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희극은 원시 가무에서 기원하였지만, 후대 궁정과 민간에서 행해졌던 오락적인 연행(演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즉 희극은 송금(宋金) 시대의 설창(說唱)예술인 제궁조(諸宮調)와, 송 잡극(雜劇) 및 금원본(金院本)에서 직접적으로 기원한 것이다. 이처럼 설창 예술은 오랜 성숙기간을 통하여 원대(元代)에 꽃을 피웠다. 우리는 이것을 '원곡(元曲)'이라고 부른다. 원곡은 원대의 잡극(雜劇)과 산곡(散曲)을 통칭하는 말이다. '희곡(戱曲)'이란 명칭이 중국의 전통 희극을 지칭하게 된 것은, 왕국유(王國維)의 『송원희곡사(宋元戱曲史)』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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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에 희극이 발전하게 된 이유는, 도시 상업 경제의 발전과 대중들의 오락적인 요구를 들 수 있지만, 몽고 민족의 이질적인 문화 요소가 중국문화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신선감을 주었다는 점과, 몽고 통치 이후 갈 곳 없는 사대부들이 시정의 기예단(伎藝團)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희극 창작에 참여한 것 등도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희극에 대한 경시풍조 때문에 현존하는 희극자료는 매우 적으며 그나마 전해지는 것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작가와 작품의 수를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현존하는 원 잡극의 수량은, 장무순(張懋循)의 『원곡선(元曲選)』과 수수삼(隋樹森)의 『원곡선외편(元曲選外編)』에 실려 있는 것을 근거로 하면 162종이 된다. 명나라 주권(朱權)은 『태화정음보(太和正音譜)』에서 잡극을 12종으로 나누었고, 근대 학자들은 내용에 따라 애정혼인극(愛情婚姻劇)·사회극(社會劇)·역사극(歷史劇)·공안극(公案劇)·신선도화극(神仙道化劇) 등으로 나누었다.
원 잡극은 대덕(大德) 년간(1297-1307)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는 잡극이 극도로 번성한 시기인데, 원곡의 사대가(四大家)인 관한경(關漢卿)·정광조(鄭光祖)·백박(白朴)·마치원(馬致遠) 중, 정광조를 제외하고 대가들이 모두 이 시기에 활약하였다. 이 시기는 큰 대도시를 중심으로 희극이 연행되었는데, 연경(燕京)을 비롯하여 진정(眞定)·변양(汴梁)·평양(平陽)·동평(東平) 등 경제가 번창한 대도시와 그 주변 지역에서 행해졌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왕실보(王實甫)의 『서상기(西廂記)』, 관한경의 『두아원(竇娥寃)』, 백박의 『장두마상(墻頭馬上)』, 마치원의 『한궁추(漢宮秋)』 등이 있다.
후기의 잡극은 장강(長江) 동남부 연해 도시로 집중되었는데, 이는 원대 후기에 그 지역으로 경제의 무대가 옮겨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정광조의 『천녀이혼(倩女離魂)』을 들 수 있다. 원 잡극은 북방의 곡조를 가지고 부른 것이며, 남방 지역에서는 남송 이래 남방 곡조를 가지고 연행하는 희극이 있었다. 이것을 '희문(戱文)' 혹은 '남희(南戱)'라고 한다. 비교적 유명한 작품으로 『형차기(荊釵記)』·『백토기(白兎記)』·『비파기(琵琶記)』 등이 있다.
산곡은, 음악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원대에 유행하던 가곡(歌曲)을 의미하며, 문학적 의미에서 말하면 당시의 일종의 서정시에 해당한다. 산곡은 사(詞)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체재면에서 상당히 가까운데, 모두 고정된 격률을 가진 장단구 형식에 속한다. 그래서 산곡을 '사여(詞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산곡의 언어 풍격은 사와 현격하게 다르다. 사는 전체적으로 정아(精雅)한 반면에 산곡은 통속적인 경향이 짙다.
또한 산곡은 속어와 구어를 많이 사용하였고 '아이야(哎喲)'라는 어기사를 사용하는 면에서 사와 다르다. 더욱 중요한 차이는, 산곡은 짧은 서사적 줄거리를 통하여 등장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현장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희극적 효과를 내기 위한 것으로, 이 점 때문에 시와 사보다 더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원대에 산곡이 흥성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문인들이 산곡의 창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을 들 수 있다. 원대 문인들은 정권에 기대지 않고 시민 사회로 접근하였으며, 전통적인 윤리로부터 자유스러워졌다. 때문에 산곡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양식으로 합당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