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

 

1984. 4. 9. 월새

 

본문: 사무엘상 7장 12절∼14절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돌 세운 지방을 에벤에셀이라 이름 한 것은 내나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그는 평소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 복음 운동을 위해서 바친 일을 했습니다. 평소에 희생하는 일을 쭉  계속해서 해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살다가 때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복음 운동을 위해서 바쳐서 이래 동강이 나고 뜨끔 뜨끔  이렇게 살았고.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별로이 하나님 섬기는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뛰어나게 불거진 두드러진 그런 무슨 희생이나 큰 노력이 없었고. 고생도  없었고, 또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가 평상 신앙생활할 때에 그에게는 어려움이  닥쳐지지를 안했습니다.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늘 사무엘을  도와서 이래 하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맡아서 할 때에 큰 낭파나 환난이나  큰일 있는 것도 사무엘에게 닥쳤을 때에는 아무 일 없는 것같이 그렇게 평온하게  지나갔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또 이스라엘과 애굽 이것은 다 우리에게는 교회들과 이  세상과의 그런 것을 상징하고 모형해서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 실물 교훈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애굽 사이에 어떻게 됐던가? 또 하나님 나라와  블레셋 사이에 어떻게 됐던가? 하나님의 나라와 바벨론과의 그 사이가 어찌  됐던가 하는 조런 것을 우리가 볼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점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 방편을 오늘 우리 교회들에게 적용시키고  세상에게 적용시키면 그 일이 바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무엘같이 굴곡없이 섬긴 사람이 없었고, 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서 아무  파란과 곡절 그런 것들이 없이 그저 평온하게 지내서 참 흠없는 그런 사명을 다  감당했습니다. 요셉같은 그런 이들도 일찍부터 하나님 섬겼지마는 하나님 섬긴  것이 이렇게 사무엘처럼 이렇게 섬기지를 못하고 굴곡있게 섬겨서 움푹 짐푹하게  섬겼고, 뭐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이런 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랬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겨졌고 또 모든 것이 그 하나님의 주권  역사대로 이루어져 결과를 맺는 것이라는 것을 의심없이 믿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이 주권을 엘리 제사장의 종말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러 가지고  엘리 제사장에게 대해서 될 일을 말한 것이나 그 모든 것을 들어 보면. 성경을  보면 아주,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확실히 믿고 거기에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이 중세대에 하나님의 사람 중에 칼빈이 그가 교리와 신조적으로는  위대하다고 다 믿어서 칼빈 신앙 사상이라면 다 모두 건전하다 그렇게 인정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칼빈이 건전한 중에 그분에게 제일 위대한 것이 어떤  것이 위대하냐? 하나님의 주권을 그가 발견을 했고. 또 하나님의 주권을 그가  확실히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그 신앙 아래에서 다 해석도  했고 경영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둘째로 그 분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주권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주권에 맞춘 것은, 우리가  알 수 있게 맞추어 놓은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이요 또 영감이라. 영감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안했지마는서도 신구약 성경 말씀이라.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서 모든 걸 시작해야 되고 또 성경 말씀에서 끝을 마쳐야 되고,  그러기에, 성경 말씀대로 가고 성경 말씀대로 중단해야 된다, 맺는 것도 끊는  것도, 시작하는 것도 마치는 것도 전부 성경대로 해야 된다 하는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이 둘째로 칼빈의 장점입니다. 그래 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어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도 세상  어학 사전에서 말하는 거와 같지 아니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어제  간단하게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권세는 다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지 아니한 것이  없다, 권세는 하나님의 것이다, 또 하나님이 주인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내셨다,  하나님만이 그 권세를 쓰신다, 물론 쓰는 것은 이런 피조물 저런 피조물들이  쓰지마는 그 쓰는 것이 다 하나님이 쓰실 때에 그것을 통해서 쓰시고 그것들이  하나님에게 속해서 쓰시는 것이지 하나님을 등져서, 쓰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는  요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입니다. 뭐  권세가 여러 가지, 여러 가지 있는데 요 사건만은 하나님이 그것을 단독  권세를, 독권을 가지고서 하셨다 하는 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이라 말은  권세라는 것은 전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주인이요. 또 하나님만이 쓰시지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침노하지 못 한다.

하나님의 그 주권에서 모든 것이 다 움직이고 또 살고 또 되어져 나가고 그대로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크게 말하면 과괴의 권세와 건설의 권세 이 두  가지밖에는 없다, 그런데 파괴의 권세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를 대신 섬기는  것과 또 인간들의 그 모든 사상과 주장을 그렇게 쓰는 것과 또 인간들의 그 모든  소욕 그것을 행하는 것이 그것이 파괴하는 주권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한 말로 말하면 죄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에 위반된 것이 죄요, 또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의 대속에 위반되 것이 죄요, 이래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함을 입은 자이니 대속함을 입은 데에 합당한  자로 살아라, 대속함을 입은 자로서에 합당한 자로 살아라, 그러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하면 다시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대신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  분을 위해서 살아라 그분 위해 사는 것이 뭐이냐? 두 가지 생활이니 죽는 생활과  사는 생활이다 죽는 생활은 우리의 옛사람은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같이  연합해서 죽고 또 우리는 주님의 부활하신 부활에 연합해서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산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건설에 대한 권세는 의에 속한 것이니까 우리가 의에 속하며 건설  권세에 속해서 건설이 이루어 나가고, 죄에 속하면 파괴의 건설에 속해서 파괴가  이루어져 나가고. 나가는 그것인데, 무슨 파괴라고 마귀가 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 그렇게 만드셔서 그래 놓으시고 거기에 인간의 그 자유성을  가지고 죄를 영접하든지 의를 영접하든지 해서 제가 의에 속하든지 죄에  속하든지 둘 중에 하나에 속하게 되는 것안데, 의에 속하면 하나님의 건설  능력에 자기가 소속해서 거기에, 그 능력이 자기를 위해서 일 하게 되고. 자기가  죄를 영접하면 파괴의 능력에 속해서 파괴의 권세가 자기를 붙들고 역사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권세가 권세지 허락해 주지, 안한 것은 권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자유권이라 하는, 유한한 자유권이지마는서도, 이 자유권이란 이것이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어데까지든지 자유하는 것은 아니지마는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내에서는, 이 자유권이라는 것이 이것이 우리의 생사를 결정지웁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홀로의 역사로 죽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살렸지마는서도  사람의 주격인 영을 살린 후에는 하나님께서 살아난 그 영을 통해서 그 사람의  심신을 이제 살리는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역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노력하는 것은 건설구원에 대한 노력을 하는 것이지  우리가 기본구원에 대한 노력을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본 구원은 순전히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만 됐지 그 공로 외에 딴 것은 손을 대지  못합니다. 왜? 그것이 쉬워서 공짜배기로 얻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어려워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절대 불가능의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신인양성일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다  건설구원, 성화구원, 심신의 기능구원이니, 중생된 영이 물질계와 영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중생된 영의 기능이요, 영의 승구요, 타고 다니는 승구요, 영의  도구요, 영의 모든 소유가 되어 있는 그것들을 지금 잘 준비해서 마련하려는  이것이 우리의 지금 노력입니다. 우리가 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이 자기의 노력 여하에 있다 이래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기본구원에  관한 성경과 건설구원에 과한 성경을 혼합시켜 가지고서 그걸 구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기본구원에 대한 것을 자기의 노력으로 돼서  했다고 하면 기본구원은 깨지고 맙니다. 우리의 노력은 다 제한돼 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끝이 있고 부족이 있고 거기서 미달이 있고 미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건설구원 성화구원이라 하는 것은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요 언제든지 미완성에서, 그저 앞으로도 자꾸 그대로 자라가야 된다는 것.

종자는 새로 하늘나라에서, 종자는 새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 마는서도 세상에서  시작해 놓은 것이 그것이 자라가기는 영원히 자라갑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종자를 마련치 안해 놓으면 자라가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의  영광의 차이나 권위의 차이는 세상에서 그 신앙 차이가 있는 것보다도 내세에  무궁토록 가면은 갈수록 더 차이가 더 많아집니다. 하나는 한 종류를 키우고  하나는 두 종류를 키우기 때문에 자꾸 자라가니까 차이가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혹 눈이 어두워서, 마음의 눈이 어두워 마음의 눈이  어둡다 말은 비판의 눈이 어둡고, 평가의 눈이 어둡고 소욕의 눈이 어두워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 이렇게 자꾸 되어지기 쉽기 때문에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 이는 성경 말씀으로 자기의 지식을 삼아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또 그 안에 있는 영감으로서 자기가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소욕해야 되지, 자기 마음에 '아무래도 이것 만은 없어서는 안 되겠다.

이것만은 있어야 되겠다.' 하나라도 그것만은 있어야 된다고 하면 그것에게  붙들려서 자기의 구원은 실패한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이것만은 있어야 된다  고렇게 생각하는, 요것만은 뭐 죽어도 살아도 요것만은 내가 가지고 가야 되지  요거는 안 가지고 가면 안 된다 하는,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그것이, 그렇게  그것이, 자기에게 필요하고 요긴하고, 다른 것 다 버려도 이것만은 버릴 수  없다는 고렇게 보여지는 그것이, 그것만은, 성경 말씀에 어겨져도 요것만은 해야  된다 고렇게 보여지는 것이 우리가 마귀에게 미혹을 받아 가지고, 마치 해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선악과를 볼 때, 그 선악과가 자기들에게는 제일  해독이요 인류에게 제일 해독이 되는 것인데, 배암의 유혹받고 보니까 인류에게  하나님보다도 그 선악과가 보배라서 하나님 버리고 그 선악과를 먹었던  것입니다. 먹은 그 결과가 오늘 우리에게 닥쳐 가지고 그것 보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잘못 견해하는 그런 것을 가지면 우리가 건설과  파괴도 바로 보지 못한다 그말이오, 건설은 파괴로 보고 파괴는 건설로 보고  자꾸 이렇게 착각하기가 쉽다 그거요. 건설은 파괴로 보고 파괴는 건설로 보기  쉬우니까, 우리 눈이 밝아야 바로 봐서 건설을 건설로 보고 파괴를 파괴로 보고,  구원을 구원으로 보고 멸망을 멸망으로 보고 이렇게 이것을 똑똑히 구별해야  되는데. 만일 이것이 자기의 눈이 어두워 가지고서, 자기의 눈이. 마음의 눈이,  어두워 가지고, 마음의 눈이 어두운 것은 지식이 어두우면 마음의 눈이  어둡습니다.

 우리의 비판이나 평가나 모든 경영이나 그런 것은 다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이 삐뚤어지면 다 삐뚤어진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지식부터,  안약을 사서 발라 지식부터 하나님의 지식만이 참된 지식이요, 살리고 산  지식이요, 하나님 지식 외에는 다 죽이고 죽은 지식이기 때문에, 이제 내가  죽이는 지식을 가지고서 보면 사는 것은 죽는다 또 죽는 것은 산다 이렇게  보여지기 때문에 지식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자기 지식을 삼는 이 일이  우리가 일보적으로 해야 될 일입니다. 하나님의 대속에 대해서도 그렇고.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그렇고 모든 것 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역사나, 하나님이 주신 우리 소망이나. 우리의 모든 생활 법칙이나 이  전부가 다 간단하지마는서도 신구약 성경에는 빠진 것 없이 다 하나님이 모아서  구비해 놓으셨기 때문에, 요 구비 속에 들어가면 고 구비 속에서 영감이 계대를  해 가지고, 구비 속에 들어가면 고 구비 가지고는 부족한데 고 구비 안에는  하나님의 은밀 의지. 하나님의 은밀한 지혜 지식 그것을 영감이 우리에게 무한한  것을 자꾸 가르쳐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충족합니다.

 그러나 이 영감을 받는 데에는, 어데 이 문서 계시를 두고, 영감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문서 계시 안에 영감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서 계시를  통해서만 영감받지 문서 계시를 떠나서 영감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때도 꼭 문서 계시인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모든 것을 다 망라해 보는 거는 어렵지마는 어데든지 한 군데  구멍만 뚫으면 됩니다. 구멍만 뚫으면 들어가 보면 하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는 제일 은혜되는 말씀을 어느 말씀이든지 한 말씀을 들고서 그 말씀을 다시  새김질하고 새김질하고, 자기가 그 말씀과 자기와 대조하고 자기 행동과  대조하고 자기 미래를 그 말씀대로 살라고 할 때에 그때에 자기가 변화가  됩니다. 자기의 잘못된 것도 깨달아지고 거기에 용기도 나오고 소망도 나오고  이라고 나서 나중에 그 구멍으로 뚫고 들어갔는데, 고 성구로 뚫고서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보면 이 성구도 보니까 보여지고 저 성구도 보니까 보여지고 모든  성경이 다 합해서 자기를 구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이래서, 그 많은  성경을 가지고서 자기가 자꾸 지식이 새로와지고, 바로 되고 보니까, 그 세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게 골방인데 들어가기 전에는 이 난제들이 많았는데 골방  안에 들어가고 보니까 난제는 하나님 한 분 그분에게 삐뚤어지느냐 바로 되느냐  그것이 문제지 그 외에는 난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두려움도 하나로 모여지고, 소망도 하나로 모여지고, 힘도 하나로  모여서 그분 외에 사모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분 외에 두려워 할 것도 없고,  그분 외에 내가 물을 것도 없고, 치료받을 것도 없고 맡길 것도 없고 뭐 그분 한  분만을 상대하고 보니까 그분이 모든 존재에게 상대를 잘 하도록 그렇게 그분이  조절해 주시니까 그분 한 분이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바로 비판해야 된다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니, 좋고 나쁜 것은 우선 외부적으로  신구약 성경 말씀 문서를 가지고 이 문서에 위반되나 문서에 합치되나. 문서에  위반된 것이라면 그건 말할 것도 없이 고만 들어가면 그거는 죽는 것이요, 한번  들어가면은 달라집니다. 선악과 먹고 난 다음부터 해와와 아담은 아주 딴사람  됐습니다. 사상이고 뭐고 아주 딴사람 돼서 오늘 이십 세기에 인간들의 사이비한  육십 육의 지식, 사이비한 지식이 자꾸 전부 그럴 듯, 단편적으로 보면 그럴  듯하지마는서도 그것 시종과 끄트머리 결과, 시발과 중간과 끝 결과를 보면 전부  거짓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물질에 대한 것은 반은 옳은 말이고 반은  거짓말입니다. 물질에 대해서 인간이 관계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과학에 대해서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 그게  반은 참말이요 반은 거짓말, 반거짓말이 온거짓말 보다도 사람을 죽이는 데는 더  효력이 있고 활발스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식을 가지고서 건설 파괴를 똑똑히 구별해야 되겠고,  이러니까, 그것을 구별하기 싫으면, 구별할 수 없다면 고만 건설 파괴는 나는  구별할라 하니까 힘드니. 그 구별하는 것도 복 있지마는 복잡하니까 그거는 내비  두고, 그러면, 단순하게 신앙생활이 뭐이냐? 하나님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권세돼 있고 하나님의 권세다. 이런데, 그 권세는 둘로 나눌 수 있으니 건설과  파괴 이 둘뿐이다. 그러면, 파괴의 권세에 내가 속해서 그 권세가 내게 와  가지고서 나에게 파괴를 해 주는 것은 내가 죄를 취하면 파괴해 주고, 내가 의에  속하면 그 권세, 의의 권세 건설 권세가 와 가지고 나 위해서 일해 준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파괴 권세가 오기 전에는 내게 파괴를 아무도 하지  못한다. 건설 권세가 오기 전에는 건설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러기 때문에,  전부, 마치 사람의 심통에서 피가 나와 가지고서 모든 전신에 이래  불룩불룩거리면서 다 혈맥을 통해 가지고 이래 가는 것처럼. 하나님 한 분에게서  모든 것이 나와 가지고 전체에 움직여서 파괴도 건설도 다 이렇게 움직이는데  파괴가 건설과 모순된 것 같지마는서도. 모순된 것 같으나 이 모순이 모순이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일치합니다. 한 분에게서 나와서 한 분에게 돌아가서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저 단순하게 나는 죄에 속하면 나는 망한다, 의에 속하면  나는 산다, 요것을 가지고서 무엇이든지, 죽는 것이나 그 사는 것이나 그만  둘이면 생사 아닙니까? 하나는 사는 것 하나는 죽는 것. 죽는 것은 파괴 권세에  속한 것. 사는 것은 생명 권세에 속한 것, 또 생사. 화복, 화는 파괴 권세에  속한 것. 또 복은 건설 권세에 속한 것. 또 존비, 높아지는 것은 건설 권세에  속하는 것, 낮아지는 것은 파괴 권세에 속한 것. 귀하고 천한 것도 다, 귀한  것은 건설 권세에 속한 것, 천해지는 것은 파괴 권세에 속한 것. 성공과 실패도  성공은 건설에 속하는 것 실패는 파괴 권세에 속하는 것. 자꾸 이렇게 둘로만  분류해서, 그렇기 때문에, '쪽발로 걸어가라.' 쪽발로 걸어가라. '그렇지마는  이런 것은 또 이런 것도 있지 않느냐?' 그 미혹을 받지 마라. 꼭 둘로만  판단해라. 너희들은 둘로 판단하는 그 이상을 판단할 만한 그런 아무 머리가  없기 때문에 둘로 가라. 이거냐 저거냐. 이거냐 저거냐 자꾸 이 쪽발로만  걸어가라. 쪽발로 걸어가야 거룩한 자의 입에 삼켜질 수가 있지 쪽발로 걸어가지  안하면 거룩한 자의 입에 삼켜지지 안하기 때문에, 이 마귀란 놈은 둘로 하라고  하지 아니하고, 자꾸 이 둘로 쪼개서 이렇게 나가지 아니하고 이제 서이, 너이,  다섯, 여섯 많이 하면 좋은 줄 알고 이래 가지고 실패를 하면, 무엇을 진리를  분별해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뭐 쪼개는 것이 틀리다. 쪼개면 안 된다.'  쪼개서, 자꾸 쪼개서 나가는 것도 탈. 쪼개는데 둘 이상으로 쪼개는 것도 탈, 또  쪼개는 것을 버리고 하나로만 나가는 것도 탈. 이러기 때문에, 요새는, 한창은  쪼개는 병을 가지고 또 이래 하디마는 지금은 한창 뭉치는 병을 가지고 속하게  합니다. '나누지 안한다.' 이거는 꼭 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나님이냐 악령의  역사냐. 진리냐 불법이냐 꼭 둘로만 이렇게 해 나가면 우리가 얼마든지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일 성경을 해석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해석이  둘이라는 범위를 벗어 나갔으면 그 사람은 미혹을 받고 있는 사람이요 다른  사람에게 미혹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의에 속하면 그만 됩니다. 의에 속하면, 의는 무엇이  의냐? 성령과 진리와 피라고 증거하는 그것이 우리에게 의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효력있게 적용시켜서  역사하는 것이 뭐이냐 하면 외부는 성경 말씀이요 그 다음에는 성령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거하는 것이 셋이 있으니 셋은 하나라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과 물 하는 것은 언제든지 진리를 가리켜서 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피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가리켜서 말했는데,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두 가지 권세가 있으니 건설의 권세에 내가 속하면  건설의 권세가 나를 붙들고 일하고, 또 이 파괴 권세에 내가 속하면 파괴 권세가  나를 붙들고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파괴 권세에 속해 가지고 건설되는 일이  절대를 붙여서 절대 없습니다. 또 건설 권세에 속해 가지고 파괴되는 일이 절대  없습니다.

 이런고로 내가 건설의 권세에 속해서 건설의 권세를 내 권세로 삼느냐 파괴  권세를 내 권세로 삼느냐 이 둘 중에 하나인데. 우리는 마음도 몸도 자유성을  가지고서, 제한된 자유성이지마는 자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자유성으로  건설의 권세의 근원인 이 의를 내가 영접할 수도 있고, 파괴의 권세의 원인인 이  죄를 영접을 할 수도 있는 것이 내 자유니까 '어느 것을 영접할래?' 이래 가지고  현실마다 반드시 이 둘이 봉착됩니다. 현실마다 이 둘이 봉착돼서 어느 것을  영접해서 네가 어데 속하겠느냐 하는 것이오. 이러니까, 이 오른편에, 의의  편에서는 셋이 지금 자꾸 노력합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자꾸 깨우치고,  독자적 권위를 가진 이 성경 말씀이 역사하고 성령이 역사하고, 주님의 피의  공로가 역사해서 자꾸 이 의에 속하라고 그래야만 네가 살지 그리 안하면 네가  죽는다고 자꾸 역사하는데 또 이 편에는 정반대의 마귀가 불법과 인간들이 들어  가지고서 죄라는 것이 들어 가지고 자꾸 이렇게 지금 사람을 미혹시키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죄는, 무엇이 죄인고 하면 악령. 악성과 악습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그게 전부  죄입니다. 악령. 악성. 악습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그것이 전부 죄요. 그것이  뭐이냐? 이 피조물이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피조물 중심이 그게 다 악입니다.

그게 다 죄요. 피조물 중심이 그것이 죄입니다. 전부 창조주의 중심 그분 위주,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에게로 돌아가는 일 이것이 전부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 주권을 똑똑히 구별해서 믿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파괴의 주권을 제가, 파괴의 권세를 제가 영접하고 거기에 속해  가지고 있으면서 뭐 행복을 구한다고 구해서 기도하며 죽어도 소용없고  없습니다. 애를 써도 소용없습니다.

 발람이 벌써 그가 파괴의 권세에 속했습니다. 파괴의 권세에 속해서, 파괴의  권세에 속한 것은 뭐이냐 하면 그가 죄를 취했다 말이오. 죄를 취한 그 걸음에서  이제는 충성만 하면 되지 않는가? 생명만 기울이면 되지 않는가? 그 발람이 생명  내놓고 의를 지켰습니다. 생명 내놓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에게 따랐다  그말이오. 그러나 그 사람은 파괴의 권세에게 속했어. 그 발람이 제가 살라면은  거기에서 발락이 아무리 말한다 해도 다 집어던지고 '나는 이 온 걸음조차 잘못  틀렸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돼, 온  것부터 잘못됐다고서 다시 본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 내가 간 것을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간 것을 잘못했습니다.' 제 그것을  회개해야 되지 그것은 회개하지 안하고서 그 자리 있으면서 제가 어떤 충성 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회개라 하는 것은 뭣이 잘못된  것 그것으로 인해서 이리 됐으면 잘못된 뿌럭지 고놈에 가 가지고 고놈을 탁  회개를 해 버려야 되지 고거 회개하지 안하고 그 다음서부터 제가 아무리 시작해  봤자 하나님은 속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진실한  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건설에 속한 것, 사는 것이나 또 복이라는  것이나, 또 존귀해지는 것이나. 또 성공하는 것이나, 승리하는 것이나 이 모든  강해지는 것이나, 또 쾌락이 오는 것이나 이런 모든 좋은 것. 어데서든지 좋은  것. 참 좋은 것. 좋은 것 그것은 의로 말미암아서만 우리에게 오지 의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 셋은 내가 성령과 물과 피 이 셋에  합해서 이 셋의 것이 되어야 됩니다. 이 셋의 것이 되어야 되지, 이 셋의 것이  되면은. 이 셋의 것이 되었는데 그대로 나가다 보니까 죽음이 나왔습니다. 죽음  그것을 제가 이해 못해 그렇지 죽음 그것이 나에게 보배요 건설이며 큰  축복입니다. 이렇게 해 나가다가 살림 살이가 달아났습니다. 자기가 지위가  떨어져 버렸습니다. 자기의 권세가 깨겼습니다. 자기 생명이 죽게 됐습니다.

이래도, 그것이 자기에게 건설이요, 영원한 건설이요 유익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의에 속해 가지고 파괴되는 일이 절대로 없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되고. 또 죄에 속해 가지고서 무슨 성공이라 하는 거나  행복이라는 것이 절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됩니다. 어떤  사건에서라도 요 현실에서 내가 여기에서 의냐 죄냐 둘이 자기가 반드시 알 수  있게 됩니다. 정도, 지식 정도에 따라서 알 수 있는 정도로 오기 때문에 자기는  현실에 요라면 죄냐 의냐 요것을 똑똑히 냉정스럽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인데, 알 수 있는 고 자리에서 죄를, 의를 버리고 죄에 자기가 속해  가지고서도 무슨 수단적으로 어떻게 그만 임시적으로 어떻게 해 가지고 요리  요리 해 가지고 요리 나오면 되지 않느냐, 그게 어리석은 일이오. 선악과 먹기  전과 선악과 먹은 후는 아주 달라 버립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마귀가 왕이 돼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고 현실에서 자기가 죄냐 의냐 요것을  구별하는 것이 죽음이냐 생명이냐 정공이냐 실패냐, 내가 모든 것에 대해서  행복이 되느냐 화가 되느냐 요것이고 죄냐 의를 결정지우는 고게서 결정이  되어지는데, 그 죄냐 의냐 결정지울 때에 우리는 그, 범위를 잘못 잡기  쉽습니다. 좁은 범위, 요 좁은 범위로 생각하면 요것이 옳은 것인데 넓은 범위로  생각하면 또 요것이 옳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범위를 잡아서 자기 단체. 자기 개인만 생각할게 아니라 조금  대아를 생각해 가지고 자기 개인에게는 요라면 되겠는데 대아를 생각해 보니까  대아가 틀려 버리니까 요게 또 안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요것을 범위를  잡을 수 있는 데까지 잡아야 되지 범위를 또 넓게 잡아 버리면 속화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범위를 고걸 잘 잡아 가지고서 그것을 현실에서 죄냐  의냐 비판해 가지고서,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행복이나 형통이나 성공이나  존귀나 이런 것이 안 옵니다. 피로서는 전부 천한 것 망하는 것 죽는 것, 손해  가는 것 그것밖에 안 옵니다. 의로는 이리 옵니다.

 그러면 의는 주님의 공로와 성신의 감화와 진리 요것이니까, 내가 성경 말씀은  이용할 수 있지마는 성경 말씀을 암만 이용해도, 성경 말씀대로 한다고 해도  영감에 도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요구에 안 된다 말이오. 자기대로의 영감이  따로 있습니다.

 예를 들면은 비유컨대, 신앙의 육 학년이 있고 신앙의 일 학년이 있으면 일  학년은 일 학년 정도의 말씀을 맞추면 그 안에 영감이 자기에게  영감시키지마는서도 육 학년은 육 학년 정도의 말씀을 맞추지 안하고 일 학년  정도의 이 문서 계시를 맞추면 영감 거리가 멀어서 영감이 안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꼭 같은 행사에서 어떤 사람에게 영감이 오고 어떤 사람에게 영감이 안  오는 것이 점점 그 사람의 신앙이 장성해 갈수록이 영감 만나기가 더 힘든다  그말이오. 힘드는 것은. 그 사람은 장성했기 때문에 좀 구비해야 됩니다.

구비해야 되지 그 사람이 그저, 열 가지가 구비해야 자기를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가 있는 사람이 한 가지만 해놓고 됐다고 하고 있으면은 그 사람은 아홉  가지가 미비되기 때문에 구비가 아니고 그거는 아직 까지 그. 사람은 아홉  가지가 모자라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노력하면 아홉 가지를 채울 수 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요는 뭐이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다해야 된다, 요거는 뭐 일 학년도 다하면 되고, 이  학년도 다하면 되고, 육 학년도 다하면 되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닷 냥쭝  받은 사람도 다하면 되고, 두 냥쭝 받은 사람도 다하면 되고 한 냥쭝 받은  사람도 다하면 되고, 닷 냥쭝 반은 사람은 반만 해도 두 냥쭝 반이니까 이 한  냥쭝 받은 사람보다 많지마는서도 안 됩니다. 다했소. 그 보다 비유에 보면  다했다 그말이오. 자기만 다하면 자기 정도로서는 다 걸어갈 수 있어. 그라기  때문에, 이 태산을 올라가는 것같이 신앙생활하는 것은 한 자욱 한 자욱 걸어서  자기가 있는 것만 다하면 다 갈수 있는데 가지 안하고 이것을 초절해서,  초절해서 갈라 하기 때문에 안 돼. 초월이라는 것은 돌을 하나 놓고 하나 놓고  요라는 것이 초월이고, 초절이라 하는 것은 요 돌 놓고 요것 안 놓고 그 위에  놓을라 하는 이런 허영과 허욕의 허망을 가지기 때문에 신앙은 다 절단이 나.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라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진실이 아니면 안  돼. 진실치 안한 사람은 신앙이라 하는 것은 법칙도 진실이요. 종자도 진실이요,  방편도 진실이요 또 노력도 진실이요, 열매맺은 맺음도 진실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지금 기도회에 등록된 사람은 오천 삼백 칠십 일 명이 등록을 하고 기도합니다.

등록시킨 사람들은 등록하고 기도하느냐 또 챙겨 줘야 됩니다. 마귀란 놈은 자꾸  이래, 우리가 고만 일을 뭐 해 놓고 챙기지 못하면 안 됩니다. 씨는 뿌려 놓고  거두지 못하면, 챙긴다는 것은 그 추수하는 거와 같습니다. 자꾸 챙겨야 됩니다.

말해놓고 또 챙기고, 챙기지 안하면, 자기가 자기를 챙기고 다른 사람, 자기  맡은 사람을 챙기고. 자기가 맡은 사람을 자꾸 챙겨야 돼요.

 이래서, 다 등록하고 다 기도해서 이번에 이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환난이 평안이 되어지고 기쁨이 되어지는 이것이 되고 기도하지 안 하면 자기  단독이라도 환난을 만날 것이고 기도하면 전체가 천인 만인이 네 옆에서  엎드려져도 자기에게는 그런 재앙이 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국방도 되는 것이고 우리의 민족도 되는 것이고, 실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마병이오 불병거라 하는 것은 엘리야가 그 시대의 이스라엘을 다 국방했다  그말이오. 그분으로 국방됐지 다른 것으로 국방되지 안해요.

 그러니까, 오늘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그 하나님의 사람들이 속하여 있는 그  민족. 그 국가, 그 방어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구원이 되는 것이지, 그러나  그들은 그대로 해야 돼요. 그들은 그대로 하지마는서도 실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여기에서 구원과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남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가져서 하나님의 노가 풀려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심이 된다면 뭐 공산주의 그것이 뭐입니까? 하나님이 다 만들어  놓은 건데 이라라면 이라고 저라라면 저라는 것인데, 그분이 우리에게 독을 품는  것은, 그분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독을 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것이니 하게 하는 것은 기독자를 파괴시키는게 아니고 기독자로  정신차려서 더 깨끗해지고 더 강해지고 온전해져서 그런 것들의 다 주인공이  되라 그말이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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