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04 10:45
■ ‘개역개정판’의 개악적 번역에 대한 논평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개역개정판 성경은 오류가 많다. 개정이 아니라 개악이다. 그 가운데 하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번역본의 차이
1) 개역한글판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2) 개역개정판
(고전14: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위에서 보는 대로 ‘적당하게’와 ‘품위 있게’는 한글의 단어적 뜻이 다르다. 그러면 성경의 도리적 뜻은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리고 ‘질서 대로’와 ‘질서 있게’는 그 의미가 다르다. ‘질서 대로’는 거기에 따르려는 피동성(被動性)이 있고, ‘질서 있게’는 그것을 맞추려는 주동성(主動性)이 있다.
2. 단어의 성경적 뜻
다음은 성경에서 ‘적당’과 ‘질서’라는 단어가 있는 성구를 각각 찾아보았다. 이렇게 성경에서 찾아보면 어떤 도리가 있는 단어인지 알 수 있다.
1) 적당
(민32: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가축에 적당한 곳이라’를 ‘가축에 품위 있는 곳이라’로 번역이 되면 진리의 도리를 왜곡하는 개악이다.
(신11: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를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품위 있는 때에 내리시리니’로 번역이 되면 진리의 도리를 왜곡하는 개악이다.
2) 질서
(히5:1-1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레위 족속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 있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 있다. 이것이 질서이다.
(히7:1-17)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있고 또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시다. 이것이 질서대로 이다.
3. 성경적 주석
1) 적당하게 하라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것과, 또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고, 또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게 아무것도 아니며,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서 하는 것이 적당하게 하는 것이다.
2) 질서대로 하라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것과, 또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고, 또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게 아무것도 아니며,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러므로 보이는 잠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돌아보는 것이 질서대로 하는 것이다.
-2016. 4. 4. 김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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