없어.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영원 자존자, 완전자, 전지 전능자. 창조주, 대주재.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주권 개별 섭리자, 모든 것의 주인되신 그분, 그분을 믿으라. 그분을  믿으라 그분이 계신다는 것을 네가 인정하고. 그분이 계신다. 그분이 계시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에 대해서 네가 올바른 행위를 가지라, '또 나를 믿으라'  그분이 계시고 그분이 모든 것 다 가지시고 그분이 생사 화복도 다 가지시고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주권 개별 섭리자이신데 너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을 딿고 그분을 믿고 그분과 관계를 갖고 싶지만. 갖고  싶지만 너는 마음만 소원이지 안 된다. '하, 그분 사귀고 싶다. 그분하고 이런  관계를 맺고 싶다. 그분에게 속하고 싶다 그분을 믿고 싶다. 그분을 닮고 싶다.

그분과 친교를 가지고 싶다. 나는 그분의 것이 되고 싶다.'  제가 중생은 열 두살 먹어서 중생 했습니다. 열 두살 먹어서 그때에 학교를  가는데, 저의 면에서 학교가 없어서 이십 리를. 이십 리를 걸어서 웅양 학교라  하는 그 학교를 걸어갑니다. 새벽밥 먹고 그래 가 가지고 그래 인제 공부하고  오고 하는데, 그때 고운서 권사님이라는 그분이. 목사 돼 가지고 순교했다 말을  들었습니다. 그만 남북이 갈려서 만나보지 못했는데 그분이 가면서 말하기를  '예수 믿고 하나님 공경합시다' 이라는데 '예수 믿고' 하는 소리는 잘못 들었어.

뭐 예수란 말은 듣기는 들었는데 하나님 공경이란 말만 들었어. 내가 그 소리를  열 두 살 먹어서 학교 가다가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깜짝 놀래지는 것이 '아,  인간이 하나님을 공경하다니? 하나님 공경하는 길이 있나?' 그래서 그때부터 내  마음 가운데는 여러 가지 좀 수수께끼가 생겼습니다. 난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제가 그 학년에 급장이었습니다. 지금은 급장  세력이 없지만 그때는 급장 하면 학교에 공부하러 들어갈 때에 이제 다 모여  가지고 '앞으로 나란히'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앞에 인솔해 가지고 들어가고 또  공부하고 마치면 다 나와서 다 줄 세워 놓고 앞에 나서 가지고 같이 나와 그  학생들하고 같이 서로 경례하고 이래 나뉘어서 운동장에서 헤어지고 그래  했습니다. 그때. 왜정 그때 초기입니다.

 그래서 제 반에 예수 믿는 아이가 안대용이라 하는 그 아이가 하나 있었고  정봉조라 하는 그 아이가 하나 있고 예수 믿는 아이가 둘이 있었습니다.

안대용이라는 그 사람은 지금 ○○교회 장로로 돼 가지고 있고, 정봉조라 하는  사람은 ○○신학교 총무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저와 한반에 있는데. 그래서  저는 급장이고 그냥 그 사람들은 내 밑에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들을 가지고  자꾸 뭐이 나올란가 싶어서 시달리고 또 놀리고 이래 가지고 자꾸 그 하는 것을  유심히 봤습니다. 유심히 보면서 '저게 뭐인가?' 어떤 때는 울려도 보고 이래  가지고 이래 하면서 거기 뭐이 나올란가 자꾸 이래 가지고 이러면서 어쨌든지,  '하나님을 공경하다니? 너거 하나님 공경하나?' 하나님 공경한다고.

 그래 가지고 아주 번민을 많이 가지고 참 '하나님을 공경하다니? 하나님 공경할  수가 있을까?' 그것이 한 십 삼 년 내 마음 가운데에 늘 숙제로 있어 가지고  그때 저는 술도가 하는 사람이니까 방종한 사람입니다. 뭐 오만 짓 다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오. 술먹고 돌아다니다 가서 술을 먹고 집에 돌아가면  가다가는 그냥 못 가니까 사람 하나 데리고 사 가지고 그래 부축해 가지고  갑니다. 가면서, 가면 웁니다. 가다가 울고, 가다가 만일 집에 가서 변소간에  들어가면 그만 술 깰 때까지 그 자리에서 앉아 울고 있습니다. 내가 우는 건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뭐이냐?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을까?' 인생으로  태어난 것이 불쌍하다고 저는 인생이 불쌍하다는 그것을 혼자 한 사흘 동안  운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인생된 게 불쌍해서.

 그렇게 고민하다가 스물 다섯 살 먹어서 윤봉기 목사라고 지금 아마 세상 떴을  것입니다. 윤봉기 목사님이 ○○교파 총회장도 했고 했는데 그분이 권사로  지냈는데, 그분이 우리 술도가 앞으로 지나가면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지나갑니다. 아예 '저거는 술도가쟁이기 때문에 저거는 뭐 전도해 봤자  소용없으니까' 해서 그냥 지내가는 모양이오. 그래 내 마음이 어떻게 섭섭한지  불렀습니다. '뭐 하는 사람입니까?' '아. 나는 예수 믿는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전도하는데 여기 뭐 하러 옵니까?' '이 동리에 오늘 저녁에 모여서 예배볼라  합니다.' '예배보면 왜 나 한테는 전도를 안 합니까?' 이라니까 '아. 예.

미안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우리 집에 와 가지고 전도하십시오. 제가 모으면  오늘 저녁에 우리 동민 하나도 없이 싹 다 모일 수도 있습니다. 모이라고 하면  다 모입니다. 다 모일 수도 있습니다. 전도해 주이소' 그래 가지고 그날 밤에  우리 집에서 모여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했는데, 그때 씨 뿌리는  설교에 대해서 설교를 합디다. 그 설교를 제가 듣고 그때 그 속으로 '아. 내가  예수 믿어야 되겠다 이라면서도 그 작정이 되지는 안하고 그저 알아보겠다고  술도가 하면서 성경을 보는데 하루 마태복음 한 권. 또 마가복음 한 권 누가복음  한 권 이래 가지고 하루 한 권씩을 성경을 술도가 사무실에 앉아 가지고  있으면서 그걸 읽었습니다. 읽다가 마지막에는 어떤 사람 만나가지고 약간  지도를 받고. 농산 교회라 하는 교회에 가 가지고 예수 믿기 시작했는데 첫날  가니까 창세기 1장 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때 내가 거기서 앞에 꺼꾸러졌습니다.

'아, 모든 존재논 모든 존재는 자연 존재라고. 자존이라고 나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창조주가 있다?' 나는 그런 소리를 못 들었어요. '지으신 분이 있지 이래  가지고 거기서 그만 그래 가지고 모든 사람은 천사같이 보이고 나는 죄인이라서  그만 머리를 들지 못하고 그래 가지고 있다가 그 주일로부터 예수 믿기 시작해  가지고 이제 모든 거 다, 술은 사흘 만에 끊고. 술도가는 사흘 만에. 누룩  도가는 열 이레 만찌 다 처분하고 그 돈도 다 처분하고 그래 가지고 이래 예수  믿기 나서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지마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싶지마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겠느냐? 공경할 수 있느냐? 하나님을 믿으라, 네가 성경보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 것을 네가 믿으라. 믿고 그분과 관계를 갖고 싶고 교제를  갖고 싶지만 가질 수가 있어야지?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네가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보다 더 좋은 게 없을 것이다. 땅 위에  암만 좋아도 하나님보다 더 좋은 게 없고, 네가 땅 위에 암만 소망 있어도  하나님보다 더 소망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 한 분이면 다 되고 하나님보다 더  좋은 이가 없다. 더 좋은 이가 없지 만 너는 거기에 올라가지 못한다. 거리가  멀어서 안 된다. 나를 믿으라. 나는 하나님과 너와 그 사이를 중보시켜서  하나님과 너와를 딱 들어붙여서 하나를 만드는 나다 하는 것을 주님이 가리켜서  또 나를 믿으라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읍시다. 성경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연구해서 하나님을 바로 지식하는 데도 이거는  우리가 평생 지식하고 영원히 지식해도 우리는 다 하지 못하고 남은 끝이 또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을 인정하는 거, 어떤 하나님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

그분에게 대해서는 어떻게 행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그분에게  대해서 내가 올바른 관계의 행동과 사람이 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 한  말씀에서 우리가 가져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래서, 성자 후란시스는 자기 제자들과 한 달 동안 기한하고 '이제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 되겠다 너무 자꾸 이렇게 속화돼서 안 되겠다' 하면서 기도하러  가자 해서 기도하러 가 가지고 '나는 하루 한 끼씩만 달라' 따로 떨어져 가  가지고 기도를 하는데, 한 끼씩 달라 그래서 한 끼씩 '밥을 갖다 드리고 숨어서  '무슨 기도하는고 보자' 이라니까 한달 동안을 제자들 이 교대로, 자는 사람  자고 또 잔 사람이 또 깨서 교대하고 한 달 동안 교대해 가지고 지키니까 한 달  내내 기도하는 것이 그 기도라.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이렇게 하고 난  다음에 한참 생각하다가 벌벌 떨면서 못 견뎌 하고 무서워 두려워하고, 또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십니까?' 또 그라고 난 다음에 또 두려워 떨고.

한 달 내내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주님은 누구십니까? ' 이라다가, '주님의  고난을 좀 나에게 주님의 고난은 나 위해 대속한 고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좀 나에게 알려 주옵소서.' 이라니까 후란시스 손에 구멍이  뚫렸고 이 종아리에 구멍이 뚫려서 후란시스가 그 다음에 낫고 난 다음에도 그  흔적은 낫지안하고 그 상처가 죽을 때까지 항상 종기 상처로서 그와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자기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할라고 나무 위에  걸쳐 가지고 나무 위에 이렇게 꺼꾸로 걸쳐 가지고 거기에 있으면서 주님의  고난이 어떠했는가 이렇게 주님의 고난을 알게 해 달라고 하면서 거기에 달려  가지고 이 나무에 질매 모양으로 걸쳐 가지고 있으면서 며칠 계속해서 그말 하고  있더만 나중에 마지막에는 내려와서 봤는데 보니까 손에 못자국이 있고 이  다리에 못자국이 있어서. 이 네군데, 옆구리 창자국은 있었다 소리를 못 들었고  네 군데 못자국이 있은 것을 그 제자들이 목견했습니다. 그래 그 제자들은,  후란시스의 제자들은 '아, 하나님 알기가 이렇게 힘이 들구나 하나님이 어떤 일  하시는 것을 알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주님의 고난이 어떻게 크다는 것을  그분들이 다 알아서 후란시스의 제자들이 그분들 이 세계에 퍼져 가지고 많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후란시스는 수도원에 가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천주교가 타락해 가지고 성경도  못 보게 하고 천주교에 가입하지 안하면 구원이 없다 하고 성경을 이단으로 이래  가지고 성경을 저거 마음대로 꾸며서 자꾸 멸망받는 마귀의 도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 죽여서 수십만명 이 죽었고 이라니까 그때 할 수  없어서 그런 분들은 피해서 저 첩첩 산중에 가 가지고 모여 가지고 살았습니다.

암혈과 토굴에서 살았어. 이러니까 뭐 먹는 거는 근근연명 하고 그렇게 살았으니  그것이 주후 칠백년 경의 한창 수도원이 많이 늘어나고 하는 그 시대입니다.

 이래 가지고 개혁한 종교를 오늘은 낙관해 가지고 저거, 번역자들이 신앙이  하나도 없어. 그래 놓으니까 '천주교와 모두 합동 번역해야 된다 이래 가지고  합동이라면 뭐이든지 좋다 해 가지고, 이제 기독교라 하고 예수 믿는 거는 전부  합동할 것이요 종교는 다 통일될 것이요 종교만 아니라 온 세계는 통일된다는  것을, 요한계시록 7장에 열 뿔이라 하는 것은 땅 위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통일된다는 것을 그것을 벌써 말씀에 놨습니다. 열 뿔의 해석을 벌써 수십 년  전에 하나님이 알려 주셔서 깨닫고 열 뿔은 세계에 있는 모든 힘이라는 걸, 모든  과학의 힘 종교의 힘 지식의 힘 사상의 힘 모든 주의의 힘 이런 모든 종교의 히  전 힘이 똘똘 뭉친 것이 열 뿔이라 하는 것을 벌써 해석을 해서 수십 년 전에  깨닫고 해석해 선포한 사람들은 전파를 했다 그 말이오.

 그런고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거할 곳이 많다 말은 면적이 넓다 그 말이  아니오. 거할 곳이 많다는 말은 천년 살아도 또 새 살이가 있고 만년 살아도 또  새 살이가 있고. 밟아도 또 밟을 것이 있고 배워도 또 배울 것이 있고, 알아도  또 알 것이 있고, 얻어도 또 얻을 것이 있고 거기에는 모든 존재가 무한입니다.

고쳐도 또 고칠 게 있고, 새로 얻어도 또 새로 얻을 게 있고, 거룩해져도, 이제  거룩해졌으니까 다 거룩해졌느냐? 거룩해졌는데 또 더 거룩해져야 되고 또  거룩해져야 되고 또 거룩해져야 되고 더 거룩해지고,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도다' 이거 뭐 공간 세상에 시간으로도 짤막하고 종류도 몇 가지 됩니까?  인간의 필수품으로 가지고 사는 것이 몇 가지 됩니까? 몇 가지 안 됩니다. 인간  일생 동안 네가 몇 가지나 가지고 살았나, 인간이 일생 동안 가지고 산 것을  그게 많은 것 같지만 그 종류를 기록해도 몇 가지 안 됩니다. 몇 군데나 가  봤느냐 몇 군데 안 됩니다. 생각을 얼마나 했느냐 생각도 몇 가지 안 돼. 얼마  안 됩니다. 이 많다 말은 이 세상은 작고 좁고 짧고 얼마 안 되지만 아버지의  집은 무한하다,  '있을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이것이 없으면  너희들에게 이 세상 거 주었지 뭣 때문에 세상을 부인하고 이와 같이 나를  따르라고 하겠느냐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데 마음이 정결한 자가 아버지를 보지 마음이 정결치 않은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했습니다. 착한 양심  아니면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만날 수가 없습니다. 착한 양심이  무엇입니까? 신앙 양심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옳고  바른 참된 것을 찾을라고 하는 것이 신앙 양심이 참된 양심은 신앙 양심, 그  증에 참된 양심은 하나님의 신구약 성경 말씀을 상고하면서 요 말씀대로  어짜든지 내가 마음이나 생각이나 뜻이나 성질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소원이나  욕심이나 대인 관계나 물질 관계나 모든 사건 관계나 내가 땅 위에서 어떻게  하면 바로 하고 옳게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걸리지 않게 바로 옳게 할까, 어떻게  하면 옳게 하고 바로 할까 하는 요 마음 요게 착한 양심입니다. 요게 없으면  예수 믿는다 해도 헛일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외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찾아간다, 선한 양심이  무엇인가? 선한 양심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서 어떻게 하든지  모든 면에서 내가 아직까지 잘못된 게 뭐이 있는가, 잘못된 것을 고칠라고 애를  쓰고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를 쓰는 것, 회개에, 자기의 진심을 다 가지고  회개에 전력하는 그것이 착한 양심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후에 그 다음을 계속하겠습니다. 뭐 이래 가르칠라 하면 얼마든지 이렇지만,  그런데. 그만, 좀 배우면, 안 믿으니까 배워 봤자 자꾸 미끄러져 가니까 소용이  없어.

 오늘 오전에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했으니까 근심하지 않는 사함  됩시다. 모든 땅에 속한 근심 다 버립시다. 이것은 땅에 속한 근심을 말씀하는  것이지 하늘에 속한 근심을 말씀하는 것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근심은 영원히  죽을 때까지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성경에 기록했는가. 성경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고 기록했는지 이분을 우리가 인정하는 사람 되도록  우리가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또 나를  믿으라' 주님은 하나님과 나와의 그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중보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길이라 말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는 길. 아버지에게 가는 거는  예수님이 나를 대형하셨고 대행하셨고 대화친하신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아버지께는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대형하신 이 공로는 아버지께  담대히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들에게 일렀으리라' 이 말씀은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생각해도  우주가 다 그 안에 들었고. 우리의 영원한 양식이 그 안에 들었고. 이 말씀을  떠나서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찾았으며 무엇을 성공했느냐! 다 성공 같은  실패니라. 살았다는 것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었다. 성공 같으나 실패다. 얻은 거  같으나 다 뺏겼다 너는 살아 있으나 실은 죽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너무 세상은 사이비해서 거짓부리의 세상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외식의  도가 많습니다. 너무도 인본의 도가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천주교에서  과거에는 성경을 보지 못하게 수백 년 동안을 그렇게 내려왔습니다. 그라다가  나중에는 성공회라고 '성경을 보되 요것만 봐라' 해 가지고 성경에 붉은 줄로 쳐  가지고 붉은 글로 쓴 성경 있고 검은 글로 된 성경 있고 성경이 두 색으로  기록됐습니다. 그것이 성공회에서 보던 성경입니다. 성경은 보나 요 붉은 글로  기록한 것만 읽어라 검은 글로 기록한 거는 읽지 말아라 그랬었습니다. 지금은  천주교도 성경을 읽습니다.

 이런데 옛날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과거와 현재와 하나의 일관해 가지고  우리는 평가해야 됩니다. 그 사람을 평가할라면 몇십 년 전과 오늘 과의 몇 십  년 동안 그 사람의 생애를 놓고 평가하면 환하게 나옵니다. 너무도 우리는  미개해서 건망증도 있고, 현실로 나와서 당장에 하루에 천사도 되고 하루에  마귀도 되고 코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단 속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읍시다!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우리가 실행합시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 믿는 실행을 합시다. 주님 믿는 실행을 합시다. 아버지 집에는 무한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이게 없으면 주님이 온 세상의 그까짓 거 엿새 동안에 지은  것이야 우리에게 줄라면 대번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업이 아닙니다.

소망이 아닙니다.

 <기도>  주님, 우리는 주님의 피로 대속하였사옵고 영감과 진리로 살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순전히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산 것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죽은 것뿐입니다. 산 것은 주님에게서 새로 받은  것뿐입니다.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이 죽은 것을 주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부활을  시켜 받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아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산 힘이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해 주신 이 계시의 말씀에 온갖 것을 다 우리에게 알려 주셨는데 이  지식의 이 내용의 사실을 믿는 믿음이 우리가 모자랍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확신하고 확신해서 실행으로 온전한 믿음에 나아가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님의 피를 인하여 성령으로 인하여 진리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의  이 계시한 신구약 성경에 계시한 이 내용을 확실히 인정하는 믿음을 우리  각자에게 충만시켜 주시고 인정한 요대로 실행 실천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하신 대로의 지식과 말씀대로의 행위와  말씀대로의 일과 말씀대로의 사람이 되어서 주님이 작정하시고 선포하신 대로  주님의 형상과 영광의 찬미의 사람이 되게 하시옵 소서. 세상의 빛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는 주님의 선물인 믿음으로만 될 수 있는 것을 압니다. 이 시간  주의 말씀으로 이 시간도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로 죽은자를 살려 주시고 병든  것을 완전히 고쳐서 새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렇게 많은 형제들을 불러서 흑암과 사망에서 구출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강한 마귀의 결박에서 주님의 피의 능력과 성령과 진리의 능력으로  해방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사오니 주의  자녀입니다. 주님이 호주되어서 거느려 주시고 저들의 모든 것에 대해서 의논의  대상이 되어 주시고 저들이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시고 저희들의 모든 영육의  신변을 다 지켜 안보해 주시고 저희들의 그 마음의 눈을 밝히시사 살아갈 길을  환하게 보여 주시고 주님 한분 모시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이것으로써 모든  성공과 모든 치료와 모든 안보와 모든 승리되는 이 비밀을 확실히 믿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다시는 마귀에게 유혹받지 안하고 세상에 타락되지 안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뿍뿍 걸어서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승리자로 설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한사람의 믿음으로 온가족이 다 믿게 하시고, 이들을 믿게 하는  종들에게 더욱이 성령의 뜨거운 사랑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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