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하나

 

1984. 1. 28. 토새벽

 

본문: 로마서 12장 3절∼ 8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해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맏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선지자선교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아라' 그러면 그 이상의 생각 이 어떤  것이 그 이상의 생각인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는 우리의 머리요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지체요 분자요, 또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받는 것으로 족합니다. 받는 것으로 족한데 제가 수동적으로 살지  안하고 그에게 받아서 사는 것으로 살지 안하고 제가 뭐이든지 능동이 되면  죽습니다. 그러니까, 수동적으로 살고 능동적으로 조금만치라도 능동의 것이  있지 않도록 해라, 너는 또 하나의 지체요 부자요 전부가 아니다. 하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의 분수대로 또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존재인 것을 알고 살아야 되지 지나치게 자기는 전부도 아니요,  자기는 또 능동의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살아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짓 안할라해도 자꾸 이게 되져요 인제 모두 나이가 많으면 자꾸  돼지는데 젊은 분들이 이런 일 되기 전에 좋은 일 많이 해야 되지 믿음 준비  안하면 안 됩니다.)  이 여러 시간을 말씀했는데, 이 본문을 자꾸 이 본문만 읽으는 것은 이 본문을  잡고 어떤 본문이나 여기에 대한 말씀이면 같습니다. 그러니까 한 본문을 잡고  요동치 말고 굳게 서라고 해서 자꾸 이럽니다.

 첫째 아담으로 생겨진 것이 우리에게 있고, 또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은 어떤 것인고 하니  사람이 죽었을 때에 시체 되어 있는 시체 죽었을 때에 시체되어 있는 그 시체  그것이 첫째 아담에게서 받은 것들이요 또 아담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와진 것이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것이 있으니 타락으로  인하여 온 것 그것이 아담에게 속한 것이요 아담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 활동이나 기능이나 또 생명이나 또 권세나 영광이나 존귀나  기쁨이나 쾌락이나 그 모든 것, 이 송장이 송장이 움직이는 그 움직임 전부, 또  송장이 가진 모든 영광이나 존귀나 행복이나 기쁨이나 평강 그 전부 그것이 둘이  사람인데 사람은 이 송장이 되는 이 고깃덩어리 이것이 있고. 고깃덩어리 외에는  어떤 게 있는고 하니 활동하는 그 기능 또 활동하는 기능 또 그것이 가진 모든  덕,-덕 그런 것은 활동보다 더 시비해서 활동은 내가 이런 것 '주, 종을  땡땡치심' 이래면 이게 활동이지마는 덕이라는 것은 그 활동으로 말미암아 마치  자동차가 지나가면은 먼지가 일어 나듯이, 이렇게 뭐 이래 두드리니까 (주: 종을  한번 치심) 땡! 이래 소리가 울리는 것 같이, 그렇게 신비하게 돼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 덕입니다. 덕-또 그보다도 더 신비하게 돼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의  영광 기쁨 쾌락, 그런 것 들입니다.

 그러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그 형체가 되어 있는데 그  형체 그것에게 모든 기능, 또 그것의 쾌락, 또 그것의 영광, 행복, 생명,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다 쏙 잡아 빼버리면 뭐만 남습니까, 녜? 확 잡아 재면  뭐만 남지요, 금방 말하지 안했어? 시체, 쏙 잡아 빼면 시체만 남아요. 요걸  똑똑히 구별해야 됨니다. 이게 비유의 말씀이 아니라 그말이요, 비유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비유가 아닙니다. 쏙 잡아 빼버리면  송장만 남소. 그러면, 송장과 안 믿을 때의 그 안 믿는 사람과 송장과. 다른것이  뭐 있습니까? 송장과 다른 것 있는 것, 송장은 그 형체 뿐입니다. 영도 형체  뿐이요, 이 심신도 형체 뿐이요, 거기다가 안 믿는 사람으로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다른게 뭐이냐, 그 시체에 딴 것 있는게 있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그  기능의 작용이 있고 기능의 작용이 있고 또 그 기능과 이 시체가 살아서  움직이는 그 생명이 있고 또 그것이 누리는 쾌락과 모든 영광과 존귀 그런 것이  있고 이제 그래서 안 믿는 사람으로서 이제 죽어 있는 사람과그 산 사람의  다름이 뭐이냐 그라면 여러분이 좀 알지 쉬울 거라 말이오.

 자꾸 이건 알기 어려운 신비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사람의 이 말이라 하는  것이 대단히 요새 발달된 방언이니까 그 방언이 발달이 많이 되어서 넉넉히 모든  것을 표시 할 수가 발표할 수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지마는서도  그 인간의 방언이라하는 것은 지금도 극히 성급니다. 극히 성글어서 이것은  발표할려고 하면은 발표 못하는 것이 발표하는 것 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만츰  언어는 둔한 것이라 말이오. 언어는 둔한 것이기 때문에 언어는 대충 이렇게  짐작만 하도록 윤곽적으로만 이렇게 말 하고 언어 속에 이제 영감으로써  작용하는 영감으로 자기에게 알아지는 그것이 인제 비로소 그 알게 되고, 그  영감으로써 알게 된 그것이 이제 그 보다 더 하나님과 연결된 것 생명으로써  생명에 신령한 생명의 본능으로 알아지는 그것이 더 이제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래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지마는서도 하나님의 모형을 가질라면 뭐  그 참 이런 무슨 비유로 말하면은 그저 땅과 하늘이 높은 것처 럼 그렇게 차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도 이 세상에서 종자적으로 갖춘 것은  그때 자라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마련치 못한 종자는 안 되지마는 마련해 놓은  종자는 자꾸 그대로 발달되고 성장되고 얼마든지 나갑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잘 믿는 사람과 못 믿는 사람의 차이가 많습니까,  무궁세계에 억 만년 지내고 난 다음에 차이가 많겠습니까? 어떤데 차이가  많겠습니까? 그걸 여러분들이 대답을 할 줄 알면 하는 말을 좀 들을 수 있다  그걸 생각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잘 믿는 사람과 못  믿는 사람의 그 차이와 무궁세계의 차이에 어느 차이가 더 많을 건가 그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이 모르고 지금 우리 ○집사님은 알고 말하는지 모르고  말하는지 잘 모르겠어 이 무궁세계니까 무궁하니까 그 차이가 많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을 가지는데 그 말은 맞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종자를 가졌으니까 이  사람은 종자를 백 가지를 가졌다 저 사람은 천 가지를 가졌다 그러면 십 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십 배 차이가 있으니까 십 배 차이가 있지마는 이 종자  한 종자가 십 년이 가니까 그 만침 커지고 그 만 년이 가니까 그만침 커지고  억만 년 가니까 그만침 커지니까 이거는 다시 종자는 더 마련하지 못하고 이제  마련된 그것이 자꾸 하나님을 향해서 자라가고 온전해 가다 보니까 종자 있는  것은 자꾸 확대돼서 자꾸 성장돼서 나가게 되는데 종자는 이 세상에서는 종자 몇  가지 그 종자의 숫자만 많고 작고 차이가 있지마는 하늘나라에서는 그것이  실상으로 참 무한이 자라서 가는 그 자라감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그말이요. 그냥 거저 무궁세계니까 차이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지 말고.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이나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는 종자적입니다. 종자를  마련하는 종자적이요-종자는 세상만 마련하지 무궁세계 가서는 종자를 마련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그러기에 모든 것이 기초적입니다. 기초적이요 근거적인데  이 근거는 무궁세계에서는 마련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근거를 마련 해  가지고서 그 근거가 자꾸 자라가고 비유컨대 이 기초적이니까 이 기초 위에  기초를 다시 무궁세계는 닦지 못해요. 이 세상에서 기초를 닦아 놓으면은 한  기초 닦았으면 그 한 기초 위에 한 건물이 서는데 천 층 만 층으로 자꾸 이렇게  높이 건축돼 나가고 그러나 그것만 되지 그 새로운 터를 닦을 순 없다 그  말이요, 기초는 마련 할 수가 없고 종자적으로는 마련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차이가 많은 것입니다.

 이렇게 안 믿는 사람을 자꾸 이것이 뭐인가 저기 뭐인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보태 보면 알고 떼어 보면 안다 그 말이요. 보태 보면 알고 떼어 보면 알고.

이런데 이 말하는 것을 자기가 확실히 믿어지는 믿음이 생겨져야 되고 또 자기가  확실히 깨달아 영감된 그 영감이 되어져야 되고 그래야 알지 그 전에는  모릅니다. 안 믿는 사람이 지금 같이 한 자리에 앉아서 있다가 한 사람은  죽었습니다. 한 사람은 살아 있습니차. 그러면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다른 것이  뭐이냐? 그 몸뚱이에 모든 지체를 심사해도 꼭 지체가 같습니다. 또 세포를  심사해도 세포가 사람과 사람이 좀 다른 것처럼 그것만 다르지 꼭 같습니다.

같은데 뭐이 다르냐? 다른 것은 첫째 생명이 다릅니다. 하나는 생명이 있고  하나는 생명이 없고 그게 다릅니다. 또 뭐이 다르냐? 하나는 지능이, 이  기능체의 시체, 기능이 기능이 그것을 통하여서 작용할수 있는 그 기능에 작용할  수 있는 그 시체는 있지마는서도-이 손이 움직이면은 이거 움직인 이거는 힘이요  이거는 기능이요 또 여기 묘한 묘술하는 그런 거는 또 그것도 기능이요-이런데  이 움직일 수 있는 이 근육이나 골수나 신경이나 이 모든 것 그 시체는  있지마는서도, 이것이 기능이 없어 가지고 작용을 못한다 그거요. 그러면, 그  생명이 없기 때문에 생명이 없고 있고 그게 다르고, 또 다 같은 시체인데 생명  떠나 있을 때 생명이 다르고 또 기능이 다르고 그것이 활동하는 그 활동이  다르고 그것이 누리는 그 희로애락이라는 그 누림이 다르고 그것의 모든 행복이  다르고 또 지금 자꾸 이래 새로와지고 가감해서 먹고 먹음으로 새로와지고  공기를 마심으로 새로와지고 햇빛을 마시므로 새로와지고 또 이것이 차차 차차  그 도태해지고 하는 그것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른  그것을 우리가 또 구별해 봐야 될 것입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르다.

 이런데, 그러면 우리 기독자들과 그와 다른 것은 뭐이냐? 시체가 다르냐  같으냐? 이 시체 이거는 시체가 다릅니까 같습니까? 시체가 같습니다. 시체가  같습니다. 시체는 같은데, 또 그러면 그것이 그 생명이 생명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생명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안믿는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생명이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가진 생명도 우리가 있습니다. 또 기능이  같습니까? 녜, 기능이 안 믿는 사람의 기능과 같은 것도 있고 또 믿는  사람으로서 그들이 가지지 못한 그런 기능을 가졌습니다. 생명도 기능도 그들이  가진 것도 가졌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고, 또 모든 그 작용 작용하는  것이 작용하는 것도 그들이 작용하는 것도 가졌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작용도  가졌고, 또 그들이 누리는 그 희로애락의 누리는 것도 가졌고 그들이 가지고  누리지 못하는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희로애락을 누리는 그것이  있고, 또 그들이 하는 일이 일같은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는 거 있고 그들이 하지  못하는 알지도 못한 일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있고 그들이 가진 그 지위도  우리도 가지고 있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지위도 우리가 가지고 있고, 그의  영광이나 존귀나 능력이나 그런 것을 그들이 가진 것도 우리가 가지고 있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래서 그 시체와 불신자의  시체와 불신자의 산 것과 다른 것을 여러분들이 구별해 보고, 또 불신자와 또  믿는 사람과 다른 것을 구별해 봐야 됩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어떤 걸 가지고  있느냐 하면은 그 생명을 가진 그 생명이 그들의 생명과 우리 생명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생명은 그것은 죽는 생명입니다. 그것은 죽는 생명이요.

영생하는 생명이 아니고 그 생명은 죽는 생명인데, 저주받은 생명이요 사망 아래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존재 목적이 뭐이냐 존재 목적이 그 죽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시간이 가면 차차 차차 죽어서 다 죽어 버러는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불택자는 나는 것이 뭣 때문에 나는 것이냐 이 원죄로  말미암아 죽은 그것이 본죄로 인해서 완전히 죽기 위해서 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나는데 두 종류 있는 것은 하나는 영생하기 위해서 났고 하나는  죽기 위해서 났습니다. 하나는 죽기 위해서 났고 하나는 영생하기 위해서 났고,  그러면 죽기 위해서 난 것은 그것이 원죄로 벌써 아담이 대표해서 그 대표의  동참한 종류가 수량이 있는데 대표에 참석한 수량이 있는데 그 수량이 있는 그  수량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제 정죄 아래에 있고, 사망 아래에 있는데 그것이  그 사망 아래에 있는 사망이 완성해야 되겠고 정죄가 완성해야 되겠고, 그  형벌이 완성해야 되기 때문에 무궁세계 지옥이라 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 전 선택 안에서 하나님 목적 안에서 난 사람들이 있으니 사람들이  끄트머리 보기에는 같은 것지마는서도 목적 안에서 있는 이 사람들은 나기를  뭐이냐? 그것이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된 그것이, 완성되기 위해서 나고, 또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된 그것이 완성되기 위해서 납니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은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것이 이제 완성을 하기 위해서 났고,  또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은 그것도 완성되고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된 그것도 완성되기 위해서 났습니다. 그 완성이니 완성  그것이 영원 완성이 아니고 완성 그것이 종자적인 완성이요 기초적인 완성이라  그말이오. 알겔옵니까? 기초적인 완성이요 종자적인 완성이라 말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두 가지 완성이 됩니다.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것이 완성되고  둘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그것이 완성이 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컷째  아담에게 속한 것만 완성 이 됩니다. 이러니까 불신자와 불택자와, 택자의 다른  것이 이것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우리가 불택자와 우리 택자 우리들과  같은 것이 있고 다른 것이 있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구별을 해야 될 것입니다.

같은 것이 있고 다른 것이 있다. 그러면 같은 것은 같은 그대로 같고 다른 것이  그들이 가지지 못한 다른 것이 있으니다른 그것이 뭐이냐? 다른 그것이 그  생명이요 그들과 같이 가진. 그 생명이 있고 그들이 가지지 못하고 다른 생명이  있으니 그 생명을 가르쳐서 영생하는 생명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 다른 생명이  있고, 다른 또 기능이 있습니다. 기능이 있는데 그러면 송장과 안 믿는 사람과  기능이 다릅니다. 송장과 안 믿는 사람과의 기능이 다른 것을 여러분들이  찾으시오. 그 기능의 기능의 기능의 그 형체는 있고 본체는 있지마는서도 기능의  본체는 있지마는서도 그것이 능이 빠져버렸다 말이요 능이 없어 버리요. 그  기능을 기능 작용을 할 수 있는 그 본체는 있지마는 서도 본체에 그 생명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이 기능 본체에 산 기능이 있어야 될 터인데 산 기능이 없기  때문에 팔만 뻣뻣하이 이래 가지고 있지, 오그리도 못하고 뻗도 못하고 이  못한다 그말이오 그러면 불신자의 그 기능을 가진 그 기능외에 택자들은  영생하는 기능을 가졌으니 그들이 가진 그 기능 그는 그외에 그들이 가지지 못한  기능을 가진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가지지 못한 생명이 있고 기능이 있고 또 이것에 그 활동하는  그 활동의 세계 활동의 무대 활동의 그 무대 활동의 무대라고 말 하면은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먼자 자기에게 있는 무슨 이 고깃덩어리의 기능, 자기의 또  마음의, 기능 마음의 기능 그것이 언제든지 -요거 좀 알기 어려울 거라-'그  기능이 언제든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에서 해방하시고' 해방이란 말씀을  했고, 또 '그 지위를 지키지 안한 천사들을 흑암에 가두었었느니라 가두었다  하는 그 가두었다, 또 해방됐다 하는 것은. 갇힌 것 해방이라 말은 구금을  당해서 있었다 구금 당해 있었다 하는 그것을 전제로 하고 말하는 것이고. 또  흑암에 가두었다 하는 것은 그 광명에서 흑암으로 가두어져 버렸다 하는 그런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기능이 그 불택자의 그 기능이 활동하는  그 무대 그 무대는 우리도 활동할 수가 있고 그 무대는 우리가 가졌고 우리가 또  그들이 가지지 못한 그 활동 무대를 가졌습니다. 활동 무대를 가졌으니 그 활동  무대는 그들이 가지지를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죄로 인해서 갇혀 있는 그  구속되는 감옥 속에만 있지 감옥 밖에 나오지 못하고 이 감옥이라 그 말하면은  벌써 이게 형체를 가지고 물체를 가지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들이 이 감옥에  갇혔다 하는 것을 알지마는서도 그 감옥이나 그 죄에 갇혀서 그 활동하는 그  활동이 사망세계요, 그것이 광명이 되지 못하고 의가 되지 못하고, 영생할 수  있는 심판을 통과할 수 있는 그런 빛이 되지 못한 빛이 되지 못한 그 어둠에서만  되어 가지고 있고, 그 제한된 그 제한 범위 내에서만 있지 그 제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한 세계를 그들이 참가하지 못하고 밟지를 못하고 또 광명 세계를 밟지  못하고 의롭고 진리인 그 무대를 그들이 가지지를 못하고 그 무대에서는 활동을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택자와 택자가 이 세상에서 같은 한 자리에  앉아 가지고서 사탕 장사를 한다 할지라도 이 사탕 장사하는 이 사람의 활 무대  그 사람이 활동하고 있는 활 무대를 그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그 가운데는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껍데기 육안으로 볼 때는 한 자리에  있고 같은 사람이지마는서도 기능도 다르고 활무대도 다르고 소망도 다르 그 또  조성해 놓은 그의 이력이나 모두 이루어 놓은 일들도 다르다 그거요. 그래 이  활동도 다르고 또 희로애락을 누리는 그 희로애락도 다르고 영광도 다르고 다  다른데 그것이 이 세상에 불택자들이 아담 해와에게 받은 그것, 그것과 비슷한데  그거와 비슷한데 요것은 뭘로 차이 있느냐 하면은 하나는 죽은 것이요 하나는 산  것이요 생명이 있고 없어서 다릅니다. 그러면 또 생명이 있다 없다 하면은  그들이 가진 생명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생명은 또 우리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지 못한 생명을 우리가 가진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가지지  못한 생명.

 이 아주 어렵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듣고 알 사람은 알고 알면 그  사람이 가서 자기 속에 작용을 할 것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그래 싸운 것이  아니라 이게 자꾸 말을 하면 자꾸 육적으로 나오고 자꾸만 껍데기로 나옵니다.

자꾸 껍데기로 나오고 아주 사람들이 요것은 손으로 펼수 있다 이렇게  말하지마는서도 손으로 쥘 수 있는 이것이 든든하고 여문 것 같지만 손으로 헐  수 있는 이것은 참 허무합니다. 손으로 쥐었으면 나중에 보니까 다 피해져  버리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치로 잡은 것은 그 손으로 잡은 것보다 더  강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두워서 자꾸 이거 외부로 사망에 가까운 자꾸  껍데기로 나올라고 하고 안으로 들어 갈려고 하지를 안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그들이 가진 시체되는 그것을 우리도 가졌고 또 그들이 가진 그 기능  그것을 기능이나 희로애락이나 활 무대나 그런 것도 다 가졌습니다. 가졌으나  그것은 전부 다 사망 아래에 있는 것이요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요 또 어두움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또 그것은 제한해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갇혀 있는 그 안에서만 제한돼 가지고서 활동하지 그 밖에  하는 것은 없지마는서도 우리는 그 밖에 하는 것이 있다 그거요. 그 밖에 활  무대, 활동할 수 있는 그 기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은 그 사람은 그 기능이  어떤 기능이 있느냐-이건 알기 위해서 지금 말하는 겁니다. 어떤 기능이 있느냐?  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기능이 있습니다. 걸어 다니는 기능이 있어. 그거도 또  없는 사람 있고 걸어 다니는 기능은 있으나 그 사람이 이 바다 위에를 그저 제가  헤엄쳐 가지고서 몇 키로 같은 거는 갈 수가 있겠지마는서도 혜엄쳐 가지고서  우리 한국에 시작해 가지고서 세계 바다를 일주 할 수는 없다 그거요. 없는데,  그 사람이 그 배라는 그 자기가 배를 소유해 가지고서 그 배를 타고서 이 세계에  있는 전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바다를 다 항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항해할 수가  있지마는 그거는 할 수가 있지마는서도 그 사람이 공중은 혹 뛰어서 한 몇 미터  가량은 공중을 이렇게 제가 활동할 수 있지마는서도 벌써 몇천 미터나 하는 그런  위에는 그 사람이 갈 기능을 가지지 못했다 그말이오. 그러면 그 기능도 땅에  기는 거는 땅에 기는 기능도 없어서 누워가지고서 그저 털렁털렁하고서 이래  하는 어린 아이에 그것도 있지만 조금 크면은 육지는 돌아다니고 그 기능이 좀  늘면은 바다에도 다닐 수 있고 또 더 늘면 공중도 다닐수 있고 지금은 별에도  달에도 갈 수가 있고 이것이 다 기능인데 그 기능의 범위와 한계가 자꾸 다르다  그거요.

 이와 마찬 가지로 이 기능이 시체도 같고 또 모든 기능도 다 가지고 있고  기능도 가지고 있고 생명도 가지고 있고 또 힘도 가지고 있고 또 희로애락을  누리는 것도 있고 행복도 있고 그 모든 영광도 존귀도 있고 다 있습니다.

불택자들이 다 있는데 그것이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나가는 걸 여러분들이  살펴봐야 될 것입니다. 그것이 있던 것이 하나씩 둘씩 줄어져 간다. 그것이  있는데 그 질적으로 감퇴돼 간다, 또 그것이 능력적으로 차차 노쇠해 간다, 또  그것이 종류적으로 차차 감소돼 간다 감수돼 간다, 수가 자꾸 감해져 간다  이것을 볼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생명을 가졌으되 그 죽은 생명, 이제  생명을 가졌는데 그 생명은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서 생명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의 범죄로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어진 죽음이 완성을 하기  위해서 그 죽어진 죽음이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것이 창조 돼 나오고.

창조돼 나온 것이 그것이 하루 이틀 살아 가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예정에서  죽는 죽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났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나는  것이 그 사람은 죽기 위해서 난 사람 사망을 완성하기 위해서 저주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제 죄의 형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러니까 사망을 완성하기 위해서 난  사람이 있고 또 사망을 사망을 이것을 완전히 벗고 생명으로 완성하기 위해서  사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서 이것을 완전히 믿기위해 이 첫째  아담에게만 속한 사람이 있는데 둘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을 완전히 벗고 둘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을, 완전히 입는 이 완성을 하기 위해서 나고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다른  것입니다. 그 기능도 첫째 아담의 그 기능. 이 기능이 그것이, 이 기능이 완전히  이것이, 기능이 사망되는 그 기능 사망을 이루기 위해서 났습니다. 이러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다 그 말은 이 첫째 아담에게 속한 기능이 죽었단 말 아니요  첫째 아담에게 속한 기능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죄와 허물로 죽었다 그 말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 기능은 그것은 없어지는게 아니라 그 기능은 자꾸 그  완성하기 위해서 났는데, 죄와 허물로 죽었다 말은 범죄하기 이 전에 있던  범죄하기 이 전에 있던 그 모든 기능이 완전히 죽었다 그 말입니다. 기능이  죽었다 그라면 하나님의 속성의 기능이 죽었다, 또 모든 빛의 기능이 죽었다.

도덕의 기능이 죽었다. 영광의 기능이 죽었다, 영원성의 완전성의 모든 기능들은  다 죽어 있다. 죽었는데, 이 택자들이 나는 것은 죽은 것이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그 살아난 것이 완전히 살아나서 완성이 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은 죽기 위해서 났고 한 사람은 살기 위해서 났습니다.

한 사람은 지옥가기 위해서 났고 한 사람은 천국 가기 위해서 났습니다. 한  사람은 아담 해와로 말미암은 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완성에서 났고, 한 사람은  아담 해와로 말미암은 것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을  이제 완성하기 위해서 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됨이 무엇으로 머리 됐느냐  시체되는 이 시체적으로 머리, 시체가 되는 이 시체되는 시체란 말은 우리도  시체가 됩니다. 우리도 시체가 안 되는게 아니라 시체가 돼요. 그러면 시체가  되는데 시체되는 이거는 첫째 아담에게 속했습니까 둘째 아담에게 속했습니까?  첫째 아담에게 속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된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이것에 머리됨이 아니고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그것으로서 머리 됐다  그말입니다.

 이러니까 내가 지금 자꾸 증거하는 것은 뭘 증거하고 있느냐? 그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라 또 만물은 발둥상이라 이것을  자꾸 비유로 지금 알고 있어서- 이 실상은-이것을 비유로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은혜를 입지 못하고 지금 거기에 서 이 은해를 깨닫고 이렇게 자기가  주관적으로 느끼고 이 본능적으로 느껴가지고서 이것을 살라고 애를 쓰는, 이  실지로 누리지를 못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한데 따라서 피동적으로서만 이래  만들어지 그 만들어져 가지고 있지 이거 누리지를 못한다그말이오. 그러기  때운에 우리가누리고 누리고 하나님이 만드시는데 만드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그  능동적인 것과 또 거기에 서 이 피동적으로 되는 거와 다르다 이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식을 시켜 가지고서 인식할 때에는 인식한 그것이 뭣을  새로 만드는 그 능력이 아니라 인식 하는 그것은 누리는 것입니다. 인식하는  것은 누리는 것인데 누릴 수가 없기 때문에 좌우간 누리는 그 지혜를 주시고  마음의 눈을 열어 가지고서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됨은 어떤 것으로 머리됐느냐?  우리에게 그 세상 사람이 가지지 못한 생명, 영생하는 생명, 완전 생명,  영생하는 생명으로 머리가 됐습니다. 영생하는 생명으로 머리가 됐소. 머리가  됐고, 그러기 때문에 억만 년을 무궁세계 가서 살다가도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와  끊어지면 자기는 사망하고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생하는 이 생명으로  우리의 머리가 됐고, 또 우리에게는 기능 자체는 기능 자체는 첫째 아담에게  받았는데 그것이 죽었던 것이라 죽었던 것인데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그  기능이 산 기능이 됐습니다. 산 기능은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와 허물로 죽은 것은 기능과 도덕면으로서 도덕의 것으로서는  죽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산 기능이 됐고 또 산 도덕이 됐고 또  산 작용을 하고 또 산 존재가 됐고 산 지식 산 속성 산 속성이 됐고 또 산  영광이 됐고 존귀가 됐고 산 희로애락이 됐고 산 작용 활동을 한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생명으로 그 세상 사람이 가지지 못한 그 생명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요 또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모든 기능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요 또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기능에 이 활동하는 기능의 작용  기능의 작용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요 또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그  활 무대, 그들이 가지지 못한 알지도 못하는 활 무대란 무대로서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요 또 그들이 가지지 못한 희로애락의 이 영광 존귀 이것으로써  머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걸 좀 여러분들이 자꾸 생각을 해야 이것이 알아지지.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됨이 머리됨이 얼마나 필요하고 가치있고  이 머리 됨이 얼마나 중요하다 하는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지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반 사람들이 기독자들이 이거 전부 비유로 알고 있다 말이오. 비유,  실상인데 비유로 알고 있으니까 이 실상을 취할라고서 욕망하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구하지 안해요, 이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와서  만들어지지마는서도 본인이 모르기 때문에 누리지를 못하고 본인이 모르기  때문에 구하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구하라 주실 것이로되' 구해서 주시는 것은  못 받는다 그말이오. 구해서 얻는 것은 받지 못하지 구하지 못하니까, 알지  못하니 구하지 못하고, 구해서 받는 것을 받지 못하지. 또 구해 가지고서 받는  것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그것을 누리야 되는 건데 알아서  누리야 되는 건데 누리지 못하니까 아무 영광이나 행복이나 그 행복감이 없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우리에게 영생하는 그 생명-이 고깃덩어리의 죽는생명 이거는 가져서  이것은 확실히 알기 때문에 이 생명은 안 뺏길려고도 하고 이 생명이  귀중하지마는서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하는 진리와 영감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이 영생하는 이 생명이 생명은 알지 못하니까 살고는 있지마는서도 이  생명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하는 생명을 가지고 항상 죽을까 겁내고  죽음을 겁내고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지 못하니까 이 죽기를 두려워하므로 일생을  종 노릇하는 그 사람의 그 피해를 중생된 사람들도 입고 있다 그거요. 그거는  인식 부족에 지식의 부족이기 때문에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이 그들이 가지지 안한 생명. 그들이 가지지 안 한 기능,  그들이 가지지 안한 모든 기능의 활동과 작용, 또 그들이 취하지 못한 그 활  무대 무대, 그들이 가지지 못한 희로애락, 그들이 가진 영광 존귀 평강, 그들이  가지지 못한 나라 그 나라 이 세상에서 그들이 가지 지 못한 나라 이것은 둘째  아담에게 우리가 얻은 것인데 이런 것들은 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십니다. 우리의 머리입니다.

 자 이 조금 시간이 조금만 잠깐만. 여러분들 그 여기에 아주 젊은 사람이 있고  여기에 늙은 사람이 있습니다.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이 있으면은 이 세상에서  가치를 누구를 봐 줍니까? 누구를 가치를 높다고 봐 줍니까? 늙은 사람은 그  대답을 할 줄 아는데 젊은 사람은 그 대답을 할 줄 모르요. 그러기 때문에  나이가 벌써 열 살 먹는 그 아이는 그 아이는 두 가지를 양면을 가졌습니다. 열  살 먹는 아이는 그 세 살 두 살 먹는 그 어린 아이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린  아이가 부럽습니다. 그 벌써 어린 아이 보다는 늙어 버렸어. 또 인제 그때는  어린 아이 되고 싶은 그것도 있고 또 어서 어른되고서 그거는 어른되고 싶은  그거는 몰라서 하는 것이고 어린 아이가 점점 어린 아이가 되고 싶은 그거는  알고 하는 욕망이고 또 자꾸 어른이 되고 싶은 그거는 몰라서 그 죽는 건데 그걸  몰라서 지금어서 어른 됐으면 싶으다 그말이오. 아이들은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시기가 지나 가지고서 한 삼십이나 되면 그  사람은 대개는 삼십되는 사람이 이십 구 세되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이십 구 세  되는 사람이 이십된 사람을 부러워하고 이십된 사람이 자꾸 안으로 부러워 하고  자꾸 늙어지는 그것을 원치 안합니다. 그러나 조금은 삼십된 사람도 나도 한  사십 됐으면 뭐 좀, 그거는 세상에다가 기반 닦는 그런 소유를 인해서 그것을  원합니다. 소유를 인해서 그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또 만일 육십이나 칠십이나  되면 어쩝니까 육십이나 칠십이나 되면 그 사람은 뭘 원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아주 젊은 사람을 가치로 알고 나이 많은 사람을 가치로 여기지  않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러기 때문에 전부 부러운 것은 젊은이가 부럽고  늙은이는 부럽지 않습니다.

 이런데 그러니까, 가치가 자꾸 아주 이제 늙어서 죽을라고 콜락콜락 콜락하면서  있는 그 사람보다는 늙은 건강한 사람이 낫고 늙은 건강한 사람보다는  중칙이라면 그 사람이 낫고 가치가 낫고 그 사람보다는 이제 아주 청년들이  가치가 낫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늙어서 죽을라고 꼴막 꼴막 거리는 그사람보담  못한 가치는 뭐입니까 그사람만 못한 그 사람보다 더 가치가 없는 거는  뭐입니까? 시체입니다. 그보다 못한 거는 시체요. 이러니까 그 가치에 이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가치에 차이가 있는 것 처럼. 그런데 거기에 서 이제 죽은 자와  산 자의 가치 차이 그 차이가 있는 걸 우리가 확실히 알수 있지요. 죽은 자의  가치와 산 자의 가치가. 차이 있는 걸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차이가 있는 것을 확실히 우리가 해석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느낄수 있지요.

느낄수 있는데.

 그러면, 죽은 자와 불택자의 산 자와 그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와, 그러면 불택자로서의 산 자의 가치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자의 가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 구속함을 받아서 살아난, 새것이 있는 자의 가치.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 받은 중생된 자 새로 지음 받은  자 이것이 된 자와의 그,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하는데 이 ○집사님이 있습니다. 하는데 알고  있습니다.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말하는 대개는  좀 알고 있기는 있는데 나이가 많으연 좀 알겠지요.

 그런데 어데서 사람들이 끊어져 가지고서 고통을 당하느냐 이 산 자와 죽은  자의 가치 차이 산 자와 죽은 자의 가치 차이를 이것을 어린 사람들이 많이  차이를 봅니까 중칙이에 봅니까 나이 많은 사람들이 봅니까? 거기에 대한 지식을  누가 더 풍부하게 가졌습니까? 아이들이 많이 가졌습니까 늙은 사람이 많이  가졌습니까? 늙은 사람이 많이 가졌습니다. 늙은 사람이 많이 가졌소.

 이와 마찬가지로 이 그만 자연인이라 합시다. 자연인, 안 믿는 사람들은 그거는  자연인입니다. 자연인과 특수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이 특수인,  자연인과 특수인의 이 차이점을 이 차이점은 사람들이 모릅니다. 이 차이점을  말하는 것이 성경이 이 차이점에 가치성을 자꾸 말하고 있지마는서도 이  차이점에 가치성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어도 세상에  지식을 가지고서 자기 지위나 권세나 영광을 이것을 위할라고서 이렇게 이  무대도 좀 명예로 나서 가지고 뭐 책을 써서 막 뒤에 심판 받을 것도 생각도  안하고 책을 써서 많이 낼라고 애를 쓰고 또 이 무대에 나서 가지고서 자기  영광과 존귀와 명예가 커질라그만 애를 쓰는 이것이 다 무식한 연고라 그말이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새것이 되어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진  이것과 예수 그리스도 없이 되어 있는 이것의 가치 차이를 모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가치 차이, 그 가치 차이보다도 이 가치 차이는 이거는 참 완전 가치  차이기 때문에 암만 그거는 산자와 죽은자를 말해도 조금 덜죽었고 많이 죽었고  이제 좀 덜 죽었고 다 죽었고 덜 죽었고 다 죽은 것의 차이요, 그 불택자들의  젊음과 늙음의 차이라 하는 것은 좀 덜 아주 망할 것이 남아 있고 덜 망한 것,  아주 망한 것, 이 망함에 그 덜 망하고 더 망하는 그 차이요, 덜 죽고 다 죽은  그 차이오. 그러나 이거는 영원히 살고 죽은 거와 차이이기 때문에 이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보다도 더 크고 높지마는 이것을 사람들이 느끼지를 못한다  말이요 알지를 못해. 요걸 자꾸 비유로 지금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여기에서 마귀는 작용을 하고서 수입을 봅니다.

 이러니까, 이 세상 그 첫째 아담에 속한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생명으로서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십니다. 또 모든 속성으로서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십니다.

또 기능으로서 머리십니다. 기능의 활동 그 기능 작용으로서 머리십니다. 또 이  활무대 활무대적으로 머리십니다. 또 이 나라로서 머리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이렇게 머리됐기 때문에, 마치 하나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이시요 교회는 그의 몸이신 이 비밀에 이 신비한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가지고서 하나님이 이 자연 계시인 보통계시 하나님의 창조하신 만물  창조하신 만물로 가지고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고서 우리가 교회가 몸이 된  이 비밀을 알기 위해서 이 자연 계시로 가르쳐 놓은 것이 뭐입니까 그 뭡니까?  뭘로 가르쳐 놨습니까? ○○목사님이 생물 들로 가르쳐 놨습니다. 이 알기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알려고 나가는 데는 얼마나 아직까지 도인이 뭐  도가 얼마나 먼지 모릅니다. 얼마나 이 생명도에 와 가지고서 도인이 될는지  지금 도인이 되지도 못하고 도를 팔아 먹고 도를 가지고 벌써 세상 영광을  위해서 날뛰기 때문에 이 도인이 되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땅에 있는 소망을  가지고는 하늘에 소망은 이루지 못합니다. 이 가지고 있으면 가지고 있는 입장  때문에 하늘에 소망을 이룬것 같지마는서도 다 비뚤어져서 안 됐다 그 말이오.

죄라 말은 죄와 그죄로서 가리워져 있는데 생명과 이 사망이 그 사이 경계돼  가지고 죄로 되어 있는데 죄로 됐다 알은 삐뚤어졌다 그 말이오.

 어제 아침에는 그 작용을 가르쳐서 말했는데 아무리 수도 시설을 아무리 잘  해놔도 그 저수지에 연결되지 안하고 그 선이 삐뚤어져 버렸으면 여기 물 하나도  안 나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인간이 아무리 구비하다고  할지라도 그 저수지인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 연결성이 뭘로 연결됐나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 됐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은 그 연결이  삐뚤어졌기에 아무리 선천 후천 잘 나 봤자. 거기 물 한 방울도 안 난다 말이오.

무한하신 분에 그 무한하신 분, 완전하신 분, 완전성이 여기 나오지 못하고  무한성이 나오지 못하고 불변성이 나오지 못하고 영생성이 여기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 연결은 뭘로 됐느냐 지난 밤에도 말했지마는서도 예수 그리스도 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연결이 됐는데 머리와 몸뚱이가 그&어지면은 그 몸 둥이는  몸뚱이는 그 아주 장사의 몸둥인데 그 몸뚱이가 뭘 볼 줄 압니까? ○○○씨 볼  줄 아요? 아 몸뚱이 장사의 몸뚱이라도 모가지 끊어지면 못 봐요 모가지  끊어지면 못 봐요? 머리가 끊어지면 못 봅니다. 못 봐요.-이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연결돼 있으면-아무 것도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시각이라  하는게 전척 없어요 모든 존재에 시각이 없어 요 또 이재 들을 수도 없어 들을  수도 없어 아무 것도 신령한 무한의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어요. 또 말할 수도  없어 말할 수도 없어. 또 먹을 수도 없어. 이 생명 산 존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일이요 우리의 귀요 눈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 되지 안하면 우리는  듣지도 보지도 먹지도 아무 작용도 못하는 것이라. 이거는 시체와 같이돼 가지고  있는 거와 한가지입니다.

 아무리 선천 후천의 그것이 잘 됐다 할지라도 수도 시설을 수도 시설을 뭐  굉장히 이십 세기 문화로 최고로 잘 해 놨다 할지라도 그 물 있는 원저수와 그  연결이 끊어졌으면 그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안하고 그거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말이요.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는 이렇다 하는 것을  어제 아침에 그것을 들어서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면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시요 우리는 그의 몸이십니다. 요 자꾸 좀 자, 여러분들  왜 가치를 말합니까? 송장과 산 사람과 가치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른 요것을  거머지고 놓지 말고 요것을 가지고, 요거 전부 자연 계시입니다. 요것을 가지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택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와 끊어진 그것이 송장과  산 사람과 그 차이 있고 가치 다른 거와 그거와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차이점이  있다 그거요. 자기가 다 같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중생도 됐고 모든 속성도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인 그 속성도 얻어 가지고 있지마는 가지고 있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끊어지면 안 믿는 사람으로 말하면 산 사람과 죽은  송장이 차이 있다 하는 그것은 알면서 우리에게 있는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끊어지면은 송장됐고, 산것은 요 차이 있는 요것을 느끼지를 못하고  깨닫지를 못한다 그거요. 그러기에 우리에게 아무리 사랑을 말하지마는서도 그  사랑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끊어지면은 내나 송장이요 하나는 산 것입니다.

 그러면, 연결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뭘로 연결됐습니까 연결된 그 연결이  무슨 줄로 가지고 연결이 됐지요, 연결된 줄이 무슨 줄로 연결이 됐소? 저뒤에,  ○○○목사님? 진리와 영감으로 연결이 된게 아니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연결됐소, 사죄와 칭의와 이 화친의 대속으로 연결 됐는데 늘 그래 말합니다.

말하기를, 하나님의 무한한 지극히 크고 무한하신 예수님의 대속의 지극히 크고  무한하신, 무한하심을 붙혀서 말하는 것이 그 속에 뜻을 두셨는데 그 말을  들어도 못 알아 듣는다 그말이오.

 예수님의 대속을 그 대속이 얼마나 넓어지느냐? 그걸 제가 종종 말할 때에  자기가 억만 년을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서 억만 년을 살고 나서 억만 년을 살고  나서 그 가보지 못한 데가 있었는데 억만 년을 살고 나서 한 군데 새로 가보니까  억만 년 후에 처음으로 만나는 그 존재들에게 가서 대면을 하니까 대하니까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 날 대하고 있다. '날 언제봤기 때문에 네가 여기까지 와  가지고 날 알고 있느냐, 언제 왔느냐, 날 환영을 하니까 어떻게 날 알며 어떻게  나와 화목을 가져서 이렇게 친밀히 됐느냐?' 이라니까 말하기를 '세상에 있는  골고다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서 대속의 화친을 할 때에 하나님과 화친,  만물과 화친 그것이 예수님의 대속인데 그 때에 우리가 화친되지 안했습니까  그때 화친이 되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가보니까, 억억만 년 후에 예수님의 대속의 화친이 그 때에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 그 말이오 그억억 만 년 후에도. 하나의 알려 주기 위해서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우리에게 얼마나 범위 넓게 얼마나 깊게, 이런데 이런 무한의  도를 가지고 이 세상에 불교니 뭐니 조부라운 그런 걸 가지고서 지금 말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창조의 주먹 안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연결은 됐다. 연결이  됐는데, 연결된 그 모가지와 머리와 몸이 연결돼 가지고 있으니까 연 갈된 그  연결이 위에 머리에 있는 그 모든 작용이 모가지를 통해서 나오는데 모가지에  통하는 여기는 피도 연결돼 있고 신경도 연결돼 있고 뭐 많은 것이 연결 돼 있을  것입니다. 그 연결된 것을 통해서 여기에 서 이 중앙청에서 본부에서 작용하는  것이 전부 여기에 서 통치를 하고 지배해 가지고서 온 전신 전체에 이 전체를  통치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보급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이렇게 하고 있다  그거요. 그런데 그와 같이 통치와 같이 우리에게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에게 지금 모든 은혜로 통치로 또 보호로 그것이 전부 머리에서와, 머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거기서 보호도 거기에 서 나오고, 우리를 뭐 이리 저리 다  조종해 가지고서 바로 잘 간추려서 이거 틀리지 안하도록 삐뚤어지지 안하도록  우리를 다스리는 것도 모든 은혜도 생명도 능력도 지혜도 전부 거기에 서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오는데,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그말이오. 우리의 지혜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거기에 서 나오는데  나오는 그 나오는 줄을 가리켜서 우리가 뭐라고 말합니까? 나오는 줄, 그 줄을  가리켜서 뭐라고 말합니까 ○○○목사? 봐, 저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말하기 때문에, 이제 아까 말한 것 줄은 뭐이냐 그것이 뭐이냐면 진리와  영감이라 그 말이오. 나오는 줄 나오는 그것이 영감과 진리라.

 그러기 때문에, '어린 양의 그 보좌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더라 그 생수가  흘러나와 가지고서 그렇게 모든 생명 강수를 이루더라 성전 빗장 밑에서 거기에  서 생수가 새어 나와 가지고서 천 척을 흐르니 또 이천 척을 흐르니 삼천 척을  흐르니 그거 자꾸 흐르니까 이렇게 넓어지더라' 하는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은 우리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오는 그 모든  영감과 진리의 이 역사. 머리에서 몸으로 통치가 나오고 지혜가 나오고 힘이  나오고 보호가 나오고 모든 피가 나오고 모든 신경이 나오고 이 모든 심지어 손  가락 끄트머리 하나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세포는 한 없는 세포 가졌는데 그  세포 하나 하나를 관리 해 가지고 그것이 마찰돼 나가지 안하고 잘 작용돼  가지고서 건강을 이루어 가도록 하는 그것이 여기에 있는게 아니라 이 머리  하나에서 다 조절한 것이 여기까지 다 끝까지 가는 것. 이것이 뭐이냐 이것이  하나 비유물로 묘사물로 우리를 알아 주기 위해서 한 형식물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 말이오.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시요 우리는 몸인데 이 실상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생물들의 모든 그 생명체를 만들어 나서 이게 하나의 형식 계시라  그말이요. 계시용으로 쓰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을 본체로 삼고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는 밀접하다 이라니까 그 관계는 이 육체의  생물들의 머리와 몸과의 이 밀접함과 같은 그런 밀접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는  그것이 마귀라는 유혹에 어두워져 가지고 이래 된다 그거요 알아 듣겠습니까?  이것을 자기가 실상으로 아무리 논리로 들어도 제가 논리로 들어 가지고  모릅니다. 실지로 자기가 실행하는 가운데서 알아진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예수 믿는 도는 실상의 도입니다. 실상이 없는 그 자는 암만해 봤자  청산유수로-엊 저녁에도 말했지요. '주의 이름으로 나는 선지자 노릇도 했고 또  능한 일도 많이 했습니다. 귀신들도 쫓아 냈습니다. 주여 날 열어 주소서.'  하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악한 자야 나를 물러가라 내게서 물러가라' 그게 뭐입니까 그것이  머리와 몸이 안 되고 도구 노릇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자기가 실지로 행하지  안하면 부흥사가 제일 불쌍합니다. 부흥사가 제일 불쌍해, 그 부흥사가 대개는  보면 그게 어리석게 지금 이 머리와 몸에 이 관계 이것을 이루는 부흥회 인도가  되어야 되지 그 지식만 전해 가지고서 이라게 되면 자기 망합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뭐 이것을 지금 암만 말해도 속에 있는 그 실상을 인간의  방언으로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를 못 한다 이라면 거기서 자기가 지금 영감  받아가지고서 영감 받아 자기가 실지로 체험을 하면 알아요, 실지로 행하는  가운데서 알지 그 전에는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는 전부 교만해  '하나님께서 뭐 해' 교만한 자는 전부이 멸망 받아, 이 교만 하나 가지고 다  멸망하도록, 외식하는 자는 외식 하나 가지고 멸망하도록, 거짓된 자는 거짓  하나로 멸망하도록 요렇게 하나님이 딱 만들어 놨기 때문에 이 선은 누가 뚫고  가지 못해요 요거, 진실 안에 뚫고 들어 가지를 못해요.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는  기독교는 실상의 도라, 또 실방에서만 되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미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말에 거하면' 이미 믿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람 아닙니까 '네가 내 말에 거하면' 또 한 꺼풀 더  들어갔다 '내 말에 거하면' 또 진리대로 살면 그 말이요 살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또 자체가 변화가 되고 그라고 나면은 또 진리를 알지, 그라고 나면 또  새로 알아 자꾸 껍데기 이러기 때문에 '문들을 열고 들어가라' 문 또 하나 문  열고 들어가니까 또 문 있고 또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자꾸  들어가서 '내가 열린 문을 둔다' 그말은 문 한 개라 말이 아니고 문을 열 주님이  열어 주시니까 또 들어 갔다 들어 갔다. 문지기가 문을 열어 준다 문지기가 문을  열어 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가 깊이 체험하고  체휼하고 자기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 것을 그의 피로 그의 살로 양식  삼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어떤 것이며, 거기로 무슨 효력이 나오는  것이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자기의 생명 삼고 자기의 그 양식 삼는다 말은  자기가 기계 동작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을  가르쳐서 양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문으로 들어오는 자마다 들어갈려 하면 문으로  들어갈려고 문으로 들어갈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자기가 입을려고 대속의 은혜를 참 입을려고 사죄를  입을려고 칭의를 입을려고 자꾸 이렇게 할 때에는 문지기가 문을 열어 준다. 그  문지기가 뭘 말합니까? 문지기가 뭐입니까? 문지기가 성령의 감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 가지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입게한다 말이요, 거기에 서 자기  구원도 이루어지고 거기에 서 양식도 나옵니다. 꼴과 물이 거기에 서 나오요.

 이러니까, 외식은 헛일입니다. 자기가 연구를 해서 명철한 머리를, 가지고서  이런 세상에 과학이라 하는 것도 문서적으로 앉아서 연구합니다. 문서적으로  앉아서 연구하는 사람은 또 사람은 그것만 가지면 속에 있는 지식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만일 문서적으로만 의학을 연구했다고 하면은 그 사람은 많은  사람을 죽일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을 죽일 의사입니다. 문서적으로 연구하는 그  문서들이 발표하지 못하는 문서들이 발표하지 못하는 자기가 아무리 알고 그걸  글로 써서 뒤에 후배들에게 알려 줄라고 문서로 암만 기록해서 뭐 의서를 여러  수 천권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자기가 발표 못하는게 그 속에 있다 말이오. 발표  못하는게 그 속에 있어 발표 하지 못하는 그것이 있어, 자기도 발표하지 안한 그  무엇인가 발표하지 못하는. 그 기능이 그 속에 있고 느낌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하나 하나 실험하는 데에서 알게 된다 말이오. 문서적으로 연구하지  안하고 자기가 하나를 수술해 보고 하나 알아보고 이렇게 실험하는 데서 알고  있는데 실험하는 데서 알게 되는데 실험해서 알게 될 때에 이 모든 물질과학과  마찬가지로 실험해서 알게 되는데 자기가 그것을 돈이나 명예나 그런 것을  목적하고서 이 실험하는 데에는 수술해서 실험하는 데는 모른다 그말이오 자기가  이웃을 제 몸같이 하는 그 사랑을 가지고서 자기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 수술하고 시험할 때에 시험 할 때에 거기에  서 이제 참다운게 나온다 그 말이오. 그 실험에서 참된 지식이 나와요.

 이러기 때문에 명의가 뭐이냐, 훌륭한 명의가 어떤 사람 명의냐? 명의라는  사람은 자기가 문서 논리적인 문서로 연구를 하고 실험적으로 연구를 하는데  실험적으로 연구를 해도 자기가 돈벌이 위해서 하는 사람은 하나의 기계를  만드는 거와 기계를 만지는 거와 같이 물질을 만지는 거와 같이 그렇게만  만들어지지 물질로 비교할 수 없는 신비한 물질이기 때문에 신비한 그 신비성을  알지 못합니다. 신비성을 아는 데에는 자기가 참 사랑을 가지고서 할 때 알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어떤 의사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배는 쭉 갈라  가지고서 맹장염 수술을 썩 하지마는서도 자기가 정말로 사랑하는 자녀에 그거는  쨀 수가 없다, 째지는 째기가 도무지 째지를 못하고 겁이 나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된다. 그것이 뭐이냐? 사랑이라는 것이 그 사랑을 가지고서 자기가  해부를 하고 그 수술을 하고 하는 거기에 서만 나오는 그 신비한 지식이기  때문에 그 지식은 자기가 진실하고 사랑이 없으만 가지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늘 말하기를 그런 말 하는데 다른 사람 알아 듣는지 못  듣는지 몰라도 그 의사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박사에 대해서 말할 때에 그래  말해 ○박사가 요새는 이 부근에 있는 의사보다는 능력이 제일 많다. 그 사람이  실력이 있다. 실력 있는 그거는 뭐이냐? 그 실력이 어데 써 나왔느냐? 의서를  문서적으로 공부하는 데서 나온 것 아니다.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무슨  자기가 뭐 논리에서 나온게 아니고 자기가 지금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서 돈벌이  위해서 할게 아니라 사람을 구원해 보자, 사람을 구출해 보자하는 그 마음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서 나온 고거 가지고서 쏙쏙 써 버리니까 딱딱 들어 맞는데  그것이 변해지기 쉽다. 변해지기 쉬워서 내가 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는-돈벌이  위해서 명예 위해서 하는게 아니라-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다는 중심에 그  인간을 사랑하는 참 의사의 본정신, 그 정신이 늙어지지 안하면은 그 지혜가  점점 발달될 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의사로 유명한 의사는 어떤 의사냐? 돈보고  하는 그 의사는 이거는 사람 죽이는 거짓부리 의사가 되고, 돈이야 그 내비두지,  어쨌든 사람을 구원하는 참 자기의 친 사랑하는 자를 이렇게 수술해 고칠라 하는  거와 같은 요런 것을 가지고서 거기에 는 손을 대지 못하고 치료하지 못하는  요런 그 사랑을 가지고 치료하지 안할 수 없어 치료하는 거기에 서만 나오는 그  신비한 지혜와 지식이다. 그것을 내가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 가서 봅니다. 저는 어데 갔다가 이래 의사에 갈 때에 내가  그때 코가 아파서 지금도 좀 다 못 낫고 있는데 의사에 가니까 딱 이래 보니까  수월한데 그 사람이 그저 병낫아주고 돈 받고 그러니까 돈 받는 것이 돈 버는  것이 목적이고 병 낫는 그게 목적이 아니고 그 병 낫는 거 돈 받는 거 속에  알맹이에 병 낫우는 그게 있어야 되고 병 낫우는 알맹이 속에 진정 인간을  사랑하는 그 인체를 사랑하는 그것이 그 속에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어서 한 번  거석하고 그 한 달 치료 해야 된다 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한번 가고는 안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안 가고 말았어 아 가고 말았는데 그 뭐 집에서 치료해도 한  사흘만 치료, 하면 그만 좀 낫는데 그게 계속이 못 돼요. 이 계속할라하면  그것도 지장이 많애, 뭣이 오고 뭣이 오고 자꾸 이래 가지고서 그만 지속히  계속을 못한다 이거요.

 이게 여러분들 사람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껍데기 속에 자기의 정신으로  정신으로 느낄 수 있는 그 알맹이가 있고 정신으로 느낄수 있는 그 속에 참  자기가 영감을 받아서만 느낄수 있는 그 속에 있고 그 속에 신비하게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연결이 되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 양심 쓰지 안하면 천 리 만 리  거리가 멀어서 근방에 오지도 못하고 자기가 진실을 가지지 못하면 신앙  걸음이라 하는 것은 일보도 움직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녜, 그저 그래 가 가지고 연구하도록 하십시오.

 내가 또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의 실상이요 우리는 그  몸입니다. 이것을 알리기 위해서 모든 이 생물들의 머리와 몸뚱이에 이것들을  만들어 가지고서 머리와 몸은 이런 연관성을 가졌다 이런 작용성을 가졌다  이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만든 그것을, 이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택자들의  머리와 몸에 이 관계인 이것을 알려 주기 위한 계시물로 형식계시물로 그것을  만든 것이지, 그것이 실상이고 우리는 그 실상인 그것을 들어가지고서 그와  비슷한 머리와 몸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관계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아무리 자기에게 있는  지식이 얼마나 많고 크다 할지라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안 되었으면  그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녜, 그러면 연결이 어찌 되느냐? 사죄와 칭의  화친의 이 세 가지 줄로만 연결이 됩니다.

 그러면 연결이 되면 그 뭐 나오요? 연결이 되면. 그때 그때 영감이  나오고-진리는 영감이 나오면 진리라 합니다. 영감은 처음에 대목이요 그것이  우리에게 나와서 우리를 통과하면 인간을 통과하면 진리입니다. 성경 말씀은  영감이 인간을 통해서 나온 그것이 진리요 진리를 파고 들어가면 영감이오.

하나님께 직접 받는 것은 문서 계시가 아니고 영감입니다. 이렇게 그 영감이  나와서 그 사람의 지식이 하나님의 영감에 연결이 되어서 그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작용이 그 영감을 통해서 작용하는 그 모든 작용의 능력과 그것이  나와 가지고서 그 지식을 통해서 지식을 움직이고 그 지식을 통해서 나타나고 그  지식을 움직여야 그 지식이 살았지 산 일하지 그렇지 않으면 산 일은 못합니다.

 그러기에, 이번에 공과를 기록했는데 그 공과 그것을 가서 보고 그냥 언뜻 읽어  가지고서 문서 쓰고 문자 가지고 외우는 거 아니고 깊이 느껴야 됩니다. 그 한  공과를 느끼면 모든 공과를 다 알 수 있고, 그 한 공과만 깊이 느껴도 그 깊숙이  파고 늘어가게 되면 성경을 헤치고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새는 어떤 사람이 필요하나? 이 세계에 돌아 다니는 이  신학을 배워 가지고 신학자가 필요가 없어. 그거는 줄기요 우리가 알 필요가  없어. 필요가 없어. 뭐이냐? 신구약 성경을 자기가 보고 성경 말씀대로 행함으로  하나 체험하고 또 행함으로 둘 체험하고 체험하고 경험해 가지고서 성경과  자기와 대속하신 공로로 말미암은 영감과 이래 가지고서 거기에 서 나온 사람,  그 실험에서 배운 사람, 체험에서 배운 사람, 또 영감에서 배운 사람-모든  사람이 알고 난 다음에 영감과 진리는 빼내 버리고 영감과 진리는 문서에 기록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요거 알아야 됩니다. 영감이 문서 속에 들어 있는  문서가 있는데 그문서는 뭐입니까? 그 문서는 뭐이요? 그 문서는 신구약 성졍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 외에는 성경 말씀 외에는 그 영감이 그 말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만 갈 수도 있고 말 속에 영감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전하는 것이 말에 있지 안하고 지식에 있지  안하고 성신의 감동에 있기를 원한다 권능에 있기를 원한다' 하는 것은 권능이  같이 가기를 원한다 그거요. 이러니까 이제 하나라도 자기가 똑똑히 알면 그런  외식하는 행위가 없습니다. 외식하는 행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요것을 깊이 깨달아 자꾸 그래 기독자들은 명상이 많아야  돼요. 생각이 많아야 되고 깊이 깊이 생각하고 처음에 생각할 때에 이 현상  세계란 이 세계를 벗어 버리고 현상 세계를 벗어 버리고 현상 세계가 없는 세계  속에 들어가면 나중에 들어가 가지고는 자기를 잊어 버리요. 무아가 아니라  자기는 잊어버리오. 자기는 잊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될 그때가 자기가 바로  되어 있는 거라. 자기는 잊어버리고 하나님만 생각할 그때가 에덴동산 타락한  이전의 것들 이전의 사람과 비슷한 것인데 그 보다도 더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데 자기를 잊어버리고 하나님만 향해서 이렇게 전부를 다해서 나가야 되는  것인데 자기가 자기, 뿐만 아니고 자기 밖에 있는 자기에게 소지품 지위, 명예,  권세, 뭐 돈, 이런 것 막 꽉 쌓여 이게 주님과 사이를 꽉 막아 가지고 있는데  언제 그거 뚫고 들어갑니까 현상세계 이것을 부인해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버려  버리고, 이제 또 자기까지도 잊어버리고 자기가 없는게 아니라 무아지경이  아니고 자기가 없는게 하니고 자기를 잊어버리요 자기는 잊어버리고 전부는 다  주님 한 분만 바라보는 요것이 되어질 바에 비로소 그것이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이를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거짓  부리는 안 돼, 그러니까 명상이 많아야 돼요.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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