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1 14:18
현실관,성령을 영접하는 법
본문 : 요한복음 6장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우리를 영원 전 주님의 목적하신 그 안에 있게 하시고 때가 되매 창조하시고 때가 되매 주님의 설정해 놓으신 공로의 은택을 입혀 주사 영감과 진리로 영생하는 생명을 받게 하시고 날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존재들이 다 대기하게 하시고 성령과 진리와 주님의 공로가 하나되어 우리를 주의 작정하신 대로 구속을 이루어 주시는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지극히 크고 영화로운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사오니 지극히 큰 이 소망을 날로 깨닫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는 무한하신 은총이기 때문에 유한한 저희들은 스스로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이 알려 주셔야 알고 성령님이 또 베풀어 주셔야 알고 성령님이 우리를 살려 주시고 움직이셔야 우리에게 영육의 모든 요소들이 때를 따라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이 시간도 천하에 있는 성도들, 날마다 주님의 것 되기를, 주님의 종되기를, 주님의 성전되기를, 주님의 지체되기를, 이리하여 거룩한 제사장으로, 정결한 선지자로, 담대한 왕으로 주의 모든 면의 형상을 온전히 입는 주의 모형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도 저희들에게 좋은 기회를 앞두고 준비의 기간으로 주셨사오니 준비의 때에 다 준비하여 주님에게 받아 모든 피조물이 알 수 있도록 드러나게 하는 때에 드러남을 받는 저희들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여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하는 이 영은 사람의 영을 가리킴이 아니고 성령님 곧 아버지의 영 아들의 영 곧 성령의 영 하나님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내나 이 영이 성부요 성자요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영으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이렇게 그 성호를 성호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서 성호라, 거룩한 이름이라 해서 성호라 합니다. 성호를 우리에게 표시하신 것은 그 역사하시는 역사에 각각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을 맡은 위, 지위, 위마다 다른 것을 나타내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이렇게 표현했으나 성부 성자 성령이 한 영이요 한 하나님이시요 그 본체도 하나요 또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게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성령이라 말인데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영원 전, 목적을 정하신 데서부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 히시고 또 삼일 만에 부활하신 이 부활까지 당신의 목적인 곧 우리를 하나님같이 온전케 모든 면이 온전케 깨끗하게 거룩하게 하시는 이 역사를 내적으로 다 이루셨습니다.
내적으로 다 이루어 놓으시고 이루어 놓으신 이 구원을 이제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죽은 영에게 베풀어서 영을 살리셨습니다. 영을 살리고 난 다음에 영을 살린 자의 그 육을 살리는 역사를 시작해서 죽는 그 시간까지 육을 살리는, 육을 살린다는 것은 곧 심신, 마음과 몸, 심신을 살리는 그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면 이미 베풀어 놓으신 그 구원을 우리 각자들에게 실상으로 그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그 책임을 지신 이가 성령이십니다. 영이신데, 성령 이신데, 그러기 때문에 여게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책임지신 분이라 그런 표현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 '영과 물로 살아났다' 거듭났다 많은 다시 살아났다 말입니다. 또 '영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살아났다' 무엇이 다시 살아났는고 하니 우리의 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의 영은 하나님이 살리 시려고 할 때에 단번에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택한 자면 그 택한 자가 있고 난 다음에 택한 것이 아니고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작정으로 그렇게 되어지고, 택한 자가 되고 택함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이 목적 안에서 때가 되면 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출생하게 됩니다.
그러면 출생을 하는 것이 꼭 같이 출생하는 게 아니라 먼저 출생하는 사람도 있고 뒤에 출생하는 사람도 있는 것과 같이 이미 출생된 사람들이 또 중생, 영이 중생되는 것도 먼저 되는 사람도 있고 뒤에 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여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하는 이 말은 영을 살리는 것도 그러하지마는 여게는 영이 살림을 받은 사람들의 그 남은 육을 살리는 것도 성령이시라 하는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기까지에 우리가 모르는 모든 사망 문제가 해결되고 생명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까지에 완료됐습니다. 다 완료된 그 구속을 이제는 개인 개인에게 실상으로 입히기를 책임지신 분이 영이십니다.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책임을 지시고 살리기를 시작하는데 그 시작하는 것이 먼저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뒤에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하기를 마치 택함을 입었지마는 먼저 나는 사람도 있고 뒤에 나는 사람도 있고 있는 것 같이 그렇게 됩니다.
또 먼저 그 영이 살림을 받아서 그 순서가 각각 다르게 살림을 받은 그 영 살림 받은 사람들의 육이 살림 받는 것도 순서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뱃속에서 살림 받는 사람도 있고, 어릴 때부터 살림 받는 사람도 있고, 나이가 늙어 죽을 때사 그때사 비로소 영이 살림 받는 사람도 있고, 그때사 육이 살림 받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영이 살림 받은 것은 꼭 같습니다. 누구나 꼭 같지마는 육이 살림 받는 것은 이 육은 단일체가 아니고 단일성이 아니고 그것은 모든 종합성입니다.
종합성인데 그것이 원청 밀접하게 단합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로 보지마는 실은 마음도 여러 뭐 수십 수백 세포라 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이 고기덩어리 이것도 수많은 세포로 되어 있다고 그거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다 상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택함은, 하나님의 목적의 택함은 동시에 됐고 또 택함을 받은 것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게 조금 혼돈돼 있습니다. '뭣이 있어야 많이 있어서 택할 게 아니냐?' 그런데 이것은 존재한 것을 택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없는 가운데 당신의 목적에서 그것을 작정하신 이것이 택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택함이 먼저 있고 존재가 그다음에 있습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이 주님의 구속을, 택함을 받은 자들이 출생하는 것도 선후가 있고, 또 출생된 자가 중생하는 것도 선후가 있고, 또 중생된 자의 심신으로 된 이 육이 구속받는 것도 순서가 있습니다.
또 순서만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일찍부터 받기 시작한 사람, 어떤 사람은 늦게사 받기 시작한 사람, 어떤 사람은 늦게 받기 시작해도 일찍 받기 시작한 사람보다도 더 온전을 이루는 사람, 어떤 사람은 일쩍부터 받기 시작해도 아주 뭐 받은 양이 얼마 되지 않는 사람, 또 늙어 죽을 때 그때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받는 것이 각각 하나님이 영원 전 각자에게 예정한 그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예정한 구속이 각각 다릅니다. 마치 우리 사람은 뭐 다 같은 사람이라 이라지마는 그 사람의 용모가 다 각각 다른 것처럼.
우리가 천 명이 모였다고 해 가지고서 자기가 아는 사람을 찾지 못하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아주 뭐, 참 하나님이 그거, 미술 가운데에 아주 그것도 고등 미술인데 조그만한 요거 뭐 한 자 미만의 요런 안면이지마는 거게서 그 모양이 다 각각 다르도록 누구든지 보면은 환하게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다르게 만든 그것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서 무궁세계에 가서 사는 우리의 구속의 그 형상도 각각 다릅니다.
그걸 성경에 말하기를 '한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는 것과 같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지마는 그 구원의 종류도 다르고 또 그 맡은 직분도 다르고 각각 모양도 다르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한 구속을 입어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몸인 이 성도들의 구원을 이루어 가지마는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빌립보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달을질을 하는데 주께서 내게 주실라고 들고 있는 그 상을 받기까지 내가 달린다. 내 모가치, 구원에 내 몫에 태인 내 몫의 구원을 내가 온전히 이룰라고 지금 앞만 보고 달아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구원이 이렇게 돼 있기 때문에 각각 다른 구원을 이룰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구원을 이루시는 방편도 조금씩 다릅니다.
물론 그 살리는 데에는 성령인 영과, 성령님과 또 진리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이 셋이 합해서 하나가 돼 가지고 모든 존재, 하나님 외에 모든 피조물의 존재된 이 모든 것을 이 구원을 위해서 활용을 하도록, 활용을 하는데 자기에게 해당된 것만 활용하지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 거는 자기가 구경도 못 합니다.
그것을 다 우리가 활용을 하고 또 하나님께서 각각 우리 각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예정해 놓으신 그 예정해 놓은 순서대로 이루어 가지고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해서 우리의 몸의 구속이 끝이 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몸의 구속을 잘 이룬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약간 이룬 사람도 있고 사람마다 각각 달라서 구원 이룬 양도 다르고 종류도 다르고, 광채도 다르고, 또 모양도 다르고, 이래서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는 것처럼 이 구원은 다 그리스도의 몸이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는데 다 몸에 속했지마는 귀도 있고,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어서 그 각각 모양도 다르고, 직분도 다르고 힘도 다르고, 그러나 그 생명은 한 생명을 가지고 살고, 또 힘도 한 생명에서 나오는 힘, 또 거게서 지혜도 한 생명에서 나오는 지혜,이래 가지고 한 몸이 이루어 서서 나가는 것처럼 이렇게 우리 구원도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우리가 당하는 그 현실이 각각 다릅니다. 현실이 다른 것은 자기가 무슨 안 믿는 사람같이 '팔자기 나빠서 그런 현실이 당한다 팔자가 좋아서 그런 현실 당한다' 그렇게 안 믿는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마는, 우리의 현실은 전지 전능하신 사랑의 주님이 곧 내게 예정된, 내게 하나님이 주시기로 정하신 그 구원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내 구원이 이루어지는 데는, 내게 하나님이 작정하신 그 구원이 이루어지는 데는 그 구원을 이루기에 가장 좋은 그런 현실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 구원을 이루는 데에 참 쓸모 있는 현실이어야 되지 아무리 좋은 현실이라 해도 내 구원을 이루는 데는 소용이 없을 수 있고 또 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이 각각 다른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각각 다르고 이러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는 방편도 각각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다 같이 일생 동안을 살아 가지고 육의 구속을 이루어 가지고 가지마는 어떤 사람은 이 면을 경험해서 이 면이 능하고 어떤 사람은 저런 면을 경험해서 저 면이 능하고, 그것이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 자기가 자기로서 살 그 기능을 마련하는 것이요 자기의 업무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연성을 이루는 것, 연습해 가지고 연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데 영원 전후터 작정돼 있는 이 비밀은 깨닫지 못하고 껍데기만 생각하고 그저 자기 현실을 불만하고 누구의 현실을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것은 이거는 마귀의 꼬임을 받아 가지고 순전히 삐뚤어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눈에 보는 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도 물에 가 살놈은 물에 가서 살아야 되지, 물에 가야 그게 자라지 공중에 아주 공기 좋고 서늘하고 통풍이 좋은 그런 데 가서 자라는 게 좋겠다 해서 종자가 다른 건데 그만 거기 가 놓으면 그거는 말라 죽어버린다 말이오. 그러니까 물 속에 자랄 것은 물 속에서 자라야 되고, 공간에서 자라야 될 것은 또 공간에서 자라야 되고, 땅 속에서 자라야 될 것은 땅 속에서 안 보이도록 자라야 되지 보이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종류대로 각각 다른 것처럼 우리의 구원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구원의 종류가 다르다고 딴게 아니라. 마치 손가락 끝에 가시를 하나 딱 끼워 놓으면 그 가시 끼인 것, 손가락 끝에 가시 끼였으니까 뭐 발은 있다가 '야, 너거 동무 손가락 끝에 가시가 찔렸다. 아프다 한다.' 그렇게 기별하지 안해도, 기별 안 해도 그만 가시가 꼭 찔리면 그만 발가락 끄트머리가 아파서 그것도 가시는 안 들었는데 달달달달 떱니다. 또 그것만 떠는 게 아니라 그만 눈도 그만 아파서 떱니다. 귀도 아파서 떠요. 또 속에 있는 간도 또 아파서 떱니다. 그러면 아픈 것이 꼭 같다 그거요. 손가락 끝에 가시 찔려 아프면 그 아픈 것이, 아픈 것의 아픔이 전신이 아픈 감을 느끼는 것이 꼭 같습니다.
고통의 감을 같이 느낍니다.
또 그러고 그이에게 무슨 사람마다 각각 미가 다른데 '그 사람은 아주 눈썹이 잘났다' 눈썹이 잘났는데 눈썹 잘났거나 말았거나 그게 무슨 발에 소용이 없지마는 눈썹 하나 가지고서 그 발도 대우를 받습니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지금 결혼을 할라고 면접을 하는데 그 사람이 발은 잘 못생겼다 그말이오. 이러나마 눈썹이 하나 잘 생긴 것 보고. 그만 눈썹 때문에 그만 그 총각이 좋아서 '나는 이것 좀 결혼하겠다' 암만 그 처녀가 안 할라 해도 달라붙어 가지고 죽겠다고 달라붙어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말이오.
그거 뭐이냐 하면 그 사람은 눈썹의 매력을 인해서 그 사람 좋아 하는데 눈썹만 뽑아 가지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눈썹이 좋으면은 눈썹이 좋으면은 또 이마도 좋고, 뭐 뒷꼭대기도 좋고, 또 몸뚱이가 뚱뚱한 것도 좋고, 또 가늘어도 좋고, 그래 한 군데 좋아놓으면 그 좋은 영광을 온 전신 전체가 다 받습니다. 고통도 전신이 다 받고, 또 영광도 전신이 다 받고, 대우도 전신이 다 받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이 각각 다르나 이 구원이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이루어지는 이 구원이기 때문에 내 하나가 바로 되면은 나 하나의 그 혜택을 누가 보느냐? 역사에, 아담 하와가 첫 교인인데 아담 하와 아벨 또 그 시대 있는 사람, 이 시대 있는 사람, 예수님 재림때 까지에 역사에 와 가지고서 이 역사 세계에 와서 구원을 이룬 그 모든 사람들은 나 하나의 혜택을 다 받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하나 바로 되면은 잘 되면은 나 하나의 혜택을 다 받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 잘못됐으면 내 잘못된 그 피해를 전 기독자가 다 받습니다. 뭐 억억만도 넘은 그 기독자가 다 받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희로애락의 모든 영광과 존귀의 그 모든 것이 다 하나입니다. 한 생명으로 한 힘으로 다 하나로 역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전지하신 지혜로 예정 하신 그대로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구원을 잘 이루어 가시는데 그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은 다 현실을 가지고 현실에서 모든 면을 구비 시켜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같은 현실을 원한다는 것은 참 그것은 참 천부당 만부당한 생각입니다. 또 현실에 대해서 '좋은 현실이라 나쁜 현실이라, 아무것이 현실은 좋고 내 현실은 안됐다.' 제게 대해서 좋은 현실 나쁜 현실이라고 제가 스스로 평가한다는 것도 그것도 참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 수많은 존재를 다 하나로 해 가지고서 전지하신 주님이 당신에게는 몸과 같이, 머리에 속한 몸과 같이 그렇게 필요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나 하나로 인해서 전기독자들이 다 혜택을 입을 수 있고, 전기독자들의 좋은 것도 내가 다 입을 수 있고, 전기독자들의 나쁜 것도 다 입을 수 있는,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그 구원을 이루어 가도록 우리가 애를 쓰고, '주님의 손에 들린 바 상, 주님이 내 몫으로 정해 놓으신 그 구원이 완성되기를 위해서 나는 달음질친다.' 하는 이대로에 되지 자기 현실에 대한 이 비밀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주관대로 자기 조부라운 생각대로 현실이 좋다 나쁘다 이렇게 평가한다는 것은 이것은 너무도 외식이요 너무도 무식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데서든지 우리에게 필요 없는 현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존재들이 다 대기해 있고, 또 그 모든 존재들이 존재하게 된 그 목적이 곧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의 필요를 위해서 모든 존재들이 대기해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게서 자기에게 좋지 못한 그런 현실은 없다는 이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자기에게 필요 없는 현실은 없다. 또 자기에게 닥친 그 현실은 천하 사람들이 다 논평하기를 '참 그 불행한 현실 만났다' 하나 자기에게는 그 현실 없으면 자기 몫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 현실이 자기에게 닥쳐지는 것이니까 자기는 거게서 불만 불평이라 하는 그런 그거는 망상이고 그런 거는 다 말고 자기 현실에서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입기 위해서 그 현실에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 현실에서 구원을 입도록 노력하는 것은 그때 그때 주님이 간단 명료하게 우리에게 해 놓은 하나님의 말씀 육십육 권의 이 문서로 기록해 놓은 간단하고 명료한 요 방편이 우리에게 기록되어서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가 받았고 이 신구약 성경에 말씀의 그 윤곽 안에, 신구약 성경 말씀 이 윤곽 안에, 윤곽이라면은 예를 들면 집을 지으면 저 기둥이 있고 들보가 있고 도리가 있고 한 저런 것이 윤곽입니다. 윤곽이고, 그 안에는 뭐 창문도 있고 모든 것 다 같은 것 작은 것 있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은 우리의 구원에 윤곽으로 주신 것이고 이 윤곽 안에 모든 세부적인 것 또 모든 다양의 구비적인 것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면서, 이 성경 말씀 안에 성령님이 계시면서 성령님이 그 일을 다 책임맡고서, 둔한 우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보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되어 있는 주관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문서계시로 주셔 가지고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하는 이래 놓으니까 그 문서로 알 수 있다 말이오.
우리가 알 수 있는 그 문서로 가지고서 우리 현실에서 우리 구원에는 내 구원을 위해서 주신 현실이니까 이 현실에는 '이 문서대로 하면은 어떻게 하면 되느냐?' 우리가 찾을 것은 문서대로 찾는 그 정도입니다.
문서대로 찾는 그 찾음이 내 현실에서 윤곽적으로 내 구원을 이루는 그 방편을 내가 윤곽적으로 내가 찾은 것이오. 윤곽적으로 찾을 때에 자기가 그 윤곽적으로 찾은 그것이 목적이라고 하면은 그것은 외식이기 때문에 헛일인 것입니다.
윤곽적으로 이 말씀을 찾는 것은 이 말씀은 뭐이냐? 이 말씀은 그 안에 모든 것을 세밀히 다 내게 대한 것을 가지고 계시고 또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으로 계시고 생명으로 계시는 성령님을 만나서, 윤곽된 문서계시로써 생명을 만날라고, 생명을 만날라고 또 생명에서 성령님을 만날라고 그런 소망을 가지고 이렇게 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문서계시, 기껏 문서계시를 자기가 지켜서 그대로 행하고, 그 문서계시는 한 중매쟁이입니다. 윤곽이나 윤곽 속에 중매쟁이라. 문서계시 안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 안에 또 누가 계시는고 하니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역사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이 또 외부로 나왔을 때에 진리라고 말하고, 또 진리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이렇게 접할 수 있도록 나타난 것을 가리켜서 말이라, 말씀이라, 문서계시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현실에서 자기 몫에 태인 자기 몫에 태인 자기 구원을 이루는 데에 가장 좋은 현실이기 때문에 그 현실과 다른 사람의 현실을 바꾼다는 것은, 바꿀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바꾼다는 그것은 자기 구원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탐한다는 것인데 그게 절대자로서 정해 놓은 것을 변동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암만 자기가 취할라고 해도 안 됩니다.
자기 구원을 자기가 이루어야 되지.
그러니까 자기 현실을 제일 자기 구원 이루는 데에 제일 가장 좋은 그 현실을 주님께서 큰 힘을 들여서, 거에는 우리가 보기에는 뭐 현실을 닥치니까 그 현실은 그만 단순히 그렇게 가치가 적은 것으로 보지마는 우리 현실을 하나님이 만드시는 데는 거게는 사람도 들었고, 또 공기도 거게 적합한 공기도 들었고, 또 통풍도 들었고, 또 모든 주변에 있는 그런 물질도 들었고, 또 공간도 들었고 다 들었다 그겁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는데 그게 쉽게 저절로 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힘을 들여서 우리 현실을 만들었습니다.
산다싱전을 보면 산다성이 신앙 생활 하면서 제일 어려움 당한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그 서장에 가 가지고 전도할 때에 서장에서 전도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고문과 고형을 줘서 쫓아내도 기어코라도 거기서 전해야 되기 때문에 전하다가 마지막에는 붙들려 가지고 어데 갔느냐 하면 해골굴이라 하는, 해골굴 사람을 거게는 사형을 시킬 때에 어떻게 시키느냐? 큰 구덩이를 파 놓고 그 구덩이에다 그만 던져서 죽이는데 그 구덩이는 사람이 얼마나 죽어서, 이제 죽은 것 또 수십 년 전에 죽은 것, 수백 년 전에 죽은 것, 그 구덩이에 죽은 것이 많은데 그래 딱 넣어 놓고 난 다음에 문 딱 닫고, 이러니까 그 속에 악취라는 것이 굉장한데 자기가 어려움으로서는 그 어려움이 제일 어려움을 만났었다고.
열대 지방에서 이 거머리라 하는 것은 이망씩한데 거머리에 물리면 그만 그때는 물리는 사람은 바로 직사하는데 그 거머리를 잡아다가 옷을 벗겨놓고 거기다가 마구 이래 퍼부어 가지고서 막 달라들어 이래 물어도 그때도 그런 거는 견디기가 괜찮아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흔적을 내가 받고 있다. 성신의 인침을 내가 받고 있다.' 그게 뭐이냐 주님에게 속했다는 증거요 주님의 고난을 자기가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뻐했지마는 그 아주 해골구덩이라 하는 거게 들어갔을 때에는 견디지를 못했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그때사 비로소, 평생 처음으로, 항상 감사하고 이랬는데 그때는 감사하지를 못하고 '주님이여, 내가 이것을 견디지 못하겠으니 나를 어서 구출해 달라'고, 여기서 어서 구출해 달라고 간구했다고.
다를 때는 어떤 그 어려움을 당해도 그 어려움을 피할라고 하지 안하고 어짜든지 거게서 주님을 더 만족케 할라고 이랬는데 그 구덩이 가서 그 모두 악취가 나고 이라는 데는 견디지 못해 가지고서 '내가 여기서 죽겠사오니 어서 나를 구출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다고.
그러니까 천사가 와 가지고 거게서 광주리를 달아 내뤄 가지고 거게서 타고서 이래 올라와 가지고 그래 나왔는데 나와 가지고 또 전도합니다. 전도하니까 그 사람들이 그걸 잠구고, 잠구고 왕들과 대신들의 인으로서 인봉을 딱 했는데 인봉 그대로 있는데 사람은 나와서 전도하고, 그래 가지고 거기서 나중에는 박해를 주지 안하고 사정을 해 가지고 그래 거기서 떠나기를 원했는데 '이 도를 받은 사람들의 신앙 생활에 자유를 허락하면 내가 여게서 떠날 수 있다. 내가 전도해서 전도받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자유를 줘라.' 그 사람들이 '자유 줄 터이니까 떠나라'고. 그래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그러면 그런 환경 그것이, 그것이 산다싱의 그 사람 몫에 대한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그 토막도 하나 있어야 되지 그게 없어 가지고는 그 구원이 이루어지지를 않는다 그거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만드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벌써 그 사람 구원 이루기 위해서 그 나라에는 그런 사형 법을 세운 것이 하나님이시요 그 사형법을 세워 가지고서 수백 년이 나왔는지 뭐 그 나라가 몇 대나 내려와 가지고 그래 됐는지 그만치 그런 것 된 그것이 일시에 거기 있으니까 그 구덩이 잡아넣었다가 아니라 영원 전 그 구덩이를 하나님이 예정으로 만드셔 가지고 주권적 능력으로 그 구덩이를 만들고 그 구덩이에 사형을 시키고 때가 되니까 산다싱을 그 안에 집어넣어 가지고 그렇게 해골의 어려움을 당했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에게 현실이라는 현실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현실은 전혀 없습니다. 또 우리 몫에 대한 구원이 다르기 때문에 만나지는 현실이 각각 다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현실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 설 계하신 것이고 전능하신 분이 이것을 성취해 놓은 것이고,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서 대속해서 죽기까지 하시고 또 부활까지 하신 그 주님이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해서 큰 힘 들여 가지고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현실을 만드신 그 노고도 알고, 또 필요의 가치도 알고, 그 목적도 알아서 우리가 거게서 감사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그 현실을 잘 활용하도록만 노력해야 됩니다.
활용하는 데는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느냐? 윤곽적인 문서계시의 말씀대로 그대로 우리가 행할 것인데 그대로 행하는 것이 요것으로써 끝난 줄 알면 그 사람은 외식의 사람이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것으로 정죄를 받게 되는 것이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이 법이 우리를 정죄해 죽일라고 이렇게 정죄하기 위해서 이 법이 있는 게 아니고, 이 법칙이 말이요, 이 법칙이 은혜로 있다. 이 법칙이 이미 이루어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서계시를 통해서 생명을 만나도록 노력합니다.
이 문서계시를 지킬 필요가 뭐 있느냐? 지키는 소망의 목적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문서계시를 지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문서계시를 지켜. (졸면 되는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문서계시를 지켜.
생명은 뭐인데? 생명은 뭐입니까? 생명은 힘입니다. 생명은 힘인데 생명은 힘이라니? 그 힘이 무슨 힘인데? 생명의 힘이 뭐인데? 마귀도 힘이 있고, 물질도 힘이 있고, 짐승도 힘이 있고 다 힘이 있는데 그 힘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 자존하신 전능하신 완전자이신 그분의 힘으로 움직이기를 원한다는 것이 그것이 생명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힘으로 그분의 힘에게 피동되기를 원하는 것이 그것이 생명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전능자에게, 우리가 중생된 것이 전능의 성령 또 전능의 진리, 성령과 진리에게 붙들려 거게 피동되는 그것이, 피동되기 시작했다 하는 그것이 중생입니다.
그러면 그 피동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피동으로 결정되어진 다시 불변적으로 된 그게 뭐이냐? 우리에게 영생입니다.
그러면 문서계시로 생명에 나아가기를 원하고 생명에 나아가면, 진리와 영감에게 내가 피동되기를 원하고, 그러면 거게서 그치면 또 외식입니다.
피동되기를 원하는, 그러면 거게 피동되어서 뭐할라고? 피동되는 것은 그 안에 자존하신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에게 연결이 바로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피동되기를 원하는 것이니 자존하신 분이 누구신데? 여게 말은 '살리는 건 영이라' 그 영이십니다. 영. 성령. 이 영은 성부의 영이요 또 그리스도의 영이요 예수님의 영이요 또 성령이시라.
그런데 영에 접하기를 우리가 원해서 윤곽적인 말씀을 문서계시를 우리가 찾아서 내게 해당된, 그 현실에 또, 그 현실은 내게 내가 원하든 안 원하든 현실이 내게 왔고 내게 온 그 현실에 해당된 그 문서계시를 찾아야 되니까 문서계시를 찾아 가지고 그 문서계시대로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하느냐? 그는 지극히 큰 능력에 내가 연결되기 위해서 하는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문서계시 거게 해당된 문서계시를 찾아 가지고 문서계시대로 내가 행해서 문서계시에게 속해 가지고 문서계시와 나와 하나될라는 것은 지극히 큰 능력에 연결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연결이 됐으면 그 연결된 것은 죽이지 못합니다. 죽이지 못하고 해하지 못합니다. 전능자의 능력에 연결이 됐으면 그건 죽이지 못하고, 죽였으면 순교니까 그거는 지극히 큰 영광으로 다시 나타나지 해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전지 전능자에게 피동될라고 하는 것은, 그 피동될라고 하는 것은 뭐할라고 거기 피동되느냐? 그는 능력 얻을라고? 아니요. 피동될라고 하는 것은 벌써 능력을 얻은 것은 피동됐으면 능력 얻은 것은 자기 밖에 있습니다. 능력은 벌써 껍데기가 됐어 능력은 껍데기가 됐고 그 피동으로서 자기에게 능력이 나타났으면 능력은 껍데기요 자기가 피동됐는데 그 피동의 알맹이는 뭐입니까? 그 알맹이 한번 말해 보십시오. 알맹이는 뭐인지? ○○○목사님? 그 알맹이는 뭐이지? 저 봐, 눈도 안 감고 있는데 뭘하고 있느냐 하면은 말씀을 들으면서 어만 것 생각하고 있어.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대로의 지금 생각을 하고 있다 말이오. 자기대로의, 그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대로의 뭘 생각을 하고서 여게서 가르치는 데 따라오지 안했기 때문에 물으니까 모른다 말이오.
우리가 윤곽으로 되어 있는 문서계시를 찾아서 만나는 것은 그 목적이 어데 있다고 했습니까? 그 목적이 어데 있어? 이것 모두 혼은 다 나가버렸네.
문서계시를, 우리 현실에서 문서계시인 성경 말씀을 찾아서 그 말씀과 나와 하나될라고 하는 것은 그 목적이 뭐입니까? 생명에 연결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에 연결됐으면 생명에 연결된 거는 지극히 큰 능력자가 될라고 능력을 가질라고 하는 것입니까 생명에 연결된 거게서 또 목적은 뭐입니까? 소망과 목적이 뭐이요? 소망과 목적이 뭐이요? ○○씨? '하나님' 하면 좀 멀어.
거게 나타내기를 하나님이 거게는 뭐라고 나타났는데? 하나님을 뭐라 했어? 성령. 여기 영이라고 하지 안했어? '살리는 건 영이라' 영을 영접하기 위해서 영을 만나기 위해서, 내가 영을 만나서 영에 속하기 위해서. 영에 속했으면 벌써 그 능력은 내 밖에 있어. 내 밖에 있고 내가 영에 속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있으리라' 말씀하신 그대로.
이러기 때문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 문서계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뭐라고 늘 말하지요? 중매쟁이. 이 성경 말씀은 우리의 중매쟁이입니다. 누구에게 중매해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에게 중매하는 중매쟁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중매쟁이만 만나 가지고 신랑 안 만나고 중매쟁이만 만나고 사는 자가 있으니까 그런 자는 신랑 오면 다 쫓겨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 성도들이, 구약 성도들이 문서계인 이 성경 법칙을 철저하게 지켰지마는 성경 법칙을 지킨 그것이, 열심히 지킨 그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렇지 안했습니까? 열심히 지키는 그들이 예수님이 성경 말씀을 어긴다고 해 가지고서, 안식일은 그날 일하지 안하는 건데 안식일날 병 낫우고 한다고 해 가지고서 예수님을 정죄해서 죽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지난밤에 ○목사님이 소망에 대해서 말을 했는데 소망에 대해서 좋은 말 한 마디를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구원의 투구라' 말하는 것은 우리 구원에 각각 요소가 있는데 그 요소 중에 우리 몸뚱이 중에는 머리가 제일 중요하지 않습니까? 머리 상하면, 팔 하나 끊고도 살아도 머리 그만 끊어버리면 못 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의 각각 요소에 제일 중요한 것을, 제일 중요한 부분을 보호하는 것은 소망이다. 제일 무슨 구원 역사에 그 요소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을 잘 안보하는 것은 소망이다. 그러기 때문에 소망이 없으면 투구가 깨졌으니까 모가지 달아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이 소망이라는 소망은 우리의 구원 역사에 제일 두부가 희고 제일 중요한 그것을 안보하는 것이 이 소망이다. 그러니까 소망이 있으면 제일 중요한 것이오. 사랑 중에도 제일 중요한 것,우리의 의지 중에도 제일 중요한 것, 우리의 모든 행동 중에도 제일 중요한 부분이 이 소망 속에서 안보를 받는다 하는 그런 말을 증거를 했습니다.
고거 아주 잘 깨닫고 간직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망을 투구에 대해서도 그전에 제가 여러번 설교했는데 들어서 버리지 안하면 다 깨달아지는데 버리면 헛일입니다.
이러니까 이 소망을 가져야 되지 현실에는, 현실에는 소망을 가져서 내가 현실 내게 해당된 그 구원을 하나님께 주실라고 하는 그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그 소망을 찾아가는 데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신구약 성경 말씀 이 윤곽적으로 제일 외부적으로 우리가 접하기 쉬운 대로 찾기 쉬운 것을 우리에게 주셔 찾기 쉬운 것 이 성경 말씀을 찾는다 성경 말씀은 누구에 중매쟁이입니까? 성경 말씀은 생명과 나와의 결혼하도록 하기 위한 중매쟁이라 그말이오. 그거 우리가 주님의 능력에 붙들려 가지고서 이제 능력과 우리와 접선이 됐습니다. 그러면 그 능력은 누구와 나와의 중매쟁이입니까, ○○○목사님? 성령님과 나와의 중매쟁이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내 안에 있어서 성령은 내 안에 나는 성령 안에 이렇게 계셔서 우리의 이 소망을 바로 가지고 해야 되지 사람들이 중간에 가다가 마는 그런 외식을 해 가지고서 그만, 외식하면은 도로 나쁩니다. '소선은 대선의 적이라' 안 믿는 사람 통계에 하는 말인데. 조그만한 범위로 소선이 있지만 그 나라에 소선이 있는데 대선이 하나 있는 그 대선을 중심으로 한 대선에 소속한 소선이 아니라면 이 소선은 역적이 되고 만다 그말이오. 역적이 되고 말아. 이러니까 소망을 가지고 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모든 죽은 것이 살아나는 것이, 그렇기에 살리는 건 영인데 영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한 말이 뭐라 했습니까? '영이요 생명이라' 했습니다. '영이요 생명이라' 요걸 잘 알아야 돼. '영이요 생명이라' 뭣이? 말씀이.
말씀을, 말씀을 따라서, 먼저 말씀 만나기가 제일 쉬워. 말씀이 중매쟁이라.
말씀 중매쟁이를 만나 가지고 생명을 만나고, 생명 중매쟁이를 만나 가지고 이제 영을 만납니다. 그러니까 살리는 건 영인데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는 이 말이 생명이요 곧 영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은 것을 살리는 이 방편을 취해야 되는데 알면 그만 다라.
하나를 바로 알면 전부를 다 바로 알아. 하나를 바로 알면 전부를 다 바로 아는데 알다가 자기 마음과 생각을 다 내놔 그렇지 내놓지 안하면 다 돼요.
그래서 이 새벽기도 나오면 말씀은 한 말씀 하는데 천 명이 있으면 천 명, 만 명이 있으면 만 명이 각자 자기들에게 해당된 그 문제들을 다 해결받게 됩니다.
그거는 누구의 역사입니까? 성령의 역사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 능력을 만나야 되고, 능력을 만나야 되고 그 영을 만나야 되지. 그러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에게 전하는 말이 지혜의 말에 있지 안하고 권능에 있기를 원한다' 권능에 있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완성이 됩니다.
그러니까 자, 이제 성경 말씀을, 자기 현실에서 성경 말씀을, 해당된 성경 말씀을 찾는 데에는 무엇을 사용해야 됩니까? 우리 요소에 뭣을 사용해야 됩니까? 우리 요소에 이 이성을 사용해야 됩니다. 이성을 사용해 가지고서 해당된 성경 말씀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을 찾아 가지고는 거게서 또 무엇을 사용해야 되느냐? 거게서 자기에게 있는 그 양심을 사용하게 되면은, 양심을 사용하게 되면은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 바울이나 모든 그런 사람들이 대외적으로 이 세상을 이긴 것은 외부적으로 이긴 힘은 양심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갈 때도 마음에 붙들려서 내가 죽일라고 모두 다 기다리고 있지만 그 자리 안 갈 수는 없다' 바울을 붙들고 있는 양심의 힘이 바울을 죽일라고 하는 그 힘 보다도 강했기 때문에 양심에게 붙들려서 죽이는 데 갔다 그거요.
그러면 그 양심이 힘을 만나고, 그 힘을 만나면 곧 하나님이신 성령과 접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면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양심 쓰지 안하는 사람은 구원을 이렇가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구원을 바라보지도 못해. 구원에 딱 들어붙어야 되는데, 구원 속에 내가 들어가고 구원이 내 속에 있고 구원과 나를 하나가 돼야 되는데 양심도 그게 종착이 아니라. 양심이 종착이 아니라 양심도 중매쟁이입니다.
이러니까 중매쟁이도 없는데 무슨 결혼이 있을 거라? 하나님 정해 놓은 중매쟁이가 일을 안 하는데 중매쟁이도 다 배척을 해 버리는데 무엇이 일이 되겠소? 이러기 때문에 믿는 기독자의 구원은 욕심이나, 배짱이나, 또 민첩이나 활동이나, 그뭐 아주 아이큐 그런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성이 이성이 제일 껍데기 중매쟁이요. 이성 안에 있는 중매쟁이가 ○○○선생, 뭐이지요? 양심. 양심이 그 안에 있는 중매쟁이요. 양심 중매쟁이 안에는 뭐입니까? 무슨 중매쟁이요? 능력. 능력은 어데 중매합니까? 성령님에 중매합니다.
능력이라 말은, 생명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움직이는 그 움직임에 붙들려서 피동되는 그 피동되는 건데 피동은 뭐냐 하면 움직이는 원동인 그분 차지해서 그분에게 들어붙을라고 그분 하고 하나될라고 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에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들 안에 있는 것을 너희들아 알리라' 이랬어.
받는 사람은 알 수가 있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 데 가서 그런 거기 가서, 거기 찾아가는 건, 내가 아레도 말랬지마는 금정산에 한번 갈라고 하는 것은 뭣 때문에 뭐 산천이 좋아서 갈라 하는 것 아니오. 거기서 양성원 하는 그 영감을 그때 거기서 받았다 그거요. 다른 물론 영감도 받지마는 '양성원은 이렇게 해라'하는, 그 영감을, 내가 내 호주머니에다 그때 뭐 아마 칠필 년 그때 십여 년을 넣어 가지고 있었는지 여기다 넣어 가지고 여기 넣어 가지고서 '이거 어떻게 할까?' 늘 생각하는 문제인데 그걸 금정산에 내가 기도하는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올라가 가지고서 기도할 때 그때 내가 깨달았다 말이오. 그때 깨달아서 그때 계획을 다 해줘서 그때 계획대로 지금 내대로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있는데 또, 그것 다 그래요. 어데든지. 내가 수원지 뒤에 만당에 거게 가고 싶은 것은 내가 거게서 조그만한 요 굴이 있는데 굴 속에 거게 앉아 가지고서 기도하는 가운데에 주님과 좀 밀접하게 접한 그게 있어서 그게 그리워서 거게를 한번 가고 싶어서 그때 한번 갔었어. 집사님들 하고 한번 갔었어.
우리가 제일 그리운 것은 그저 뭣보다도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이성의 중매를 받아 가지고서 자기 현실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이냐? 자기에 대한 주님의 뜻이 무엇이냐? 주님의 뜻 그 진리 그것을 찾을 때에 우리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또 그것보다는 저게서, 이성에서 진리 찾아 진리에서 하나님과 접선되는 그 접선을 생명이라 하는데 접선되는 그것을 찾는 그것이 우리에게 참 기쁨이 됩니다.
접선에서 이제 주님 안에 내가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는 주님 만나는 그것이 기쁨이라.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뭐라고 해도 자기가 이것이 많이 된 그곳이 그립고 제일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러니까 뭐 야곱의 주는 우물은 다 먹어봤자 목마르다 그말은 이 세상 자연 은총이나 이런 거는 그까짓 거 암만 받아봤자, 암만 받아봤자 나중에 불만스럽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은총은 이성으로 자기에게 해당된 그 진리를 만난 그 진리는 권태나지 안해요. 그거는 후회되지 안해요. 그만 마음에 권태 안 납니다. 자꾸 갈급이 나오요.
이러니까 예수님 안에서 구속을 이루는 이 사람보다 더 좋은 취미를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니까 이 세상에 사람 쳐놓고 제일 아주 행락 생활, 쾌락 생활, 제일 기쁜 생활, 제일 행복의 생활, 제일 행복의 생활 한 이가 누굽니까, ○○○씨? 누가 제일 행복의 생활 했어? 예? 누가 제일 행복의 생활 했어? 누구? 고함 질러 봐. 예수님. 예수님이 제일 쾌락 생활 했어. 제일 행복 생활 했어.
제일 만족 생활 했어. 제일 복있는 생활 했어. 제일 진짜요. 그분의 생활은 가고 가고 가도 후회되는 게 하나도 없어. 이 세상에 와 가지고서 말 한 마디 한 것도 후회한 것이 없고 전부 기쁘고 즐겁고 생각하면 좋고 행복을 누렸습니다. 행복을 누렸어.
그러니까 예수 안에 정말 행복이 있지 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취해 봤자 얼마 안 가서 권태 나요. 그래 안 믿는 사람이 통계하기를 뭐 목욕은 뭐 한 시간 기쁨, 이발은 하루 기쁨, 또 결혼은 얼마라 하더라? 일주일 기쁨, 집짓는 것은 십 년 기쁨, 말타는 것은 평생 기쁨, 그것도 죽을 때는 그만 없어져 버려. 영원한 기쁨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말해 준 이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그러기에 이 말을 찾아 가지고서 생명을 찾고, 이 생명을 찾아 가지고 성령을 만나야 됩니다. 이러니까 현실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 돼요.
십 분 기도 후에 사층에서 권찰회 모입니다.
엊저녁에 ○○○목사님 설교 중에 고거 요지를 말했습니다. 소망의 투구.
소망의 투구요. 소망은, 소망은 우리 각 부분에 제일 중요한 것을 보호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소망 없으면 그거 죽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