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님 옥중편지와 설교 (12)
선지자선교회
손양원목사설교/부활하신 주님의 5대 특은
부활하신 주님의 五대 특은(特恩)
(요 20: 19~20)
이 제자들이 모인 방은 성만찬을 베푸시던 곳이 아닐까 싶다. 가롯 유다는 물론 없었고 또 도마 까지도 없었으니 제자들은 열명이었을 것이다. 제자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문을 닫고 모인 까닭은 자기들까지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영화(靈化)된 주님은 자유 자재의 몸이심으로 문 닫은 곳이라도 능히 들어오실수 있었다.
주님의 일생을 3기로 나눌수 있다. 제1기는 30년간 가정생활의 시기이니 자신 준비의 시대로 사적 생활의 시기인 것이다. 이는 우리 기독자에게 있어서 지상(地上)생활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제2기는 삼년간 전도 생활의 시기이니 다른이에게 은혜를 베푸는 시대이다. 이적이나 기사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는 공적(公的)생활의 시기인 것이다. 이는 하늘 나라의 진리를 나타내되 특히 속죄구령(贖罪救靈)사업을 가르치는 시기인 것이다. 제3기는 40일간의 부활하신 영화(靈化)생활의 시기이니 제자들에게 참 복을 받게하는 시기이다.
이는 성도들에게 천국 생활의 모형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보면 30년 생활보다는 3년 생활이 더 귀하고 또 3년생활보다는 40일 생활이 더욱 중한 것인 것을 알수가 있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오늘 말하고저하는 이 부활 직후에 주신 5대 특은은 기독자에게 가장 큰 복이 되는 것이니 잘 받아야 한다. 부활후 단 40일간에 11차나 나타나신 기적과 말씀하신 교훈과 행하신 일들은 놀랍고 크고 좋으나 이번에는 우선 부활 후에 5대 선물만 말하고저 한다.
1. 평강을 주셨다(19하~21상)
'너희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유대인들의 인사법이다. 즉 육적 인간들의 예의였으나 사실은 방에 있는 그들이 괴물(怪物)인줄 알고 놀랄가 보아서 하신 말씀이다. 겁을 내여 문을 eke고 있으니 영화된 몸으로 나타나시면 그들은 물론 더욱 놀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어서 그들을 우선 안심 시키셨다. 31절에 보면 또 거기에도 재차 말씀하시기를 너희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었다 이 평강은 영적이요 위대한 평강인 동시에 큰 진리가 감추인 평강인 것이다. 이 평강은 주님께서 세상에 나실때에 천사들이 예언하던 평강인 것이다. 즉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로다(눅 2:14)'하신 말씀이 그대로 응해지는 말씀이고 또한 주님께서 교훈하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하신 말씀대로 실제로 주시는 것이요 장래 무궁 세계의 평강이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며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푼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하신 미래 영원한 평안의 시작의 말씀인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인생은 누구나 진정한 참 평안한 사람이란 없는 것이다. 첫 아담이 타락한 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석가 같은 사람도 노병사(老病死)인 삼대고(大苦)를 면해 보려고 했으며 또 다른 많은 이들도 애를 썼으나 실제 참 평안을 누리고 산 자는 세상에 한 사람도 없었다. 아이고(我而苦) 아이구(我而救)는 인간의 입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혹 일시적 외부적 물질적으로 해서 기쁘고 즐거워 웃는 자 있었으나 참 진정한 평안을 누린자는 없다. 주님은 첫 아담 이후 첫 소리로 첫 복이 세상에 임하게 하졌으니 먼저 우리들로 시작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었다.
여러분 마음 속에는 주께서 주신 참 진정한 평안이 있는가? 주님이 내심에 가지시었던 그 평안이 여러분에게도 체험 되었는가? 천사가 예고한 평안을 또한 장내 무궁 세계에서 누릴 복을 조금이라도 맛보았는가?그렇게 못한다면 이 평안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또 무엇이 이 평안을 막는가?혹은 받았으되 몰이해(沒理解)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지 않는다면 받았던것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바로 명령이시다. 대 명령이시다.모든 염려를 헤치고 깨뜨리고 맡기고 막 받게 되는것이다.무조건으로 그냥 무엇이든지 다 맡겨 버리고 그저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 이상하게도 중간 길 새 길이 생겨 마치 진퇴양난중에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듯 없던 길이 생겨서 살길 평강의 길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근심이 되거나 어렵거나 억울하거나 답답하여 절망이거나 죄이거나 무엇이던지를 불구하고 맡겨놓고 볼 일이다. 기도만 해 놓은즉 만사 해결이다. 오늘까지의 내 신앙 생활이 그리하였다. 신자의 근심 걱정은 그것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기도해 본즉 진리의 해답이 나오게 되니 무조건으로 평강만 받으라는 대 명령인 것이다. 예수가 주시는데 누가 안받겠으며 누가 비난하며 누가 막겠는가? 너희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이다. 그런고
로 마음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염려를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아무리 큰 죄나 난경이라도 어렵다고 뒤로 가는 것이 아니다 뒤로 가는 자는 다 망하고 어쨌던 전진하면 다 살고 지혜나 권능을 다시 얻게 되는 것이다.
2 성령을 주셨다(행 2: I~4,요 20:22)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이는 참으로 복중의 대복이다. 예수님을 뵙기만해도 복되고 듣기만해도 복된데 사귀이는 영광은 무한히 커서 비할데가 없는데 하물며 삼위중 한위되시는 즉 예수님 자신이신 성령을 주어 받게 되는 그 복 그 영광이야 무엇에 비하랴! 즉 첫 아담의 자손인 죄인이 두째 아담 예수의 인격으로 중생케 되니 이 어째 복되지 않으랴. 육체를 가진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영적 인간이 되게하시는 이 원리는 꼭 주와같이 되게 하심이다. 부활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까지 되게 하신 것이요
중보직 삼직(三?)의 인격을 갖추어 위대한 인간이 되게 하신 것이 곳 성령을 받게하신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첫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더니 이제 제자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어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이다. 생기는 즉 숨이요 즉 생명인데 이 생명은 즉 성령이신 것이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나심같이 성령은 성자로 부터 보내게 된것이다. '성령을 받으라'성령을 주실 보증같이 보인다. 그것은 사실 오순절에 임한 까밝이다. 그러니 성령의 역활은 오순절 전부터 활동하고 계셨다. 마치 십자가의 고를 것세마네 혈한고(血汗苦)에서 맛보시었고 주님의 부활 전 부활은 변화산상에서 보여 주시었고 오순절 전 성령은 부활 직후의 기운을 불어 성령을 주신데서 부터 볼 수 있는 것이다.
'받으라' '생기를 부으셨다'는 대기(大氣) 대명(大命) 대능(大能)이시다. 이것으로서 에덴동산에서 첫 아담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심령위에도 내리시는 것이다. 누가 감히 거역하랴! 받고 안받는 문제보다는 주시는 이의 대능이신 것이다.‘나사로야 나오너라'하심에 어찌 나사로가 못 나오겠는가, 죽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썩었다는 말이 무슨관계냐, 무덤의 강한 문은 무엇으로 얽어 놓으랴, 누이 마르다의 불신앙이 무슨 관계냐, '나오라'는 대 명에는 막을자가 없는 것이다. 대명에는 '빛이 있으라'하니 캄캄한 흑암도
광명해졌다 '궁창아 나오너라' '물이여 갈라져라' '해야 달아 별아 초목아 생물아' 주님의 이 이적 기사의 대능은 어느 누가 막을수 있으리요. 반문 할 수 있으리요. '평강이 있을 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이말을 믿는 자면 누구나 다 받을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우리 구주로 믿는자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로 믿는자면 다 받는다. 다시사신 부활의 예수를 믿는자는 다 받는다.
3 사죄 특권을 주셨다(요 20:23,마 18:18)
기독교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이다. 십자가라 할때에는 먼저 죄란 것이 관계가 된다. 그런데 부활을 말 할 때에는 웬일인지 죄악이니 하는 것은 생각조차 없어지고, 새 기력과 신 세계의 소식을 가저 오는듯한 심령 기분을 가지게되고 만다. 사죄 특권을 받으자는 누구냐 하면 십자가의 보혈에 서 죄 씻음을 받은자다. 회개한 그 자가 아니겠는가,오늘의 우리는 참으로 사죄의 특권을 받게 됨을 확신하는가,주의 십자가의 대속을 확신 하는가. 주님의 부활에 확신이 있는가. 사죄의 평안을 얻었는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사죄의 특은(特恩)은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같은 대권을 남용해서는 안된다. 어떤 교파의 사람은 이 특권을 남용(濫用)해서 교황 정치에 기울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이들은 월권해서 타인의 행동을 주장하고자 하는 범죄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참으로 이러한 대권을 받은 심령 충만한자를 보면 오히려 겸비해지고 온유하여진다.
다른 사람을 형님으로 높이고 더럽고 무서운 죄악만 다스려서 죄에 사로잡힌 자들을 죄에서 풀어놓아 위대한 특별한 은혜를 받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타인의 죄를 사할 수 있겠는가?
(1) 기도로써‥‥‥제사장 직으로 대신 기도하면서 대신 기도하면서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친구를 믿게 하려고 기도 했으나 장례날에 가서 믿게한 이야기)
(2)전도하여서‥‥‥불신자와 악행자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하여야 할 것이다.
(3) 받은바 복음을 가지고‥‥‥바로 성경 말씀을 잘 듣게하여 스스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4)좋은 교훈으로써‥‥‥심방이나 권면 또는 설교를 통하여 할 것이다.
(5) 실제로 신인간(神人間)불화를 부활 시킴으로써‥‥‥형제중 불목하는자 있으면 지혜롭게 상의하여 화목함으로써 할 것이다.
이와같이 이러한 특권을 받은 우리들은 이 좋은 특권을 실행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조금만 권세나 지위가 있으면 그것은 악용하기 쉬우나 우리 기독교는 그렇게 할 수 없는것이니 사죄 특권은 더욱 그러한 것이다.
4. 사도의 성직을 주셨다(요 20:21상, 마 28:16~20)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십자가로서 우리 죄를 다 대속하시고, 부활하시어 사죄의 평안을 주시고, 새생명으로 중생케 하시는 심령을 주시고, 사죄케하시는 특권까지 주실뿐 아니라, 주님이 가시고나서 당신 대신으로 행 해야할 대 사도의 직분까지 주셨다. 육신으로 계셔서 역사하실 때는 12제자를 택하시여 3년간 전도에 동역(同役)케 하시더니 이제 부활 영화의 주로는 승천후 천당에서 성신으로서 남종과 여종을 통하여 사도의 성직을 수행케 하신다. 대 사도의 성직을 주신 임명하는 이 말씀에는 두가지 큰 뜻이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 같이' 에서 "같이"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과 일체요 동일하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가령 요한복음 17:16에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니다' 또 요한복음 17:11, 21, 22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이 되어 운운'요한복음 15:10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회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3:34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
희도 서로 사랑하라'이렇게 찾아 볼때에 주와 하나님이 일체시요 또한 우리도 주와 일체인 것이 분명한다.
(2)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에서 "보낸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먼저 있는 보내신다는 동사의 뜻은 파견된자가 파견하는자의 권위를 대표하고 있는 것을 가르킨다.
그러나 두째번 나오는 "보낸다"는 말의 뜻은 보통 사명을 주어서 보낸다는 동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항상 주님과 함께 하신것 같이 주님은 항상 제자와 떠나시지 않을 것을 약속하시고 보내신다는 뜻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혼자 있는것 같아도 그 뒤에 보호자가 늘 감시하고 배후를 지키는 것과 같다고 할른지! 주넘을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신을 통하여 보호하심 같이 제자들도 보호 하시면서 보낸 것이 자기 혼자 살고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마태복음 28:18-20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대로 우리 기독자는 누구나 다 각각 분량대로 살어가는 개인 생활과 동시에 우리 주님의 남은 사업에 전권대사의 중책을 가졌다는 것을 잊지않아야 한다.
5.대속과 부활의 확신을 주셨다(요 20:20)
요한복음 20:20에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성경의 순서대로는 이 말씀이 먼저였으나 내가 순서를 바꾼것은 앞에 말한 네가지 복음의 사실을 믿느냐가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앙이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시여 우리를 중생시키는 첫 열매가 되어 주신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 토대는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겠는가, 사실상 이러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일이니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실인즉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이 믿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지혜로우면 지혜로울수록 지혜있는 이에게는 과학적 증명이나 합리적 이론이 아니면 믿지 못하는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여 주시는데 야, 만지게 하여 주시는데 야 어찌 못믿겠는가?과학적인 머리를 가진 도마도 아니 믿을수 없었고, 박해하던 대학자 바울도 부정 할 수 없었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어거스틴, 오리겐, 칼빈, 같은 대 학자들도 이런 사실 앞에서는 아니 믿지 못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우리 같은 무식하고 미련하고 빈약한 자에게도 믿도록 하여 주신다. 꼭 하나님이 보여주어야 보고 믿게 되는 것이니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20절에 보니 닫은 문을 열지도 않고 들어가 시어서 보이시니 그들은 보게 되고 기때했다고 하였다. 기독교는 항상 무엇이던지 하나님 편에서 먼저 하시고 인간편에서는 믿기만 하면 된다.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었다.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보게하소서" "알게 하소서" "믿게하여 주옵소서""사하여 주옵소서"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동시에 정의감 간구심, 순종심, 인내력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천당에서 먼저내려오셨고 베데스다 연못가에 찾아가셨다. 네가 낫고져 하느냐 물으셨고, 다시 죄를 범치말라 하시었고, 네 믿음이 너를 성하게 하였다 하신것이다. 이때에도 그들이 문을 닫고 있는 그 안에 일부러 들어가시어서 보이시니까 불신으로 절망 속에 있던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동시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보라 도마와 같이 믿지 못하겠다고 하던 완고한 마음의 소유자에게 까지 부활의 주님은 나타나시었다. 가롯 유다는 본래의 길대로 간 것 뿐이고 베드로는 본선(本線)으로 도로 올려 세우신 것 뿐이다. 그러나 29절에 의하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욱 복된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을 보는데는 영과 육 두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에 영안이 육안보다 나은 것이다. 오관(五管)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심령으로 파악함이 신앙이다. 이 신앙의 눈이란 인간 편에서 보라고 눈을 뜨는것과 같아 "주는 곧 광명의 빛이시니 빛이 임하시여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보고 믿기만 하면 된다. " 우리들에게 이처럼 확신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은 참으로 감사 할 뿐이다. 사도들이 거의 모두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런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부활의 주님께서는 이러한 다섯가지 특별한 은혜를 주셨다. 물론 이 외에도 다른 많은 것이 있겠으나 본문에서는 이 다섯가지를 찾아 볼 수 있다. 부활의 주님이 주신것은 영원히 소유하게 되는 것이니 우리도 이런 은혜 받도록하자!
손양원목사설교/충령묵도와 국기경배문제
충령묵도(忠靈?禱)와 국기경배 (國旗敬拜)문제
(고전 2: I~16)
일본 제국 우상교와 싸우던 과거 대 환난은 과거에 있었던 문제 일 뿐 아니라, 오늘날도 직면한 일대 문제요 또한 장래의 문제도 된다. 과거에 신사 참배 한 것을 죄라고 깨달아 회개했다고는 하나 그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과연 무엇인가,만약에 진정하게 참으로 회개했다면 그 잘못 된 것에서 분기하여 앞으로 닥치는 문제에 크게 싸울 수 있는 힘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 우리는 진정한 애국자 열열한 애국자가 되자
참다운 애국자 참다운 애족자(愛族者)는 그 국가 그 민족의 흥망 성쇄의 길을 잘 가르쳐 주는 자가 아닐가, 건국 초두에 있어서 처음부터 주초(柱礎)가 되어서 아주 구별해 보아야 되겠는데 벌써 목사 장로 중에 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국기 경배와 충령묵도를 한 이가 있다고 하니 어찌 딱한 일이 아니겠는가.
2, 국가와 종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피차에 떨어 질 수 없는 관계이니 종교란 그 국가의 흥망의 길을 가르쳐 주는 자요 국가의 흥망 성쇄를 따라 그 나라의 종교도 영향을 받게 되는 법이다. 따라서 국권은 종교를 보존 할 책임도 있는것이다. 이처럼 국권 아래 종교를 둘 것도 아니고 종교가 국가 정치를 간섭 할 수 도 없는 것이다.이렇게 종교는 그 국가의 내부가 되고 정치는 외부가 되여 각각 별도로 병행 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유대 국가는 세계 각국의 표준이요 거울이다
하나님은 모든 국법 도덕의 표준과 종교의 근본 표준으로 유대국에 율법을 주셨다. 고로 유대국에 주신 율법 즉 국법 도덕 종교 이 3대 법 원리에 의해서 바로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와 국가의 머리시요 주장이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어길 때는 종교도 타락하고 국가도 망하게 되는 것이다. 보라 하나님께서는 국토를 주시되 한계를 정하셨고 국민을 내시되 주권자를 내시어 주장하게 하시니(행17:25-26)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며 나라가 흥왕하기를 바라겠는가 시편 33:12에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는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하였다.
4.죄값으로 나라 망한 과거를 살펴보자
악한 습관을 모방하지 말라, 소위 일본 문명을 배웠다는 사람들의 오늘 그 행동을 보면 일본 우상국의 일본 정신 독주(毒酒)에서 아직도 깨지 못하여,죄인지 망할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것 보니 답답하다. 가령 그 악행으로 해서 나라 망하던 그것을 보고도 그 흉내를 내려고 할 것이 무엇인가.이 역시 말세의 징조인가 싶다. 문명이라고 해도 우상적 문명 본 받지 말고, 일본 정신의 악한 습관이라면 회개하고 모양이라고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5 국기 경배는 또 다시 모든 죄를 받아들이는 첫 걸음이 된다.
국기 경배가 작은일 같으나 이것을 하게되면 충령묵도도 부모 제사도 단군제(檀君祭)도 다- 못할것 없이 된다. 이론을 부친다면 그럴듯한 이론을 부칠수 있으나, 이것은 인의(人意)와 악마와 오묘한 유혹에 속히우는 것이다. 국가 의식(儀式)이라고 하고 나오는 모든 죄를 용납하는 시초가 된다.그런고로 아예 처음부터 금을 그어 놓고 건국 시초부터 구별을 보일 필요가 있다. 나라 망하는 죄악의 길을 또한 가르쳐 주자
기독자 여러분! 만일 우리가 성전 바같이라고 국기에 절해도 좋다면, 다음에는 성전 안에 또다시 일본 악정때와 같이 강단 뒤에 붙여 놓고 예배의 대상이 되는 때는 어떻게 할까,성전 밖에서 경배를 하면서 성전 안에서 못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되어지면 과거 신사 참배 때에 짓던 죄와 무엇이 다르며 과거를 회개했다는 뜻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되어지면 일정때에 하던 악법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러니 이러한 망동(妄動)은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의 화상이나 베드로의 초상을 성전 안에 걸어 놓고 경배하는
로마교 이단(異端)과 다를 것이 무엇이며, 또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와 국조에서 드리는 단군제를 무엇이라 막겠는가. 이래지면 나라는 또 망하게 되고 기독자에 대한 박해는 배전 이상일 것이다.
이제는 이론은 고만두고 성경 말씀을 표준으로 하고 생각해보자. 과거에 범죄하고도 사람들의 구구한 이론이나 인간적 지식으로 해서 실패하였던 일본 정책으로 처음 신사 참배 우리 조선 교회에 문제가 들어왔을때다 정신 차려 반대하지 못한 까닭에 실패하였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 할 때에 과거를 거울 삼아 철저하게 회개한 표로 힘써 싸와야 하겠다. 베드로 선생도 다윗 임금도 바울 선생도 회개에 철저 했던 것을 볼때에 우리들도 회개에 칠저 해 져야 하겠고 회개에 철저해 지면 앞으로 강하게 범죄하지 않도록 배워야 한다.
(사형수의 이야기)
6, 참다운 애국자가 되자 (롬 1:18~32, 롬(9:I~3)
우리나라의 흥망의 길을 잘 가르쳐 주자, 흥망의 길을 잘가르쳐 주는 종교가 참 기독교다. 특히 목사님의 책임 장로님의 책임은 지도자의 입장으로서 지중함을 자각해야 한다.
옛날의 선지자를 보라 모세도 예레미야도 바울도 다 참 애국자들이었다. 망국 일본에도 진정한 기독자가 있었다면 우상을 박별해서 저같은 참혹한 지경에는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선지자와 가마귀 신세 이야기) 내가 당한 박해의 고생은 과거 문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 더 크다. 그래서 우리는 범죄 방지선(防止線)을 그어 놓자 ①국가 의식이라고 해서 다 할것 아니라②지방의 도덕이라든지 풍속이라고 해서 다 따를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도덕 풍속도 국법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그 지방 풍속 그 국가의 의식이라고 해서 다 따를 바에야 무슨 까닭으로 우리가 박해를 받겠는가,기독교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 들어갈때 마다 박해를 받은 것이 이 까닭이다, 범죄할 소질을 가지고 되어진 국법이나 풍속에 어찌 순종해야 하겠는가, 영국 같은 나라에도 초대교회 시대에는 30여년간 자녀 교육까지도 못시켰다 하며,일본에도 처음 로마교가 들어 갔을 때는 40만명이 학살을 당했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교인은 건국초에 심각한 각오를 가지고 올바른 국가가 세워 지도록 힘쓰고 심지어 박해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7. 지도자여 속지 말라
우리는 국기 경배 충령묵도에 유인 당하지 말자 아직도 과거 일본 우상의 술, 음녀의 독초에 취한 것이 깨이지 않은듯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다.
아직 지금도 각각 신자의 양심에 맡기자고 하는이가 있으니 참 가탄(可歎)할 일이다. ①양심이라고 하나 불의한 양심 미각(味覺)한 양심 혼미한 양심이 어찌 옳게 깨달겠는가 ②다 각기 자기 양심에 맡긴다면 지도자의 필요가 무엇이며 책임은 무엇인가 ③성경 지식이 부족하다고 진리 분별력이 부족한 어린 신자들에게는 가르쳐야 하지않겠는가 과거에 실패한 신자들이 지도자 원망하는 것 많이 보았다. ④과거에 조선 교회를 망친자가 누구냐 총회 노회를 지도하던 목사장로들이 아니었드냐? 이 책임 벗을 수 없다 ⑤또 다시 망칠 소리 말라, 국가 흥망의 길을 잘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어찌 무책임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제2계명에 크게 주의하면서 이를 밝혀야 한다. 제2계명중에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한 말씀대로 우리는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어서는 안된다. 섬기기 위해서 또는 영리적으로나 이왕부터 있든것이나를 물론하고 만들어서는 안된다. 우리 신교에서는 예수의 사진까지도 이를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서는 안된다. 또 '거기 절하지 말며'했다. 예(禮)와 절은 다르다. 예의를 표시하는 것과 절 하는 것은 다르나 특히 상대가 우상일 경우에는 절이란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할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만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에게만 절할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도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이적을 행한 다음에 그들이 자기들을 신으로 섬기려고 할때에 옷을 벗고 반대했던 것이다. 또 '섬기지 말라'우상이면 바로 물질인데 피조물인 우상이 무슨 화복을 줄 수 있기에 섬기겠는가. 우리 기독교가 다른 점이 이것이다. 우상이 있는 우상종교가 무슨 우상을 구별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신의 전이요 예수의 생명을 가진 기독자가 어찌 세상 사람들과 같이 할 것이며, 마귀의 아들로 우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죄인들처럼 우상에게 절 할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기독자라는 것은 외부나 육체만 보지않고 중생한 영적 인간이다. 그런고로 우상에게 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론은 고만두자. 마
귀의 지혜는 묘해서 들으면 근사해서 속기 쉽다. 마귀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 다음가는 것이기 때문에 속기 쉽다. 아담 해와가 마귀에게 속듯이 속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실패란 것은 대개가 이론적으로 따지다가 속아서 되어진 실패인것이다. 국민 의식이니 국민 도덕이니 그래서 종교가 아니니 하는 따위가 그렇게 만들었다. (에덴 타락후 인지(人智) 신지(神智) 3종으로 분리된 이야기)우리는 다만 성경의 진리와 교회 역사상에 나타난 과거 거울과, 우상 국가가 멸망된 예를 찾아보면 명약 관화(明若觀火)한 것이다.
8.한가지 죄는 여러가지 죄를 낳는다(롬 1장).
기독자와 이방인이 똑 같은 죄를 짓지 않았는가. 신자 참배로부터 동방 요배 국기 경배 부모 제사까지 꼭 우상 종교인처럼 - 다신교인 범신론자 혹은 무신론자 처럼 우상숭배 하나 때놓지 않고 다 범했으니 무엇이 기독자라고 다른 점이 있었겠는가, 공범죄 동참죄를 예사로 지은 것이 아닌가,따라서 도덕적인 죄도 이루 말 할수 없이 범했다. 도덕적으로도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조금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이다. 술 마시기, 담배 피우기, 이방 혼인, 거짓말, 사기까지도 불신자 지지않게 하고 있지 않은가, 도저히 기독자다운 경건을 또한 찾아 볼 수 없다. 심지어 목사 장로 조사까지도 이 모양 같은 이가 있으니 다른 보통 신자의 행실이란 일러 무엇하겠는가, 이 범죄로해서 기독교 전체가 더렵혀지고, 하나님을 욕되게하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것이 아닌가, 어찌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겠는가, 저들의 마지막은 패망이라고 하신대로 될 것을 어떻게 면하겠는가,그러니까 소위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도 구실뿐이다. 우상
숭배자들 보다도 더 허무한 짓들을 한다. 그러니 제4계명의 안식일을 범하여 예배드리는 날도 잃어버리고, 주일 날이라고 평일과 다른것이 없게 되고, 성전, 강단에다가 국기를 붙여 놓고 예배의 대상을 삼고, 성전에 들어 오면 먼저 동방을 향하여 경배하고나서 부스러기 찌꺼기 예배를 드리게 된것이 아닌가, 옛날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 교인에게 화와 저주로 책망하실때에 '경건한 모양은 있으나 경건한 능이 없다'고 하셨는데 오늘날의 신자에게서는 그 경건한 능이 없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그 경건한 모양까지도 없으니 가탄(可嘆)할 일이 아닌가
예배당에 올때에는 신자같고 밖에 나가면 불신자와 동류요, 기도 할 때에는 하나님 아들 같은데 머리를 들면 마귀의 자식과 다른 것이 없다. 찬송을 부를 때는 신자같은데 찬송을 부르던 그 입에서 욕설도 나오고 거것말도 나오고 유행가도 나오는 별의 별 소리가 같은 입에서 나오니 어떻게 구별이 되겠는가, 한 구명에서 달고 쓴 물이 어째 나올수 있으며, 무화과 나무에서 엉컹퀴와 찌르는 가시가 맺겠는가, '내가 올때에 믿는 것을 보겠느냐'하시더니 과연 그렇게 될 것같다. 인간의 죄악은 심판 주님을 독촉하는 것 같이 사망과
음부의 내음새가 지상에 가득하니, 어찌 기독자의 도덕적 부패의 책임을 면 할 수 있으랴, 주님의 이름으로 사귀를 내어 쫓았고, 선지자 노릇을 했으며,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드렸고 설교도 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것이 심판대 앞에 무슨 효과가 있으랴! 보라 과거에 제1, 제2계명 범하더니 이같이 모든 죄를 산출하게 되었다.
9. 진리의 절도(節度)를 당하지 말라
옛날 예루살렘 거룩한 전이 불결하게 된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지 말라'하셨다더니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기와 절도를 당하고 있는것 같다. 일제 때에는 부득이해서 억지로 강제로 시험을 당한것 같더니 오늘날에도 모든 신자들이 절도를 당하고 사기를 당하는것 같다. 남을 속이고 자기가 스스로 속아서 결국 마귀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는것 같다. 인간들의 교묘한 이론에 속고 있는것 같다. 마귀에게와 사람들에게 진리와 생명-과 신앙을 절도 당하고 사기 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과거에 속은 것을 알고 성경에 큰 차이카 있는것을 알면서도 이를 분간하지 못하고 불나비 처림 불속으로 뛰어 드는것 같다. 이것은 분명히 과거 우상 독주에게 깨지 못한 증거이다, 번연히 당해 보아서 상식적으로 능히 판단 할 수 있는 일인데 깨달지 못한다. 들려주고 가르쳐 주어도 깨다지 못하고 있는 혼수상태야 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음녀의 악마는 참으로 교묘한 악마 였던듯 싶다. 불신 사회도 보니 그 정신 그생각이 여전히 일본식이요 교회내도 보니 꼭 그때 형식을 형식만 바꿔놓고 이름만 변한것 뿐이지 똑같다. 국기 경배가 그렇고 충령 묵도가 그렇다.
10. 성도는 성별된 생활을 하자
(요 15:18~21, 17'14~16)
자 끝으로 부탁 하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는 문제이다. 이제부터는 진정으로 회개하고(대세를 따르는 것 말고)정신을 차려서 깨여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처럼 참기독자로 살아보자, 왜 그렇게 불신자의 흉내를 내려고 하는가. 왜 이방 나라의 유전을 받고 싶어하는가, 불신자의 구미를 못 마추어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신앙으로 해서 조롱을 받고 핍박 당할 것을 무서워 말라, 기독자로서 참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핍박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개인에게서 핍박, 가정의 핍박, 가물적으로도 핍박, 국가적으로도 박해를 당하는 것은, 의례히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오늘 날도 변함이 없는 일이다.
자! 이제는 옛 성도들의 반열에 같이 서서 선을 그어놓고 살아 보자 말에도 행실에도, 의식에도, 도덕에도, 국법에도 태도를 선명히 하자. 옛 성도들은 믿고 난 후에는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1)이름도 고쳤다. 게바가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2)윤기(倫氣)도 변했다. 육체나 혈통을 찾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형제 찾기를 좋아했다.
(3)직업도 변했다. 어부가 그 직업을 고쳐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고, 학자가 장막 짓는 이가 되었다.
(4)고향도 달라졌다 벧세다가 고향이더니 천국이 고향이되고, 길리기아 다소가 고향이더니 하늘 나라가 고향이 되었다.
(5)개심(改心)했다. 우뢰(雨雷)의 아들이 사랑의 아들이되고, 돈을 사랑하던이가 돈을 버리게 되고, 포악하던 박해자가 온유하고 겸손한 핍박 당하는자가 되었다.
(6)개종(改宗)했다. 유대교의 철저한 율법 주의자가 예수의 제자로, 세례 요한의 제자가 예수의 제자로 옮겼다.
그런데 우리들은 무엇무엇이 얼마나 변하고 달라졌는가.신자가 되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된지 오래지만 아직도 별로 변함 없는것이 아닐까. 우리가 중생된 후에는 참으로 변화가 있어서 성별된 생활을 해야된다. 우리 기독자는 땅위에 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늘에 올라 갈 인자(人子)이다. 성신의 역사로 신자가:된 우리는 성신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과 부합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과 짝하지 말고 성별된 생활을 하자면 때로는 고독을 느낄때 있을 것이나 기독교는 원래 고독의 종교이다. 세상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은밀한 종교이다. 기도도 은밀한 중에서, 구제도 은밀한 중에서, 선행도 은밀한 중에서 행하여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이 알것이 무엇인가. 또 생각해 보자. 동네 동네마다 풍속이 다르다. 나라 나라마다 국법이 다르다. 하물며 세법(世法)과 천법(天法)이 같겠으며 인법(人法)과 신법(神法)이 같겠는가! 이제부터는 인의(人意)에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세법과의 충돌을 겁내지 말자 요한 15:18~20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에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터이라'하셨다. 과연 기름이 물과 합쳐지고 빛과 어두움이 한데 있을 수 있으랴.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합해 지겠는가. 이처럼 기독자는 세상과 타협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중생활을 말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두나라에 살 수 없듯이 이중생활이 하나님 앞에 통과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핍박에는 두가지가 있다.
①범죄하고 악을 행함으로 오는 핍박이 있는데 이는 나와 남과 나라와 교회를 망치는 결과 가져온다.
②주 위해서 의를 위해서 받는 핍박이 있는데 이것은 신자에게 당연히 있을 일이 아닌가, 이것은 교회 왕성의 비료가 되는 것이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가 된다'는 것은 유명한 말이다.
자! 기독자들아 참 애국자가 되는 길은 참 기독자가 되는데 잇는 줄 알고, 진리 위해서 불의와 싸우고 주를 위하여 세상과 싸워 주 앞에 죄를 다 쏟아 바치기까지 하자!
그래서 과거에 취했던 모든 음탕한 독주에서 깨어나 성신충만에 취해서 우상숭배를 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