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소망과 연성

 

1980. 3. 18. 화새

 

본문: 빌 1 :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간절한 기대와 소망 이것을 바로 가지지 아니하면  신앙생활은 헛일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영원한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이 하나님, 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과 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들과 또 하나님의 지으신 것들과 하나님의 섭리로 역사 한 이  모든 사건들과의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에서 지으신 분이시오 또 이것들의 주인이 되는  주가 되는 분이시오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보존하고 주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이분이 제일 크고 또 많이 제일 많이 가지셨고 이분의 권세가  제일 큽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할 분도 이분이요 또 우리가 사귀어 유익을 볼 분도  이분입니다. 이분이 제일 우리가 소망할 분이요 또 기대할 분입니다. 이분과의  관계를 우리가 소망하고 이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잘 이루어지는 그것을  우리가 기대할 것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더듬을 것도 없이 이러하지마는 그 미혹의 악령이 세상에 있어서  우리 마음들을 어둡게 만들고 미혹시켜서 우리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또 미혹을  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이 절대자이신 이 하나님을 소망하고 이 하나님에게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이 이것이 당연한 일이요 뚜렷한 일이지마는 사람들이 이  구원에 하나님보다 그는 비교할 수 없는 무한히 무가치하고 하나님에게 비교해서  하나님에게 비해서 무한히 무가치하고 무능하고 무한히 불진실하고 무한히  사랑이 없고 하는 이런 인간을 하나님보다 만물을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섭리로  된 일이든지 악령으로 말미암아 된 일이든지 인간으로 말미암아 된 일이든지  어떤 일이든지 일들 이것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기고 필요로 여겨서 바래보고  기대하고 쫓고 하는 것은 이것은 분명히 어리석기가 어떻게 어리석은 사람이라  그렇게 평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분명히 미친 사람이요 미친 자요 귀신들린  자입니다.

 우리가 논평해 볼 때에 우리가 평가해 볼 때에 만에 하나도 이럴 수 없는  일이지마는 악령의 그 혼미케 하는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고 미혹시키는 이  미혹으로 인해서 우리의 매일 매일의 생활은 하나님 외의 이 세 가지에 붙들리고  또 세 가지를 욕망하고 세 가지로 인하여 사는 생활이 오히려 많이 점령을 하고  있는 그런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자의 모든 승패에 대해서 첫째 우리 할 일이 뭐인고 하니  성경말씀을 가지고 모든 것을 얼마든지 비판하고 평가하고 쓰여야 합니다.

성경말씀 가지고 이렇게 심사하고 저렇게 심사하고 이렇게 비판하고 저렇게  평가하고 마치 목수가 자를 대고 먹줄을 대고 이것을 확정 지우기 전에는 톱도  다른 무슨 대패도 연장도 대지 안하고 '이것부터 먼저 이거는 몇 이를 잘라야  되겠다 몇 푼을 깎아야 되겠다 얼마의 넓이로 이거는 구멍을 뚫어야 되겠다'  이것부터 확정하고 연장을 대 가지고 해야 되지 이것은 하지 안하고 연장부터 대  가지고 톱이 있으니까 자르고 대패 있으니까 밀고 끌이 있으니까 구멍 뚫고 못이  있으니까 박고 그게 어떻게 미친 목수가 아니고 우리가 정신 없는 목수가  아니겠습니까?  또 그 사람이 무슨 집을 짓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을 보면은 분명히 그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그렇게 단정을 지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단정을 짓는다면 우리 기독자가 멸망케 하는 이 지식인 인간 머리에서 나온 이  지식으로 바닷물 같이 되어있는 바닷물 같이 되어있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막  죽고 몰살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지식이 왔는데 이 신구약  성경을 들고만 있고 이것만 가지고도 다 맞추지를 못합니다.

 영감이라야 맞추는데, 윤곽적으로 이 말씀을 주셨고 이 말씀을 가지고 일차  대충 심사를 해서 바른 것을 찾고 난 다음에 내부적인 이 조성은 영감이라야  되는 것인데 기독자의 살이를 한다고 하면서 아무런 이 말씀 가지고 비판하지  안하고 이 말씀 가지고 평가하지 아니하고 마구 날이 새니까 일어나서 '일  있으니까 일해야 되겠다 먹어야 되겠다 피곤하니까 쉬어야 되겠다' 이것은  우리가 정신 없는 그 목수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정신 없는 목수 그 사람이 정신 없는 일을 해 봤자 이미 죽을 죽음 이미 저주  받은 저주 빼앗긴 그것 실패된 그것이 죽은 그것이 더 죽어서 썩어 가는  것뿐이지마는 우리 기독자들이 이 심사 없이 날뛴다는 것은 영원히 존영할 수  있는 것이 영원히 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이 몸의 활동 이것보다 마음의 활동 정신의 활동이 더 앞서야  합니다. 목회자도 벌써 아랫도리가 성해서 뛰 돌아다니는 열심히 부지런히 뛰  돌아다니는 것, 마치 아랫도리 힘이 좋은 당나귀처럼 또 아랫도리 힘이 좋은  개처럼 뛰 돌아다니기만 돌아다니는 그 목회자 목회 못하고 저 죽고 교인 죽고  다 실패합니다.

 왜? 아, 그것이 심방을 가야 할는지 안가야 할는지 그 말을 해야 될는지 안  해야 될는지 그 일을 해야 될는지 안 해야 될는지 사람마다 형편이 다르고  시간마다 달라지는 것인데 이거는 생각지 안하고 심방은 좋다고 자꾸만 심방만,  기도는 좋다 기도,  어제 어떤 사람이 나한테 전화를 했는데 우리 교회는 지금 철야기도에 불이  붙어서 밤새껏 이래 철야기도 하는데 이것에 불이 붙었는데 다른 교회들은 지금  기도를 그렇게 하지 않는데 이것 어떻습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기도하는 것. 아, 중요하고 좋기는 하지마는 기도하는 것도 죄가 되는 때도  있다 치우치면 안 된다 좀 생각해 보고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할 때 기도하고  하지 마라 할 때에 안하고 모든 것이 믿음으로 해야 된다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해야 되지 하나님에게 피동 되지 안하고 하나님은 지금 이래라 하는데 기도하고  있으면 막 바로 그게 죄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저 잘못을 찾으라고 하는데 그것은  하지 안하고 기도하고 있으니 그것도 죄다  기도는 귀중한 것이지마는 기도하라 할 때에 하는 기도가 귀중하지 아무 때나  기도하는 그것은 아니다. 항상 기도하란 것은 항상 하나님과 연결되어 가지고  움직여라 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지 그러면 밤에는 철야한다고 그것만하면 될  줄 알고 그것만하면 제일이라.

 우리 교회는 철야하는 이가 제일이라 이래만 생각하고 인간이니까 낮에는 자기  일과가 꽉 짜여 있을 터인데 누워 자고 그분을 얼마 안 해서 그 교인들의 가정이  파멸을 당할 것이고, 업체가 파멸을 당할 것이고 결국은 아나니와 삽비라가  회개한 것처럼 그것이 이제 다시 반복으로 돌아갈 때에는 걷잡지를 못할 것이라  하는 그것을 말을 해 줬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기도란 말은 기도라는  말은 어떤 사람 기도하면 그렇습니다. 가만히 보면 이런 데서는 뭐 사람이  많으니까 모르지마는 시골교회서는 강단 옆에서 기도하고 앉아서 보면 쫓아와  가지고서 '뭐뭐뭐뭐뭐뭐 뭐 주고 뭐 주고 뭐 주십시오' 하고 달아납니다. 그만  그게 기도요 뭐 달라고 하는 것 또 조금 나은 사람은 보면 '뭐 잘못했습니다 뭐  잘못했습니다 뭐 잘못했습니다 뭐 잘못했습니다.' 그만 이래 '잘못했다 뭐  주십시오 뭐 감사' 이렇게 하고 달아납니다.

 그 기도를 볼 때에 그 사람이 분명히 자기에게 대해서 좀 살피고 자기 형편을  대해서 살피고 자기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자기 사회라는 사람들을 살핀다면  분명히 자기가 해야 될게 있는데 그것은 참 천 리 만 리 거리가 멉니다. 다른  사람이 말해줘도 모를 만치 거리가 멉니다. 그게 기도랍니다. 그것이 기도  아닙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하란 것인데 하나님을 상대하라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네게 베푸신 은혜가 뭐꼬 하나님은 보배를 나에게 줬는데 나는  보배를 거름자리 파묻어 뒀던지 보배를 저 마등에 내 던져 버려 버리면 다른  이가 주어 갈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보배가 뭐인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보배가 뭐인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뭐인고? 이 면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란 것입니다. 은혜면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뭐 주셨노? 이 면으로  하나님과의 상대를 해라 하나님이 네게 뭐 주셨노?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러니까 '아이구, 이것을 주셨는데 나는 이것을 가졌는 줄도 몰랐고 이것을  보배인 줄도 몰랐고 은혜인 줄도 몰랐고 이것을 예사로이 헌신짝 모양으로  집어던져 버려 버렸구나' 그것을 깨달으면 잘못됐다는 자복이 나오고 또  경하여서 이렇게 무지해서 감사할 줄 모르고 보배인줄 모르는 이 우매무지한  짐승 같은 자에게 이런 보화를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인격 교재입니다. 그것 없이 기계 모양으로 기계 틀어놓은 것 모양으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뭐 주십시오 그것은 다 기도가 아니고 하나의 자기  주관 중에도 자기 주관을 기울여서 뭐 연구하지 안하고 하나의 습관 가지고  하나의 버르징이 가지고 하나의 나쁜 습성 그것 가지고서 날뛰는 것이기 때문에  순전히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대접할 것 중에 제일 대접할 것 그것은 뭐이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을 가치를 알고 소중히 여겨서 그것을 잘 보관하고 그것을 잘  이용하고 하는 그것이 제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말씀하신 것은 사랑하는 자란 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습니다. 버리지 안하고 지도로 다 받고 인도도 다 받고, 가르침도 다 받고,  명령도 다 받고 다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전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것 다  받음으로 옷 한 벌도 피 한 방울도 없이 다 그것 받는 것으로서 끝나  버렸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그 말입니다.

 죽음을 주실 때 죽음을 받고 모욕을 주실 때 모욕을 받고 천함을 주실 때  천함을 받고 이런 것을 연습하는 우리는 이것을 연습해서 숙달하지마는 주님을  이것을 완수했다 그 말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주님과 나와의 내게 주신 은혜면을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기도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또 내게 대해서 주님이 기뻐하신 것이 뭐이며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소망하는 것이 무엇이며 명령하는 것이 무엇이며  섭섭해 하는 것이 무엇이며 노여워하는 것이 무엇이며 주님이 내게 준비해  가지고 들고 있는 징계가 무엇이며 이것을 찾고 찾는 것이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찾는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안 하는 것보다 낫지마는 다른 것을 해야할 때에 기도하는 그 기도로  죄짓는 것이나 다른 것 하라고 하는데 성경 보는 것으로 죄짓는 것이나 다른 것  하라고 하는데 사랑하는 것으로 죄 짓는 것이나 꼭 같습니다.

 죄라는 것은 어떤 것이 죄냐? 하나님에게 피동 되지 안한 것은 다 죕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이지 않는, 그 분에게 피동 되지 안한 것은 다 죕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물질과 모든 사건들 속에 심기어져 가지고서 가는 우리들이,  그러면 하나만을 상대한다면,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좋아하고, 하나님만  바래보고, 하나님만 노래 부르고, 하나님만 말하고 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라 할 때에도 있습니다. 너는 일 좀 해라 할 때도  있습니다. 너는 이 물건에 대해서 어떻게 좀 처리해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움직이시는 대로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시키는 대로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을 시키든지 물질에 대해서 시키면 물질에 대해서 해야할 것이고 인간에게  대해서 시키면 인간에게 대해서 해야할 것이고 사건에 대해서 시키면 사건에  대해서 해야될 것 아닙니까? 이러기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모든 세상살이를  해야될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자기가 물질을 상대하는 것이 죄 될 때도 있고 의 될 때도 있고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죄 될 때도 있고 의 될 때도 있고 사건을 자기가 붙들고  처리하는 것이 의 될 때도 있고, 죄가 될 때도 있고, 우리 기독자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단절입니까? 세상을 버릴 때도 있고 세상을 취할 때도 있고 세상을  사랑할 때도 있고 세상을 미워할 때도 있고.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기도를 합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의논해 가지고  한다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 말이요. 그러기에 기독자들은 명상 없이  날뛰는 자는 명상 없이, 눈감고 생각하는 것 없이 우리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귈 것입니까?  성경에 나타내서 하나님은 이러하신 하나님이라, 이런 일 하시는 하나님이라  하는 하나님으로 그런 일 하시는 하나님인줄 알고 그런 일을 자기가 할 때에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은 노여워하시고 미워하시는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알고 하나님 노여워하시고  미워하시는 일을 버리고 그것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 노를 직접 푸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성경에서 나타내신 당신을 나타내신  그대로 성경으로 당신을 나타내신 그 성경에 나타내고 있는 그 하나님으로  상대하고 또 성경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따르고 어떻게 노여워하고  어떻게 친근하게 어떻게 대우할 수 있다 하는 그 종류 그대로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원히 볼 자는 없습니다. 이제까지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고  앞으로도 하나님을 볼 자가 없습니다. 성경에 볼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는 형체도 없고 물체도 없는 무형의 존재입니다. 왜 무형의 존재냐? 그는 형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완전자이기 때문에 어떤 그 형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완전자이기 때문에 완전은 무슨 형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벌써  제한으로 국한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러기에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그 분이 어떠하신 분인지 그  분의 역사 하심, 역사 하시며 나타난 그 나타난 그분에 역사 하심을 보아,  그분은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며 어떤 욕망, 포부를 가지신 분이시며 어떤  지식을 가진 자이시다 하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못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완전자기 때문에 못 봅니다. 뭐라고  비유할까.

 아주 무식한 사람에게 그는 보통을 초월한 과학자가 있다 합시다. 그 과학자가  그 과학자가 어떤 가치의 과학자인지 제가 한자리 있으면 압니까? 한자리에  있어도 모릅니다. 말을 하면은 압니까? 말을 해도 모릅니다. 모르지 않겠소.

 얼마 전만 해도, 여기에서 말을 하면 백 리 밖에서 듣는다. 그런 뽀얀 거짓말을  어데 한단 말인가? 줄을 조그만 못줄만 가지고 있으면 만 리 밖에서 듣는다 말도  아니다. 조그만한 그 못줄 같은 그 끄내끼로 말이 어떻게 만 리를 간단 말인가?  혹 십 리나 이십 리나 갈는지 몰라도 완전히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화가  나오고 나니까 안다 그겁니다. 못줄로 아무것도 없어도 몇 만리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얼마든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지 않소? 일반  지식화 되지 않았습니까?  아주 무식한 사람에게 권위 있는 유식한 과학자가 그 암만 본다고 볼 수가  있습니까? 알 수 있습니까? 말도 모르는데 그 사람을 알 수가 있습니까? 또  악인이 성인을 모릅니다. 거짓된 자가 진실한 사람을 암만 한자리 같이 살아도  모릅니다. 이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우리가 볼 것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성경으로 나는 이런 분이시란 것을 나타낸 그 성경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그대로 알고 그러고 나면은 성신의 감화감동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란 것을 그분에게 알려줘 가지고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 우리의 육안으로 보는 줄 압니까? 우리의 눈으로  이 육체의 눈은 아주 허무한 것입니다.

 이 본다는 것이 너무도 범위 좁고 아주 어둡고 둔하고 정확성이 심히 적은  것입니다. 이 껍데기에 대충 아주 외부적 생활 할 때에 약간 써먹는 것이지, 그  보다는 마음의 눈이 더 밝습니다. 마음의 눈보다는 영의 눈도 영체라도 있어야  그걸 보지 영체 없는데 그걸 볼 수 없다 말이요.

 우리가 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하는 대로하는 것이 하나님  대접으로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방편을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우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이 물질계에 있는 이 물질계에 있는 영계에 있는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접촉할 때에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이 되고 이것을 하나님을 거슬려서 접촉할  때에 하나님을 바로 거슬리는 것이 되고,  이러기 때문에 우리를 탁월하신 이 창조주 이 하나님을, 하나님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에게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것,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잘못하는 것이 볼 수 없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잘할 수 없다 이것입니다. '보는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거짓말이라' 이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가 행동하기는 이  피조물과의 행동하도록 이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은 피조물에  대해서 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행동은 사람을 사랑하는 행동은 사람에게 직접 저희들에 대해서  사랑하는 그것은 헛일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행동은 어데 다 대고 해야 되느냐 이 볼 수 없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내가 이렇게 해야  되지 사람을 상대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대해서 그 사람에게  대해서 하는 행동이 네가 하나님에게 대해서 하는 행동으로 그 사람에게 대해 할  때에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할려면 사랑하는  행동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해야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할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행동을 피조물에 대해서 해야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된 세상에 거짓된 세상에 거짓된 것이 많이 태산보다 많고  바닷물보다 많은 이 속에 참된 것이 한 개만 끼어 있다고 할 만치 이만치 희귀한  하나님의 바른 지식이 우리에게 왔는데 우리가 이 대대손손이 우리는 이 거짓된  지식에서 죽고 죽고 또 죽어서 완전히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가 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인데,  우리 생각대로 막 하고 우리 마음대로 막 하고 욕심대로 막 하고 제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제 생각대로 다하고 제 맘대로 다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게 생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좋은 것이 끼여 있을 수가 없소.

전체가 저주와 사망뿐입니다. 이러기에 믿는 사람은 좀 생각해야 됩니다. 믿는  사람은 명상이 많아야 돼요.

 마치 목수하나 데려다 놓으니까 이것이 집을 지을려면 그 길이 얼마짜리 얼마  있고 구멍 몇 개 파야 되고 뭣이 어째되고 이러니까 이 재료가 모자란다 재료를  더 가져와야 되겠다 또 이 재료를 갖다가 지금 갖다가 어떻게 재재를 해야  되겠다 이것도 생각지 안하고 몇 개 갖다 놓기만 갖다 놓고 '아이쿠 많습니다.

그러면 이만하면 되겠소 아이쿠 이만하면 이 집 짓고도 남습니다.' 십 분의 일  백 분의 일도 모자라는 것을 그만하면 된다고 하는 그 목수가 그 사람을  망합니다. 망치요 그 사람을 망칩니다. 그 건축주 주인 망치요 그럴 것 아니겠소  생각지 아니하고 사는 인간은 자기 건설은 다 망쳐 버리고 맙니다. 자기 건설은  망치고 마요.

 이것이 또 그렇다더니 당장에 보더니마는 톱을 척 보더니마는 톱이 이 날이  좋다 도끼가 좋다 하더니마는 무조건 끊어 재낍니다. 무조건 끊어 재끼요 '아,  이것 이래 끊어도 됩니까?' 주인이 보니까 의심스러워 '이것 끊어도 됩니까?'  아, 톱은 나무 끊으라고 하는 것 아니요 목수가 나무 끊는 것이 목수 할 일이지  뭐입니까 마구 끊어 재낍니다. 마구 패 재낍니다. 그게 무슨 집을 지을 것이요.

 생각 없이 활동하는 인간은 성공을 못 보는 것입니다. 세상일도 조금 생각해야  되는데 기독자는 명상이 많아야 됩니다. 일을 못해도 명상이 많아야 됩니다.

악령이 주는 미혹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피곤해서 쓰러지지 빈틈없이 할 일은  일생동안 자기에게 꽉 박아 있습니다. 틈이 없습니다. 악령이 이렇게 틈 없게  만들어 놔야 구원 이루지를 못할 것이기 때문에 빈틈없이 했는데 제가 그 일  다하고 나서 예수 믿겠다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생각해서 자기가 주를 위한 일이 아니라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는  일이 기도만 주님을 위하는 일이 아니요 전도만 주님을 위하는 일이 아니요  직접의 일도 간접의 일도 간 간접의 일도 있습니다. 간 간접의 일을 해야 할 때  직접으로 하면 헛일이요.

 우리가 흙이 변하여 거름이 되고 흙이 변하여 거름이 되고 거름이 변하여 모든  세균 곤충이 되고 곤충, 세균이 변해요 채소가 되고 채소가 변하여 우리의  식물이 되고 우리의 식물이 변하여 피와 살이 된 것입니다. 이런 순서를 거쳐야  되는데 이런 순서를 거치지 안하고 흙을 제가 바로 먹을 수가 있겠소 거름을  바로 먹을 수 있겠소? 식물도 거름을 바로 못 먹는 것입니다. 거름 그것이 눈에  안 보이는 전부 버러지가 됩니다.

 버러지가 일단 돼 가지고 버러지가 돼서 식물에 고기가 될 때에 식물이 그걸  먹는 것입니다. 쌀이라든지 어떤 그 채소라든지 그것이 됐으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피와 살이 되는 줄 압니까? 아니요 그것이 우리 몸 안에 들어와 가지고서  또 썩습니다. 또 썩소. 썩어서 그것이 전부 다 균이 돼 버립니다. 균이 됩니다.

균이 되면은 그것을 또 다 죽어서 아주 그거는 우리 피와 가장 점점 가깝게 살과  가까워지게 된 그때에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간접 간 간접 자기가 먹든지 마시든지 이 일 하든지  저 일 하든지 청소를 한번 할지라도 무슨 식물하나 심을지라도 짐승하나  기를지라도 잡아먹을지라도 다 주로 인함이 아니라면 자기 비판대로 이것은 주를  위하는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 주를 위하는 동기가 주로 인해서 시작되고서  목적이 주로 인하고 또 향방이 주를 향하여서 또 방편이 주의 주시는 그 방편을  써서 나가는 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하지 안 하는 것은 다 죄"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밥  먹는 것도 죄, 자는 것도 죄, 노는 것도 죄, 일하는 것도 죄, 기도하는 것도 죄,  성경 보는 것도 죄, 전도하는 것도 죄, 무엇이? 믿음으로 안 하면 하나님에게  피동 안 하면 다 죕니다.

 이렇게 물질이라는 것도 이런 순위가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정반대 되는  하나님과 원수 되어있는 생명에 반대되는 사망되어 있는 이것이 생명을 향해서  화해져 가고 하나님화 되어 가는 여기에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하면 됩니까?  자기가 두서너 가지 알면 그대로 하면 됩니까? 아니요 성경을 생각하고 생각해서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서 그것을 말하면 성경을 쪼갠다고  성령이 오시면 되지 그런 어리석은 소리하면 안됩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 한 성구를 인간이 암만 그 사람이 해석을 한다 해도  성경이 많으니까 뭐이 뭐인지 사람들이 모르니 한 성구 거기에 수많은 다른  성경이 있는 것을 그 한 성구를 갖다가 하나를 문제로 내세워 가지고 모든  성경에 있는 것을 다 들추어서 이렇게 말해주는 그 하나로 모든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 제가 아무리 위대한 성경 해석자라 할지라도 그 성구를 가르치고  있는 성경에 있는 전 도리를 말할 자는 없습니다. 그게 내나 성경인데 그렇게  낙관시 하고 그렇게 안일주의로 게을하게 성경을 보는 사람은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들은 생각이 많아야 됩니다. 생각이 많아야 돼요. 생각도  무서운 생각들이 많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가르쳐서 공상이라 말합니다.

소용없는 생각을 가르쳐서 공상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말하는  것을 공상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또 자기가 어떤 그 세상 무엇을 하나 두고서  이렇게 생각하는 그것을 가르쳐서 욕심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욕심이라. 자기가  어떤 그 미워하는 것을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감정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게 생각만 하면 됩니까? 어떤 사람은 기도하러 가 가지고서 기도하러 가는  것이 내나 집에서 자기가 미워하는 것 자기가 소원하는 것 고놈을 가지고서  복잡한데서 그것을 소원할라 하니까 복잡한데서 마음이 흩어지니까 소원이  주먹덩이 만치밖에 안될 터인데 이걸 다 세상일 다 집어던지고 저 산중에 가  가지고 밥까지 굶고 생각하니까 이 주먹덩이 만한 욕심이 산더미 같은 욕심이  돼버리고 맙니다. 그것이 기도랍니다.

 우리는 생각을 가져야 되는데 뭘 가지고 생각해야 됩니까? 목수가 설계도안을  가지고서 생각해야 되겠고 설계도안을 가지고 생각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잣대를 가지고서 생각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먹줄을 가지고서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잣대를 잡아야 되고 먹줄을 잡아야 되지 않습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설계도입니다. 설계도요.

 이러기 때문에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 성경이 말하는 성경이 인간을 설계하는  데에는 인간은 이런 이런 이런 이런 인간이 돼야 된다 행위는 이런 이런 이런  행위가 되어야 된다 모든 것을 설계한 설계도가 성경이요 막바로. 이것은 대충  요새 건축자들이 설계하면은 두 가지 설계하는데 하나는 허가 내는 대충 설계요  하나는 실지로 공사할 시공 설계인 것처럼 신구약 성경은 허가 설계요 대충  설계요 성신의 감화가 시공 설곕니다.

 이러니까 성경 말씀 가지고서 윤곽적으로 생각해야 되고 성경말씀 가지고서  이거는 해야 되나 안되나 대충적으로 해야 되고 한다해도 성경대로 했으면  답니까? 아니요 우리에게 볼 때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 가지고서 모든 일을  하실 때에 바리새 교인들이 반대해서 예수님을 이거는 이것 보니까 하늘에서 온  자가 아니고 이거는 귀신들린 자라고 이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지  아니했습니까 그들이 뭘 근거해 가지고 그랬습니까 어떤 박사의 말을 근거해  가지고 그랬소? 왕의 말을 근거해 가지고 그렇게 했소? 어떤 제사장의 말을  근거해 가지고 그랬습니까? 뭘 근거해 가지고서 그랬지요? 네 성경을 근거해  가지고 그랬습니다. 성경을 근거해 가지고서 성경이 이렇기 때문에 이렇다  했습니다.

 성경만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로 더불어서 시비해서 첫째  마귀로 더불어 전투하는 이 전투하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이 전투를 붙였는데  전투할 때에 마귀가 예수님을 해할려고 달려들 때에 무슨 무기 가지고  달려들었습니까 전부 성경말씀 무기 가지고 달려들었습니까? 성경이 이러니까  이래라 이러니까 이래라 이러니까 이래라 하지 안 했습니까? 그럴 때에 예수님도  성경말씀의 무기를 가지고 그를 절단 냈습니다. 그래 승리했습니다.

 이러니까 성경말씀만 가지고도 자기 신앙양심과 인격을 써서 영감을 받지  않으면 헛일하는 것인데 성경말씀도 집어 던져 버리고 현저히 성경 말씀에  뚜렷한 것도 버리고 성경 말씀은 생각지 안하고 제 생각대로 어떤 인간이 말한  대로 제 감정대로 자기 현실 당하는 형편대로 하는 그것이 자기 감정대로 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 주관대로 하는 것 아니겠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거야  세상에 좋다고 해도 세상에서는 먹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먹는 것이 제일 좋소 뭐 행락이라고 하지만 그까짓 것 암만  그래도 열흘만 굶겨놓으면 행락이고 뭐이고 먹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제일 중합니다. 이래도 먹는 것도 자꾸 먹이면 당장 죽어  버립니다. 당장 안 죽겠소? 제일 안 믿는 사람이 제일 중하고 제일 귀중하고  제일 필요 있고 요긴한 것이 먹는 것이지마는 지나치면 그것으로 죽습니다.

 이런데 어떤 자는 전도한다고 전도만 어떤 자는 기도한다고 기도만, 하나님께서  전도만 하라했으면 그것만하면 되지요. 그러나 그 전도에는 모든 것이 구비한  것이 있습니다. 이 천장에 보짱 이거 한다는 것이 당장에 보짱만 되는 것 아니요  보짱만 올려놓으려면 사람 죽습니다. 물건 됩니다. 그 보짱이 올려지는 데는  모든 밑에 구비 조건이 다 돼 가지고서 그것이 이제 건축되어 나가는 것이란 그  말이요. 자기가 전도를 한다고 해도 전도하는 데는 자기 전도하는 것이 그것이  효력이 나느냐 안 나느냐? 하는 데는 모든 기초적이 구비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모든 신앙 행위가 구비해져서 내가 말하는 것이 내가 말하는 것이나  전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과 권능에 성령이 나타나시고  권능이 나타나는 것으로 해서 너희들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지 안하고  하나님의 권능에 있도록 할려고 한다 하는 그것이 전도해도 권능이 같이 해야  되지 입술만 날뛰면 됩니까 다른 사람이 밉상으로 보지 그 사람이 전도하는  데마다 다 전도가 막혀버리고 말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양성원에서 공부하는 여러분들은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명상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대해서 생각하고 자기에게 대해서 생가하고 모든  간증자들 지나간 나쁜 선배 좋은 선배 과거에 모든 실패의 선배, 성공의 선배,  저는 별 사람인줄 압니까? 자기도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주의하지 안 하면  빠지지 별수 뭐 있소? 또 앞으로 어떤 것이 있을 것인가? 내 지혜가 부족하니까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한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해라' 하나님에게  지혜 구하는 것 뭐이요? 하나님이 지혜로 쓰라고 성경 말씀을 줬는데 성경  말씀을 무시하는데 무슨 지혜를 준다 말이요? 지혜를 하나님에게 달라고 하는  것이 신구약 성경을 모조리 금쪽 같이 여겨서 이 지혜를 쓸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달라고 입술로만 하면 됩니까?  그것을 성경에서 미워해서 말씀하시기를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로  아느냐'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로 아느냐' 이것이 외식자의 기도입니다.

누가 말한다고 듣습니까? 그 인격을 보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네 가지 위에 있는데 지금 내가 어디다 뿌리박고서  무엇으로 자라가고 있는지 나는 어데 피동 되고 있는지 어데 속하고 있는데  우리는 무식해서 그 사람 속에 있는 병을 말을 해도 모르지마는 그게 많이  숙달된 의사들은 진찰할 것 없이 사람 보면은 무슨 병이라는 것은 알고 또  찍해야 본다는 것이 혓바닥, 눈 그만 그것 보면 다 알아 또 색깔 보면 알아.

 이것처럼 우리가 신구약 성경 말씀에 이 안약, 이 안약을 바르면 신구약  성경말씀으로서 자기를 치료하는 자기 마음을 치료하는 지혜를 치료하는 신구약  성경 말씀으로 지혜를 치료하고 마음을 치료하고 성질을 치료하고 욕심을  치료하고 성령의 욕심을 가지고 치료하는 눈이 환하게 밝으니까 인간 제가 천  껍데기 만 껍데기로 둘러싸도 압니다.

 다만 모르는 것은 그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를 했을 때에 모릅니다. 언제 어떤  사람이 회개를 했는지 회개했을 때에는 다 깨끗한 사람으로 보이지요 하나님도  그렇게 보요. 그러나 그것이 또 죄 지어서 어떻게 된다는 그것은 하나님만이  알지 맛배기 인간은 모릅니다. 오늘 성자가 내일 악인이 될 것은 우리는 몰라요  그러나 현재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란 것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 없이 살지 말고 생각해서 무슨 일든지 시작은 천천히 해야  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는 더디 하라' 했소. 모든 시작은 천천히 하고  시작한 일이라면 후회가 없는 일을 시작해야 됩니다. 시작한 일이라면.

 인간이 절대성은 가지지 못하지마는 인간이 시작한 일로서 잘못된 일은  있습니다마는 후회한 일은 없어야 됩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전지자가 못되기 때문에 시작은 했는데 나중 보니까 잘못됐소 그런 것은 있을 수  있소.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말 것 하는 후회는 없어. 왜? 자기가 그걸 시작할  때는 자기 양심껏 힘껏 자기 이상으로서는 자기로서는 그 이상 생각할 수가  없어서 자기로서는 가장 옳은 것을 했기 때문에 자기의 무지를 무지한  자기에게는 그것이 마땅하다 그 길밖에는 갈 수 없다 그 길밖에는 선택할 수가  없고 그런 계획밖에는 가질 수가 없었던 내이었다 그렇던 자기라는 것을 깨달을  것뿐이지.

 그때 이리할 것을 잘못했다 후회는 없는 것이 참된 기독잡니다. 잘못됨이  없어서 후회 없는 것 아니라 자기로서는 그럴 때 그 이상 더 옳은 것을 택할  수가 없으면 했으면 후회는 안 돼. 하나님이 볼 때에도 너로서는 그 길밖에는 갈  수밖에 없다는 그것 인정하시지 네가 알 수가 있었는데 네가 거슬렸다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담시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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