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7 16:22
■ 루터의 ‘이신칭의’는 ‘이신득의’에 대한 교계의 왜곡
(서론)
루터는 개혁주의를 개척한 선두주자(先頭走者)이다.
우리가 루터에 대하여 ‘이신칭의’를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신칭의’가 아니고 ‘이신득의’가 맞다.
부족한 종이 추측하기는 루터는 당시에 갈2:16을 대표적 성구로 근거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다’ 곧 ‘이신득의’로 말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 교계가 루터에 대하여 ‘이신칭의’로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 곧 칭의의 구속에 대해서는 인식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령(보혜사 성령과 주의 성령)이 임하시는 의롭다 함을 얻는 득의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는 당시에 ‘이신득의’를 말했지만, 지금 교계가 ‘이신칭의’로 왜곡했다고 보는 것이다.
(본론)
1장 이신칭의에 대하여
한자로 ‘이신칭의(以信稱義)’는 한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다’이다.
그런데 ‘의롭다 칭함을 받다’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 곧 보혈속죄를 받은 것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칭의의 구속을 받은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칭의(稱義)’ 곧 ‘의롭다 칭함을 받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보혈칭의’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 그보다는 ‘보혈속죄’가 맞다.
그리하여 ‘보혈칭의(寶血稱義)’는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다’이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칭의의 구속을 받은 것을 말한다.
‘보혈칭의’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다’를 근거하는 대표적 성구는 다음의 롬5:19 말씀이다.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장 이신득의에 대하여
한자로 ‘이신득의(以信得義)’는 한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다’이다.
‘이신(以信)’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기에 ‘득의(得義)’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 즉 ‘이신득의’이다.
그렇기에 ‘이신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신득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다’이다.
‘이신득의’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다’를 근거하는 대표적 성구는 다음의 갈2:16 말씀이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결론)
1. 이신과 칭의
‘이신(以信)’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이다.
‘칭의(稱義)’는 ‘의롭다 칭함을 받다’이다.
그리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 곧 칭의의 구속을 받은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칭의’ 곧 ‘의롭다 칭함을 받다’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보혈칭의’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보혈속죄’이다. 그렇기에 ‘이신칭의’ 곧 ‘이신’에 ‘칭의’를 적용하는 것은 구원의 도리에 맞지 아니하는 것이다.
2. 이신과 득의
‘이신(以信)’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이다.
‘득의得義)’는 ‘의롭다 함을 얻다’이다.
그리하여 ‘의롭다 함을 얻다’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령 곧 보혜사 성령과 주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이신득의’ 곧 ‘이신’에는 ‘득의’를 적용하는 것이 구원의 도리에 맞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신(以信)’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에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의롭다 칭함을 받다 즉 죄 사함 곧 칭의의 구속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의롭다 칭함을 받다’ 즉 ‘죄 사함 곧 칭의의 구속을 받다’에는 이신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보혈’로써 ‘보혈칭의’ ‘보혈속죄’가 맞는 표현이다.
그래서 서론에서 말한 대로 루터는 본래 ‘이신득의’로 말한 것을 지금 교계가 ‘이신칭의’로 왜곡되게 말하는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한 것은 성경에는 ‘이신칭의’가 아니고, ‘이신득의’로 말씀하기 때문이다.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다’를 그대로 한자적 교리용어로 표현하면 ‘이신득의’이다.
- 2024. 05. 17∥목사 김반석
- 선지자문서선교회∥http://www.seonjija.ne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
공지 | 2024.11.13-177 | 김반석 | 2023.05.03 |
177 | 주요 교단 여성 목사 안수 도입에 대한 반증적 논평 | 김반석 | 2024.11.13 |
176 |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의 이단설 ‘부활 신앙’에 대한 반증적 논평 | 김반석 | 2024.07.11 |
» | 루터의 ‘이신칭의’는 ‘이신득의’에 대한 교계의 왜곡 | 김반석 | 2024.05.17 |
174 | 유대교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유 | 김반석 | 2024.05.06 |
173 | 침례교 신학자들께 질문 성구 행19:1-7 | 김반석 | 2024.02.19 |
172 | 이영인 홈페이지는 이단 지방교회를 옹호하고 있다 | 김반석 | 2024.02.02 |
171 | ‘이신칭의’에 대한 성경적 논평 | 김반석 | 2023.06.09 |
170 | 개역개정판은 이단적 개악 | 김반석 | 2023.06.09 |
169 | 개역한글판의 ‘두려워 말라’ ː 개역개정판의 ‘두려워하지 말라’ | 김반석 | 2022.12.20 |
168 | 천주교가 주장하는 ‘계시’에 대한 성경적 반증 | 김반석 | 2022.11.03 |
167 | 천주교가 주장하는 ‘마리아’에 대한 성경적 반증 | 김반석 | 2022.11.02 |
166 | 개역한글판의 ‘신령과 진정’ ː 개역개정판의 ‘영과 진리’ | 김반석 | 2022.10.02 |
165 | ‘영혼과 육체’의 이분설에 대한 반증적 논평 | 김반석 | 2022.08.18 |
164 | 김윤수 목사의 ‘아가(雅歌) 주해’에 대한 논평 [1] | 김반석 | 2022.06.02 |
163 | 한어성경 ‘아가(雅歌)’에 대한 논평 [1] | 김반석 | 2022.05.28 |
162 | ‘한종희목사 전기’에 대한 김반석목사의 논평 | 김반석 | 2022.03.02 |
161 | ‘예장 통합, NCCK·WCC 탈퇴하지 않기로‘에 대한 반증적 논평 | 김반석 | 2022.02.19 |
160 | 강원주 목사의 '개역개정판에 대해 말한다'에 대한 논평(둘째 글) | 김반석 | 2021.03.04 |
159 | 개역개정판은 이단적이다 | 김반석 | 2021.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