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 간 선교사 말콤 펜윅

  선지자선교회

함경도 원산에 세워진 최초의 침례본부, 한국의 복음화 시작

 

펜윅이 28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후원하는 교단이나 교회는 없었다. 그는 선교의 방향이 탈 교단적인 색채를 띄고 있어서 교단중심적인 한국 풍토 속에서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펜윅은 한국 선교역사 가운데 숨겨진 보화라 할 수 있다. 그가 45년간 보여 주었던 신앙선교, 오지선교, 자립선교, 개척선교 등은 당시 다른 동료 선교사들조차 모방하기 힘든 선교 사역이었다. 또한 그의 말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됨으로 오늘날 펜윅을 선교학적인 관점에서 재평가 해 볼 때 그는 분명 선교 혁신자였다.

 

한국 침례교 창시자의 입국

 

한국침례교 창시자이자 초대 선교사인 펜윅(Malcom C. Fenwick)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인 1889128일이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주님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들어온 펜윅은 독립된 선교사였다. 천신만고 끝에 한국 땅에 도착한 펜윅 선교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나라는 28년 동안 그가 살았던 환경과는 너무도 달랐다. 말도 통하지 않았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낯선 환경이라도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곧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온 이곳 한국 땅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우선 서울에 10개월 동안 머물면서 한국인의 생활을 파악했다. 그리고 언어를 배우기 위해 황해도 송천에 사는 서경조 씨를 찾아가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몇 마디의 말을 배우고 나서 곧바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3년 동안 한국 땅에 머물면서 언어를 익혔고, 현지 환경을 어느 정도 파악한 펜윅 선교사는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고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89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미국교계 지도자로 유명했던 메사추세츠에 있는 보스톤의 클라렌돈 침례교회담임 목사 고든(A.J.Gordon) 박사를 찾아가 3년간 신학을 공부했다.

그후 1897년 다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돌아왔다. 낯설지 않은 한국에 돌아오자 곧바로 송천으로 갔으나 그곳은 이미 장로교회가 선교지로 정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남의 터에 집을 세우지 않는다는 성경 말씀에 순종하여 발길을 원산으로 돌렸다. 당시 경원선이 개통되지 않아 교통이 매우 불편하던 원산은 선교사가 없는 지역이었다. 그는 함경도 원산에 본부를 세웠는데 그곳이 한국 최초의 침례교 본부였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

 

한국에 선교사로 오기 위해 한국에 대해 공부하고 있을 때 그는 한국민족은 미개해서 사람을 잡아먹는다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한국은 미개한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국인의 생활을 직접 경험한 그는, 한국은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숭고한 도덕이 있고, 예의가 바른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미풍양속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따르는 한국인의 순수한 삶에 깊이 매료되어 한국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특히 한국인이 일본의 압제하에 있는 것을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하면서 한국인들에게 나라 사랑하는 것과 민족성을 일깨워 주는 데 많은 노력을 했다.

원산에서 사역하면서 펜윅 선교사는 편위익이란 한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명망 있는 대영 귀족의 후예로 태어나 성장했으며 고등교육을 받아 앞날이 촉망되는 젊은이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어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꾸고 한국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바칠 각오를 한 것이다. 편위익 선교사는 마태복음 2818-20절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주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겠다는 소명을 불태우게 되었다고 간증했다.

그전까지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고,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한국은 아마 지중해상의 어느 섬으로 아프리카 식인종들처럼 미개한 족속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악한 여건의 나라라 할지라도 주님이 가라고 하시면 순종하기로 한 것이다. 찌그러지고 녹슨 통처럼 부족한 자신이지만 생명의 물을 운반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한 것이다.

 

펜윅 선교사의 본격적인 선교활동

 

1902년 스테드만(D.W.Stead man) 부부와 맥킬 여사는 원산에서 선교하고 있던 펜윅 선교사에게 강경과 공주 지방에서 개척한 교회와 모든 소유를 인계하였다. 자연히 펜윅 선교사의 선교지가 한국 남쪽 지방까지 넓어졌다.

펜윅 선교사는 1906년 강경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교단 명을 대한기독교회로 정했다. 그리고 회중의 추대를 받아 제1대 감목으로 취임했으며, 46조로 이루어진 교규도 만들어 공포했다. 이후 10개가 넘는 선교지를 더 개척하여 한국은 물론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제자 육성과 독립정신

 

펜윅 선교사는 독립적인 선교사로 자급자족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천막을 만드는 일을 통해 자급자족하면서 선교활동을 한 것과 같다. 펜윅 선교사는 직접 미국의 선진 농법을 도입하여 과수원과 농장을 운영했으며 꽃을 기르는 일을 하였다. 농민들이 펜윅 선교사의 농법을 배워서 직간접적으로 원예와 농법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일본의 한국교회 탄압

 

펜윅 선교사가 우리나라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는 일제의 식민지 말기로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기독교 말살운동을 광적으로 확대해 가는 때였다. 일제의 군국주의자들은 기독교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가장 큰 저해요소라고 판단하고 노골적으로 박해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모든 교단을 하나로 통합하여 관리하고자 했다.

기독교회(지금의 침례교)는 이들의 탄압에 맨주먹으로 싸웠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자 일제는 침례교회의 교역자 32명을 체포하고 무자비하게 고문하였다. 모든 교회는 강제로 문을 닫았고 교인들은 흩어져 산과 들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러나 침례교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학대를 받으면서 때론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추호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수호하였다. 이는 펜윅 선교사의 성경적인 가르침과 타협할 줄 모르는 올곧음에서 나온 신앙정신이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펜윅 선교사의 마지막 전도순회

 

초기 한국 침례교회는 일본의 무자비한 박해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계속 발전하여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갔다. 전국에서 주의 일꾼들이 모여들었으며 남북한 전역은 물론 만주와 시베리아, 몽골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해졌다. 이렇게 250여 곳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전국에서 일하는 교역자가 70여 명이나 되었다.

1925년 펜윅 선교사는 시베리아와 중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위험한 전도의 길에 나섰다. 경흥, 고읍, 중산 등 각 교회를 순회하였고 간도에서는 최성업 외 동역자들과 함께 교회를 순회하기 위해 선교여행을 계속했다..

 

펜윅 선교사의 유언

 

펜윅 선교사는 1935126, 72세의 나이로 원산 자택에서 하나님의 품에 고이 잠들어 먼저 간 부인의 묘 옆에 묻혔다. 그는 젊은 시절에 복음을 들고 한국에 들어와 46년간 이 나라와 이 민족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한국을 무척 사랑해서 한국 땅에 자신의 육신을 묻었다. 펜윅 선교사는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우리 교회는 세속된 교회들과 연합하지 마시오. 또 한 가지, 내 무덤에는 봉분을 하지 말고 평장을 하시오라는 짧은 유언을 남겼다.

한국 침례교회가 유독 박해를 많이 받고 순교의 피를 많이 흘린 것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주의 본분을 충실히 지킨 까닭이다. 한국에 있는 침례교회의 사명은 결코 타교파의 그것보다 작은 것이 아니다.

한국 침례교회가 비록 그 수는 다른 교단에 비해 적으나 주님이 세우신 진리의 말씀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지켰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비참한 옥중 생활을 견디며 32인의 지도자들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 당시 교단의 감목인 전치규 목사를 비롯하여 이종덕, 이종근 등 역대 감독(총회장)이 차례로 순교의 피를 흘리며 복음의 진리를 수호한 것이다..

 

자료: 한국침례교 인물사/ 김갑수/ 요단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