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그림은, 약 50만 년 전의 암각화로부터 현대 회화에 이르기까지 실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시인들은 동굴 생활을 하면서 벽이나 바위에 그림을 새기거나 그렸다. 원시인들의 그림은 각 부족의 토템을 상징하기도 하고, 부족간의 투쟁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것을 통칭하여 암화(岩畵)라고 한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면,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새로운 표현 도구와 대상을 찾게 되었고, 그들이 발견한 것이 바로 도기 위에 그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채도화(彩陶畵)라고 한다. 이 그림들은 부족의 농경과 수렵 생산 활동을 비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물고기 및 사냥 도구가 그림의 주요 표현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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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하(夏)·상(商)·주(周) 시대에 이르러 문자를 가지고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고, 정치 권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술 역시 종교적 행위보다는 점점 정치적 색채를 띠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청동기의 주조이다. 청동기에 새겨진 다양한 문양과 상형문자는 지배자들의 권위를 표현하는 정치적 의미를 짙게 깔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인간이 자연과 신으로부터 공포와 외경심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림 속에는 아직도 자연과 신을 경배하는 내용이 남아 있었다. 그러한 현상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이르러 변화되기 시작한다.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생산력이 급속도로 발달하게 됨에 따라 그림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현실 삶과 전쟁을 표현하는 내용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이다. 전국시대에서 진한(秦漢)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만들어진 묘지에서 많이 발견된, 백화(帛畵)·벽화(壁畵)·화상석(畵像石)·화상전(畵像磚)에서 표현한 것이 바로 그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 때까지의 그림은 집단을 위한 것이었다. 개인의 정서와 사상 및 체험을 표현하기보다는 집단의 법칙과 삶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개인의 정서와 취향을 표현하는 그림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고개지(顧愷之) 등 실명을 가진 화가들이 등장하였고, 조식(曹植)·사혁(謝赫) 등은 이들의 활동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조류에 따라 산수화가 출현하였는데, 이후 산수화는 중국회화사의 핵심을 이루는 장르가 되었다. 위진(魏晉) 현학자(玄學者)들은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자연산수에 귀의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삶의 자유를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며, 점점 자연 속에 인격과 감정을 이입시켰다. 중국의 산수화는 이러한 사조 속에서 급속도로 발전하였으며, 문인 지식인들이 산수화를 접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는 중국그림이 외국과 최초로 교류하는 때였다. 이에 따라 서역으로부터 전래된 불교의 영향으로 표현기법과 내용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즉 사실적 표현기법이 환상적 분위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그 색채도 화려해졌다. 사관과 동굴 속에 그려진 유마힐 등의 불상 미술이 이를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수당(隋唐)에 이르면, 산수화가 더욱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인물이나 고사(故事)의 부속품으로 존재하던 자연산수가 그림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자연산수화는 점점 독립적인 장르로 발전하게 되었다. 산수화를 즐겨 그렸던 문인학사들은 자신들의 높은 정신적 이상을 자연산수를 통해 표현했다. 이렇게 산수화가 발전하는 가운데 당나라 태종(太宗) 때에는 염입본(閻立本, ?-673) 등 문인학사들과는 다른 풍격을 가진 화가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주로 궁정에서 생활하면서 제왕의 화려하고 위엄있는 모습을 거대한 몸집으로 표현하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제왕의 권위적인 모습, 궁궐 여인의 화려한 자태 등을 그렸다. 오대(五代) 서촉(西蜀) 때에 이르면, 이미 궁궐에 화원(畵院)을 두고 시험을 통하여 화가들을 선발하였다. 그리고 송(宋) 태조는 건국 후,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을 만들어 화원 제도를 정착시켰다. 이렇게 하여 화원 출신의 화가들이 대량으로 배출되었는데, 그들은 주로 궁궐이나 황가에서 요구하는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에 화려한 색채와 과장된 필치를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문인학사들보다 '형사(形似)'에 치중하는 한편, 판에 박힌 화법을 구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제도를 통하여 배출되었으며, 황실로부터 제도적·물질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받을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예술적 기교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고, 이들의 활약은 중국 그림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중국에는 문인학사 출신의 화가와 화원 출신의 화가가 동시에 존재하였다. 중국 그림은 이 양자의 상보관계 속에서 다채로운 화풍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송대(宋代)는 문인화가 최고조로 발전한 시기이다. 여기에 궁정화가와 민간화가의 다양한 그림이 더해져 송대 그림은 중국회화사의 최고봉을 이루게 된다. 송대에는 상업경제가 번영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가 생겨났다. 오밀조밀하고 시끄러운 도시 생활은 인간과 자연의 접촉을 차단하였으며, 이것은 자연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자연 경치의 감상을 통하여 긴장된 생활을 해소하고자 했다. 결국 산수화와 화조화는 도시인에게 '와유(臥遊, 누워서 산수를 유람)' 작용을 하며 점점 발전했다.
원대(元代)는 중국의 사의문인화(寫意文人畵)가 극도로 발전한 시기이다. 몽고족이 건립한 원왕조는 화원(畵院)을 설치하지 않았고, 궁정의 귀족들 역시 남송의 회화전통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요(遼)와 금(金) 이래 줄곧 이어져 내려 온 북방 회화가 유행했다. 문화가 발달한 남방의 사정은 달랐다. 문인들은 멸시를 받았고 벼슬에 나갈 길이 막히자 회화를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였고(寫意), 감정을 풀었다(抒情). 이를 계기로 원대에는 남송의 사대부 문인화의 기초 위에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 잡화 등 제 영역으로 제재를 확대했고, 사의화(寫意畵)의 표현능력을 강화시켰다. 이미 대대적으로 발전했던 사의풍격(寫意風格)을 사실풍격으로 바꾸었다. 이런 화풍이 원대 화단의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다.
명대(明代) 초기에는 전제 왕권의 강화에 따라 문화예술에 대한 정치적 통제와 간섭이 심해졌다. 심지어는 시문과 화의(畵意)를 곡해하고 각종 죄명을 씌워 화가들을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당시의 그림은 전통적 회화 기법과 심미 기준이 규범화되었고, 과거의 화풍을 모방하고 정리하는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에는 원파(院派)와 절파(浙派)를 주축으로 하는 전문화가(행가 行家)와, 오파(吳派)를 주축으로 하는 문인화가(일가 逸家) 그룹이 활약을 하면서 초기의 암울했던 화풍을 변화시켰다. 또한 시장경제가 발달한 강남 지방에 화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그림의 풍격, 지방색, 전통 계승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화파를 형성하였다.
한편 통속문학인 희곡과 소설이 발달함에 따라 판화 삽화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청대(淸代)까지 지속되었는데, 당시에 출판된 『서상기(西廂記)』·『수호전(水滸傳)』·『홍루몽(紅樓夢)』·『삼국연의(三國演義)』 등 통속문학 작품은 모두 삽화본이다. 또한 천문(天文)·지여(地輿)·절영(節令)·인기(人紀)·의술(醫術)·금학(琴學)·서화(書畵)·복서(卜書)·상법(相法) 등에 판화가 이용되었으며, 『만보전서(萬寶全書)』나 『삼재도회(三才圖會)』 같은 백과사전 등에도 모두 판화가 이용되었다. 명 만력(萬曆)에 판각된 『비파기(琵琶記)』·『북서상기(北西廂記)』의 삽화를 감상해 보면, 휘파(徽派)의 저명한 조각공 황씨(黃氏)가 판각한 작품은, 판화가 아니라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이처럼 붓으로 그린 산수화를 칼로 다시 재현하는 것은 단순한 복각이 아니라 새로운 예술창작이었다. 당시의 조각공들은 복건건안파(福建建安派)와 강소금릉파(江蘇金陵派), 그리고 안휘신안파(安徽新安派) 등 예술풍격에 따라 분파를 이루었다. 이를 보면 당시 판화 예술은 실용의 단계를 넘어 예술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명말 청초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사화보(詩詞畵譜)는 모두 판화로 판각된 것으로, 시와 그림이 하나로 융합된 경지를 보여준다.
청대 초기 그림은, 서양화를 학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명 중기부터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서양화가 전래되었다. 서양화를 도입하여 중국에 정착시킨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낭세영(郎世寧, 1688-1766)을 들 수 있다. 그의 본명은 Gastiglione으로 이태리 신부이자 화가였는데, 1715년 그의 나이 27세 때 중국으로 들어와 51년을 살면서 중국과 유럽의 회화 교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세필 채색 화법을 사용하여 수묵 위주의 중국회화와 접목시켰으며, 새로운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청대 중기의 화단은 양주화파(揚州畵派)가 차지하고 있었다. 강소성(江蘇省) 양주(揚州)는 육지와 수로 운송이 발달하여 명나라 중기부터 전국의 염상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후원으로 전국의 미인, 시인묵객, 화가들이 이곳으로 운집하였다. 일부 염상들은 문학과 예술적 기호에 따라 별서와 정원을 꾸며놓고, 화가와 시인묵객을 초청, 시회(詩會)와 화회(畵會)를 열어 예술을 감상하였다. 막대한 상업자본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양주는 신사의화파(新寫意畵派)의 활동무대가 되었는데, 그들이 이른바 양주팔괴(揚州八怪)라는 집단이다. 그들은 천재적인 개성, 순수한 예술정신, 세태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오만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괴이한 서체와 독창적인 화풍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양주팔괴는 8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8명에 누가 속하는지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하지만 대체로 나빙(羅聘), 정섭(鄭燮), 금농(金農), 이방응(李方膺), 황신(黃愼), 왕사신(汪士愼), 이선(李鱓), 민정(閔貞), 고상(高翔), 변수민(邊壽民), 고봉한(高鳳翰), 화암(華嵒), 진찬(陳撰) 등이 '양주팔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양주화파가 활동하던 양주는 18세기말에 이르러, 부호들의 사치, 백련교(白蓮敎)의 난, 귀주(貴州)에서 일어난 묘족(苗族)의 반란, 서구 열강의 침략, 소금값의 급등과 염상의 발호, 소금의 질적 저하와 사천(四川) 등 내지의 소금 생산량의 급증 등의 원인으로 점점 썰렁한 도시가 되어 갔다. 양주화파 역시 대염상들의 몰락과 홍수, 마지막 화가인 나빙이 작고(1799년)하는 등 여러가지 악재가 겹쳐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양주화파의 몰락과 함께 새롭게 화단의 각광을 받기 시작한 곳은 바로 상해(上海)이다. 장강의 하구에 위치한 상해는 1820년경부터 무역항과 상업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대거 이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새로운 유파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을 상해화파(上海畵派)라고 한다. 이들의 특징은, 양주화파처럼 개성을 존중하고, 전통적 화법을 거부하였으며, 서양화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응용하였다. 상업 자본이 발달함에 따라 그림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화가들이 많아졌다. 때문에 그림의 속화(俗化)는 불가피하였으나, 당시 상업자본이 예술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말에서 1950년까지를 장식한 화가로는 제백석(齊白石, 1863-1957)과 서비홍(徐悲鴻, 1894-1953)을 들 수 있다. 제백석은 농촌에서 성장하여 민간 대중미술을 학습하였고, 40세까지는 민간공예에 종사하는 한편 전문적으로 문인화, 시서화, 전각을 학습하였다. 40세 이후에는 문인화가 신분으로 여러 지역을 유람하고 각계인사들과 교류하였다. 이 시기에 그의 화풍은 공필(工筆)에서 대사의(大寫意)로 전환하였다. 55-65세까지는 북경에서 생활하면서 화풍의 변화에 고심하였으며, 65-94세까지는 그의 회화 창작이 최고봉에 이르는 시기이다.
그는 혁신정신이 투철했던 화가, 즉 서위(徐渭)·석도(石濤)·금농·오창석(吳昌碩)을 계승하였다. 전각에도 뛰어났는데, 절파(浙派)에서 조지겸(趙之謙)까지, 그리고 다시 진한비(秦漢碑)의 각법을 계승하였고, 위비(魏碑)를 융합하여 전각의 새로운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 속에는 문인전통과 민간전통, 문인 교양과 농민 기질이 두루 융합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속(雅俗)을 모두 겸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비홍은 미술가, 미술행정가 겸 교육가이다. 24세 때 프랑스로 유학 9년간 근대 서양화를 배우고 귀국한 뒤, 서양화 기법을 중국화 창작에 도입하였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데 해부학, 색채학, 소묘, 비례법을 강조하였다. 당시 그의 말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였다. 이상에서 기술한 중국 그림의 발자취를 요약해 보면, 중국 그림의 역사는, 산수화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 미학의 특징은, 아속(雅俗)·형신(形神)의 대립과 조화에 있었다. 그리고 전문화가와 문인화가의 상보관계 속에서 다채로운 화풍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