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순서-펠라기우스-칼빈

 

1988. 1. 20. 수밤

 

본문: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기독교 가운데에 펠라기우스주의라 하는 그 교파가 있었습니다. 이 교파는  하나님의 인도는 받으나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간다 하는 그런  교리와 신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순전히 행함으로 인간의 구원이 되지  다른 걸로 되지 않는다 하는 주장들이며 또 사람이 알면 행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하는 그런 교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또 칼빈은, 사람들의 구원은 절대 하나님의 주권 은혜이다. 하나님 그분 한  분에게 달렸고 그분 혼자 인간 구원을 이루신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칼빈주의입니다.

루터파는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사람이 반대만 안 하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는 것이 루터파의 깨달음입니다.

또, 감리교 요한 웨슬레파는 사람과 하나님의 힘을 합해 가지고 구원은 이룰수  있다. 이래서 각각 깨달음이 다릅니다.

이 깨달음들이 다 일방적인데 그 중에 칼빈의 깨달음이 제일 올바른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칼빈의 깨달음에 폐단되는 일이 있는 것은, 구원은 궁극적 구원이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지 인간은 그 하나님의 구원을  항거할 수도 없고 또 인간의 노력으로 가감도 할 수가 없다 하는 것이 칼빈의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중에는 칼빈의 깨달음이 제일 낫지마는 여게는 사람들로 위험성이 있고  미혹성이 있습니다. 어떤 위험성이 있고 미혹성이 있는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니 하나님이  주권 의지로 예정하신 구원을 주권의 능력으로 다 성취하시는 구원인데 인간이  추호도 가감할 수는 없으니 이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라. 그러니까  인간이 힘을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안 쓴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라 하는  여기에서 칼빈주의를 좇는 사람들의 폐단이 많이 있습니다.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구원은 구원입니다.

그 루터파에서 생각할 때에 자기가 거부만 안 하고 보니까 하나님 은혜가 와  가지고서 역사하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거부만 안 하면 된다 하는  그 거부파입니다. 거부만 안 하면 된다.

또, 요한 웨슬레파는 하나님하고 사람하고 둘이 힘을 합해야 된다. 그것도  자기네들이 해 보니까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힘을 쓰니까 되고 힘 안 쓰니까 안  되고, 또 힘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떨 때는 힘 안 써도 되고 이러니까  자기네들 신앙 체험에서 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또, 펠라기우스주의는 ‘우리의 구원은 꼭 사람이 힘써 행함으로 된다. 행함이  없이는 구원이 안 된다. 사람이 무엇이든지 할라고 하면 된다. ’ 이래 가지고  그들은 ‘못 할 것이 없다’ 행함에 대해서 그들은 전능과 같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라다가 이 근경에는 그 실지로 따져 보니까 잘못됐다 해서 이제는  펠라기우스주의가 둘로 갈라졌는데 하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이고 하나는  온펠라기우스주의라. 반은 하나님의 그 은혜와 행함으로 된다 하는 것이 이제  변해서 반반으로 된 것이고 지금도 ‘구원은 행함으로 된다. 행하지 못할 것이  없다. ’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들이 체험 가운데서 그라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의 교리가, 절대 주권 하나님의 의지대로 예정한 것을 하나님의 주권의  능력으로 예정한 것을 성취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요것이 꼭  올바로 깨닫기는 깨달았습니다.

이러니까,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뭐 절대 예정, 절대 주권 성취 이런데 인간이  한다고 뭐이 되며 안 한다고 뭣 되며 또 반대한다고 뭐 되겠느냐, 이러니까 그저  하나님께 맡겨 놓고 우리는 되는 대로 이루어져 갈 것뿐이지 우리가 뭐 발동할  것이 없다 그렇게 하는 고 미혹의 폐단을 받아 가지고 손해보는 일이 많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이 루터파에서 깨달은 것, 알미니안주의에서 깨달은 것,  펠라기우스주의에서 깨달은 것, 칼빈주의에서 깨달은 것 이 넷을 똘똘 뭉쳐서  하나가 돼야 실상은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거부만 안 하면 된다, 또 둘이 힘을 합해야 된다, 인간의 전 힘으로써,  인간의 힘으로써 된다, 또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된다. 이렇게 오늘까지 뚜렷히  세계 교회에 넷 주의가 제일 큰 주의로서 점령을 하고 큰 교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있는데, 이것이 다 이리저리 치우쳐서 곁길을 가고 칼빈주의는 맞으나 사람들이  유혹받을 수 있는 그런 길이 막혀 있지 안해서 실패를 많이 합니다.

그러면, 정로는 어떤 게 정로인가? 기독교의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의 그  은혜인데 주권 그 은혜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그 과정과 방편에 있어서가  문제입니다.

이루어지는 과정과 그 방편에 있어서 꼭 사람이 자기가 한 것으로,  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이. 자기가 한 것으로 여겨질 만치 ‘틀림없이 이거는 내가  했다’ 자기가 하니까 되고 안 하니까 안 됩니다. 전적 자기의 노력과 힘으로  구원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보여질 만치 자기가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해야 되는  것이며, 또 이렇게, 펠라기우스주의대로 이렇게 깨달아서 하다가 보니까 자기 혼자 힘만  가지고 안 되고 하나님과 둘이 합작을 해야 이 일이 완전히 되더라. 보니까  혼자만 가지고 안 되고 하나님하고 합할 때 일이 바로 잘 되더라.

또, 전적 하나님이 하시는데 우리에게 그 은혜를 거부하고 있는 이 패역이 있어서  안 되지 그 패역만 없어지니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우리에게 와서 다  이루어지더라 이렇게 말할 만치 이 구원은 꼭 자기 힘으로 해서 되는 것같이  여겨질 만한 그 순서를, 펠라기우스주의의 그 순서를 통과해 가지고 되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자기 힘으로만 해 가지고서 되는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이 순서와 방편을 통해  가지고서 이루어지는데 ‘이거는 내가 했다. 이거는 내 힘으로 했지 내가 하니까  되고 안 하니까 안 되더라. 내가 힘써 하니까 되고 안 하니까 안 되더라. ’ 하는  요 방편과 ‘암만 해도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되더라’ 하는 그런 또 그 방편이  나올 때 있습니다. 그런 방편과, ‘또 이것은 우리가 반대만 안 하니까 돼지더라’  `합하니까 돼지더라’ ‘이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다' 이렇게 하는 요렇게 아롱아롱  해서 사람들이 참 그걸 원만히 완전히 판정해서 자기가 논증할 만한 그런 하나의  단순한 것으로 되어지지 않는 그런 순서를 통과해 가지고 되는 것이 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제일 처음이 펠라기우스주의대로 해야 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런데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고다음에 좀 들어가서 보면 ‘아니다. 하나님 힘만으로만 되는 것이  우리하고 합작을 해야 된다. ’ 또 이렇게 힘써 나가다가 보니까 ‘이는 우리가  반대만 안 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한다고 되는  그거는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인데 반대만 안 하면 된다. ’ 또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궁극적 은혜의 구원이다’ 이렇게 되는 이 순서의 과정을 어떤 사람은  요 과정을 보고서 말한 것이고 어떤 사람은 조 과정을 보고서 말을 해서 되는  것인데, 어쨌든지 천국은 힘씀으로 얻는 나라가 천국나라입니다. 힘씀으로 얻는 나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하는 말씀이 지금 말하는 이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은 능력 있는 자가 얻는 것 아니고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힘쓰는 자가  얻는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의 구원을 이룰 것으로 생각할 것인가? 자기가 한  것같이 힘쓰는 그 힘을 쓰지 안하면 안 된다. 자기가 하는 것같이 여길 만치,  자기가 하니까 되고 안 하면 안 되고 하는 자기가 한 것같이 여겨지는 그 방편의  힘을 쓰는 그것이 하나님께서칼빈주의와같이전적 은혜로 주시는 그 구원을  제가 바로 받는 정도의 것이다.

그렇게 죽자껏 힘쓰는 것이 그게 기껏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거부 안 하는  정도의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을 주시는데 하나님하고 나하고 둘이 겨우 합작하는  정도의 힘이다.

전적 하나님의 은혜인데 은혜로 주시는 공으로 주시는 것을 받는 정도의 힘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각각 깨달음이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 구원은 어떤 면이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반적 일을 보면  자기가 자기 힘으로 힘써 자기 힘으로 해서 되는 거와 같은 그런 방편을 통해  가지고서 됩니다.

이러기에, 성경에는 여러 가지 이적과 그 모든 표적들이 있는 것도 그저 기록만  해 놓으니까 ‘그 사람이 믿으니 하나님이 그와같이 하셨다’ 이렇게 간단하게  기록돼 있지마는서도 그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그 실상의 과정은 자기의 믿는  것이 이 심리학자들이 분석을 한다든지 또 인간의 이 모든 신경학자들이 분석을  할 때에는 그는 그 신경을 그렇게 쓰면 그 병은 낫는다. 또 심리에 그렇게 되면  심리 작용으로 낫는다. 이는 순전히 심리 작용으로 정신 작용으로 신경 작용으로  그 안에서 변화가 될 수 있다 하는 그렇게 논할 만치 그 사람이 거게 대해서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고 믿는 것, 애를 쓰는 것이 ‘이렇게 네가 해 가지고 나은  것은 이것은이 심리학자들이 볼 때는이거는 순전히 심리 작용으로 이만한  작용으로써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 아닌 사람들도 이 심리 작용으로  그런 모든 치료되는 것 그런 것이 있다.

또, 이런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참 정신일도 금석가투라고서 이제 사람의 그  정신이라 하는 것은 돌도 쇠도 꿰뚫을 수 있다, 손 대지 안하고 뚫을 수가 있다  하는 것처럼 그 사람의 정신력으로 그래 된다.

이 세상에서 차력이니 최면술이니 하는 그런 거 다 인적 요소를 연단시키고  집중시켜 가지고서 되어지는 그런 것을 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도 또 다 보고  있기 때문에 이 기독교도 일종의 그런 것으로 되어진다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분석을 할 만치 하나님을 믿는 것, 바라보는 것, 또 자기가 그 일을  성취시킬라고 역사하는 것 이런 것이 인간의 힘만으로도 이거는 된다, 이거는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됐다, 자기가 해 놓고서 이거는 내 힘으로 됐지 내 노력에  내가 열심히 하고 내 노력으로 이와같이 이게 된 것이지 이거 무슨 객관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다 여길 만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방편의 순서를 통과해  가지고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는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출애굽에서 이적을 행할 때에 그때에 첫째 둘째 세째까지는  복술들도 그 이적을 행했지마는서도 그다음 네째부터는 그 이적을 행하지 못하고  네째로부터 열 한째까지는 복술들이 막지도 못했고 따라오지도 못한 것처럼  이렇게 인간이 하는 것과 인간이 하는 그 이상 차원에서 되는 거기에 나아갈  때에 비로소 인간의 정신이나 심리나 이런 것으로써 인간의 노력으로나 되는  것이 아니고 이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됐다 하는 것이 구별이 되지 그  이하에는 사람들이 알송달송하게 그렇게 인적 요소로 됐다고 할 만치 그만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루어지는 것이 이 세상 믿음 없는 사람들은 순전히 인적 요소로  됐다고 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정도 그 이하에까지는 그렇게 다 말할 수  있지마는서도 인간 정도 이상에 초인간, 인간의 심리, 정신, 모든 노력, 연단 그런  것을 초월한 그다음부터 되어지는 거기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알  수가 있고 인간들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판정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정도에 갈 때까지는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다 이거는 인적 요소로  된 것이지 무슨 객관의 역사로 된 거 아니다 그렇게 그들이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이 말하는 순전히 인적 요소로 이렇게 인간으로서만  하는 것은 인간 정도에서만 되지 인간을 초월하는 거게는 올라가지를 못합니다.

초월한 거게는 올라가지를 못합니다.

못 하는데,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 그 평선 이하에 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이것은 다 되기는 되어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됐든지 뭘로 됐든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은혜로 순전히 된 것도 그 인간 평선 이하에 된 것은 다  온전치 못한 것들이며 다 사망에 속한 것들이며 다 변할 것들이며 다 영원성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꼭 같이 인간 평선까지는 왔지마는서도 여게서 이제 인간 평선으로  가던 사람은 거게서 떨어지고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나아가던 그 사람은 인간을  초월한 그 너머 끝이 없이 무한히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의 기적을 행할 때에 세째까지는 이 마귀와 인간들과 합작해  가지고서 될 수가 있었지마는서도 네째부터는 마귀와 인간들이 합작해 가지고서  그 일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오늘도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하나님이 주시는 전적 은혜요 이거는 주권 은혜인데 이 은혜를  내가 받는 데는 내가 힘써 가지고 내 힘으로 하는 것같이 여겨질 만한 이 정도의,  참 다른 사람이 보면은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할 때에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인적 요소로만 가지고도 그 사람하고 나하고 둘이 꼭 같은  열심, 같은 충성, 같은 노력, 같은 간절로 힘을 썼을 때에 불신자 그 사람도  이루어지고 나도 이루어지고 둘 다 같이 이루어질 만한 그런 정도로 나가는데  하나님을 믿으므로 나가는 것은 인간선 이상이 되어질 때에 그는 떨어지고  여기는 전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아가고, 그 이하는 다 꼭 같이, 안 믿는 사람들이, 이거는 뭐 공연히 세상에 이런 종교  저런 종교 다 많이 있다. 호렝게교에도 있고 또 태극도에도 있고 또 무슨 도에도  있고 거게도 다 병이 나았다 이렇게 그거 다 말을 할 만치 그들도, 그들은 순전히  정신력 가지고 또 자기의 그 심리의 힘 가지고 신경의 힘 가지고 자기 의 아주  연단 연성한 그 모든 인적 요소의 작용으로 그들은 다 이루어졌는데, 기독교의  구원도 그들이 그와같이 이루어진 거와같이 하나님을 소망하고서 이 믿음을  지키는 데에 그 정도의 것으로 되어져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것이 없으면  안 이루어집니다.

그 정도로 되어지는데 그 정도로 되어지는 그것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을 받는 방편이요, 그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역사요, 그것이 자기를 바친  역사요, 완전히 자기를 맡기는 역사라.

이것이 되는 정도에서 이루어지나 믿음으로 한 것은 끝이 없이 계속 자꾸 인간을  초월한 어데까지든지 나아가지마는서도 이제 인간의 힘으로만, 인간의 정신,  인간의 노력, 인간의 열심, 인간의 간절 이 심신의 노력으로만 되어진 것은  인간의 힘만치만 가고 그 이상은 가지 못하는데 기독자도 꼭 같이 인간의 힘을  다해 가지고 가니까 불신자가 인적 요소로 가지고 될 고 정도까지 가는 데는  그들과 꼭 같은 그 힘을 들이되 그들은 자기네들 힘을 가지고서 하고 이는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그 힘을 들여 가지고서 이와같이 하니까 인간선까지  가는 데는 다 같이 됩니다. 다 같이 그들도 되고 이쪽도 다 됩니다.

다 되나, 이제 하나님을 믿고 바라고 맡겨놓고 순종하는 믿음에 노력하는 그  노력으로 된 사람은 그 선에 가 가지고서 중단하지 안하고 그 선에서 끝이 없이  얼마든지 쭉쭉 올라가고 이래 하지마는서도 이제 믿음이 아니고 인간의 힘을  가지고 하던 사람은 고게까지 가다가서 끝은 끊어지고 맙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는 생활과 안 믿는 사람같이  믿음으로 하지 안하고서 자기의 인적 요소로 가지고서 이와같이 하는 것은 그  표가 어데 나느냐? 인간선까지는 가지마는서도 초인간의 생활은, 초인간의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초인간의 역사의 그 은혜의 이르는 데까지는 안  믿는 사람들은 인적 요소로 가지고서 인적 요소로만 가지고도 이루어질 수 있는  그 투자, 이루어질 수 있는 그 투자와같이 자기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그 일에 그 정도의 투자를 해야 이루어지지 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  이루어집니다.

투자를 해야 이루어지는데, 겉어머리는 꼭 같지마는서도 나중에 인간의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에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은 거게서 중단돼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본  것은 끝이 없이 무한히 초인간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이게 기독교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들이 뭣이든지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인적만으로써 할 수 있는, 인적만으로써 해도 되는 그 정도의  충성과 노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주의로 이와같이 나가나 펠라기우스주의가 나중에  가다가 그다음에 인적 요소의 한계까지는 갔지마는서도 그다음은 가지 못하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주의에서 조금 더 나아간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님하고 둘이  합작을 해야 된다 하는 그것을 발견한 이제 펠라기우스주의를 밟고 올라선 것이  그것이 알미니안주의요, 또 알미니안주의를 밟고 올라선 것이 그것이 루터주의요,  루터주의를 밟고 올라선 것이 칼빈주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오늘밤에 말하는 것은 기독자들이 자기 구원을 이룰라고  하면은 참 심리자들이 분석할 때에 네가 그만치 정신 노력이 있었고 정신 집중이  됐고 또 그렇게 신경이 다 단일로 집합이 되었고 이렇게 했으니까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나 네 속에 네 노력의 힘으로 됐다고 할 만한 그런 정도의  노력이 안 되면 우리 구원을 이루어 갈 수가 없다 하는 그것을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요사이, 벌써 지난 주일 주일학교 공과로 가르쳤고 그전에도 가르쳤고 또  새벽마다 계속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있는데 이제 뭐 이치를 가르칠  게 아니라, 이치를 가르칠 게 아니고 이렇게 자기 정신으로 해서 됐다고 할 만치,  자기 심리로 해서 됐다고 할 만치, 또 자기의 노력으로 해서 됐다고 할 만치  여겨질 만치 이만한 노력 투자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암만 알아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서 찾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으니라’ 요  간단하게 말했는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입니다.

이래서, 생명으로 인도한다 멸망으로 인도한다 인도하는 게 둘이 있다는 것  요것만 해도, 오늘 아침에 이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현실을 당해서 살 때에 그저 닥치는 대로 그때에 제 생각나는  대로 제 지혜 나는 대로 제 경험과 체험된 대로 그대로 모든 것을 택해 가지고서  걸어가기 때문에 인간 생활은 통틀어 놔서 전부 멸망입니다. 인간이 현실을  만났을 때에 자기 생각대로 자기 지혜대로 자기 경험대로 자기 체험대로 자기  좋은 대로 한 사람의 생활은 기독자의 생활이든지 불신자의 생활이든지 완전히  멸망입니다. 전부가 멸망이오.

다만 현실을 당했을 때에 여게는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고 멸망으로  사망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으니 나는 내가 독립할 수 없고 자행할 수 없는  존재라. 그러기 때문에 나를 인도하는 신이 있으니 내가 이 신의 인도를 받든지  저 신의 인도를 받든지 내 현실에서 움직이는 것은 이것은 내 마음이요 내  생각이요 내 뜻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건 성경이 부정했습니다. 네 생각이 없고  네 뜻이 없고 네 욕심이 없다. 너는 벌써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후에는  인간이라는 건 자유가 없는고로, ‘지금도 불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그게 네 마음이 아니고 네 생각이 아니고 네 뜻이 아니고 네 욕심이  아니고 네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이 아니면 마귀 판단 둘뿐이다. 이걸  성경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아니면 마귀 판단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자는 사탄의 그 악령이니 너는 그  현실에서 너를 네가 자유해서 네 마음이라, 네 생각이라, 네 욕심이라, 네 뜻이라,  네 경험이라, 네 체험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곧 마귀의 것이라.

왜?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마귀 것이 됐기 때문에 마귀가 주장하는 것이라. 다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세 가지로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의 인도냐 마귀 인도냐? 이 두 가지를 구별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인도는  생명이요 마귀 인도는 사망이니까 네가 이것을 깨닫고, 네가 무엇을 하고 싶든지 뭐 대인 관계를 하든지 무슨 일을 처리할라 하든지  언제든지 반드시 거게는 너 혼자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사람들도 저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거게는, 이 우주에는 우리를 인도하는 주인이 몇입니까, 손가락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주인이 몇이요?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봐요, 손가락으로. 녜,  둘입니다. 이거 아는 것이 멸망하지 안할 자요 이것이 구원 얻을 자입니다. 이  인도하는 자가 둘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천이고 만이고 억만이고 다  멸망이요, 전부 다 멸망이오.

우리를 인도하는 신이 둘이 있다 하는 이거는 멸망의 위험성도 있고 생명의 그  참 다행성도 있는데 이거는 생명도 아니요 멸망도 아니요, 이거는 생명과 멸망의  미결입니다. 멸망하느냐 이제 그 생명과 성공을 하느냐 하는 미결입니다.

이제 인간이 무슨 일을 당하든지 자기 현실에서 현실을 당할 때에 자기 현실을  닥쳤을 때에 그 현실에서, 나를 지금 이 현실에서 인도하는 영은 둘이다. 내가 이  현실에서 한 자욱을 떼놓는 데는 떼놓는 그 한 자욱이 멸망으로 떼놓든지  생명으로 떼놓든지 둘 중에 하나이지 아무나따나 가는 거 아니다. 내가 한 자욱  떼놓는 것은 멸망으로 한 자욱 떼면 멸망으로 네가 들어가서 요 시간 멸망이  되든지 생명으로 떼놔서 생명이 되든지 두 길 중에 하나다.

이러기 때문에, 여게는, 내 현실에는 나를 인도해서 멸망케 할라 하는 영도 있고  영생을 하게 하는 생명과 평강, 금생과 내세에 생명과 평강을 이루게 할라 하는  그 영도 있어 두 영이 내 현실에 지금 나를 이끌고 있다. 내 현실에 두 영이 나를  이끌고 있다 요것을 생각지 안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거게는 천리 만리 거리가  멉니다. 없습니다. 생명이 없어. 전부가 다 멸망이오.

자기 현실에서 나를 인도하는 두 영이 있는데 이 두 영이 지금 하나는 생명으로  인도하고 하나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이 두 영이 나를 인도하고 있으니 나는 이  둘 중에 어느 인도라도 인도를 받지 나 혼자 독단으로 독립으로 지금 독행할  수는 없는 내다. 어데 끌리든지 나는 끌리게 마련이다. 그러면 나를 끄는 신이  둘이니 내가 어느 신으로 끌려가느냐? 나를 끄는 신이 둘이라 하는 것을 생각하는 고 사람에게는 아직까지 희망이 있고,  산 거는 아니요, 희망이 있고 이것을 모르는 자에게는 전부 멸망입니다. 멸망이오.

거게는 희망이 없어. 완전히 멸망이라. 요거 하나라도 잡고 우리가 살아야 됩니다.

그저 자기가 크고 작은 어떤 일을 당하든지 자기 현실은 지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앞에는 두 길이 있다 말이요, 두 길. 이 현실에서  멸망으로 한 자욱 떼놓든지 생명으로 한 자욱 떼놓든지 두 길이 있는데, 자기  현실에는 멸망으로 끄는 그런 나보다 강한 세력이 있고 또 생명으로 끄는 나보다  강한 세력이 있으니 내가 ‘이 두 세력이 나를 끌고 있는데’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두 세력이 나를 끌고 있으니 이리 가면 멸망이고 이리 가면 생명이니 ‘이 두  세력이 나를 끌고 있는데’ 하는 고것을 자기가 `두 영의 세력이 나를 끌고  있으니’ 하는 거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희망이 있고 이 두 영의  세력이 자기를 끌고 있다는 이 사실을 모르는 자에게는, 어떻습니까?  멸망뿐입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멸망뿐입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희망은 없고  멸망뿐이라는 이 말이 틀립니까 바릅니까? 멸망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확실히 아는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녜, 이겁니다.

그러면, 끌고 있는 그 두 영은 나보다 강합니다. 사람보다 강합니다. 그 세력은  강합니다. 강하나 예수님께서 구속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줬습니다. 자유를 줬기  때문에 악령도 나보다 강하고 성령은 나보다 더 무한히 강하고 강하지마는 내가  자유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하나님이 구속하시고 줬습니다. 너희를 불러서  자유케 했다 했습니다.

자유가 있기 때문에, 내가 여게서 성령을 영접해서 ‘나를 인도하십시요, 나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겠습니다. ’ 하면 따를 자유가 있고 ‘악령의 인도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따를라면은 는 자유가 있는데 악령의 인도를 따를라고 할  때에 성령이 간섭 못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를라 할 때에 악령이 간섭하지  못합니다. 이런 기로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현실에서 나를 인도하는, 하나는 사망으로 하나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강한 세력의 두 영이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직 멸망은  아니요, 아는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희망이 있소. 이걸 모르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이걸 아는 사람 희망이 있소.

자기가 단 둘이 뭐 재미 있는 골방 속에 들어앉았다든지 자기가 어떤 용상에  들어앉았든지 자기 앞에 수많은 지금 재물을 놓고 앉았든지 지극히 큰 권세를  가지고 있든지 언제든지 고 현실에서 멸망 멸망으로 빠져들어가고 현실에서 이제  존영 존영으로 성공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두 영의 인도가 있다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도매금으로 그만 희망이  없어. 그거는 완전한 멸망입니다. 거게는 희망이 없어. 멸망뿐이야.

거게서 ‘두 인도가 있다’ 하는 것을 깨닫고, 있으니까 내가 어느 인도를 받을까  하는 사람은 희망은 있습니다. 생명으로 가지는 못해도 희망은 있습니다.

희망 있는데 거게서 자기가 ‘자,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냐 이렇게  하는 것이 마귀 인도겠느냐? 어느 것이 마귀 인도며 어느 것이 하나님의 인도냐?’  하는 것을 자기, 성경 냅두고, 성경 말씀 많이 듣고 벌써 기존 지식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현실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며 어떻게 하는  것이 마귀 인도냐?’ 자기 양심만 써서 알라고 하면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다 압니다. 모를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다 압니다. 핑계 못 합니다. 다  압니다.

여게서, 잘못 가면 멸망이고 잘 가면 성공이니 멸망과 생명이란 요것을  생각하면서, 멸망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두 영이 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영에게 딿는 것이며 어떻게 하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에 딿느냐 하는 것을 자기가 생각만 가지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벌써 중생된  사람은 다 압니다. 모를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요게서 멸망과 구원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끝났는데 이제 새벽으로 안 나오는 사람들이 뭣을 보고 안 나오는지  몰라도 그게 자기 멸망이오. 그런 것도, 새벽기도 나오 게 어떤지 안 나오는 게  어떤지 자기가 생각해 보면 알 것 아니겠습니까?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요거 꼭 잃지 마십시오. 요것만 가지면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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