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운동과 새로운 문학의 탄생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淸) 왕조가 붕괴되고 이와 동시에 공화정이 수립되는 등 일련의 새로운 시대조류 속에서 신문화운동은 본격적인 궤도에 돌입하게 된다. 중국문학사에서는 이 시기, 즉 1917년경에서 1926년에 이르는 시기를 편의적으로 '신문학의 탄생과 성장기'라 부른다.
선지자선교회
신문화운동의 직접적인 촉발제가 된 것은 1차 대전 처리 결과에 대한 전 중국민의 불만으로 야기된 '5·4운동' (1919)이었다. 이 운동의 핵심은 '민주(德先生)'와 '과학(塞先生)'에 대한 요구였다. 이 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으로 이 이전에 있었던 일련의 사상계몽운동 말고도 1차 대전 처리 과정에서 드러나는 국제질서의 재편과 역학관계의 변화, 그리고 러시아 혁명을 통한 제2세계의 태동, 그리고 대다수 중국 지식인들이 유학하고 있던 일본의 다이죠(大正) 시대라는 독특한 분위기 등 대외적인 영향이 강하게 작용했다.
'5·4 신문화운동'의 주요한 진지는 사회평론성 잡지 『신청년(新靑年)』(1917)이었고, 여기서 제기된 주요한 화두는 계몽자(지식인)와 피계몽자(일반 대중)의 관계설정,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관계설정 문제였다. 후스(胡適)의 '문학개량', "국어적 문학, 문학적 국어"에 관한 주장이나 천두슈(陳獨秀)의 '문학혁명론'이나 저우쭤런(周作人)의 '인간의 문학', '평민의 문학'에 관한 주장이나 최초의 근대적 소설로 평가되는 루쉰(魯迅)의 「광인일기(狂人日記)」나 리따자오(李大釗)의 맑시즘 소개 논문 등은 모두 이런 맥락에 서 있다. 계몽운동의 중심에 언어(문어가 아닌 구어)와 문학(낡은 문학이 아닌 신문학)의 문제, 그리고 인간(주체)을 제대로 세운다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 현상은 당시 95% 이상이 문맹인 중국의 상황에서 보자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와 함께 문학단체의 결성도 잇따랐다. '인생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 문학연구회(文學硏究會, 1921)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며 일본에서 결성된 창조사(創造社, 1921), 그리고 "자유롭게 말하고 거리낌없이 새 생명의 탄생을 촉진하며 새 것에 방해가 되는 낡은 것을 힘써 배격"할 것을 주장한 어사사(語絲社, 1924), 그 밖의 현대평론(現代評論, 1924), 신월사(新月社, 1928) 등이 그 주역들이었다.
한편 신문화운동의 방향이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라는 구도에 입각해 있는 한, 수구파들의 반격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난징(南京)에 중심을 둔 『갑인(甲寅)』과 『학형(學衡)』을 통해 펼쳐진 이들의 주장은 나름대로의 정합성이 없지 않았지만 새시대의 홍류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문화운동 진영이 이들 복고파에 대항해서 시종일관 한 목소리를 냈던 것은 아니다. 1925년 이후 신문화운동의 물결이 퇴조함에 따라 이들 내부에서도 각각 계급적·계층적 이해관계에 따라 일부는 복고로 돌아서고 일부는 좌우익으로 나뉘어지는 등 다양한 분화가 일어나는데, 이 다양한 스펙트럼이 다음 시기 문학사의 결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