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2 15:46
회개3-불신,땅의 소망,현실관
본문 : 벧전1:3-7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오다가 '여기 앉아볼까 저기 갈까?' 하는 그것이 사소한 것 같애도 그게 양심을 죽이고 살리는 것입니다. '조리 가 볼까, 주최측을 봐서는 저 앞에 가서 앉는 게 옳은데 저 앞에를 가 볼까 여기 앉아볼까?' 할 때에 그때에 그 사소한 것인데 '내가 온 순위대로 앉아야지. 저 앞으로 가는 것이 좀 내게는 불리하지마는 그래 가야 되겠다' 하고서 가서 앉으면 그것이 양심을 살리는 것입니다. 양심은 사소한 데서 살아나지 그 뚜렷한 데서 그렇게 살아나는 것 아닙니다. 저 뒤에 오는 사람들은 다 줄을 같이 잡아서 저리 앉도록 하십시오. 실은 저만치 앉은 저 뒤에 먼저 나간 그 사람들은 다 마음이 좀 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믿음을 먼저 주십니다. 마음에 믿음은 하나님이 성경에 나타내신 대로 아는 것이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 아는 것, 그 다음에는 그것을 소망하는 것, 또 소망하고 난 다음에는 '내가 요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실행하겠다, 요대로 살 겠다' 하는 실행이 자기 속에서 작정되는 것, 그러고 난 다음에는 '내가 이렇게 실행할라고 하면은 여러가지 굴곡과 애로와 마찰들이 있겠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계속하겠다' 하는 인내가 자기 속에서 이루어 집니다.
마음의 믿음의 요소, 지식 신앙, 소망 신앙, 실행 신앙, 인내 신앙 이 신앙 이 네 가지가 자기 마음 가운데 이루어지면 그 다음에 육체의 믿음 속에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시험, 참으로 네가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네가 그렇게 알고 있나? 참으로 그걸 바라보나? 네가 실행할 그런 욕망과 각오가 있나? 네가 또 계속할 그런 것이 네 마음 가운데에 몇십 번이든지 다시 재습 재습 또 '내가 요런 일이 있으면 내가 실행 못 하겠다' 해서 미리 미리 몇십 번이든지 연습을 해 가지고 그렇게 인내가 네 마음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졌으면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에 믿음이 생겨졌나 안 생겨졌나, 가졌나 안 가졌나 하는 젓을 시험하시는 현실을 주십니다.
현실을 줄 때에는 그 마음 속에 이 믿음의 요소가 생겨졌나 안 생 겨졌나, 공연히 네가 주관으로만 그렇게 말하고 있고 거짓부리로 껍데기뿐이 아니냐? 그러기에 시험하는 믿음이 오고, 그러고 난 다음 에는 연단, 믿음을 연단하는 연단의 믿음이 옵니다.
자기가 참 하나님을 지존자로, 자존자로, 전능자로, 전지자로, 주권 자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대속하신 주님으로 이렇게 자기가 정말로 알고 있는지, 인정하고 있는지, 믿고 있는지, 껍데기뿐인지, 참으로 바 라보는지 하는 그 실상을 주님은 알고 계시지마는 자기도 잘못 알기 쉽고 또 다른 사람도 내게 대해서 잘못 알고 과대평가도 하고 과소 평가도 하기가 쉬우니 이것을 가르쳐 정확히 해 주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현실에서 '닥쳐보니 참 나는 믿음이 없었구나. 참 믿음의 능력의 보호는 크구나.' 이것을 자기가 체험하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래서 자타가 알게 하는 요 시험이요 그 시험을 쳐서 합격되면은 그 다음에 대우가 달라지는 짓처럼 자기가 그 현실에서 시험하는 그 현실을 믿음으로 승리로 잘 통과하면 그 다음에는 그 전과 훨씬 다른 그런 자기에게 체험파 경험으로서 참 연단받은 정금같은 그런 신앙이 되어집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또 연단하는 또 시험을 주십니다. 현실을 줘 가지고 자기에게 믿기는 믿고 바라보기는 바라보고 의지 하기는 의지했지마는 잡것 가지고, 자기 주관의 힘이나 세상에 다른 무슨 힘이나 이런 잡된 걸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했던 그런 인본적인 것 순전히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온 게 아니고 인본적인 것 그런 것을 섞여 있는 것을 거기서 다, 그것 가지고는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전부 제거되도록 하는 그런 어려운 시련의, 연단히 그 현실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그 현실을 통해서 자기가 성장되도록 하는, 그 연성돼서 성장케 하는 그런 현실을 주십니다.
그런데 여게 우리가 신앙 생활 하는 데는 첫째로 소망을 굳게 잡아야 됩니다.
우리는 새생명을 받았고 썩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안하고 낡아지지도 안하는 전부 완전의 것 영원의 것, 불변의 것 이런 것을 이미 우리에게 종자적으로 주셨고 이것을 성장시켜서 영에 온 것이 심신까지 마음에 오고 몸에까지 와서, 심신까지 와서 이것이 온전함을 이루도록 주님이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난 소망, 살아난 소망 이 세상에 있는 죽은 소망 아니고, 첫째 아담으로서는 죽은 소망을 우리가 가지고 그 소망을 위해서 날마다 소망을 달성한다고 노력하고 달성하면 성공했다 하지마는 내나 죽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 이랬는데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산 소망, 영원 소망 이것을 우리가 가졌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은 자기 주관을 부인하고 계시 말씀인 그 말씀을 확신하고 또 영감을 화신하는, 자기의 주관을 객관으로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주관을 객관이신 하나님에게 복 종하는 이것으로 바꾸는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쑤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난 소망이 있습니다. 살아난 소망. 살아난 소망 이것을 자꾸 성경을 읽으면서 이 소망을 생각하고, 또 눈 감고 묵상하면서 이 소망을 생각해서 차차 차차 이 세상에 속한 소망은 자기에게 죽었다는 인식이 차차 차차 확고해져서 그것은 분명히 죽은 것인 것을 자기가 그 지식이 확고해지는 그 반면에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이 산 소망은 확고하다는 것이 자기에게 자꾸 인식이 확고해집니다.
이래서 이 소망을 바꾸는 일을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회개하지 안하면 안 되는 이런 아주 위급한 단계에 있는데 우리가 무엇을 회개할 건가? 회개도 자기가 아는 것만치 회개하지 모르는 것은 회개를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유무식에 대해서 상관이 없는 길이 하나 있는 것은 회개라는 것은 한꺼번에 회개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회개는 꼭, 말하자면 문이라고 말해 놨어, 문. 문은 한 문이 닫겨 있으면 그 문을 열고 들 어가야 그 문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또 문을 열어야 또 들어가는 것처럼 한 회개 자기가, 사람마다 각각 달라서 이 사람에게는 네가 이 죄부터 회개해라. 그 죄로 인식하고 있는 그 죄를 회개하면 순서적으로 주님이 그 다음 죄를 회개하도록 그 다음 죄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회개해야 될 것을 그것을 깨닫고도 거게 무슨 위 협에 눌리든지 그 어떤 욕심에 끌렸든지 해 가지고 그걸 회개하지 안하면 그 다음은 보여주지를 아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들을 열고 들어가라 문들을 열고 들어가라" 하는 그말은 하나씩 둘씩 회개를 해야 그 다음이 열려지고 순서가 알아지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식해도 자기에게 닥쳐진 그 죄를 그것을 자기가 죄라고 느껴지는, 마음에 자책할 게 없도록 그것을 회개하면은 그 다음 또 회개할 그 죄를 보여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거는 개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고 전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회개할 게 뭐인가? 우리와 우리 남한에 있는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진노거리가 되어진 회개 중에 하나를 말합니다. 그거는 뭐인 가? 소망을 바꾸지 안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까지 하시고 또 부활까지 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전부 죽은 소망을, 암만 제가 소망하고 그 소망을 다 소원 성취를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죽음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죽고 썩고 망하고 심판받아 벌받을 것뿐이지 아무것도 생명에 속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 암아 우리에게 산 소망을 줬습니다.
이러니까 이 산 소망을 주셨으니 소망을 바꾸어야 될 터인데 소망을 바꾸지 못하고 예수 믿는다는 이름만 가지고 있지 소망은 여전히 땅에 있습니다.
그 전부 믿는 사람들이 분주한 것, 욕하는 것, 시기하는 것, 쟁투하는 것, 시비하는 것, 복음 운동이라고 이래 떠들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 그 모든 것을 분석해 볼 때에 그 소망이 전부 땅에 소망이라.
땅의 소망을 인해 하는 것은 주의 이름을 팔아먹는 것이요 이용해 먹는 것이요 주의 이름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자기가 이용하는 것이지 주님의 노를 격발시키는 것이지 주님의 노를 푸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소망을 우리가 바꾸지 못한 요 죄를 자기가 다른 일을 버리고라도 지금 이것을 회개를 해서 바로 잡아야 됩니다. 소망이 바꿔지지 안했고 안 믿을 때와 꼭 같은 땅의 소망을 가지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 소망은 자기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 소망을 향하여 인간들은 다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소망을 바꾸지 안한 사람은 자기 향방을 바꾸지 안한 사람이요 목표를 바꾸지 안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심신의 노력은 그를 향하여서 가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산 소망으로 소망을 바꿀 것. 그 다음에 둘째는 뭐이냐? 모두 다 이런 시험하는 것이오. '네가 참으로 나를 전능자로 믿나 전지자로 믿나? 나를 자존자로 믿나? 내가 창조하는 이 창조주로 믿느냐? 너를 위해서 대속하신 것을 믿느냐?' 그 여러가지 그런 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그것을 시험하기 위한 우리의 모든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자에게는, 여게 그 말씀이 있습니다. 5절에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우리에게는 지극히 큰 능력이 와 있는데 그 능력은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신 능력이요, 지금도 창조된 모든 것을 보존하고 있는 능력이요, 또 보존하고 있는 모든 것을 관리하고 계시는 능력입니다. 지극히 큰 능력이오. 이분을 거스려서 이 능력을 거스려서 아무것도 안 돼. 마귀도 이 능력 아래서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와서 있는데 이 능력이 우리에게 활용이 되어 지는 데는 이 능력이 우리에게 이용이 되어지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믿을 때에, 인정하고, 인정을 네가 참으로 하느냐 안 하느냐? 인정하는 그것이 자기의 주관에 나타나고, 자기의 사상에 나타나고, 자기 마음에 나타나고, 자기 감정에 나타나고, 자기의 행동에 나타나는 실상의 믿음, 그 실상의 믿음을 통해서 지극히 큰 능력은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이러니까 한 자리에 같이 있으면서 다 같이 '우리 아버지는 전능자라. 주님은 모든 것을 주권하고 계신다.' 어떤 그 대적의 공산주의의 무슨 강한 세력이 와서 우리를 어떻게 위협하고 우리를 박해하고 할 때에, 그때에 그 세력보다 내 아버지의 세력이 크고, 그 세력보다 내 아버지의 세력이 크고 또 그것이 내 아버지가 지어서 존재하게 된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주권의 그 섭리에 붙들려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 보면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느냐 안 사랑하느냐? 나를 바라보느냐 안 바라 보느냐? 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그것을, 당신의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는 그것을 인정하고 안 하는 데에서 자기 마음은 평안해지고 담대해지고 조심도 있어지고, 자기의 전 마음의 움직임이 그를 어떻게 인정하느냐 하는 그대로 자기 마음의 행동은 이루어집니다. 또 인정함을 따라서 자기의 몸의 행동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지극히 큰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믿느냐 안 믿느냐?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 하는 그 시험 하는 현실을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까 여게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 근심은 왜 나옵니까? 여러가지 어려움을 자기에게 닥치게 되니까 그 어려움으로 인해서 근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근심이 어데서 나왔습니까? 이 근심이 믿음에서 나왔습니까 이 근심이 어데서 나왔습니까? 네, 믿음에서 나온 것 아니고, 믿음으로 인해서 나오기는 나왔지만 믿음에서 나온 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인하다니?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소망을 버렸으면 이런 아무 그런 것은 당하지 안하지요. 이 소망을 가지고 자기가 믿기 때문에, 믿기 때문에 자기 환경에 어려움이 와서 닥치게 되고 어려움이 닥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것은 뭐입니까? 그 속에 믿음으로 인해서 여러가지 근심이 나옵니까 믿지 아니하는 의심으로 말미암아 근심이 나옵니까? 녜 의심이 나오는 것은 불신으로 인해서 의심이 나옵니다. 불신 불신 그놈만 죽여버리면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휘떡 벗어버리면 되는데 그렇게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는 그 입장과 그 처지와 그 인생관과 그 주장을 왜 버리지 못하느냐? 그때 다 이 소망을 버려버리면 아무 그럴 것 없어. '나 예수 안 믿습니다.' 다 집어던져 버리면은 '너는 우리편이니까' 세상이 저희 것이라고 해서 환영하고 기뻐하지마는 믿음을 다 버리지 안하고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입장을 버리지 못합니다.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입장을 버리지 못하는데 그 입장 버리지 못한 그 입장이 참 기쁘고 즐겁고 평안한 시온의 대로이지마는 자기에게 고통이 되어지는 것은 왜 그러냐? 그분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자기가 믿는 그 확신이 없는 그 죄값으로써, 믿지 못하게 하는 그것은 옛사람, 자기 아닌데 믿지 못하게 하는 불신 그것이 들어서 자기를 자꾸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신강을 하다가 그것을 부인해 버려버리고 이제 주님을 믿는 것으로 끝을 맺어서 그 현실을 통과하고 나면 그 다음에 다시는 그 정도의 시험은 와서 시험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통과하고 난 다음에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가지게 된다.
"여러가지 시헙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기뻐하는 것이 자기가 거게서 믿음을 찾아서, 왜 그렇게 여 러가지 근심했는데 그 근심이 기쁨이 되어지느냐? 근심이 기쁨이 되어지는 것은 왜 근심이 되어졌느냐? 근심이 되어지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준 그 산 소망을 집어던져 버리면 아무 근심 안 되겠는데 산 소망을 자기가 잡고 있기 때문에 근심이 돼. 그 현실을 주는 게 근심이 돼. 그 소망만 버리면 세상 사람같이 나가니까 근심될 게 뭐 있습니까? 소망을 놓지 안하고 그 소망을 빼앗기지 안하고 그 소망을 하려고 하니까 여러가지가 마찰이 와서 근심이 되어지는데 근심되어지는 그 것은 뭐이냐? 그 근심되어지는 여러가지 그 상대를 이기지 못할, 이기지 못할 우리가 돼 그런 것도 아니고, 이길 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어 그런 것도 아니고,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있지 안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 말이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나님 말씀을 자꾸 새김질하고 믿지 안하기 때문에 자기가 거게서 하나님의 어떤 존재라는 걸 믿지 안하기 때문에, 제가 보니까 뭐 처녀들 시집 잘 가 가지고 배짱 안 부리는 사람 없습디다. 벌써 자기보다 훨끈 나은 사람과 약혼만 됐다 해도 그만 그 처녀가 활기가 있고 뭐 배짱이 있어. 결혼 떡 했다고 하면은 그게 어떻게 배짱이 있는지? 아무리 또 어린아이들도 자기 동무끼리와 같이 지금 큰 아이하고 싸우다가 큰 아이가 주먹으로 때리고 이러니까 겁이 나서 도망가다 마침 아버지를 만났다 말이오. 아버지를 만나서 아버지 품안에 딱 안기고 나면은 안심이 되니까 이제는 오히려 주먹을 내며 조롱하고 있어. '아나 때려라. 아나 때려라. 때려라.' 이래도 아버지가 있으니까 못 올줄 알기 때문에. 벌써 그것이 자기가 아버지의 능력이 자기를 보호하고 있고 아버지의 능력은 상대보다도 강하다는 것이 인식하는 그 인식에서 필연적으로 오는 그 평안이라 그말이오.
이와같은 주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을 믿는 이 믿음을 인해서 자기 에게 평강이 왔고 평강이 오니까 그 거리낌에 거리낄 것도 없이 주님의 명령대로 그대로 쑥 나가니까 흥해 바다가 갈라졌어. 이래 나가니까 나가보니 아무것도 없어.
그러기 때문에 마귀의 시험은 이 꼭 그림자와 같다 하는 것이라. 이렇게 크게 와 가지고 이런데 그 믿음을 가지고 썩 나가보니 아무것도 없어. 허깨비라 하는 게 있는데 그 앞에 허깨비가 흘킬라고 이러는데 그럴 때 '그게 아무것도 없다.
네 주관에서 생겼고 네 선입적 관념에서 모두 다 생겨진 것이니까 네가 그럴 때에 잡을라 해 봐라. 뭐 있는 줄 아나? 아무것도 없다.' 손양원 목사님이 갇혀 가지고 있을 때에 그날밤에는, 하도 그 간수 들이 다 손 목사님에게 감화를 받아서 '목사님 오늘 저녁에는 지금 계획이 소금물을 가지고 꺼꾸로 달아놓고 코에다가 물을 넣을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뭐 물 한 주전자만 넣으면 다 넣고 그만 그 다음에 안 넣습니다. 저녁에는 아무것도 잡숫지 말고 그러면은 그 물을 다 마셔 버리면은 아무 고통 없이 그냥 지내 나옵니다.' 이걸 말해, 주고. 그 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 손 목사님은 주를 위해서 죽는 것이 얼마나 행복이라는 걸 소원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날 밤에는 그 방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을 '오늘 저녁에는 내가 좀 물을 좀 먹어야 되겠 으니까 물 좀 달라' 하니까, 평소에 자기 먹는 것을 다 나눠 줬었기 때문에 그 모두 은혜를 입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예' 물을 다 줘 물을 실컷 배가 뻥뻥하게 먹었다 말이오. 그거는 이제 그 물 먹으면 주를 위해서 죽을라고.
이래 실컷 먹고 지금 '오늘 저녁에는 이제 나도 주님이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심같이 나도 죽기까지 주님 한번 사랑할 수 있겠다' 하는 이 소망을 가지고 기뻐서 이래, 부르기 때문에 들어가니까, 불러놓고 암말도 안 하고 있어.
가만보니까 저거끼리 모여앉아 가지고 '아무래도 요번 전쟁은 우리가 진다.
우리가 희망이 없다. 이거는 곧 손을 들게 됐다.' 저거끼리 자꾸 이래 쌓고 있고, 있는 걸 몰랐다 그말이오. 그런 소리 실컷 하고 나서 보니까 손 목사님이 옆에 앉았으니 저거가 그래 놓고 그 사람을 어떻게 손 목사님을 형벌할 수 없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부끄러우니까 '오마요오로까, 네가 여기 있나?' 깜짝 놀라 이러면서 '돌아가라.' 그래, 이렇게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자는 다 찾으리라" 하는 이것이 하나님에게 소 망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요 믿음 가지고 세상을 이기도록 하나님이 요렇게 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실은 6 25같은 그런 전쟁이 약한 사람 위해서 학생들 위해서 그런 겄이지 장성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없으면 이 죽음이라는 이 폐물을 지극히 고귀한 것으로 이용할 수가 없어.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떠한 하나님, 십자가 못박혀 죽으신 그 하나님, 우리 주님이 어떠하신 주님인 것을 말로는 하지마는 그와 같은 지존자이심을 전능자이심을 내가 믿지 안하는 그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이래서 자꾸 기도할 때에 묵상하는 것이 그 뭐이냐? 언제 내가 보니까 여게 OOO씨 기도하면서 '주여, 주님의 전능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사옵나이다.' 자꾸 믿을라고 애를 써. 그거 그래 믿는 것, 믿어지는 것, 그러면 믿어지는 것, 주님의 속성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참 불쌍하고 알려 주심을 받은 사람은 믿는 그 믿음에 따라서 자기에게 평강도 오고, 담력도 오고, 기쁨도 오고, 또 용기도 오고, 승리도 하고 자꾸 이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내가 참으로 인정치 않는 것, 믿지 않는 것, 요 죄를 우리가 회개를 제일 먼저 하고, 또 하늘의 소망을 우리가 바꾸어 가지지 못한 요것.도 둘째로 회개를 하고, 모든 시험은 다 우리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자꾸 믿는 사람 되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때 가서 놀래고 고통당하는 한 시간 고통이 지금 회개하는 열 시간 고통 스무 시간 고통보다 더 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지금 다 권해서 새벽기도 다 나와 가지고 믿는 도리를 밝히 깨닫고 그대로 실행해 살면 평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