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성

 

1984. 7. 3. 화새 

 

본문 : 이사야 26장 1절∼7절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선지자선교회  지난밤에도 재독을 해서 잘 알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 하는  것은 우리가 믿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일할 수가 있고 결과가  맺어집니다. 아는 것은 필요한 것이 믿기 위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는  것은 믿음의 요소 중에 순위적으로 말하면 첫째라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알고, 두 번째는 인정하고, 세 번째는 욕망하고 네 번째는 그대로 복종하면 다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안다고 해도 인정 안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인해서  근심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성 있는 이 진리를 업신여기는 그런 사람이  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양보치 안해야 되지 양보하면  헛일입니다.

 여기에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옛날은 구원이라 하면 이것인가  저것인가 그렇게 심히 복잡하고 간추려 강령을 쥐기가 어려웠지요. 어려웠지만  벌써 신약 시대 와 가지고는 이 구원을 간추려 그 강령을 잡을 수 있게  됐습니다. 점점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그 심령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니까  자체의 실력도 자라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라감에 따라서 점점 깨닫게  해 주시는 영감도 높아져 간 연고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위대해도  옛날의 깨달음과 오늘의 깨달음이 다르고, 또 예수님의 재림 때 그때의 깨달음이  우리의 깨달음의 절정의 깨달음이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의  필연성입니다. 그러면, 깨닫는다고 해 가지고 진화성은 아닙니다. 진화되기를  바라는 진화성은 아니고 우리에게 알려 주는 계시성입니다. 차차 차차 더 알려  줘 가지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그 이사야는 예언자인데, 구약 시대도  그러했지만 신약 시대는 더우기 그러해서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노래할 것이라.

그러면 공통적인 지식, 일반적인 지식, 다 '구원이 성과 곽이 됐다' 하는 것을  누구든지 다 알게 되어서 말하게 될 것이라.

 그러면, 구원이라면 예수님의 사죄가 구원이요, 칭의가 구원이요. 하나님과  화친의 그 결합이 구원인데, 이 대속의 이 구원을 벗지 안하고, 이 구원을 이미  입혀 주셔서 우리가 중생 됐습니다. 이 구원을 기본적으로는 입고 있지만 우리가  이 실지의 신앙 현실 생활에서는 이 구원을 입고 그대로 현실을 통과해서 구원의  확정을 짓는 일도 되고 이거는 행위도 됩니다. 행위 구원의 확정을 짓는, 역사  구원을 학정을 짓는 일도 되고, 구원은 입고 있지만 현실에서 너무 마찰의  어려움이 많고 또 기묘한 유혹들이 많아서 자기 주관이 나오든지 또 인간들의  모든 지식이 나와서 방해할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세상이라 말하는데, 세상과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고는 이 구속을 입은 그대로 현실을 통과할 자 없습니다.

이 자기와 세상을 부인하고야 입혀 주신 이 구원을 벗지 안하고 뺏기지 안하고  입고 현실을 통과할 수 있는데, 세상과 자기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덧붙여서 그  걸음을 걸으려고 하면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이 구원을 인한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벗지 않으려는 이를 인해서 박해가 오는데 그 어려운 박해 그것이 곧  뭐이냐? 십자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성은 그 성 안에 있는 그 모든 것을  보호하는 것이 성이요, 또 밖에 온 모든 외적들을 막는 것이 성이요 또  전투적으로서는 외적은 불리하고 성 안에 있는 이들은 전투에 가장 도 움이 되고  용이하도록 그렇게 건축된 것이 성인 것입니다. 이 사죄를 칭의를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이것을 자기가 입고 있으므로 박해오고 입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  미결되고 또 유혹되는 난제들이 있는데 그럴 때에 입고 있는 그것이 자기의  보호가 됐다. 예수님의 이 세 가지 대속을 입으려고 했더니만 그것이 나중에  보니까 지극히 큰 대적의 세력에서 보호함을 입은 게 됐다. 보호하려고, 내가  살라고 뭐 하려고 한 그거는 아닌데, 살라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다만  예수님의 이 세 가지 대속을 빼앗기지 안하고 이 대속을 보수하려 하는 그것이  안보가 됐다. 이 대속을 보수 하려고 하는 이것이 보니까 승리가 됐다. 대속을  보수하려고 하는 이것이 원수를 다 정복해서 점령해서 취득한 것이 됐고, 그들은  대적하는 것이 그것이 나를 돕는 일이 놨고 저주하는 것이 그것이 축복이 되고  말았다 하는 그것을 여기에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믿어야  합니다.

 과거에도 그 요셉이 같은 사람도 보면 그가 이 구원을 버리지 안하려고  하나님의 약속의 구원을 벗지 안하려고 하는 그것이 자기를 높은 자리에  끌어올리는 일이 됐고 또 자기의 모든 대적들을 다 정복하고 승리한 일이  됐습니다. 이제 구약 때도 그랬지만 신약 때는 더욱 그러기 때문에 이 모든  사람들이 다 노래하게 될 것이라, 다 일반적 지식과 공통적 지식이 될 것이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을 열고' 문들을 열라 하는 그것은 자기 부인이요 세상  부인입니다. 그러면. 세상과 자기를 바라보고 의지 하는 것을 벗고 자기와  하나님을 바꿔서. 자기 바라보던 것을, 의지하던 것을 하나님 바라보고  의지하고, 세상 바라보고 의지하던 것을 하나님 바라보고 의지하고, 선생님은 한  분이라.'하나님 한 분을 자기의 인도자로. 참 한 분을 믿을 수 있는 자로,  바라볼 수 있는 자로, 의지할 수 있는 자로, 맡길 수 있는 자 그 인도를 받을 수  있는 자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자로. 따를 수 있는 자로 이렇게 이 하나님,  한 분을 이렇게 여기는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뭐 인간의 노력을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그 물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자존자이신 그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아 생겨진 것들이 그분 한 분에게  모든 것이 있다, 그분 한 분에게 속해서 그분 한 분으로 말미암아서만 살고 또  평안하고 존영해진다 하는 요것을 의심 없이 확신하고 요대로 사는 그것이  구원이 되고, 고 사람만 만들어 가지고 그런 사람들만 모아 놓은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그렇기 때문에 사망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사망이 없다  말은 불신 이 없다는 말이요, 또 의심이 없다는 말이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게 피동되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니까, '신을 지키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 하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그 나라로 들어가라. '신을 지키는' 그 나라의 생활이다,  하늘나라의 생활은 신(信)입니다. 하늘나라의 생활은 딴거 하나도 없습니다.

신뿐입니다. 신인데, 신 그게 뭐이냐? 전지요, 전능이요 또 완전한 사랑이요,  또영생입니다.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가라.' 그 나라에는, 전부 신을  지켜서 신이 완성되고 완료된 그것만 가득 차 가지고 있는 곳이 하늘나라라.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그러면, 이 심지는,  '심지가 견고한 자라.' 이 심지가 견고하다 말은 그 심지가 변동되지 안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심지가 꺾어지지 안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가 견고하다는  이 견고라는 말을 붙인 것이 뭐이냐 하면, 여호와의 구원이 성과 곽이 되는  데에는, 성과 곽이 되는 데에는 반드시 꺾어질 만한 그런 경우를 통과하게  되나니 꺾어질 만한 그런 경우에 꺾어지지 아니한 그것이 성곽이 된다. 자기가  구원이 성곽이라고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얼마든지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보수하다가 자기에게 그 보수하는 의지가, 신앙의지가 꺾어지게 되는, 꺾어지기  쉬운 그런, 어려움에 꺾어지게 되는 그 꺾어지게 되는 그 경우를, 그 현실을  통과한 너머에 구원이 성곽되는 그 일이 있다 그것을 여기서 말씀합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라 하는 그 심지는 다른 심지가 아니고 여호와의 구원을 성과  곽으로 이렇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데, 요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요 인정,  요 지식, 또 그대로 복종하는 요것이 가다가 변동되도록 온 세상은 달라들어  가지고 요것을. 요 신앙의지를, 요 작정한 의지라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모든  것을 이렇게 사고해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 해 가지고 이제는 완전히 결정을  지워서 '요대로 단행하겠다.' 하는 그 단행 결정이 지워진 그때부터의 우리  마음을 가리켜서 의지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요 신앙의지가 꺾어지지  아니한 그 너머 구원이 성곽의 효력을 나타내고 성곽의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요때 꺾어지지 안하고 그때에 모든 사람은 심지가 꺾어져서 그것을 다 버려  버리는데, 열심히 뭐 떠벌려서 주를 위하여 죽느니 사느니 뭐라고 말을 해도 그  심지가 꺾어질 수 있는 그런 압력이나 모든 박해가 있을 때에는 심지가  꺾어지는데 그때 꺾어지지 아니한 심지, 고 신앙 심지, 여호와의 구원으로  성곽을 삼는 그 욕망의 신앙 심지 그것이, 그 심지의 강도가 있는 것만치 그것이  구원이 되어진다. 성곽이 되어진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강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올라가지는 못합니다. 다시  구원의 성곽에 들어가지는 못 하기 때문에 요 심지의 견고한 자라 하는 요걸  우리가 명심해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 다시한번 증거하려 하는 것은 '심지의 견고라.' 요것은, '시험을  받고 참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것에 대해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 그전에는 안  된다' 이러니까, 요것을 가리켜서 열 처녀 비유에 '밤중이 오는데 밤중에 등불을  들고 밤중을 통과하는 거기서 신랑 만나게 됐다.' 그러면, 그때 신랑 못 만난  사람은 도리어 천해지고 비천하게 됐다. 이것이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이모로 저모로 여러 가지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앙 심지, 여호와의 구원으로 안보를 삼고, 여호와의 구원으로 승리를 삼고,  여호와의 구원으로 취득을 삼고 사는 요 생활이 가다가 꺾어지게 되는데  꺾어지게 될 그때가 뭐이냐? 그 다음에는 이것이 성곽이 되는, 이 구원이 성곽이  되는 고 순서인데, 이 구원이 성곽이 되려고 할 그때에 요 구원을 성곽으로  소망하는 신앙의지가 꺾어지지 안해야 그 성곽이 자기에게 되고 만다. 만일  그때에 꺾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요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 과거에 왜정 말년 때에 신사참배가 있을 때에  많은 일정하에 있는 일본 나라나 조선 나라에 그때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신사참배는 그들이 섬기는 우상인데,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누구든지 다 상식적으로는 절해서는 안 된다고 이렇게 생각을 했지만  그때 너무 환경의 탄압이 심하기 때문에, 그 우상숭배를 안 하고 견디는 데는  여러 가지 박해가 있으니까 다 우상숭배를 하고 말았다 말이오. 안 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뭐 제가 아는 대로 그때에 신사참배 안 한 사람으로서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몇 사람 없습니다. ○○교파에서는 안 한 사람을 내가 아는 대로는  손명복 목사님이라는 그 목사님이 신사참배 안 한 것을 내가 알고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아는 목사님들은 다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또 평신도 가운데서 안  한 사람들이 또 더러 있습니다.

 이런데 그때 그것을 가리켜서. '그러면 어떻게 보느냐?' 그러면, 그것이  여호와의 구원을 버려서 성곽이 되지를 못했다, 그때에 하나님의 보호를 입지  못했고 하나님이 승리케 해 주시는 승리를 이루지 못했고, 하나님이 점령하게  하는 그 취득을 취득하지 못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니까 그렇지, 뭐 신사참배 안 했으면 안 했고  했으면 했지 제가 뭐 저 안한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 줄 게 뭐입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모든 분위기를 조성하시니까 그만 신사참배 안 한 사람들이  그때는 권리를 다 잡았습니다. 처음에 장로교는 하나뿐 이었었는데, 장로교는  신사참배 안 한 사람들을 전부 다 모시고 그분들의 말하는 데 지도를 받게 되고  그것이 다 진리라 해서 모두 따르는데, '신사참배 한 것은 범죄한 것이라.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라. 큰 죄를 범했기 때문에 신령한 음행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것을 회개해야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을, 신사참배 안 한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을 ○○○목사님이 '그렇지 않다' 하는 반대를 하다가 그 현장에서  쫓겨 나갔습니다. 못 견뎠습니다. 현장에서 모두 다 '퇴장하라' 이래서 퇴장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때는 그랬는데 그 뒤에 차차 차차 물러져 가지고 그만 신사참배  반대 하는 것을 존경하고 그것이 옳다고 인정해서 그리 소속하는 사람이 고신이  되어졌고, 반대하면서, '뭐, 그게 무슨 큰 죄라?' 이래 가지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은 것이 합동측이 됐습니다. 그때 처음에는 고신과 합동측이 이렇게  갈라졌지만 지금은 합동측에도,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안 하는 것이 옳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다 합동측에도 많고 칼측에도 많고 모든 다른 데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때에 다른 교파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이 장로교의 형편으로서는  그랬었습니다. 대구에서 총회가 모였을 때 그때에 신사참배한 것이 죄라 죄  아니라 하는 그런 것을 가지고 논단하는 그런 것을 게가 그 총회에서는 참석을  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뭐 세상을 뜨신 그런 어른을 일을 많이 한  어른인데 말할 게 없지만 그래도 옳고 그른 것을 증거를 해야 되기 때문에  인신공격이 아니고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천조대신 이름으로 이  송도 앞 바다에 가 가지고 전부 세례를 거기서 목사들이 다 모여 가지고 세례를  천조대신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안하고는, 왜정 때 안 하고는 못  견디기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다.

 이러니까, 심지가 견고한 자라는 요것을 우리가 예사롭게 생각지를 말고,  과거에는 '천주교가 진리가 아니라 천주교는 이단이라' 이래 가지고 여러 수십만  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여호와의 중인은 이단이라 하지만 앞으로 가면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이라 하면 박해당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이라 하는 그  도를 이단이라고 그렇게 할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또 어제도 내가 그런 말  들었습니다. 안식교는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이 있지 안식일을 지키지 안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구원의 근거로 삼는 그것은  오늘도 이단입니다. 그거는 잘못입니다. 그러나 안식교를 벌써 다 모두 이단으로  정죄하지 안하는 것이 세계가 다 이렇게 휩쓸리니까, 마지막에는 불교를  이단이라 했다가는 죽습니다. 불교나 뭐이나 종교는 꼭 같다는 그런 것으로 점점  화해져서 나가는 것이 세상이라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것도 다 심지가 견고한 자가 여호와의 성곽을 얻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죄를 보수하고 칭의를 보수하고 하나님과 화친 된 이 결합을  보수해서 벗지 안하려고 하면 반드시 신앙의지가 꺾어져서 변동 돼야만 하는  그런 현실을 만나게 되고 만날 그때에 신앙의지가 꺾어지지 안하고 통과 되어야  여호와의 성곽을 자기가 누리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단단히 기억할 것은 공산주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는 뭐 우리의 싸움이 다른, 교리 신조 싸움이 벌써 파묻혔습니다. 교리 신조  싸움이 파묻혔는데, 교리 신조가 깨졌으면 신앙이라는 것은 의례히 깨져 버리지,  교리와, 옳은 교리 옳은 신조가 없는 데에 옳은 신앙이 있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 하신  대로 지금은 전부 다 인화가 됐지 신화는 없게 됐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과  화친으로 예수님이 대속해서 결합된 하나님으로 더불어 결합한 이 결합을  양보하지 안하고 이 결합을 보수 하려고 하는 데에는 앞으로 공산주의의  박해보다도, 이방인의 박해보다도 기독자 안에 박해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과거에도 보면 거룩과 진실을 가진 도인들과 외식하는 자들이 있어서 반드시  외식하는 기독자에게 박해를 당했지 뭐 세상에게 박해당한 일 은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루살렘 밖에서는 의인들이 죽임을 당한 일이 없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는 살  것이라.' 그 사람이 생명을 애끼지 안하니까 죽을라고? 죽으려고 했는데 생명을  애끼지 안했는데, 여호와의 성곽이 그를 보호하니까 그것이 피난이 됐고 그것이  승리가 됐고 그것이 점령을 한 취득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소한  것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우주와 영계에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두고  우리가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사망과 생명 모든 것이  내가 그리스도와 연결이 끊어지지 안하면 그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나의 소유가  되고 나의 취득한 것이 되고, 나에게 통치를 받아야 되고, 나로 인해서 그들은  영원히 살아야 되는 이런 참 교회 위치를 자기가 바로 가지게 되는데,  교회 위치도 기본적인 위치가 있고 활동적인 위치가 있습니다. 활동적인 위치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활동이 있지만, 기본구원이야 다 얻어 가지고 갔지만  하늘나라에 아무 쓸모없으니까 그런 위치에 있기는 있지만 실은 모든 것을  통치해서 하나님의 그 온갖 충만으로 피조물들에게 충만케 해 줘서 피조물들의  구주가 되는, 중보가 되는 이것이 되는 것은 활동적 교회입니다. 건설구원 있는  자들이 그 나라에게 가서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가 삼합이 돼 가지고 일행되는 것 삼합이 돼 가지고 한  움직임되는 이것을 가리켜서 교회라 그렇게 말합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들에게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평강으로 지키신다 말은  안보 한다 말이요 승리로 지키신다 말이요. 취득으로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이러니까, 요 심지 견고에 요것이 달렸다, 기초적은 알고 인정 하고 소망하고  욕망하는 요 노력의 시작에 그것이 있는 건데 시작한 그것이 결실은 뭐이냐? 고  심지가 꺾어질 수 있는 그럴 때에 꺾어지지 않는 그것을 통과해야 된다, 요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리부터 기도해야 됩니다. 뭐 그런 것, 명예니 지위니 하는 그런 걸  지금 돌볼, 깨달은 사람들은 그런 것 돌보지 않습니다. 그런 걸 돌보는 자는 다  그걸로 망합니다. 명예로, 지위로, '내가 이래야 지위가 올라가겠다.' 그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다 그게 우상됐기 때문에 망하고 맙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앞으로 독침이 나오겠고, 공산주의의 탄압이 나오겠고, 또 모든  일반 종교 단체의 일반 종교가 다 통일이 됩니다. ○○○씨가 요번에 갇힌다고  하지만 모릅니다. 그 사람 갇히지 안할 것입니다. 안할 것이 왜? 그 사람이 좋은  것을 들고 나섰습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것을 들고 나섰습니다. 뭐이냐? 종교  통일이 그 사람의 주장입니다. 종교 통일. 그러니까, ○○신문이라는 신문인데.

거기에는 불교고 뭐이고 무슨 종교든지 종교라 하는 것은 다 차차 차차 일반으로  여겨서 전 종교 통일. 뭐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 무슨 종교든지 다 통일하려는  그것을 가졌기 때문에. 아주 제일 첨단을 걷고 있기 때문에 인기가 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첨단을 걷는 것은 뭐이냐? 요한계시록 18장에 열 뿔이 그것이  하나가 되는 그것입니다. 열 뿔이 단합되는 그것인데 땅위에서 종교만 통일할  것이 아니라 종교와 과학이 통일 된다 그 말이오.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다.

이렇게 통일이 돼 똘똘 뭉쳐 가지고 그때에 똘똘 뭉치니까 그 통일에 합치되지  아니하는 자가 누구냐? 그 사람이, 어린 양이 합치되지 안하는데 어린 양은  의례히 이기고 어린 양에게 속해서 택함을 입고 부르심을 입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그러면, 진실한 것이 뭐이냐? 바로 알고 바로 행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바로 알고 바른 욕망을 가지고바로 행하는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앞으로 참된 진실한 기독자는 온 세상과 대립이 된다는 것을  요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면, 일곱 머리는 세상의 모든 사상들이요  열 뿔은 세상의 힘인데, 그것이, 한 짐승에게 열 뿔과 일곱 머리가 있습니다.

내나 몸뚱이를 재 보면 짐승이라. 몸뚱이를 말하는 근본은 세상이라. 세상인데  세상에 이런 사상으로 나왔고 저런 사상으로 나왔고. 이런 주장으로 저런  주장으로 나와서 껍데기는 보면 다른 것 같지만 몸통은 하나라.

 이랬는데, 나중에 여러 가지로 나와 가지고 많은 사람을 끌어서 휩쓸어 대  가지고 마지막에는 몸통 하나와 같이 그 일곱 머리와 열 뿔들이 하나가 된다.

하나가 돼 가지고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운다. 그런데,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데 어린 양에게 소속한 군대들이 있는데, 뭐이냐? 택함을 입었고,  부르심을 입었고 부르심을 입었다 말은 중생돼서 믿는 것을 말합니다. 택함을  입고 부르심을 입었는데 그들이 다가 이기는 게 아니라 그 중에 진실한 자들만  이기리로다. "진실한 자들만 이기리로다"  여호와의 구원으로 성곽을 삼는 그 신앙의지가 꺾어지지 안하고, 그 신앙의지가  꺾어지지 안하고 그 신앙의지가 이겼을 때에 그때에 이기기 전과 투쟁할 때와  이기고 난 다음에가 다르다. 이기고 난 다음에 새로 발견된 여호와의 평강을  그가 볼 것이다. 여호와의 평강. '아, 참 하나님이 지키셨다. 하나님이  도우셨다. 하나님이 승리케 해 주셨다. 하나님이 이런 걸 다 점령시켜 주셨다'  이래서 그가 그 신앙의지가 꺾어지지 아니하고 통과하고 다음에 새로운 세계, 참  사망이 없는. 다시 요동이 없는, 근심 걱정이 없는 평강의 세계를 자기가  취득하고 그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평강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또 한번  이기니까 또 새로 그 이상의 평강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또 이기니까 그  이상의 평강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네가 너와 세상을 초월하는 그것이 일보요 그 다음에 또 초월 하고  초월하면 점점 네가 벗을 사람이 자꾸 나온다. 벗을 사람이 나와서 벗을 사람  벗고 벗을 세상을 벗고 자꾸 벗으니까 입는다, 벗으니까 입는다, 벗으니까  새것을 입고 벗으니까 새것을 입습니다.

 이래서, 사도 바울이 자꾸 벗으니까 벗어 갈수록 벗어 갈 것이 많아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 이렇게 말한 것이 벗을 것이 많기 때문에 그 벗을  것을 가리켜서 괴수 죄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 여호와를 의뢰함이니이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은 다 그 신앙의지가 다 꺾어지고 말았고  여호와의 구원으로 성곽을 삼은 것을 다 버리고 말았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 신앙의지가 견고하고 꺾어지지 안했나? 그 사람 은 어떻게 꺾어지지 안했나?  뭐 다른 것 없습니다. 꺾어지지 안한 원인은 뭐이냐? '자기를 구원하는 자기를  책임진 주 여호와를 의뢰함이니이다.' '자기를 책임진 계약 선포하신 계약의  하나님을 의뢰함이니이다.' 그것 때문에, 주 여호와를 의뢰한 그것 때문에 그  신앙의지가 꺾어지지 안했지 다른 것으로 꺾어지지 안한 것이 아니라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그분을 오늘도 의뢰 내일도  의뢰, 이 현실에도 의뢰 저 현실에도 의뢰 어디서든지 영원히 빈틈없이 여호와를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너를 책임진 계약의 하나님은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영원히 그를 바라보는 것은 요동치 않는다, 후회가 없다. 그 주장은 후회가  없고, 그 욕망은 실패가 없고, 그 전투는 패전이 없다. 그는 완전하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5절에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이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신다는 것은. 그러면, 기독교는 뭐이든지 높은 것을 낮춥니까? 아닙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세상에서 악을 자기 일 삼고 있는 사람도 세상에서 얼마든지  높아지게 했습니다.

 여러분들이나 우리가 미혹받기 쉽습니다. 여기 꽃마을에 기도원에는 그 안에  내원정사라 하는 절이 있는데, 아주 그 절을 잘해 놨고 부자 절입니다. 또 아주  지식층들이 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루 있으면 어느 날이든지 자가용이  여러 수십 대, 매일 수십 대는 들어갑니다. 어떨 때는 뭐 자가용이 늘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도로 수축도 잘해 놓고 이랬는데 그 사람들은 다 자가용  탑니다. 지금도, 현재 현 정권에서도 아마 기독교인들이 많기는 많지만 모두  불교에 나가는, 할머니가 불교에 독신이라 이런 사람들이 장관, 대학 교수, 총장  뭐 이런, 모두 다 그 사람들이 다 불교에다가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 이런 사람들이 다 모두 이렇게 잘되고 이라니까. 이 기독교는 봐도 그렇게 뭐  잘된 것이 그렇게 많이 보여지지 안하고 이라니까 사람들이 의심을 가져서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73편을 제가 서부교회서는 몇 번을 아마 그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많이 있는데, 이종교 믿는 사람들, 무신론 소련이 지금 세계의 제일  강대국이 됐고 이북이 지금 이남을 이거 뭐 앞에 있는 맛있는 음식처럼 널큼  집어 삼킬라고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다 끌어 내린다는  그 말이 아니고, 물론 그것도 때가 되면 끌어 내리지만 여기에 끌어 내리는 것은  일차적으로 여호와의 구원으로 성곽을 삼지 아니하고 자기와 세상을 가지고  높아지려 하는 그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구코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그 진리와  꼭 같습니다. 그거 와 꼭 같소.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 주시는 이 세  가지 구원을 보수하려는 이것만 하려고 하면, 올라가려고 그것 하는 것은 또  거짓부리요. 올라가려고 그것 하는 것은 거짓부리고, 우리는 그걸 지키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법리입니다. 당신이 죽으심으로 이루었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의  관계에서 우리는 죽든지 불리해도 그것 해야 됩니다.

 이러니까 이 구원만을 보수하는 이 자를 하나님께서 이제 높였지 높아 지기  위해서 구원 보수를 한 사람이라면 속에 딴 놈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놈이  옛사람이요, 기묘하게 가장을 해 가지고 들어 있는 그놈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걸 바라지 안하고 다만 주님이 죽으심으로 이렇게 해 주셨으니 죽기까지 죄를  내가 대적하지 안했다. 우리는 죽기까지 대적해야 되고 또 죽기까지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것을 보수해야 되겠고, 하나님을 이제는 다시는 하나님을  배반하지 안하고 그분을 제일로 보는 유일신으로 서 우리가 우리 마음 보좌 위에  모셔 놓고 그분이 모든 걸 통치하고 거기에 복종하도록 이렇게 하는 그것이,  구속의 은혜를 인해서, 종 됨을 인해서, 거기에 팔림을 인해서, 그분의 사랑을  인해서 그렇게 하는 것 이것을 높이기는 당신이 높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자를 내가 건지리라 나를 아는 자는 내가  높이리라' 하는, 그러기에, 꼭 성경은 보면 이리 저리 말 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자꾸 한 가지로 말하면 안 되니까 요리를 여러 가지를 만들어 가지고  이렇게 성경에 말해 놨고 설교를 하지만 실은 하나입니다. 실은 하나뿐이오.

이러니까, 이리 들어가나 저리 들어가나 들어가 가지고 마지막에는 종착은  하나라 하는 여기에 도달하지 안했으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중간에서  유리방황하고 있는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높은 데 처하는 자라 그 말은 먼저 구속을 받은 자로서 이  외에 자기를 높이는 방법을 삼는 사람들, 또 이 외에 솟은 사람들 자기가 좋은  자리 차지하고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자신이 높아지고 '솟은 성' 그거는 자신을  말하고, '높은 데' 높은 곳이라 하는 것은 그 처소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사는 위치를 높이게 하는 방법과 또 자신을  높이게 하는 그 방법을, 그것을, 구원으로 성곽을 삼으신 이 구원 보수만 하려고  했는데 이래 높아진 그것은 하나님이 높이 서기 때문에 하나님이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은 구원으로 성곽을 삼았기 때문에 구원으로만  높이지 딴걸로 높이지 안하는데 그 외에 인본으로, 또 그 외에 자기의 꾀로,  수단으로, 방법으로,  하나님이 요걸 제일 원하시느냐 하는 그걸 가지고 해야 됩니다. 한 자리에서  둘이 매를 가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합니다. 두 사람이  불교에 가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두 사람이 설교 하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수 있습니다. 왜? 한 사람은 불교에 설교하는 그것이  자기를 불교에서도 '위대하다 유명하다' 이렇게 인정받기 위해서, 자기 높이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여기서도 내가 하나님의 도를 전해 가지고 하나님의 도가  여기에도 들어가야 되겠고 여기에 있는 사람도 구원해야 되겠다는, 그 목적과  동기가 다르다 그 말이오. 방편은 같지만. 이러니까, 동기와 목적에서 결정을  짓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과도 중하지만 동기를 제일 중하게 보고 그  다음에는 목적을 중하게 보는 것이지 방편 그거는, 이라고 저라는 그거는 그렇게  중하게 보지 않습니다. 방편도 좋아야 되지만 동기가 좋아서 연약해서 안 될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이 구원으로 높아진 그  외에 높아진 것을 다 이렇게 진멸한다, 일차적으로 교회에 그렇게 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시고, 그 다음은  불택자에게 이렇게 이 세상으로 높아진 것을 하나님께서 '봐라, 너지 봐라. 이  나로 말미암아 높아지지 아니하고 다른 것으로 높아진 것을 봐라.' 이렇게 다  보이는 것이 영원한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믿는 사람이 돼 가지고 여호와의 구원으로 성곽을  삼는, 구원으로 승리삼고 구원으로 안보삼고, 구원으로 취득을 삼는 이것,  그러면, 높아지려는 게 아니라, 그거는 안 바라고 '아 이래야 하나님의 안보를  받는다. 이래야 하나님의 승리를 받는다. 이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는다. 온 세상이 나에게 안보해 줘도. 그 안보는 싫다. 죽었으면 죽었지 안보  싫다. 하나님의 안보만 원한다. 또 하나님이 승리케 해 허야 되지 뭐 세상이  주는 승리 그런 거는 싫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그 선물만이, 사랑하는  당신이 나에게 주시는 선물만이 나에게 필요 하지 다른 간부들이 주는 것은  싫다. 요래서 간부라 본부라 또 요렇게 말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각도로 말씀하고 저 각도로 말씀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 이와 같이 하십니다. 과거에  왜정 말년에 어호와의 구원으로 성곽을 삼은 그 사람들 높인 것이 손양원  목사님이 있을 곳이 없어서 애양원으로 밀려갔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이 다른  교회에서 모두 다 밀어내고 뭐 수단 방법으로 그라는데, 다른 데 가면 마찰이  맙고, 쓸 데 없는 죄악의 마찰이 많기 때문에, 그때 여수 애양원 교회라는 게  그렇게 크지를 안했습니다. 그랬는데, 그리 가 가지고 거기서, 애양원 교회에서  목사 노릇 했는데, 뭐 왜정 말년 신사참배가 나기 전에야 손양원 목사님을 누가  알아 줬습니까? 그 손양원 목사님을 찌끄러기로 알았습니다. '문둥이 목사  문둥이 목사, 아무도 가치로 안 알아 줬습니다. 이러나, 왜정 말년에 여기서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그분이 높아졌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해방 후에는 다른 부흥사가 없어. 다 신사참배한 사람들이  뭐라고 나서 가지고 부흥사를 할 것입니까? 그러니 인도를 다른 사람이 하지  안했소. 그때는 신사참배 안 한 사람들만 다니면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부흥회를  하다가 그 뒤에는 부흥회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아, 나는 신사참배'  먼저 갑니다. 강사로 가 가지고 '나는 신사참배한 죄인입니다. 나는  신사참배했기 때문에, 내가 이 신사참배하는 구덩이에 빠져서 죽을 욕을 봤기  때문에 내가 말뚝을 박습니다. 신사참배하면 죽는다. 내가 빠져서 욕을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빠지지 말라고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방편으로 다  상회 했습니다. ○○○목사님도 당신 입으로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 손양원  목사님 그런 이 외에는 다른 사람 뭐 집회할 사람이 없어. '신사참배한 나는  죄인입니다.' 그 간증하는 그 외에는 할 게 없어. 그때 한명동 목사님이  거창읍에 교회에서 집회하실 때에도 신사참배한 것을 '나는 그게 원통해서 하루  한 끼씩 안 먹고, 하루 한 끼씩 먹고' 그때 그분이 이래 있은 지가 오래 됐어요.

오래 동안 '지금까지 하루 한 끼씩 먹습니다. 나는 그 죄가 원통해서 그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서 하루 한 끼씩만 먹고 두 끼씩은 굶습니다.' 그 한명동  목사님 입으로 말하는 걸 내가 들었습니다. 집회 와 가지고. 그때 그것을 원통히  그래 가지고 회개하는 간증으로 했지 뭐 다른 큰소리 할 수 없었다 그 말이오.

그러나 그때 신사참배 이긴 사람들은 큰소리를 해. '신사참배 이럴 때에 생명을  애끼고 주를 버리는 이런 죄를 회개해야 된다' 이렇게 말한다 말이오. '그런 걸  회개해야 한다.' 승리한 자와, 회개한 것과 외치는 것과 달랐어.

 그러기 때문에, 그분들, 주남선 목사님도 목사님 중에는 조그만한  목사님입니다. 이랬는데, 신사참배로 그렇게 커단해지고 높아졌고 한상동  목사님도 커단해지고 높아졌습니다. 여기에 뭐 그때 ○○○목사님 그런 분들은  참 대왕이오. 그런데 나도 그만 조그만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이러나 신사참배로  영 바꿔졌다 그거요. 이 세상에서 그런 걸 우리에게 거울로 보입니다. 거울로  보이는데, 이다음에 하늘나라 가서 보면 참 큰 변동이 있을 것입니다. 큰 줄  알았는데 극히 작고, 작은 줄 알았는데 극히 높은 것.

 그러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믿는 사람으로서 여호와의 이 구원을 자기가  보수하는 이것이 성곽이 됐고 이것이 높음이 됐고 이것이 존영이 된 그것만 남고  여호와의 구원 외에 딴것으로써 자기를. 수단으로 방법으로 뭘로 높이려 하는  것은 높일라고한 것만치 반드시 내려오고 맙니다. 반드시 내려오고 맙니다.

반드시 천해지고 맙니다. 세상에서 천해지지 안했으면 무궁세계에서 천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천해지는 게 좋습니다. 천해지는 게 좋고, 아예 그런 것은  우리가 엿보지 안하고 돌보지 안하고 바라보지 안해야 되고 여호와의 구원으로  성곽을, 여호와, 전능자, 창조주 주권자가 그렇게 성곽을 삼으니까 그 성곽 속에  들어가서 구원 얻을 일이지 딴걸 가지고 쓸 게 뭐 있습니까? 없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등록하고, 기도회에 등록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6244명이 등록하고 기도합니다.

거기에 주일학교가 2418명이 등록하고 기도하고 있고 중간반이 1841명이  등록하고 기도하고 있고, 장년반이 1984명이 등록하고 기도하고 있고, 그래서  합계 6243명이 등록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광고하는 것은, 본 교회에 광고하는 것은 등록 안 한 사람  등록하고 기도하라 그걸 말하는 것이고, 이래 오늘 교역자들이 모였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돌아가거든 각 교회에서, '다른 사람 따라가? 나는 내대로 하지  따라가기는 싫다.' 따라가기는, 기독교의, 기독교의 전방편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전 방편이 따라가는 것, 따라 가기를 싫어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의 전 방편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뭐이냐? 하나님 따라가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것은 뭐 문둥이가 말해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면 따라가야 되고 원수가 말해도 하나님 말씀이면 따라가야  됩니다. 따라가기를 싫어하는 고 속에 자기가 모르는 원수 중의 원수인 자기가  들어 있다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권사님들은 네 분이 다 출석해서 기도했고, 또 목사님은 다섯 분들이 다  여기에 출석해 기도했고, 또 장로님들은 여섯 분만 출석해 기도했었습니다.

 와 이래 자꾸 하느냐 하면 그분들이 이렇게 기도하니까 다른 교인들도 '아,  장로님들도 다 기도하는구나' 이렇게 해서 좀 이 기도를 격발케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야, 거기에도 그러니까 우리 교회도 가서  그래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요 기도 운동이요 격발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30분 매일 기도하는 것은 자기와 자기 교회와 자기 가정,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하고, 우리나라를 위해서, 앞으로 큰 전투가 있을 터인데 이  전투를 승리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또 하나는 약한 이를 위해서 이 전투가 뒤로  연기 되고 이 전투가 시작되지 안하도록, 연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승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는 것이 이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381 구원의 향방과 절제/ 고린도전서 9장 19절-27절/ 860829금밤 선지자 2015.10.25
380 구원의 터 6가지/ 히브리서 5장 13절-6장 2절/ 860601주후 선지자 2015.10.25
379 구원의 유래/ 에베소서 1장 8절-12절/ 820304목새 선지자 2015.10.25
378 구원의 시발과 성취/ 이사야 9장 6절-7절/ 841223주전 선지자 2015.10.25
377 구원의 순서-펠라기우스-칼빈/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880120수야 선지자 2015.10.25
376 구원의 성장성 전진성 향상성/ 디모데후서 3장 15절-17절/ 870111주후 선지자 2015.10.25
375 구원의 성으로 들어가자/ 이사야 26장 1절-7절/ 800113주후 선지자 2015.10.25
374 구원의 성과 곽/ 이사야 26장 1절-7절/ 840701주후 선지자 2015.10.25
» 구원의 성/ 이사야 26장 1절-7절/ 840703화새 선지자 2015.10.25
372 구원의 성/ 이사야 26장 1절-7절/ 800108화새 선지자 2015.10.25
371 구원의 법칙 4가지/ 에베소서 2장 1절-7절/ 831115화새 선지자 2015.10.25
370 구원의 방편/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800809토새 선지자 2015.10.25
369 구원의 방편/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800806수야 선지자 2015.10.25
368 구원의 길은 회개뿐/ 요한계시록 13장 1절-18정/ 821016토새 선지자 2015.10.25
367 구원의 길은 회개뿐/ 누가복음 13장 1절-9절/ 830320주전 선지자 2015.10.25
366 구원의 근원/ 에베소서 1장 3절-12절/ 811123월새 선지자 2015.10.25
365 구원의 근원/ 요한일서 3장 3절/ 820205금새 선지자 2015.10.25
364 구원의 근원/ 에베소서 1장 3절-14절/ 811124화새 선지자 2015.10.25
363 구원의 근원/ 디모데후서 1장 3절-14절/ 801102주전 선지자 2015.10.25
362 구원의 가치-믿음 크는 방법/ 디모데후서 3장 15절/ 870111주새 선지자 2015.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