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적 조직신학' 그 명칭의 의미
선지자선교회
현재까지 교회사에서 내려오는 조직신학은 원어 해석적으로 정리한 조직신학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런 조직신학은 원어적 조직신학이며 그래서 또한 신학적 조직신학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을 근거하지 않고 원어를 근거해서 해석하는, 그 해석으로 먼저 주경신학이 있었고, 그 주경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그 교리를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원어적 신학적 조직신학입니다.
김반석이 정리한 조직신학은 지금까지 내려온 조직신학과는 그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그 순서는 같고, 다만 원어적 신학적 조직신학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그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성경해석에 있어서나 또 교리에 있어서 원어나 신학을 근거하지 않고, 그런 것은 다만 참고로만 하고, 오직 성경을 근거해서, 성경을 성경사전으로 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또 교리를 정리하며 또 교리를 정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래서 성경적 조직신학 앞에 ‘성경적’이라고 그 이름을 붙인 것은, 원어적 신학적 조직신학이 아니라는 그 구별을 지우기 위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조직신학이라 해서 성경 같은 조직신학이라는 말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하고 또 성경을 성경사전으로 하는 그 중심으로 조직신학을 정리한 조직신학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적 조직신학 서문 등에 성경을 근거해서 정리하는 그 성격의 조직신학이라는 것을 밝혔고, 또한 덧붙여서 성경 어휘 단어는 그 단어가 처음에 기록된 그 성경구절에 그 단어에 대한 성경의 해석이 들어 있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단어를 성경으로 해석하는 그 진리적 그 원리입니다. 타 진영 목사님들을 만나서 간단하게 이 원리적 이치를 말했더니 아! 그러느냐고 깜짝 놀랍디다. 또 중국 목회자 분께도 이렇게 말했더니 그 분도 "그렇습니까?" 하고 깜짝 놀랍디다.
김반석도 이것을 깨달게 해주셔서 처음에 이 원리를 적용시켜보고 참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들도 적용시켜보면 이 원리적 이치대로 될 것은 그 이치는 진리적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리적 이치의 깨달음을 만일 김반석 제 단독의 지혜와 명철로 깨달았다고 하였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 것이고 또 그러면 그런 말 한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셨다고 하면 또 거기에 부정적 이의를 답니다. 이러면 이런다고 티를 잡고 저러면 저런다고 티를 잡습니다.
돌 같은 김반석이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이 원리적 이치를 발표하는데 김반석이 이 깊은 원리적 이치를 스스로 깨달았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깨닫게 해주셨겠습니까?
하여튼 혹 잘못하면 이 원리적 이치를 훼방하거나 그 이치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리라는 것은 뭐 신앙 양심적으로 슬슬 감지가 될 수도 있을 터입니다.
영감을 배척하면, 나에게 역사 하시는 그 영감도 배척하는 그 원리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적 조직신학이라고 그 이름을 붙여놓고, 그 잘못된 실수를 정정하였다면 어떻게 성경적 조직신학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겠습니다. 그 말도 아주 틀린말은 아니고 맞습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변명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앞에 언급한 것같이 이 성경적 조직신학은 원어적도 아니고, 또 신학적도 아니고, 성경을 근거한 성경적 조직신학이라 하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성경을 근거해서 조직신학을 정리하는 가운데서, 이렇게 성경을 근거해서 성경적 조직신학을 정리하는 가운데서, 그 근거를 가지는 성경 단어를 바로 해석하지 못하므로 오는 실수적 오류였습니다.
만약 '성경적 성경사전'이라는 그 이름을 들고 문제를 삼으려 한다면 이럴 경우에는 해당이 되며 또 맞겠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근거해서 조직신학을 정리한다 해놓고 원어적이거나 또 신학적으로 그 방향을 바꾸어서 조직신학을 정리했다면 어째서 성경적 조직신학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고 지탄의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재 뭐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적으로 조직신학을 정리하는 그 가운데서 그 해석이나 그 정리의 실수적 오류입니다. 물론 그런 사항도 발생하면 안될 것이나 본디 부족하고 미약한 종인지라 그 실수적 부족적 미약적 오류는 부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서 김반석이 수차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기를 이 성경적 조직신학을 정리하는 그 원리를 적용하여 이 김반석 보다 더 바르게 더 깊이 성경적으로 조직신학을 정리하여 주시기를 말씀드렸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말 속에는 오류가 있는 부분은 잡아 주시고, 부족한 부분도 채워주시고, 더 나아가 영감 충만한 여러 분들이 더 좋은 조직신학을 정리해 주실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얼마 전에 성경 계시록 20장에 기록된 ‘바다’에 대하여 그 성경적 해석에 실수적 오류가 있었는바 김반석이 그 오류를 찾아내어 정정을 하고, 또 그 정정한 내용을 게시판에 공고를 하였습니다. 처음에 정리할 때는 오히려 정정한 그 해석으로 바로 정리를 하였는데 그 뒤에 오히려을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이러한 오류는 실수적 오류이지 근본 조직신학을 정리하는 그 방향이 구부러진 오류는 아닙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방향을 잘 잡아가던 중에 타이어가 펑크가 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던 중에 펑크 난 것을 이제 고쳐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 가는 방향을 바로 잡고 그 가는 도중에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고 하여 그 차나 또 그 달리는 목적을 왜곡시킨다면 이는 좋지 못합니다.
차가 장거리를 몇년씩 달리다 보면 한번씩 타이어에 펑크는 나게 되어있고 또 누구든지 나게 되어 있고, 또 났었습니다.
이래서 펑크 난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게 여긴다면, 펑크 난 그 본인에게는 그것조차도 좋은 약으로 받으면 문제 없겠습니다.
또 한 눈으로 보고 한 눈으로 지우거나, 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내부 공회인이라면 이런 면을 다 주지하거나 또 아쉬워하거나 또 안타깝게 여기거나 하지만 말입니다.
하기야 그 단점들이 우리 자신들에게 하나씩 둘씩 없다면 하늘에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는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진정으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준다면 성경말씀대로 우리는 한 몸의 한 지체이겠습니다. 그런데 이 팔이 저 팔을 뜯고 있고, 또 주먹으로 눈을 콩콩 두들기고 있으니, 제 몸을 제가 두들기는 것이이 될뿐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성경적 조직신학, 그런 이름을 가진 조직신학이라고 해서, 오류가 없거나 부족이 없거나 미달이 없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을 성경사전으로 삼아서, 그 삼은 것에 근거해서 조직신학을 정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성경적’이라는 그 조직신학에 대하여 그럴 것이다 라고 여기는 그 오해나 그 곡해나 그런 치우침은 가지지 마셨으면 합니다.
성경적 조직신학은 원어적이거나 신학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시킨 그 성경적 조직신학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같은 조직신학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성경 같은 조직신학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대한 성경을 근거해서 그 중심으로 정리한 조직신학이라는 것을 표하기 위해서 ‘성경적’이라 했고, 그리하여 그 조직신학의 이름을 '성경적 조직신학'이라고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