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1 01:09
하늘과 땅은 불에 타서 풀어진다
1987. 8. 12. 밤 (수)
본문:베드로후서 3장 6절∼14절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이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공과 제목은 ‘하늘과 땅은 불에 타서 풀어진다’ 하는 그 제목입니다.
요절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하는 말씀이 요절이 됐습니다.
서론은 ‘지금은 말세지 말입니다. 말세에 우리에게 일곱 가지 기억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먹는 것 자는 것 일하는 것 공부하는 것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 일곱 가지를 주님이 부탁하셨습니다.’ 일곱 가지에 대해서 읽습니다.
첫째, ‘온 세계가 홍수로 전멸될 때에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시기를 회개하고 배를 하나님 말씀대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이 말씀을 귀넘어 듣고 마음에 제 욕심대로 시집가는 사람 장가가는 사람 사고 파는 데 또 집 짓는 데 이런 일에만 밤낮 열중하기를 홍수로 멸망되는 그날까지 정신 없이 있다가 멸망한 것같이 예수님 재림 때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두번째는, ‘지금 있는 하늘과 땅은 구원 준비할 자와 멸망할 자가 판별되는 그날까지 두셨다가 하늘과 땅을 다 불사를 것입니다.’ 셋째, ‘본장 8절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말하여 의인의 곤욕을 보고 하루가 천 년 같고 악인들의 회개는 안 하고 시간만 지나가는 것을 보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안타까운 긍휼의 주님의 마음을 잊지 말고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회개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넷째로, ‘주님의 재림은 뜻밖에 그물같이 도적같이 아이 밴 여인에게 해산같이 갑자기 닥칠 것입니다. 그런고로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로, ‘주님의 재림 그날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전부가 다 불탑니다.
그날에는 죄냐 의냐 하는 것이 다 드러납니다. 하나도 인간의 힘으로 숨기지 못합니다. 갑자기 불세계가 될 것을 눈감고 생각하면서 준비하여야 합니다.’ 여섯째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겨 나옵니다. 불심판은 지나가고 멸망 없는 새 세계가 나옵니다. 불에 타지 아니한 의인들은 이 나라로 옮겨 가십니다. 순종치 아니한 사람들과 만물을 멸망시킨 홍수는 순종한 노아에게는 큰 구원이 된 것같이 의인들에게는 불이 구원이 됩니다.’ 일곱째로, ‘불타지 않는 준비, 새 하늘과 새 땅 새 세계에 들어갈 준비는 그날을 생각하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현실 현실을 준비하면서 주님의 은혜로 잘 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크고 급한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문답에.
첫째, ‘지금은 어느 때이뇨?’ 답에, ‘말세지말입니다.’ 둘째로, ‘잊어서는 안 될 몇 가지를 말씀하셨느뇨?’ 답에, ‘일곱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셋째로, ‘기억할 일곱 가지를 말하라.’ 첫째 ‘노아의 때와 인자의 때가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둘째 ‘지금 있는 천지는 멸망과 구원이 판정되면 다 불살라집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넷째 ‘멸망은 뜻밖에 옵니다.’ 다섯째 ‘하늘과 땅은 다 불에 타서 풀어집니다.’ 여섯째 ‘의인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갑니다.' 일곱째 `새 세계에 갈 준비는 거룩과 경건 생활입니다.’
이것을 다음 주일 주일학교 공과로 삼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에도 재림에 대해서 말씀 많이 했는데 뭐 이 재림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뭐 이렇게 또 말을 하고 저렇게 말하고, 벌써 이 재림에 대해서는 다 사람들이 지식적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요는 옛날 노아 때도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홍수로 심판할 이 큰 것을 말씀하셨지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업신여겼습니다. 업신여기고 있다가 말씀하신 대로 홍수가 닥치니까 그때에 모든 사람들은 다 홍수로 멸망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 홍수 멸망에서 구원된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노아의 때와 같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노아의 때에 육체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겨우 여덟 식구뿐이었습니다.
그때도 택한 자들은 다 그 영은 구원을 얻은 사람은 몇 천이 몇 만이 몇 억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육체로 구원 얻은 사람은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중생된 영이 구원 얻는, 택한 자들은 뭐 몇 억이 될란지 모르겠습니다. 몇 백억 몇 천억이 될란지 뭐 얼마가 될란지 모르겠습니다. “그 수는 능히 셀 수 없을 만치 숫자가 많다” 요한계시 7장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육체로 구원 얻을 사람은 다만, 예수님이 말씀하기시를 노아 때에 겨우 여덟 식구밖에는 육체로 구원 얻은 사람이 없는 거와 같이 다 영으로 기본구원 얻어서 하늘나라 가기는 가지마는 그 심신의 기능이 멸망을 받지 안하고 구원 얻을 사람은 심히 숫자가 적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다시 말하면 “믿는 자를 보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신 말씀을 주님은 어누리하지 안하시고 말씀하시는데 이 사람들은 원죄와 본죄로 인해서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 말씀을 어누리를 합니다. ‘내가 올 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이렇게 말씀을 하셨지마는 오늘에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러니까 그저 주님은 대체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지 그것이 꼭 과학적 수학적같이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어누리를 합니다.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그 말씀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온 우주가 다 불탈 터인데 불타는 해를 보지 안하고, 불타는 해를 보지 안하고 이 불탈 때에 그는 조금도 두려움이나 손해나 보지 안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입어서 불의 심판에 심판당하지 아니하고 불심판을 이기고 구원 얻을 사람이 노아 때와 같이 심히 적다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그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주가 불탈 때에 이 불타는 해를 받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그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영은 택한 자들은 다 구원을 얻을 것이고 또 택한 자 가운데에 이 불로 멸망을 받을 그때에 당한 사람은 불에 멸망을 받을 것이고 불의 멸망이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도 꼭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의 해를 보지 안할 수 있는 그런 신앙 정도나 또 불의 심판을 받아 가지고 불의 심판의 해를 보지 않는 신앙의 정도나 꼭 같습니다. 불심판을 보고 안 보는 게 문제가 아니고 안 봐도 하나님 앞에서는 벌써 그것이 다 판정이 되고 또 불심판에 멸망을 받아도 판정되는데 인간이 볼 때에 ‘이 불심판에 해를 받지 안하나 해를 받나? 자기는 해를 받나 안 받나?’ 인간들이 알고 모르는 것이지 하나님편에는 그게 상관 없습니다. 안 해도 다 당신은 아십니다.
어쨌든지 이 불심판이 올 때에 불심판에 대한, 자기는 불심판에 대한 해를 하나도 보지 않을 사람이 노아와 같이 그렇게 남는 사람입니다.
불심판이 올 때 그때에 그러면 타지 아니하고 다 그대로, 타지 아니하고 이 몸을 그대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받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갈 건가, 또 그때에 무슨 죽음을 통해 가지고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변화받아 갈 건가 하는 그것은 확실한 성문은 되어 있지 않지마는 우리가 다른 모든 성경을 봐서 그때에 이 육체를 벗는, 이 육체의 썩을 것을 벗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에 썩을 것을 벗는 이 사실은 성경 다른 데에 많이 말씀을 해 놨습니다.
이 심신이 이 불에 대해서, 불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사람 있고, 우주가 불탈 때에 두려워하는 사람 있고 또 불탈 때에 두렵지 안한 사람 있고, 또 이 불로 인해서 손해를 보는 사람 있고 이 불로 인해서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 때도, 노아 때도 노아의 홍수가 그렇게 홍수 심판이 날 때에 모든 사람들은 다 피할 길이 없어서 두려워하고 모두 해를 봤습니다. 그 육이 다 구원을 얻지 못하고 다 해를 봤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여덟 식구는 이미 하나님이 그렇게 홍수 심판하신다는 것을 미리부터 경고하셨고 그 경고하신 말씀을 등한히 듣지 아니하고 신실히 듣고 일편단심 ‘이 홍수 심판 임하면 어찌 되나?’ 하는 이 말씀대로 해서 그 심판을 면할라고 준비를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 되었다” 이랬습니다. 이래서 다 했으니까 노아에 대해서는 홍수 심판이 올 때에 그는 뭐 염려나 두려움이나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하시니까 자기 구원 준비한 데 대해서 참 불행 중 다행이고 또 준비하지 안한 그런 사람들 위해서 걱정은 했지마는 자신에 대해서는 걱정한 일이 없었고 또 물로 말미암아 손해본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하나의 예표적인 심판이요 또 하나의 그 모형으로 보이신 모형 계시의 심판이지마는 이 불심판은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이기 때문에 이 불심판이 올 때에 우리 믿는 사람을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불심판이 올 때에 두렵고 그때에 놀라는 사람, 두렵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겠고, 두렵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겠고, 또 하나는 그저 그렇게 큰 역사니까 두렵지마는 마음에 후회되지 아니하고 그래도 마음에 그렇게, 자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위엄스럽기 때문에 두려움만 가지지 자기 이 준비해 놓은 게 있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거나 그런 일은 없이 맞이하는 사람 있겠고, 또 하나는 이 불심판에서 자기 구원 이룰라 하는 것이 다 끝장나 버리니까, 자기 구원 이룰라 하는 것이 끝장나니 자기 구원 이룰려는 것이 이루지 못하고 끝나는 일과 또 자기가 모든 준비할 거, 참 후회될 거 또 그때에 모든 후회될 거 그때에 후회될 것을 불심판이 오기 전에 다 정리 정돈한 사람과 이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또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을 것이고, 또 불심판 왔을 때에 자기로서 준비할 것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과 준비한 사람이 또 서로 두 쪽이, 두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이 불심판이 옴으로써 자기가 이 육체대로 있지 안하고 홀연히 변화돼 가지고 새 나라를 가든지 어쨌든지 이 불심판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이 심신 기능 구원에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이 있겠고 손해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준비를 든든히 해 놓은 사람은 뭐 준비 다 했기 때문에 손해볼 거 없지마는서도 준비 못 한 사람은 준비 못 한 채로 다 끝나버리기 때문에 그거는 다 손해가 될 것입니다.
이래서, 불탈 때에 그때에 우리가 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는 데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이 없는 세계요 영원한 세계이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은 이 혈육을 가지고는 영원한 세계에 가지를 못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 혈육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그저 백 년만 지나가도 뭐 허불허불하이 그 썩었고 뭐 이백 년이나 유지되는 그런 혈육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혈과 육은 썩지 아니할 것을 가지지 못한다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때에 이 썩을 몸이 변화는 다 됩니다.
이 썩을 몸이, 썩을 육체를 가진 이것이 이것을 어떻게 벗을란지? 그것은 벗는 모양은 여러가지로 말했는데 어떤 사람은 순교를 당해 가지고서 벗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육체를 홀연히 벗는 사람도 있고, 이래서 어쨌든지 이 육체는 그때에 벗습니다. 벗고 썩지 아니할 심신 신령한 몸으로 변화받아 가지고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것이 마치 사람이 헌옷 입었다가 새옷 입는 거 또 나쁜 거 입었다가 좋은 거 입는 거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그 준비된 사람은 이 육체를 벗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함을 받을 때가 그때 마치 자기에게, 그건 비유지마는 헌옷을 입고 있다가 이제 좋은 새옷으로 갈아 입을라 하면은 헌옷 벗을 때에 기쁘지 뭐 헌옷 벗는 것이 그렇게 고통이나 슬플 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새옷 입는 거는 으례히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과거에 성도들 가운데도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는, 이 육체를 벗는 것이 그렇츰 기쁠 수가 없는 그런 사람도 있고 또 이 육체를 벗을 때에 심히 고통스러운 사람들도 많이 우리가 봅니다.
그런고로 주님이 구름타고 오실 때에도 그때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돼 가지고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져 가는데 변화되는 그 과정이 어떻게 변화되나? 벗는 것은 그것은 틀림없이 벗습니다. 이 혈육을 벗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변화돼 가지고서 가기는 가는데, 그러면 이 변화될 때에 어떤 사람은 이 혈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때에 그때에 그 기능은, 기능은 변화를 안 받습니다. 기능은 그대로입니다. 기능은 그대로고, 기능은 그대로고 다만 이 심신이라는 이것이 이제 변화를 받는데 그때에 기능이 아주 유력한 이 몸으로 변화받는 사람도 있고 또 아주 무능한 그런 천한 사람으로 변화받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때 변화받을 때에 이 불심판으로 와서 불심판에서 해를 받는 그런 것은 다 소멸되고 이 불심판에 해받는 것은 다 멸망할 것이고 불심판에 해받지 않는 것만 신령한 것으로 다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가 홀연히 변화가 되는데 이 고기덩어리, 고기덩어리 이 속에 기능이 들었는데 기능이 없어지지 않을 기능으로 완전히 땅위에 있는 동안에 성화되어 있는 그것은 그저 많은 방해를 받고 많은 방해를 받는 이 모든 이런 것들을 다 벗고 신령한 몸 자유하는 그 기능으로 옮겨져 가니까 그는 마치 보자기 쓰고 있다가 보자기 벗으면 사람이 시원하고 또 전쟁하는 사람이 그 갑옷을 입고 투구 쓰고 있다가 그거 벗어내 버려 버리고 이제 자유하니까 평안하고 하는 것처럼 평안할 것이고, 또 그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 신령한 기능으로 성화돼 가지고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갈 그 기능이, 기능이 다 불에 타서 소멸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 같은 그 정력, 자기의 정신이라든지 힘이라든지 그 정력을 가지고 여러가지 기능을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그 정력을 가지고서 어학이라는 그 기능을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정력을 일 년을 기울여 가지고서 만들어 놓은 기능이 뭐이냐? 어학 기능입니다.
예를 들면은 영어를 공부했으면 영어 기능을 영어 아는 기능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정력을 가지고서 일 년을 기울여서 만든 것이 무슨 어떤 예술품을 만드는 예술품 그 제작의 기능을 가졌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정력을 가지고서 이 모든 학문을 공부해 가지고서 여러 가지 그 학문들을 공부해서 학문에 대한 기능을 만든 사람도 있겠고, 또 어떤 사람은 정치학을 공부해 가지고 정치의 기능을 자기가 학으로 만들었고 실지로 경험으로 만들고 체험으로 만들어 가지고서 어쨌든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데는 자기의 정력을 가지고서 사람이 삽니다.
정력을 가지고서 이 현실이라 하는 현실을 살아 가지고 나가는데, 정력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아주 쓰지 못할, 아주 쓰지 못할 죄짓는 거 방탕 방종한 그런 죄짓는 그런 기능을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노름하는 기능, 어떤 자는 사기 협잡하는 기능, 또 어떤 사람은 그 정력을 어데 기울였든지 또 자기는 무슨 음란한 그 기능 자기가 그 정력 가지고서 무슨 일을 했든지 그대로의 그 기능화됩니다. 그 정력은 그 현실을 통해서 대개는 기능화, 무슨 기능이든지 기능으로 바꾸어집니다.
기능으로 바꾸어지고 또 어떤 사람은 그만 그 현실에 정력을 아무 기능으로 바꾸지 안하고 그저 그만 썩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만일 그 자기의 정력이라 하는 그걸 가지고서 하루 종일 누워자고 일생동안 항상 놀고 지나갑니다. 그저 놀고 지나가면은 그거는 기능도 그저 유흥, 유흥을 즐거워하는, 유흥을 즐거워하는 그 기능만 그는 만들었지 뭐 쓸모 있는 기능은 하나도 만들지 안했겠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통해서 정력이라 하는 건 자꾸 이렇게 지나가는데 지나가는 거 가지고서 이런 기능을 만들든지 저런 기능을 만들든지 좀 가치가 더 있는 기능, 가치가 적은 기능, 또는 쓰지 못할 그 기능, 어떤 사람은 뭐 별 기능도 만들지 안하고 그만 그냥 그저 그 세월이 지나가는 동시에 그 정력은 그대로 소비되고 허비되고 돼서 그만 그렇게 소비가 돼 가지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그 정력을 기능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고 여러가지 층하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정력을 가지고서 진리를 만듭니다.
진리를 만들다니? 그 기능을 가지고 현실에서 진리냐 세상이냐, 피조물이냐 창조주냐 이런 것이 환경에서 많은 시련을 해도 자기는 현실을 진리를 영접하고 진리와 하나되고 진리를 보수하고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그 정력을 기울였으면 그 사람은 그 현실에서 정력이 변해서 진리가 되겠고, 정력이 변해서 또 영감이 되겠고, 정력이 변해서 거룩이 되겠고, 정력이 변해서 여러가지, 진실의 기능, 또 의의 기능, 사랑의 기능, 또 자비의 기능, 또 진리 지식의 기능, 지혜의 기능 뭐 여러가지, 자기는 그 정력을 가지고서 썩지 안할 기능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썩을 기능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있는데,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그때에 다 불택자들은 그들이 그 정력 가지고 만든 것도 다 썩을 것들이고 땅의 거는, 하나님의 심판의 이 심판은, 불심판은 다른 불이 아니고 이 물질의 불이 아니고 말씀의 불이라 했습니다.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말씀의 불 진리.
이 진리의 불이기 때문에 이 진리에 소멸되지 안할 것은 이 진리와 동질이 되면, 진리와 영감은 하나이기 때문에 진리와 영감 주님의 대속과 동질이 되면 그것은 이 불에 타지 않습니다. 뭐 불을 불에다 넣는다고서 뭐이 타겠습니까? 열도가 말이요, 백 도 되는 것을 백 도 안에다 집어 넣어 놓으면 백 도에 암만 거석했다 해도 백 도가 탑니까? 백 도 되는 것을 만일 이백 도에 넣으면 백 도 그게 변해지지마는 내나 열과 열하고 합하고 물하고 물하고 합하는 거와같이 이렇게 이 진리와 영감의 기능화된 것은 이 불이 왔을 때에 하나도 타지 안하고, 하나도 타지 안하고 다만 이 껍데기, 이 껍데기, 기능을 싸고 있는 껍데기, 기능을 싸고 있는 껍데기는 뭐이 싸고 있느냐? 이 기능이 우리의, 이 기능이 우리의 뇌, 골. 이 골 이런 것은 이 기능을 싸고 있어. 골 이거는 기능이 없는 것입니다. 이 골 속에 진리의 기능이 무엇의 기능이 우리의 관절과 골수, 이 근육, 골수. 이런 것은 다 이것이 기능을 포함해 가지고 있는데, 기능을 내포해 가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해 가지고서 여러 나라 어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 어학을 가지고 있으면은 그 어학이라는 기능은 그 두뇌의 감각 작용 속에 그 기능이 들어 있지 두뇌 이게 기능은 아닙니다.
그거 만일 두뇌 그거는 암만 골 그거는 골 속에, 골 속에 참 거게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뭐 천억이라는 그 콤퓨터가 한 사람 뇌 속에 들었다 하는데 그거는, 그거는 콤퓨터 그거는 아무 기능이 아닙니다. 기능이 아니고 그대로 있는데 거게 이런 거 저런 거 진리나 영감이나 이런 것을 자꾸 거기다가서 넣어 가지고서 그게 인제 기능이라 말이오.
기능인데 그러면 기능은 현실에서 다 만들었지마는 기능이 어디 들어 가지고 있느냐 하면은 이 골 속에 들어 있고, 근육 속에 들어 있고, 이 모든 총명이라는 지혜라는 마음이라는 거 이거 껍데기 이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 속에 들어 있는 이 물질로 되어 있는 그것은, 첫째 아담에게 받은 우리의 심신이라는 이 존재 이것은 이 진리와 영감에 대속의 공로에 이 기능이 그 속에 꽉 배서, 꽉 배서 있지마는 이것은 이 아무래도 우리 골도 피요 이거 다 껍데기인데 이런 껍데기는 다 이거는 장구하지 못합니다.
이거는 뭐 억만 년이든지 있을 거 아니고 암만 그래도 아무리 그뭐 세계 방언을 다 집어 넣어 가지고 있는 그런 어학에 능한 기능을 가득 쌓여 있는 그런 두뇌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래 나이 많아지면 쇠해지고 나중에 죽으면 송장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썩어질 거 그런 것들은 다 이 예수님이 재림해서 불타게 되면은 그때 이런 것은 다 변화받습니다. 변화받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변화를 받는데 그때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받고,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변화받고, 이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변화를 받기 때문에 그 자체가 믿음 가지고 준비해서 이거 말하자면 늙어지는 자가 늙어지지 안하는 것을 입을라 할 때에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시공에 제한받는 이 심신의 형체를 가지고 있는데 이 심신의 제한받는 형체를 시공에 제한받지 안하고 영원한 이 신령한 것으로 바꾸어 가지게 됩니다. 변화되니까 다 좋아하지 나빠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준비한 자는 불타고 재림하셔서 불 가지고 심판하시는 그때에 고통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없고 다만 그 형체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고 그 안에 있는 이미 그 안에서 다 성화돼 가지고서 변화된 그 기능은 그대로 이 신령한 것을 입고서 그대로 하늘나라로 옮겨가는데 마음의 그 요소에, 마음의 요소에 속한 거는 그대로 옮겨가고 마음의 요소에 속하지 안한 것은 고기덩어리 요소 그거는, 그것은 땅 속에 있는 것인데, 땅 속에 있으나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그게 살아나는 것인데 예수님이 재림할 때는 그때는 땅 속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 마음과 고기덩어리의 기능과 이것들이 다 변화돼 가지고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가게 됩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이 구름타고 재림하실 때에는 우리의 그 심신이라 하는 것은 변화됩니다. 다 변화되는데 그것은 썩지 안할 것으로 변화되는데 변화되는 과정이 한번 이렇게 죽고 변화가 될란지 그것이 이거 신령한 것으로 당장 변화가 될란지 거게 대해서는 우리가 확실히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요한계시 20장에 말하기를 “첫째 부활이라” 부활이라 말은 한 번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켜서 부활이라 하기 때문에 그때 한 번 죽음을 통과해 가지고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을 거 아닌가 그렇게 우리가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보는 것이고, 이 죽는다는 것은 이미 이 혈육의 몸 이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이것은, 이것은, 이것이 끝나버리고, 죽음이라 하는 것은 끝나는 걸 말해요.
죽음이라 하는 건 끝나는 걸 말하지 않습니까? 죽음이라 하는 건 없어지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죽음이라는 건 끝나는 걸 말하고 또,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걸 말하고,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죽음이라 하고 또 육체 이것이, 육체는 피와 살 이런 걸로 돼 있는 이런 것이 끝장나는 걸 가리켜 죽음이라 이랍니다.
이제, 그러니까 생명도 끝나고 육체로 있는 그것도 끝나고, 그러면 어떻게? 그 끝나고 신령한 것으로 변화된다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에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 심신이 그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죽는다는 그 죽음을 그런 꼭 뭐 그 순교를 당하든지 이래 죽어 가지고서 그 죽음을 통과해 가지고서 그리 된다고로만 그렇게 볼 수가 없습니다.
왜? 이 죽음이라 하는 것은 이 자연 생명, 육체의 생명, 이 육체 생명이 끝나는 것이 죽음이요, 이 끝나는 것이 죽음이요 또 이 피와 살 이거 썩고 할 수 있는, 썩고 늙고 쇠해지는 이것이 끝나는 것이 죽음입니다. 알겠어요, 이 죽음? 그러면 육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 죽음이요 또 이 시공에 제한을 받는 이 고기덩어리가 이것이 끝나는 것이 죽음이라. 이게 죽음이고 또 그 형체가 없어지는 게 죽음이라.
이러기 때문에 신령한 것으로 변화되어서 없어지는 거 또 그 생명은 다 끝나 버리고 이제 영생하는 신령한 생명으로 이 육체가 변화되는 거로.
이러니까, 첫째 부활한다고 해 가지고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그런 죽음을 죽어 가지고서 꼭 부활한다 그렇게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왜? 죽음이라 하는 것이 여러 모양으로 죽어 가지고서 부활하기 때문에, 죽음이라 하는 거는 이 끝났다는 말인데. 죽었다는 그 끝나는 것이 꼭 어떤 모양으로 끝날지는 모르나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그 불심판할 때에 다 끝이 나 버려.
끝이 나는데 끝나는 그 형편에서 어떤 그 종류들이 있느냐 하면 자기의 그 정력을 가지고, 정력을 가지고서 만들어 놓은 모든 만들어 놓은 것이, 그 정력으로 가지고 만들어 놓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불에, 하나님의 말씀의 불에 타지 안할 그런 요소들이 아니고, 그런 요소되지 안하고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이거는 세계 제일 정권자다. 세계 제일가는 정권이다. 이는 세계에 제일가는 과학자다. 또 세계에 제일 가는 재벌가다. 이거는 세계에 제일가는 또 예술가다. 이거 세계 제일가는 체육가다. 이거는 세계 제일가는 무슨 뭐 어떤 미남이다, 미인이다.
뭐 다 그 정력을 가지고서 기능 만들었다 하는 그 기능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감과 피에 동질인 거 있고 이질인 거 있으니까 동질인 것은 다 하나도 해를 보지 안하고 이질된 것은 다 해를 보기 때문에 구름타고 오시면 그이의 정력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그 모든 조성되어 있는 기능, 이 세상에서는 가치 있다 존귀하다 하는 그 기능이 그게 다 불탈 것이고, 그거는 불타버려. 그거는 인제 불탈 것이고, 또 이 영생하는 완전하고 영원한 기능, 완전하고 영원한 기능은 뭐이냐 하면은 진리 기능이 완전하고, 영감 기능이 완전하고, 예수님의 대속 기능이 이거는 완전 영생 완전 흠 없는 것인데 이것으로서 하지 못하고 그만 이 땅의 기능으로서 만들어 놓은 그것도 불타고 이 신령한 가치 있는 영원한 기능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다 불타버립니다. 만들 수 있는 것도 불타. 이제는 그만 만들지를 못합니다.
만들 수 있는 것도 불타지, 만들어 놓은 것도 불타버리지. 이러나 그 만들어 놓은 사람은 자기는 만들어 놓은 것도 영원히 타지 안하지 또 이것을 만들 수 있는 그것은 다 만들어 버렸지, 다 만들었으니까, 더 만들 게 아니라 다 만들어 버렸으니까 이것은 불타는 게 아니고 이것은 신령한 것으로, 이 생활은 끝나버렸기 때문에, 이 생활은 끝났기 때문에 신령한 것으로 변화돼 가지고서 시공을 초월한 것으로 변화돼 가지고서 주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 예수님 재림 때에, 재림 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어떤 사람이 있느냐? 이제 고기덩어리의 이 마음과, 마음.
마음과 몸. 마음도 물질이요 몸도 물질입니다. 마음과 몸의 물질인 이 물체, 물체.
물체 이것은, 물체 이것은 다 변화를 받습니다. 택한 자들은 다 변화받습니다.
물체는 다 변화받습니다. 택한 자들은 이 물체는 다 변화받지마는 그 물체가 없어지지 안할 땅에 속한, 진리와 영감과 피와 이질이 되는 그것으로써 이제 그 기능으로 됐다면 기능은 싹 타 버리고, 기능은 타고 이제 물체 그거는 변화됩니다.
그러면 그 물체 그것은 다시 그것이 영생하는 이 기능을 마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영생할 기능은 마련하는 것은 끝나버리고, 마련할 수 없고 마련하는 것은 끝나버리고 마련한 건 다 불탈 것이고, 인제 그러니까 기독자 가운데에서 자기의 심신이 변화되는 것은 꼭 같이 변화됩니다. 뭐 바울이나 우리나 꼭 같은 변화를 받습니다. 받는데 그 육체의 기능, 이거 잘 안 들으면 몰라. 저 ○○○사모, 잘 들어, 잘. 잘 안 들으면 헛일이라.
육체의 이 변화는 다 받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다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할 때는 다 부활합니다. 부활하는데 다만 그 심신을 이 세상 살이에서 현실 생활, 현실 현실 만날 때에 현실마다 자기의 정력은 안 드는 게 없습니다. 그 현실을 사는 것은 그 현실 사는 정력이 그만치 소모돼. 한 시간 살았으면 한 시간 정력이 소모돼야 한 시간 살고 일 년 살라면 일 년 살 그 정력이 소모돼야 일 년 사는 것입니다.
그 정력이 뭘 만들었느냐? 정력이 땅의 것을 만든 사람 있으니 그 사람은 땅에 만들어 놓은 기능이 불타버리 고 그 심신은 변화받습니다. 똑 같은 변화받습니다.
또 믿는 사람이 자기가 정력을 가지고 썩지 안할 기능을 반을 만들었고 썩을 기능을 또 반을 만들었으면 반은 불타고 반은 불타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그때에 우리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 불탈 것은 어떤 게 불타느냐? 불탈 것은 자기의 영원한 기능을 만들 수 있는, 영원한 기능을 만들 수 있는 그 모든 정력은 다 불타버립니다. 영원한 기능을 만들 수 있는 그 정력은 다 불탑니다. 요거 똑똑히 여러분들이 구별해요. 영원한 기능을 만들 수 있는 정력은 불타버립니다. 또 없어질 땅의 것을 만들 정력도 다 불탑니다. 그때, 기능을 만들 정력은 다 불탑니다. 기능을 만들 정력은 다 불타고 심신은 다 변화받습니다.
요거 똑똑히 구별해요. 심신은 다 변화받고 기능을 만들 정력은 다 불타버립니다.
그걸로 끝나버립니다.
이러니까, 그 안 믿는 사람들은 무엇이 타느냐?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만들어 놓은 기능도 불타고 정력도 불타고, 그러면 심신의 그 형체는 어찌 되느냐? 심신의 형체는, 심신의 형체는 안 믿는 사람들도 전부 다 변화받습니다.
믿는 사람도 변화받고 안 믿는 사람들도 변화받습니다.
변화받는데 안 믿는 사람이 변화받는 걸 가리켜서 심판의 부활, 심판의 부활 사망의 부활 받는다 했습니다. 그거는 왜 변화받느냐? 변화받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 그 심신이 범죄한 그 모든 것을 다 심판 받아 가지고 유황불 구렁텅이 가기 위해서 다 부활 받습니다.
그러나 또 인제 택함을 입은 자들은 이 심신이 다 변화받습니다. 심신이 변화받는데 변화받는 이것은 다 예수님의 공로로 변화받아 가지고서 하늘나라 가게 됩니다. 하늘나라 가게 되니까 구원 준비를 잘한 사람이나 못한 사람이나 심신의 변화는 다 받습니다. 꼭 같이 받습니다. 요것도 잘 알아요.
꼭 같이 심신의 변화는 받는데 다만 이 세상에서 그 정력을 가지고 영원한 기능을 만든 자도 있고 없어질 기능을 만든 자도 있고 택한 자들 가운데에서 없어질 기능만 내치 만들고 영생하는 그 기능은 하나도 만들지 못한 사람 있고 영생하는 기능만 다 만든 사람 있고.
이러니까, 영생할 기능 만든 고거는 죽지 안하고 심신 변화를 받을 때에 그것은 같이 변화받습니다. 심신 변화를 받을 때에 그것은 같이, 변화된 심신하고 없어지지 안할 그 기능 만든 것하고는 같이, 영원히 같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그 심신이 변화를 받되, 변화를 받되 없어지지 아니할 기능은 하나도 없고 없어질 기능만 만들었다가 불탈 때는 그것이 다 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걸 가리켜서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렇게 말해.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러니까 이제 그때에 모두 다 불탈 것은 다 그 심판에 다 그 걸리게 되고 심신만 변화를 받습니다.
또 그 사람이 그라면 심신은 변화받고 또 자기가 불탈 기능을 만들어 놓은 것은 그것도 다 불타고, 멸망받고. 또 그 사람의 신령한 기능이든지 멸망할 기능이든지 기능을 만들 수 있는 그 정력도 다 불타버립니다. 정력은 말이오. 그러면 정력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다 끝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그 사람이, 그 만든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냐? 그 사람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 사람의 심신이 변화를 받고, 심신이 변화를 받고 또 그 사람의 영원한 그 기능을 만들어 놓은 그것은 다 그것은 영생이기 때문에 변화받은 심신과 영생하는 그 기능이 같이 있고, 그 사람의 그 영생의 기능을 만들든지 썩어질 세상 기능을 만들든지 만들 수 있는 그 정력, 만들 수 있는 그 정력이, 만들 수 있는 그 정력이 그것이 다 사용해서 남은 여분이 없이 다 신령한 기능 만드는 것으로 다 변화시켜 가지고 만나는 사람도 있고, 정력이 신령한 것으로 변화하지도 못하고 그만 그 정력이 때문에 이 다리오 왕이 아무리 그래 말해도, 말해도 그 말한 것이 이들과 하나님과 하나인데 하나님과 하나인 것을 자꾸 어기라고 하니까 그 소리가 우습지 그게 두렵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과 하나이니 이분이 크시기 때문에 크심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두려워지지 않습니다. 그런 걸 여러분들이 좀 생각해.
심령이 어두우면 잘 못 알아들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구름타고 오실 때 이 불은 진리와 영감과 피와 하나된 사람은 이 불이 그에게는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두렵지 안하고 이 불은 자기 비위에 딱 맞습니다. 이 불은 자기의 성미에 맞고 비위에 맞아서 좋고 기쁘고 반갑지 해되지 않습니다.
이래서 현실에서도 믿는 사람들이 다 같은 입장에, 동시, 동소, 또 같은 입장 거게 있지마는, 거게 있지마는 죄악을 대해서는 죄악화되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되기 때문에 염려가 없고 기쁘고 즐겁고, 하나님의 역사가 올 때에는 하나님화된 사람은 염려가 없고 평안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우주가 불탈 터인데 이 탈 것을 혹 믿는 사람들은 어떨 것이냐? 그 불이 말씀의 불이기 때문에, 말씀의 불이요 하기 때문에 산도 태우고 들도 태우고 우주도 다 지구 땅덩어리도 태우지마는 그 불이 하나님의 사랑과 동질인 사람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질인 사람. 뜻도 같고 생각도 같고 본질과 본성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 불은 그를 태우지를 안합니다. 태우지 안하고 동질입니다. 이것은 뭘로 말해야 뭐 이게 좀 될란가? 이래서 우리는 어서 주님의 재림이 지금 가까와 있으니까 빨리빨리, 우리의 할 일은 뭐입니까? 할 일은 뭐 그저 이 우주가 불탈 터이니까 여기서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을 가지지 말고 그저 불탈 터이니까 불은 뭘로 타느냐? 하나님의 말씀 진리로 태우고 영감으로 태웁니다. 진리로 태우고 영감으로 태우고 예수님의 피로 태웁니다. 예수님의 피가 태우고 영감이 태우고 진리가 태울 것이기 때문에 피하고 영감하고 진리하고 하나된 것은 타지 안하고 곧 하나입니다.
마치 호랑이 새끼가, 사람들은 호랑이 보고 겁을 내지만 호랑이 새끼는 가장 친하고 좋은 것이 그 에미 호랑이입니다. 알겠습니까? 에미 호랑이. 그러나 그 호랑이와 동질이 아닌 사람은 보고 두려워하지마는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니까, 사람이 저 범을 큰 범을 보고 두려워하고 사자를 보고 두려워하니까 아마 저 새끼 저놈도 저 사자 보고 두려워할 거다. 아니오. 두려워하지 않고 그 반갑고 가장 좋은 곳이 그곳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영감과 진리와 대속과 하나된 자는 그것이 와 가지고 모두 우주를 태우기 때문에 그와 이질된 것이 다 타고 그렇지 그 동질된 것은 가장 좋은 것이 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실 때에 이 불로 가지고서 불심판으로 오실 때에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는 최고로 좋은 것이 그때고, 기쁜 게 그때고, 평안한 것이 그때고, 그때는 아무 원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가장 평안한, 다시 말하면 어데보다도 자기 몸이 평안하고 자기 몸이 좋은 거와 마찬가지로 그게 자기 몸이 되고 자기 살이 되고 자기 피가 되고 자기 전부 자기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도 두려워지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러니까 이 준비를 불타지 않기 위해서 이 준비를 어떻게 할 건가? 이 준비는 어떻게 할 건가? 그저 거룩한 행실. 거룩한 행실이라 말은 자꾸 우리 행실에서, 거룩한 행실이 뭐이냐? 피의 행실, 영감의 행실, 진리의 행실이오.
진리 피 영감과 하나되는 행실 이게 거룩한 행실이라, 하나되는 행실. 하나되는 행실. 이래 가지고 하나되는 것 가지고 하나님 위하는 것, 경건은 하나님 위하는 것인데.
이거 해서 어서 나와 이 진리와 내가 다 하나됐으면 하나도 나는, 내가 진리 안에 진리가 내 안에, 아무 거기서 이질이 아니기 때문에 마찰이 없습니다. 마찰이 없지마는 내게 만일 진리화 안 된 게 있으면 그것만 마찰됩니다. 그것만 놀라고 그것만 타고 그것만 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짜든지 우리가 자신이 어서 진리화 영감화 예수님의 대속화되기를 우리가 힘써야 되지 여게 일곱 가지 말하는데 요걸 공과를 그저 학생들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쳐 주십시오. 가르쳐 주나 가르쳐 주는 대로는 그뭐 긴 말 하지 말고 간단하게, 요 공과에 이래 써 놨지마는 아주 뒤에 일곱 가지 그 문답이면 좋습니다. 일곱 가지 문답이면.
일곱 가지 문답으로 가르치고 위에 기다란 그건 여러분들만 알지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는 일곱 가지로 간단하게 문답해서, ‘노아의 때와 인자의 때와 같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지금 있는 천지는 멸망과 구원이 판정되면 다 불살라집니다.’ 요렇게 간단 명료한 요걸 자꾸 가르치면서 반사 선생님들이 주의할 것은 자기가, 자기가 믿음으로 믿음을 가르치고, 믿음으로 믿음을 가르치고, 요것을 사실 믿기를 주먹만치 믿으면 내가 주먹만치 그 아이에게 가르치는 게 건너갈 수 있고 내가 이 전체를 다 믿으면 다 건너갈 수 있고, 그러니까 다 같은 말로 그 학생들에게 말하지마는 그 학생에 전해지는 것은 안 믿으면 전해지지 안하고, 말만 전해지고 외식만 전해지는 것, 진실이 전해지는 것, 그러니까 본인이 요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래서, 아무래도 재림은 가까왔습니다. 모든 것을 다 본대도 재림은 가까왔습니다. 뭐 성경에 예언해 놓은 모든 예언이 거의 다 맞아들어갑니다.
그러고 여기뿐 아니고 우리만 뭐 이래 하는 게 아니고 다른 데도 말 들어 보면은 깨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아주 많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빨리 준비하고 그 땅에 거리끼는 거 그따위 짓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뭐 때문에? 오늘 구름타고 오면 다 헛일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뭐 평생에 먹고 산다 할지라도 자기 구원에 손해갈 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구원에 손해갈 일 하겠습니까? 이래서, 어짜든지 이 준비를 잘하고 학생들에게 이것을 자꾸 읽어 듣겨서 요것도 외우도록 하는 게 좋습니다.
광고합니다.
집회 참석수는 서부교회는 장년반 중간반 특수반 주일학생 다 합해서 오천오 명이 참석했습니다. 오천오 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집회에 한 아마 요번에 한 칠천 되겠다’ 하는 그런 사람들은 조금 정신이 없어. 우리 서부교회만 오천인데, 언제든지 보면은 서부교회가 과거의 삼분지 일 됩니다. 삼분지 일 되고 다른 데서 삼분지 이 됩니다. 삼분지 이 되니까 아마 요번에도, 다른 교회도 많이 힘을 씁니다. 이러니까 이번에 만오천은 되지 안했느냐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여게는 보고 나온 걸로 말하면 만이천팔백삼십일 명인데 보고 들어온 것만 해서 이런데 이거 모르겠습니다, 어찌 됐는지? 그러니까 우리 진영 교회만 한 만삼천 된 셈인데 다른 진영에서 얼마나 왔는지 모르겠어요. 많이 왔었습니다.
그라고 또 광고합니다.
새벽기도 어짜든지 빠지지 말고 나오십시오. 그라고 지하철 공사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라고 집회에 설교 말씀 재독은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 사흘밤 일곱시 삼십분부터 여덟시 삼십분까지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재독을 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또 이번 집회로 병나은 분은 빠짐없이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층 입구에서 지금 일층 입구에 있는 신고함에 적어 내시면, 신고함에 그만 적어 넣으면 됩니다.
그러고 신고함에 적어내는 것보다도 자기 구역장에게 해서 자기 구역장이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 믿지 안하는 강퍅한 자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많은 사람들이 이걸 보고 신앙에 참고로 삼아 가지고서 믿음에 도움이 되는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