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 잘 알면서도 또 잘 모르는 것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참으로 잘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 '하나님과 동행'이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인데" 하고 단박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잘 알면서도 또 참으로 잘 모르는 것이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 예정, 창조, 섭리의 그 근본과 그로 말미암은 모든 조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과 동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동행을 하다가 선악과로 하나님과 동행이 떠나므로 사망이 왔고, 그 사망의 원죄와 본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신구약 성경 진리를 주신 것도 구속받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그 뿐만 아니라 성령을 보내신 것도 구속받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데 우리들이 간과하는 것은 이 중요한 하나님과 동행은 뒷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기도해라, 연보해라, 새벽기도 나오라, 맡은 직분 잘 감당해라, 성경을 읽어라, 하나님 말씀대로 신앙생활 잘해라, 등등 이렇게 교훈하고 권면하고 경성 시키나 그렇게 하라고 하는 그 근원이 되는 '하나님과 동행해라'는 말은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바로 한다는 교회와 교인들도 자칫 그만 하나님과 동행은 없고 그 외의 것 즉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조성한 것만 상대합니다. 이래서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을 위해서 주신 법칙인데 하나님과 동행은 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법칙만 상대합니다. 이것을 외식이라 율법주의라 합니다.
말세지 말 오늘 교회는 너무나 어두워져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칙만 상대하는 이것은 두고서라도 타락에 타락이 쌓여서 사람만 상대하고 더 타락해서 이제는 불신자처럼 물질만 상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것은 거의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도 강단에서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말씀은 거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잘 믿는다는 교회도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하지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의 그 중심이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측면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거의 외식이며 거의 불신 수준입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을 말하고 동행을 한다고 하지만 지극히 미약합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겉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한 것 같아도 그 속에 하나님과 동행한 분량이 얼마나 되나 하는 이 각도로 지금껏 한 신앙생활을 계산해 본다면 참으로 너무 허무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과 동행을 말씀하셨고
구약시대에서도 하나님과 동행을 말씀하셨고
신약시대에서도 하나님과 동행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구속받은 우리들은 늘 하나님과 동행을 위한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주시는 현실에서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은 하나님과 인격교제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은 하나님과 가까이 사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은 하나님과 한 덩어리 되는 것입니다.
피와 성령과 진리도 하나님과 동행을 위해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 이것만이 우리의 성화구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 이것만이 우리의 영생구원입니다.
이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이 힘들어도 또 하나님과 동행을 외칠 자격이 없더라도 또 그렇기에 심정이 부담스럽더라도 하나님과 동행을 말하렵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