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의미

 

1984. 3. 18. 주일오전

 

본문: 에베소서 1 장 22절-23절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하는 그는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근본부터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없는 가운데서 영계와 이 물질제, 우주,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성으로 말하면 근본부터 만물 위에 있고 만물은  그에게 지음을 받았고, 또 알든지 모르든지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그분에게  복종하는 그 결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하는 그 말은 예수님의 신성만이 아니고 신인 양성일위로 된  인성도 그러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입니다.

영계나 물질계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의 발등상입니다. 영계나 이 물질계  우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우주와 영계 이 모든 것은 창조주의 발등상이요  교회는 만물 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영원 자존하신 이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으나 근본 하나님이 뉘요, 또 피조물인  인성도 하나님과 일위가 돼서 완전 승리를 이루셨기 때문에 신성도 인성도 만물  위에 있고 만물을 발등상으로 삼았고 교회는 그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제일  아래 위치를 가진 것이 이 물질계의 모든 피조물과 영계의 모든 피조물이요, 그  위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떤 것이 교회인고 하니 하나님과 진리와 사람이 행동적으로 하나가 된  그것을 가리켜서 교회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진리와 한 행동을  하심이 아니고 한 인격의 한 격위를 이루어서 그 본체는 두고 역사척으로는  일위를 이뤘습니다. 신성과 인성과 진리와 한 격위를 이룬 것이 예수님이시요,  그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서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의 영과 육이 한 지식을 가지고  한 욕망을 가지고 그의 능력을 힘 입어서 함께 움직이는 것이 그것이 교회  입니다. 교회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둘로 구분할 수 있으니 보이는  교회는 우리들이 이렇게 모여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 단체를 가리켜서  보이는 교회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이 보이는 교회는 앞으로 때가 되면  없어집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으니 보이기 않는 교회는 하나님과 진리와  영과 심신의 기능이 하나가 된 그것을 가리켜서 신령한 교회라 보이지 않는  교회라 그렇게 구분하는데, 보이지 않는 교회는 다 영생이요 영존하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보이는 교회는 변동이 되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변동없이 그대로  영원하고, 보이는 교회는 예수님이 구름타고 재림하시면 일단 폐해져서 죽었다가  다시 보이지 않을 수 있는 교회. 또 보일 수 있는 교회 자유 자재로 변화한 몸을  입을 때에 그때에 보이는 교회도 영계를 자유로 출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예수님의 그 몸도 그 인체도 공간의 제한을  받았습니다. 문이 닫혀 있으면 열지 않고는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또 사람들에게  다른 것으로 덮어 가루면 안 보일 수 있지마는서도 가루기 전에는 안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 몸은 문을 닫아 놔도. 공간이 없어도  출입할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보일려면 보일 수가 있고 또 안 보일려면 또  안 보일 수가 있습니다. 또 물질로 된 이식물을 먹을려면 먹고 먹지 않고도  영원토록 시장 없이 살 수 있는 몸입니다. 이 몸과같이 우리들도 변화를 받는다고  빌립보 3장 21절 이하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물을 복종케 할 수 있는 전능한  능력으로 우리의 이 죽고 썩는 몸을 주님의 몸과 같이 거룩하게 변? 함을 받는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때에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쿄쇠가 일치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머리요 교회는 옴이요 만물은 그 아래 위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만물 위 하나님 밑의 그 위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위치는  그러하고 기능 작용은 어떻게 하는가 하는 기능 작용에는 마치 우리의 머리와 몸  이것이 한 생명 한 기능을 가지고 한 희로애락으로 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피조물된 교회가 이렇게 기능적으로, 희로애락적으로 모든 영광과 행복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영생하게 되는 것이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은 이 일이 이루어진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전능이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직접 섭리하심과 같은 그런 섭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몸으로 되어 있는 이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의사도 만물에게 나타나고,  당신의 사랑도 만물에게 나타나고, 당신의 은혜도 만물에게 나타나고, 당신의  진노도 만물에게 나타나고. 당신의 심판도 만물에게 나타나고, 당신의 긍휼도  만물에계 나타나서 역사합니다.

 그런고로, 교회의 직책은 하나님의 각양 각종의 그 충만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다  전하여 주는 중보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만물에게  충만케, 하나님의 부요로 만물에게 충만케, 하나님의 그 지능으로 만물에게  충만케, 하나님의 평강으로 만물에계 충만케 하는 이 역사를 하는 것이 교회의  영원 직책입니다. 이것이 영원직입니다. 그 직을 직분적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모든 좋은 거 나뿐 거 큰 거 작은 거 삐뚤어진 거 바른 거 그런  것을 이 중보된 위치 제사장 직에서 그 모든 것을 바로 잡아서 조화를 일으켜  화평케 하는 직책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속하신 것도 만물의 대표자인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에 만물도 다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을 대신 형벌  받고 대신 행하여 대속함으로 만물을 다시 회복시켜서 살게 구원한 것이  예수님의 하신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그 모든 일을 하시고 그 일을  우리들에게 분담 시켜서 우리들도 성질적으로 그와 같은 일, 양은 다르지마는서도  종류적으로 그와 같은 일을 영원히 해서 주님이 우리의 대속주가 되심같이  우리는 만물의 대속주가 되어서 만물에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하나님의 몸이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입니다.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충만케 하시는 자라 말은 하나님을 가리켜 말합니다. 하나님의  만물들에게 충만케 하셔서 만물을 영원히 살게 하고 행복되게 하는, 없는 가운데  지으심같이 지은 것을 또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케해서 그 모든 행복과 평강과  쾌락이 충만케 하시는 그 하나님의 충만을 교회를 통해서 한다 그렇게 여기에  표시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머리시요 우리는 그의 몸이요  만물은 그 아래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세계에서는 천군 천사나 만물은  우리로 인하여 살고 우리는 우리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삽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는 별다른 딴 존재인가?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로서 딴 존재이지마는 신성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위에 있다 아래에 있다 하는 것은 예수심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  본체적으로는 하나님이시지마는 사역을 맡아서 일하시는 그 사역적으로는 층하가  있고 그 사역의 이름적으로는 층하가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위는 셋이나 본체는 하나이십니다. 위가 셋이라 말은 위에는 책임과  직책이 있기 때문에 삼위의 하나님이 본체는 하나이시지마는서도 말은 그 직책은  각각 달리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과의 이 차이 있는 것은 본체적 차이가 아니고  요거 잘 알아야 됩니다. 본체적 차이가 아니고 역사적 차이입니다. 우리는 몸이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 되심은 우리가 본체적으로 머리와 몸이 된  것이 아니고, 언제나 그분은 창조주시요 자존자시요 완전자시요, 우리는 그분에게  지음 받은 피조물이요 유한한 자요 불완전한 자인데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그  역사로 연결되어 머리와 몸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우리는 그의 몸된 것은 은혜의 역사적으로 머리 되고 몸된 것이지 본체적으로  머리되고 몸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가도 언제나 교회는 피조물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시요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십니다. 우리가 요것을  잘 구별해서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일은 언제부터 시작됐는가? 하나님이 자존하신 그다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이 일을 목적으로 정하셨습니다. 목적으로 정하시고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또  그다음에는 예정하신 대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창조하신  것을 예정하신 대로 보존하시고 하나님이 사람되어 예정하신 대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시고 다시 죽은 가운데에서 이 부활하신 이  부활까지의 공로로 우리를 완전히 대속하시고, 또 그 예정대로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예정대로 우리를 불러서 예수님 믿게 만드시고, 예정하신 대로  우리에게 천태 만상의 모든 현실들을 봉착하게 해서 모든 현실은, 우리는 좁고  어린 지혜라 이해 못할 때 믿이 있지마는 성경을 보고서 성경 지식을 충분히  가진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 있으니, 이해 못할 현실, 좋다 나쁘다고 하는 현실  그 현실은 꼭 같은 하나님의 목적 곧 우리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가치적으로, 효과적으로, 우리에게 그 필요성적으로는 꼭  같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역사를 하기 위해서 하는가? 크게 말해서 우리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도 창조도 모든 존재도 하나님이 주권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합했다가 나눴다가, 있게 했다가 없게 했다가, 원소로 돌아가게 했다가  원소가 또 어떤 존재로 다시 지음을 받게 했다가 이렇게 하나님아 섭리하시는 그  모든 섭리는 첫째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는 것이요, 구원을 이루게  하는 그 구원의 내부를 말하면 자존하신 하나님에게 대한 올바른 지식과  피조물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자타에 대한 모든 움직임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가져 하나님과 피조물, 모든 존재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  구원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요, 구원의 또 다시 한 일부는 모든 존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모든 존재에게 대해서 올바른 관계의 존재로, 관계의  행위로 자체가 점점 성화 되어감으로 자체는 하나님에게도 필요하고 모든  피조물에게도 필요 고 자기에게도 필요한 이 완성을 이루기 위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 만물에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깨끗하고 거룩하고 사랑과  지능 충만하여 평가적인 영원한 쾌락과 생명으로 충만케 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어떤 순서든지 순서가 나타날 때에 이  순서는 영원 전 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예정하신 예정의 그 순서가 하나씩  둘씩 지금 통과되고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또 이런 존재가 저런  존재로 변해지고 저런 존재가 이런 존재와 합해지고 나눠지고 변해지고 있어지고  없어지고 하는 이 모든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근본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존재 목적은 우리 구원을 위한 것 그 존재들의  목적이요. 이 모든 존재들이 이렇게 저렇게 자꾸 변화 되어가는 모든 과정들도  우리 구원을 위한 순서요 역사들인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예정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어야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우리 구원 곧 교회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예정하신 대로 섭리하시고 보존하시고 이렇게 재창조로 둘로 합해서  하나로, 하나를 둘로 이렇게 하나님이 개별 섭리하시는 이 사실을 우리가 알고 또  인정하고 믿고 하는 그것이 우리 지식에 있어서 우리 지식이 그대로 지식돼야  되고, 그 사실대로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돼야 되고, 우리 사상이 그렇게 되어야  하고, 우리의 행동이 그렇게 되어야 하고. 우리의 모든 희로애락이 그와 같이  되어져야 그것이 믿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무엇을 기준한  말씀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천하에 두어도 둘 수 없을 만한 그렇게 수량이 많고  복잡한 것을 간추려서 육십 육권 성경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육십 육권에  기록되어 있는 이 계시 지식은 땅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보낸 지식인데 하나님이 인간을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시켜 정확 무오하게  그렇게 사람들이 깨닫게 해 가지고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이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지식이요 또 하나님이 인생으로 더불어  계약한 계약입니다. 이 간단한 말씀 안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이  성경 말씀 안에서 계속 영원히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이 묻서 계시 안에는  무한한 영감 계시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문서로 계시되어 있는 문서 계시를 믿을 때에 그 믿음을 통해서,  믿는 것 만치 영감 계시가 그이에게 이제 계시해 주기 시작합니다. 깨달아서 알려  주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목적하신, 곧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모형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신데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볼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를 보았거늘 너희들이 어찌 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말하느냐'  이제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고 영원히 하나님을 볼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분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영원하신 분이시요 완전하신 분이신데, 그분을 볼 수  없는데 하나님의 품속에 있던 독생자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셨느니라  하는 것을 요한복음 1장에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인간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땅에 있는 수많은 그 인간들의 말과 인간들의 그 모든 지식  그 지식이 아니고 그 지식은 땅에서, 땅에서 뿌리 박아 올라온 지식인데 이  신구약 성경 지식은 하늘에서 내려온 지식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장벽이 헐어짐을 인해서 이 휘장 가운데로  하늘에 있는 그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에게 오셨고 이 지식안에 하나님이신 그  영감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내주하셔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이래서, 이  대속의 공로를 입은 사람은 성령과 진리가 그 안에 와서 죽은 영을 살리고 살린  그 영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의 모든 기능을 살리고 몸의 기능을 살리려는  것이 그것이 중생된 영의 역사입니다. 그 기능이, 우리 마음의 영의 기능이,  마음의 기능 마음의 기능은 지식성도 있고 지혜성도 있고 선성도 있고 사랑성도  있고 거룩성 구별성도 있고 의성도 있고 진실성도 있고 이 주권성도 있고 있는데  그런 모든 마음의 속성을 살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몸이 되는  그것이 우리의 위로 위에 있는 목표요 위를 향한 목표요, 아래를 향한 목표는  만물에게 하나님의 온갖 축복과 은혜로 그들에게 충만케 해 주는 이것이 아래로  우리의 목표요 사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몸이 되는, 몸이  이루어져가는, 본체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형적입니다. 하나님의 모형이  이루어져가는 것이 위로 우리의 목표요, 만물에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해  주는 이것이 아래로 우리의 목표입니다. 이 두 가지 목표가 달성되는 이것이  우리의 성공인데 달성되는 그 방편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믿음은 하나님히 계약으로 선포 해 놓으신 이계약 중에  있는 모든 소망을 실상으로 만드는 것이 그것이 한 말로 말해서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기관이 믿음이요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달성시키는 그 방편이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믿음의 방편을 써서 내가  하나님의 몸도 되고 만물의 중보자도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도 되고  만물들이 환영하면서 영원히 고대하고 찬양하는 그 대상이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믿음 하나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그 해석을 하면 하나님이  계약하신 그 계약을 자기가 지식으로나 마음으로나 감정으로나 자기의  본능으로나 자기의 양심으로나 자기의 영으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인정하는 것 그다음에 믿음은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우리의 머리되시고, 우리의 구원은 모든 순서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예정된 이 사실, 모든 존재가 우리 구원 위해서 창조된 이 사실, 모든  존재들이 예정대로 이렇게 저렇게 변화, 재화, 화합, 분리. 또 소멸되는 이 전부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있는 이 사실을 자기 양심이 인정하고, 자기 본능이  인정하고, 자기 사상이 인정하고, 주관이 인정하고, 성품이 인정하고 지식이  인정하고, 자기 말이 인정하고, 자기 행동이 인정하고, 자기의 몸과 피부까지  인정하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전능자의 그 역사를 따라서 지극히  높은 구원을 이루어가고 만물의 모든 존재가 이 구원을 위해서 있다고 자기가  입으로 말해도 지식이 인정 안 될 수 있고, 지식으로 그러하다 인정을 해도  자기의 감정적으로 인정안 될 수 있고 감정까지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의 주관과  본능으로 인정이 안 될 때에는, 그분의 지극히 크심이 자기 현실에 어떤 크고  두려운 어떤 것이 자기에게 부딪칠 때에 그가 지극히 크신 분과의 자기 구원과의  이 사실을 입으로 말하고 지식으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사실 사상이 되어 있고  주관이 되어 있고 본능이 되어 있으면 큰 데 속하여서 큰 것으로 말미암은 자가  그를 위해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게 피동되거나 거기 대해서 염려나 두려움이나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된 기독자는 놀램과 근심이 있지마는 놀램과 근심이 있는  것은. 혹 그분에게 거슬릴까 하는 두려움이요, 혹 그분에게 어긋남이 있는가 하는  놀램이요, 모든 인류와 피조물이 그분에게 바로 정상적인 그 결함이 되지 못해서  사망될까, 그것이 절단날까, 그것이 어리석게 스스로 자멸하는 그런 일이 있을까  하는 이 구원에 대한 염려나 두려움이지 어떤 피조물에게 피해를 받을까 그  피조물의 어떤 세력이나 모략에게 자기가 피해, 해를 입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은  절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 있는 것은 믿음이 없는 증거입니다. 안 믿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렇게 믿는 믿음으로 비로소 우리의 이 목표는, 두 가지  목표는 달성됩니다. 두 가지 소망은 달성됩니다. 위로는 내가 하나님의 몸 되는  것, 아래로는 모든 피조물에게 복의 기관이 되는 것, 생명의 기관이 되는 은혜의  기관이 되어지는 것 이것이 우리의 두 가지 목표요 두 가지 소망이요, 하나님의  목적 하나가 이 두 가지를 이루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지극히 큰 이 일을 우리에게 이루시려고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여기 읽어 봅니다. 에베소서 1장에, 1 장 18걸에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든  우리들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소망이 무엇이며, 그 소망이 뭡니까? 뭐 한국  영토를 차지하는 것 아닙니다. 구라파 영토를 차지하는 것 아닙니다. 이 지구  땅덩어리를 차지하는 것 아닙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조롱하고 '예수 믿는 자들은 아주  허영과 허욕이 가득 찼고 전체 기독교 보다 더 기만의 종교는 없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했기 때문에 이제 믿고 안 믿는 여기에서 그것은  결정됩니다. 그러기에, 무신론자들은 하나님 없다고 하고 그를 아주 멸시합니다.

그런데,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인정 할 수 없는계 다만 주님의 피공로의  구속을 받고 성신의 감화를 받은 사람만 인정이 됩니다. 인정이라 하는 것이 자기  주관으로 인정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신의 능력으로 인정을 하실 때에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라 그 말은, 기업이 뭐입니까?  '우리 기업은 그것이 우리 기업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시켜 주어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이 필요한 것 같이 우리가 필요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 가지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그렇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서 모든 피조물들을 만족하고. 저들이  몰라서 대항도 하고 하지마는 마지막에 알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다음으로  자기들에게 봉사자요 사랑의 자요 시은자요 위하는 자이기 때문에 만물이  마지막에는 우리를 찬양합니다. 우리는 그 찬양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께 돌리는  찬양을 돌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어떠하며' 그것이 우리  기업 인데 이 세상은, 세상은 많이 차지하였으면 많은 것들이 그 차지한 자를  원망합니다. 적게 차지 하였으면 적게 차지한 자를 원망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에 ○○○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국부입니다. 그분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속하기를 땅에 속했기  때문에 모두 다 뒤에 후배되는 그 정권자들은 그를 이렇게 존대하지를 않습니다.

존대하지를 않습니다. ○○○ 대통령도 국부라고 할 수 있고 그 영모는 국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세상들은 다 거기에 대해서 불평 불만이 많고  좋아하는 것 만치 싫어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또 칭찬하는 것 만치 욕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영광되지를 못합니다. 살았을 때에는  영광을 이렇게 돌리지마는서도 죽고 난 다음에는 전부 원망 블평입니다.

 그러나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 어떠하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와  같이 지위를 얻고 권세를 얻고 이래 하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서는 죄인으로  정죄받아 죽었지마는 성경에 말하기를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과 그 밑에 있는 모든 위로부터 아래까지의 모든 존재가 주님 앞에  감사의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영광을 주께 돌리면서 주라 시인한다고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영광의 덕의 구원입니다. 영광의 덕의 구원이라는  것은. 영광이라는 것은 뉘든지 해를 봤으면 영광을 안 돌립니다.

 그 마을에 가서 보니까 부자가 둘이 있습니다. 한 부자는 가서 물으면서 '여기  아무 부자가 있지요?' 이라니까 온 동민들이 입을 삐쭉 삐쭉거리면서 '그 댁이  어디 있습니까?' 가르쳐 주지도 안하고 휘떡거리면서. 삐쭉 삐쭉 거리면서 이래  갑니다. 또 묻기를 '그 댁이 참 인심이 좋다고 했지요? 참 선하다 하지요?'  이러니까 말은 못 하고. 겁이 나니까 말은 못 하고 삐쭉거리면서 '체, 미친놈 찾아  왔네 미친놈이 왔네. 그걸 인심이 좋단다. 또 미친놈 또 한놈 왔네.' 아, 속으로  돌아서서 욕을 한다 그말이오. 그게 영광이 없는 겁니다. 분명히 그 부자가 그  동민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그 동민에게 해독을 끼친 자가 분명합니다. 또 한  부자를 말합니다. '아 그 부자가 여기 있다 하지요.' '아이구, 어찌 오셨습니까?  아십니까? 예, 여기 계십니다. 그분 어찌 아십니까? 참 그분은 참 장한  어른입니다. 우리 뭐 동리가 그분의 덕으로 삽니다. 그분이 우리 동리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을 했는지 우리 동리에서 참 그분의 비를 세울려 해도 못 세우게  해서 못 세우고 있습니다.' 뭐 이러니까, 어떻게 사람 마다 만나도 칭찬이  자자하고 감격해서 못 견딥니다. 그게 영광입니다. 그게 영광이오. 우리 구원은  영광과 덕으로 된 구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말단의 모든 것까지도 다 감격하고 감사하고 진정 속으로  존대하고 감사하고 이렇게 영광을 돌리는 이런 구원이니까 이 기업의 이 중보자  되어 가지고 만물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케 하는 그 충만한 자의 그자의, 이  교회의 기업인 이 기업의 영광의 그 풍성한 것이 어떤 것을 이 마음의 눈이  밝아야 알 터인데, 성신의 감동으로 알 터인데 성신의 감동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 것을 너희들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19절에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그 능력이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러면, 우리가 믿기만  믿으면, 믿으면, 우리가 믿기만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서 역사하시는 그  능력은 지극히 큰 능력,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인데 그 능력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할 수 있는데 우리가 믿지 않으면 그 능력이 우리에게 와서 역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힘의 강력의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우리가 믿으면 역사합니다. '베푸신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절에 '그 능력이'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말은 대속하신 죽음도 이 능력이  들어서 대속하신 죽음을 성공하셨고, 또 다시 우리를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사람으로 부활하신 이 부활도 이 능력이 들어서. 그러면, 이 능력은 무슨  능력입니까? 이 능력이 사랑의 능력이요. 이 능력이 사랑의 능력이요 완전의  능력이요 모든 전체를 생명으로 구출하려는 그 생명 역사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주님 안에 역사해 가지고서 하늘에서 자기 오른편에 앉히사' 피조물 중에  창조주 다음 위치를 가진 것이 이 능력을 가지고서 다음 위치를 가지게 됐습니다.

 하늘에는 이 세상 권세 모양으로 무력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평가적인 가치입니다. 모든 풀 한 포기도 자유 의사가 다 있습니다. 풀 한 포기도  자유 의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만물 심판이라 말합니다. 풀 한 포기도  자유 의사를 가지고서 그 풀 한 포기가 '너는,' '나는 이분을 제일 좋아한다.'  그분을 올려야 됩니다. 그분을 높여야 됩니다. 그분은 찬성합니다. 풀 한 포기도  '나는 거기에 대해서 모릅니다.' 했으면 그의 혜택이 그에 미치지 안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영광에는 한 개의 흠점이 있게 됩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간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게 하시고'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그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만물을 그 아래 복종하게 하셨으니까  세상 권세자가 강제로 억압을 해가지고 복종케 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평가적으로 다 경배하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인다 그말이오. 이런 영광스러운 이  구원을 우리가 이루는 데에는 믿음으로 됩니다. 믿음이면, 믿으면 하나님의  충만이 우리에게 와서 연결됩니다. 어떻게 연결되느냐? 머리와 몸과 같은 이런  밀접한 연결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본체의 연결이 아닙니다. 연결이 되고, 또  믿으면 자기의 믿는 그 행위가 자기가 알았던지 몰랐던지 믿는 행위 하나 하나가  모든 피조물들에게 알고 보면 다 감탄해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그런 결과를  맺는 그 행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믿음을 가리켜서 베드로  후서 1장 1절에는 보배로운 믿음이라 이렇게 했소 보배로운 믿음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믿음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자기가. 자기가 일국의 그 왕의, 왕의 사신으로 왔으면 옛날은 암행어사라고  있습니다. 숨어 다니는 어사, 어사라 말은 왕이 심부름 보낸 사람이라 해서  어사라 하는데. 암행어사라도, 자기 속에 왕이 배경이 되어 가지고 있고 왕의  대사로 왔기 때문에 암행어사가 그 나라 국경 안에서는 아무도 겁을 내지  않습니다. 만일 암행어사가 무슨 말을 하나 하면 산천 초목이 떤다 했습니다. 왜?  땅에 있는 것도 이렇게 자기가 인정할 때에 그 권세를 자기가 힘입어서 힘입은  것이 태도에 나타나고, 안 면에 나타나고, 정신에 나타나고, 사상에 나타나고.

주관에 나타나고, 행위에 나타나고 다 나타나는데 우리가 이 모든 것이 우리  구속을 위한 예정이요 창조요 섭리요 이런 이 사실, 이렇게 큰 구원을 받았고 큰  직책을 이루는 이 구원을 이루는 이 사실을 자기가 지식으로 알고 '아, 말은 그  사람들은 그래 말하지마는서도 그거는 쓸 데 없는 말이다.' 지식으로는  알았지마는서도 부인하는 것이요. '아 그거 사실이다.' 또 말로 인정 합니다. '그는  사실이다.' 말로 증거를 합니다. 또 자기가 행동으로 그렇게 증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로 인한 행동을 합니다. 그렇게 인정하는 행동을 합니다.

그렇게 아는 행동을 합니다. 자기는 그렇게 믿고 바래는 행동을 합니다. 이러다  그 전지전능이라는 그런 것은 자기는 평소에는 되는데, 아주 그 전능의 주님을  믿지 안하면 여기서는 두려워 하지 안할 수 없을 그럴 때는 전능의 능력을  믿으면 평안하고 기쁘지마는서도 전능의 능력은 입으로는 말해야, 주님은  전능이십니다. 전능의 주님이 날 보호하십니다. 전능의 주님이 보호 하시는데  내가 무슨 염려 있겠습니까? 전능의 능력이 보호하십니다. 전능의 품안에 나는  들었습니다. 전능의 주가 내 안에 계십니다. 아무리 입술로는 해도 얼굴이  새파래집니다. 얼굴이 새파래져. 겁이 나 가지고 얼굴이 새파래져. 그만 발발 떨고  얼굴이 새파래져서 송장같이 돼져. 그것은 그의 지식으로도 인정하는 그것이  감정까지 인정이 안 됐고 사상까지 인정이 안 됐고 저의 주관까지 인정히 안  됐기 때문에 그 주관의 떨림이 껍데기 피부까지 그 두려움의 불신이 나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참 세월이 짧은데, 얼마되지  안하는데 이 세월에 이 순서의 현실을 주시는 것은 요 현실까지의 내사 인정치  못하는 것을 내가 발견하고 '아! 나는 과연 사자 구덩이를 만나니까 다르구나.

불미 속에 찹아 넣는다는 그런 시험을 만나니까 다르구나. 신사 참배를 만나니까  다르구나. 공산주의자를 만나니까 다르구나. 재산이 그만 탁 그만 일시에 파산이  되어지니 다르구나. 또 다른 사람에게 어떤 억울하고 애매한 소리를 들으니까  다르는구나.' 달라진다 그말이오. 아, 전능자를 모셨고 전지자를 모셨고 만주의  주를 모셨고 모든 존재의 중보의 위치를 가지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동행하면서  하나님 시키는 대로 그 지극히 큰 역사를 하는데 뭐 누가 욕을 하면 어떨 것이며  누가 비꼬면 어떨 것이며 정죄를 하면 어떨 것이며 그가 죽인다고서 뭐 무슨  그렇게 경영을 하면 어떨 것이며 그런 선포가 있으면 어떨 것이냐 그말이야 어떤  사람은 6·25때에 그 인민군들이 저놈은 죽여야 된다고서, 매일 그 내무서에서  의논하기를 저놈은 죽여야 된다고서 내일 죽이자 모레 죽이자 하는 그런  사형이라는 사형시키는 그 말을 암만 해도. 날마다 수십 번 듣기는 듣지마는서도  하거나 말거나, 왜? 하나님은 내편 되시고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니까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그 말 하는 것도 우리 주님이 개별 섭리로 그말을 하게  해서, 그 마음에 그 말 하는 것이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왜 그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그 말을 하겠는가? 오! 그 말 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주님이  네가 이 말을 듣고 그 협박에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정말 믿나 안 믿나 하는  것을 보자 하시는 것이니까 '주여! 내가 믿습니다! 아무리 큰 자라도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만이 내 생명을 주권하고 계시지 누가 내 생명을 가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라니까 주님이 웃으시면서, 기뻐 웃으시며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내가 기뻐하고 만족하노라.' 이렇게 모든 것이 우리 현실에서 믿음 없는 것을  알게 하시고. 또 믿음을 맨들게 하시고, 또 믿음 없는 걸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교만하지 않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오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고 그러면 믿음  없는 것을 알게 하는 것과 또 믿음 없는 것을 새로 믿음을 만들게 하는 것과 또  믿음을 소망하게 하는 것과 믿음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 시험하게 하는 것과 또  믿음을, 믿음 중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믿음이 있고 제 주관으로 믿는  믿음이 있으니까 이 주관으로 믿는 믿음은 다 불탈 것이요 완전성이 아니기  때문에 이 완전성이 아닌 믿음을 다 소멸하고, 완전히 주관은 죽어 버리고,  주관은 죽어 버리고 전적 하나님만 믿는, 자기가 세상이 이런 것이 좋기 때문에  믿는다 형편이 좋기 때문에 믿는다 하는 그런 거 다 치워 버리고 순전히  하늘에서 온 이 객관적 믿음만이 남아 있도록 하는, 금은 불로 연단하는 거와  같이 순전히 영감과 진리로의 힘으로만 믿고 인간 주관이 없는, 그 모든 것을  불태워서 정금처럼 완전히 그렇게 연단시키기 위해서 하는 거, 이 현실은  이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을 당할 때에 '아, 여기에서 배울 것이  뭐인가? 발견 할 것이 뭐인가? 깨달을, 오해했던 것을 깨달을 것이 뭐인가?  오판했던 것을 깨달을 것이 뭐인가? 헛되이 안심했던 것을 깨달을 것이 뭐인가?  여기에서 내가 믿지 못했던 것이 뭐인가? 기뻐하지 못했던 것이 뭐인가?  소망하지 못했던 것이 뭐인가? 내가 의지하지 못했던 것이 뭐인가? 내 그분을  대접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 뭐인가?' 이 현실은 이런 거 저런 거 모든  것이 많은데 이것을 다 할라 하니까 한 현실만 줘 놓으면 하나만 하지 둘을 못  하기 때문에 자꾸 현실을 바꾸어서 이렇게 해 주시니 현실은 정금보다 귀한  것이라. 내게 대한 현실은, 이 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가졌지마는서도 모든  현실보다 내게는 내게 당한 현실이 제일 보배로운 현실이라. 죽음이 온  현실이든지. 영광이 온 현실이든지 손해가 오는 현실이든지, 매를 맞는  현실이든지, 감옥에 갇히는 현실이든지 어쨌든지 내게는 내 현실이 제일 보배라.

보배인데 이 보배인 현실에서 목적인 하나님의 몸이 되는 것, 만물의 중보자가  되는 것. 이래서 하나님에게 만족이 되고 만물에게는 다 감탄으로 기뻐하고  환영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하나님 좋아하시고 만물 좋아하는, 이 만물들이  모든 존재가 좋아하는 요 속에서 천국을 누리는, 요 속에서 평강을 누리는 이것이  우리가 이룰 구원인데 우리가 이 믿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뭐 조금 알려 줄려고 뭐 하나 내놓으면 '아이구, 와  이렇습니까? 하나님이 날 버리십니까?' 나 망한다 나 죽는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이 주실래야 주실 수가 없고, 고칠래야 고칠 수 없고, 영광으로 이끌래야  이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 나라의 총리대신으로 세울려고  했지마는서도 그거 우리에게 계시로 보였소. 총리대신이 큰게 아니라 시킬려고  하나님께서 요런 순서, 요 순서, 그 환난에. 형제들에게 미움을 당했기 때문에 흙  구덩이에 파묻혔고 흙구덩이에 묻였기 때문에 다시 거기서 끌어냈고 끌어냈기  때문에 햇 족속에 상품으로 팔았고 팔렸기 때문에 애굽을 갔고 애굽에 갔기  때문에 보디발 집에 갔고 보디발 집에 가서 보디발 아내 때문에 억울하게 됐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 갔고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서 이제 거기가 가지고 모든 그  정치범 사람들을 만나는 가운데에서 애굽 나라의 정치학을 다 공부했고 또  거기에서 하나님이 꿈 해석하는 것을 주어서 꿈 해석을 함으로써 애굽 나라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거요. 요셉이가 세상의 과학 가지고 됐습니까? 다니엘도  그랬소. 그가 특수 학원에서 공부 했지만 공부한 그것 가지고 하나도 올라가지  못했소. 하나님이 주신 그 지식, 꿈 해몽 가지고서 다니엘이 올라갔고 죽을 때도  하나님의 계명 지켜 가지고 올라갔지 딴 거 가지고 올라 간게 뭐 있습니까?  우리가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런고로, 가다가서 이제까지 하나님 따라와도 하나님 계명 지키는, 그 계명  지켜서 하나님 인도대로, 어떤 지경에서도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이 하나님  따라가는 거라 했는데 '계명 지키다 이제 감옥에, 마지막에 감옥에 왔다. 무슨  소용 있노?' 하고 요셉이가 감옥에서 그만 탈출 해버렸으면 헛일이라 그말이오.

감옥에서 계명 지키지 못 했으면 헛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 믿는  자는 하나님이 마음 놓고 그에게 사랑과 은혜와 존귀의 그 권위를 그에게 부여해  줄 수가 없고 그를 인도해서 성장 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오전에는, 우리가 어떠한 자인가? 하나님이 어떤 자이시며  그의 목적에 있는 우리가 어떠한 자인가? 우리 소망이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신 그 능력이 어떠한가? 우리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공로는 어떠한가?  우리를 성령과 진리와 주의 피가 보증하고 있으니까 이 보증의 세력이 어떠한가?  이 우주는 뭐인가? 내게 닥치는 모든 존재는 뭐인가? 현실은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가 똑똑히 파악하고 믿는 마음을 가졌을 때에 우리는 평안하고 즐겁고  강하고 담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구원을 이루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믿어야 합니다.

 오후에 계속 하겠습니다.

 이런데. 이 믿음을 왜 못 가지느냐? 아, 하나님의 인도 대로만 하면되는데.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계약을 믿고 그대로만 실행해 가면은 한 시간 이  계약 이행해서 이루어지는 결과는 이 우주로도. 우주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천하를 얻고도 너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 했습니다. 잃는 것이 뭐입니까? 중생된 새사람을 잃어 버렸다 그말이오.

빼앗기는게 뭐입니까? 그 현실에서 자기의 기능이 되어지는데 현실 한 현실에서  자기의 기능 만든 그것은 우주를 자기 것 만든 것보다 더 크다 그말이오. 우주를  자기 것 만든 다 할지라도 자기가 세상을 떠나면 다 두고 가야 돼. 소용이 없어.

이렇게 주님이 평가했습니다. 주님이 거짓말하시는 주님입니까? 우리를 속이는  주님입니까? 주님은 천지는 없어져도 당신의 한 말씀, 한 마디는 하나도, 획  하나도 가감이 없다 했습니다. 믿어야 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 합시다.

 믿는 자가 권능 있고 복 있고 평안하고 믿는 자는 세상을 발 아래 밟습니다.

믿는 자는 이 세상을 잘 이용해서 세상도 구원에 복되고 자신도  영광스러워집니다. 그러나 믿지 안하는 자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안 믿는 데는  할 수 없어. 이 말씀을 듣고 조롱하는 자도 있을 거고 비웃는 자도 있을 것이고  감탄하는 자도 있을 거고 '아멘' 하고서 작정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 우리가  입으로 표시해야 되겠어. 우리도 앞으로 설교 들을 때에 이제 그 마음에 그렇거든  '아멘!' 해야 되겠어. 너무 그래 놓으니까 거리가 멀어서 안 됐어. 옳으면 옳은  것으로서 '옳습니다! 옳습니다?' 아멘 안 할려면 '옳습니다.' 해야 돼 '옳습니다.'  이래 가지고서 확신을 가져야 능력이 옵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와 연합이 됐는데 그거 더럽히지 맙시다. 더럽히지 많으면  큰 능력 옵니다. 더럽히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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